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사건

탈아입구란 왜구가 일본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조선에 대한 반역이었다.

한부울 2009. 9. 19. 15:37

Javanese 과 Japanese 는 같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8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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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말하는 脫亞入歐란 왜구가 일본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조선에 대한 반역이었다.

왜구가 일본으로 탈바꿈하기 위하여 서세의 첨병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래 첨부한 것은 대륙조선연구회 김홍필 선생께서 대항해시대 유럽 국가가 동아시아에 진출한 역사 시기별로 깔끔하게 정리한 내용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왜구전신인 일본이 1511년부터 1641년까지 서세와 빈번한 접촉이 있었던 반면에 1642년부터는 일체 서세와 통역이 없다는 사실이다.

왜구임진왜란으로 된서리를 맞은 대륙조선의 통제가 최소한 1642년부터 복귀되어 제대로 이어졌다는 반증이다.

더 구체적으로 파악해보자.

대륙사적으로 보았을 때 삼한 중 마한 백제는 일찍이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남아시아를 무대로 해역을 경영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가 대규모로 충돌할 때면 육상에서는 고구려가 반대로 해상에서는 늘 백제가 고구려를 압도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백제가 해상력이 그만큼 엄청난 것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한 백제도 결국 당나라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신라에게 망(660년)하여 결국 신라가 삼한을 통일한다.

신라 역시 백제를 이은 海上지배國이었다는 말이 된다.

반도사관에 찌들어 버린 우리는 신라의 국력과 영역이 어느 정도인지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서아시아까지 광범위한 영력으로 한 엄청난 규모의 나라였다고 판단된다.

삼한을 통일한 신라는 해상왕 장보고(?~846년)가 말해주듯이 백제의 터전을 고스란히 인계 인수받아 海上王國으로서 기틀을 다지고 전 세계를 누빈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얼마나 대단했으면 장보고를 海上王이라고 통칭 하였겠는가?

그런데 아래 정리한 것을 시기별로 분석하여 보면 특히 일본은 서세와 정말 뗄래야 뗄 수 없는 찰떡궁합 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늘 서세가 있는 곳엔 일본이 있었다.

남만은 동양인들이 아니라 서양인 즉 수마트라 자바에 근거한 네델란드, 포르투갈인들을 말했다고 김홍필 선생이 주장하고 있다.

임진왜란은 왜란 즉 왜구무사집단의 반기인 것 같지만 기실 포르투갈이 왜구를 진두지휘했을 가능성이 더 많다.

아마 조선이 패했다면 조선영역이 온통 포르투갈 서세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 분명해진다.

임진왜란에 왜구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서세도 상당수 포함되거나 동참되었다고 보여 진다.

바로 왜구가 서세 특히 포르투갈의 아시아침략에 동원되고 첨병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역사가 꼬이기 시작한다.

서세의 막강한 화력을 등에 업은 왜구들은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백제의 후신인 일본으로 둔갑하려고 몸부림을 치게 된다.

그때부터 동양사가 난도질당하면서 조작되기 시작하였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삼한 역사의 몫이 되고 만 것이다.

백제는 삼한이다.

그렇지만 삼한의 대륙지배의 전통성이 백제를 이은 일본으로 탈바꿈한 왜구로 인하여 깡그리 무너져 내리고 만 것이다.

당시 왜구 무사정치집단주체세력에게 지상최대의 목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나라 없이 늘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집시 같은 신세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살인, 살육, 도적질, 강간, 납치 등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최악의 이미지가 새겨진 왜구 신분에서 탈피해야 할 절박함이었다고 본다.

대륙조선에서 왜구를 인간취급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에 따른 그들 나름대로의 고통은 어느 정도인지 짐작 가는 일이기도하다.

고인이 되신 박경리 선생께서는 살아생전 미완의 글에서 일제에게 하던 말 중에 그들이 우리에게 가진 원한이 어떠한 것이 길래 이토록 우리민족을 짐승처럼 핍박하는가?

한탄과 아울러 그들 내면의 심정도 들여다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민족의 원한을 생각한다면 끝내 하지 말아야 할 표현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내면에 깔려있는 잠재적 의식을 바라보고자하는 의문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박경리 선생뿐만 아니라 이러한 의문은 우리 모두에게 없지 않다.

그것은 반도사관에 따른 피해의식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현재 그들 왜구 즉 일제가 우리민족에게 이렇듯 말할 수 없는 핍박과 압박을 가 하였듯이 우리도 한때 그들에게 그러한 핍박을 가하였을 것이란 개연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들의 그러한 절박함이 있었기에 바로 우리(조선)의 그늘에서부터 한시바삐 벗어나 극복하려고 氣를 썼을 것이라고 보아진다.

근세기 동양사는 그러한 목적을 가진 일제에 의하여 난도질당하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들은 결국 동양사를 이리저리 꿰매어 붙이고 잘라내고 바꿔놓으면서 그들 왜구의 역사를 완벽하게 세탁 하고 말았다.

왜구무사정치집단주체세력은 16세기 항해시대 아시아로 진출한 서세의 개입으로 자연스럽게 입지가 높아짐에 따라 역사세탁에 대한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게 되었다.

일본?

일본이란 국명은 백제가 만들어 준 것이라고 일본서기에 나온다.

일본서기는 근세기에 만들어진 역사 세탁의 표본이다.

왜구무사정치집단주체세력은 왜구를 일본으로 둔갑시키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사력을 다해 기존의 동양사를 절단하고 농단하여 그들에게 번듯한 일본국을 만들어 쥐게 되었다.

도적질과 살인, 파괴의 상징인 왜구신분의 천박하고 미개한 비문화적인 면을 조작과 사기를 부렸서라도 씻어내고 도려내어 문화종족으로 새롭게 탈바꿈하고픈 욕망이 그들에게 강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고 해상강대국으로 군림한 백제의 후신이란 역사사실을 어거지로 가로채어 그들의 역사로 만들고자 사생결단 물불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해진다.

그들이 수 천 년 간 우리선조들에게 받았던 그들 나름대로의 원한과 피해의식, 열등의식을 씻어내고 되갚기 위한 방법으로 이러한 역사세탁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끝내 왜구 일제는 대륙조선을 서세에게 팔아 힘을 빌어 무력하게 만들었고 대륙조선의 영토인 열도를 취함과 동시에 일본이란 나라를 만들었으며 그것조차도 부족하여 대륙조선의 근원을 한반도에 집어넣고 조그맣게 만들어 천하의 무도한 패륜같은 짓을 끝내 완성시키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부르짖는 탈아입구이다.

탈아입구로 왜구가 일본이 되고 백제의 후신이 된 것이다.

이것이 역사세탁논란의 끝자락이다.

동시에 대몽고려를 한반도고려로 만들어 고려최씨 무인정권을 동양사의 대명사인 몽골 칭기즈칸으로 둔갑시켜버렸고 대륙조선을 한반도조선으로 만들면서 명. 청이라 하는 만주국을 새롭게 탄생시켰다.

근대역사는 황금에 눈이 어두운 몇몇 서양 저질작가들의 삽화나 사진, 그리고 이문과 이윤에 눈이 먼 지도편집자들이 만든 종이조각같은 지도, 해적들이 장난삼아 적어놓은 항해기록 등이 근세기 역사자료로 둔갑하여 음모와 자의적으로 꾸며진 거짓의 역사를 뒤받침하고 있다.

서세 네덜란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설쳐 되었던 곳에 해적질로 명줄을 이어가던 바로 일본의 전신인 왜구무사정치집단주체세력들이 있었고 그들은 서세에게 육신과 영혼까지 팔아 그때부터 탈아입구하였다. 결국 그로부터 300년 후 명치유신을 부르짖은 왜구해적서세첨병주체세력들은 역사세탁의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탈아입구의 본질인 것이다.

 

[클릭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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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 유럽 국가가 동아시아에 진출한 역사 시기별로 정리한 내용


1511년 포르투갈의 인도총독이 말라카(지금의 말레이시아 말라카 주; 말레이어=Melaka, 영어=Malacca, 중국어=満剌加)를 정복했다. 이후 말라카는 동남아시아에 있어서 포르투갈 해상제국의 거점이 됐다. 당시 그곳에 요새와 카톨릭 교회가 세워졌다.

1542년 5월 포르투갈 사람이자 카톨릭 선교사이고 예수회 창설멤버 중 한 사람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San Francisco Xavier)는 인도 서해안 중부의 고아(Goa)에 도착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1545년 9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말라카에서 동아시아 포교에 나섰다.


동아시아라고 하지만 열도를 의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야 위치적으로 맞아 떨어지니까

그 당시 열도에 일본은 없었다.


1549년 8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일본인 야지로-(안지로-)와 동료 신부들과 함께 카고시마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1557년 포르투갈은 중국 마카오의 사용권을 획득하여 유일한 유럽인 거류지가 됐고 동아시아 교역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 시점을 전후로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포르투갈 정부의 지원하에 마카오를 거점으로 동남아시아 포교활동에 들어갔다.

1563년 포르투갈 사람이자 카톨릭 예수회 선교사인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가 일본에 상륙하여 포교활동을 시작했고, 1597년 7월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에서 사망했다. (약30년간 포교, 편년체 역사서 “일본사” 저술)


수마트라 자바이다.


1600년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1601년 3월 영국 동인도회사는 자금을 모아 4척의 선단을 동남아시아에 최초로 파견하여 항해에 성공했다.

1602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자바 섬 서부의 반텐에 상관을 설치했다.

1602년 네덜란드는 동양무역의 진흥을 위해 ‘세계 최초의 (拓植)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를 설립했다. 본사는 암스테르담(Amsterdam)에 두었다. 동인도회사에는 조약체결권, 군대교전권, 식민지경영권 등의 특권이 주어졌다. 본거지는 바타비아(Batavia)[지금의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Jakarta)]였다.

1603년 자바(Java) 섬 서부의 반텐에 네덜란드 상관을 설치했다. 또한 말레이반도의 파타니(Kerajaan Melayu Patani) 왕국에 네덜란드 상관을 설치했다.

1603년 일본의 토쿠가와이에야스(徳川家康)는 에도(江戶)에 바쿠후(幕府)를 두었으며, 1604년 주인선(朱印船)제도를 실시했다.


[주인선이란 16세기말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일본 지배자의 주인장(朱印状 해외도항허가증)을 받아서 해외교역을 수행하는 선박을 말한다. 주인장을 휴대하는 일본 선박은 당시에 외교관계가 있었던 포르투갈, 네덜란드 선박이나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지배자들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1635년까지 350척 이상의 일본 선박이 주인장을 받아 해외로 도항했다. 주인선은 반드시 나가사키(長崎)에서 출항하여 나가사키로 귀항해야 했다.]


이 당시 나가사키는 인도네시아 자바근역에 있었다고 비정된다.


1604년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설립됐다.

1609년 일본의 히라도(平戶)에 네덜란드 상관이 설치됐다.

1609년 9월 필리핀 임시총독이었던 로드리고 데 비베로(Rodrigo de Vivero y Velasco; 1564년~1636년; 스페인 귀족, 식민지 정치가) 일명 ‘돈-로드리고’가 차기 총독과 교대하기 위해 3척의 함대로 필리핀 마닐라에서 멕시코 아카푸르코(Acapulco)로 항해하던 중에 태풍을 만나 돈-로드리고가 타고 있던 기함이 일본의 카즈사노쿠니(上総国; 지금의 치바=千葉 현 남부 지역)에 표착했다. 그 지역 주민들의 도움으로 구조된 후에는 에도(江戶)를 방문했고 토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와도 회견했다.


필리핀에서 표류하였는데 어찌 열도에만 표착하였는가?

필리핀에서 표류하였다면 인도네시아 근방 무수히 많은 섬 중에 하나 일 것이다.


1610년 8월 돈-로드리고는 토쿠가와이에야스로부터 윌리엄 아담스(William Adams)가 건조한 가레온(Galleon) 선박을 제공받아 일본을 출발했고 1610년 11월 멕시코 아카푸르코에 도착했다. 이후 돈-로드리고는 일본에서 경험한 내용을 정리한 “돈-로드리고 일본견문록”을 남겼다.


로비에 의한 조작은 하멜 조선방문기처럼 얼마든지 가능한 시대가 바로 근세기 역사이다.


1613년 일본의 히라도에 영국 동인도회사의 상관이 설치됐다.

1619년 제4대 동인도 총독이 자바 섬 서부의 자카르타(Jakarta)에 성을 쌓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본거지로 삼았다.


[일본의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는 기본적으로 남만무역을 장려했다. 토쿠가와이에야스(徳川家康)는 스페인과의 교역에 적극적이었다. 토쿠가와바쿠후(徳川幕府)는 교역을 하면서도 그리스도교(카톨릭)는 철저히 금지했다. 또한 남만교역으로 인해 서쪽 지방의 다이묘-(大名)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그들의 해외무역을 제한했고, 교역장소도 히라도와 나가사키(長崎)로 제한했다.]


지금 열도에서 남만으로 가는 항로에 아무것도 없고 남만(수마트라 자바섬)만 있는가?


1623년 영국 동인도회사 상관을 일본 히라도에서 철수했다.

1624년본은 스페인 선박의 내항을 금지했다.

1634년 일본은 나가사키에 인공섬 데지마(出島)를 만들어, 그곳에서만 포르투갈 상인이 교역하도록 장소를 제한했다. 

1635년 일본 토쿠가와바쿠후(徳川幕府)는 쇄국령(鎖國令)을 내렸다.

1639년 일본은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을 금지했다.


이때 대륙조선에서 풍신수길의 대역죄를 물을 것을 종용했을 것이고 덕천가강에게 서세와 거래를 더 이상 방치하는 것을 묵과하지 않고 응징하겠다고 하는 것에 대한 조치였다고 보여 진다.


1641년 일본 히라도에 있었던 네덜란드 상관이 데지마로 이전됐다. 히라도에서의 교역을 금지하고 오로지 나가사키의 데지마에서만 교역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일본의 강력한 쇄국체제가 완성됐고, 결국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상대로 이루어졌던 남만무역이 종료됐다. 이후 데지마에서의 교역은 네덜란드 상관만이 가능했다. 카톨릭 교회 선교를 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과는 달리, 개신교(Protestant; 프로테스탄트)를 믿는 네덜란드는 포교활동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를 탄압하던 토쿠가와바쿠후(徳川幕府)는 네덜란드를 유일한 교역상대로 여겼다. 일본이 남만무역으로 얻은 것은 화승총(火繩銃)과 주인선(朱印船)이 대표적이다. 수입품은 철포(鐵砲), 화약(火藥), 중국산 견직물 등이었고, 수출품은 은(銀) 등이었다.]


이상하게 이후부터 일본은 서세와 접촉한 기록이 없다.

대륙조선의 쇄국지령이 통한 것이다.


1641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포르투갈의 거점인 말라카를 점령했다.

1664년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재편성됐다.

1665년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인도양의 부르본 섬 즉 지금의 레유니온(Réunion) 섬을 점령하고 식민 통치를 개시했다. 초기에는 커피를 재배(나중에 실패)했고, 사탕 재배가 중요 산업이 됐다.

1673년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인도 동해안의 폰디세리(Pondicherry)에 상관을 개설했다.

1680년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태국(Siam)의 아유타야(Ayutthaya) 왕조에 사절을 파견했다.

1693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폰디세리를 점령했다.

1697년 네덜란드는 조약에 의해 폰디세리를 프랑스 동인도회사에 반환했다.

1711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중국 광동(廣東)에 상관을 설립했다.

1724년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중국 광동(廣東)에 상선을 파견했다.

1761년 영국 군대가 폰디세리를 점령했다.

1769년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해산됐다.

1786년 영국은 페낭(Penang; 檳島, 檳城, 檳榔嶼; 현재 페낭 주의 수도=George Town) 섬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이후 자유무역항으로서 영국 동인도회사의 거점으로 발전했다.

1795년 프랑스 군대가 네덜란드 본국을 점령했다.

1799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해산됐다.

1819년 영국은 싱가포르(Singapore) 섬에 동인도회사의 상관을 설치했다. 19세기 종반에는 영국이 말레이반도 전체의 식민지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1824년 영국과 네덜란드가 체결한 조약에 의해 말라카는 영국에 양도됐다.

1824년 영국은 싱가포르 섬을 식민지로서 획득하여 무관세의 자유무역항 정책을 추진했다.

1840년부터 1842년에 걸쳐 영국은 제1차 아편전쟁에 승리하여 1842년 중국으로부터 홍콩(香港) 섬을 획득했고, 이를 빌미로 포르투갈은 1845년 ‘마카오 자유항’ 성립을 선언하고 중국의 세관 관리를 쫓아냈다.

1874년 영국 동인도회사를 해산했다.

1887년 포르투갈은 통치권을 획득하여 마카오를 식민 통치했다. 그러나 당시 포르투갈은 국력이 점점 약해졌고, 영국의 식민지인 홍콩이 번영하여, 마카오는 무역항의 지위를 상실했다.

[대륙조선연구회:김홍필09.09.19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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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과 배반의 이유?

 

탈아입구(脫亞入歐)는 일본 개화기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일본의 나아갈 길을 제시한 것을 가리킨다. 글자 그대로는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사회를 지향한다'는 뜻이다. 1885년 3월 16일자 일본 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에 〈탈아론(脫亞論)〉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기고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탈아론요약]


서구화의 바람이 동양을 향해 불어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모든 국가는 서구사회와 더불어 이 운동에 동참하여 문명의 열매를 맛보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문명은 홍역과 같지만, 여러 이로운 점을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홍역보다는 이롭다. 그러므로 국가는 문명에 거역할 수 없으며 이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문명화 과정에서 보수적인 정부 (도쿠가와 막부)는 걸림돌일 뿐이며 이를 뒤집어야만 일본에서 문명화를 이룰 수 있다.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얻는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시아를 벗어나는 것'(脫亞)이다. 비록 일본이 이미 정신적으로는 아시아를 벗어났지만, 이웃의 두 나라 (한국과 중국)은 개혁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이 나라들의 유교적 가르침은 모두 위선적이고 뻔뻔할 뿐이다. 중국과 일본의 개혁이 실패한다면, 이들은 곧 세계열강에게 나라를 빼앗길 것이다. 서구인들은 언제나 일본, 중국, 한국을 같은 문화를 가진 비슷한 나라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일본에게 걸림돌이 될 뿐이다. 나쁜 친구를 사귀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마찬가지로 나쁜 인상을 주기 때문에, 일본은 이웃의 나쁜 아시아 나라들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위키백과]


도쿠가와막부는 대륙조선의 쇄국정책에 동참한 일본 막부정부이다.

위 요약문에 두 나라는 한나라가 맞고

중국과 일본만 개혁에 실패하면..이라고 한 것은 중국이 바로 조선이라는 말이며

일본, 중국, 조선은 비슷한 나라라고 한 것은 중국과 조선을 분리하였지만 같은 호칭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