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사건

회민봉기-염군봉기(捻軍起義)와 둥간혁명(東干)

한부울 2009. 8. 30. 18:26

제주도의 민란과 회민(回民) http://blog.daum.net/han0114/17049014

철종과 함풍제는 동일인물인가?(2) http://blog.daum.net/han0114/17049405 

세계전쟁사 사상자 수 http://blog.daum.net/han0114/17049423 

전쟁 비용의 역사-History of War Cost  http://blog.daum.net/han0114/17044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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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민봉기, 임술농민항쟁-염군봉기(捻軍起義)와 둥간혁명(東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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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53 청, 태평천국 진압비: 19억4400만 달러, 1조 7500억 원

희생자 수 : 20,000,000 - Taiping Rebellion (China, 1851-1864)

   

1867-73 청, 회민반란 진압, 2400만냥, 27억 달러, 2조 4천억 원

희생자 수가 기록에는 12,000,000 명이라고 하지만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

 

둥간혁명은 1648~1878 230년간 회족과 위구르 이슬람 회교 반란 인데 1648년 처음 회란 발생 다음해에 인조가 죽고 효종이 등극한다.

인조(仁祖, 1595년~1649년, 16대 재위 기간: 1623년~1649년)

병자호란 삼전도사건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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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농민봉기, 제주민란, 진주민란, 삼남민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만 회민봉기일 가능성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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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동학교주 최제우가 경주에서 동학을 창시하였다.

1862년 진주민란을 시발점으로 하여 삼남(충청˙전라˙경상도)지방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임술 농민봉기라 총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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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농민항쟁(壬戌農民抗爭)


임술년인 1862년(철종 13)에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일련의 농민봉기.

우리나라 역사에서 봉건사회의 제 모순을 가장 집약적으로 표출했으며, 농민이 역사적 실체로서 결집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봉건적 생산 관계하에서의 기본 모순인 지주 대 작인 간의 소유권투쟁을 밑바탕에 두면서, 농민층 내부에서 소유와 경영의 분화를 반영한 부농과 빈농의 대립이 상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농민항쟁을 야기 시킨 직접적 계기이자 현상적인 문제는 국가에 의한 부세수탈의 폐단이었다. 봉기농민들은 청원서를 통해 부세문제의 해결을 요구조건으로 내걸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조세량의 증가문제와 관속들이 저지르는 부정행위의 시정이었다. 또한 농민들은 사대부 토호에 의한 향촌의 무단지배에 대해 항의하고, 사대부에 의한 갖가지 사적 수탈, 산림의 사점화(私占化), 서원묵패를 내세운 징세행위의 문제점을 제기했다.


임술농민봉기는 2월 4일 경상도 단성현에서 발생한 이후 전국의 약 70개읍에서 발생했다. 즉 경상도단성·진주·개령·인동·함양·선산·상주·성주·울산·군위·비안·현풍·거창·밀양·신녕·연일·경주·창원·남해, 전라도의 능주·장흥·순천·무주·낙안·순창·창평·용담·옥과·남평·구례·장수·진안·동복·화순·흥양·나주·제주(정의·대정 포함)·여산·장성·익산·영광·진도·금산·진산·임피·금구·부안·함평·강진·고산·태인·정읍·고창·무장·무안 등이며, 충청도의 경우 은진·공주·회덕·청주·회인·문의·임천·진잠·연산·진천·청안에서 봉기가 발생했다. 그밖에 경기도 광주와 황주, 함경도 함흥의 봉기를 들 수 있다. 농민항쟁의 일반적인 형태는 빈농들이 봉기에 적극 나서고 몰락양반·농촌지식인·재지명망가와 같은 별도의 지도층이 존재했던 경우이다. 봉기의 조직화 과정으로 향회(鄕會)가 주목되는데, 이는 기존 관(官)주도의 향회와는 달리 봉기에 참여한 각계각층의 의견을 모으고 투쟁방향을 상의하는 장으로 민회(民會)·이회(里會)·도회(都會)라 불렸다. 이 모임에서는 불법수취를 합리화시킨 관주도 향회의 결정을 저지하고 항의하는 방법을 논의했다. 우선 연명(連名)하여 관아에 호소하는 등소(等訴)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는 합법적으로 용인된 저항수단이었다. 그래도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못하면 전면봉기를 통한 실력행사를 계획했다.


한편 민(民) 주도의 향회나 전면봉기 과정에서 일부 면임·이임의 가담과 공동체적 강제력(벌전징수·가옥파괴)이 동원되는 방법을 통해 농민들이 조직적으로 동원되었다. 이에 비해 초군(樵軍)들이 참여한 봉기는 평소 공동노동 조직으로서 자체 결합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향촌 내 지도층인 토호 양반에 의해 주도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봉기에 나서고 있었다.


농민들의 공격은 대부분 조세징수를 담당했던 이서들에게 집중되었다. 반면 수령은 국왕이 임명한 신분이라 하여 크게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 농민들이 봉건국가의 지배체계를 구조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한계였다. 그런데 제주·옥과·함평·익산에서는 부정한 수령을 구타하여 가마에 태운 후 마을 경계선 밖으로 추방시키는 적극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는 수령의 읍리 지배를 실질적으로 부정한 행위였다. 또한 농민들은 동헌 습격 이후 수령과 결탁하여 향권 장악에 앞장섰던 토호와 사대부의 집, 고리대 및 고율의 소작료를 통해 농민수탈에 앞장섰던 지주 부민들의 집도 공격함으로써 반봉건항쟁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했다. 이때 농민들은 짧은 기간이나마 읍권을 장악하고, 향회를 통해 자신들이 선호하는 인물을 핵심적인 관속(官屬)으로 임명하며, 문제가 된 조세장부를 열람하는 등 자치적으로 향촌을 지배하기도 했다. 읍권 장악의 사실이야말로 단편적이나마 당시 농민들의 정치적인 지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일면으로 여겨진다. 농민항쟁에 대한 대책으로 나온 정부의 삼정이정책은 농민들이 봉기를 통해 얻어낸 구체적인 성과물의 하나였다. 이후 대원군 정권이 대내적인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실시했던 일련의 조세개혁책은 임술농민봉기에서 농민들이 제기하고 투쟁으로 획득하고자 했던 삼정이정책의 일부를 계승한 데 불과한 것이었다.


철종 13년인 1862년에 발생한 임술년의 농민항쟁은 강제검의 난 이라고도 불리운다. 같은 해 2월에 진주에서 불이 붙어 삼남지방으로 번졌던 육지의 민란에 자극을 받아 일어난 것으로 대정현 사람 강제검과 제주 봉개리 사람 김흥채 같은 이들이 중심이 되어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일으킨 것이다. 9,10,11월에 걸쳐 3차례나 봉기하였고 3차 봉기 때에는 다음해 1월까지 제주목 전체를 장악하기도 하였다. 場稅를 지나치게 많이 거두는 것, 부역을 불공평하게 매기는 것, 또 환곡에서 부정이 많이 저질러지는 것 등의 이유로 발생하였는데 신분적 차별과 더불어 과도한 조세부담을 져야 했던 대다수 도민들은 이러한 항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고 봉건정부는 이러한 도민들의 요구를 들어줄 능력이 애초에 없었기 때문에 봉기는 다음의 봉기를 잉태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읍정을 장악하기까지 했던 봉기는 다음해 1월에는 진압되고 장두인 강제검과 김흥채는 체포즉시 처형된다.

 

三南民亂 조선 말 1862년(철종13) 삼남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봉기사건.

농업을 위주로 한 자연경제를 재정적 기초로 삼던 조선은 국고수입을 전적으로 농민에게 의존했다. 그런데 국가의 재정적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농민의 부담은 과중해졌다. 또한 조선 말 삼정(三政)의 문란과 지배층의 과중한 착취, 세도정치의 불합리성, 문호개방 이후 급속히 증가한 국가지출 등은 농민에게 2중 3중의 부담을 갖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세의 징수관인 아전(衙前)의 행패 또한 극심하였다. 마침내 1862년 2월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원인은 ① 양곡의 횡령 ② 취잉(取剩;환곡의 이자를 많이 받음) ③ 배호백징(排戶白徵;호별로 강제징수하는 세금) ④ 공갈 ⑤ 인징(靭徵;불법으로 전세를 받는 것) 등이었다. 이에 전교리 이명윤(李命允)이 주축이 되어 향리의 농민을 동원·훈련시켜 어느 정도의 조직적 민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뒤늦게 조정에서는 2월 29일 박규수(朴珪壽)를 안핵사로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농민의 분노와 항쟁을 자극해서 민란은 진주에서 삼남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3월에는 전라북도 익산(益山)에 민란이 일어나고 4월에는 개령(開寧;金泉)·함평(咸平), 5월에는 회덕(懷德)·공주(公州)·은진(恩津)·연산(連山)·청주(淸州)·여산(勵山)·부안(扶安)·금구(金溝)·장흥(長興)·순천(順天)·단성(丹城)·함양(咸陽)·성주(星州)·상주(尙州)·거창(居昌)·울산(蔚山)·군위(軍威)·인동(仁同) 등 삼남전역에 걸쳐 민란이 일어났다. 정부에서는 박규수를 비롯하여 각지에 안핵사·선무사(宣撫使)·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는 데 힘썼다. 민란주모자는 극형에 처하고 탐관오리를 징계하는 한편, 삼정의 근본적인 개혁책을 강구하였다. 한편 박규수 등 안핵사는 민란의 원인이 국가재정의 낭비와 민생의 궁핍에 있음을 지적하고 삼남지방에서의 환곡제도의 폐지를 상소하였다. 조정은 5월 26일 삼정의 개혁을 위한 이정청(釐整廳)을 설치하여 삼정이정절목을 공포하였다. 그 내용은 군정(軍政)과 전정(田政)에 있어서는 민원이 없도록 개혁했으며, 환정(還政)에 대해서는 23개조의 수습방법을 들어 시정했다. 이렇게 해서 민란이 잠시 수습되었으나, 그 해 여름 한발과 수해가 들자 민심이 다시 동요되어 9월에는 제주도, 10월에는 함흥(咸興), 11월에는 광주(廣州), 12월에는 창원(昌原)·남해(南海)·황주(黃州) 등 각지에서 대규모의 민란이 일어났으며,


이듬해 여름에는 서울 한복판에서 금위영(禁衛營)의 군졸까지 소요를 일으켜 민란은 기세를 더하였다. 철종이 죽고 고종이 왕위에 올라 대원군이 집권, 서정을 쇄신하고 남인·북인 등을 등용하여 인재를 널리 구하게 되니 자연히 민란도 가라앉게 되었다. 삼남민란은 결국 조선봉건사회의 한 붕괴과정이기도 했다.[야후백과]

 

5개 군영(軍營) : 조선의 수도와 그 일대를 방어하기 위해 조직된 훈련도감(訓鍊都監),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 총융청(摠戎廳), 수어청(守禦廳)의 5개 군영(軍營)을 말한다

 

금위영 [禁衛營] : 수도(首都) 서울을 호위하고 지키는 영문으로서 다음과 같은 관직이 있다. 도제조(都提調 : 영의정이 겸임함), 제조(提調 : 병조판서가 겸임함), 대장(大將), 중군(中軍), 별장(別將), 천총(千摠), 기사장(騎士將), 파총(把摠).

 

1863년 금위영(禁衛營)군졸들은 녹봉으로 받은 쌀의 질문제로 소요를 일으켰다.

왕실이 있는 수도 근접에서 방어하는 훈련도감 금위영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은 철종죽음과 연계 할 수 있는 심각한 일이다. 때문에 둥간혁명(東干)Dungan revolt 과 흡사하다. 이때부터 북양군벌들이 나서 진압을 주도하면서 자연스럽게 대륙조선 대신 청을 혼입한 시기가 아닌가 여겨진다.

 

1863년 음력 12월 8일에 철종 재위14년, 33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동학교주가 최제우가 체포되었다.

남해에서도 민란이 발생했다.

대원군 서원철폐령-1868년과 1871년 서원 1700여 곳 중 47곳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고 위패를 땅에 묻을 것을 명했다

서원을 성리학만 위주한 것이라고 보면 아주 잘못된 판단이다.

서원은 모든 종교를 불문하고 두루 평등하게 학문을 연구하는 서원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한 서원을 철폐한다는 것은 그러한 공평성을 파괴하고 일거에 말살하겠다는 정책문제에서 또 다른 반발을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이 되었음이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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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民蜂起

 


雲南省에서 발생한 杜文秀起義(Panthay Rebellion1855-1873)

둥간혁명(東干):섬서성(陝西省)·감숙성(甘숙省)을 중심으로 발생한 봉기(1862-1873)


중국의 이슬람교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서아시아와의 연결을 유지해 왔다. 18 세기에는 메카나 예멘의 나크슈반디야 교단에서 배워 온 지도자들에 의해 두개의 계통의 신비주의가 중국 서북부에 밀어닥쳤다.


하나는 마래지(馬來遲 1681-1766:甘肅省河州出身회교學者)에 조직 된 쿠피야교단(虎夫耶, Khufiya), 한개는 마명심(馬明心1718-1781甘肅省遷金出身무슬림 회교학자)에 조직 된 쟈후리야 교단(哲赫林耶 Jahriya)이다. 이러한 교단은 보다 전통적인 수나파와 공존하고 있었다. 쿠피야는 청의 지배를 용인했기 때문에 로교(老敎)라고 불려 보다 과격한 쟈후리야는 신교(新敎)라고 불렸다.


청의 관료들의 부패와 이슬람교에의 탄압에 대해서, 쟈후리야의 회족과 사라르족(撒拉族 Salar)은 1781년과 1783년에 봉기 했지만, 곧바로 진압되었다.


사라르족(撒拉族 Salar):청海省의 循化撒拉族自治區、化隆回族自治區、甘肅省의 積石山保安族東현族撒拉族自治區、新疆 이리 카자크 自治州 거주


반란


1862년, 태평천국과 염군(捻軍:華北의 武裝勢力)이 섬서성에 들어가자 漢人은 방위를 위해 단련(團練:淸代地方民兵制度)을 조직했다. 그 결과 漢人을 무서워한 회민도 무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 대립이 깊어진 결과, 회민이 태평천국에 호응하여 봉기했다. 초기의 지도자에게는 任武, 赫明堂, 馬生彦, 馬振和, 白彦虎등이 있었다. 동시기에 녕하(寧夏)에서도 馬兆元과 馬化龍 지도로 회민이 봉기했다. 섬서성의 회민군은 청조가 태평천국의 대응에 쫓기고 있는 동안에 중국 황화강의 지류유역의 섬서 중부에 세력이다. 봉기군은 서안을 포위했지만, 1863년 가을에 흠차대신(欽差大臣) 다륭아(多隆阿)에 패배했다.


태평천국의 붕괴 후, 좌종당이 인솔하는 상군(湘軍)이 섬서에 들어갔다. 좌종당은 염군을 먼저 토벌하고 나서 회민군을 넘어뜨린다고 방침을 정하고 1866년에 회민군은 감숙성에서 철퇴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좌종당은 또 면이나 곡물 등의 농업을 장려하여, 한층 더 다른 지역으로부터의 재정원조를 받았다. 이렇게 해 보급을 확보한 좌종당은 1869년에 류송산(劉松山)를 파견하여 가장 중요한 쟈후리야의 리더 마화용에의 공격하여, 감숙성 북부에 있는 마화용의 거점인 금적보(金積堡)를 포위했다. 16개월의 포위의 후, 마화용은 항복해 처형되었다. 몇 천의 이슬람교도가 중국을 피했다.


좌종당의 다음의 목표는 란주(蘭州)의 서쪽에 위치한 감숙성과 티벳의 통로이며 회민이 대부분 거주하고 있는 河州(現在 臨夏市)으로 갔다. 河州는 마 점오의 회민군에 의해 지켜지고 있었다. 마점오는 쟈후리야는 아니고 현실적인 쿠피야였다. 그 때문에 1872년에 좌종당의 권유에 응해 투항하여, 거점을 양도하면서 청군에 편입되었다. 그 때문에 河州의 회민은 좌종당의 회민 분산 이주 정책(洗回:회교청소)을 피할 수 있었고 공동체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河州의 회민군이 가세한 좌종당은 河西回廊으로 나아가려고 했지만, 좌방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西寧의 확보를 우선했다. 서녕에는 대규모 회민의 공동체가 있어, 섬서성으로부터 온 많은 난민을 보호하고 있었다. 3개월의 전란 후, 서녕은 좌군의 지휘관 류금당의 손에 떨어져 회민군의 지도자 마계원(馬桂源:甘肅省 西寧 현재 靑海省 西寧市出身)이 잡혀 수천인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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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회랑(河西回廊:하서주랑, 감숙주랑)는 동쪽은 烏鞘嶺로부터 시작해, 서쪽은 옥문관, 남북은 남산(기연산맥과 阿爾金山脈)과 北山(馬鬃山, 合黎山, 龍首山)의 사이의 길이 약 900 km, 幅數km로부터 근 100 km와 불규칙한, 서북-동남 방향에 치우치는 좁고 긴 평지이다. 회랑의 형태를 하여, 황하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하서회랑으로 불린다. 지역에서는 甘肅省과 蘭州와 6,5000 m급의 기연산맥을 水源으로 하는 사막 하천에 적셔지는 오아시스 都市群,  河西四郡:武威(涼州), 張掖(甘州), 酒泉(肅州), 敦煌(瓜州)를 포괄한다. 민족은 다수에 있는 漢族, 몽고족, 유고(裕固族), 티벳족등의 민족이 거주한다. 한의 무제가 河西를 열어, 무위, 장액, 酒泉, 돈황의 사군을 연결하고, 내륙의 新疆에 이어지는 중요한 통로이며, 고대의 실크로드의 일부분으로서 고대 중국과 서방 세계의 정치·경제·문화적 교류를 진행시킨 중요한 국제 통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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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 권고를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회민들이 마지막 감숙성의 거점인 숙주(현재의 酒泉市)에 틀어박여 저항을 계속했다. 좌종당은 보급을 정돈한데다가, 1873년부터 1만 5천의 군사로 숙주를 포위했다. 10월에 숙주는 함락 하였고, 지도자인 마문록(馬文禄)등 7천명이 처형되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감숙성 남부로 이주 당했다. 蘭州에서 돈황에 이르는 河西回廊을 회민의 무인지대로 하여, 동쪽 트르키스탄과의 연결을 끊었다.


백언호(白彦虎)가 인솔하는 회민군은 동쪽 트르키스탄의 야크브·베크(Yakub Beg, 1820- 1877.5.16)의 아래로 피하고 나중에는 러시아로 피했다. 백언호에 따른 회민의 자손이 현재의 둥간(Dungan, 東干)이다. 이 봉기의 결과, 많은 회민이 살해되었고 섬서성에서는 전란전에 70~80만 있던 회민이 10년 후에는 2~3만으로 감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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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군봉기(捻軍起義, Nien Rebellion 1853~1868)


捻軍은 태평천국과 동시기에 청에 반항한 화북의 무장세력. 념이란 화하 북방淮河北方의 방언으로, 한가닥 한가닥의 실 즉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하는 의미이다. 념군의 기원은 捻子라고 하는 유민(遊民)의 집단에서 安徽省・河南省일대에 확대되었다.


1852년의 기근으로 가입자가 증가하면서, 18명의 수령이 회합, 장락행을 맹주로서 활동이 활발화했다. 1853년, 태평천국이 북벌을 개시하면서, 安徽省・河南省의 념군은 이것에 합세해 도처에로 봉기했다.


1855년, 황하의 제방이 터지면서, 山東省・安徽省北部・江蘇省北部에 많은 사람들이 물난리을 만나 난민이 되어, 념군에 가입했다. 념군은 박주에서 장락행을 大漢盟主라고 하고, 노랑·흰색·남·흑·홍의 五旗軍制를 제정하여(청의 8기의 실체가 아닌가 여겨진다)치하집(雉河集)을 근거지로 했다. 수십만인이 모여, 淮河의 남북을 념군이라고 하는 상황이었다. 다음 해, 교통의 요충의 영주潁州 부양(阜阳, Fuyang) 삼하첨(三河尖)을 점령해, 태평천국의 陳玉成과 긴밀한 제휴가 되었다. 1858년부터 1862년까지 념군은 山東・江蘇・安徽를 전전 한다. 여기서 청조는 몽고족의 용장 센게린첸(僧格林沁,

Sengge Rinchen 1811-1865)을 투입했다. 1863년, 센게린첸은 치하집을 공략하고, 장락행(張楽行)을 잡아 처형했다.


1864년, 태평천국이 멸망 하자 태평천국의 遵王의 뢰문광(頼文光)은 장락행의 조카의 장종우(張宗禹)와 연합하여 조직을 개편했다. 뢰문광은 념군의 부장에 태평천국의 王号를 하사받고 10만명의 기병을 가지게 되었다. 1865년, 념군은 산둥성의 조주(曹州:菏沢市)에서 센게린첸의 기병 부대를 괴멸시켜, 청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청조는 증국번(曽国藩)에게 념군의 토벌을 명하여 증국번은 湘軍・淮軍 8만을 인솔하여 맞았지만, 념군은 증극번의 포위를 돌파하고 湖北省에 들어갔기 때문에, 증국번은 흠차대신이 해임되어 이홍장에 대신했다.


1866년, 념군은 동서로 나누어져 동념군을 뢰문광·임주·리온태가 지휘하고, 서념군은 장종우·구원세·장우작이 지휘하여 섬서성에 들어갔다. 동념군은 산둥성에서 이홍장에게 포위되고 큰 타격을 받았다. 서념군은 좌종당과 전투를 했지만 동념군을 구원했다. 1868년, 동념군은 山東省의 교래하(膠莱河)에서 전멸하고 뢰문광이 체초되었다. 서념군은 保定・天津에 쳐들어갔지만, 큰 비로 기병이 움직이지 못하고 괴멸하여, 장종우는 행방불명이 되었다(일설에 투신자살설).


이렇게 하여 수십년에 걸쳐서 일어난 安徽・河南・山東・江蘇・湖北・陝西・山西・直隷의 8성을 유린하던 념군의 싸움은 종결되었다.

 

前期捻軍

黄旗:張楽行(大漢盟主)

白旗:龔得樹(軍師)

黒旗:蘇天福・王貫三

紅旗:侯士偉

藍旗:韓奇峰


後期捻軍

遵王頼文光

梁王張宗禹

荊王牛宏升

魯王任柱

幼沃王張禹爵

魏王李蘊泰

淮王邱遠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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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이의 란

 


판제이의 란(杜文秀起義 영어:Panthay Rebellion)은, 1856년부터 1873년에 걸쳐 현중화 인민 공화국의 雲南省에서 발생한 회족주도에 의한 이슬람교계 소수민족들이 청조에 대한 대규모 반란이다. 판제이는 버마인(현 미얀마)에 의한 운난회민의 호칭이다. 이 사건은 중국에서는“두문수기의”로 불리고 있다.


반란의 원인


판타이의 란은 1853년에 주석 광산에서 일하는 회족과 한족의 노동자의 대립이 폭동으로 발전하여, 다음 해에 청조 당국이 반란 진압에 회족의 학살한 것이 원인이다. 당초의 반란의 지도자의 혼자서 있던 마 덕신(馬德新 Ma Dexin 1794年-1874年) 즉 운남서 회교울라마(Ulema)는 자신의 영향력의 증대에만 집착하여 아마 보신을 위해서 1861년에 청조에 투항했다. 계속 항거하던 杜文秀는 영창부(현保山市) 출신의 회족이다.


울라마(Ulema)는 '학자'를 뜻하며 주로 이슬람 법의 법학자를 말한다.


경과


1856년, 반란군은 운남의 서부 도시 大理를 점령하고 그곳을 본거지로 하여, 청조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平南국을 수립했다. 그들의 지도자 두문수는 술레이만·이븐·아브드·앗라후만이라고 칭했지만, 일반적으로는 술탄·술레이만으로서 알려져 있다.


반란군은 1857년, 1861년, 1863년, 1868년의 4회에 걸쳐서 운남성의 성도昆明을 포위 공격했다. 운남 남부 출신으로 회족의 반란군지도자 馬如龍도 1862년에 곤명을 공격했지만, 청조로부터 군의 수뇌를 제시하여 배반했다. 그의 부하의 일부는 이것을 불만으로 1863년에 雲貴?督 반탁(潘鐸)을 죽여 곤명을 탈취하고, 두문수에 인도하려고 했다. 그러나 두문수의 군이 도착하기 전에 馬如龍이 청조의 잠육영(정치인 岑毓英Cen Yuying1829年 - 1889年)의 지원을 받아 곤명의 지배권을 되찾았다.


그 후 전국은 청조의 측에 유리하게 기울어 반란군은 대영제국의 빅토리아여왕(Alexandrina Victoria 1819.5.24- 1901.1.22)에게 서신을 보내 국가로서의 승인 및 군사 지원을 요구했지만 거부되었다. 1872년 반란군은 지도자의 두문수의 죽음을 계기로 진압되었다.


반란의 사망자는 100만명에 달했고 살아남은 많은 회족의 난민이 주변의 버마, 타이, 라오스 등에 피신했다. 이것이 오늘 날 피신한 나라에 존재하는 중국계회족의 근원이다.


미얀마에 끼치는 영향


판타이의 란은 미얀마(콘바운 왕조 Konbaung Dynasty 最後王朝 1752~1886)에 큰 부의 영향을 주었다. 영국과의 전쟁의 결과 버마를 빼앗긴 미얀마는 풍부한 곡창지대를 잃었다. 판타이의 란까지 운남을 통해 청으로부터 쌀을 수입하고 있던 미얀마입장에서, 청조의 분노를 사고 싶지 않았던 미얀마는 청조의 요청대로 반란군과의 교역을 취소했다. 이 때문에 쌀 수입원을 잃은 미얀마는 쌀의 수입을 대영제국에 의지할 수밖에 방법은 없었다. 또 당시의 미얀마의 경제는 청에 면화 수출에 크게 의지하고 있었지만, 판타이의 란에 의해 이것도 실행이 안되게 되었다.


콘바운 왕조 Konbaung Dynasty


1752년 아라운파야왕모소보로 즉위, 콘바운아침의 성립

1753년 버마의 舊都 인와(아바)를 탈환

1757년 연하 버마, 몬 왕국의 수도 파고(페그)를 점령

1758년 살 지방이나 마니프르에 원정

1759년 타이의 수도 아유타야 공격, 철퇴

1766년 신뷰신왕, 아유타야를 함락 시킨다

1769년 청군과 아바 근교에서 정전협정을 체결해, 철퇴시킨다

1782년 보드파야왕, 마운마운왕을 살해. 아마라프라에 新王都 건설

1795년 아라칸 왕국을 정복

1814년 마니프르 왕국을 지배하에 넣는다

1817년 아삼 왕국을 지배하에 넣는다

1824년 제1차영면(英緬)전쟁(~26년)

1826년 얀 다보-조약으로 아라칸과 테나세리움 할양, 아삼과 마니프르에 대한 종주권 상실

1852년 제2차 영면전쟁, 英軍 버마 점령

1885년 제3차 영면전쟁, 왕도 만다레이 함락

1886년 영국, 상 버마를 英領 인도에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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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간혁명 (東干) Dungan revolt

 


清末에의 1860년대부터 1870년대에 걸친, 동쪽 트르키스탄(현재의 新疆 위구르 자치구)을 둘러싼 전란. 이슬람교의 봉기의 결과, 야크브·베크(Yakub Beg, 1820- 1877.5.16)에 의해 동쪽 트르키스탄은 통일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야크브·베크가 청의 좌종당에게 졌다.


동쪽 트르키스탄 정세


동쪽 트르키스탄이 청조의 지배하에 들어가 1 세기가 된 1860년대에서, 동쪽 트르키스탄은 3개의 路로 나누어져 통치되고 있었다. 1개는 천산북로에서 이리지방을 관할하고 있었다. 벌써 이것은 천산남로에서 8개의 도시를 관할하고 있었다. 즉 서쪽의 오아시스 도시 호탄(和田,和阗,和闐), 야르칸드 카운티 (莎車县,Shache,Yerkent), 옌기서르(Yengisar), 카슈가르(喀什, Kashí, 카스), 동쪽의 Uqturpan, 아케슈(阿克蘇, Akesu), 쿠체(庫車, 龜玆), 카라샤르(Kharashar:焉耆回族自治県)이다. 그리고 東路은 우르무치(Urumqi 烏魯木齊) 주변을 관할하고 있었다. 이리(新疆最高軍政長官天山山脈北部恵遠城)장군은 혜원성에 주둔하고, 3로의 군을 통괄하고 있었다. 점점 천산북로의 민정을 직접 담당하면서, 천산남로의 민정은 현지의 베그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東路의 민정은 감숙성의 관할하에 있었다.


1820년대의 쟈한기르·호쟈(Jahangir Khoja1788-1828)나 1857년의 와리·칸Wali Khan (khoja ?-1865)과 같이 카슈갈로부터 코칸드·한국(Khanate of Kokand)에 피한 白山党(아파키야)의 종교 지도자(Khoja:Turkestan)의 침공이 이어졌기 때문에, 동쪽 트르키스탄에는 5만의 군사가 배치되고 있었다.

군은 만주인과 漢人의 부대로부터 편성되어 후자 한인부대는 섬서성·감숙성의 회족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청군의 대부분은 이리지방 9진지에 배치되었지만, 대부분의 도시에도 배치되고 있었다. 이러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현지로부터의 税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중앙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원조는 태평천국의 란이나 그 외의 반란의 진압을 때문에 원할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이리장군은 세를 올려, 관직을 매도하게 되었다. 새롭게 관리가 된 사람은 민중으로부터 착취하는 방법으로 그 본전을 되찾았던 것이다. 청의 失政과 그것을 조장 하는 베그, 호쟈(Yakub Beg)의 침공, 증가와 汚職등에 의해, 동쪽 트르키스탄의 사람들의 불만은 높아지고 있었다.


1862년에 섬서성과 감숙성으로 회민 봉기가 발생하자, 동쪽 트르키스탄의 회족의 사이에 청조는 우리들에 대한 학살의 준비를 시작하고 있다라는 소문이 퍼졌다. 따라서 위구르인Uyghur·키르기즈인(Kyrgyz)·카자흐인(Kazakhs)과 같은 터키계 민족도 봉기에 참가했지만, 우선 도화선을 자른 것은 회족이었다.


반란의 발생


최초의 반란은 소규모였다. 1863년 3월 17일에 학살의 소문에 자극된 水定鎮近郊의 三道河의 회민 200명이 이리지방의 9진지 중 하나인 탑늑기성(塔勒奇城)을 공격했다. 그들은 무기를 빼앗아 수비병을 살해했지만 다른 살간의 군에 폐퇴 살해되었다. 다음 해에 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이것은 3路로 동시에 발생하여, 이리장군의 방어한계를 넘어섰다.


1864년 6월 3일부터 4일에 걸쳐 밤중 쿠체의 회민 봉기하여, 곧바로 터키계 주민도 합류했다. 청의 진지는 몇일로 함락 하여, 천명의 漢人兵과 150명의 몽고병이 사망했다. 동쪽 트르키스탄의 다른 도시와는 달리, 마을의 외부가 아니고 내부에 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회민과 위구르인의 주도권 분쟁의 결과, 봉기에는 참가하고 있지 않았지만 이슬람교의 공동체에서 스피로서 권위를 갖고 있던 라싯디·호쟈를 지도자에게 선출했다. 그는 3년에 걸쳐서 동서로 세력을 확대하여, 타림분지 전체에 지배권에 넣으려고 시도했지만, 그 기도는 야크브·베크에 의해 저지 된다.


쿠체의 봉기의 3주일 후에 東路에서도 봉기가 발생했다. 6월 26일에 우르무치의 회족의 병사가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지도자는, 감숙성 출신으로 신비주의(Sufism)의 일파인 쟈후리야의 지도자의 타명(妥明Tuo Ming 1788‐1873)과 회민에게 호의적인 参将의 색환장(索煥章)이었다. 도시의 대부분은 파괴되어 청의 요새는 포위되었다. 봉기군은 서쪽을 향해, 창길(Changji昌吉)에 들어가, 9월 16일에 마나스(Manas玛纳斯县)를 함락시켜, 29일에 오소(烏蘇 Wusu)를 함락 시켰다. 계속하여 10월 3일에 우르무치의 요새가 떨어졌다. 청의 수장은 화약고를 폭발시켜 자살했다. 타명은 清真王이라고 칭했다.


만주인이 살해하려고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야르칸드의 회족의 병사들은, 6월 26일에 봉기했다. 도로 외부에 있던 청의 진지에 대한 최초의 공격은 실패했지만, 2천명 청의 병사들이 사망했다. 오전 중에 봉기군은 시내에 들어가, 7천명의 漢人들이 살해되었다. 회족의 병사의 수는 적었지만, 많은 터키계 주민들이 참가했다. 그들은 형식상의 지도자에게 카불의 명가의 출신인 그람·후세인을 택했다.


초가을에는 천산북로의 이리분지에서도 마나스와 오소의 함락의 소식을 접하고 탄압을 받는 것을 무서워한 회민들이 봉기했다. 이리장군 常清는 현지의 주민으로부터 부패한 圧政者로서 증오하고 있었지만, 오소의 함락 후에 해임되어 明緒가 대신했다. 명서는 회민과 교섭하려고 했지만 헛수고에 끝났다. 11월 10일에 상업의 중심지인 이녕(Yining伊寧)과 군사·정치의 중심지의 혜원성(恵遠城) 모두가 봉기하여, 위구르인도 더해졌다. 이윽고 이슬람교의 카자흐인과 키르기즈인도 합세하는 한편으로, 불교도의 칼미크(Kalmyk people)인과 시버족(錫伯 xibo)은 청조의 측에 붙었다. 이녕(Yining 伊寧)는 회민과 위구르인의 손에 떨어졌지만, 혜원성의 청군은 12일에 걸치는 시가전의 끝에 봉기군을 격퇴했다. 한인들은 청군의 승리를 지켜보고, 청군에 협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청군의 반격은 실패하여, 대포를 빼앗겨 明緒는 간신히 포박을 면했다. 아크스와 오소의 함락으로 혜원성의 청군은 고립되어, 명서가 북경과 연락을 하려면  러시아를 경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혜원성의 청군은 12월 12일의 공격을 격퇴하였지만, 반란은 준가르의 북부까지 퍼졌다. 카자흐 사람들은 일찌기 이 땅을 지배하고 있던 칼미크(Kalmyk people)인에 복수를 했다.


파괴된 쵸체크의 극장


1865년 정월, 타청지구(塔城地区Tacheng Dìqu)의 회민 지도자들은 상호의 평화를 맹세하기 위해서 쵸체크의 회교 사원에 청의 공무원과 카룸이크의 귀족들을 초대했다. 그러나 그들이 회교 사원에 도착하면(자), 회민들은 무기고를 점거해 그들을 살해했다. 2일간의 전투의 뒤, 이슬람교가 쵸체크의 지배권을 확립해, 청군의 요새는 포위되었다. 그러나 카룸이크인의 지원으로 청군은 가을까지 타르바가타이 지구를 탈환해, 회민들은 반대로 회교 사원에 갇혔다. 전투의 결과, 쵸체크는 완전하게 파괴되어 주민은 난민이 되었다.


타청지구(塔城地区Tacheng Dìqu)역사

 

 

1764년 清政府가 肇豊城를 세워 高塔爾巴哈台参賛大臣이 주방, 塔城地区를 행정구로서 정식으로 설립. 

1864년 러시아 제국과의 사이에 中俄勘分西北界約記(카슈갈 조약)을 체결 당해 청은 서북의 변경의 영토를 40만 km2 이상이나 잃었다. 중 塔城地区는 10만 km2강을 잃었다. 

1893년 러시아에 조차 되어 10년이 경과한 巴爾魯克山을 회복. 

1916년 裁撤塔爾巴哈台参賛大臣이 塔城道를 설치해 塔城. 烏蘇. 沙湾의 3현을 관할했다. 

1929년 탑성도가 탑성행정구에 고쳐진다. 

1969년 소련군에 의한 巴爾魯克山 西部 鉄列克提에의 침입. 


청조는 반란의 진압을 위해서 러시아 제국에 원조를 요구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태도는 애매했다. 駐清公使의 우라늄 가리는 요청을 완전하게 거절하는 것은 로청관계에 악영향을 가져온다 보고했다. 한편으로 중앙아시아에 주둔 하는 장군들은 만약 봉기가 성공하여 이슬람교 국가가 성립했을 경우, 청을 원조하는 것은 새로운 이웃나라와의 관계에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국, 러시아는 청군의 시베리아 통과와 혜원성의 수비대에게 로의 곡물의 매각을 인정했지만, 그 이상의 원조는 실시하지 않을 것을 결정했다. 러시아에 있어서의 최우선 사항은 청과의 국경을 유지하고, 반란이 러시아 국내에 파급하는 것을 막는데 있었다. 1865년 2월, 七河州 주둔군의 게라 SIMM·코라파코후스키는 공격은 최대의 방어라고 생각하고 국경을 넘어 동쪽 트르키스탄을 식민지와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외무대신 Alexander Mikhailovich Gorchakov (1798.7.16 – 1883.3.11)는 그러한 위반행위를 실행하면 청이 반란을 회복했을 때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각하했다.


그 사이, 청군에게 정세는 악화되어 갔다. 1865년 4월, 혜녕성이 봉기군의 손에 떨어져 만주인·시보족·예벤키족(Evenki) 8천명의 수비대는 학살되었다. 혜원성의 대부분은 1866년 1월 8일까지 봉기군의 손에 떨어졌다. 식량이 다한 明緒는 항복을 신청했다. 明緒는 銀과茶를 공출 하는 것으로, 목숨과 청조에 충성하는 보장 양쪽 다를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봉기군은 이슬람교에 충성을 요구했기 때문에 명서는 교섭을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3월 3일, 성채에 봉기군이 침입하자, 명서는 저택을 폭파해 가족과 부하와 함께 자살했다. 이렇게 해 이리지방은 청조의 손으로부터 멀어졌다.[위키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