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는 한반도 제주도가 아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434
조선 충청도에 흑우가 대량으로 육성되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435
철종 6년 1855년에 호네트호가 들어 온 곳은 한반도 동해가 아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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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 의 먹구름?
중국의 먹구름이란게 청(CHUNG)의 먹구름일까?
그런데 열강의 중국분할「르프티 주르날·1898」이란 삽화그림을 보면 늑대 손갈퀴 모양을 하고 있는 청관리 모습에서 무엇인가 모르게 강한 음모냄새가 난다.
언듯보기에는 판케익 둘레에 앉아 있는 제국들이 청이 지배하는 CHINA 란 판케익을 고스란히 빼앗긴다는 것에 놀라는 것 같은 표정을 느낄 수 있으며 그 속에 강한 메세지는 내가 차지한 판케익을 왜 허락없이 너희들끼리만 나눠먹느냐 하는 식의 표정이다.
다시말해 원주인은 따로 있고 청이란 늑대역시 늑대심보를 가지고 있는 강탈자 입장임을 알 수 있다.
대륙 CHINA 판케익 주인은 바로 대륙조선이고
먹구름은 대륙조선의 먹구름이라고 해야 맞다.
반도사를 보면 이양선이 몰아닥친 곳은 한반도인 것처럼 풀어 놓고 있지만 그것은 반도사가 의도하는 목적에 의한 조작된 것일 뿐이고 실제 사실은 대륙에 이양선이 몰아닥쳤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한지라고 여겨지는 반도는 그들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오직 관심대상은 대륙이었다.
반도를 서로 나누려고 혈안된 것 같은 것은 한마디로 엉터리 조작이 낳은 결과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기의 역사조작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당시 한반도 뿐만아니라 열도 역시 서세의 특별한 관심을 끌지 못했다고 보인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열도에 일본이 존재하여 한반도 휴전선을 경계로 하고 자본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이 첨예하게 대립된 지역적 구도가 아니었던 시기였다.
오직 그들 서세의 주요관심사항은 대륙이란 크다란 판케익이고 눈이 멀어 있을 때이다.
한반도는 지형적으로 보아도 그렇지만 서세가 판단 할 때 값어치 있는 자원이 별로 없다는 판단을 할 곳이고 열도 역시 섬으로서 지진과 화산대가 관심을 주지 못했다고 보인다.
물론 일본 조차 지금의 열도에 없었던 시기이다.
지금의 열도를 왜구무사집단세력이 차지하고 영토로 삼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혼란일 수도 있다.
서세가 정식으로 왜구무사집단들에게 열도에 이동할 수 있는 허락을 받은 시기는 청일전쟁(시나전쟁)이후 대만을 점령한 이후라고 보이고 확실하게 인정 도장을 받았던 시기는 러일전쟁에서 왜구무사집단세력이 승리한 직후라고 보인다.
아래 사마랑호가 입항 곳의 사진인데 대체적으로 아열대 기후의 지역이다.
그곳이 바로 사마랑호가 입항한 제주도나 우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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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먹구름 이양선의 제주 출몰
제민일보 2008년 11월 18일 (화) 19:01:45
제주 탐라 가파도는 동남아시아 남해 근역에 있었다.
1840년 가파도에 영국함선 상륙…흑우 약탈
침탈 방어 못한 제주목사·정의현감 파직당해
열강의 중국분할「르프티 주르날·1898」
위 풍자그림을 보면 대륙조선의 실체를 얼마나 감추려 하는 것인지 알 수 있게 하는 그림이다. 청 복장을 하고 있는 늑대모습이 주는 상징성은 매우 충격적이다. 5개 제국들은 CHINE 을 분배하는 몫에만 열중하고 있고 뒤편에서 청은 그렇게 분배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표정으로 음흉한 늑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청(淸)도 제삼자란 사실을 알려주는 삽화이다.
나는 뭘 먹어라고? 니들끼리만....
가파도 黑牛 훔쳐간 영국 군함
19세기 조선 해역에는 빈번하게 이양선이 출몰했다. 이것은 쇄국을 고집했던 조선의 어두운 먹구름이었다. 아시아에 동인도회사의 식민지 거점도시가 건설되면서 열강의 쟁탈은 아시아를 제국주의자들의 시장과 원료공급지로 추락시켰다.
조선의 이양선의 출몰은 서양의 위력을 제대로 알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주도 최남단 해역에도 이양선(異樣船)이 나타났다. 이양선이란 무장한 서양배로서 군사 작전을 위해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칭 무적함대이다.
1840년 12월(헌종 6년)에 출몰한 이양선 2척은 영국의 함선으로 제주도 가파도(加波島)에 상륙하여 대포를 쏘며 흑우를 약탈해 갔다. 이 때 쏘았던 대포알의 크기는 둥근 박만 하고, 무게는 30근이나 되었다. 조정에서는 영국군 40여명의 가파도 침탈을 문제 삼아 이를 방비하지 못한 수졸(水卒)의 책임이 크다고 하여 정의현감 강계우(姜繼遇)와 제주목사 구재룡(具載龍)을 파직하였다.
가파도는 제주도 남쪽 모슬포 송악산과 마라도 사이에 있는 납작한 섬이다. 모슬포항에서 해로로 5.5㎞거리이며 도항선을 타고 가면 30여분 정도 걸린다. 면적은 84㏊, 동서의 길이가 1.5km, 남북의 길이가 1.6㎞ 쯤. 해발 고도가 18m 내외이다. 섬이 낮고 평평해서 그런지 이미 오래전부터 목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제주대정정의읍지」에는 '가파도 별둔장(別屯場)의 둘레는 10리, 그 목장의 소는 103마리이며, 이를 감독하는 관리는 모슬진 조방장 겸 색리(察色吏) 1명, 군두 1명, 테우리(牧者)가 8명이다. 지난 신미년(영조 27)에 제주목사 정언유(鄭彦儒)가 가파도에 목장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가파도의 초지는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이미 성종 때부터 목장이 설치 돼 운영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정언유에 이르러 국가 제사용 흑우(黑牛)가 가파도에 방목된 것이다. 1793년경 가파도에서 길러진 흑우는 75마리였고, 1843년에는 72마리였다. 영국의 함선이 흑우를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자 헌종 8년에 목사 이원조(李源祚)는 가파도의 목장을 폐쇄하고 사람들을 살게 하였다.
벨처가 만난 정의현 관리.
우도에 나타난 사마랑호
「헌종실록」11년(1854) 6월29일조에는 '이양선이 호남·흥양(興陽)과 제주 바다에 자칭 대영국선(大英國船)이란 배가 출몰하여 우도에 이르러 흰색 깃발을 꽂아 놓고, 바다의 수심을 측정하고, 돌을 쌓아서 회(灰)를 칠하여 그곳의 방위를 표시하였다.
영국인들은 나무 기둥 세 개를 묶어 놓고 그 위에 경판(鏡板)을 올려놓아 절을 하면서 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제주 역학통사(譯學通事)가 달려가 실정을 물었으나 이름을 적은 종이와 제국지도(諸國地圖), 종려선(棕櫚扇) 2자루를 주고 돛을 올리고 동북쪽으로 사라졌다'고 하였다.
같은 내용이 「탐라기년(耽羅紀年)」에도 실렸다. '여름에 이양선 1척이 우도에 정박하였다. 이양인의 모습은 눈은 움푹하고 코는 높고 눈동자는 푸르고 머리는 양털과 같았다. 그들 가운데 한사람이 복장과 용모가 달랐고 한문을 아는 자가 있었는데 오아순(吳亞順)이라는 사람이었다.
때때로 포를 쏘니 소리 때문에 산악이 진동하였다. 작은 배를 타고 줄자로 섬을 측량하였다. 매번 100보마다 돌을 쌓고 회를 칠하고는 그 속에 쇠자루(鐵釘)를 끼웠다. 그들의 우두머리(上將)가 삼읍 연안을 두루 묻고 말하는 대로 즉시 그림을 그렸다. 목사 권직이 놀라 마병(馬兵)과 총수(銃手), 성의 군사를 모아 이에 대비하였다. 그해 겨울에 환해장성을 수리 축조하였다.'
제주도 우도(牛島)에 나타난 배는 영국 군함 사마랑호(H.M.H.Samarang)였다. 이 군함의 함장은 에드워드 벨처(Edward Belcher, 1799~1877)였고, 1845년 5월부터 8월까지 제주도와 거문도를 항해하면서 조선의 남해안을 탐색하는 임무를 띠었다. 오아순은 대청국(大淸國) 광동성(廣東省) 광주부(廣州府) 향산현(香山縣) 출신으로 나이는 24세였다.
영국인(紅毛人)들은 오아순을 개방항구였던 광주(廣州)에서 품삯을 주고 통역으로 고용하여 우도까지 오게 한 것이다. 오아순은 사마랑호는 영국의 황제가 파견한 배로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린다고 하였다. 그들은 가는 데마다 경치 좋은 곳에 탑을 쌓고 기를 꽂아 하늘에 기원하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 사마랑호에는 모두 200명의 군인들이 타고 있고 실은 물건들은 모두 대포, 화약, 식량이라고 했다.
사마랑호는 세 개의 돛대를 가졌다. 가운데 돛이 제일 크고 높았다. 배 좌우 삼판(杉板)에는 수십 문의 대포가 설치돼 있었다. 배의 이물과 고물은 평평하고 낮은 편이었다. 사마랑호는 1845년 5월28일 제주 별방진 아래 어등포(魚登浦) 앞 바다에 머물렀다.
작은 배 5척으로 해안에 상륙하여 돌을 쌓아 회를 칠하고 제단을 설치해 제를 지내고는 돌아왔다. 5월29일에는 화북진(禾北鎭) 아래 건입포(健入浦) 앞바다에서 정박을 했다. 30일에는 자신들이 쌓은 돌탑을 제주도민들이 훼손했다고 하여 항의하는 듯이 대포를 쏘았다.
81명의 군인들이 완전무장을 한 채 육지에 내리려고 했으나, 조선인 문정관이 무장해제하라는 요구 때문에 다시 배를 타고 대정현 지역으로 갔다. 이들은 날마다 자리를 옮기면서 정박지마다 이와 같은 행위를 반복하였다. 6월 2일, 그들은 죽도(竹島)에서 나와 도원포(桃源浦)에 상륙하여 나무 세 그루를 묶어 그 위에 경판(鏡板)을 올려놓고 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들은 그 후에도 마라도, 범섬 등 섬을 두루 살피다가 6월10일에 다시 우도로 돌아왔다. 11일에 우도로 찾아간 통사 안재득에게 3가지 물품을 던져주고 동북쪽 물마루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제주목사 권직은 황망히 장계를 올렸다. '배의 생김새와 사람 모양을 볼 때 지난 경자년(1840)에 소를 도살하고 배에 싣고 간 대영국인라고 칭하는 사람들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들은 무척 험상궂고 모질었고, 대포를 쏘고 칼을 휘둘러 백성들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큰 배는 바다 한 가운데 가지런히 서 있었고, 왕래하는 작은 배들은 나는 새처럼 빨라서 추격해도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호랑이 우리에 집어넣으려고 했지만 도리어 개천에 풀어놓은 물고기처럼 되었습니다'라고 사마랑호의 제주도 출몰 상황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제주목사 권직은 변방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하여, 정의현감 임수룡, 제주판관 송익렬, 대정현감 한정일을 파면하고 각 진(鎭)의 장수들을 중벌로 다스릴 것을 건의하였고, 그들이 남기고 간 3가지의 물품은 봉하여 비변사로 올려 보냈다. 사마랑호가 제주도 삼읍 해안에 머문 기일은 20일 정도였다.
중국의 개방항구
영국 함선이 가파도와 제주도 인근에 나타난 것은 세계적인 정세였다. 당시 영국은 중국 동남해안에서 여러 번 해전을 거쳐 마침내 아편전쟁(1839~1842)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842년 8월 청나라 조정과 남경조약(南京條約)을 성사시켰다.
조약의 항목에는 '치외법권(영사의 재판권)과 낡은 중국 관행의 개선, 배상금, 적당한 관세와 외국인의 세무 관리와의 직접 교섭, 중국의 모든 외부인에 대한 최혜국 대우, 모든 방문자와의 상업의 자유와 독점의 금지'가 들어 있었다. 청조는 영국인들을 달래기 위해서 척박한 홍콩 섬을 영구히 양도하고, 광주(廣州), 하문(廈門), 복주(福州), 영파(寧波), 상해(上海) 등 5개의 항구를 개방했다. 하지만 남경조약을 보는 시각은 서로가 달랐다. 청조(淸朝)에서는 구체화된 조약의 내용을 전부 받아들이지 않았고, 영국 또한 조약의 특권에 만족할 수 없었다. 이 조약은 결과적으로 영국과 프랑스기 두 번째 전쟁을 치러 1858년 천진조약(天津條約)을 얻어낼 때까지는 실제로 확립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개방항구들을 대형 창고가 있어서 언제나 소란스러웠고 기계를 대신하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벅적대었다. 외국인들은 이들 중국인 노동자들을 가리켜 쿨리(coolie)라 불렀다. 즉 '힘든 일을 하는(苦力) 사람들'이란 뜻이다. 개방된 항구에는 외국인 회사 경영자인 타이판(Taipan, 大班) 아래 외국인에게 고용된 중국인 매판(買辦, comprador)이 일을 감독했다.
이들 항구 주변에는 '외국조계(外國租界)'가 중심가를 이루었다. 외국조계는 조약상 자국의 보호를 받을 수 있어서, 하나의 독립된 도시 국가처럼 중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안정적으로 외국인 사회를 형성할 수 있는 치외법권 지대였다.
사실 그 안정적인 보장은 영국함대의 감시와 보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남경조약 때만해도 개방항구들은 5곳에 지나지 않았지만, 20세기 초가 되면 중국의 개방항구의 숫자는 80곳을 넘어섰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의 열강들에 의한 조약의 결과였다.
개방항구의 이국인 사회는 처음에는 중국인과 섞여 살았지만, 점차 하천, 운하, 수로 섬에 의해 자연스럽게 중국인 사회로부터 분리되었다. (John King Fairbank and Merle Goldman, 1992) 서구 열강의 침략은 서서히 조선의 하늘에도 먹구름을 몰고 오기 시작했다.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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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S SAMARANG
Sloop 6th Rate (Atholl Class 1816.) Launched 01/01/1822 at Cochin (East India Company). Armament 28 guns, (20 x 32 pdr carronades, 6 x 18 pdr carronades, 2 x 9 pdrs.) Normally 175 crew.
Dimensions & tons: 113ft 8in, 94ft 8+in x 31ft 6in x 8ft 9in. 499 91/94 bm
Designed by the Surveyors of the Navy and constructed of teak; Hulked in 05/1847 and employed as a guardship at Gibraltar, broken up 10/1883.
Battle Honour China 1839 - 42
Eligible Actions & Operations of the Samarang for the crew to qualify for the China Medal 1842
a) 07/01/1841 Bombardment, landing and capture of Chuenpee Hill Forts and fortifications at Tycocktow, both situated guarding the seaward approaches to Canton on the Bogue - also known as Bocca Tigris.
b) 26/02/1841 Bombardments, landings, capture and destruction of nearly all the forts and embrasures on both sides of the Bocca Tigris up to Canton.
c) 12/03/1841 Ship's Boats attack up a narrow and intricate channel on the only remaining fort protecting approaches to Canton at its northern entrance via the Macao passage. The capture of this fort cut the city's last remaining line of communication for daily subsistance supplies.
China Medals 1842 awarded to HMS Samarang
Officers - 20 + 1 RM. Crew - 101. Royal Marines - 25. Total - 147
Discharged Dead: Crew - 0. Royal Marines - 0. Total - 0
History P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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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China War 1841 - 1842 John Le Geyt
This was the first campaign medal approved for award to military and naval forces by the British Government, and though it was awarded to any serviceman present at any one of thirteen seperate actions, no consideration was given to the concept of awarding additional clasps
Generally, the First China War Medal wa awarded to those who served with distinction in any of the following operations;
In the Canton River in operations of 1841.
At Chusan in 1841 and 1842.
At Amoy, Ningpo, Chinpae, Tsekee, Chapoo, in the River Woosung, in the Yangste Kiang, and at the assault on Ching-Kiang-Fo.
This was truely a "Combined Operation" campaign with some fifty British Warships taking part and a small number of British and Indian Regiments. The reasons for the war were more complex than the usual image of the Chinese being forced to accept the Opium Trade though this was an important factor, but politics aside, the hardships the British faced on this campaign from hostile action and disease make this a hard earnt award.
John LE GEYT.
China War Medal 1842 named to "John Le Geyt. HMS SAMARANG"
John Le Geyt was born in St. Saviours, Jersey in 1812 with his usual stated place of residence as Gorey, Jersey.
He joined HMS Samarang at Portsmouth on 23rd November 1836 as a Volunteer and graded an AB Seaman which would indicate he had previous maritime experience.
HMS Samarang was built by the East India Company at Cochin, launched in 1822, she was commissioned at Portsmouth in June 1824 as a Frigate (6th rate), later re-classified as a Corvette and by 1839 carried 26 guns. Built from Indian Teak that was resistant to worm, she cost £19,587 and the class were often referred to, rather disparagingly, as "donkey frigates". In 1847 she was hulked as a guardship at Gibraltar, and was sold in 1883.
In happier times however, John Le Geyt sailed with her in January 1837 operating off the South American station where she visited Rio Janeiro and Monte Video amongst other ports. In October 1840 she reached Macao to join the British Fleet in operations off the China coast.
On the 7th January 1841 she was involved in the bombardment and capture of the Chuenpee Hill Forts situated guarding the seaward approaches to Canton on the Bogue. Operations on this day resulted in the ceding of Hong Kong to the British.
The 26th February 1841 however required the 'Samarang' to engage in further operations resulting in the capture and destruction of nearly all the fortifications on both sides of the Bocca Tigris as far as Canton.
The following month, 12th March saw operations reminiscent of the Nelson era when the inner passage from Macao to Whampoa was forced by the H.E.I.C.S. Nemesis with boats from the 'Samarang' and 'Atlanta'. The attack was made along a narrow and intricate channel on the remaining fort protecting the approaches to Canton, at its northern entrance via the macao Pasaage. The capture of this fort cut the cities last remaining line of communication.
Shortly after this the 'Samarang' returned to Macao and John Le Geyt was discharged on the 25th August 1841 though it is not known if he joined another ship as was the norm for the time. During his service on 'Samarang' he had served as Captain of the Foretop (1838) and Quarter Master from May 1839.
John Le Geyt's China Medal is one of only 121 awarded to the 'Samarang' crew and may be considered fairly scarce, especially to a Channel Isla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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