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는 한반도 제주도가 아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434
일본의 관문, 나가사키(長崎)는 어디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49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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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표류기를 조작한 이유
1592~1598 사이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향료무역을 독점하면서 대륙조선 영역을 탐내던 포르투갈에 의하여 발생된 것이며 그러한 포르투갈의 비호아래 왜구가 대륙조선을 상대로 일본 국가 성립을 요구하였을 수 있으며 그러한 요구가 대륙조선의 거부로 무산되자 대륙조선을 상대로 한 반란성격의 전쟁이다.
16세기 향료무역을 주도하면서 몰루카 제도(말루쿠 제도:Kepulauan Maluku)에서 경영하던 포르투갈이 해적(왜구)를 이용하여 대륙조선을 상대로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1602년 네델란드 자바를 깃 점으로 동인도회사를 설립 경영하는 과정에서 인도네시아 와 자바근역에서 활동하던 해적 왜구무사집단세력들을 이용 현지인들을 독려하고 대륙조선의 영역을 잠식하면서 첨병역할을 도모하였다고 하는 점이 많다.
대륙조선에 요구하던 독립적 일본국 성립을 목표로 야망을 키우던 왜구무사집단세력은 포르투갈에 이어 일어난 네덜란드에 요구하고 협조를 구하였을 것이고 그 꿈을 19세기까지 대륙조선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서세의 본격적인 준동으로 대륙조선이 내부로 부터 와해 되면서 관할지인 한반도와 열도가 무주공간이 되자 그 틈을 이용 그곳에 자바근역 왜구무사집단세력과 대륙남동지역에 흩어져 있던 왜구민간세력들을 이동시켜 열도 원주민과 충돌이 발생하였을 것이며 그 전쟁이 무진전쟁(戊辰戦争1868)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보았을 때 지금의 열도를 일본의 역사적 근거지로 만들어야 하는데 바로 하멜표류기 기록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아무리 은폐하고 숨기려 하여도 부처님 손바닥에서 벗어 날 수 없듯이 하멜표류기는 네덜란드가 지배하던 자바근역에서 발생된 하나의 사건을 날조하여 부각한 사건이며 후일 일본 역사 근거지를 열도에 맞추기 위하여 사건 위치를 지금의 한반도 제주라 설정하면서 마치 열도에 왜구들이 역사적으로 근거한 것처럼 꾸며 만들어 일본이란 나라를 구체화하고 극대화 한 것이라고 판단되는 기록이다. 물론 이러한 날조행위는 하멜이 죽은 후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이고 서양세력의 협조가 있었다고 보인다.
이와같은 식으로 날조될 때 서세가 원하던 서양역사가 중심이 되고자 세계사를 재편성하던 과정에서 대륙조선과 상치되는 일본이란 나라를 만들어야 하겠다는 필요성이 제기 되었을 것이고 이것을 왜구무사정치집단세력들의 적극적인 요구에 의하여 받아들여지면서 결국 하멜표류기는 대륙조선을 한반도조선으로 둔갑하고 열도에 일본을 만드는 기록으로서 남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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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표류기 요약
1653년 7월 30일 VOC(동인도회사)의 Sperwer hawk호는 대만을 출발해 일본의 나가사키로 향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항해라면 배는 적어도 11월말까지 나가사키에 도착했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고 대만으로 돌아오지도 못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몇 달이 지난 후 VOC의 총독은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10월에 선원과 귀중한 짐을 실은 배가 실종됐다고 공식적으로 공표했다.
특히 위 기록에서 나가사키 위치를 바로 지금 열도에 두고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된다.
네덜란드가 자바에 진출하는 과정에 있었던 시기인 17세기 중반 아직 일본이란 나라자체는 없었다고 보이고 대만과 나가사키란 한정된 왜구 집단 도시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제주, 탐라, 대만, 일본(나가사키), 유구가 동남아 남해 근역에 같이 존재했었다고 판단되고 이때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역시 지나 대륙 南海 즉 南支那海역이나 東支那海에는 아직 진출하지 못했던 시기라고 판단되는 점이 있다. 그러니 남지나해역에 있었던 해남도, 필리핀, 대만, 지금의 오키나와 그리고 한반도와 열도까지 그들이 갈 수도 없었던 시기라고 해야 한다. 물론 대륙조선이 이 해로를 막고 경계를 강화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포르투갈 마젤란이 1521년 비사얀 제도에 도착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어딘지가 확실하지 않고 時期 年代 또한 그들이 자의적으로 정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포르투갈의 항로를 이어받은 네덜란드 함대가 필리핀에 상륙하였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은 사실상 이 근해에 진출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만약 스페인 마젤란이 아니라 네덜란드나 포르투갈인 이었다면 이러한 의심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인이 아니라 유럽서남단 스페인에서 서쪽으로 진출하던 스페인 함대가 남아메리카를 남단을 거쳐 태평양을 지나는 과정에서 서인도제도라고 오인하는 해역에서 우연히 현 필리핀 일부 섬에 돛을 내려 발견했다고 하는 시기가 1565년이라고 보여 지지만 스페인이 본격적으로 필리핀(呂宋)에 식민지통치가 이루어지던 18세기에 비로소 처음 발견한 시점으로 보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여겨지면서 이것 역시 객관적으로 확인 할 길이 없다.
어쨌던 하멜표류기 장소는 동남아시아 남해일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1653년경에는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가 남지나해와 동지나해에 진출하지 못했다고 판단된다는 것은 영국이 南支那海 대륙 廣州(홍콩)에 들어 온 시기가 1841년 아편전쟁 때란 점도 있다.
그런데 하멜이 무슨 제주로 한반도로 표류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네덜란드 상선이 왕래 하던 곳이 인도네시아와 자바라면 그 근역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한 것임을 상식적으로 알고 위치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한반도 제주도는 그 지역과 거리상, 해류이동상 관계를 설정하는데 무리가 따르는 지역이다.
이상한 폭풍이 일어나 거리와 해류에 상관없이 난데없는 곳에 점프라도 시켜 튕겨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계속]
그러나 1666년인 13년 후에 나가사키(네델란드 점령지 인도네시아 근방)에 있는 VOC 책임자는 Goto-archipelago섬들 중 한 곳에서 일본인(자바인)에게 구조된 이국적인 복장을 하고 뗏목으로 표류중인 8명의 네델란드인에 대한 특별한 메세지를 받았다. 그들은 일본(자바일 가능성이 높다)당국에 의해 당장 나가사키(동남아 해역)로 이송 되었다. 1666년 9월 14일 그들은 나가사키 부두에 도착했다. 그들은 실종된 Sperwer hawk호의 선원으로 밝혀졌으며, 10일전 그들은 조선의 남해안에서 자유를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허름한 어선을 타고 탈출한 것이다.
그들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했다.
13년 전 1653년 그들이 타고 간 배는 난파되어 조선의 섬(제주도 대정현: 탐라라고 하는 동남아시아 남해) 해안에 이르렀는데, 배에 타고 있던 64명 중 32명만이 살아남았다. 조선정부가 자기 나라의 존재를 다른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은둔의 나라, 미개한 나라, 비인도적인 나라 등 나쁜 상징을 더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꾸며낸 지어낸 낭설) 떠날 수 없었다. 생존자들의 운명은 불확실했다.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했으나 살아남기 위해 구걸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들 중 12명은 몇 년이 지나 사망했고, 마지막 생존자는 16명 이었는데 그들 중 8명이 몇 차례의 실패 끝에 조선을 탈출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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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록을 보면 하멜이 본 조선은 마치 사람을 짐승처럼 다루고 미개인들이 사는 곳, 악마의 소굴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반대로 지금 중국역사에서 조차 짐승으로 기록하여 구(寇)나 노(奴)따위로 표현하고 있는 왜구들을 친절하고 양심 바른 문명인, 문화인으로 그려 소개한데 대해 상당한 거부감이 없지 않다.
솔직한 표현을 하면 거부감이기 보다 기록에 대한 경멸감이 먼저 앞선다.
이러한 명확한 오류의 기록을 다른 것은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말이다.
하멜표류기가 이러한 묘사가 등장한다는 자체가 날조 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는 것이고 신뢰성을 줄 수 없는 기록이란 사실을 알 수 있어진다.
옆구리 칼만 차고 해적질만 하고 있으면 다 문화인이고 문명국인가?
힘센 자들에게 아부 아첨하는 근성이 있는 것도 모르고 네덜란드 지들에게만 잘해주고 굽실거리니 그럴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19세기 때 유독 한반도 근역에서 표류한 사실이 많이 나온다.
언제나 이양선이 표류했다면 한반도 탐라가 나오고 일본나가사키 유구가 나온다.
이러한 역사 기록을 사실이라고 보면 제주라고 하는 탐라 그리고 대만, 일본, 유구 등은 같은 범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곳이 과연 지금의 한반도 남해가 맞는지 의구심이 많다.
왜냐하면 지금도 그렇지만 동남아시아 근해보다 한반도에 몰려오는 태풍은 그렇게 많지 않다.
태풍이 많이 몰아치는 곳은 인도양, 뱅골만, 남아시아해, 남지나해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하멜 표류기 주 무대는 한반도가 아니라 동남아 남해이어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하멜표류기 시기에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고 식민지로 삼고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자와(JAVA)의 토후(土侯)를 지배하고, 인도네시아 원주민들을 부려 힘든 노동을 시키면서 네덜란드 부(富)의 원천(源泉)으로 삼고 자바와 일본 무역을 거의 독점하였던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에서 하멜이 표류한 것이다.
하멜이 표류한 시기인 1653년경에는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가 남지나해와 동지나해에 까지 진출하지 못했다고 앞에서 이야기 했다. 네덜란드가 일본무역을 독점 하였다는 것은 지금의 열도 일본의 무역을 독점 한 것이 아니라 인도네시아 내역에 있는 지금 일본이라고 지칭하는 한정된(나가사키)지역의 무역을 독점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당시 네덜란드가 동남아시아 남해 전역을 지배하고 식민지를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말 할 것도 없이 하멜 표류기는 이때 일어난 사건의 기록이다.
하멜표류기는 누군가에 의해 날조되고 조작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당시에도 금전으론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시기였으니 상상을 초월 할 수 있다.
첨가하여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늘 의문시 하는 것이지만 유독 임진왜란을 크게 확대시켜 놓았다.
임란은 따지고 보면 흔히 일어 날 수 있는 다민족국가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이민족의 반란이다.
그러한 반란을 마치 국가대 국가가 벌인 전쟁처럼 크게 그려놓은 것이다.
조선이 왜란으로 인하여 완전 쑥대밭이 된 것처럼 확대한 것이다.
대륙을 집어넣은 한반도라 치면 완전 쑥대밭인 것처럼 보여 진다.
하지만 대륙이라면 그렇지 않는 난이다.
물론 일제 강점기에 조선왕조실록 역시 다른 사서와 마찬가지로 총독부에 집중관리 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 할 수 있다. 때문에 날조, 조작이란 검은 손이 탓을 가능성이 높고 검은 손의 주인공인 일제가 어디까지 손을 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거의 완벽하게 새롭게 만든 사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중간 중간 필요한 글씨를 첨부 또는 삭제 하였을 수도 있고 부분 수정, 편집하였을 수도 있으며 아예 통째로 다르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의 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 이후 광분하던 일본 신봉자에 의하여 철저하고 은밀하게 계산된 계획아래 날조되고 만들어진 국가라고 보면 정확하다.
하멜이 표류할 시점인 1653년이라면 이 당시까지 일본이란 나라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물론 사서에는 일본이란 나라가 너무 많이 등장해서 탈이지만 기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1592년에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풍신수길이 포르투갈이 전달 해 준 신식무기 조총에 한껏 기대에 부풀어 마치 칭기즈칸처럼 행세하고자 했지만 그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 목적은 나름대로 나라를 세우려 한 짓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끝내 한사람 개인의 망상으로 끝나버리고 만 허망한 亂이었다.
왜란이 끝나 분기탱천한 대륙조선의 엄청난 분풀이로 주동자는 삼족이 멸했고 뿐만 아니라 가담자 전부 참살되거나 죽임을 당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와해된 세력이었지만 포르투갈 대신에 이어 새롭게 나타난 서세 예수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수작에 의하여 잔여 세력이 다시 규합되고 이후 새롭게 준동하여 지금 일본탄생의 모태가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엄밀히 보면 동인도회사는 대륙조선 남해(아시아남해통칭)에서 포르투갈처럼 대륙조선을 재차 침략하기 위한 첨병 기지라고 해야 옳다.
하멜 표류기를 기화로 대륙조선에 대한 서구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을 것이며 비난이 극에 달해 대륙조선을 척결하여야 할 대상으로 지목되었을 것이고 그 이후에도 서세가 의도적으로 대륙조선의 이미지를 나쁘게 그려 여론을 조작하였을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된다.
물론 이와 같은 사실은 증명할 길이 없다.
하지만 하멜표류기는 하멜이 죽고 난후 예수회가 주도한 서세뿐만 아니라 그들의 전폭적인 비호를 받은 왜구무사정치집단세력들의 의하여 정치적으로 악용되었을 소지가 많으며 날조되어 그들 세력에게 유리하게 꾸며진 이야기 일 가능성이 상당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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