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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터널~
정치적인문제 뿐만 아니라 국민정서적인 면에서도 맞지 않는 용어이다.
애초부터 우리와 함께 할 수 없도록 스스로 똥물을 던지는 족속들이 지금 열도인들이다.
시도때도 없이 늘상 심사를 건드려 뒤틀어지게 하는 독도문제. 더러운 치부를 덮으려고만 하는 위안부문제, 강제동원노동자보상문제, 과거 침탈역사의 잘못에 대한 진심에서 울어나지 않는 땜질식 반성태도 등 들어난 문제만 하더라도 우리가 그냥 넘어가기가 힘드는 것이 사실이다.
한일터널을 운운하는 우리나라 정책입안자들이 그들의 못된 근성이나 근원이나 알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침탈의 대한 반성은 고사하고 한국동란으로 치부하여 오늘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고 자신들이 잘나 잘 사는 것처럼 여기는 오만이 넘쳐나고 그들 스스로가 얼마나 추악한지도 까맣게 모른체 어디 하나 진실되지 못한 습성에 환멸을 느낄정도이다.
그야말로 이러한 구제불능적인 사고를 가진 일본 주체들과 우리가 근본적으로 융합할 수 있다는 판단 자체가 가당찮다.
그런데도 지금 이상하리 만치 모든 언론에서 한일터널 문제을 부각하고 띄운다는 느낌이 있고 그것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는 면에서 이러한 의도에 본질을 의심케 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갑자기 한일터널 문제가 대두되어야 하고 필요한 것인가 물음이 필요하다.
한일터널은 모든 것이 정리되고 난 후 우리 스스로가 진정으로 마음이 동해 그리고 정서적으로 그들을 용서할 수 있어 비로서 하나로 통합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느낄 때 상징적으로 도모해야 할 중대한 사한이다.
그런데도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 상처투성인 국민정서에 고추가루 뿌리는 식은 옳지 않다.
한일터널은 아무리 분위기를 띄워도 우리민족 정서가 용납하지 않으면 이루어지기가 불가능한 문제이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의 정서와는 아랑곳 하지 않고 우리에게 한일터널을 뚫고자 온갖 압력을 가할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극단적으로 첨하자면 100년전 강제병합이 이루어지던 경우와 흡사하다.
집단 살인귀 얼굴을 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다시 환생하여 종국에 대한민국(남한)을 점령하는 것을 전제로 한 고약한 계산이 깔린 사주라고 할 때 어찌하겠는가 하는 물음이 없을 수가 없다.
일방적으로 그들만이 필요로 하여 한일터널이 뚫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런데 무엇이 답답하여 우리 스스로가 나서 터널을 뚫겠다는 것인지 그 발상자체가 친일세력들에 의한 음모에 의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일본보다 우리에게 무슨 더 많은 이득이 있어 국민정서는 아랑곳 하지 않고 우리가 나서 한일터널을 뚫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이처럼 앞장서 한일터널 뚫기 분위기를 띄우는 것은 한국내 불손한 친일파 음모세력들이 갑자기 준동하면서 전면에 나섰기 때문일 것이다.
본 모습은 감춘체 어떤 세력의 지시에 따라 준동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면이 있고 그들의 본질 즉 검은 속셈을 의도적으로 숨기고 마치 세계글로벌평화주의자들인 것처럼 행세하고 위장하여 100년전처럼 나라전체를 일본 군국주의자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고자 하는 음모가 분명 도사리고 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이러한 행위가 과거 매국노인 이완용, 송병준이 한짓과 무엇이 다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훗날 정말 꼭 터널이 필요하다면 우리가 일본전체를 접수하고 완벽한 해원을 한 연후에 우리 스스로가 결정하고 진척시켜야 할 문제임을 분명히 밝혀두는 바이다.
결론적으로 해저터널을 아무렇지도 않게 뚫어 일본인들을 우리 영토로 몰려들게 할 정도로 일본과맺힌 한은 아직 풀어지지 않았으며 해원이 안 되었음을 분명히 지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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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되 갚아야 할 해원[解寃]-을미사변 The Eulmi Incident
http://blog.daum.net/han0114/17045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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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외교관이 증언하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일본 내부서 고발이 있음에도 시해범들 무혐의 판결 내려"
"조선인들이 시해하도록 음모..명성황후 시신 비참하게 처리돼"
관련기사 정확히 115년전 오늘. 명성황후가 일본인의 손에 의해 살해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 정확한 사건과 경위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분분한 가운데, 우치다 사다즈치(內田定槌)의 회고록 '부임지 주요사건 회고'에는 명성왕후 시해를 주도한 일본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공사가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고 한 사실이 생생히 기록돼있다. 또 일본측이 이번 사건을 '조선인이 주도한 살해사건'으로 가장하기 위해 대원군을 앞세워 왕성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대원군이 주저했다는 내용과 일본으로 소환된 시해사건 가담자들이 무죄로 방면된 과정도 담겨있다.
1865년 후쿠오카(福岡縣) 코쿠라(小倉)에서 태어난 우치다는 1889년 외무성에 입부한 외교관으로, 1893년부터 영사의 신분으로 경성에 근무했다. 우치다는 1939년(소화 14년) 작성한 회고록에서 "재임 중 나의 경험 가운데, 세상에 그다지 알려지지도 않았고 또한 후세에 역사로 남지도 않을 것 같은 일이 있는 바, 이에 관한 기억들을 적어보려 한다"고 밝혔다.
◇ 미우라 공사의 은폐시도 = 1895년 10월8일 새벽. 영사관에서 지내던 우치다는 총성에 잠을 깼다. 피묻은 칼을 든 무리들이 "어젯밤 궁에 침입해 왕비를 죽였다"고 보고하는 모습을 보게된다.
곤혹스러워진 우치다는 공사를 만나면 사건의 전모를 알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 공사의 방으로 달려갔는데, 공사는 방에서 등불을 밝힌 채 절을 하고 있었다. "시끄러운 일이 발생했다"고 보고하자 미우라 공사는 "조선도 드디어 일본의 것이 됐다. 이제 안심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미 조선인은 물론 외국인들도 일본인이 피묻은 칼을 듣고 대낮에 거리를 걷고 있는 모습을 본 상황이었다. '일본인이 이 사변에 관계한 것을 숨길 수 없다'며 어떤 방법을 강구하면 좋겠느냐고 묻자 공사는 '나도 지금 그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느긋한 모습을 보이던 미우라도 사실을 알고 달려온 러시아 공사가 다녀간 뒤에는 걱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외무성에 이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본국에 전보를 치려한다. 그러나 이미 전신은 공사관의 명령으로 금지돼 있었다. 결국 영사관보인 호리구치(堀口)에게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설득해 이같은 사실을 일본 정부에 보고토록 했다.
◇ 대원군 사건당일 밤 주저, 비참한 명성황후 시신처리 과정 = 나중에 사건의 전모를 알아보니까 사건을 꾸민 이들은 '국왕의 부친이자 왕비와는 견원지간인 대원군'을 끌어들이는 게 좋다고 판단 하에 대원군을 끌어들이는 계획을 세운다. 이에 직접 호리구치가 대원군의 집으로 가 필담(筆談)을 나누며 그의 동의를 얻어낸다.
이들은 한밤중에 일본 병사와 경찰관이 대원군을 선두에 세우고 궁에 들어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도록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사건당일 밤이 되자 대원군이 주저한다. 호리구치가 직접 저택에 가서 대원군을 재촉해보지만 꾸물거리는 이미 날이 밝기 시작한다. 결국 대원군을 억지로 끌어내 궁으로 향하지만, 이들이 궁에 도착했을 때 호위병들이 발포해 저항했다고 회고록은 전한다.
일당들은 이를 물리치고 궁안으로 들어가지만 궁녀들이 많이 누워있어 누가 왕비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다만 다른 여자들의 비호 속에 도망가는 여인이 있어, 그가 왕비라고 생각해 살해한다.
사체 처리 과정도 잔혹했다. 명성황후의 사체는 처음에 뜰 안의 우물에 던져졌다. 그러다 죄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한 일당들은 다시 궁 안의 소나무가 많은 벌판에서 석유를 뿌려 태웠다고 한다. 그러고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이튿날 사체를 연못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좀처럼 가라앉지 않자 다시 꺼내 소나무 벌판 가운데에 묻었다고 전한다.
◇ 범인들의 무죄 판결 = 미우라 공사로부터 '어젯 밤 왕성에서 변이 있어 왕비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보고만 받았던 일본 측은 호리구치의 보고서로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게 된다. 깜짝 놀라 수습책을 마련하기 위해 코무라(小村) 정무국장이 직접 조선으로 건너온다.
코무라 국장은 이 사건은 일본에서 처분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관계자들을 모두 일본으로 보낸다. 직접 사건과 관계된 민간인 47명을 일일이 불러 조선 퇴거명령을 전달했는데, 이들은 모두 크게 감사를 표하며 기뻐했다고 전한다. 일본에 도착한 이들은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되지만 모두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난다. 왕비 살해자는 조선인으로 결정돼 이미 사형에 처해졌으므로 일본 재판소가 사건을 심리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회고록을 입수한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은 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직접 지휘한 미우라가 사건을 감추려 하지만 우치다의 보고로 본국에서도 알게됐다"면서 "그럼에도 일본은 이들을 재판에서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판결을 내렸다"고 말했다. 최 원장은 이어 "일본 외교관이 내부에서 고발한 구체적 이야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판결을 내린 것은 일본의 파렴치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은 "당시 우치다가 지방출장 중이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의 성향 때문에 미우라가 그를 아예 계획에서 빼버렸다"면서 "우치다는 동학농민운동에 관한 현지 조사 보고서도 작성하는 등 재조선 일본 공사관 내에서도 양심적으로 일을 하려는 인물에 속한다"고 평가했다.(서울=연합뉴스) 김연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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