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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조선을 찾아왔던 이양선들

한부울 2009. 9. 4. 18:48

하멜 표류기를 조작한 이유 http://blog.daum.net/han0114/17049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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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조선을 찾아왔던 이양선들

조선을 찾아왔던 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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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베르케르크호(Ouwerkerek)는 네덜란드 상선으로 바타비아(Batavia, 오늘날 자카르타)를 출항하여 나가사끼로 항해하던 도중 1627년(인조 5년)에 제주도에 표착하였다. 당시 Jan Janse

Weltevree, Theodorick Gijsbertz, Jan Perteree Verbaest 등 선원 3명이 음료수를 구하러 제주도에 상륙하였으나 제주 관헌에게 체포되어 포로가 되었다. 이때 포로로 잡힌 네덜란드 선원 중 한 사람인 네델란드 De Rijp출신의 Jan Janse Weltevre는 조선으로 귀화한 박연(1595-?)이다.


훈련도감(五軍營:정병(精兵) 양성과 기민(飢民) 구제 임무를 맡아 오다가 1594년부터 수도 방위·국왕 호위 임무를 겸하여 종래 오위가 담당하던 기능을 대신하였다.)에서 근무하였는데, 1636년 병자호란때 세 사람 모두 출전하여 박연을 제외한 두 사람은 전사하였다. 그는 포로가 된 왜인들을 감시 ·통솔하는 한편 명나라에서 들여온 홍이포(紅夷砲:네델란드 화포)의 제조법,·조작법을 지도하였다. 1653년 H.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이르렀을 때 그들을 서울로 호송하고, 하멜이 도감군오(都監軍伍)에 소속되자 전라도 병영으로 이송되기까지 3년간 조선의 풍속,말 등을 가르치며 그를 감독하는 한편, 조선 여자와 결혼하여 1남1녀를 두고 여생을 마쳤다. 박연의 고향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북쪽에 위치한 De Rijp 마을에는 현재 Jan Janse Weltevree를 기리는 교회앞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박연은 귀화까지 하였는데 하멜은 지옥과 같은 곳이라고 했다.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극과 극이 아닌가?


벨테브레에 대한 또 다른 보고서 내용


Weltevree가 1627년 조선인에게 붙잡혔던 상황을 볼 때, 여러 자료들은 모순되는 점이 있다. 그러나 1627년의 부산의 기록에 따르면 벨테브레(박연)가 경상도의 경주에 붙들려 왔었다고 한다. 이 기록이 다른 세부사항에서도 정확하며 벨테브레는 이 사실을 인정했다. 따라서 우리는 벨테브레가 경주에 붙들려 왔다고 봐야 한다. 하멜의 표류기 에는 벨테브레가 조선해안에서 좌초할때 Ouwerkerck 호에 승선하고 있었다고 적고있다. 여러 동료들과 함께 그는 물을 가져오기위해 해안으로 노를 저었다. 그러는 동안 이들은 벨테브레와 두명의 동료를 붙잡은 조선인들에 놀라서 나머지는 가까스로 달아났다. 하지만 데시마(지금의 일본 나가사끼에 있는 섬)상관장의 일일 보고서에서 벨테브레가 Ouwerkerck 호에 타고 있지 않았다고 쓰여 있다. 어느날 Ouwerkerck호의 선원들이 중국선박(Chinese junk)을 포획했는데, 벨테브레는 이 배를 Formosa(지금의 대만)로 가져가기 위해 다른 네덜란드인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 폭풍으로 배는 조선해안에 다 달았다. 여기에서 세 명의 네덜란드인들은 중국인에게 압도당해 조선인에게 건네졌다.

 

조선해안에 닿았는데 중국인들이 중국에서 와서 놀다가 중국인에게 붙들였다.

말이 되는가?

그러면 그곳은 중국인이 점령한 곳이어야 한다.

그런데 조선인에게 건네 졌다 한다.

조선 해안에 중국인이 있었다는 것도 신뢰가지 않는 기록이다.

때문에 중국인이나 조선인은 같은 것이고 음모, 조작세력에 의하여 이중으로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벨테브레도 마찬가지지만 하멜역시 도착한 곳은 동남아시아 해안이다.


이 사실은 1627년 7월 22일 Formosa의(지금의 대만: 동남아시아 근해에서 찾아야 한다)

장관이 Batavia(지금의 자카르타) 상관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확인되었다. Formosa 장관은 7월 16일 Amoy(동남아)로 가는 도중에 Ouwerkerck이 중국상선을 포획했다고 발표했다. 150명중 70명의 중국선원들이 Ouwerkerck으로 옮겨간 반면, 네덜란드인 16명은 나머지 중국선원들과 함께 대만으로 가기 위해 상선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상선은 폭풍으로 북동쪽에서 표류했고 그 후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봐서 좌초의 우려가 있다. Ouwerkerck호는 몇 달후에 포르투칼선에 의해 포획되어 마카오에서 불태워졌다. 위의 언급으로 봐서 배는 조선해협에 도달한 적이 없으며, 벨테브레는 Hollandse 사략선 무리에 인질로 붙잡혀서 조선인에게 건네진 것이 분명하다.

 

엄청난 조작에 의한 것이기에 기록자 스스로도 혼란스러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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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 Sperwer호(galleon)는 네덜란드 상선으로 1653년 8월(효종 4년)에 나가사끼로 항해도 중 제주도 해안에 표착하였다. 1653년 1월에 네덜란드를 떠난 포겔 스트루이스(Vogel Struuijs)호는 6월 자바섬의 바타비아(Badavia)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총독 명령에 따라 스페르베르호로 갈아 타고 Fomosa(지금의 대만)로 출발하였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네덜란드의 대만 신임총독으로 부임하는 레세르를 임지로 데려다주는 일이었다. 임무가 끝난 뒤 다시 대만에서 일본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7월 나가사키를 향해 출발하였으나 풍랑이 심하여, 1653년 8월 15일 배는 난파되고 선원의 일부만이 제주도 남해안(the island of Quelpaert)에 상륙할 수 있었다.선원 64명 중 38명이 구조되어 제주 관헌의 보호를 받은 바 있었다.


당시 선원 가운데 화물 감독이었던 하멜(Hendrik Hamel, 1630-1692)은 억류된 지 13년만인 1666년 9월 15일(음력) 동료 선원 7명과 함께 탈출하여 일본을 거쳐, 1668년 7월 20일 암스테르담으로 귀환하였으며, 이후 하멜표류기로 알려져 있는 "Journal van de ongeluckige Voyage van't Jacht de Sperwer" (Sperwer호의 불운한 항해표류기) 라는 제목으로 책을 써서 조선을 서양에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Hendrick Hamel의 출생지인 Gorkum에는 1998년 9월 11일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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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 Sperwer호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1648년 건조. 적재톤수 약 160톤, 길이 약 40미터, 선폭 약 8미터로 건조된 후 5년만에 제주도에서 난파됨.

바타비아((Badavia) : 현재의 인도네시아 자바섬 북서안에 있는 수도 자카르타를 말하며, 16세기 말 자바에 진출한 네덜란드인은 지리적 위치가 뛰어난 점에 주목하였다가, 마침내 초대 동인도 총독 쿤(Coen)은 리웅강 하구에 성채를 건설하고 운하를 만들어 시가를 건설하였으며, 지명도 바타비아라 명명하여 동인도 제도에서의 네덜란드 식민 세력을 위한 최대 거점으로 삼았다.

포모사(Fomosa) : 현재의 대만을 말하며, 1590년 포르투갈인이 이곳을 방문하여 "아름다운 섬" 이라는 뜻의 포모사(Fomosa)라고 명명하였다. 네덜란드는 타이완 남부의 민족을 누르고, 일찍이 1624년 안핑[安平:臺南市]에 제란디아성(城)을 구축하였다. 에스파냐도 1626년 지룽[基隆] 지방의 서랴오섬[社寮島]에 산살바도르성을, 다시 3년 후에는 단수이항[淡水港]에 산토도밍고성을 각각 축조하고 타이완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네델란드는 1642년에 에스파냐를 구축(驅逐)하고 그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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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4년 8월 6일 조선왕조실록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이 치계(馳啓)하기를,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과 판관(判官) 노정(盧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藥材)·녹비(鹿皮)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木香) 94포(包), 용뇌(龍腦) 4항(缸), 녹비 2만 7천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챤[吉利是段]인가?’ 하니, 다들 ‘야야(耶耶)’ 하였고, 우리 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高麗)라 하고, 본도(本島)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吾叱島)라 하고, 중원(中原)을 가리켜 물으니 혹 대명(大明)이라고도 하고 대방(大邦)이라고도 하였으며, 서북(西北)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이라 하고, 정동(正東)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日本)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郞可朔其)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서울로 올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蠻人)이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


달단 : 달단은 Tatar로 13세기 이후로는 몽고민족, 남부러시아 일대의 터어키인,중국 북방 북아시아 등 전체를 가리킨다

낭가삭기(郞可朔其) : 지금의 일본 나가사키


헌종 7년10월23일 조선왕조실록(하멜이 탈출한 후 일본관계)

동래 부사 안진이 치계하여 표류 아란타 군민에 관련한 서계에 대한 일을 아뢰다.  


“차왜(差倭) 귤성진(橘成陳) 등이 은밀히 역관들에게 말하기를 ‘10여 년 전에 아란타(阿蘭陀) 군민(郡民) 36명이 30여 만 냥(兩)의 물건을 싣고 표류하여 탐라에 닿았는데, 탐라인이 그 물건을 전부 빼앗고 그 사람들을 전라도 내에 흩어 놓았다. 그 가운데 8명이 금년 여름에 배를 타고 몰래 도망와서 강호(江戶)에 정박했다. 그래서 강호에서 그 사건의 본말을 자세히 알고자 하여 서계(書契)를 예조에 보내려 한다. 아란타는 바로 일본의 속군(屬郡)으로 공물(貢物)을 가지고 오던 길이었다. 황당선(荒唐船)이 표류해 오면 즉시 통지해 주기로 전에 굳게 약속하였는데, 지금 통지해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물건을 빼앗고 사람을 억류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성실하고 미더운 도리인가. 차왜가 나오면 반드시 서울에 올라가 서계를 올릴 것인데, 본부(本府)와 접위관(接慰官)의 문답이 예조가 답한 서계와 다르지 않아야 일이 어긋나는 단서가 없게 될 것이다. 또 도주(島主)와 강호의 집정자 사이에 틈이 있는데, 이번 일은 매우 중대하여 만약 서로 어긋나기라도 한다면 도주가 먼저 화를 입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비국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회계하기를,


“장계에 말한 아란타 사람은 몇 년 전에 표류해 온 만인(蠻人)을 말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복색이 왜인과 같지 않고 말도 통하지 않았으므로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무슨 근거로 일본으로 들여보내겠습니까. 당초에 파손된 배와 물건을 표류해 온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였으므로 우리에게는 잘못이 없으니 숨길 만한 일도 없습니다. 차왜가 오면 그대로 답하면 그만입니다. 역관을 시켜 복장과 말이 왜인과 같았는지를 한번 물어보고 그들의 답을 들은 다음에 만인의 실상을 갖추어 언급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공문을 보내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헌종 8년2월26일 조선왕조실록(하멜 탈출 후 일본과의 관계)

수찬 김석주를 접위관(接慰官)으로 차출해 보냈다. 일찍이 갑오년에 남만인(南蠻人)의 배가 표류해 대정(大靜)의 해변에 도착하였는데, 그들의 탄 배가 죄다 파손되어 돌아갈 수가 없었다. 제주 목사가 치계하여 여쭙자 그들을 그냥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병오년 가을에 그중 8명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다가 표류해 일본 오도(五島)에 도착하였다. 오도에서 이들을 붙잡아 장기(長)로 보내니 장기 태수가 그들의 거주지를 물어보았는데 아란타(阿蘭陀)의 사람들이었다. 아란타는 곧 일본에 속한 군(郡)이었다. 그 사람들을 강호(江戶)로 들여보냈는데 관백(關白)이 대마 도주(對馬島主)로 하여금 우리 나라에 묻기를,


“해변에 왕래하는 야소종문(耶蘇宗門)의 잔당들을 일일이 기찰하여 통보해 주기로 일찍이 귀국과 약조를 했었다. 그런데 아란타 사람들이 표류해 귀국에 도착했을 때 귀국이 통보하지 않았다. 표류해 돌아온 8명은 비록 아란타 사람이지마는 그 나머지 귀국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필시 야소의 잔당일 것이다.”


하면서 여러모로 공갈하였다. 대개 야소는 즉 서양에 있는 별도의 종자인데 요술이 있어서 어리석은 사람을 미혹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일찍이 일본과 상통하였는데 뒤에 틈이 생겨 관백이 매우 미워하였으므로 매양 우리 나라에게 붙잡아 보내주라고 요청하였다. 이번에 아란타 사람들이 표류해 일본에 도착했을 때 관백이 우리 나라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 야소가 아닌 줄을 알고도 이를 트집잡아 권현당(權現堂)에 쓸 향화(香火)를 요구할 구실거리로 삼은 것이다. 그리하여 차왜(差倭)가 나와 관(館)에 40일을 머물러 있었으나 조정에서 일부러 응하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석주를 접위관으로 차출하여 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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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릭 하멜의 표류와 조선탈출

1653년 7월 30일 VOC(동인도회사)의 Sperwer hawk호는 대만을 출발해 일본의 나가사끼로 향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항해라면 배는 적어도 11월말까지 나가사끼에 도착했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고 대만으로 돌아오지도 못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이다.

몇달이 지난후 VOC의 총독은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10월에 선원과 귀중한 짐을 실은 배가 실종됐다고 공식적으로 공표했다.


13년 후에 나가사끼에 있는 VOC 책임자는 Goto-archipelago섬들 중 한 곳에서 일본인에게 구조된 이국적인 복장을 하고 뗏목으로 표류중인 8명의 네델란드인에 대한 특별한 메세지를 받았다. 그들은 일본당국에 의해 당장 나가사끼로 이송 되었다. 1666년 9월 14일 그들은 나가사끼 부두에 도착했다. 그들은 실종된 Sperwer hawk호의 선원으로 밝혀졌으며, 10일전 그들은 조선의 남해안에서 자유를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허름한 어선을 타고 탈출한 것이다. 그들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했다.


13년전 그들이 타고간 배는 난파되어 조선의 섬(제주도 대정현) 해안에 이르렀는데, 배에 타고 있던 64명중 32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조선정부가 자기 나라의 존재를 다른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떠날 수 없었다. 생존자들의 운명은 불확실했다.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했으나 살아남기 위해 구걸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들중 12명은 몇 년이 지나 사망했고, 마지막 생존자는 16명 이었는데 그들중 8명이 몇차례의 실패 끝에 조선을 탈출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1653년 7월 30일 대만을 출발한 후 폭풍으로 인해 표착되어 제주도-서울생활- 1656.3월 전라도 병영에서 생활, 1663년 여수, 남원, 순천등지에서 분산 수용 되었다가 1666년 9월 4일 여수에서 탈출. 1666. 9. 14 나가나끼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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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표류기 와  Corea 호

 

동인도회사에 제출된 하멜의 보고서가 시중으로 유출되어 소책자로 출간됐다. 그 당시 파장은 엄청난 것이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고조되어 있던 유럽에서 이 소책자는 선풍적인 인기를 일으켰다. 불어판,독어판,영역판이 경쟁적으로 출간됐다. 그때까지 동방의 조그만 나라 코레아는 유럽인들에게 겨우 그 이름만 알려져 있을 정도였다. 바로 이때 출간된  "하멜의 표류기" 는 미지의 나라 코레아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처음으로 유럽인들에게 소개한 책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네델란드도 조선과의 직교역을 신중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조선과의 직교역 검토


1668년 네델란드 식민지 문서 제255호에는 이때, 동인도 회사가 조선과의 직교역을 검토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1년후인 1669년 동인도 회사는 새로 만든 상선의 이름을 "코레아호"라 명명했다. 조선과의 직교역을 위해 만들어진 배였다. "코레아호"는 천톤급의 대형 상선이었다. 네델란드 동인도 회사 입장에서 조선은 중국 진출을 위한 전략적 교두보로 인식됐다. 이 전략적 요충지를 자신들의 무역권안에 포함시키기위해 동인도 회사는 조선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게된다.


직교역 추진에 앞서 동인도 회사는 조선 잔류자 8명에 대한 소환 문제를 먼저 해결하려 했다. 동인도 회사는 이 문제를 바타비아 본부에 지시했다. 그러나 아직 조선과 외교관계가 없었던 바타비아 본부는 일본 에도막부의 중재를 요청했다. 에도막부는 잔류자 소환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자 적극적으로 나섰다.


1670년 2월, 마침내 잔류자 8명도 고국 네델란드로 귀향했다. 귀향자는 하멜의 보고서를 근거로 14년간의 급여를 지급받았다. 잔류자 송환 문제를 해결한 동인도 회사는 조선과의 직교역 추진을 위해  "코레아호" 를 동양 무역본부인 바타비아로 출항시켰다. 동인도 회사 출항일지에는 네델란드를 출발한 "코레아호"가 1670년 4월 2일 바타비아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네델란드 17인 위원회는 바타비아 상관장에게 조선과의 직교역을 추진하라는 명령도 함께 내렸다.  "코레아호"가 출항했을때 그들 중 몇명은 이 항해를 자원했었다. 그런데 뜻밖의 문제가 발생한다.


네델란드 17인 위원회


"일본을 제치고 우리가 직접 코레아와 교역을 한다면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을것이다. 조선과의 직교역을 추진하라!"


도쿠가와 이에스나(德川家康)-에도막부 4대장군


"우리는 조선과의 무역에서 우란타국의 개입을 원하지 않는다. 만일 우란타국이 조선과의 직교역에 나선다면 우리는 데지마 상관을 페쇄시킬 것이다!"


요한 마차이케르-동인도 회사 동양본부장


"일본에 상관을 두고있는 이상 우리는 일본과의 무역에 불씨를 일으키는 일을 삼가해야 합니다. 코레아와 직교역을 해 보려는 생각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동인도 회사의 최종 결정은 조선과의 직교역을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동인도 회사가 조선과의 직교역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눈치챈 에도막부가 이를 적극 저지하고 나섰던 것이다. 결국 동인도 회사가 의욕적으로 명명했던 "코레아호"는 조선으로 단 한번도 항해하지 못하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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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솔(La Boussole 500톤)호와 아스트로라베(L' Astrolabe 500톤)호는 1787년 정조 11년 5월에 프랑스의 해군 대령인 라 페루즈(Jean-François de Galaup, comte de La Perouse , 1741-1788)가 이끌고 세계 일주 항해를 하던 도중 우리 나라 남해안과 동해안을 탐사, 1787년 5월 27일 서양인중 울릉도를 최초로 목격, 동승했던 천문학자 다줄레의 이름을 따 다줄레 섬(Isle Dagelet)이라 명명하였으며, 이 이름은1950년대까지 세계지도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울릉도의 어민들은 폐루즈의 탐사대를 목격하고 봉화불을 밝히는 등 신속히 대응한 것으로 보이며, 라페루즈의 탐험대는 울릉도 상륙 일보전에 철수하여 독도는 보지 못하고 항로를 북쪽으로 하여 타타르 해협으로 향하고 만다. 그러나 이들이 단순히 탐사 활동만 하고 지나쳐서인지 조선 왕조 실록에는 이들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다.

울릉도 탐사 경위는「The voyage of La Pérouse around the world 라페루즈의 세계 탐험기」에 실려 있는데, 이 책은 1791년 4월22일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명에 의해 출판 작업에 착수, 1797년 프랑스 국립인쇄소에서 출판됐다. 항해 일지 형식의 이 탐험기에는 울릉도 탐사 경위가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남해안과 동해안의 해안선을 실측하여 작성한 해도, 제주도 남부 해안 및 울릉도의 실측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1668년「하멜 표류기」 이래 서양인이 한국을 직접 목격, 관찰하고 과학적으로 측정하여 기록한 최초의 자료이다.


라페루즈 탐험대가 1785~87년 사이에 측정한 해안선, 해도, 섬들의 위치, 산의 높이, 수심 등은 대단히 정확한 것이어서, 프랑스 해군은 이 해도들을 수정 없이 반세기 이상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수치와 비교해도 오차가 미미해, 현재까지도 유효하다고 할 만큼 과학적이고 정밀한 것이었다. 1788년에 태평양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탐험대 2백여명의 노력과 이들의 목숨, 새로 건조한 두 척의 프리깃함정, 당시로서는 가장 발달된 항해 장비, 측정 장비, 방대한 자료 등이 희생되고 그 대가로 남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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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페루즈 함대의 탐험 항해기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는, 영국의 대탐험가 쿡(Cook)이 끝내지 못한 지역에 대한 탐험을 계속하여 이를 보완하라는 임무를 라페루즈에게 맡기고, 이에 대한 지침서를 직접 써 주었다.

라페루즈의 사명은 무엇보다도 아메리카 대륙의 북부와 아시아 대륙, 특히 쿡이 1776~79년 사이에 실행하지 못한 조선의 동해안, 타타르 해안, 일본의 홋카이도, 쿠릴 열도, 캄차카반도 등을 탐험 관측·조사하는 것이었다.


라페루즈 함대는 새로 건조한 두 척의 최신 프리깃함 부솔(La Boussole)호와 아스트로라베

(L'Astrolabe)호로 구성되었다.  모함인 부솔함에는 해군 중위 2명, 소위 3명, 준사관4명, 박식한 과학자, 천문학자, 생물학자 및 화가 10명, 하사관 9명, 포수와 사수 8명, 목 수, 선체 수리 전문가와 닻 담당 10명, 조타수 및 수병 38명, 보트병 12명, 잡역부 9명, 하인 7명 등 총 112명이 승선했다. 아스트로라베호에도 비슷한 인원이 승선했으므로 220 여명이 탐험에 참가했다.


조사 작업에 필요한 당대 최신 과학 장비와 각종 자료 (중국, 한국, 일본 등에 관한 책과 지도 등), 백과사전, 학술 논문 등도 적재했다. 특히 항해 장비는 그때 처음으로 사용 한 복각계(경사 나침반) 등 세계에서 가장 앞선 것이었고, 페어 플레이를 하는 영국인들은 쿡이 사용했던 장비들을 대여해 주기도 했다. 그외에도 2백여명의 인원이 수년간 먹을 식량과 보급품도 두 함정에 나눠 실었다.


탐험대장인 라페루즈는 모함인 부솔호의 함장이 되었고, 아스트로라베호는 드 랑글(de Langle) 대령이 함장이었다. 과학자 중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며 수학자·천문학자인 다줄레, 수학자 몽주(Monge)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둘 다 육군사관학교 교수였다. 그 밖에 광물학자, 생물·식물학자, 천문학자, 의사, 인류학자, 원예가, 화가도 여러 명 있었다.


탐험대는 1785년 8월1일 브레스트 군항을 출발했다.


대서양을 남극 방향으로 횡단하면서 마데르를 지나 카나리아 군도와 브라질 남단을 거쳐 1786년 케이프 혼을 통과했다. 칠레의 콘셉숀(Concepcion)에서 환대를 받고, 식량, 연료, 음료수를 보충한 후 1786년 3월15일에는 지구의 남반부 해역 탐사의 대장정에 나섰다. 4월9일 파크(Paques)섬에 도착, 그후 북쪽으로 장거리 도항을 시작했다.


라페루즈는 18세기 말엽인 그 시점에, 좋은 측정 장비를 갖추지 못했던 옛날 스페인 항해가들로부터 물려 받은, 위도가 잘못 계산된 세계 지도의 신화를 깨 부수는 작업을 하 게 되었다. 샌드위치(하와이) 군도와 미국 서부 해안 사이의 적도 부근에 표시돼 있던 여러 개의 육지들은 라페루즈 일행에 의해 지워질 수밖에 없었다. 샌드위치(하와이) 군 도에서 물물 교환으로 식량 등을 확보한 다음 알래스카를 향해 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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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페루즈의 울릉도 발견 항해일지(1)

1787년 5월19일


짙은 안개와 함께 15일간이나 계속된 평온한 날씨가 변하여 바람은 북서 방향으로 고정되었고 대단히 시원했다. 일기는 흐리고 희끄무레 했지만, 수평 선이 수십km에 펼쳐졌다. 지금까지 그렇게도 잔잔했던 바다에는 풍랑이 대단히 심하게 일었다. 이때 닻이 닿는 수심은 약 46m였다. 나는 일순간도 지체 없이 출발 신호를 했고, 북동 1/4동방향, 제주도(켈패르섬)로 항로를 지도했다. 제주도는 일본 해협에 진입하기 전의 최초의 인식 지점이다. 이 섬은 1635년 홀랜드 선박 스패로우 호크 (Sparrow Hawk)호가 좌초함으로써 유럽 사람들에게 알려졌는데, 이 시기에 조선왕의 지배하에 있었다.

 

우리는 5월21일 이 섬(Quelpaert, 제주도)을 알게 되었는데, 거리 측정에는 이상적인, 더 할 수 없이 맑은 일기였다. 이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한 섬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섬의 남쪽 첨단부의 위치를 북위 33°15', 동경 124°15' (위도는 오늘날의 수치와 같고, 경도는 현재 126°15'이므로 약 2° 정도 차이가 남)로 확정했다. 나는 섬에서 11km 떨어져 항해하면서 67 km(제주도 동서의 길이는 73 km)에 걸쳐서 전개된 해안을 최대한 세심하게 측정했고, 이를 베르니제(Bernizet) 씨가 지도로 작성했다. 정상의 높이는 약 1천9백50m 였고, 1백~1백10km 거리에서 식별할 수 있었다.

 

                                 라페루즈함대에서 작성한 Quelpaert 섬 남해안(제주도)

 

한반도에 어디어디라고 하는 지도마다 보면 하나같이 지도가 짤려 전체 구도를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전도를 그리기에 무리가 있어서...종이가 모자라...시간이 없어서...

미국이 신미양요(1871) 해전도 역시 이와 같다.

19세기에 서양에서 그렸다던 한반도 소속 지도는 모두다 이와 같다.  

무엇때문에 크지도 않는 강화도 전도는 그리지 않고 강화도 강화해협과 비슷하게 그려 이리저리 화살표를 그어 일부지역만 공개하였기 때문에 실제 강화도인지 알 수가 없다.


정상은 섬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었고, 이 산 자체가 섬인 것 같았다. 토지는 매우 완만한 경사로 바다까지 내려왔다. 이 경사면에 있는 집들은 마치 대강당의 층계처럼 층을 이루고 있었다. 땅은 아주 높은 지대까지 경작된 듯했다. 망원경을 통해 밭과 밭 사이의 구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밭이 아주 작게 나누어진 것으로 보아 인구가 많음을 알 수 있었다. 각종 경작물이 매우 다양하게 자라는 모습은 이 섬을 더욱 아름답게 했다. 불행히도 이 섬은 외국인과의 소통이 금지된 민족에 속하며, 이 민족은 이 나라 해안에 표류하는 불행을 겪는 모든 사람을 노예 상태에 억류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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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비던스(HMS Providence)호는 406톤, 포 16문, 길이 33미터인 Sloop로, 영국 해군 브로이튼(William Robert Broughton)의 지휘하에 그당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북태평양을 탐사, 타타르 해협으로부터 조선의 영흥만 앞바다를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면서 관측한 후, 부산 동래포에 상륙하여 우리측 사료에 처음으로 이국선으로 불리웠던 배이다.


1797년 10월(정조 21년)에 부산 동래 용당포에 나타나자, 경상도 관찰사였던 이형원과 동래부사 정상우 등은 프로비던스호의 제원에 대해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는 데 그쳤고, 조선 조정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玄啓欽이라는 천주교인은 프로비던스호에 승선한 뒤 '그와 같은 배 한 척만 있으면, 조선의 전선 100척은 쉽게 무찌를 수 있다'고 말한 죄로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었고, 정조 21년(1797년) 사료에 "외국인 50명이 표착하여, 배에 올라 보니 쌀 3,000섬(1섬=144 kg)을 실을 수 있다". 고 부산 동래포에서 보고되어 있다.

 

                                                   1797년 브로이튼이 그린 부산포


라페루즈의 부솔호보다 10년 뒤 조선에 찾아온 브로이튼의 프로비던스호는 현재의 강원도 고성 조금 북쪽 한반도 가까이에 울릉도로 보이는 아르고노트(Argonaute) 섬을 발견하였다 하여, 1820~50년경의 서양 지도에는 라페루즈가 붙인 다줄레섬(울릉도) 외에 아르고노트 섬도 나타나 있는데, 그 후에 아르고노트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어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지도상에서 사라졌으며, 서양인 최초로 조선의 식물이 채집된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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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Robert Broughton의 항해기

윌리엄 로버트 브로이튼은 HMS Chatham호의 지휘자였다. 1776년 미국 독립전쟁시 제독 Knight 밑에서 해군 생도가 되었다. 1790년 HMS Victory호에서 Knight와 함께 근무, 1792년 늦게, Chatham호로 오늘날 오리건주와 워싱턴 인근인 콜롬비아 강을 탐험, 그는 강을 따라 포틀랜드 위 해도를 작성하였다. 1793년 7월 런던에 귀환하였다.


브로이튼은 1793년 10월에 프로비던스호를 지휘하여 밴쿠버와 합류하라는 명령를 받았으나. 1795년 2월에 폴리머스항을 출항, 이미 귀환중인 밴쿠버와 대서양에서 너무 늦게 합류, 1796년 3월에 Nootka 에 도착하였다. 브로이튼은 태평양을 가로질러 북위 35도에서 북위 52도까지의 아시아대륙의 해안과, 일본의 동,남해안을 탐사하였으며, Corea(조선) 해안을 조사하였다. 2년여의 긴 항해끝에 브로이튼 함장이 지휘하는 프로비던스호가 1797년 10월에 부산에 상륙하였다. 조선 탐험의 뚜렷한 목적을 띤 최초의 서양인이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탐험되고 있는 조선에서 국가의 세력과 무역 패권을 놓고 해상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였다. 프랑스는 1787년 조선 해역에 진입했던 라페루즈 함대의 항해로 주도권을 잡았으나. 항구에 입항해 볼려는 열렬한 그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비협조적인 일기 조건과 선원들의 안전에 대한 걱정 때문에 되돌아 가야만 했다. 10년 뒤인 1797년, 영국의 함장 브로이튼과 그의 탐험대는, HMS Providence호로 항해, 조선의 동해안을 탐사, 성공적으로 조선 해안인 부산 동래포에 10일간 상륙하여 머물렀다. 또한, 브로이튼은 1795년에서 1798년까지 라페루즈가 지나쳐 버린 오끼나와의 많은 섬들과 일본 해안가를 면밀히 조사하였으며,  1804년에 "A Voyage of Discovery in the North Pacific Ocean" 이라는 책을 발간 하였다


브로이튼의 항해기에 의하면, "새로운 정보와 교역같은 것이 기대될 것으로 생각되었던 조선 해안을 조사하는 것이 본래의 항해 목적중 하나" 라고 하였다. 영국 선원들이 항구에서 10일간 머무르는 동안, 지방 행정관과 관리들은 정박중인 배를 방문하여 선원들에게 즉각적으로 항을 떠나가도록 설득하였고, 일반인들조차 무리지어 배에 올라 선원들의 환영을 받은 바 있다. 지방행정관은 영국 선원들이 떠나가는 10월 21일까지 외국 방문객에게 소금, 쌀, 고기와 해초들을 주도록 명령하였고, 계속적으로 무상으로 물과 나무를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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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끼나와의 기록

프로비던스호는 1797년 5월 15일 타이완 부근 Tarama 섬 Milliam 해안에서 낮은 조수의 영향으로 모래톱에 좌초되었으나, 배는 섬에 놔둔채 112명의 선원들은 안전하게 "the Prince William Henry" 구조선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들은 지방민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며, 후에 프로비던스호의 기지인 마카오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같은 해, 좌초된 프로비던스호는 Naha항(오끼나와 남서부 위치)에 들어 갔다.

 

                      A Schooner following HMS Providence by Broughton, dated 1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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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21년 9월 6일 조선왕조실록

경상도 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이 치계(馳啓)하기를,  “이국(異國)의 배 1척이 동래(東萊) 용당포(龍塘浦) 앞바다에 표류해 이르렀습니다. 배 안의 50인이 모두 머리를 땋아 늘였는데, 어떤 사람은 뒤로 드리우고 머리에 백전립(白氈笠)을 썼으며, 어떤 사람은 등(?)으로 전립을 묶어 매었는데 모양새가 우리 나라의 전립(戰笠)과 같았습니다. 몸에는 석새[三升] 흑전의(黑氈衣)를 입었는데 모양새가 우리 나라의 협수(挾袖)와 같았으며 속에는 홑바지를 입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코가 높고 눈이 파랗습니다. 역학(譯學)을 시켜 그 국호(國號) 및 표류해 오게 된 연유를 물었더니, 한어(漢語)·청어(淸語)·왜어(倭語)·몽고어(蒙古語)를 모두 알지 못하였습니다. 붓을 주어 쓰게 하였더니 모양새가 구름과 산과 같은 그림을 그려 알 수 없었습니다. 배의 길이는 18파(把)이고, 너비는 7파이며 좌우 아래에 삼목(杉木) 판대기를 대고 모두 동철(銅鐵) 조각을 깔아 튼튼하고 정밀하게 하였으므로 물방울 하나 스며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 윤득규(尹得逵)가 치계하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상우(鄭尙愚)의 정문(呈文)에 ‘용당포에 달려가서 표류해 온 사람을 보았더니 코는 높고 눈은 푸른 것이 서양(西洋) 사람인 듯하였다. 또 그 배에 실은 물건을 보니 곧 유리병·천리경(千里鏡)·무공은전(無孔銀錢)으로 모두 서양 물산이었다. 언어와 말소리는 하나도 알아 들을 수 없고, 오직 「낭가사기(浪加沙其)」라는 네 글자가 나왔는데 이는 바로 왜어(倭語)로 장기도(長崎島)이니, 아마도 상선(商船)이 장기도부터 표류하여 이곳에 도착한 것 같다. 우리 나라 사람을 대하여 손으로 대마도(對馬島) 근처를 가리키면서 입으로 바람을 내고 있는데, 이는 순풍을 기다리는 뜻인 듯하다.’ 하였습니다.”  하니,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순풍이 불면 떠나보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정조21년 10월 4일 조선왕조실록

“전에 동래(東萊)에 표류해 온 배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이르기를 ‘아마도 아란타(阿蘭) 사람인 듯하다.’ 하였는데, 아란타는 어느 지방 오랑캐 이름인가?” 하니, 비변사 당상 이서구(李書九)가 아뢰기를,  “효종조(孝宗朝)에도 일찍이 아란타의 배가 와서 정박한 일이 있었는데, 신이 어렴풋이 일찍이 동평위(東平尉)의 문견록(聞見錄)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아란타는 곧 서남 지방 번이(蕃夷)의 무리로 중국의 판도(版圖)에 소속된 지가 또한 얼마 되지 않습니다. 《명사(明史)》에서는 하란(賀蘭)이라고 하였는데 요즘 이른바 대만(臺灣)이 바로 그곳입니다.”  하자,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주달한 바가 두루 흡족하니 참으로 재상은 독서한 사람을 써야 합니다.”

 

정약용의 "다산시문집"

...동래부사의 말을 들으니 '그 선제(船制)가 개판(蓋板)이 있어 마치 우리나라의 거북선 "龜船"과 같았고, 개판 위로 창문을 내어 출입하도록 되었는데, 나사 모양의 사다리를 만들어 빙빙 돌아서 승강하였다. 좌우의 판 안에 여러 개의 방이 배열되어 있고, 그 판을 뚫어 창문을 만들었는데 모두 유리를 붙였으며, 배 안을 들여다보니 붉은 색의 칠이 황홀하였다. 개, 돼지, 오리 등의 가축을 기르는 곳도 이상스럽게 정결하였다. 또 한 곳을 보니 장창(長槍) 수백 자루를 쌓아놓았고, 사람마다 조창 하나씩을 차고 있었다. 그리고 배의 네 귀퉁이에는 모두 대포를 설치하였으며, 세 개의 돛대를 세웠는데 끊을 수도 있고 이을 수도 있어 그 장단(長短)을 마음대로 조절하게 하였다. 그들은 또 언덕 위에 소가 가는 것을 보고 두 손을 이마 위에 세워 소뿔의 형상을 하면서 달라고 요구해 왔으나 동래 사람들은 끝내 주지 않았다.' 하였다. ... 조창(鳥?)은 조그마한 것이 마치 필률(?? 악기의 한 가지)과 같이 생겼는데, 화문(火門)을 돌로 장식하였으며 발사하면 불이 나간다. 그들은 이를 사용하는 솜씨가 매우 재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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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군함 알세스트호(Frigate Alceste, 함장 Murray Maxwell )와 리라호(Sloop Lyra, 함장 Basil Hall)는 1816년 7월(순조 16년)에 서해안의 마량진 앞바다에 출현하였다. 이 두 선박은 영국이 영국 동인도회사의 상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북경 조정에 특사로 파견한 암허스트경(Sir Jeffrey William Pitt Amherst)을 태운 선단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이양선으로 불리게 된 선박이다,

 

 

알세스트호는 1817년에 지금의 보르네오 근처 이름없는 모래톱에 걸려 좌초 되었으나, 극적으로 선원과 승객들은 구조되었다. 이 선단은 1816년 2월 9일(양력) 영국을 떠나 브라질을 경유하여 중국에서 임무를 마친 뒤, 본국 정부로부터 조선 서해안 일대를 탐사 하라는 훈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두 함장은 각기 자기의 군함을 지휘하여 1816년 9월 1일 조선에 내항하여 백령도(James Hall's Group)등 서해안 일대를 10일간 시찰하고, 해도를 작성하게 되었다.


Lyra호 함장 바실 훌은 본국에 귀환하여 1818년 '한국 서해안 항해기'(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the Great Loochoo Island)를 출간하였다.

 

                                                         바다에서 본 Lyra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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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16년 7월 19일 조선왕조실록

서양선이 서해안에 출현하자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비인현감 이승열이 승선하여 내조 목적을 문정하였고,  이들의 문정을 토대로 충청수사 이재홍이 조정에 장계로 보고하였다. "마량진(馬梁鎭) 갈곶[葛串]밑에 이양선(異樣船) 두척이 표류해 이르렀습니다". 그 진(鎭)의 첨사 조대복(趙大福)과 지방관 비인 현감(庇仁縣監) 이승렬(李升烈)이 연명으로 보고하기를,


‘표류하여 도착한 이양선을 인력과 선박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끌어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4일 아침에 첨사와 현감이 이상한 모양의 작은 배가 떠 있는 곳으로 같이 가서, 먼저 한문으로 써서 물었더니 모른다고 머리를 젖기에, 다시 언문으로 써서 물었으나 또 모른다고 손을 저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참 동안 힐난하였으나 마침내 의사를 소통하지 못하였고, 필경에는 그들이 스스로 붓을 들고 썼지만 전자(篆字)와 같으면서 전자가 아니고 언문과 같으면서 언문이 아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좌우와 상하 층각(層閣) 사이의 무수한 서책 가운데에서 또 책 두 권을 끄집어 내어, 한 권은 첨사에게 주고 한 권은 현감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펼쳐 보았지만 역시 전자도 아니고 언문도 아니어서 알 수 없었으므로 되돌려 주자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기에 받아서 소매 안에 넣었습니다. 책을 주고받을 때에 하나의 작은 진서(眞書)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서 거래하는 문자인 것 같았기 때문에 가지고 왔습니다.


사람은 낱낱이 머리를 깎았고, 머리에 쓴 모자는 검은 털로 만들었거나 노끈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동로구(銅臼)와 같았습니다. 의복은 상의는 흰 삼승포[三升布]로 만들었거나 흑전(黑氈)으로 만들었고 오른쪽 옷섶에 단추를 달았으며, 하의는 흰 삼승포를 많이 입었는데 행전(行纏) 모양과 같이 몹시 좁게 지어서 다리가 겨우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버선은 흰 삼승포로 둘러 쌌고, 신은 검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발막신[發莫]과 같고 끈을 달았습니다. 가진 물건은 금은 환도(金銀環刀)를 차기도 하고 금은 장도(金銀粧刀)를 차기도 하였으며, 건영귀(乾靈龜)를 차거나 천리경(千里鏡)을 가졌습니다.


그 사람의 수는 칸칸마다 가득히 실어서 자세히 계산하기 어려웠으나, 8, 90명에 가까울 듯하였습니다. 또 큰 배에 가서 실정을 물어 보았는데, 사람의 복색, 패물, 소지품이 모두 작은 배와 같았고, 한문이나 언문을 막론하고 모두 모른다고 머리를 저었습니다. 사람의 숫자는 작은 배에 비하여 몇 갑절이나 될 것 같은데, 배 위와 방 사이에 앉아 있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하였으며,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는 등 매우 어수선하여, 하나 둘 세어 계산하기 어려웠습니다.


서책과 기물(器物)은 작은 배보다 갑절이나 더 되었습니다. 큰 배나 작은 배를 물론하고 그 제도가 기기 괴괴하며, 층이나 칸마다 보배로운 그릇과 이상한 물건이 있었고, 기타 이름을 알 수 없는 쇠와 나무 등의 물건이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또 여인이 있었습니다. 눈앞에서 본 것은 단지 한 명뿐이었는데, 흰 베로 머리를 싸매고 붉은색 치마를 입었습니다. 두 배에 모두 대장간이 설치되었는데, 만드는 것은 모두 대철환(大鐵丸), 화살촉 등의 물건이었습니다. 첨사와 현감이 배에 내릴 때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가지고 굳이 주었는데, 작은 배에서 받은 두 권과 합하면 세 권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서북풍이 불자 크고 작은 배가 불시에 호포(號砲)를 쏘며 차례로 돛을 달고 바로 서남 사이 연도(煙島) 밖의 넓은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첨사와 현감이 여러 배를 지휘하여 일시에 쫓아갔으나 마치 날으는 새처럼 빨라서 사세상 붙잡아 둘 수 없었으므로 바라보기만 하였는데, 앞의 배는 아득하여 형체가 보이지 않았고 뒤의 배는 어슴프레 보이기는 하였으나 해가 이미 떨어져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두 배의 집물적간건기(什物摘奸件記)와 작은 배에서 얻은 한 폭의 진서전(眞書)을 모두 베껴 쓴 다음, 첨부하여 올려보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조정에 보낸 ‘영길리국(英吉利國)의 진서(眞書)

"금년 윤6월 초순 사이에 우리 영길리국에서 5척의 배로 우리 영국왕(英國王)이 차정한 사신과 수행한 사람들을 보내어 천진(天津) 북연하(北蓮河) 입구에 도착하여, 지금 왕의 사신 등이 모두 북경에 나아가 황제[萬歲爺]를 뵈었으나 천진 외양(外洋)의 수심이 얕은데다가 큰 바람까지 만나 배의 파괴를 면할 수 없기 때문에, 각 선척이 그곳에 감히 정박하지 못하고 지금 월동(東)에 돌아가서 왕의 사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귀국하려고 합니다. 이에 그곳을 지나게 되었으니, 해헌(該憲)은 음식물을 사도록 해 주고 맑은 물을 가져다 마시고 쓰도록 해 주십시오. 왼쪽에 우리 왕께서 보낸 사신의 인장(印章)이 찍혀 있으니 증거가 될 것입니다. 가경(嘉慶) 21년  월 일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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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호는 500톤급 영국 동인도회사(EIC) 상선으로 조선 해역에 통상을 요구하기 위해 나타난 최초의 서양선이었다. 1832년 동인도회사에서는 극동의 새로운 통상지를 개척 탐사하려는 목적으로 타이완을 거쳐, 조선 서해안과 제주도, 그리고 일본 오키나와에 이르는 항해를 계획하고, 그 책임자인 린제이(Hugh Hamilton Lindsay)는 중국어에 능통한 의사겸 선교사인 귀츨라프 목사(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1803∼1851)를 통역관, 선장 Rees를 포함 67명의 승무원을 승선시켰다. 후에 귀츨라프는 "The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 1832 & 1833 with Notices of Siam, Corea and Loo Choo Island" 책을 1834년에 발간한 바 있다.


로드 암허스트호는 1832년 2월 27일 중국 광동을 출발하여 1832년 6월 21일(순조32년) 황해도 몽금포 해안에 나타났다가, 남하하여 충청도 홍주 고대도 뒷 바다에서 20 여 일간 정박하며, 조선 국왕에게 서한을 전달해 줄것과 통상 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제까지의 서양선들과는 달리, 통상을 요구해 옴에 따라 조선 정부는 이들에 대해 각별한 반응을 보였다. 한양에서 내려온 특사는 서한과 선물을 되돌려주며 중국 황제의 허락없이는 외국과 통상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순조 32년 7월 21일, 사건이 마무리된 후 공충감사 홍희근은 순조에 장계를 올렸다. 


귀출라프의 조선 첫인상

 

조선인은 세상에서 가장 사람을 싫어하는(misanthropical) 민족이라 하지만, 협박과 상처를 입혀서라도 침략자를 충분히 물리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민족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처음 조선인을 면담할 때부터 매우 의아하게 생각한 점인데, 그들이 겁이 많으며 무엇이든지 강하게 요구하면 불평없이 굴복한다는 나의 선입관을 입증할 만한 어떤 충분한 근거를 찾지 못하였다. 조선인들이 우리에게 냉담한 감정을 나타낸 것은 분명하지만, 악의 없는 외국인을 겉으로 원수같이 대접할 때 마음속에 갈등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모든 인간의 가슴속에 있는 인간의 타고난 감정을 없앨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상은 귀출라프의 항해기 내용으로 동양 사정에 밝은 귀츨라프는 조선에서의 천주교의 박해 사실과 쇄국정책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선입관과 달리 조선인들이 매우 용감하고 인정이 많다는 좋은 인상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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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32년 7월 21일 조선왕조실록(1)

공충 감사(公忠監司) 홍희근(洪羲瑾)이 장계에서 이르기를, “6월 25일 어느 나라 배인지 이상한 모양의 삼범 죽선(三帆竹船) 1척이 홍주(洪州)의 고대도(古代島) 뒷 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영길리국(英吉利國)의 배라고 말하기 때문에 지방관인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와 수군 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瑩綬)로 하여금 달려가서 문정(問情)하게 하였더니, 말이 통하지 않아 서자(書字)로 문답하였는데,


국명은 영길리국(英吉利國) 또는 대영국(大英國)이라고 부르고, 난돈(蘭墩), 흔도사단(都斯)이란 곳에 사는데 영길리국, 애란국(愛蘭國), 사객란국(斯客蘭國)이 합쳐져 한 나라를 이루었기 때문에 대영국이라 칭하고, 국왕의 성은 위씨(威氏)이며, 지방(地方)은 중국(中國)과 같이 넓은데 난돈(蘭墩)의 지방은 75리(里)이고 국중에는 산이 많고 물은 적으나 오곡(五穀)이 모두 있다고 하였고, 변계(邊界)는 곤련(昆連)에 가까운데 곧 운남성(雲南省)에서 발원(發源)하는 한줄기 하류(河流)가 영국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북경(北京)까지의 거리는 수로(水路)로 7만 리이고 육로(陸路)로는 4만 리이며, 조선(朝鮮)까지는 수로로 7만 리인데 법란치(法蘭治)·아사라(我斯羅)·여송(呂宋)을 지나고 지리아(地理亞) 등의 나라를 넘어서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 선재(船材)는 이목(木)을 썼고 배의 형체는 외[瓜]를 쪼개 놓은 것같이 생겼으며, 머리와 꼬리 부분은 뾰족한데 길이는 30파(把)이고 넓이는 6파이며 삼(杉)나무 폭을 붙인 대목은 쇠못으로 박았고, 상층(上層)과 중층(中層)은 큰 것이 10칸[間]이고 작은 것이 20칸이었으며, 선수(船首)와 선미(船尾)에는 각각 건영귀(乾靈龜)를 설치했고, 배 안에는 흑백의 염소[羔]를 키우며 오리와 닭의 홰를 설치하고 돼지 우리도 갖추고 있었으며,


선수와 선미에는 각색의 기(旗)를 꽂고 작위(爵位)가 있는 자의 문전에 있는 한 사람은 갑옷 모양의 옷을 입고 칼을 차고 종일토록 꼿꼿이 서서 출입하는 사람을 제지하였으며, 급수선(汲水船) 4척을 항상 좌우에 매달아 놓고 필요할 때에는 물에 띄워 놓았습니다. 전(前)·중(中)·후(後)의 범죽(帆竹)은 각각 3층을 이루고 있고 흰 삼승범(三升帆)도 3층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사용하는 그릇은 화기(畵器)이고 동이[樽]와 병(甁)은 유리였으며 숫가락은 은(銀)으로 만들었고, 배 안에 실은 병기(兵器)는 환도(環刀) 30자루, 총 35자루, 창 24자루, 대화포(大火砲) 8좌(座)이었습니다.


또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은 총 67인이었는데, 선주(船主)는 4품(品) 자작(子爵) 호하미(胡夏米)이고, 6품 거인(擧人)은 수생갑리(隨生甲利) 출해리사(出海李士)이며, 제1과장(第一長)은 파록(波菉)이고, 제2과장은 심손(心遜)이고, 제3과장은 약한(若翰)이고, 화사(畵士)는 제문(弟文)이며, 사자(寫字)는 노도고(老濤高)이고, 시종자(侍從者)는 미사필도로(米士必都盧)이며, 과계(計)는 벽다라마(多羅馬)·행림이(行林爾)·임홍파(林紅把)·가파지(加巴地)이고, 수수(水手)는 가타(嘉他)·랍니(拉尼)·야만(耶)·주한(周翰)·명하(明夏) 및 마흥(馬興) 6인이며, 진주(陳舟)에 10인, 손해(遜海)에 20인이고, 주자(廚子)는 모의(慕義)와 무리(無理)이며. 지범(止帆)은 오장만(吳長萬)이요, 근반(班) 시오(施五)·시만(施慢)·시난(施難)·시환(施環)·시섬(施)·시니(施尼)·시팔(施八)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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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랑호(Samarang, bark, 582톤, 함장 Sir Edward Belcher)는 중국의 남경조약 체결 후 개방된 중국 해안을 측량할 목적으로 항해하던 중 조선 해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1845년(헌종11년) 6월 제주도 '우도' 앞바다에 정박한 후 30여명이 보트 3척에 나누어 타고 우도에 상륙하여, 섬 연안을 1개월 동안 돌아 다니면서 수심을 측정하고, 전라도 흥양(고흥) 초도, 강진 여서도, 장흥 평일도, 해남 지역등 서남해를 탐사하고 거문도에 들러 "해밀튼항(Port Hamilton)"이라 명명한 영국 군함 사마랑호였다.


함장 Edward .Belcher(1799-1877)는 1848년에 " Narrative of the voyage of H. M. S. Samarang, during the years 1843-46" 이라는 책을 발간하였으며, 사마랑호는 1847년6월에 프랑스 군함 글로아르호가 전라도 만경 신치도 부근에 도착했으나 암초에 좌초되자 1847년8월 다른 2척과 함께 상해로부터 출동하여 구조해준 바 있다.

 

 

조선 조정은 사마랑호에 대해 이들이 무역을 강요하기 위하여 온 것으로 판단하고, 사마랑호의 내조 사실을 청국과 일본에 통보함과 동시에 청국을 통하여 조선이 금단의 땅임을 영국측에 통고하여 다시는 그러한 사건이 없도록 조처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제주도민은 마치 난리라도 난 것처럼 20여 일 동안 생업이 마비될 정도였고, 그 후 도민들을 동원하여 해안가에 환해장성을 수축하여 만일에 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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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11년6월29일 조선왕조실록

이달에 이양선(異樣船)이 호남(湖南) 흥양(興陽)과 제주(濟州)의 바다 가운데에 출몰 왕래하며 스스로 대영국(大英國)의 배라 하면서 이르는 섬마다 곧 희고 작은 기를 세우고 물을 재는 줄로 바다의 깊이를 재며 돌을 쌓고 회를 칠하여 그 방위(方位)를 표하고 세 그루의 나무를 묶어 그 위에 경판(鏡板)을 놓고 벌여 서서 절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역학 통사(譯學通事)가 달려가서 사정을 물으니, 녹명지(錄名紙)라는 것과 여러 나라의 지도(地圖)와 종려선(棕櫚扇) 두 자루를 던지고는 드디어 돛을 펴고 동북으로 갔다.


헌종11년7월5일 조선왕조실록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도희(金道喜)가 아뢰기를, “이양선(異樣船)에 대해서 제주(濟州)에서 사정을 물었을 때에 받은 번물(番物) 여러 가지는 그대로 봉하여 제주로 돌려보내 인봉(印封)해 두고 혹 뒷날 이것을 가지고 증거로 삼을 때를 기다리게 하겠습니다마는, 이 배가 세 고을에 두루 정박한 것이 거의 한 달에 가까운데 상세히 사정을 묻지 못하였습니다.


번인(番人)의 형적은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운데, 일찍이 선조(先祖) 임진년에 영국 배가 홍주(洪州)에 와서 정박하였을 때에 곧 돌아갔어도 그때 곧 이 연유를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한 일이 있었고, 그 뒤 경자년에 또 저들의 배가 제주에 와서 정박한 일이 있으나 잠깐 왔다 빨리 가서 일이 매우 번거롭기 때문에 버려두고 논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은 임진년의 일보다 더 이정(夷情)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있고 사정을 묻는 가운데 청나라 통사(通事)가 있다 하였다 하니, 사전의 염려를 하지 않아서는 안될 듯합니다. 임진년의 전례에 따라 역행(曆行) 편에 예부에 이자하고 황지(皇旨)로 광동(廣東)의 번박소(番泊所)에 칙유(飭諭)하여 금단하게 하도록 청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선조(先祖) 임진년(1832년 순조32년 암허스트호를 말함)

경자년(1840년 헌종6년 2척의 영국선이 제주 상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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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용범선


16 세기까지 유럽에서 군함과 상선의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순수한 군함이라 할 만한 범선은 그 수가 극히 적었다. 1588 년 영국과 에스파니아간의 해전에서도 완전한 군선이라고 할 갈레온선은 양쪽 합하여 약 58 척 뿐이고, 상선을 개조하여 임시로 무장하여 썼다.

그 뒤 17 세기에 들어서 군선과 상선은 구별되기 시작하고, 군선의 수는 급격히 늘어났을 뿐 아니라 배의 크기도 증대되고, 성능도 계속 개량되었다.


군선의 등급 분류

17 세기의 주력함들은 100 문 내외의 포를 장비한 1,200~2,000 톤 크기로 대형화 되었으며, 배들의 계층, 선종이 다양화되어 17 세기 후기에 이들을 1 급함부터 6 급함 등으로 분류하였다.1~3 급함은 직접 함대행동에서 전투를 주도하는 주력함으로서 전열함(ship of the line)이라 하고,


1급함은 사령관이 탑승하는 기함, 2급, 3급함은 일반 전함이다. 4 급함은 순양 및 상선의 호위 등을 임무로 하고, 5 급함은 주력함대에 수행하여 정찰등의 임무수행, 6 급함은 연안순시가 임무였다. 5-6 급함에 해당되는 군선을 Frigate함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해군에 비하면 1,2,3급함은 전함, 4급함은 순양함, 5급함은 구축함, 6 급함은 순시선에 해당된다.


프리게이트함(Frigate) 

18세기 유럽은 제해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해군력 증강에 열중했으며, 우선 거대한 전열함도 필요했지만 보다 작으면서도 성능이 우수하고, 경제적인 군함도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18세기 후기부터 비포가 50문 이하이고 속력이 빠른 프리게이트가 각광을 받게 되었다. Frigate는 원래 경쾌하고 속력이 빠른 호위함이었다. 크기도 나라마다 다르나 대체로 당대의 5급함 내지 6급함 정도였다.


영국은 1645년 처음으로 프리게이트함 Constant Warwich호를 건조했는데, 305톤에 길이 약 100피트,폭 26피트, 포 26문(Demi-culverin 18문, Saker 6문, Minion 2문)을 장비, 선체가 낮은 경구조이며, 충분한 범장을 하여 속력을 빨리낼 수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선체가 커지고, 비포수도 늘어 전열함 구실을 하는 것도 나타났다. 프리게이트가 점점 커짐에 따라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한 소형 프리게이트함이라고 할 수 있는 콜베트함 (Corvertte)이 포 18-20문 정도 장비하고 상선 호송, 순찰 등 원래 프리게이트가 하던 일을 도맡았다.


Frigate 함이 가장 발달한 나라는 미국으로 1776년 독립후 해군을 건설할 때, 유럽처럼 전열함을 건조하지 않고 대형 프리게이트를 건조하여 해군의 주력으로 삼았다. 미국 초기의 프리게이트함으로는,1797년 건조되어 영국과의 전쟁에서 용맹을 날리고, 현재 보스톤항에 영구 보존되어 있는 USS Constitution호로서 그 속력은 13.5노트였다


군선의 장식

16 세기의 군선은 갈레온형선으로서 상갑판 하나만 두고 그 위에 포를 장비하는데 그쳤으나 17 세기의 군선은 보다 대형화된 갈레온형선으로 2층,3층 갑판으로 만들고 포도 2층 3층으로 배열하였다. 범장에 있어서 보다 더 복잡해지고, 갈레온의 특징인 선수의 긴 부리(Beak-head)도 점점 퇴화되기 시작하였으나 여전히 남아있다.


군함 선체의 장식에서 16 세기의 갈레온선은 오로지 기능 위주로 건조되어 별로 장식을 하지 않았으나, 17 세기 들어서 대형군선은 화려한 조각과 현란한 색채로 장식되기 시작, 영국의 제임스 1세는 1610 년 유명한 조선가 피니어스 페트에 명하여 선현과 선수, 선미에 왕가의 문장, 왕관, 동물, 글자등 세밀한 조각을 세겨넣은 호화선 로이얄호(Prince Royal)만들게 하였다.


찰스 1세도 부왕 못지 않게 1637 년 조각과 금박으로 뒤집어 쒸운 "황금의 악마" 라고 불리운 바다의 군주호(Severeign of the Sea)를 만들었다.  그러나 18 세기 들어서는 이러한 풍조는 점차 사라지고 소박한 옛 모습을 찾아 조각도 선수상 정도에 그치고, 채색도 흑색, 갈색등 단순화, 19 세기까지 선수상만은 그대로 유지, 모든 배의 유일한 장식으로 남아있다.

 

 

군선의 함포

유럽에서 함포는 1350 년 경부터 쓰이기 시작, 1485 년 핸리 7 세가 건조한 리젠트호는 포 25문을 장비 하였고, 1571 년 레판토 해전 당시에 갤리선 선수 중심선상에 구경 7인치의 50파운드 포를 장비하였으나, 이는 경포로서 적을 다소 혼란시키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해전에서 함포의 위력을 어느 정도 발휘된 것은 1588 년 영국과 에스파니아의 해전에서 영국의 포격전에 에스파니아가 대패한 것이 시초로 그 후 군선에 함포을 많이 탑재하게 되었고, 이후 함포시대의 막을 연 것으로서 해군 전술의 혁명이었다.

 

 

17,18세기의 함포 종류로는


Cannon Royal, Cannon, Demi-cannon 포 등은 포신의 길이에 비해 구경이 큰 대구경계 포로서 32~68 파운드의 무거운 포탄을 발사하는 것이고, Culverin, Demi-culverin 포는 구경에 비해 포신이 긴 장포신계포로서 18~9 파운드의 포탄을 각각 쓰는 것이었다.기타 Saker, Minion, Falcon, Robinet 포 등이 아주 가벼운 경포에 해당된다 [MR H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