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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황소(黃巢)의 난(875-884)
875–884: A rebellion by salt smuggler Huang Chao against Tang Dynasty China, which later collapsed due to the destabilization caused by the rebellion.
(2)잔지의 난(Zanj rebellion, 869-883)
869–883: The Zanj Rebellion of black African slaves in Iraq. The Zanj Rebellion was crushed in 883 by the Abbasids.
황소(黃巢)의 난(875-884)은 중국 당(唐)나라 말기에 일어난 대 농민반란을 말한다.
잔지의 난(Zanj rebellion, 868-883)도 흑인 노예의 반란이다.
하지만 나중에 하층 민중의 반란으로 변질된다.
황(黃) 노랗다. 누르다.
소(巢) (새, 곤충, 짐승 등의) 둥지. 보금자리. 굴. 집.
황소(黃巢)의 난에서 정작 반란의 주인공인 황소(黃巢)란 인물은 출생년도도 불분명한 모호하게 기록되어 있다.
잔지의 난 주인공인 페르시아인(Persian) 알리 이븐 무하마드(Ali ibn Muhammad) 역시 그렇다.
또 황소(黃巢)란 이름에서 노랗고 누런 것이 은근히 강조되고 있는 듯하다.
황인종이란 의미이다.
동방 즉 동양을 대륙 동쪽으로 힘주어 말하고 있다.
잔지의 난(Zanj rebellion, 868-883)의 구성원은 아프리카 흑인이다.
인종적인 면을 은근히 들어내고 있다는 억지스러움이 느껴진다.
그렇게 느껴서인가?
발생한 시기와 난을 평정한 년도역시 어쩌면 맞춘 것처럼 비슷하고 차이가 없다.
발생년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평정한 년도가 1년 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같은 년도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이니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들다.
명색이 역사인데 어떻게 이런 현상이 발생할 수 있을까?
그것도 성질이 비슷한 반란을 두고 이렇게 꿰맞춘 것처럼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은 좀처럼 이해하기가 힘든다.
서로 역사서를 맞추면서 기록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여길 정도이다.
우연치고는 너무 짠 것 같다.
시대가 같으니 근대사에서 대륙중국이라고 칭하는 당(唐)과 아랍의 종주국이라고 하는 칼리프 왕조 압바스가 대상인 것도 그렇게 같을 수가 없다.
황소의 난 역시 당(唐)을 무너뜨리는 요인으로 작용 하였으며 이 잔지(Zanj)의 난 역시 압바스 왕조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쳐 바그다드 칼리프 권위가 무너지는 계기가 된다.
아랍 종주국이란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두 난이 너무나도 비슷한 면이 많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 것인가?
중국에서는 만초무늬(蔓草紋)라고 부르는 당초(唐草)무늬는 당나라에서 유행한 중국전래의 초화무늬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지만 원래는 이집트에서 기원한 것이라 한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엄격하고 기하학적인 구성을 가진 이집트 당초무늬는 그리스에서 경쾌하고 율동적인 리듬이 강조된 파상형 혹은 S자형의 당초무늬로 변형되었으며 여기에 측면형의 연꽃 2개가 합쳐진 원형의 팔메트(palmetto)가 접속된 당초무늬가 아시리아로부터 전해져 이른바 인동당초무늬의 초기양식이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당(唐)과 이집트가 혼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집트라면 카이로로 대변할 수 있는데 바그다드 칼리프 압바스 왕조 (Caliphs of Baghdad 750-1258)후기가 바로 카이로 칼리프(Caliphs of Cairo 1261-1517)이다.
단 지금의 이집트 명칭은 1922년에 왕국의 이름으로 독립하면서 사용한 것이다
압바스 왕조(Abbasid Caliphs 750-1258/1517)가 당(唐)인가? 하는 근원적인 문제가 존재하지만
똑같은 난을 황소의 난과 잔지의 난으로 다르게 분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없지 않다.
삼한과 고려, 조선을 한반도에 묶는 바람에 고민하지 않아도 될 고민을 한 것 같으며 그로 인해 파생된 공백을 메우려고 하다 보니 이런식으로 중복될 수밖에 없는 오류가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한다.
좀처럼 납득할 수 없는 이러한 세계사적 오류는 지금 낱낱이 밝혀지고 있고 비일비재하다.[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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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黃巢)의 난(875-884)
안사의 난 이후 번진(藩鎭: 변방을 평정하기 위하여 군대를 주둔시키던 곳. 변방에 설치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그 지방을 다스리던 관아. 또는 그 으뜸 벼슬)세력의 발호와 환관의 발호 및 환관파와 조신파와의 싸움은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져 마침내는 당 왕조를 무너뜨리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당의 희종(僖宗) 중화 원년(881) 1월 8일 이 날은 당나라 수도 장안의 역사에 대서특필할 커다란 사건이 일어난 날이었다. 이날 아침 당나라 제18대 황제 희종이 장안의 서문인 금광문을 빠져나와 허겁지겁 도망치는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장안의 동문 춘명문으로부터는 반란군의 수령 황소(黃巢: ?-884)가 대군을 거느리고 금으로 장식한 수레를 타고 위풍당당하게 입성하였다.
장안의 백성들은 조수처럼 길 양쪽에 밀려들어 반란군을 환영했고 태극궁에서 연금 생활을 보내던 궁녀 수천명도 거리에 뛰쳐나와 황소를 환영하였다. 반란군의 장병들은 가난한 백성들을 보면 의복과 금품을 나눠 주는 등 이날 하루는 장안 백성들에게는 더없이 즐거운 축제의 날이었다. 황소는 산동성 하택현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문무를 좋아하였으나 과거 시험에는 낙방하였다. 황소의 집은 소금을 밀매하고 있었는데 왕선지 또한 같은 소금 밀매업자였다.
874년 왕선지(王仙芝)가 군사를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여 황소도 또한 군사를 일으켰다. 해마다 계속되는 한발과 수해. 충해로 인하여 고향을 버리고 유랑 생활을 하는 자들이 속속 그들의 휘하로 모여들어 삽시간에 수천명의 군사를 모을 수가 있었다. 왕선지와 황소는 일정한 거점을 정해두고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이동하며 공격하는 작전을 폈기 때문에 토벌하는 관군측에서는 포착하기가 어려워 많은 어려움을 겼었다.
당시 천하는 크게 소연하였다. 반란을 일으킨 것은 왕선지. 황소 두 사람뿐이 아니었고,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절서 낭산진의 장교 왕영도 반란을 일으켰고 섬주. 염주. 하중 지방에서도 병란이 일어나 천하는 점점 소연해졌다. 대부분이 북방 출신인 황소군의 장병들은 영남의 풍토에 익숙지 못해 병사하는 자가 잇달아 발생하여 10명 가운데 3, 4명이 죽는 상태에 이르렀다. 황소는 부하들의 권유에 따라 공격 방향을 북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북쪽으로 돌아가 큰일을 도모하자."
이것이 황소군의 구호였다. 큰일을 도모한다는 것은 시시하게 절도사 따위가 되겠다는 뜻이 아니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겠다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황소군의 북벌이 시작되었다. 황소의 북벌군은 커다란 뗏목을 만들어 계림에서 상강의 흐름을 타고 형주. 영주를 지나 담주를 격파하였다. 이곳에서 정부군 10만명이 소멸되어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었다고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다. 황소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니 지나는 곳마다 속속 황소군에 항복하였다. 황소는 장안에 남아 있던 황족 전원을 몰살하고 12월 임진일에 함원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나라 이름을 '대제(大齊)', 연호를 '금통(金統)'이라 칭하였다.
대제 금통 4년, 즉 883년에 이르러 황소군의 전력은 눈에 띌 정도로 약화되어 장안의 남.서.북은 모두 당군에 의해 봉쇄당하게 되었다. 동쪽(낙양)으로 통하는 길은 원래 황소군의 부장 주온(朱溫)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황소군의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주온이 당군에 항복함으로써 낙양과의 교통도 차단당해 버렸다. 이렇게 해서 장안은 점점 고립 상태에 빠지고 물자마저 바닥이 날 지경이었다. 주온의 배반은 황소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었고, 당왕조에게는 천병만마나 다름없는 큰 힘이 되었다. 당왕조에서는 주온에게 요직을 내리는 한편 전충(全忠)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하였다. 이후부터는 주온을 주전충이라 일컫기로 한다.
이 주전충이야말로 당나라에 이어 5대 10국의 하나인 후량(後梁)의 태조가 된 인물이다.
장안에서 탈출한 황소는 추격하는 주전충. 이극용(李克用)과 1년 이상 싸웠으나 패배를 거듭함으로써 거의 전멸 상태에 빠졌다. 금통 5년(884) 6월 황소는 겨우 1천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태산, 동남 낭호산으로 도망쳤으나 호랑곡 전투에서 패하여 자결로써 일생을 마쳤다.
황소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당왕조는 이 반란으로 인하여 큰 타격을 입어 그후 23년간 겨우 명맥을 이어갔을 뿐이었다. 이 23년 동안은 번진(절도사) 세력이 강성하여 환관들을 모조리 죽이고 살아남은 조정 중신들도 모두 황하에 던져 죽임으로써 당왕조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907년에 이르러 선무 절도사(하남성. 산동성. 안휘성 일대의 장관) 주전충이 당왕조 최후의 황제 애제(哀帝)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황제의 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양(梁)이라 하니 이 나라를 역사상 후량(後梁)이라 부른다. 이렇게 해서 당왕조는 고조로부터 20대(代) 290년 동안 이어오던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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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 반란(Zanj rebellion)
아바스 칼리프제국에 대한 흑인노예의 반란(868~883)
바스라(al-Baṣrah, Basra)의 많은 지주들이 바스라 동쪽의 해안 늪지대의 배수를 위해 수천 명의 동아프리카 흑인(잔지)을 남부 이라크로 데려 왔다. 지주들은 대개 아랍어를 할 줄 모르는 잔지에게 최소한의 호구지책만을 해결해주면서 가혹한 노예노동을 강요했다. 869년 가을, 4대 칼리프 알리(Ali ibn Abi Talib, 656-661)와 마호메트(Muhammad, Mohammad 571-632.6.8)의 딸 파티마(Fatima Zahra)사이의 후예로 자처하는 페르시아인(Persian) 알리 이븐 무하마드(Ali ibn Muhammad)가 몇몇 노예노동단(500~5,000명)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잔지가 받는 사회적 지위의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그들에게 자유와 부를 약속했다. 알리의 제의는 하리지테(Khaw rij:이탈자)의 만민평등사상까지 끌어들임으로써 더욱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하리지테의 사상은 모든 사람이, 흑인노예까지도 칼리프로 선출될 수 있고 모든 비하리지테는 이단자로서 성전(聖戰)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잔지의 군대는 패배한 칼리프의 군대에서 도망 나온 잘 훈련된 흑인 부대와 불만이 쌓인 지역 농민들을 흡수하면서 규모와 세력이 급속히 성장했다. 869년 10월 그들은 바스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곧바로 잔지의 중심 거점으로 알-무크타라(al-Mukhtarah, 아랍어로 선택된 것-the Chosen)를 정했는데 그곳은 해안 소택지대 중에서 운하로 둘러싸여 접근하기 어려운 건조지역에 있었다. 반란군은 페르시아 만의 알-우불라(al-Ubullah)항구를 점령함으로써(870. 6) 남부 이라크에 대한 통제권을 손에 넣었고, 바스라로 가는 교통수단을 차단해 남서부 이란의 아와즈(Ahwaz)도 장악했다. 신임 칼리프 알 무타미드(Al-Mu'tamid, 870-892 )의 동생 알 무와파크(Al-Muwaffaq, 842–891)가 이끄는 칼리프의 군대는 아직 반란군에 대처할 여력이 없었다. 잔지는 871년 9월 바스라를 약탈하고, 이어서 872년 4월에 알 무와파크의 군대를 격파했다.
872~879년 알 무와파크(Al-Muwaffaq, 842–891)가 독립적인 페르시아 왕조인 사파르 왕조(Saffarid Dynasty, 861–1003)의 팽창을 동부 이란에서 저지하는 데 여념이 없는 동안 잔지 세력은 와시트(Wasit)를 점령하고(878) 이란의 후지스탄(Khuzistan)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879년 알 무와파크가 흑인노예들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펴서 1년 안에 잔지의 2번째 도시, 알마니아(al-Mani'ah 난공불락요새)를 탈환하고 후지스탄에서도 잔지 세력을 축출했다. 881년 봄에 알 무와파크는 티그리스 강의 대안(對岸)에 세워진 특이한 도시로부터 알 무크타라에 대한 포위공격을 했다. 2년 뒤 883년 8월 이집트 군단으로 보강된 알 무와파크는 마침내 알 무크타라(al-Mukhtarah)를 점령하고 알리의 수급을 들고 바그다드로 귀환하여 반란을 완전히 진압했다.
와시트(Wasit)
압바스왕조(Abbasid Caliphate, Baghdad750–1258/Cairo1261-1513)제국의 중앙부인 이라크에서는 주트족(Jutes)의 반란이 진압된 후 한 세대가 지난 869년 바스라 지역(al-Baṣrah, Basra)에서 일어난 잔즈(Zanj) 반란군이 만약 사파르왕조(Saffarid Dynasty, 861–1003)와의 연합이 이루어졌다면 압바스왕조(Abbasid Caliphate)는 끈덕지게 지속된 반란으로 아마 종말을 고했을 것이다.
880년 10월 요새 중 하나인 알마니아(al-Mani'ah)를 격파했을 때는 흑인들에게 잡힌 아녀자 5천여명을 구출해 냈고, 883년 8월에는 마지막 요새인 알 무크타라(al-Mukhtarah)를 어렵게 격파, 주모자인 알리는 전사하였으나 그 목을 잘라 오자 칼리프 알 무타미드(Al-Mu'tamid, 870-892)는 땅에 엎드려 알라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15년 간 계속된 이 반란으로 무수한 인명이 희생(犧牲)되었으며 티그리스강 하류에 사는 백성들에게는 깊은 상처를 남겼고, 중앙집권적인 압바스왕조는 이후 칼리프의 권력이 더욱 약화되고 말았다.
잔지(Zanj)의 반란을 계기로 호라산과 아무다리야강(Amu Darya) 이북의 중앙아시아에서는 발흐, 박트라(Bactra)출신의 이란계 귀족 사만호다(Saman Khuda)증손 나스르1세(Nasr I, 864/865–892)가 트란스옥사니아(Transoxania)를 근거지로 독립 사만왕조(Samani dynasty 874-999)를 열고 각종 모피류·종이·철제품·슬라브인노예·가축등으로 동서무역(東西貿易)을 관장하여 요충지인 부하라(Bukhara)와 사마르칸트(Samarkand)는 바그다드를 능가할 정도로 번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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