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사건

나선정벌(羅禪征伐)에 주체는 조선이다.

한부울 2009. 7. 3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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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청나라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한 조선(?)러시아와 싸울 군사를 요청하였고, 조선은 군사를 1654년(순치 11년)과 1658년(순치 15년)에 두 번 파병하여 러시아군과 싸웠는데, 이것이 조선의 나선 정벌이다.

2.청나라는 러시아에 번번이 패배하여 조선의 조총군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 청나라는 원조를 요구....

 

1항에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한 조선이라고 했는데 지금의 반도머리 부분 두만강이 러시아와 국경과 마주한 것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당시 러시아와 조선이 국경한 곳 그곳은 광범위한 영역을 전제로 한 국경이어야 한다.

 

2항을 보면 청은 조선보다 군사력이 강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형편에 청나라가 대륙을 어떻게 온전하게 점령하고 통치하였겠는가?

청이라 함은 강씨(강희제)나라라 하여 19세기말엽이나 20세기초에 갖다붙인 명칭일 뿐이고 역사 주체는 조선이다.

 

 

 

현재 표시된 알바진은 구글위성의 서비스가 되지 않아 확인 불가능하다.

지금의 흑룡강이 나선정벌시 흑룡강이 되어야 하는지는 좀 더 밝혀야 할 일이다.

 

其外涉瀚海,阻興安,東濱黑龍江,西越阿爾泰山,為外蒙古。

흑룡강(黑龍江) 지역과 접하는 곳은 한해(瀚海)와 아이태산(阿爾泰山), 외몽고(外蒙古)

악이다사(鄂爾多斯)는 본래 만주(滿洲)이다.

악이다사(鄂爾多斯:  오르도스 (Ordos) = 황토고원) 고원의 영고탑을 가리키는 것이다.

 

19세기말~20세기초 지명 이동시 강(江)명도 이동 하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신뢰 할 수가 없다.

물로 알바진 성 위치도 화살표시된 그곳에 있었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없다.

나선정벌이 벌어진 곳은 고유만주가 존재하던 곳 지금의 천산을 깃점으로 하여 내몽고방향으로 동쪽전체를 아우르는 곳에서 길림 흑룡강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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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정벌 (羅禪征伐)


조선 효종 때 조선이 청나라를 도와 러시아를 친 싸움.


나선은 러시아 사람들, 즉 러시안(Russian)을 한자음으로 옮긴 것이다. 이들은 흑룡강(黑龍江) 방면의 풍부한 자원을 탐내어서, 1651년(효종 2) 흑룡강 우안(右岸)의 알바진(雅克薩) 하구에 성을 쌓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모피를 수집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부근의 수렵민들과 분쟁이 생기고 청나라 군사와 충돌하게 되었다.


이듬 해 러시아인들이 다시 오소리강(烏蘇里江) 하구에 내려가 성을 쌓고 송화강(松花江) 방면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영고탑(寧古塔)에 있는 군사를 보내어 공격, 축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구식 장비의 청군으로서는 총포를 가진 러시아군을 당하지 못해 번번이 패배하였다.


제1차 정벌

 

 

이에 청나라에서는 조선 조총군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1654년 2월에 청나라 사신 한거원(韓巨源)을 보내어 조총군사 100명을 뽑아 회령을 경유, 3월 10일까지 영고탑에 보내주도록 요구하였다.


그 해 4월 영고탑에 도착한 조선 조총군은 청나라 군사와 합류, 흑룡강 방면으로 떠났으며, 20일에 왈가(曰可) 지방에서 배를 타고 후통강(厚通江)으로 내려갔다.


28일 흑룡강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러시아군을 만난 조선 조총군들은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적군의 기세를 꺾고 계속 추격, 적군은 7일 만에 도망갔다. 조선 군사는 전승을 거두고 5월 16일에 회군해 6월에 본국으로 개선하였는데, 이것이 제1차 정벌이었다.


제2차 정벌


그 뒤에도 러시아군이 흑룡강 방면에서 계속 활동하고 이에 대한 청나라 군사의 출정이 자주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1658년 3월 청나라에서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선 조총군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혜산진첨사 신류(申瀏)를 대장으로 삼아 조총군 200명과 초관 기고수 등 60여명을 거느리고 정벌에 나섰다.


조선 군사들은 5월에 영고탑에 들어가 청나라 군사와 합류, 흑룡강에 나아갔다. 6월 송화강과 흑룡강이 합류하는 곳에서 러시아 군사를 만났다. 러시아 측에서 큰 배 10여척에 군사를 싣고 당당한 기세로 공격하고 육상에서도 적군이 공격을 해오자 청나라 군사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 군사가 용감하게 나아가 화전(火箭)으로 적선을 불태우자 흩어져 도망갔다.


이 전투로 흑룡강 방면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군사의 주력이 거의 섬멸되었다. 조선 측에서도 8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들은 청나라의 요청으로 얼마 동안 송화강 방면에 머무르다가 그 해 가을 영고탑을 거쳐 개선하였다. 이것이 제2차 정벌이었다.


의의

 

2차에 걸친 러시아 정벌은 효종의 즉위 후부터 준비해왔던 북벌계획을 간접적으로 실현한 결과였다. 이 때 비록 적은 수의 군사를 보냈으나 큰 전과를 올리게 된 것은 당시 사격술과 전술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네이트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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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 편에 보면

1680년대에 러시아 제국은 로마노프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고, 또한 강희제가 러시아와의 갈등이 있던 당시는 러시아의 근대화와 최전성기를 이루어낸 표트르 1세의 초기 시대였다. 이미 이전부터 러시아는 군대를 동원하여 만주로 내려왔다. 과거 순치제 때 러시아와의 국지적인 전쟁으로 청나라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한 조선(?)러시아와 싸울 군사를 요청하였고, 조선은 군사를 1654년(순치 11년)과 1658년(순치 15년)에 두 번 파병하여 러시아군과 싸웠는데, 이것이 조선의 나선 정벌이다.

 

이 당시 조선은 그 주위에 누구를 막론하고 감히 덤벼 들 수 없는 막강한 군사력를 가진 나라였기 때문에 조선국경으로 남하하지 않았고 대신 청나라 동북쪽을 노렸다는 것인데 위치가 분명치 않다.

동북쪽을 지금의 흑룡강성지역으로 대입하는 것에 불만이 없을  수 없다.

조선과 러시아관계가 대다수 생략 축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로부터 30여 년 뒤, 러시아는 표트르 1세가 강력한 개화 정책 아래 근대식으로 바뀐 군대로 계속 청나라의 동북쪽을 침략하였고 일부는 북만주에 주둔하여 심지어는 근처에 살던 만주인에게 보드카를 선물로 주어 취하게 한 다음 기습을 감행하여 그 부족의 거의 모든 장정을 죽이고 아녀자들을 겁탈하기도 하였다. 강희제는 이에 분노하여 러시아에 사과를 요구하였으나 러시아는 그에게 선물을 보내고 통상 자유의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러시아가 계속 송화강까지 세력을 넓히려 하자, 강희제는 먼저 국경에 애혼성(愛琿城, 아이훈 성)을 쌓았으나 계속 러시아가 야욕을 드러내자 그에 강경책을 써서 러시아의 국경 요새인 아르바진을 공격하였다. 아르바진을 점령하였으나 러시아군은 물러나지 않고 뺏긴 아르바진 요새를 수복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청군과 러시아군이 흑룡강 부근에서 국지적으로 싸우고 휴전하기를 반복한 뒤에, 1689년(강희 28년)에 강희제는 영시위내대신이자 자신의 처숙(妻叔)인 색액도를 흠차대신으로 명하여 러시아와 협상을 보게 하였고 러시아와 청나라 대표가 네르친스크에서 만나 헤이룽강의 지류인 고르비트사 강과 스타노보이 산맥을 청나라와 러시아의 국경으로 확정 지으니, 이것이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이 조약에서 청나라의 제안이 대부분 수용되어, 청나라는 동북쪽의 넓은 영토를 얻게 되었다. 또한, 청나라와 러시아 간의 무역에도 자유를 보장하였으나, 러시아에는 그다지 득을 볼 만한 조항은 많지 않아, 훗날 함풍제의 치세 때, 러시아가 애로호 전쟁에서 청나라의 원조를 빌미로 만주와 연해주의 많은 땅을 도로 가져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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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정벌[羅禪征伐] 


나선은 러시안(Russian)을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러시아는 13세기 이후 몽골족의 지배하에 있다가 15세기 후반에 몽고족을 몰아내고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17세기 전반에는 헤이룽 강[黑龍江]유역까지 진출하였다. 1651년(효종 2)에 헤이룽 강의 우안(右岸)에 알바진(Albazin) 성을 쌓아 군사 기지로 삼고, 다음해 우수리 강[鳥蘇里江]하구에 새로 성을 쌓으려 하여 청나라와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이에 청의 영고탑(寧古塔) 도통(都統)이 2,000명의 병력으로 러시아군을 공격했으나 총포를 가진 러시아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 뒤 러시아가 헤이룽 강의 지류인 송화강(松花江)유역까지 진출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물자를 약탈하자, 청나라는 그곳의 러시아인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에게 원병으로 조총수(鳥銃手)들을 요청하였다.

 

[원본클릭]

                                         조선(청) forces storming the fort of Albazin


당시 조선에서는 효종이 즉위하고 있었는데, 그는 2번의 호란(胡亂)을 격은 뒤 심양(瀋陽)에인질로 8년간이나 체류하며 고초를 겪었으므로 반청사상(反淸思想)이 강하였다. 따라서 주자학(朱子學) 입장에서 반청사상을 갖고 있던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등을 등용시켜 북벌(北伐)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나라에게 출병을 요구받았던 것이다. 1654년(효종 5) 1월 청나라 차관(差官) 한거원(韓巨源)이 조총수 100명을 선발하여 3월 10일까지 영고탑(寧古塔)에 도착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계문(啓文)을 전달했다. 이에 조선병은 함북우후(咸北虞候) 변급의 인솔하에 1654년 3월 26일에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4월 16일 청병(淸兵) 3,000명과 영고탑에서 합세해서 27일에 후통강(厚通江)에 이르러 28일과 29일에 러시아군과 접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전승을 거두고, 5월초 주위 5리의 토성을 쌓아 놓고 16일에 회군하여 6월 13일에 영고탑을에 들어와서 귀국하였다. 그 뒤에도 청나라는 러시아와 헤이룽 강방면에서 전투를 계속하며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다시 조선원병을 요구하였다. 1658년 2월 19일자의 청황제 칙서(勅書)를 보내옴에 따라 조선에서는 함북병마우후(咸北兵馬虞候) 신류(申劉)를 통병관(統兵官)으로 하여 조총수 200명과 초관(哨官)·기고수(旗鼓水)·화정(火丁) 60명을 인솔하고 3개월분의 군령을 가지고 그해 5월 초에 영고탑으로 향하게 했다. 조선군은 6월 5일에 승선하여 송화강의 본류로 나아가 6월 10일에는 멀리 헤이룽 강 합류점까지 이르러 러시아의 지휘관 스테파노프(Stepanov) 선대와 만난 격전을 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8명의 전사자와 25명의 부상자가 났으나, 조총수의 위력을 과시함으로써 스테파노프를 비롯한 러시아군 대부분을 섬멸시켰다. 전투직후 청의 요청에 따라 송화강 방면에 머무르다가, 그해 11월 18일 영고탑을 떠나서 12월 12일에 회령(會寧)에 귀환했다.


두 차례에 걸친 조선군의 러시아 정벌은 청의 요구에 따른 처사이기는 하였지만, 북벌을 위해 준비했던 병력을 간접적으로 과시해보인 결과가 되었다. 이는 조선의 조총수가 멀리헤이룽 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그 위력을 발휘하였다는 것과, 조선군이 러시아군과 역사상 처음으로 교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던 사실은 특기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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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9-1643 : Campaign led by Qing Empire against the indigenous rulers of the region


December 1639-May 1640 : 1st battle - the natives and the Qing : Battle of Gualar (Russian: селение Гуалар) : between 2 regiments of Manchu and a detachment of 500 Solon-Daurs led by the Solon-Evenk leader Bombogor (Chinese: 博木博果尔 or 博穆博果尔 pinyin :Bomboguoer) while the second native leader Bardači (Chinese: 巴尔达齐 or 巴尔达奇) kept neutral.

September 1640 : 2nd battle - the natives and the Qing : Battle of Yaksa (Russian: Якса): between the natives (Solon, Daur, Oroqen) and the Manchus.

May 1643 : 3rd battle. The native tribes submitted to the Qing Empire.


1643-1644 : Vasili Poyarkov


Winter 1643 - Spring 1644 : a detachment of a Russian expedition led by the Cossack Vasili Poyarkov explored the stream of the Jingkiri river, present-day Zeya and the Amur rivers.


1649-1653 : Yerofey Khabarov


1650-1651 : Occupation of the Daur's fort Albazin by Khabarov after subduing the Daurs led by Arbaši (Chinese: 阿尔巴西).

March 24, 1652 : Battle of Achansk


1654-1658 : onufriy Stepanov


March-April 1655 : Siege of Komar

1655 : Russian Empire has established a "military governor of the Amur region".

1657 : 2nd Battle of Sharhody.


1654-1658 : The Manchu/Korean expeditions against Russians


In the following operations significant Korean forces were included into Manchu-led troops. The campaigns became known in Korean historiography as Naseon Jeongbeol.


January 1654 : the first time a Korean contingent arrived to join a Manchu army near Ninguta.

July 1654 : Battle of Hutong (on lower reaches of the Sungari at the present-day Yilan) between a joint Korean-Manchu army of 1500 men led by Byeon Geup (Hangul: 변급 Hanja: 邊岌) against 400-500 Russians.

1658 : Sarhuda's Manchu fleet from Ninguta, including a large Korean contingent led by Shin Ryu sails down the Sungari into the Amur, and meets onufriy Stepanov's smaller fleet from Albazin. In a naval battle in the Amur a few miles downstream from the mouth of the Sungari (July 10, 1658). The 11-ship Russian flotilla is destroyed (the survivors flee on just one ship), and Stepanov himself dies.


1685-1687 : The Albazin/Yakesa Campaign


May-July 1685 : The siege of Albazin

July-October 1686 : The siege of New Albazin.


The Nerchinsk Treaty


1689 : Russia accepts the terms of the Nerchinsk Treaty and abandons the banks of the Am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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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북벌론

조선 효종대에 추진했던 청나라 정벌계획.


병자호란의 패배 이후 조정과 유림에서는 청을 배척하고 명나라의 복수를 외치는 척화론(斥和論)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북벌계획은 1649년 효종이 즉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효종은 척화론의 중심인물로 당시 낙향해 있던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俊吉) 등 기호사림을 등용하여 훈신(勳臣) 세력이며 친청파(親淸派)였던 김자점(金自點) 일파를 제거한 후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먼저 군비확충을 꾀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과 수어청(守禦廳)을 정비하고, 중앙군 병력을 금군 1,000명, 어영청 2만 명, 훈련도감 1만 명으로 증강했다. 기병강화를 위해 금군의 완전기병화를 추진했으며, 어영청에 기병대인 별마대와 포병대인 별파진(別破陣)을 신설하고 전국의 목장을 정비했다. 군기와 전술개량에도 힘을 기울여 네덜란드의 표류인 하멜을 시켜 조총을 개량하고, 효종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청군을 가상하여 군복·무기와 마상(馬上) 전술을 개조했다. 또한 영장제(營將制)와 관무재(觀武才)를 부활하고 이완(李浣)·유혁연(柳赫然) 등의 무신을 파격적으로 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은 중앙군 확충과 이들에 대한 왕의 직접적인 통제력의 강화라는 성과에 머물렀을 뿐이다.


이 때문에 북벌론의 진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명확하지 못한 점이 많다. 효종 자신은 만주지역의 경계가 허술하고 청의 중국 지배가 아직 확고하지 않은 상황이므로 북정하면 한인(漢人)의 내응을 얻어 성공할 수 있다고 하며, 10년간의 준비와 10만 명의 북정군 양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조정 중신들은 전쟁과 군비확충을 통한 왕의 전제권력 강화를 우려했다. 더 큰 문제는 사회적·경제적 측면에도 있었다. 북벌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군역 자원인 농민경제를 안정시켜야 했다.


그러나 당시 지주제가 발달함에 따라 많은 농민이 토지를 상실하고 소작인으로 전락하는 반면, 면세·면역의 특권을 누리던 왕실과 양반층의 토지집적은 가속되어 공민과 공전은 계속 감소하고 있었다. 효종대에 대동법을 시행하고, 대규모 양정(良丁)색출작업과 노비추쇄작업을 펼쳤으나 별반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토지제도의 개혁이나 양반층의 면역특권을 철폐하는 개혁이 요구되었는데, 양반층들은 여기에 반대했다. 그결과 훈련도감의 1만 병력 확보조차 재정과 양정부족으로 벽에 부딪혔으며 효종이 무리하게 강행한 양인색출작업으로 농민의 부담이 과중되었다. 북벌론을 제창하던 송시열 등도 이러한 개혁에는 반대했다. 그의 북벌론은 춘추대의론에 따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입장에서 전개한 것으로, 군사적 행동이 아닌 정신적인 북벌론이었다. 따라서 그는 효종의 전제정치를 실정(失政)으로 비판하고 북벌의 방법으로 양병(養兵)보다는 군주의 수신(修身), 부세경감 등을 통한 민생의 안정, 그리고 춘추대의를 밝힘으로써 양란 이후 동요된 사회를 안정시키고 신분질서와 강상윤리를 회복할 것을 내세웠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1659년 효종이 갑자기 서거함으로써(계획적인 암살이라는 설도 있음) 북벌계획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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