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사건

한센병(Hansen, Leprosy)이 발병한 제주는 인도이다.

한부울 2011. 10. 31.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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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병(Hansen, Leprosy)이 발병한 제주는 인도이다.

 

글쓴이:한부울

 

인도는 북아메리카대륙남부 및 중앙아메리카대륙 콜롬비아, 브라질, 아르헨티나까지이다.

 

그렇다. 이 인도란 것은 지금의 인도대륙이 아닐 수 있고 아메리카 대륙일 수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나병(癩病, Hansen, Leprosy)은 이미 고대로 부터 내려오는 병이다.
한의학에서는 가라(痂癩)·풍병(風病)·대풍라(大風癩)라 하였고, 치료가 불가능했던 시대에는 천형병(天刑病) 또는 업병(業病)이라 하는 무서운 병이였다.

麻風病漢生病或韩森氏病
마풍병(麻瘋病), 한생병(漢生病)或한림씨병(韩森氏病)之稱由來

세계적으로 나병를 한센병으로 부른다.

1873년 아르마우어 한센이 나병환자들을 상대로 현미경으로 조사한 결과 간균으로 인하여 발병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그의 업적을 기려 한센병으로 명명되기 시작했다.

 

                                               [Edward Poynter 1867]

 

나병의 기원은 기원전 3200년 부터 기원전 343년까지 3천년 가까이 존재했던 고대 이집트(Egypt)에서 기원전 1000년 유물 발굴시(這種病菌從公元前1000年古埃及發現出第一例痲瘋病的證實) 나병의 대한 실증이 나왔다고 했고 기원전 BC600年에 인도종교서적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 춘추시대말(中國春秋時代末, BC544-BC439)경 공자의 제자 노나라 사람(魯國人) 염경(冉耕, 冉伯牛)이 나병환자라고 한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나일강 기슭에서 태고적 부터 발병한 나병은 그리스 및 서부 유럽을 거처 십자군 전쟁때 다시 팔레스타인를 거처 세계 도처로 전염이 된 것이라는 학설을 제기하기도 했으며 또 한 일부 학자들은 동아프리카 와 인도에서 4,000여년 전 발병했고 생쥐에 기생했던 나균인자가 돌연변이를 일으킨 병으로 본다는 학설도 있다.

 

중세 이후에 일부 나병 환자들을 뜨거운 인두로 환부를 지지면 전염이 예방된다고 살인에 가까운 만행를 저지르기도 했다고 하며 십자군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했다가 돌아오면서 나병에 걸린 기사가 다른 사람 특히 여성의 피로 목욕을 하면 나병이 완치된다는 이상한 치료방법이 동원되어 일부무고한 생명이 희생되는 참혹한 일이 발생되기도 했다는 설도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 성종 1년 경인(1470)  2월9일 의금부(義禁府)에 전지하기를,
“신수무(辛秀武)·정산로(鄭山老) 등이 임의로 이거을가개(李巨乙加介) 부자를 죽이고 배를 갈라 쓸개를 꺼냈으니, 추국하여 아뢰라.”하였다.

창질(瘡疾) 즉 매독이나 나병 등 피부가 곪아 들어가는 질병을 말하는 것인데 이병을 치료하는데 사람의 간과 쓸개(肝, 膽)가 약으로 쓰였다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고 배가 갈라지는 참혹한 현상이 발생하기 한 것이다.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스코틀랜드에서 나병환자들은 자식을 갖지 못하도록 신체적인 조치를 했으며, 약간의 증세가 보이면 가치없이 나병집단 수용소에 유치하는 바람에 유럽 일부 지역은 한 곳에 1,000여명씩 강제 수용조치를 하였다 하였으며 1321년 프랑스에서는 저수지와 연못, 우물에까지 나병환자들이 앙심을 품고 독약을 뿌렸다는 소문이 퍼져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나병환자 집단촌를 습격하여 많은 희생자가 나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 한반도에 한센병이 들어 온 시기는 언제쯤일까?

많은 이상한 주장이 있지만 대륙사로 따져 볼 때 근세기 이르면 1927년 이후 남방에서 한반도로 들어온 이주민들에 의해 전파되었다고 보아야 맞다.

다시말해 한반도는 한센병 자체가 기생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전라도 소록도에 있는 환자 경상도에 왜관에 있는 환자는 무엇인가 물을 수 있다.

그들은 바로 남방 이주민의 부류라고 보아야 한다.

중국대륙 남방, 복건성에서 들어 온 이주민이라야 맞다.

열도 일본에서 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열도역사를 실증사라고 하기 위한 헛소리에 불과 할 뿐이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일제가 혐오병을 조선인들에게 옮기게 하여 집단적으로 수용하였을 수 있다고 본다. 일제가 우리민족을 혐오스럽게 만들기 위해 애를 쓴 것을 보면 그러한 추측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했던 나병환자들이 1,0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여전히 콩고, 가봉, 케냐, 카메룬,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에 많은 환자들이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균의 rpoT 유전자 6 base(of the six-base tandem repeats in the rpoT of M)의 tandem repeats pattern을 조사한 연구보고는 일본열도와 한국, 중국의 대부분은 4 repeats 였다 한다.

그리고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역시 4 repeats 였다고 하였으며 인도, 캄보디아, 베트남, 필립핀, 오키나와는 3 repeats 라 하고 있다.

 

줄기가 끝에 있는 영역이라는 뜻이다.

여기 첨부한 "Map by Haisam Hussein" 하이삼 한센병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는 이야기다.

한반도에 한센병을 운운하는 것은 정말 코메디라고 해야 맞다.

 

 

                                                 [Map by Haisam Hussein]

 

그렇다면 이제 조선왕조실록을 한번보자.

그곳에 한센병 기록이 나와있다.

문종 1년 신미(1451,경태 2)4월2일 (경오)기사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기건(奇虔)의 이야기와 세종 27년 을축(1445)11월6일 (정축)제주 안무사가 제주본주(本州)와 정의(旌義)·대정(大靜)에 나병(癩病)이 유행하여 치료에 힘쓰게 할 것을 건의하는 내용이다.

 

문종 1년 신미(1451,경태 2)

4월2일 (경오)

이계린·기건·이사순·박이창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虔, 稍習吏事, 喜觀諸史, 嘗牧濟州, 不食鰒魚。 且州在海中, 人多癩疾, 雖父母妻子, 亦恐相染, 徙置無人之地, 以待自斃。 虔行部至海濱, 聞巖下有呻吟聲, 視之果癩者。 因問知其故, 卽構救疾幕, 聚置癩者百餘人, 男女異處, 令服苦蔘元, 沐以海水, 太半差愈。 及其遞還, 疾愈者, 相與泣送。

기건(奇虔)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기건은 이사(吏事)에 조금 익숙하고, 여러 사서(史書)를 즐겨 보았다. 일찍이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있을 적에는 전복을 먹지 않았으며 제주가 바다 가운데에 있으므로 사람들이 나질(癩疾)이 많았는데, 비록 부모처자일지라도, 또한 서로 전염될 것을 염려하여 사람 없는 땅으로 옮겨 두어서 절로 죽기를 기다렸다. 기건이 관내를 순행하다가 바닷가에 이르러 바위 밑에서 신음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서 보니, 과연 나병을 앓는 자였다. 인하여 그 까닭을 물어 알고서, 곧 구질막(救疾幕)을 꾸미고, 나병을 앓는 자 1백여 인을 모아 두되, 남녀를 따로 거처하게 하고, 고삼원(苦蔘元)을 먹이고 바닷물에 목욕(沐浴)을 시켜서 태반을 고치니 그가 체임(遞任)되어 돌아올 때에 병이 나은 자들이 서로 더불어 울면서 보냈다.

 

세종 27년 을축(1445,정통 10)

11월6일 (정축)

제주 안무사가 제주 등 3곳에 나병이 유행하니 중들로 하여금 치료에 힘쓰게 할 것을 건의하다

○濟州按撫使啓: “州及旌義、大靜, 癩疾興行。 若有得疾者, 惡其傳染, 置于海邊無人之地, 不勝其苦, 故墮巖崖以隕其命, 誠可憐憫。 臣令僧人拾骨埋之, 三邑各置治病之所, 聚病人給衣糧藥物, 又設沐浴之具, 使醫生僧人監掌治療。 見在癩病六十九人內, 四十五人差愈, 十人時未愈, 十四人物故。 但三邑僧, 本有軍役, 請三邑僧各一人, 除其役, 常與醫生專事救療, 醫生亦許錄用以勸。” 下兵曹。

제주(濟州) 안무사(按撫使)가 아뢰기를,

본주(本州)와 정의(旌義)·대정(大靜)에 나병(癩病)이 유행하여, 만일 병에 걸린 자가 있으면 그 전염되는 것을 우려하여 바닷가의 사람 없는 곳에다 두므로,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바위 벼랑에서 떨어져 그 생명을 끊으니 참으로 불쌍합니다. 신이 중들로 하여금 뼈를 거두어 묻게 하고, 세 고을에 각각 병을 치료하는 장소를 설치하고 병자를 모아서 의복·식량과 약물(藥物)을 주고, 또 목욕하는 기구를 만들어서 의생(醫生)과 중들로 하여금 맡아 감독하여 치료하게 하는데, 현재 나병 환자 69인 중에서 45인이 나았고, 10인은 아직 낫지 않았으며, 14인은 죽었습니다. 다만 세 고을의 중은 본래 군역(軍役)이 있사온데, 세 고을의 중 각각 한 사람을 군역을 면제하여 항상 의생과 더불어 오로지 치료에 종사하게 하고, 의생도 또한 녹용(錄用)을 허락하여 권장하게 하소서.”

하니, 병조(兵曹)에 내렸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기록에 보면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4년 임자(1612)에는 나병이 경상좌도 뿐 아니라 점점 충주(忠州)·강원(江原)의 지경에까지 이르러 형세가 국중, 나라 안에 두루 퍼지게 되었다 하였으며 숙종11년 을축(1685)년에는 남원(南原) 사람인데 그의 아비가 나병(癩病)으로 죽어 전염을 막기 위해 시신을 태웠다고 극도(極度)로 흉악(凶惡)하다하여 정형(正刑)하였다 기록하였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년(중종 25)에 충청도(忠淸道) 면천군(沔川郡)아낙네가 남편이 나병(癩病)을 얻은지 10년 만에 죽자 슬퍼하여 재가도 가지 않고 절개를 지키다가 14년 만에 죽었다 하여 열녀로 세운 것을 알리고 있다.

 

위 기록들을 보면 유럽에서 한창 유행 할때 이미 조선에도 나병환자가 줄을 이은 것이다.

1445년이 발병시원이라면 상당히 이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반도라니 웃기는 이야기가 아닌가?

 

지금까지 위 기록에 대한 해석들이 모든 자료를 보면 한반도에 자체적으로 발병한 것이 아니라 전염원이 외부로부터 유입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반도에 사람이 유입된 것이 아니라 전염원이 유입되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가 틀림없는 반도사라는 사실을 원칙으로 한 것이다.

 

1917년 4월: 소록도에 자혜의원을 개설하다.

1917년 5월: 미국 여의사 로세타 홀(본명: R. Sherwood)이 조선여의사 강습소를 개설하다.

1932년 10월: 조선나병예방협회가 발족되다(초대 회장은 박계양)

 

위 연대표를 보면서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소록도에 나병환자들을 수용하는 자혜의원을 개설했다고 하는 기록이다.

 

1423년 세종 5년 11월: 의정부참찬사 허도(許道)가 태종조부터 여의(女醫)의 설치로 서울의 부녀자들은 혜택을 많이 입었으나 지방(地方)의 부녀자들은 혜택을 입지 못하니, 각 도의 관노비의 딸 가운데 깨우친 자를 뽑아 서울에 보내 침, 뜸, 약, 음식의 법과 기술을 가르쳐 숙달시킨 뒤 내려 보내면 지방의 부녀자들의 병을 가히 치료할 것이므로 우선 경상도와 전라도에 실시하기를 거듭 건의하다.

1451년 문종 1년 11월: 개성에는 악질에 걸리 자가 곳곳에 서로 모여 있으므로 의생(醫生)들이 치료하기에 쉬우나, 경기 지방은 그렇지 못하므로 가옥을 지어 환자를 한데 모아 치료케 하다.

풍덕, 교하, 원평 등지의 악질병자들을 위해 부근에 흙집을 신축하여 모아서 치료하였다.

1452년 단종 즉위년 5월: 행(行)부사정 임원이 의학(醫學) 편의를 건의하다.

1, 몇몇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의학 교육을 분담케 함.

2, 각 도에 의국(醫局)을 설치하고 약을 조제하여 발매(발매)할 것.

3, 당약(唐藥: 중국약)을 절제하고 새로운 향약(鄕藥)을 사용할 것.

4, 침구(鍼灸) 전문의 방법을 수립하여 침(鍼)과 약(藥)을 병행 사용할 것.

 

위 조선왕조실록 두개의 기사를 보면 조선에서 나병이 발병하기 전 1423년에 이미 지방에 부녀자들을 위하여 여의(女醫)를 설치하는 문제를 의논하였다는 기록이 나오고 1451년에는 악질에 걸리 자가 곳곳에 서로 모여 있으므로 의생(醫生)들이 치료하기에 쉬우나, 경기지방은 그렇지 못하므로 가옥을 지어 환자를 한데 모아 치료케 하는 것이 좋겠다 하여 교육이나 약국조제문제 새로운 약을 사용하면서 침과 약을 병행 할 것을 이미 지시하고 실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무슨 놈의 나병환자촌을 20세기 초에 새롭게 소록도에 짓었다고 야단을 떠는지 미개한 일제놈들이 날구지를 떨고 있는 것이 그저 가소로울 뿐인 것이다.

또한 의료체계는 서양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는 기록들인 것이다.

나병환자촌과 여의사 로세타 홀(R. Sherwood)의 조선여의사 강습소 개설 운운은 그야말로 자다가 봉창 뚜드리는 무슨 새삼스러운 이야긴가 하는 것이다.

대륙조선을 뭘로 보고 야단인지 쓰레기 잡통같은 일제들의 방만한 장난이 우리를 끝까지 우습게 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한반도 제주도인가를 따져 볼 때 한반도 소록도에 나병환자촌을 세웠다고 하는 시기가 1917년 이니 그 이전 한반도 제주도에서 나병환자가 있어 소록도까지 들어갔는지 먼저 알아야 할 것이고 또 한반도 제주 원주민들에게 옛날부터 어떤 형태로 무슨 나병환자가 있었는지 철저하게 조사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반도사에 기록으로 남아있으니 그렇게 주장한다라고 하면 그렇게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은 다 밥통일 수밖에 없고 그러한 주장을 사실처럼 들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역시 밥통 소릴 들을 수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일본서기를 참고자료로 한다고 하며 일본서기에 서기 612년 “백제에서 귀화한 사람으로서 백라(白癩)의 의심이 있는 자를 해변에 유기하려 하였다”라는 기록을 들어 일본에서 한반도로 유입되었다고 해석까지 한다.

하지만 일본서기를 사서로 인정하는 것도 문제지만 믿을 바가 못 되는 쓰레기 잡서같은 사서를 가지고 실증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그들은 지금의 열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틀림없이 근세기에 열도에 차조 앉아 존재하지 않아야 할 세력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사서인데 그들이 삼한의 역사를 마음대로 뜯어고치고 지들 역사를 끼워 넣기 조작하여 만든 사서일뿐인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기록대로라면 이미 1445부터 제주도에 발병이 되었다는 이야긴데 현재 이루어진 나균(癩菌)의 rpoT 유전자 조사에서 적어도 2 repeats 나 3 repeats 로 나와야 하고 그렇다면 한센병 분포 세계지도에도 한반도가 기준이 되어 중요하게 표식 되어야 온당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조사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한반도 북쪽인 함경도나 평안도에서 나병(癩病)이 사서에 유행했다는 기록조차 없다.

중국대륙을 통해 육지로 거쳐 들어왔다는 것은 거짓말임이 들어 난 것이다.

반도사를 인정하고 또한 일본서기를 인정하여 일본열도에서 들어왔다면 rpoT 유전자 조사에 열도 나병 분포가 한반도보다 훨씬 앞선 3이나 2 repeats 정도는 되어야 옳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하이셈 한센병 세계지도는 아프리카나 인도가 원천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한반도와 열도가 되어야 맞고 그것이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균 유전자 조사나 한센병 세계 분포지 지도는 한반도와 열도는 최종 가지 끝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근세기에 한반도로 아시아남부, 또 대륙복건성 나병환자가 건너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점정리를 하면 조선왕조실록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기사들은 모두 한반도에서 발생된 사건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한센병을 근거로 한다면 제주는 아프리카나 인도를 말하는 것이고 그 외 나병이 발생한 지역인 경상도좌도, 충주(忠州)·강원(江原) 전라도 남원, 충청도 면천군 등은 인도나 아프리카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었던 지방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계삼한역사연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인도는 현재 인도대륙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 마당에 하이삼 한센병의 지도 Map by Haisam Hussein 에서 줄기의 끝이 아메리카를 가르키는 것은 세계삼한역사 구도상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만약 이 한센병 지도가 현 인도대륙에서 발생한 것처럼 만들려는 근대학자들의 나쁜 의도가 숨은 것이라면 그래서 이러한 구도가 잘못된 것이라면 다시금 인도란 명칭의 정확한 위치를 밝혀야  한다는 말이다.

 

근세기 기득권을 차지한 서양세력에서 서양근원을 만들기 위해 조작되었다면 그렇게 조작된 사실에서 우리가 세뇌(洗腦)되어 인도가 현재 인도대륙인 것처럼 각인이 되어 있으나 실제 인도, 천축은 중앙아에리카나 남아메리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때문에 제주역시 중앙아메리카나 남아메리카에서 찾아야 한다고 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이것이 바로 한센병으로 본 제주로서 한반도 제주가 될 수 없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역시 반도사가 될 수 없다는 확고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제주라고 하는 본주(本州)와 정의(旌義), 대정(大靜)은 우리가 상상 할 수 없는 대륙조선 또는 가우리조선의 지방영역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반드시 주지해야 할 사실이며 또 하나는 근대서양사학자들은 "인디안 원주민 가운데에는 한센병이 없었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란 것에 근거한 인디언이 살던 인도의 근원지가 현 인도대륙으로 귀착시키려 한다는 점이 있고 근세기에 그렇게 모든 것이 인용되어 완성 된 것 같지만 삼한역사연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 문제는 심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센병이 근원적으로 발생한 지역이 지금의 인도대륙이 아니라 처음 스페인정복자들이 한센병을 몰고 들어 갔다고 하는 곳 중앙아메리카나 남아메리카 북부가 한센병의 원초적인 발생지라고 할 때 지금 이에 대한 모든 상식을 파괴하는 엄청난 역사 회오리로 돌변할 수 있는 핵 폭탄 같은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인식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본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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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한센병역사]

기원전 200년에 이르러서는 그리스와 아시아에 있어서 매우 보편화 질환이 되었다.
이탈리아에는 기원전 62년 폼페이 군대가 전쟁에서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는 한센병 이라는 것이 알려지지 않았다.
독일에는 180년에 한센병이 있었고, 6, 7세기에는 흔한 질환이라고 알려졌다.
스페인에는 5, 6세기에 로마군에 의하여 한센병이 들어왔고, 10세기에는 흔한 질환이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에는 7세기에 스페인으로부터 한센병이 들어왔고,
영국에는 625년에 처음으로 나요양소가 생겼다.
이러한 한센병을 비롯한 감염병 환자들을 관리하는 시설들은 5세기 이후부터 11세기말까지 유럽전역에 증가하였으며 그 당시 세계전체에 1만9천개 소나 있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15세기부터 한센병이 유럽전역에서 사라지기 시작하여 시설이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유럽에 있어서의 한센병은 1095-1270년의 십자군 전쟁이전에도 알려졌으나, 특히 이 시기에 전 유럽을 휩쓸고 창궐하였으며, 13세기 말에는 최고도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14세기부터는 급격히 감소되었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거의 근멸된 상태이다. 15세기 말에 이르러서 이 한센병은 동북유럽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또 1547년 영국의 한센병원의 환자들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아메리카한센병역사]

인디안 원주민 가운데에는 한센병이 없었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중부 및 남 아메리카의 질병은 유럽으로부터의 이민, 아프리카로 부터의 노예 및 중국으로 부터의 이민에 의하여 전파되었다고 본다.
1543년경의 콜롬비아의 환자들은 모두 스페인 인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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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한국고전번역원]

광해군 4년 임자(1612,만력 40)

4월22일 (병술)

사간원이 경상좌도에서 대풍창이 전염되어 그 치료와 방제를 청하여 따르다

○壬子四月二十二日丙戌司諫院啓曰: “大風瘡, 天下之惡疾也。 慶尙左道人有此證者, 近來列邑之人, 轉相傳染, 或入水洗瘡, 或在家搔癢, 而川魚、家鷄, 若食瘡痂, 則人食其魚、鷄, 輒患其病。 非徒本道爲然, 漸至於忠洪、江原之境, 勢將遍於國中, 而守令置之尋常, 莫有救療之意, 監司亦不致意。 請三道監司推考。 令該司下送相當藥物, 多般救療, 且令都事巡檢列邑所患之人, 一一成冊後, 其中不用意守令, 各別痛治事, 下書三道。” 答曰: “依啓。”

사간원이 아뢰기를,

“대풍창(大風瘡)은 천하에 고약한 병입니다. 경상좌도 사람 가운데 이 증세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근래에는 각 고을 사람들에게 계속 전염되고 있습니다. 혹 물에 들어가 풍창(風瘡)을 씻거나 혹 집에서 가려워 긁기도 하는데 그 부스럼 딱지를 먹은 물고기와 닭을 사람이 먹었을 경우 그 병을 앓게 됩니다. 본도만 그럴 뿐 아니라 점점 충주(忠州)·강원(江原)의 지경에까지 이르러 형세가 국 중에 두루 퍼지게 되었는데도 수령이 보통으로 여겨 방치한 채 구료(救療)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며, 감사 또한 마음을 다하지 않고 있으니, 삼도의 감사를 추고하소서.

그리고 해사로 하여금 상당한 약물을 내려 보내어 다방면으로 구료하게 하고 또 도사에게 각 고을을 돌며 살피게 하되, 앓고 있는 사람을 일일이 책을 만든 뒤 그 가운데 마음을 쓰지 않는 수령은 각별히 통렬하게 다스리라는 일로 삼도에 유시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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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11년 을축(1685,강희 24)

8월4일 (임진)

아비의 시체를 태운 정득춘을 정형하다

○壬辰/禁府都事拿來, 燒其父屍罪人鄭得春。 得春, 南原人, 其父死於癲, 有言 ‘燒其屍則不染於子孫,’ 得春遂焚之。 其窮凶極惡, 前古所稀聞, 推鞫正刑。

금부도사(禁府都事)가 아비의 시체(屍體)를 불태운 정득춘(鄭得春)을 잡아왔다. 정득춘은 남원(南原) 사람인데 그의 아비가 나병(癩病)으로 죽었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그 시체를 태우면 자손에게 전염(傳染)되지 않는다’고 하자 정득춘(鄭得春)이 드디어 아비의 시체를 태웠으니, 그의 극도(極度)로 흉악(凶惡)함은 이전에 듣지 못한 것이었기에 그를 추국(推鞫)하여 정형(正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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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경제 제1권

유암(流巖) 홍만선(洪萬選:1643~1715)이 지은 농서

섭생(攝生)

기거(起居)를 조심함

취했을 때 기장 짚[黍穰]에 누우면 부스럼이 생기며 대풍창(大風瘡 나병(癩病))으로 눈썹이 빠진다. 《수양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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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경제 제4권

유암(流巖) 홍만선(洪萬選:1643~1715)이지은 농서

치약(治藥)

여어(蠡魚) 가물치. 동어(鮦魚)또는 예어(鱧魚)라고도 한다.

生池澤中。處處有之。 本草 治癩。用此以代花蛇。是亦去風。丹心 有瘡者。不可食。令人瘢白。 本草

연못과 수택에서 산다. 어디든지 있다. 《증류본초》

나병(癩病)을 치료하는 데 이것을 사용하며 화사(花蛇)로 대신하여 쓰기도 한다. 이 또한 거풍(去風)의 효력이 있기 때문이다. 《단계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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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1530년(중종 25)에 〈동국여지승람〉을 새로 증보하여 만든 조선 전기의 전국지리지.

충청도(忠淸道)

면천군(沔川郡)

[열녀]본조 치자(梔子) 안지의(安止義)의 아내이다. 남편이 나병(癩病)을 얻은 지 10년만에 죽으니, 원중(園中)에 빈(殯)하여 놓고, 주야로 슬퍼하고 울더니, 3년 만에 비로소 장사를 지냈다. 시어니가 다시 시집보내려 하자, 치자가 말하기를, “어머님께서 만일 이를 강요하신다면 나는 반드시 강에 몸을 던지고 말 것입니다.” 하니, 시어머니가 두려워하여 그치고 말았다. 그 뒤에 치자도 또한 나병에 걸려 절개를 지킨 지 14년 만에 비애하던 끝에 몸이 파리하여 죽었다.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고, 부세(賦稅)를 면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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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 제41권

단군부터 고려왕조까지의 역사책.

한치윤(韓致奫 : 1765~1814)·한진서(韓鎭書)가 지었다.

교빙지(交聘志) 9

일본(日本)과 통교(通交)한 시말(始末)

이해에 백제국에서 온 사람이 있었는데, 나병(癩病)을 심하게 앓아서 모습이 몹시 추하였으나 산악(山嶽)의 모양을 잘 만들었으며, 또 긴 다리를 만드는 데 능숙하였다. 이에 여러 나라에 보내어서 삼하입경장교(三河入脛長橋), 수내곡교(水內曲橋), 목습제교(木襲梯橋), 원강빈명교(遠江濱名橋), 회진암천교(會津闇川橋), 두암원교(兜巖猿橋) 등 180개의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이로부터 오가는 도로가 비로소 통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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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남태평양의 섬나라 나우루에서 현지인 한센병(나병) 환자들을 학살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교도통신은 7일 호주 국립공문서관에 소장된 B·C급 전범재판 기록 등을 토대로 이 사실을 밝혀낸 일본 간토학원대 하야시 히루후미 교수의 말을 인용해 “당시 일본 해군 제16경비대는 현지인 한센병 환자 39명을 다른 섬으로 이송한다고 속여 보트에 태워 바다로 보낸 뒤 포격해 침몰시켰다”고 보도했다. 일본군은 익사를 피해 도망친 환자들을 총으로 사살했으며, 희생된 환자는 11세부터 69세로 다양한 것으로 집계됐다. 남성 24명, 여성 15명. 호주가 위임 통치했던 나우루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지난 1942년 일본군이 점령했다. [쿠키뉴스] 2008년 12월 07일(일) 오전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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