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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살해범 중 조선인 우범선(禹範善)

한부울 2010. 1. 23. 20:21

반드시 되 갚아야 할  해원[解寃]-을미사변 The Eulmi Incident

http://blog.daum.net/han0114/17045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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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살해범 중 조선인 우범선(禹範善)

 

우범선(禹範善, 1857년 ~ 1903년 11월 24일)은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 살해에 가담한 조선 말기의 무관이다.


무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7살 때부터 한학을 배웠고, 1876년 과거 무과 시험에 급제한 뒤 황해도 지역에 배치 받아 근무하다가, 1881년 별기군이 창설되었을 때 여기에 참가하였다. 우범선은 일본의 사주로 창설된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참여하면서부터 일본을 배후로 둔 개화 세력과 가깝게 지냈으며 이로 인해 명성황후의 민씨 척족들과는 대척점에 서서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


1894년 일본군이 민씨 세력을 실각시킨 뒤 개화파가 집권하자 군국기무처에서 갑오경장에 참여했으며, 1895년 일본의 주도로 훈련대가 창설되었을 때 이두황, 이주회 등 친일파 군인들과 함께 대대장을 맡았다.


이 무렵 명성황후의 반일, 친러 노선으로 러시아 세력의 득세가 예상되었고, 이에 반발한 일본 공사인 미우라 고로는 훈련대의 간부들과 함께 명성황후 시해 계획을 세웠다. 우범선은 훈련대 군인 동원의 책임자였으며 명성황후의 소각된 시신을 마지막으로 처리하는 과정에도 가담했다. 그러나 이듬해 아관파천이 일어나면서 친일 김홍집 내각이 몰락했고, 그는 일본으로 피신했다. 도쿄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일본 여자 사카이 나카(酒井ナカ)를 만나 결혼하였다. 당시 미우라 고로가 우범선에 대해 “사람은 좋지만 언제 피살당할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평하였음에도 청혼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결혼 후 1903년 구레(吳)로 이사한 뒤 집들이를 하던 날 다른 사건으로 망명해 있던 고영근에게 암살되었다.


대한민국 농학 발전의 기초를 닦은 유명한 육종학자인 우장춘은 우범선이 도쿄에서 사카이 나카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로서, 우범선과 사카이 나카가 결혼할 때 일본 승려, 회운사 주지승 아라이가 우범선이 피살되면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을 키워주기로 했던 약속대로 키워주게 된다.[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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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 우범선 처단한 애국자 고영근(高永根) 가계


조선 말기의 정치가. 1898년 황국협회의 부회장이 되었으나 황국협회가 수구파(守舊派)의 폭력단체로 전락하자 이를 탈퇴하고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 가담하였다. 그 뒤 독립협회의 총대위원, 만민공동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만민공동회를 대표하여 5적의 재판 회부, 헌의육조(獻議六條) 시행 등을 요구하는 상소를 제출하였다. 1898년 정부가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 대하여 탄압을 가할 때 체포되기도 하였으며, 1899년 최정덕(崔廷德)·현제창(玄濟昶)·윤병길(尹炳吉) 등과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의 복설(復設)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3년 민비시해에 가담한 뒤 아관파천으로 일본에 망명 중이던 우범선(禹範善)을 윤효정(尹孝定)과 협력하여 살해하였다.


(1). 고영근(高永根)에 대하여  알아보니 다음과 같았다.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관리·독립협회회원.


1893년 8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 1898년 7월 중추원의관에 임명되는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898년 보부상들의 단체인 황국협회(皇國協會)에 참여하여 부회장을 지냈으나, 황국협회가 수구파(守舊派)의 폭력단체로 전락한 것을 깨닫고, 이를 탈퇴하여 당시 활발한 민족운동을 벌이고 있던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 가담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에 걸쳐 독립협회의 총대위원(總代委員)으로 선출되었으며, 보부상의 내부사정을 잘 알았으므로,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 파괴를 준비하는 황국협회의 보부상에 대항하기 위하여 만민공동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또한, 이무렵 독립협회에서 선거한 중추원의관 17명 중의 한 사람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개신유학적(改新儒學的)인 전통을 배경으로 하여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에서 발전한 국내사상의 성장에 영향을 받았으며, 독립협회의 부회장 또는 회장대리급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898년 11월부터 12월에 걸쳐 만민공동회를 대표하여 5흉을 재판에 회부할 것, 대신을 가려 쓸 것, 헌의육조(獻議六條)를 시행할 것 등을 요구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제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민권운동이 커다란 호응을 얻는 데 당황한 고종과 수구파 대신들이 1898년 12월 만민공동회의 금지를 명하는 조칙을 내리고 시위대(侍衛隊)와 보부상을 동원하여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 대하여 기습적인 탄압을 가하자, 일본인 집에 피신하여 사태를 관망하다가 한때 잡히기도 하였다. 다음해 1월 만민공동회 대표로서 독립협회를 대표한 윤치호(尹致昊)와 함께 사후대책을 협의하고 그동안의 부채 가운데 일부를 부담하였다. 2월에는 중추원의관에 임명된 지 여러 달이 지나도록 칙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추원의관에서 면직되었다.


같은 해 5월 최정덕(崔廷德)·현제창(玄濟昶)·윤병길(尹炳吉)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의 복설운동(復設運動)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3년 12월 윤효정(尹孝定)과 협력하여, 별기군참령관을 역임하고 민비 살해에 가담하였다가 아관파천으로 일본에 망명 중이던 우범선(禹範善)을 살해하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大韓季年史, 獨立協會沿歷略(獨立協會, 創作과 批評, 1970년 봄호)

獨立協會硏究(愼鏞廈, 一潮閣, 1976). 〈李潤相〉


(2). 고영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나와 닮아서 라고 말을 하면 많은 어폐가 있을줄 알고 있지만 그런 엉뚱함이 내게도 있음을 내가 공감하니 어찌하겠으랴? 그는 어러 곳의 군수를 지냈으며, 한때 차함(실제로 근무하지 아니하고 직함만을 빌리는 벼슬) 으로나마 종 2품 경상좌병사까지 역임했다. 그는 그 당시 그와 유사하게 벼슬하던 많은 사람들이 벼슬에 집착하고 금력에 집착하던 그 어수선하던 한말에 무엇 때문에 만민공동회 회장이 되었던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숨고 도망치고 망명하는 그 아수라장에서 그는 왜 폭열탄소동을 일으키고 결국은 그도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나? 그리고 일본에서 국모시해에 앞장 선 우범선을 살해했고, 일본에서 형을 살다가 풀려나 환국해서 민정식가에 몸을 의탁했다가 고종이 돌아가신 후 홍릉 참봉이 되어 죽기 전까지 능을 지켰던 그를 이곳저곳에서 찬찬히 찾아보았다. 


고영근은 김원우의 <우국의 바다> 에 잘 나타나 있다. 많은 것을 잘 그려주고 있다. 그러나 역시 소설이었다. 이 소설에 대해 추후 소개하겠습니다.


(3). 효봉 스님이 되려는 마음에 스승이 논으로 던진 바늘을 찾던 그 심정만큼은 못하더라도, 고영근의 묘를 어떻게 찾아야 하나 하는 막연한 두려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동안 그 자취의 일부라도 찾아볼 양으로 제주고씨대관에서 묘가 있다고 나오는 수원시 이목동 산자락을 며칠을 헤멨다. 하루는 이 방향, 다음 날은 저 방향, 또 하루는 길도 없는 곳을 헤쳐가며 산을 헤집고 다녔지만 정성이 부족해서 인지 고양근의 묘는 찾지 못하고 돌아선 아픈 기억만 남아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을 뒤적이다 고영근에 관한 많은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 <17권 p147 (39)발제 109호 고영근 신분에 관한 회신> 에 현재 고영근 어머니 집에 같이 살고 있는 사촌 매부 김영진에게 알아낸 사실을 별지 <고영근의 신상명세> 로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從二品 嘉善大夫 蔚山兵使 高永根 本 濟州 (종2품 가선대부 울산병사 고영근 본 제주)

乙卯 三月 二十八日生 生於 朝鮮 京城 西部 夜珠峴 (을묘 3월 28일생 조선 경성 서부 야주현 출생)

父 贈 兵曺參判 重謙 ( 부 증 병조참판 중겸)

祖 贈 承政院 左承旨 景祐 (조부 증 승정원 좌승지 경우)

曾祖 贈 司僕正 應昌 (증조부 증 사역정 응창 * 성창의 착오 기록)

母 延安 金氏 (모 연안 김씨)

凄 光山 金氏 (처 광산 김씨)

子 龍鉉(曾經郡守) (자 용현 증경군수)


고영근을 찾으려고 족보 제주고씨 영곡공파 대동보 10권을 종일 확인 해도 찾을 수 없었던 지난 일은 잊어버리고 이번에는 직계 조상을 기준으로 찾기 시작했었는데, 두 권 정도 확인했는데 그냥 느낌이 좋았다. 점심 약속을 해 둔 상황이고 마음이 급해 마무리를 하고 남은 부분은 다음에 또 시간을 내서 찾을까 고심을 하던 중 머리 속을 맴돌고 있던 이름이 나타났다. 重謙, 景祐 그리고 그때까지 명확치 않던 증조부 盛昌.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원본에 날려 쓴 한자 盛昌을 應昌으로 잘못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중겸의 후손 기록이 나타나 있질 않았다. 즉 고영근이 족보에 나타나질 않았다. 증조부 성창에게서 景昱, 景祐, 景喆 세아들이 있었으며 景昱에게는 泰謙(태겸), 景祐에게는 重謙, 鎭謙(진겸) 까지만 기록 되어 있고 그 이하 후손은 기록이 없었다. 단지 景喆의 아들 壽謙(수겸)의 후손들만 나타나 있었다.


먼저 발행된 족보에서 더 확인하기로 하고, 예전 족보를 확인하던 중 1907년 발행된 제주고씨족보 1-21(제주고씨 족보소편---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古 2518-02-17-1-21)에서  고영근을 찾았다. 자(字)가 윤수(潤秀)였고 호(號)는 해조(海釣)였다. 중시조 말로의 31세손 이었다. 그 내력은 다음과 같다.


말로(末老)-유(維)조기(兆基)-정익(挺益)-적(適)-여림(汝霖)-정간(貞幹)-순(巡)-복수(福壽)-인조(仁朝)-석(碩)-순원(順元)-신걸(臣傑)-지봉(智鳳)-득종(得宗)-태익(台翼)-세영(世英)-윤문(允文)-용(龍)-철손(哲孫)-계천(繼天)-덕창(德昌)-중남(重男)-승립(承立)-전현(傳賢)-도진(道鎭)-한표(漢杓)-성창(盛昌)-경우(景祐)-중겸(重謙)-영근(永根)


이 족보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증조부 성창은 기묘(己卯: 1759년) 10월 25일생이고 병술(丙戌: 1826년) 11월 20일 68세에 돌아가셨고, 부인은 개성 김씨 신사(辛巳: 1761년: 父 繼弘) 생이고 을사(乙巳: 1785년)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에 돌아 가셨다. 둘째 부인은 남평 유씨 정해(丁亥: 1767년:父 大瑩 )생이고  무자(戊子: 1828년) 까지 62세를 사셨다.


장남 경욱(1791-1839)에게서 아들 익겸(益謙: 1814-1888) 무과-숙천부사, 손자 영준(永俊: 1840-?) 무과-내금위장, 증손자 봉현(鳳鉉: 1870-?) 무과-훈련원첨정을 지낸 무인 집안이었다.


둘째인 경우는 부인 동래 정씨(1799-1830:父 東信)에게서 자식은 없었고, 둘째 부인 연안 이씨(1813-1856:父 重基)는 2남 1녀를 양육했다.


고영근의 할아버지 경우는 무오(戊午:1798년) 2월 5일 생이고 고영근의 아버지 중겸이 네살 되던해인 임진(壬辰:1832년) 윤 9월 8일 35세의 나이에 돌아가셨고, 중겸 역시도 순조 기축(己丑: 1829년) 12월 17일 생이고, 고영근이 임자(壬子: 1852년) 생이어서 그가 네 살 되던 해인 철종 을묘(乙卯: 1855년) 27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것으로 나온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8)기밀송 제103호 [고영근의 우범선 모살 사건 조서 송부의 건] 별지 피고인 고영근 심문조서 제3회>에 고영근의 가족사항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고국에는 어머니와 처 그리고 아들 둘 딸 하나가 있고, 일본에 온 후에 얻은 아들 하나>  아쉽게도 족보에는 둘때 아들에 관한 기록도 없다. 그런데 <요시찰 한국인 거동 2권 p112 (198) 비제 128호 고영근의 하기(萩) 방문 보고> 에서 영근의 자식 용진(26세)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으로 보아 둘째는 용진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정교의 대한계년사 3권 p143>에 궁인 엄비와정을 통하여 자식을 낳아 민가에서 길렀다고 했는데 이 사실과 일본에서 얻은 자식의 뒷이야기가 몹시도 궁금하다.


구당 김태욱이 쓴 책 <인간 우장춘> 에서 고영근의 아들이라며 우장춘의 어머니를 찾아가 우장춘을 만나게 해달라 했으나 그냥 돌려보낸 일이 있다고 했는데 그는 누구였는지 알게 될 때가 있을까?


고영근의 장남 용현은 일부 자료에는 1867년생으로 나오나 족보에는 임신(壬申: 1872년)생으로 나온다. 그는 여러 곳의 군수를 지냈으며 그 가운데 그의 아버지 고영근이 역임했던 장단부사(1893년), 풍덕부사(1894년)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런 여러 사실에 비추어 보면 고영근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상당히 어려운 소년기를 보냈다고 생각된다. 여러 자료에 나타나듯이 그는 민영익가의 겸인으로 민비와 고종의 눈에 들어 출세를 하게 된다는 이런 기록들은, 버팀목이 되어줄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혼자서 풀어나간 그만의 길이었다고 본다. 또한 그의 삶 속에서 자주 나타나는 여자와의 이런 저런 관계들은 어쩌면 어려서부터 정에 굶주리며 성장한 그의 허전함 때문이 아닌가 추측한다.


족보에서 눈에 띄는 인물이 한 사람 있었다. 엄비의 이종 사촌인 김영진이다. 그가 고영근의 작은 아버지 진겸의 사위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오마이뉴스 블로그 역사를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