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라이, 고려연합(Unite Corea)국가였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6399
인도 아유타국, 아리랑과 타밀민요 탈라뚜(Thalaattu)
http://blog.daum.net/han0114/17049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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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게르만민족대이동을 촉발시키며 로마를 멸망케 한 훈족의 발상지가 서양 사학자들이 스스로 고구려라고 하였는데 그 고구려의 터전이 지금 한반도가 아닌 유럽과 가까운 유라시아 지역이었다면 지금의 세계사는 어떤식으로 그려졌을지가 궁금해진다.
훈족의 발상지가 유라시아가 아니라 한반도였다고 기정 사실화한 것은 그들의 역사 우월성에 상처를 주지 않고 근세기 역사전쟁에서 승리한 전리품으로 처리되었다고 보인다.
근세기(1881년)까지 그 고구려 후신이고 United corea 즉 코라이(korai)라고 하는 다민족연합체의 강력한 제국의 승계국인 대륙조선이 유라시아 뿐만 아니라 알레스카 아메리카북부를 포함한 시베리아전역, 인도 북부를 포함한 중앙아시아, 그리고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전역, 그리고 아프리카북부까지 포괄하는 엄청난 영역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지배한 것이 사실이라면 근세기 이후 역사전쟁에서 승리한 서세 입장에서 그러한 역사사실을 은폐하지 않고 그대로 노출하였겠는가 하는 부분에서 근세기 역사 상황을 보았을 때 크게 장담할 수 없어진다.
어쩌면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러시아가 근세기에 차지한 영역 모두가 코라이영역일 수도 있다.
심지어 남양성을 볼 수 있는 호주, 뉴질랜드까지 우리 역사의 족적이 묻어있다.
동남아에 근거를 둔 근세기 신생국인 일본이 열도를 차지하는 역사 수수께끼.
호주대륙 뿐만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이 콜롬버스가 발견하기 전까지 어떠한 역사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토착민 인디안만이 존재하였다는 사실.
근세기 역사는 무엇인가 엄청난 근원을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한반도역사만 알고 있는 우리에겐 애초부터 풀 수 없는 너무 난해한 퍼즐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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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1881년에 무슨 중대한 국변이 일어났을까?
1882년 미국에서 발행한 Asia history corea 편에서 보면 united corea(고려연합), or korai 960-1392 이라 하였고 modern cho-sen(조선) 1392-1881로 년대를 정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현대 조선이 1881년에 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881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878년(AD) 제2차 아프간전쟁(~1880) 시작.
1879년(AD) 강수관(講修官) 홍우창(洪祐昌), 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와 원산개항예약 의정서(議定書)에 조인.
1879년(AD) 오키나와 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 현을 설치
1879년(AD) 독일의 보호관세법 성립.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이집트의 이스마일 파샤 파면.
1880년(AD) 영국에서 제2차 글래드스턴 내각(~1885) 성립. 프랑스에서 주르 페리 내각(~1881) 성립. 아일랜드에서 폭동 일어남.
1880년(AD) 김홍집(金弘集)을 일본수신사(日本修信使)에 임명. 원산에 일본영사관개관. 하나부사, 일본국왕의 친서(親書) 고종에게 전달. 삼군부(三軍府)폐지하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동경대전(東經大典)》등 출간. 지석영, 종두(種痘)실시.
1880년(AD) 중국, 독일과 수호조약 체결. 미국과도 이민조약 체결. 이홍장이 북양해군(北洋海軍)을 창설.
1881년(AD) 박정양(朴定陽)등 10여명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에 임명. 별기군(別技軍)을 두고 신식군사훈련을 실시.
1881년(AD) 인도 최초의 공장법(工場法)입법. 중국, 동태후사망. 상하이~톈진 간에 전신 개통.
1881년(AD)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 암살되고 3세 즉위(~1894). 독일˙오스트리아˙러시아의 삼제동맹 새로이체결(~1887). 세르비아˙오스트리아 간 비밀 동맹조약 체결. 프랑스, 튀니지 획득. 이집트에서 아라비파샤의 민족운동.
1882년(AD) 세르비아 제후국이 왕국이 됨.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3국동맹 체결. 이탈리아, 에리트레아를 획득. 이집트 문제로 콘스탄티노플에서 열국회의 개최. 다임러가 자동차를 발명. 미국에서 록펠러에 의해 석유 트러스트 성립.
1882년(AD) 조미(朝美)수호조규˙조영(朝英)수호조규 조인. 원산˙부산˙인천 개항. 5월, 조독(朝獨)수호통상조약 조인. 군인들, 급료 체불과 급여양곡의 변질˙정량부족 등에 격분, 난동임오군란(壬午軍亂). 대원군 원군으로 들어온 청군에 의해 납치, 청국으로 호송. 7월 제물포조약 및 수호조규속약(修好條規續約)체결. 박영효(朴泳孝)를 일본 특사겸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선중에서 태극기를 고안).
1883년(AD) 베트남전쟁 종결, 안남(安南)은 프랑스 보호령이 됨. 전인도국민협의회 개최. 수마트라 중부에서 유전(油田)채굴 시작.
1883년(AD) 태극기를 국기로 정함. 당오전(當五錢)을 주조. 초대 미국공사로 푸트 착임, 수호조규(修好條規)를 비준˙교환. 기기국(機器局; 군수공장)을 새로 설치. 최초로 영어교육 실시. 조영(朝英)수호통상 조약, 조독(朝獨)수호통상조약 조인.
그렇다면 1881년 전후로 하여 연대표를 보면서 한번 따져보자.
영국-아프가니스탄전쟁
영국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에 3회에 걸쳐 일어난 전쟁(1838∼1842, 1878∼1880, 1919). 아프간전쟁이라고도 한다. 인도 지배국인 영국은 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인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인도 보전을 위한 방벽으로서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하려고 1838년 10월 심라선언을 발표해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했다. 다음해 영국군은 칸다하르를 지나 카불로 진격했다. 그러나 주류군(駐留軍)에 대한 게릴라활동이 빈발하여, 1842년 1월 철수하던 영국군은 아프간 여러 부족의 공격을 받아 무너졌다. 이것이 제1차영국-아프가니스탄전쟁이다. 1878년 영국은 다시 제2차전쟁을 일으켰으며, 다음해 간다마크조약을 맺어 아프가니스탄의 외교권을 장악하고 1880년 영국군대는 카불에서 철수했다. 1919년 5월 제1차세계대전후 영국의 피폐와 인도의 불안정에 편승해서 이번에는 아프가니스탄이 인도를 공격했다. 이것이 제3차전쟁으로, 같은 해 8월 라발핀디조약이 체결되자 아프가니스탄은 외교권을 회복하고 독립했다.[파란사전]
한반도 조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인도북부,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및 신강지역, 운남지역, 양자강 이북지역 모두가 대륙조선의 강역이라고 생각해보자.
만약 인도남부 뿐만아니라 인도 북부 역시 대륙조선 강역이었다면 그래서 인도를 영국에게 빼앗기고 다시 아프가니스탄까지 유린 당한 것이라면 위 기록에서 나온 것처럼 1881년 모던 조선이 끝났다고 이해 할 수 있어진다.
그리고 북쪽으론 러시아가 지속적으로 대륙조선을 압박하였을 것이고 북진하는 영국에 맞서 러시아가 조선을 대신 영국과 직접적으로 전쟁까지 치루면서 영역을 확보하였다면 이해 할 수 있어진다.
그렇다면 위 연대표가 가르치는 1878년부터 시작된 제2차 영국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바로 대륙조선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이라고 쉽게 이해가 가능하다.
어차피 연대표는 대륙조선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고 할 때 의도적으로 중국조선과 한반도조선을 분리하려 하였을 것이고 조작된 것이라고 보아야 맞다.
동일한 사건을 시차를 두고 연대표를 작성하고 사건을 꿰 맞추었다는 사실도 바로 볼 필요가 있다.
모던(motern)조선이 1881년에 끝이 났는데 난데없이 1883년에 군수공장(機器局)을 만든 연유가 어디에 있는지 군수공장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군벌 이홍장은 1863년 상해기기국(機器局)을 만들었고 1867년 양무운동으로 강남기기국(機器局)을 설립하였다. 혹 이홍장의 기기국과 연결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조선이 중국이라고 할 때 1880년에 이미 독일과 수호조약을 체결하였는데 1882년에 또 다시 한반도조선과 독일은 수호조약을 체결한다. 한반도조선은 이때 독일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과도 조약을 맺는다.
그리고 한반도 원산, 부산, 인천을 개항한다.
이것은 조선이 서세를 대표하는 영국에게 중앙아시아 땅을 빼앗기면서 사실상 지배권을 상실한 입장에서 조선의 의사와 상관없이 1882년부터 서세들과 수호조약을 맺게 되는데 지금의 중국과 분리하기 위하여 년도와 날짜를 달리 하였다고 볼 수 있어진다.
물론 이것은 추측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많다.
중국이라고 하는 문제에서도 청나라가 중국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맞지 않는다.
조선실록에서 고종이 직접 중국이라고 하지 않고 청나라라고 지칭한데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청이 중국이라 한 것은 역사짜집기 세력들이 중국조선 대륙조선을 감추기 위한 것은 아닐까 한다.
이때는 중국이란 용어가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던 시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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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헌(黃遵憲)의 1880년에 저술한《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은 주변정세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저서이다. 그러나 이 저서에는 이상하게 영국을 말하지 않고 있다.
만약 1881년 예수회 서세(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의해서 대조선이 망하게 되었다면 결국 대조선의 영역인 인도북부, 서남아시아, 유라시아, 중앙아시아 서쪽영역 대부분을 내준 형편에서 남아 있는 대륙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나름대로 설파한 것이라고 보여지는데 私擬朝鮮策略이란 남모르게 비밀스럽게 조선책략을 세운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황준헌은 대조선과 대륙조선과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황준헌이 태어난 곳이 광동성 가응주(廣東嘉應州) 지금 中國廣東省梅州市이다.
1895년 호남안찰사(湖南按察使)까지 하였다는 것을 보면 분명 대륙조선 신하임에 틀림이 없다.
고종18권, 18년(1881) 2월 26일(무오)
이만손 등 만 명이 연명으로 《사의조선책략》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다
“朝鮮今日急務, 莫先於防俄。 而防俄之策, 莫先於親中國、結日本、聯美國。”
‘조선의 오늘날 급선무는 러시아를 방어하는 것보다 우선시되는 것이 없는데, 러시아를 방어하는 대책으로는 중국과 친교를 맺고 일본과 결속하고 미국과 연합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라고 하였다.
중국이 청나라인가?
그렇다면 왜 고종을 이어 순종까지 조선왕조실록에 중국이라고 하지 않고 청나라라 하였을까?
결코 중국은 청나라가 아님을 알 수 있다.
夫中國者, 我之所稱藩也, 信義交孚, 殆過二百年之久。 而一朝曰‘皇’, 曰‘朕’, 偃然二尊之稱, 無辭以受之, 容其人而留其書, 萬一執此爲詰, 致煩嘖舌, 則將何以解之也?
이에 영남유생 이만손 등 만 명이 연명으로 《사의조선책략》을 비판하는 상소하기를
중국으로 말하면 우리가 번국(藩國)으로 자처해 왔고 신의(信義)로 교류한 지 거의 200년의 오랜 시일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황제(皇帝)’요, ‘짐(朕)’이요 하면서 두 존칭(尊稱)을 태연하게 사양하지 않고 받으며 그런 말을 한 사람을 용납하고 그런 사람의 글을 받아두었다가 만일 중국에서 이것을 가지고 따지면서 시끄럽게 떠든다면 무슨 말로 해명하겠습니까?
日本者, 我之所羈縻也, 關隘險夷, 渠已稔知, 水陸要衝, 渠已占據, 萬一瞰我無備, 恣其豕突, 則將何以制之也? 美國者, 我之所素昧也。 公然被他慫慂, 自我引惹, 駕風濤涉重險, 疲弊我臣僚, 尾閭我財賄, 萬一覘我之虛, 侮我之弱。 强以難從之請, 委以不繼之費, 則將何以應之也? 俄夷者, 我之本無嫌也。 空然信人間貳, 損我威重, 靠遠交而挑近隣, 擧措顚倒。 虛聲先播, 籍此爲釁, 來尋兵端, 則將何以救之也? 又況俄、米、日本同一夷虜, 難置厚薄於其間。 而豆滿一帶疆界又相接, 萬一循日本己行之例, 援美國新設之約, 請地來居, 請貨交榷, 則何以拒之也? 又況薄海內外, 如日本、美國者, 不可殫數。 萬一各自效嚬, 請地請和, 一如日本之爲, 則亦何以遏之也? 不許, 則前功盡棄爲仇, 衆怨叢集爲敵者, 不但俄夷一國而已; 許之, 則一隅靑邱, 將無地可容矣。
일본으로 말하면 우리가 견제해야 할 나라입니다. 국경 요새지의 험준하고 평탄한 지형을 그들이 이미 잘 알고 있으며 수로와 육로의 요충지를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터에 우리의 대비가 없는 것을 엿보고 함부로 돌격한다면 어떻게 막아내겠습니까?
미국으로 말하면 우리가 원래 잘 모르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공공연히 그의 부추김을 받아 우리 스스로 끌어들여서 바다를 건너고 험한 길로 미국에 가서 우리 신료들을 지치게 하고 우리나라의 재물을 썼는데도 만일 그들이 우리나라의 헛점을 알고서 우리가 힘이 약한 것을 업신여겨 따르기 어려운 청으로 강요하고 댈 수 없는 비용을 떠맡긴다면 장차 어떻게 응대하겠습니까?
러시아로 말하면 우리와는 본래 아무런 혐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공연히 남의 이간술에 빠져 우리의 위업을 손상시키면서 먼 나라와 사귀고 이웃 나라를 도발하게 하는 전도된 행동을 하다가 헛소문이 먼저 퍼져 이것을 빌미로 삼아서 병란의 단서를 찾는다면 장차 어떻게 수습하시렵니까?
또 게다가 러시아나 미국, 일본은 모두 같은 오랑캐들이니 후하고 박한 차이를 두기가 어렵고, 러시아는 두만강(豆滿江) 한 줄기로 국경이 맞닿아 있는데 이미 실시한 일본과의 규례를 따르고 새로 맺은 미국과의 조약을 끌어대면서 와서 거주할 땅을 요구하고 물화를 교역하기를 요청하면 장차 어떻게 막겠습니까?
또 더구나 세상에는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나라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각 나라들이 서로 이 일을 본보기로 하여 땅을 요구하고 화친을 청하기를 일본과 같이 한다면 또한 어떻게 막겠습니까? 허락하지 않는다면 지난날의 성과는 다 없어지고 원수가 되며 여러 나라의 원망이 몰려들어 적이 되어버리는 것이 러시아 한 나라에 그치지 않을 것이며, 허락한다면 세계의 한 모퉁이인 청구(靑邱)에 장차 수용할 땅이 없게 될 것입니다.
彼遵憲者自稱中國之産, 而爲日本說客, 爲耶蘇善神, 甘作亂賊之嚆失, 自歸禽獸之同科, 古今天下, 寧有是理? 無乃向時巨魁之漏網者憤於沁都之敗, 而知其不可以兵力取勝, 逞其僥倖稍食之慾, 售其輾轉熏染之奸乎?
저 황준헌이라는 자는 중국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면서도 일본에서 연사(演士)로 행세하고 예수를 믿어 자진하여 사문난적(斯文亂賊)의 앞잡이가 되고 짐승과 같은 무리가 되어 버렸으니, 고금천하(古今天下)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습니까? 혹시 지난날에 법망을 빠져나간 큰 괴수가 강화도의 실패에 분격해서 병력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요행수로 차츰차츰 먹어 들어가려는 욕심을 부려서 점차로 우리를 물들이려는 간계가 아니겠습니까?
黃遵憲(1848.4.27-1905.3.28)字公度,別號人境廬主人,生於廣東嘉應州。晚清詩人,外交家、政治家、教育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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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란 용어은 대조선황제가 존재 한 곳 중원을 두고 확대 해석한 면이 많다.
결코 청나라가 중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아는 중국이란 지칭은 손문이 1928년 북벌과 통일을 완성하여 남경(南京)에 국민정부를 세웠을 때와 1949년에 비로서 모택동이 정부에 의해서 만들어진 단어이다.
대조선을 중국이라고 하였다면 서세에 밀리는 입장에서 1881년 이후 대조선 대신 비정상적으로 만들어진 정치세력 만주군벌을 중국으로 대신하게 된 원인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대조선 중국이 독일, 미국, 영국과 수호된 뒤 2년후 또 다시 수호를 한다는 것은 한반도 조선을 분리하면서 생긴 오류라고 본다.
또한 같은 년도에 청나라 라고 상징되던 이홍장이 북양해군을 창설하게 된다.
이때 들어서야 비로소 이홍장이란 군벌이 생성되었고 북양군벌은 대륙조선을 대신하여 청일전쟁이라고 알려진 세력다툼으로 일본군벌과 충돌한 것이 틀림이 없어보인다.
이 청일전쟁이란 충돌지역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이다.
한반도 조선을 만들기 위해 청일전쟁이 일어난 곳이 한반도라고 하지만 대륙조선에서 세력다툼인 기득권 싸움으로 충돌한 것이다.
청일전쟁을 서양에서 전쟁(war)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군벌끼리의 충돌(collision)이라고 표현 한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1881년(AD) 박정양(朴定陽)등 10여명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에 임명. 별기군(別技軍)을 두고 신식군사훈련을 실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우리나라 야후사전에 조선 고종18년(1881)에 새로운 문물제도의 시찰을 위하여 일본에 파견된 시찰단이로 명시하고 있다.
한어자료에 신사(紳士)는 과거, 지방의 명사(名士).유력 인사. 세도가(勢道家)를 말하는 것이고 일반적으로 지주나 퇴직한 관리를 말하진다. 예를 들어 계명신사(开明绅士)는 봉건 지주계급에 속해 있지만 비교적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계층이라 하여 불렸는데 한어 문장으로 예를 들어보면
他是具有绅士风度的王子 그는 세도가의 풍모를 지닌 왕자다.
他的父亲是这一带有名的绅士 그의 아버지는 이 일대에서 유명한 세도가다. 이렇게 쓰였다.
진보적이란 면을 따져 볼 때 조선 지배계층에서조차 사회적 기풍이 구시대를 청산하고 신시대를 만들자는 식으로 해석되는 것이라면 근세기 역사짜집기세력들이 이러한 기풍을 핑계로 대륙조선을 버리고 한반도조선을 만들자는 내용과 일치 시키려 한 면도 없지 않다.
유람(游览)역시 명승지나 풍경 등을 유람(遊覽)하는 것이다. 라고 사전에 명시하고 있다.
조선유력세도가들이 일본이 그렇듯 자랑하니 그냥 시찰 겸 유람한 것이지 문물을 배우거나 습득하기 위한 시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신식군사훈련을 실시한 별기군(別技軍)은 요사이 사관생도인데 양반집 자제들만을 뽑았다.
1880년(AD) 김홍집(金弘集)을 일본수신사(日本修信使)에 임명. 원산에 일본영사관개관. 하나부사, 일본국왕의 친서(親書) 고종에게 전달. 삼군부(三軍府)폐지하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동경대전(東經大典)》등 출간. 지석영, 종두(種痘)실시.
삼군부(三軍府)조선시대의 군사기관으로 고려 말 이성계가 병권(兵權)을 장악하기 위하여 설치한 삼군총제부(三軍摠制府)를 1393년(태조 2)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개칭 설치하여 정도전(鄭道傳)을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로 임명하여 종래의 십위군(十衛軍)을 중·좌·우군의 3군으로 나누어 귀속시키고 자체의 감독권 및 지휘권도 갖는 최초의 강력한 중앙 군사체제를 갖추었다.
삼군부의 체제는 후에 오위(五衛)체제로 군제(軍制)가 개편되기까지의 중앙부대인 동시에 왕권(王權)과 수도를 방위하는 병력을 지휘·감독하는 최고 군부(軍府)로 군림하게 된다. 1400년(정종2) 중추원(中樞院)에서 관장하던 군무의 일부를 흡수, 삼군부로 개칭하였고, 태종 때 승추부(承樞府)·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등으로 개칭하였다가
1451년(문종1) 삼군은 5위사(五衛司:義興·忠佐·忠武·龍折·虎賁)로 고쳤으며 1466년(세조12)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로 체제가 바뀌었다
그러다가 16세기 중엽에 창설된 비변사가 임진왜란 이후 군사문제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문제를 심의하는 국가의 최고합의기관으로 비대화하여 최고정무기관인 의정부가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를 막고 의정부의 기능을 확대·강화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1865년(고종 2)에 비변사를 의정부에 통합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와 군부를 분립시켜 군사기관인 삼군부를 그해 5월에 복설했다. 즉 훈련도감의 신영, 남영, 마병소(馬兵所)와 5영 가운데 낮 순찰을 담당한 주사소(晝仕所)를 합하여 삼군부라 했다. 삼군부는 군무·숙위문제를 담당하고 변방에 관한 사항까지도 관장했다. 삼군부에는 정1품인 영삼군부사(領三軍府事)·판삼군부사, 행지사(行知事)·동지사 등의 관리를 두었고, 3정승이 도제조를, 병조판서가 제조를 겸임했다. 삼군부는 대원군이 정계에서 밀려난 뒤인 1880년(고종 17)에 폐지되어 통리기무아문에 합쳐졌다가, 1882년 6월 임오군란 직후 다시 설치되었으나 그해 12월에 기무처와 함께 통리군국사무아문에 합쳐졌다.
[두산대백과사전]
통리군국사무아문 [統理軍國事務衙門]
1882년(고종 19) 종래의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을 개편한 것이다. 기구로는 이용(理用)·군무(軍務)·감공(監工)·전선(典選)·농상(農桑)·장내(掌內)·농상(農商) 등 7사(司)를 두었다. 관원으로는 독판(督辦)·협판(協辦)·참의(參議) 등을 두었으며, 독판의 유고시는 수협판(首協辦)이 대행하였다. 갑신정변을 계기로 1884년 의정부(議政府)에 통합되었다.[두산백과사전]
1881년(AD) 박정양(朴定陽)등 10여명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에 임명. 별기군(別技軍)을 두고 신식군사훈련을 실시.
별기군(別技軍)은 조선후기에 두었던 신식군대로서 1881년(고종18)5월 오군영(五軍營)으로부터 신체가 강건(强健)한 80명의 지원자를 특선(特選)하여 이들을 무위영(武衛營)에 소속케 하고, 그 이름을 별기군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중앙에 최초로 창설된 신식군대였다. 교관으로는 서울주재 일본 공사관 소속 공병소위 호리모토레이조[堀本禮造]를 초빙하였고, 다케다[武田勘太郞]를 통역관으로 하여 가르쳤다. 당시 교련소(敎鍊所) 당상(堂上)에는 민영익(閔泳翊;1860~1914)을, 정령관(正領官;대령에 해당)에 한성근(韓聖根), 좌부령관(左副領官;중령에 해당)에 윤웅렬(尹雄烈;1840~1911), 우부령관(右副領官;중령에 해당)에 김노완(金魯莞), 참령관(參領官;소령에 해당)에 우범선(禹範善)을 각각 임명하였다. 하지만 당시 내로라하는 양반집 자제들인 사관생도들은 우범선 참령관이 양반이 아니라 해서 교관을 부를 때 말을 놓아 ‘너’라고 불렀다. 이에 생도들을 모아놓고 “너희가 훈련을 마쳐도 참위(參尉·현재의 소위(少尉))에 불과할진대 월등한 상급자요, 그 더욱 교관으로서 ‘놈’이라 불리는 것은 쓸개 있는 사나이로 참을 수 없는 일이다”고 일장 연설을 하고 옷을 벗어 던지고 빠져 나왔다고 한다. 훈련은 그 해 5월 9일부터 서대문 밖 모화관(慕華館)을 가교장(假敎場)으로 했다가 뒤에 현재 서울 사대부고(師大附高) 자리인 하도감(下都監)으로 옮겨 훈련하였다. 이들 별기군은 급료나 피복 지급 등 모든 대우가 구식군대보다 월등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왜별기(倭別技)라고 꼬집었으며, 이러한 차별대우는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의 유발요인(誘發要因)의 하나가 되었다. 이때 일본인 교관인 호리모토레이조는 하도감훈련장에서 군민들에게 살해되었다. 그리하여 임오군란으로 다시 폐지되고 5군영으로 되돌아갔다.[두산백과사전]
위 내용을 보면 왜별기라 하면서 왜군들에 의해 양성되는 사관생도였고 특권층 자제들이 뽑힌 사관으로서 일반 조선인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고 보인다. 이미 임오군란이 발생되는 시점과 원인으로 따져 볼 때 일본군벌(명치정권)세력에 의해 정예 장교양성까지 지배통제 되었다는 내용이 된다.
이미 나라가 왜 군벌에 흔들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81년(AD) 인도 최초의 공장법(工場法)입법. 중국, 동태후사망. 상하이~톈진 간에 전신 개통.
공장법(工場法)1730년대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으로 기계제조공정의 활성화가 이루어지면서 1802년 영국의 입법을 시초로 각 나라에서 공장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는데 자유주의적 풍조가 만연하는 사회 분위기를 잘 알려주고 있는 대목이다.
1911年에 들어 비로소 조선에 銀行法・工場法이 公布가 된다.
여기서 인도 최초의 공장법을 입법했다고 하는 것은 조선의 공장법일 가능성이 있고 중국 동태후 사망 역시 조선 황실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음모사건일 가능성을 추측할 수 있다.
1881년에 대륙조선 상하이~톈진 간에 전신 개통이 되었다는 기록이다.
이렇게 늘어 놓고 보니 특별한 사건이나 주목할 사건이 없다.
어떻게 된 것인가?
미국은 이미 1881년에 대조선국이 끝났다고 기정사실화한 기록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1880년(AD)년에 김홍집(金弘集)을 일본수신사(日本修信使)에 임명하는 것과 하나부사가 일본국왕의 친서(親書)를 고종에게 전달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 국방부라고 판단되는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하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했다는 사실이 있다.
영국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주는 중요성은 대조선과 연관이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대조선에서 무엇인가 1881년 이전에 주요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대조선이 일거에 흔들리면서 망할 수 밖에 없었던 변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당장 임오군란이라 생각되지만 년대표에는 1882년이라 대조선이 망한 후에 발생하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임오군란 발생년도가 1882년도가 아니라 1881년이 아닌가?
영국과 대전쟁을 치루면서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임오군란은 어찌 보면 쿠데타 성격도 없지않다.
수구파인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항하는 병란으로 배척당한 대원군의 지시를 받았다고 보았을 때 그렇다.
대조선이 망하기 18년전.
철종14년(1863)에 대조선 수도 중심에서 발생한 훈련도감 금위영의 반란사건으로 철종과 그 일족이 몰살한 사건과 연관할 때 이미 그때부터 대조선은 기울고 있었다고 보인다.
그런 형국에 나라가 지탱했다고 하는 자체가 신기 할 다름이다.
제왕과 그 일족이 사라지고 없는데 나라가 존속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통제력을 상실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만약 그 당시까지 동남아시아, 인도북부와 중앙아시아 전역이 대조선의 영역이라고 할 때 시기적으로 분명 남으로는 영국과 북으로는 러시아와 직접적으로 충돌 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영국!
인도를 점령한 근세기 최대 영토를 자랑하던 서세 대표주자이다.
1881년 이후 동남아시아도 프랑스, 영국등이 마수를 뻗이는 시대가 전개된다.
조선은 corean 이라고 지칭할 때와 korea 라고 지칭할 때, 대조선국이라고 할 때와 그냥 조선 또는 대한제국이라고 할 때 각각 주체가 확연히 다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중국이라고 할 수 있는 대조선 또는 대륙조선이라고 할 때와 한반도조선이 갈라지게 하는 상징성이 아닌가도 여겨진다.
임진왜란 이후 왜구무사정치집단세력(왜군벌)들은 대조선의 강력한 보호아래 동남아시아에 근거를 두고 있으면서 조용했지만 19세 후반부터 서세(영국, 프랑스)가 밀려들자 대조선이 흔들리면서 준동하여 동남아시아 근거지에서 벗어나 점차적으로 대륙조선의 영역인 대륙남부(절강, 복건)와 열도로 이동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시기가 1872년 경이라고 보인다.
대만은 1874년 일본인이 살해된 것을 이유로 출병하여 이때부터 대만을 점령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있으며 1879년에는 유구라고 하는 오키나와까지 점령하는 각본이 그림조각처럼 맞아 들어간다.
영국, 프랑스 힘에 밀려 왜구군벌들이 극동쪽으로 이동하던 시기이다.
후 태평양전쟁으로 다시 왜구군벌들은 동남아시아로 회귀하는 전쟁을 치룬다.
마치 연어(Oncorhynchus keta)에게 모천회귀성을 보듯이 그렇게 탄생지를 되돌아가고자 한 전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륙조선영역에서 영국이 거대한 인도를 집어 삼키면서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까지 욕심을 내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러시아는 이러한 어수선한 틈을 타 대륙조선 영역으로 남진하면서 유라시아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5개국을 차례차례 집어 삼키고 있었다면 대륙조선은 영국과 러시아에 밀려 분명 동으로 동으로 쫓겨 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대륙에서 조차 미국에게 패하고 자의 타의(서세, 왜군벌)에 의해서 한반도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참담함이 있었다고 보인다.
여기서 타고르 시가 다시한번 생각난다.[한부울]
타고르와 인디즈(indies 대륙조선?) http://blog.daum.net/han0114/17049852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이란 시 탄생의 진짜내용
이시는 타고르가 일본에 왔을 때 한국의 모 신문사 기자의 부탁으로 쓴 시이다.
타고르는 인도의 시성이다 .
그는 역사학자며 초창기부터 전해 내려오는 흰두교 경전 베다 연구의 거목이며, 철학자며, 교육자며, 정치가며, 외교가였다.
그가 베다를 연구 하다가 발견 한 아리안족의 인도 진입 과정을 읽게 된다.
아라랏 고개를 넘어 검은 바다를 지나 우랄산맥을 넘어 타림분지를 지나 흰두쿠시 산맥을 넘어 왔는 아리안족의 행적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함께 길 떠난 무리의 주류를 추적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일본이라 생각 했는데 한국의 단군 신화를 접하고 베다의 나타난 단군의 나라와의 수많은 교류와 그들의 가르침을 발견하고 그게 한국이라는 사실을 일본에 오기 전에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참으로 힘없고 인구도 얼마 안되는 한국을 창조주가 계획한 숨겨 논 앞날을 바라보면서 그토록 극찬 할 수 있었다 한다.(타고르의 자서전에서 인터넷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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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등불
( 인도의 시인 : 타고르 )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하여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은 곳
무한히 퍼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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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대조선국 우초
1885년 조선 우표
1900년 대한제국 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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