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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하사변(黑河事變)이 일어난 장소?

한부울 2011. 7. 10.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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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하사변(黑河事變)이 일어난 장소?

 

흑하사변(黑河事變)이 흑해사변(黑海事變)인가?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은 1921년 6월 27일 소비에트 연방 스보보드니(이만, 알렉세예프스크, 자유시)에서 붉은군대(적군:볼셰비키군대)가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 무장해제 명령하고 사살한 사건이다. 다른 말로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도 불린다. 사건이 일어날 당시 조선의 분산된 독립군들이 모두 자유시에 집결하였기 때문에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독립군세력은 사실상 모두 괴멸되었다. 이 사건으로 독립군 960명이 전사하였으며, 약 1800여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한국의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자 불상사라고 일컬어지고 있다.[위키]

이것이 흑해사변이라고하는 자유시참변의 간추리 기록이다.

 

대한독립군단 집결지였다고 하는 연해주 달네레첸스크(伊曼, Dalnerechensk)를 1895년 킵차크(Cossacks) 코카서스인, 터키슬라브 민족들이 세웠다고 하는데 그들의 전통적 거주영역이 바로 카스피해 부근인 금장한국, 크림한국, 우크라이나 지역이다.

그렇다면 코카서스지역에 있어야 할 지명인 달네레첸스크가 어떻게 연해주에 있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대한독립군단

북로군정서 (北路軍政署軍, 서일, 김좌진)

대한독립단 (大韓獨立團, 이청천)

대한독립군 (大韓獨立軍, 홍범도)

간도국민회 (間島國民會, 구춘선)

대한신민회 (김성배)

의군부 (이범윤)

광복단 (이범윤)

혈성단 (김국초)

도독부 (최명록)

야단 (野團, 김소래)

대한정의군정사 (大韓正義軍政司, 이규)

군비단 (軍備團, 김홍일)

 

러시아 내전(Russian Civil War, 1917-1921)은 백군(白軍:멘셰비키, 소수파)이 동맹군을 포함 250만 명의 군사와 적군(赤軍:볼셰비키, 다수파)역시 300만 명이란 대군을 보유하면서 군사적으로 첨예하게 대치하고 교전한 내전이다.

하지만 이 내전은 교전 지도를 보면 범위가 동유럽 지역을 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내란으로 피해는 백군보다 적군이 많았는데 백군은 30만명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한 반면 적군은 121만 명이 넘는 대규모의 희생을 치뤘다.

하지만 승리는 적군이 한다.

 

시베리아 철도를 1916년까지 지금의 아무르(Amur)강 북쪽 경계선 까지 연결하였다 한다.

그러나 극동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까지 연결 완공은 분명치 않고 석연치않다.

아마도 일본이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기 전까지 시베리아철도가 완성이 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며 때문에 볼셰비키 적군이 연해주까지 왔다는 사실은 믿을 수가 없다.

더 붙인다면 1937년에 연해주한인강제이주가 발생하였다는 점도 상기할 필요성이 있다.

1921년에도 시베리아철도가 가설되었다면 그 전에 이루어졌을 사건이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하기로 하자.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또는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공교롭게도 러시아내전(1917-1921)의 막바지에 일어난 큰 참변이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조선인 사상자는 사망자, 실종자를 합해 2,760 명이나 된다 하였다.

상당히 많은 숫자의 군사가 참변을 당한 것이다.

우리는 이 참변을 반도사관이 아닌 대륙사관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한제국의 생성과 일제에 의한 합병을 생각해보자.

건립되고 난후 대한제국의 군사 활동은 전무한 상태에 있었던 것에 반해 일제에 강제 합병된 1910년 이후부터 독립군으로의 활동이 활발하였다는 것은 아무래도 편집적인 면이 없지 않다.

독립군으로서의 활동 말고 대한제국의 정규군 군사활동은 전혀 없었을까?

불행이도 일제에게 합병되기 전까지의 대한제국 군사들의 활동은 전혀 알 길이 없다.

하기사 어쩔 수 없이 한반도에 갇혀 제국들 눈치만 보던 나약한 제국 모습만 기록 되고 알 뿐인데 더 이상 알려하면 힘들 수밖에 없다.

때문에 모든 기록에서 대한독립군이 참변을 당했다고 나온다.

대한제국군인가?

대한독립군인가?

 

이 흑하사변(黑河事變)은 특이한 점이 많이 발견이 된다.

 

러시아는 황제, 짜르(Tsar)체제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1905년 1월 22일 제정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에서 일어난 민중시위를 무차별적으로 진압한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을 거치며 이어 1910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볼셰비키혁명)이 발발하였으며 민중 대표 레닌 볼셰비키(Bolshevik:다수당)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바로 러시아 내전이 시작된다.

 

이 러시아내전(1917-1921)의 끝자락에서 그것도 레닌의 볼셰비키(Bolshevik)군대 즉 적군(赤軍)과 교전하면서 대한제국군인지 대한독립군인지 알 수 없으나 어쨌던 포위되어 전멸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반도 조선과 한반도 대한제국이란 한정된 틀만 가지고는 문제를 풀 수가 없다.

어쩌면 일제와 서세는 대한제국이란 존재를 일제 식민지상태에 있는 한반도 대한제국이란 한정된 틀만 가지고 보도록 역사 도식을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대륙조선이 1881년 멸망하기 전 아시아대륙전체를 동국(東國)과 서국(西國)을 분리하여 통치한 사실이 있었다면 대륙조선을 뒤 이은 대한제국이 청(조선)으로 변한 동국(東國)을 어떤 이유에서 든지 포기하고 중앙아시아한국 즉 서국(西國)영역을 지속적으로 통치하면서 지배하였다는 사실을 감추고 알리지 않기 위한 술책으로 대한제국을 한정 된 틀을 만들어 역사조작극을 벌렸다고 볼 수 있는 문제이다.

늘 역사 찾기 하면서 의문시 되던 점이 있었는데 바로 이러한 모호하고 애매한 점이었다.

고구려가 중앙아시아, 코카서스를 포함하여야 한다는 놀라운 이야기와 또한 고려가 중앙아시아와 발칸반도를 포함한 소아시아, 이란, 이라크를 영역으로 하던 대제국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곧 정리하여 밝히려 하고 있지만 이러한 역사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중앙아시아 유라시아라고 하는 동유럽은 우리역사에서 결코 낮설은 땅이 될 수가 없다는 결론이다.

왜 중앙아시아를 4칸국(汗, Khan)이라 하여 서양인조차 한국으로 불려졌을까 생각해본다.

그와 동시에 1910년에 연기처럼 사라질 대한제국을 무엇 때문에 건립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될 때 과정 또한 모호하기 이를 때 없다.

1895년에 발생된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이 발단이 되었다는 것인데 민초들에게는 대단한 충격으로 받아들여 졌겠지만 대한제국이란 국가가 새롭게 성립되는 이유로는 무엇인가 부족한 느낌이 없지 않다.

고종이 이듬해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는데 러시아가 시베리아철도를 완공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즉각적으로 한반도 소식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접하게 된다.

한반도에 공관을 두었을 수도 있겠지만 고종이 아관파천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모순이 따르고 단순하게 공관이라고 생각하기에도 여러가지 혼란이 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함은 1896년 2월 11일 친러세력과 러시아 공사의 협력하에 고종과 왕세자가 궁궐을 벗어나 러시아 공관으로 가는 것을 말한 것인데 러시아로 피난 갔다는 말이다.

파천(播遷)은 한어사전을 보면 이곳저곳 떠돌다. 여기저기 전전(轉轉)하다. 이곳저곳 옮겨 다니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 란 뜻인데 임금이 러시아 공관으로 전전할 수 있는지 또한 의문이다.

이것이 바로 고종을 나약한 황제로 만들어 버리는 잘못된 역사해석이라는 것이다.

대한제국의 황제이다.

지구를 손에 쥔 독수리 문양을 한 대한제국임을 상기 해야 한다.

그리고 독수리 날개와 가슴에 8개의 태극과 8개의 괘가 모여 합하는 의미 또한 놓칠 수가 없는 것이다.

절대 나약하고 다른나라 공관 따위나 전전하는 그런 황제가 아닌 것이다.

아관(俄館)은 러시아공관이라고 해석하고 있으나 갑자기 궁궐을 떠나 이리저리 해맨다는 뜻으로도 풀이 할 수 있다. 또 아관은 러시아의 관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까 러시아 수도로 들어갔다는 것을 추리 할 수도 있다.

당시 러시아 수도가 어딘가?

바로 페트로그라드라 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이다.

대한제국 성립된 원인을 따진다면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고 하는 명성황후시해사건이 발단이 아니라 중앙아시아와 유라시아 영토분쟁으로 혼탁한 국제정황이 있었고 대륙조선을 잃어버린 후 나름대로의 입지를 고수하려는 대한제국은 서국(西國)만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득세하던 서양제국들에게 단합된 국가체제의 과시적인 포석이 더 크지 않았는가 한다.

중앙아시아 제 한국들이 대한제국으로 통합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대한제국 성립의 필요성을 아마 러시아 황제와 상의 하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관파천이라고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서양세력과 일제입장에서는 상당히 못마땅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역사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한제국의 국장을 보면 독수리 머리의 왕관 또한 러시아제국 문양과 다를 것이 없다.

이 모든 것은 대한제국 국장(國章)에서 나타나는 독수리 날개와 가슴에 새겨진 8개의 태극과 괘가 상징하는 것이다.

 

 

 

 

                                                     광무(光武) 5年(1901)

 

                                             [러시아 황제 문장 (1858-1917)]

당시 난립하던 제 한국들

우즈베크(汗國)

시비리 한국(汗國)

카슈가르 한국(汗國)

코칸드 한국(汗國)

부하라 한국(汗國)

히바 한국(汗國)

크림 한국(汗國)

간자 한국(汗國)

아스트라한 한국(汗國)

카잔 한국(汗國)

가르당 한국(汗國)

돌궐 한국(汗國)

투르판 위구르국(瓜州國 또는 高昌回鶻汗國)

 

이 대한제국이 오스만과 러시아를 모두 포함하는 제국인지 아니면 오스만은 고려세력으로 명분을 계속 유지하고 고구려 승계세력들이 한국을 이어 제정러시아로 변신한 것인지 아니면 킵차크, 코카서스, 금장한국, 크림한국, 중앙아시아 한국 등이 있는 지역 전체가 대한제국의 영역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래 제시하는 사건들이 당시 한국이 어떤 형태 국가체제인가를 추리 할 수 있게 한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과 러시아 1905년에 일어난 피의 일요일

1910년 한일합방과 두 차례 이어지는 러시아혁명과 제정러시아 붕괴

이상하게 대한제국이 존재하는 사건과 러시아에서 발생한 큰 사건들이 겹쳐지고 있다.

 

특히 제정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1868.5.18-1918.7.17, 재위1894.11.1-1917.3.15)의 즉위 년도가 1894년이라는 점과 1895년 10월 한반도 명성황후시해사건 전말을 공사 고종의 개인 친구였다고도 하는 웨베르,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Karl Ivanovichi Weber, 1841.6.17-1910.1.8)가 올린 진상 보고서를 급히 전달 받은 니콜라이 2세는 보고서를 직접 읽고 표지에 친필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단 말인가. 정말 놀라운 일이다”라고 적은 뒤 즉각 한반도에 가까운 아무르 주 주둔군에 비상 대기령을 내렸다 한다.

이것은 일제를 러시아가 나서 본 때를 보이려고 한 것처럼 묘사되는 부분이다.

당시 제정러시아 수도와 대한제국은 상당히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어쨌던 니콜라이2세는 이러한 점을 잊지 않았다는 듯이 일제를 공격하는데 이것이 바로 러일전쟁(1904-1905)이다.

사실 러시아가 일제를 상대로 기어코 전쟁을 할 필요성이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이 전쟁으로 제정러시아는 내부적으로 상당한 충격과 정치적으로 데미지를 받았던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전쟁은 러시아 입장에서 보면 보복전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러시아 힘이 아직 미치지 못하는 대륙조선 동국(東國)문제에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이어 가고 싶은 생각으로 그러한 수단의 발로라 볼 수 있고 대륙조선이란 주인이 없어진 곳에 하찮은 아시아군벌들이 설쳐되는 꼴을 방치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런 사정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사정이 더 컸던 것이 아닌가 한다.

 

 

 

중국식 머리, 의상에 얼굴은 서구형 미인 http://blog.daum.net/han0114/17050043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에서 발행된 일간지 '노보예브레먀(Novoe Vremy)' 1985년 10월21일자에 중국식머리와 의상을 한 서구형의 미인 명성황후 스케치 사진과 함께 보도되었다는 사실이 얼마 전 국내신문에 게재된 적이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미루어 짐작 할 때 제정러시아(Russian Empire, 1721–1917)와 대한제국은 반도사관으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때문에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라고 하고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 하는 이 참변은 러시아백군(白軍, 하얀짜르-white tsar, 왕당파)과 관계되는 직접적인 상황을 추측할 수 있다.

아니면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자들의 녹색군대와 무정부주의자들의 검은군대를 생각 해 볼 수 있다.

이들 세력역시 반 볼셰비키세력들이다.

 

반도역사의 기록된 대한제국이라 하는 것은 한반도를 일제가 강탈하고 식민지 할 것을 염두에 두고 건립한 나라인 것처럼 존재의 이유를 알 수 없게 하는 제국이다.

역사성으로 따진다면 불필요한 건국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건국이 이루어졌고 사실이다.

물론 대륙사관에 따른 것이지만 대한(大韓)이 무엇인가 따져 보지 않을 수 없다.

대한(大韓)은 한국을 크게 부르는 것인데 시대적 상황을 보면 중앙아시아에 제 한국(汗國)을 모두 통합한 지칭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당시 중앙아시아에 분명 한국(汗國)들이 수도 없이 많았을 때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한반도에 조그마한 나라가 감히 한국이란 간판을 걸고 억지로 눈치없이 제국까지  세웠을까 하는 점이다.

일제와 서세의 서릿발같은 감시가 있었을 법한데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국명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 조선, 한반도 대한제국이 어떤 국명을 내걸어도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고 곧 일제에게 곧 먹혀 없어질 것인데 상관없다는 식으로 보면 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어찌 그런 식으로 나라가 세워지고 없어질 수가 있겠는가 한다.

대륙조선 동국(東國)은 철종의 죽음과 동시에 청(조선)으로 넘어가 끝을 다하였지만 대륙조선 서국(西國)은 이름이 바뀐 한국(韓國)통제하에 존재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은 대륙조선 서쪽을 통치한 서국(西國)의 통치제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에서조차 중앙아시아를 19세기 말까지 제 한국(칸:Khan)이라고 하였다.

보통 부르기를 중앙아시아 한국이었다.

물론 몽골제국 4한국(四汗國)을 승계한 부분일 것이다.

칸(汗)은 한(韓)이다.

한(汗, 韓)을 칸(Khan)으로 영어화하였을 뿐인데 우리는 전혀 모른다.

바로 대한제국은 한(汗)제국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식, 어떤 형태로든지 대한제국이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존재하였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정규 군대가 분명히 존재하였을 것이라고 판단 할 수 있다.

일제로부터 한반도 독립을 위한 군사 활동만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대한제국이란 존재를 망각하게 한 것이다.

 

자 이제 지형적인 문제를 알아보자.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또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 했다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을 지적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시(自由市)라는 단어와 흑하(黑河)라는 지명이름이다.

일단 조선인들이 이 도시를 자유시라고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기록에는 지금 흑룡강이 있는 스보보드니(Svobodnyj)라고 하는데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알렉세예프스크(Alekseyevsk)였다가 이후에 볼셰비키정부에 의해 스보보드니로 바뀌었고 한국인들은 의역을 하여 자유시로 불렀다 한다.

한국인이 누구인가?

대한제국의 한국인가?

한반도의 한국인인가?

여기서도 헷갈린다.

아무르 강(Amur river)의 지류인 제야강(Zeya River) 우안(右岸)에 있으며 시베리아 횡단 철로변에 있고 1912년에 건설되었다 한다.

그렇다면 근대기에 세워진 신설도시이다.

이것은 근세기 새롭게 만든 도시라는 설명이며 자유시란 것은 갖다 붙일 수 도 있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인들이 자유시라고 할 정도면 상당히 오래된 도시로서 늘 자유롭게 왕래하던 곳이어야 한다. 그런데 신설도시라면 자유시보단 새마을이라고 하였을 것 같은데 말이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특히 시베리아 철도가 과연 이 때 완공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대 시베리아 철도(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간의 9,334㎞)는 1850년 극동지방의 군사적 이익증대, 식민, 대중국무역 등을 목적으로 계획되었다 한다. 예정선은 시베리아 가도를 따라 건설하기로 계획하고 1887년에 조사하여 1891-1892년에 걸쳐 착공하고 1897년 부분적(?)으로 개통되었다 하였으며 대신 철도의 전철화는 1929년에 개시되었으며 2002년에 비로소 전 구간이 전철화 되었다 한다.

단언컨대 절대 흑하사변(黑河事變)이 발생한 시점까지 이 시베리아 철도가 개설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사실 러시아가 19세기초 남진정책을 사용하면서 본격적으로 부동(不凍)항이 필요하였고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이란 이름으로 동방(東方)을 정복한다는 의미의 도시를 만들었던 것으로 이해한다.

러시아가 찾던 부동항은 바로 아열대 여름 건조기후의 지중해 연안이다.

당시 오스만제국과 러시아간에 전쟁(Russo-Turkish War, 1828-1829)이 있었는데 그 전쟁은 바로 러시아가 부동항을 차기 위한 수단으로 벌렸던 전쟁이다.

오스만의 무조건 휴전제의로 러시아가 마침내 승리하여 4년후 협정을 맺었는데 러시아 군함의 다르다넬스해협(Dardanelles) 자유항해와 타국군함의 통과에 대한 폐쇄를 약정하였던 협정이다.
이것이 운키아르 스켈레시 조약(Treaty of Hünkâr İskelesi)이다.

1831년에 다시 이집트의 총독 무함마드와 오스만 제국 간에 분쟁(1831-1833)이 발생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를 지지하고 러시아는 고립된 오스만을 후원하였다.

결국 이 비밀협정이 마침내 노출이 되어 서방 다른 제국들의 반발을 사고 결국 폐기 되었지만 러시아가 당시 오스만제국 보호국인 크림한국을 점령하고 흑해로 나아가 지중해로 들어가는 과정에 반드시 거쳐야 할 해협이 두개 있는데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보스포루스해협(Bosphorus)과 다르다넬스해협(Dardanelles)을 확보하고 지중해에 부동항을 설치하고자 한 것이다.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분명히 부동항을 찾았으며 동방을 점령하라 라고 하는 블라디보스톡지명을 흑해 내 점령 항구에 명명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동방(東方)은 한반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전 글에서 말했다.

동방(東方)은 바로 아나톨리아(Anatolia)반도와 중앙아시아 한국을 말하는 것이다.

때문에 구(舊) 블라디보스톡(Old Vladivostok)이란 도시가 존재하는 것이다.

구(舊) 블라디보스톡은 바로 흑해 연안에 있었다고 보인다.

구 블라디보스톡의 사진을 보면 극동아시아 건축물이 아니다.

모두 서구 건물임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연해주에 있는 블라디보스톡 인구는 2002년 현재 59만 1800명이라 한다.

 

 

 

 

 

    Old Vladivostok, pre-1917 Russian Postcard

 

기록대로 1856년 러시아인이 이 블라디보스톡을 발견하였다면 아마 지금쯤 100만 명이 훨씬 넘는 큰 도시가 되었을 것이 틀림이 없다. 이 도시는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당시 연합군의 원조물자를 이곳에 양륙할 때 본격적으로 생성된 도시라고 판단한다.

아마 그 때 시베리아 철도가 완설 되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엄밀히 따진다면 이 연해주에 있는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이 군사적으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군사항으로서 탄생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 이상한 것은 과거 제정러시아 시절 때 지명들은 볼셰비키정부와 소련정부가 들어서면서 모두 바꾸거나 없애버렸다. 그런데도 연해주 블리디보스톡은 그대로 연명하였다는 것도 의심되는 부분이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당시 백군과 적군이 치열하게 교전한 지도를 보면 위치가 지금의 흑룡강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거리가 멀고 이동상황이 여의치 않아 여기저기 출몰할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러시아 극동까지 군사이동을 자유롭게 할 형편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분명 교전지도를 보면 카스피해와 흑해를 중심으로 동유럽 남북을 가름한 대한제국의 고유영역인 것처럼 인식되는 곳에서 일어난 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교전지도]

 

그래도 애매모호하여 흑하(黑河, black river)란 단어를 영문 위키 자료를 찾아보았다.

흑하(黑河, Black River), 우리 역사에서 관련이 깊다고 판단되는 지역을 중심으로 한번 살펴보았다.

 

 

China

(1)Amur River

아무르 강(Amur River) 또는 흑룡강, 헤이룽 강(黑龍江)은 상류의 실카 강(Shilka River)과 오논 강(Onon River)을 포함하면 길이 4,444km(세계 8위), 면적은 205만 2000 km²(세계 10위)가 된다. 유역은 러시아 ·중국 ·몽골에 걸쳐 있다.

 

(2)Ejin River, also known as the Heihe (黑河, lit. "black river")

额济纳河(“亦集乃”的音轉)是中国第二大内陆河,干流全长821公里。流经青海省、甘肃省和内蒙古自治区。上游叫黑河(古作黑水。西夏語“水”讀作“亦集”,“黑”讀作“乃”),流淌在甘肃张掖地区;流到酒泉地区就改名叫弱水了;进入阿拉善盟,便叫额济纳河

The Ejin River (Mongolian: Etsin-gol, Edzin-gol), also known as the Heihe River (黑河, lit. "black river"), is a major river system that originates on the northern Gansu side of the Qilian Shan mountains.

 

Macedonia

(1)River Crna

The Crna (also Crna Reka, Macedonian: Reka Crna) is river in the Republic of Macedonia, right tributary of the Vardar. It runs though much of the south and west of the country. Its source is in the mountains of western Macedonia, west of Kruševo. It flows through the village Sopotnica, and southwards through the plains east of Bitola. At Brod (Novaci Municipality) it turns northeast, and it flows into the Vardar between Rosoman and Gradsko.

 

The name means "black river" in Macedonian, a translation of its earlier Thracian name, Erigon, meaning "black", akin to Greek érebos, "darkness"; Armenian erek, "evening"; Old Norse røkkr, "darkness"; Gothic riqis, "darkness"; Sanskrit rájas, "night"; Tocharian B orkamo, "dark".

 

Russia

(1)Chernaya River (Saint Petersburg), also known as the Tchernaya Rechka

원래 카렐리아(Karelia)어로 무스타이오기(Mustajogi)이며,

체르나야레치카(Tchernaya Rechka) 또는 검은 강(Black River)이라고도 한다.

(2)Amur River

 

Ukraine

(1)Chorna River (Ukraine), also known as the Black River

초르나(chorna)-(Black)흑이다.

 

위 china 두곳, 마케도니아 1곳, 러시아 2곳, 우크라이나 1곳으로 나온다.

이 곳들이 모두 흑하이다.

어딜까?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또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 일어난 곳은 분명 흑하(黑河)에서 일어났다고 하고 이 흑하(黑河)를 지금의 동북삼성에 위치하는 아무르(Amur)라 하는 흑룡강(黑龍江)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자유시라고 하는 옛 지명 알렉세예프스크(Alekseyevsk)라 하는 스보보드니(Svobodnyj)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이 흑룡강은 흑하사변(黑河事變)의 흑하가 될 수 없다.

 

동북삼성에 흑룡강 연역을 보면

1671년에 흑룡강연안이 흑룡강성으로 축조되었다가

1683년에 원령고탑장군부에서 분할되어서 흑룡강장군을 만들고 흑룡강성에 주둔토록하였다가

1907년에 흑룡강장군을 철수시키고 흑룡강성으로 개편하여 지금에 이른다 하였지만

1932년에 흑룡강성은 일제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의 한 부분이 되면서 흑룡강성으로 이름붙여져 굳혀진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흑하(黑河)는 어디일까?

 

[천상희 칼럼]러시아와 흑룡강(黑龍江)의 글을 보면

(생략...)

러시아 민족이 살고 있던 지역을 알수 있는 단서가 위의 기록에 있는데 아주 핵심적인 단서 입니다.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의 기록인 "흑룡강의 위에 근거해 살고 있다.(窃據黑龍江上)"의 기록과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의 기록인 "그 땅은 낮이 길고 밤이 짧다. 밤에도 어둡지 않다.(其地晝長夜短。夜不甚暗)"의 기록 입니다.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의 저자는 성해응(成海應)으로 조선의 정조때의 인물이고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의 저자는 이형상(李衡祥)으로 조선의 숙종때의 인물 입니다. 그 당대의 상황과 과거의 역사사료를 근거로 기록을 남긴 것인데,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에서는 러시아 민족이 흑룡강의 상류지역에서 살고 있다고 기록했고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의 기록에서는 러시아 민족이 사는 곳은 "그 땅은 낮이 길고 밤이 짧다. 밤에도 어둡지 않다.(其地晝長夜短。夜不甚暗)"의 기록처럼 "백야(白夜)"현상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즉,역사상의 흑룡강 지역은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곳 입니다. 네이버 지식을 보면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스웨덴 지역등등이라고 합니다. 역사에서 당 태종이 골리간(骨利幹)에 이르러 견곤도독부(堅昆都督府)를 설치했던 지역이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이며 흑룡강의 상류지역인  러시아 민족이 사는 지역이었던 겁니다. 다시말해서 러시아 민족이 과거에 살았던 지역의 전제조건은 흑룡강 상류지역이며 그 지역은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입니다.

상식적으로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은 북극권 입니다. 위의 기록 만을 가지고 러시아 민족이 살았던 지역의 전제조건을 말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기록을 보면 위에서 말한 러시아 민족이 과거에 살았던 지역의 전제조건을 만족시킬 만한 기록이 될 것입니다.(생략)

 

위는 대륙조선사 칼럼인 천상희 선생의 글인데 위 내용이 가르치는 곳 흑하 즉 흑룡강은 분명 러시아에 있는 상트 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이고 카렐리아(Karelia)어로 무스타이오기(Mustajogi)이며 체르나야레치카(Tchernaya Rechka) 또는 검은 강(Black River)이라고도 하는  

체르나야 강(Chernaya River)임을 알 수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명실공히 거대한 이름의 대한제국 실체를 어디에 두었는가의 문제가 새롭게 대두되는 것이다.

대한제국을 한반도에 두어 일제에 병합될 수밖에 없는 처참한 운명의 대한제국인가?

아니면 대륙조선의 영역을 동서로 나누어 동국을 청(조선)에 넘겨주고 나머지 서국만을 통치하는 제국으로서 대한제국인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후자의 경우가 틀림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대한제국이 존립하여야 할 진정한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 활동무대는 중앙아시아에서 카스피해와 킵차크, 코카서스 지역이라고 판단되는데 어쩌면 체르타야 강까지 영역 활동지역이었음을 알 게 한다.

바로 러시아 내전이 일어난 주 전장이며 주 영역이다.

1918년 1월 1일부터 레닌 암살 기도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얼마 안 있어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암살됐다. 혁명이 일어난 지 몇 주 만에 서방 강대국들의 재정 지원을 받은 전직 장교와 장군들이 서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반혁명 군대들을 조직했다.

대한제국의 영역에서 일어난 전쟁이라면 대한제국의 정규군이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다 잘라먹고 꼬리만 남아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안타까울 다름이다.

 

이 사건은 모든 자료에는 대한독립군단이라고 하였지만 대한제국으로서의 마지막 군사 활동이 아니었는가 판단되는 사건이다.

무엇때문에 대한제국 군인들이 상트 페테르부르크 흑룡강, 흑하라고 하는 페르나야강에 들어 갔을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을 더 이상 부정할 수만 없을 것이다.

당시 이만한 군사가 순식간에 살상되었다고 하지만 그 외 기록된 수자보다 더 많은 대한제국 군인들이 포로가 되어 볼셰비키화 되었다고 보이며 우리가 아는 기록은 어쩌면 몽골계 대한제국 정규군인으로서 표적이 되었지 않는가 하며 그 세력들이 한반도가 해방되고 난후 스탈린의 지시로 북한 고급정치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지금의 중공정권 최초 구성원도 여기서 파생된 자원이라고 보인다.

 

당시 대한제국 군사내부는 다민족, 다인종적 군대체제로서 여러 가지 갈등으로 분리되던 시점에 구심점을 잃고 확실한 체계적인 통제가 되지 않았다고 보이고 내부에 러시아 적군 즉 볼셰비키군대를 심적으로 동조한 세력들이 있어 사전에 군대기밀과 이동상황이 러시아 적군에게 노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록에도 나오지만 이 사건 이후 대한제국 군대 일부는 볼셰비키군대의 일원이 되었다 하고 있다.

 

이 당시 국제정세도 미묘하게 돌아갔다.

제1차 세계 대전(World War I, 1914.7.28-1918.11.11)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주요 연합국과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주요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4년간 싸웠으며 약 900만 명이 전사하였다.

이 전쟁이 막바지에 들어가면서 연합국(영국, 프랑스, 미국)과 추축국 (독일제국, 오스만제국)은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을 사이에 두고 교전 중이었는데도 세계 최초로 수립된 공산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양쪽 모두 이들 백군(白軍:멘셰비키, 소수파)을 물적으로 지원하거나 직접군대를 파견하여 돕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이는 백군을 "외세의 꼭두각시"로 선전할 수 있는 구실이 되었고 적군(赤軍)은 오히려 러시아의 진정한 수호자로 일반 시민들에게 부각되어 지지도도 높아지면서 오히려 내전에서 적군(赤軍)이 승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니 아이러니다.

 

이상으로 보았을 때 분명 대한제국은 서국을 영역으로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대한제국에서 러시아 내전에 깊숙하게 개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정러시아와 대륙조선과 연결될 수 있는 개연성이 확실하게 보이고 있으며 대한제국역시 제정러시아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어떤 관계고리가 분명하게 존재한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대한제국이 비록 1897년부터 1910년까지 단명의 제국으로 오명을 남겼지만 사실은 그것은 한반도역사를 만들기 위한 조작이었을 가능성이 매우높다.

흑하사변(黑河事變)은 일제가 강제 합방한 한반도 대한제국에서 일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한정된 군사 활동이 아니라 삼한의 전통적인 영역이었던 중앙아시아와 유라시아 영역인 서국(西國)의 제 한국들을 통합하고 대한제국으로서 존재하면서 1921년까지 군사활동을 벌렸던 사실을 머리와 몸통은 감추고 꼬리만 들어 낸 사건으로 전체가 들어나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아직 미약하지만 미래 역사찿기하는데 대단히 귀중한 사실로서 가치를 부여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두고 두고 깊이 면밀하게 연구해야 할 사한이 아닌가 한다.

흑하사변(黑河事變)이 흑해사변(黑海事變)인가?[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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