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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완벽하게 풀어 낼 수 있도로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이야기다.
반도역사는 이를 한반도로 한정하여 사건을 꾸민 것이라고 할 때 실제 대륙조선의 영역은 거대한 세계를 가름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맞다.
물론 아메리카대륙도 포함 된 상황 설명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청일간에 동아시아계 충돌은 지나대륙을 한정한 것이라고 풀이 할 수 있다.
기존 사학계는 근세기 청일전쟁이 발발된 이유에서 한반도에서의 권리를 서로 선점하면서 이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선은 대륙과 한반도를 포괄하는 위치에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즉 한반도만을 전제로 한 전쟁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다.
다시 말해 조선을 두고 지들끼리 힘겨루기 한 것은 맞는데 조선은 중국으로서 존재한 것에 반에 청과 일본은 신생국이나 다름없는 군벌이었으며 결국 군벌 간 치열한 영역 다툼으로 보아야 하고 조선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서로 선점하거나 강탈하기 위하여 벌린 음모와의 전쟁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즉 대륙조선의 지배층 입장에서 역사적으로 맥을 같이 하던 북만군벌인 북청군벌을 앞세우는 대신 서세에 붙어 사사건건 대륙조선 지배층을 와해하려 드는 것을 경계하며 가까이 하지 않던 왜구무사집단 즉 일본군벌(대륙조선의 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던 세력: 명치정권)간 경쟁으로 결국 서세의 힘에 밀리며 쇠락하던 대륙조선 지위와 영역 쟁탈전으로 신생 군벌간의 세력다툼이라고 해야 맞다.
이같은 것이기에 청도 일본도 같은 맥락에서 쇠락하던 대륙조선의 영역을 서로 탈취 대륙조선의 기득권을 서로 나눠가지려는 심보는 똑 같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전쟁을 종교면에서 볼 수 있는데 동양 즉 대륙조선 영역에서 일어난 대치되는 종교전쟁으로 볼 수 있다.
청은 이슬람세력일 가능성이 많고 일본군벌은 서세예수회 즉 기독교를 바탕으로 서세를 대변하고 서세의 힘을 빌어 세력 확보차원에서 치룬 충돌이라고 추리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분석한 결과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조선이 한반도만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중앙아시아와 대륙전반을 포괄하는 것으로 중국으로 존재했음을 여러가지 자료에서도 발견 할 수 있게 한다.
청일전쟁은 이러한 조선을 두고 일어난 군벌간의 전쟁이다.
아니 서양자료에는 전쟁이 아니라 그냥 충돌이라고 하고 있다.
지금에서 와서 크게 부풀려 전쟁이라고 하는 점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된다.
황해에서 벌어진 군벌간 충돌인 것이다.
황해가 어딜까?
황해가 지금 대륙과 한반도 사이에 바다일까?
아닐 가능성이 99%이다.
그러면 어딜까?
미안마 북부, 운남과 사천성 상류에는 바다 해를 붙일 만한 강도 허다하다.
특히 살윈강 뿐만아니라 베트남 북부 홍강과 메콩강 삼각주 델타지역은 비가오거나 큰물이 지면 누런 황토색 강흐름이 황하강과 다를 바가 없다.
또한 북아메리카대륙까지 포함한다면 콜로라도강과 미시시피강도 포함된다.
어딘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만약 북아메리카대륙이라면 인물들이 동양인에서 서양인으로 바꼈야 된다.
동남아시아라는 틀이라면 일본 정치무사집단들이 동양계 청정부와 충돌한 것이다.
특이한 것은 청일전쟁에서 모두 시각적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그림이거나 삽화이다.
실체를 확인 할 수 없는 것이다.
분명 한반도와 지금의 북경을 중심으로 한 다툼이 아니라 대륙서쪽 중앙아시아 중심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과정과 양자강 이남 대륙남부영역을 서로 나눠 가지려고 한 다툼이거나 아니면 북아메리카대륙어디에서 벌어진 것을 다르게 꾸민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충돌정도를 크게 확대 재생산시킬 수도 있다.
또 하나 1882년 이후 신대륙에서 신중국이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곳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충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신생국 일본은 이 다툼에서 이겨 공식적으로 취한 대만을 근거로 하여 결국 열도에 국가적 기반을 다졌던 것이 아닌가 추측되는 점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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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First Sino-Japanese War) 이 주는 혼란
일시: 1894년 7월 25일 첫 전투 8월 1일 선전포고~1895년 4월 17일
장소: 만주와 한반도, 대만, 황해 일대
결과: 일본군 승리, 시모노세키 조약
교전국 | |
청나라 |
일본 |
지휘관 | |
광서제 |
메이지 천황 |
병력 | |
63만 |
24만 |
피해상황 | |
35,000 dead or wounded |
16,823 dead, 3,973 wounded
|
청일 전쟁(淸日戰爭)은 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인 전쟁이다. 중국에서는 갑오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중일갑오전쟁(中日甲午战争/中日甲午戰爭), 일본에서는 일청전쟁(日清戦争), 서양에서는 제1차 중일전쟁(First Sino-Japanese War)이라고도 부른다.
청일전쟁은 청나라의 퇴보와 무력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양무운동의 한계를 보여준 전쟁이었으며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화가 중국의 양무운동에 비해 성공적이었음을 증명하였다.
朝鮮人兵士와 中国人捕虜
8月26日、日本は、影響下におく朝鮮と大日本大朝鮮両国盟約を締結した。朝鮮は、日清戦争を「朝鮮の独立のためのもの」(第一条)とした同盟約にもとづき、国内での日本軍の移動や物資の調達など、日本の戦争遂行を支援し、また自らも出兵することとなった
8월 26일, 영향하에 두고자 하는 조선과 両国盟約을 체결한 일본은, 청일 전쟁을 「조선의 독립을 위한 것」(제1조)로 한 동맹조약에 의거하여, 조선에서의 일본군의 이동이나 물자의 조달 등, 일본의 전쟁수행을 지원하고 스스로도 출병하게 하였다.
조선인 병사와 중국인 포로라고 하는 일본자료의 사진이다. 청일전쟁당시 조선이 중국 즉 청과 전쟁을 하여 포로를 만들었다는 것인데 포로가 된 청 병사는 분명 변발(辮髮)을 했다.
편발(編髮) : 청(淸)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경우 머리 둘레를 깎아 내고 윗머리에만 남긴 머리털을 땋아 길게 등 뒤로 늘어뜨린 모양인데, 서양 사람들은 피그테일(pigtail)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청일전쟁 때 동원된 청나라 군인들이 변발이 아니라 모두 터번을 쓰고 있다.
웬일일까?
청이 지금의 동북삼성 신만주를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중앙아시아 구만주를 근거로 하면서 인도북부, 대륙남방 사천, 운남, 귀주 등 이슬람세력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 대목이다.
결국 평양성이 그곳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예수교 와 기독교를 근거로 한 왜구무사집단 정권과 이슬람 즉 회교를 기반으로 하는 청의 군벌과의 세력다툼이라고 보여지는 사진이다.
모든 자료에서는 지금 한반도와 동북삼성, 요동반도, 산둥반도등을 전쟁지역으로 한다고 하고 있지만 다툼의 개념으로 볼 때 대륙서쪽으로 부터 대륙남방지역 근거로 한 전쟁이 아닌가 하고 평양성도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터번을 쓴 사람들(회교, 이슬람인)이 있는 곳에 평양성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터번 (turban) : 중근동을 중심으로 남자 이슬람교도들이 머리에 쓰는 수건. 터번스카프 라고도 한다. 긴 천 또는 네모난 천을 머리에 직접 두르거나 반구(半球)모양의 모자 위에 감기도 한다. 주로 길이 5∼7m 정도의 명주·무명·모직·삼베 등의 얇은 천을 사용하며 빛깔이나 감는 방법에 따라서 사회적 지위·직업·민족 등이 구별 된다.
성환과 평양의 전투
친일내각으로부터 청나라 군대를 몰아낼 권한을 부여받은 오오시마 요시마사는 약 4,000명의 일본 여단을 이끌고 한양에서 아산만까지 이동하여 아산과 성환(현재의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에 주둔한 3,500명의 청나라 군대와 대치하였다.
1894년 7월 28일, 양측 군대는 아산 외곽에서 다음날 아침까지 전투를 벌였다. 청나라 군대는 점차로 병력을 잃어 평양으로 후퇴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사상자는 500명에 달하였으나, 일본군 측은 82명에 불과했다.
8월 1일에는 공식적으로 청나라와 일본 간에 전쟁이 선포되었다.
8월 4일 이전에 조선에 남은 청나라의 병력들은 평양으로 철수하였고, 청나라로부터 파견된 병력과 합류하였다. 13,000~15,000명의 수비군은 일본군을 저지할 것을 기대하면서 대대적으로 전투에 대비하였다.
1894년 9월 15일, 일본군은 여러 경로로 평양에 모여들었다. 일본군은 평양을 습격하여 청나라 군대를 항복시켰다. 어쨌든, 폭우와 어둠을 이용하여 잔존 병력은 평양을 빠져나와 의주로 향했다. 청나라 군대는 사망자 2,000명에 부상자가 4,000명에 달했으며, 일본군은 5 ~6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은 1894년 9월 16일 아침, 평양에 입성하였다. 평양 전투 이후로 일본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였고, 조선의 물자와 노동력이 일본군에 제공되었다. 이로부터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다
1894년 평양 전투, 판화
垓字(護城溝)
구(沟, 溝)자연적으로 형성되었거나 인공으로 판 도랑. 개천.
半島史는 불신의 역사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半島史는 우리민족에게 음양으로 말할 수 없는 폐해를 주었으며 결국 기존 사실적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신뢰 할 수 없게 하였으며 믿음을 가질 수 없도록 만들었다.
위는 평양성 공격 삽화인데 일제 어용 화가가 일부러 성문과 성문사이를 좁혀 그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그린 삽화라면 성문과 성문사이 길이가 대체적으로 50~60미터정도의 길이 일 것 같다.
그래서 언뜻 보면 꼭 대동강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분명 성(城) 가장자리를 파 놓은 해자(垓字) 즉 호성구(護城溝), 호성하(護城河)를 건너는 삽화이다.
평양성이라고 하는 곳은 과연 어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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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년표
1894년
3월 東学党、朝鮮全羅道에서 봉기(갑오농민전쟁)
5월27일이나 28일 스기무라 후카시주아사시로 사토시 (杉村濬)공사, 조선이 군사를 시나(支那)에 빌리려 움직임 있음으로 통보
5월31일 朝鮮政府, 청에의 援兵을 결의. 伊藤内閣, 내각 탄핵 上奏決議案이 가결되어 난국에 직면
6월01일 동학농민군이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 조정에 반란군의 진압을 요청하였다. 스기무라주아사시로 사토시(杉村濬)공사, 袁世凱에게 조선정부는 청의 원군을 청할 수 있다고 전보
6월02일 伊藤内閣, 중의원 해산과 공사관·거류민 보호를 위한 朝鮮出兵을 각의 결정
6월04일 清北洋大臣李鴻章, 한국 출병을 지령
6월05일 参謀本部内에 大本営을 설치(형식상 전시에 이행)
6월06일 天津条約에 근거하여, 청이 일본에 한국 출병을 통고(약 2,460여 명의 청나라 군대)
6월07일 동조약에 근거해, 일본도 청에 한국 출병을 통고 (이후, 청일양군이 조선에 상륙함과 함께, 清日間와 朝日間의 교섭, 적극적으로 영국과 러시아가 調停을 한다. )
6월08일 조선과 청나라는 항의하였으나 약 4,500명의 일본 군대가 제물포에 상륙
6월11일 동학농민운동이 종료되었다.
6월13일 일본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이 기회를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할 기회로 판단하였고, 조선에서의 일본군의 지휘를 담당한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공사에 가능하면 오랫동안 조선에 남을 것을 전달하였다.
6월22일 일본으로부터의 추가 병력이 조선에 도착하였다.
7월03일 오토리 공사가 조선의 정치 체제를 바꿀 것을 제안하였으나, 보수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7월07일 청나라 주재 영국 대사에 의해 청나라와 일본 간의 중재가 있었으나 결렬되었다.
7월16일 英日通商航海条約의 조인(영사 재판권 철폐를 달성)清、軍機処등의 합동 회의에서 開戦自重을 결론으로 하고 18일에 上奏
7월19일 일본 해군의 거의 모든 선박으로 구성된 일본의 연합함대가 전쟁에 대비하여 구성되었다.
7월20일 大鳥駐朝公使, 조선 정부에 대해서 최후통첩(회답 기한 22일)
7월23일 日本軍、朝鮮王宮을 점령. 일본 측의 압력으로,
7월23일 일본군이 한양에 진입, 경복궁을 점령하여 새로운 친일 내각(대원군이 国政総裁로 취임)구성하였다. 새 내각은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일본군에 청나라 북양군을 조선에서 몰아내도록 허가하였다.
7월25일 대원군, 청과의 宗藩関係解消를 선언하고, 大鳥駐朝公使에 아산의 청군철수를 의뢰. 豊島沖海戦-고승호사건(高陞号事件)
7월29-30일 일본의 混成旅団, 청군의 주둔 하는 성환(成歓)과 아산(牙山)을 점령
8월01일 清日両国, 서로 선전포고
8월05일 大本営, 참모본부 내에서 궁중으로 옮긴다.
9월13일 大本営, 전쟁 지도를 위해서(때문에) 広島移転(히로시마 大본영)
9월15일 메이지천황, 히로시마에 들어간다. 平壌攻略戦
9월17일 黄海海戦. 그 결과, 일본이 해상권을 거의 장악
9월19일 李鴻章, 持久戦(서양 열강의 개입을 기대) 등을 上奏
10월24일 第一軍、鴨緑江渡河를 개시. 제2군, 요동 반도 상륙을 개시
11월21일 第二軍、旅順口를 점령. 그 후, 旅順虐殺事件이 발생
1895年
2월01일 히로시마広島에서 第一次講和会議(다음날, 일본이 委任状不備를 이유로 교섭 거절)
2월중순 陸海軍共同의 山東作戦完了. 일본이 해상권을 완전하게 장악
3월초순 第一軍、遼河平原作戦完了. 일본이 요동 반도 전역을 점령
3월16일 제2기 작전(청과의 直隷決戦)이기 때문에, 小松宮彰仁親王가 征清大総督任.
3월19일 講和全権의 이홍장, 門司 도착 다음날부터 시모노세키(下関)에서 교섭
3월24일 이홍장, 壮士에게 저격 된다(일본, 조건을 완화하고 강화를 서두른다).
3월30일 清日休戦条約(21일간)의 조인
4월17일 清日講和条約의 조인(5월 8일, 발효)
4월23일 일·러시아·프랑스·독일, 청에게(清への) 遼東半島返還을 요구(삼국 간섭)
5월04일 伊藤内閣, 遼東半島返還을 閣議決定
5월05일 日本이 三国에 요동 반도 반환을 전한다.
5월29일 일본군, 할양 된 台湾에 상륙을 개시
5월30일 明治天皇, 히로시마에서 토쿄로 환행
8월06일 台湾総督府条例에 의하여, 대만에서 군정시행.
10월08일 朝鮮으로 乙未事変(閔妃暗殺事件) 발생
11월08일 청과 遼東還付条約을 체결
11월18일 台湾総督, 大本営에 섬 전체 평정을 보고
1896년
2월 조선에서 親露派의 쿠데타가 성공(露館播遷), 일본이 정치적으로 후퇴
3월31일 台湾総督府条例公布에 의해, 군정으로부터 다시 민정으로 이행
4월01일 大本営 解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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