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사건

고려인 송환 완료?

한부울 2010. 10. 12.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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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송환 완료?

 

1937년 러시아인들이 말하는 한인송환? 완료의 뜻은 http://blog.daum.net/han0114/17044563

 

1937년에 벌어진 한인 강제이송문제를 냉정하게 분석해 보면 소련정부가 일제와 연해주 한인들이 연계하는 것을 막고 소련동부지역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표면적인 이유를 붙이지만 대고려연합체세력을 차단하기 위하여 적성(敵性)민족으로 낙인을 찍어 정치적으로 압박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고려인들이 거주하는 곳은 바로 고려연합체(korai, united corea)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고 기득권을 가지는 것이라고 할 때 고려인들을 이동시켜 동쪽영역을 러시아가 확보하려고 한 수단으로 이용하였을 가능성을 제기 할 수 있고 동쪽으로 이동하였던 고려인들을 일본이 지배하는 영역에 둘 수 없다고 판단 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소련정부가 적성민족으로 나눈 대고려연합체 안에 크리미안 타타르족(Crimean Tartar), 체첸족(Chechen), 리투아니아족(Lithuania), 칼무크족(Kalmik), 인구슈족(Engush)가 그 범주에 들어 감에 따라 중앙아시아에 집단 이주시켜 그들에게 보호권을 주장하려 한 것이라고도 보여진다.

소련정부가 강제 이송한 고려인 18만중 2500명의 고려 지식인과 지도자들을 처형했다는 사실은 고려연합체의 정치적 지도자들은 제거한 것이라고 보이고 세계삼한역사적으로도 이 사건을 단순하게 볼 수 없게 만드는 근세기역사 혼란기에 매우 중요하게 받아 들여야 할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소련정부에 의해 처리된 연해주 한인 강제이주사건은 다시 말해 원래 존재한 고려영역에 동부에 이주한 고려인들을 다시 송환하였다는 사건으로 처리한 것이라 볼 수 있다.[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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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전후의 연해주 한인들에 대한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온바오지식]2009-08-09, 22:52:25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지역으로의 강제이주는 1937년 봄에 불어닥친 새로운 숙청과 함께 시작되었다. 1937년의 숙청은 3월 3일 스탈린이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에 한 보고인 ‘당 사업의 부진과 트로츠키 및 다른 양면 주의자들을 청산할 방법에 대하여’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문서는 소련이 자본주의 적들로부터 포위되어 있고, 소련 내에는 외국의 스파이들이 가득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강제 이주가 공식적으로 결정된 것은 1937년 8월 21일이다. 이 날 열린 소련인민위원회와 소연방공산당은 ‘극동지방 국경부근 구역에서 조선인 거주민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결의문(No. 1428-326cc)을 채택하였고, 이는 스탈린(Сталин)과 몰로토프(Молотов)에 의하여 서명되었다.


이 결의문의 주요 내용은 원동 지방에 일본 정보원들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극동지방의 모든 한인들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공화국으로 이주시키며, 이를 1938년 1월 1일까지 완료한다는 것이었다. 강제이주의 책임자인 예조프는 1937년 9월 21일자로 1차 이주가 완료되었는데, 카자흐로 21,296명, 우즈벡으로 30,003명이 이주되었고, 총10,369가구 51,299명이라고 보고하였다.  예조프는 다시 1937년 10월 25일에 한인이주 사업이 완결되었다고 보고하였는데, 총124대의 수송 열차로 36,442가구 171,781명이 이송되었으며, 우즈벡으로 16,272가구 76,525명, 카자흐로는 20,170가구 95,256명이 이주되었다고 보고하였다. 당시 한인이주의 총 책임자였던 내무성 극동분국 총책임자인 류슈코프(Лушков, Liushkov)에 의하면, 강제로 이주된 한인이 18만여명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강제 이주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주고 행해진 것이 아니었으며, 교통편도 결코 편안한 여행이 아니었다. 먹을 것이 전혀 공급되지 않았고, 열차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행 중에 홍역이 발생하여 아이들의 사망률이 60%를 상회하였다고 한다. 또한 가족들이 여러 열차로 흩어져 이산가족도 다수 발생하였다. 또한 하바로프스크 근처 베리노(Верино, Verino)역에서 505호 열차가 전복된 사건을 비롯하여 여러 사고로 인한 사망자들이 다수 발생하였다. 이렇게 어렵게 도착한 곳도 결코 그들이 생존하기에 적합한 지역은 아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갔다. 결국 이 시기에 수많은 한인들이 희생되었으며 이에 대하여는 아직도 정확한 숫자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소비에트 당국은 극동의 한인들을 모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는데 만족하지 않고, 한인 사회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이들을 재판 없이 처형하였는데, 18만정도의 한인사회에서 2,500여명이 처형을 당했다. 살아남은 이들에게도 사회적, 정치적인 핍박이 자행되었으며, 여러 활동들은 극단적인 제약을 받았다.


원동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을 왜 중앙아시아 지역에, 그것도 1937년에 강제로 추방하였는가 하는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1937년 7월 29일자 “프라우다(Правда)”지에 실려 있다. “일본 비밀 정보부의 파괴적 행위”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일본은 불교 승려나 어민 또는 한인이나 중국인으로 가장하여 국경지대와 연해주 내에서 소련에게 불리한 파괴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와 함께 스탈린은 극동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항일 운동이 일본이 대소 선전 포고를 하는 구실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강제이주를 당한 것은 한인만이 아니었다. 이른바 적성(敵性)민족으로 낙인찍힌 여러 소수민족들도 차례로 강제이주를 당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인간 쓰레기장’이라 일컬어지던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를 당하였다. 한민족의 강제이주 이후에 같은 방법으로 이주를 당한 민족들은 크리미안 타타르족(Crimean Tartar), 체첸족(Chechen), 리투아니아족(Lithuania), 칼무크족(Kalmik), 인구슈족(Engush), 그리고 독일족 등이 있다. 이들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옮겨진 경우도 있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겨진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민족이동의 효시가 한인들의 이주였다는 것이고, 한인의 강제 이주에서 자신감을 얻은 소련 정부는 다른 민족들을 집단적으로 그 원래의 거주지에서 이주시키게 된다. [지피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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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제 민족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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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15,217,700명 (62위)

카자흐인이 53.4%, 키르기스족과 매우 흡사하며, 체질적으로는 터키인과 몽골인과의 혼혈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키는 중키, 남자가 162∼163cm 정도 또는 그 이하, 중두(中頭)이며 광대뼈가 나왔다. 코는 단비(短鼻)이나 광비(廣鼻)가 아니다. 머리카락은 직모이며 까맣고, 수염과 체모는 적다. 눈에는 몽골주름을 흔히 볼 수 있고, 유아의 대부분은 둔부에 몽골반[蒙古斑]이 나타난다.

러시아인이 30%,

우크라이나인이 3.7%,

우즈베크인이 2.5%,

독일인이 2.4%,

위구르족이 1.4%,

고려인이 0.5%,

폴란드인, 불가리아인, 벨라루스인, 약간의 중국인, 기타 6.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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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공화국 26,851,195명 (42위)

1937년에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한 고려인이 인구의 1%에 해당하는 1990년대까지 22만명이 거주하였으나, 상당수가 러시아로 이주하여 현재는 약 15만 명 정도만 살고 있다.

우즈베크족이 차지하는 비율은 80% 우즈베크족의 정체성은 BC 2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앙아시아에 분포한 여러 민족들 중 오늘날의 이란 남부와 아프가니스탄 등지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투르크계 부족들이 우즈베크족의 조상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우즈베크족은 대부분 무슬림이며 수니파의 하나피 학파에 속한다. 8세기 이전까지 대부분의 투르크계 유목민의 종교는 조로아스터교 또는 불교였으나, AD 751년 아랍이 탈라스(Talas) 전투에서 승리하며 중앙아시아 전역이 이슬람화 되었다.

타지크인(5%),

러시아인(3.7%),

카자흐족(3.6%),

타타르족(0.61%),

고려인(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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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메니스탄 4,833,000명 (113위)

투르크멘인(85%) 인류학적으로는 장두(長頭)이며 지중해 인종이지만 북부에서는 몽골로이드적 특징이 현저하다. 민족사상 투르크멘족은 이란화(化)한 훈족과 투르크계의 오구즈족과 깊은 관계가 있고 또한 몽골의 서진(西進)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우즈베크인(5%),

러시아인(4%),

그 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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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기스스탄 5,264,000명 (111위)

키르기스족 69.5% 카자흐인과 매우 흡사

러시아인 (9.0%),

남부의 우즈벡족 (14.5%)

위구르족 (1.1%),

타지크족 (1.1%),

카자흐족 (0.7%),

둥간족 (1.2%)과

터키인 (0.9%),

고려인 (0.3%),

우크라이나인 (0.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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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키스탄 공화국 6,500,000명 (100위)

이란계 민족인 타지크인(80.0 %) 수니파 이슬람교도들로서 이란인 혈통이다. 언어는 다리어(아프간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데, 산악지역의 언어는 동부 이란의 페르시아어와 매우 비슷하다

우즈벡족(15.3 %),

러시아인(1.1 %)

기타, 페르시아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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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28,150,000명 (37위)

파슈툰족 44% 인구 약 3000만명이며 모두 수니파 이슬람교도이다. 아리안 민족의 일파로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또렷하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언어는 인도유럽어인 파쉬투어를 사용하며 아랍문자로 표기한다.

타지크족 25%

하자라족 10%

우즈베크인 8%

투르크멘인과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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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163,803,560명 (6위)

펀자브인 - 44.15% 남아시아의 펀자브를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는 민족으로, 파키스탄 최대의 민족이기도 하다. 1947년 인도, 파키스탄 분리 독립 때는 인도에서 이슬람교, 파키스탄에서 힌두교와 시크교의 펀자브인이 이동했다. 대부분의 펀자브인은 이슬람교도이다.

파시툰인 - 15.42%

신드인 - 14.1%

세라이키인 - 7.57%

발로흐 인 - 3.57%

기타 - 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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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70,472,846명 (17위)

페르시아족 51%, 페르시아인은 아리아 민족 중 이란계이다. 기원전 1000년경 동족인 메디아인과 함께 이란 고원에 이주, 메디아인이 고원의 서북부에 분포된 것에 대하여 페르시아인은 서남부의 파르사 지방(현재의 파르스 주)에 정착했다.

아제르바이잔족이 24%,

길란-마잔다란족이 8%,

쿠르드족이 7%,

아랍족이 3%,

루르족이 2%,

발루치족이 2%,

투르크멘족이 2%,

기타 1%(유럽계, 러시아인, 인도인, 유대인, 집시, 한국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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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타타르족(Crimean Tatars)

 


크림타타르족(Crimean Tatars, 克里米亞韃靼人, 500,000-2,000,000)은 우크라이나, 터키, 중앙아시아 등지에 널리 분포하는 투르크계 민족이다


In modern times, in addition to living in Crimea, Ukraine, there is a large diaspora of Crimean Tatars in Turkey, Romania, Bulgaria, Uzbekistan, Western Europe, Middle East and North America, as well as small communities in Finland, Lithuania, Russia, Belarus, Poland and Brazil. (See Lipka Tatars and Crimean Tatar diaspora)


크리미아·타타르인은, 13 세기부터 18 세기에 걸쳐 크리미아 반도를 중심으로 남 러시아를 지배한 크리미아·한국(Crimean Khanate, Crimean Tatar:克里米亞汗國)의 테르크계 이슬람교 주민을 기원으로 한다.


1768-1774해의 러시아-터어키전쟁의 결과, 1783년에, 크리미아는 러시아 제국에 병합 되어 구크리미아·한국의 유력자층의 상당수는, 오스맨 제국으로 망명했다. 또,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을 시작으로 하는 이민이 크리미아에 밀어닥쳤기 때문에, 19 세기의 처음에는 크리미아·타타르인은 크리미아 반도에서의 소수파가 된다.


19 세기말에는 구한국의 귀족계급 출신의 (İsmail Gasprinsky 1851-1914)가, 크리미아의 바흐치사라이(Bakhchisaray)로, 서양식 교육의 보급 운동(쟈디드Jadid 운동)을 개시해, 크리미아·타타르인으로부터 많은 민족 지식인이 배출되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시에는 노맨·체레비지한(Noman Çelebicihan 1885-1918)이나, 쟈페르·세이다후메트등 민족파 지식인에 의해, 1921년에 「크리미아 공화국」의 설립이 선언되지만, 소련 정권이 이것을 해산시켜 크리미아 자치 소련 사회주의 공화국을 설립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중 크리미아타타르인의 대부분이 적군(赤軍)에게 동원되었지만, 1944년에는, 스탈린에 의해 크리미아·타타르인은 대 독일협력의 혐의를 받고 전주민이 중앙아시아에 강제 이주를 피할수 없게 되었다. 강제 이주의 과정에서, 주민의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크리미아·타타르인 추방(Deportation of the Crimean Tatars, Surgun)」으로서 현재에도, 크리미아·타타르인의 사이에 기억되고 있다.


스탈린의 사후, 1967년에 크리미아·타타르인에의 추방 조치는 해제되어 크리미아에의 귀환 운동을 시작되었다. 1991년에는, 무스타파·제이 미 리플렉스 카메라(Mustafa Abdülcemil Qırımoğlu (Cemilev)등 민족 활동가의 운동에 의해, 소련내의 전크리미아·타타르인으로부터 대의원이 선출되어 최고 의사결정기관인 크리미아·타타르 민족 대회(크루르타이)가 개최되어 크리미아에의 귀환을 향한 노력이 진행되었다.


현재, 약 25만명의 크리미아·타타르인이 크리미아에의 귀환해, 크리미아의 전인구의 1할을 차지하기까지 되었지만, 이민의 생활 기반의 정비, 우크라이나에서의 정치 참가의 방법등 , 이주 후의 문제는 남아 있다.[위키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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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미크(Kalmyk 卡尔梅克共和国)은 러시아의 칼미크 공화국의 주민이며 몽골계 민족이다. 현재 약 14만 7천명이 거주하고 있다. 일부는 신강위구르(新疆維吾爾自治區)와 몽골에도 약간이 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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