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의제문 (弔義帝文)
조선 전기의 학자 김종직(金宗直)이 세조(世祖)의 찬탈(纂奪)을 비난한 글로서 운문체로 씌어졌다. 김종직이 1457년(세조 3) 10월 밀양에서 경산(京山:星州)으로 가다가 답계역(踏溪驛)에서 숙박했는데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입고 나타나 전한 말을 듣고 슬퍼하며 지은 글이다.
김종직은 항우(項羽)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글을 지었는데, 이것은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端宗)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글이다. 이 글을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사초(史草)에 적어 넣었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게 되었는데, 그 때의 편찬책임자는 이극돈(李克墩)으로 이른바 훈구파(勳舊派)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김일손의 사초 중에 이극돈의 비행(非行)이 기록되어 있어 김일손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던 중,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 중에서 발견한 이극돈은 김일손이 김종직의 제자임을 기화(奇貨)로 하여 김종직과 그 제자들이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는 사림파(士林派)를 숙청할 목적으로,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 일파를 세조에 대한 불충(不忠)의 무리로 몰아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을 움직여, 큰 옥사(獄事)를 일으켰다.
이것이 무오사화(戊午史禍)인데, 그 결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고, 사림파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이목(李穆) ·허반(許盤) ·권경유(權景裕) 등은 선왕(先王)을 무록(誣錄)한 죄를 씌워 죽이고, 정여창(鄭汝昌) ·강겸(姜謙) ·이수공(李守恭) ·정승조(鄭承祖) ·홍한(洪澣) ·정희랑(鄭希良) 등은 난을 고하지 않은 죄로, 김굉필(金宏弼) ·이종준(李宗準) ·이주(李胄) ·박한주(朴漢柱) ·임희재(林熙載) ·강백진(姜伯珍)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로 귀양보냈다 [두산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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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제문(弔義帝文) 원문과 번역문.
[德田의 문화일기]
丁丑十月日, 余自密城道京山, 宿踏溪驛, 夢有神披七章之服, 頎然而來,
自言: “楚懷王^孫心爲 西楚霸王所弑, 沈之郴江。” 因忽不見。
余覺之, 愕然曰: “懷王南楚之人也, 余則東夷之人也。地之相距,
不啻萬有餘里, 而世之先後, 亦千有餘載。來感于夢寐, 玆何祥也 ?
且考之史, 無沈江之語, 豈羽使人密擊,而投其屍于水歟? 是未可知也
”遂爲文以弔之。
惟天賦物則以予人兮, 孰不知尊四大與五常? 匪華豐而夷嗇,
曷古有而今亡? 故吾夷人, 又後千載兮, 恭弔楚之懷王。
昔祖龍之弄牙角兮,四海之波,殷爲衁雖鱣鮪鰍鯢,曷自保兮,思網漏而營營。
時六國之遺祚兮, 沈淪播越, 僅媲夫編氓 梁也南國之將種兮,踵魚狐而起事
求得王而從民望兮,存熊繹於不祀。握乾符而面陽兮, 天下固無大於芉氏。
遣長者而入關兮, 亦有足覩其仁義 羊狠狼貪, 擅夷冠軍兮, 胡不收而膏齊 ?
嗚呼! 勢有大不然者兮, 吾於王而益懼 爲醢腊於反噬兮, 果天運之蹠盭
郴之山磝以觸天兮, 景晻愛以向晏。郴之水流以日夜兮, 波淫泆而不返。
天長地久, 恨其可旣兮, 魂至今猶飄蕩。余之心貫于金石兮, 王忽臨乎夢想
循紫陽之老筆兮, 思螴蜳以欽欽 擧雲罍以酹地兮, 冀英靈之來歆
조의제문(弔義帝文) 한글 번역문
정축 10월 어느 날에 나는 밀성(密城)으로부터 경산(京山)으로 향하여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신(神)이 칠장(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양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 손심(孫心)인데, 서초패왕(西楚霸王)에게 살해 되어 빈강(郴江)에 잠겼다.」 하고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생각하기를 「회왕(懷王)은 남초(南楚)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 사람으로 지역의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이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역시 천 년이 휠씬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정녕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드디어 문(文)을 지어 조문한다.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사대(四大) 오상(五常)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라서 풍부하고 이적이라서 인색한 바 아니거늘,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을손가. 그러기에 나는 이인(夷人)이요 또 천 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하노라.
옛날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하니, 사해(四海)의 물결이 붉어 피가 되었네. 비록 전유(鱣鮪), 추애(鰌鯢)라도 어찌 보전할손가. 그물을 벗어나기에 급급했느니, 당시 육국(六國)의 후손들은 숨고 도망가서 겨우 편맹(編氓)가 짝이 되었다오. 항양(項梁)은 남쪽 나라의 장종(將種)으로, 어호(魚狐)를 종달아서 일을 일으켰네.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에 따름이여! 끊어졌던 웅역(熊繹)의 제사를 보존하였네. 건부(乾符)를 쥐고 남면(南面)을 함이여! 천하엔 진실로 미씨(芈氏)보다 큰 것이 없도다.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關中)에 들어가게 함이여! 또는 족히 그 인의(仁義)를 보겠도다. 양흔낭탐(羊狠狼貪)이 관군(冠軍)을 마음대로 축임이여!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아아,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에 있어, 나는 왕을 위해 더욱 두렵게 여겼네. 반서(反噬)를 당하여 해석(醢腊)이 됨이여, 과연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구려. 빈의 산은 우뚝하여 하늘을 솟음이야!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녁에 가깝고.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흐름이여!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르도다.
천지도 장구(장구)한들 한이 어찌 다하리 넋은 지금도 표탕(표탕)하도다. 내 마음이 금석을 꿰뚫음이여!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네. 자양(자양)의 노필(노필)을 따라가자니, 생각이 진돈(螴蜳)하여 흠흠(흠흠)하도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어! 바라건대 영령은 와서 흠항하소서.’
연산군 교서 한글 번역문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했다.’는 조룡은 진 시황(秦始皇)인데, 종직이 진 시황을 세조에게 비한 것이요, 그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을 따랐다.’고 한 왕은 초 회왕(楚懷王) 손심(孫心)인데, 처음에 항량(項梁)이 진(秦)을 치고 손심을 찾아서 의제(義帝)를 삼았으니, 종직은 의제를 노산(魯山)에게 비한 것이다.
그 ‘양흔 낭탐(羊狠狼貪)하여 관군(冠軍)을 함부로 무찔렀다.’고 한 것은, 종직이 양흔 낭탐으로 세조를 가리키고, 관군을 함부로 무찌른 것으로 세조가 김종서(金宗瑞)를 베인 데 비한 것이요. 그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 했느냐.’고 한 것은, 종직이 노산이 왜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반서(反噬)를 입어 해석(醢腊)이 되었다.’는 것은, 종직이 노산이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하고, 도리어 세조에게 죽었느냐 하는 것이요. 그 ‘자양(紫陽)은 노필(老筆)을 따름이여, 생각이 진돈하여 흠흠하다.’고 한 것은, 종직이 주자(朱子)를 자처하여 그 마음에 부(賦)를 짓는 것을, 《강목(綱目)》의 필(筆)에 비의한 것이다.
그런데 일손이 그 문(文)에 찬(贊)을 붙이기를 ‘이로써 충분(忠憤)을 부쳤다.’ 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세조 대왕께서 국가가 위의(危疑)한 즈음을 당하여, 간신이 난(亂)을 꾀해 화(禍)의 기틀이 발작하려는 찰라에 역적 무리들을 베어 없앰으로써 종묘사직이 위태했다가 다시 편안하여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 공과 업이 높고 커서 덕이 백왕(百王)의 으뜸이신데,
뜻밖에 종직이 그 문도들과 성덕(聖德)을 기롱하고 논평하여 일손으로 하여금 역사에 무서(誣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어찌 일조일석의 연고이겠느냐. 속으로 불신(不臣)의 마음을 가지고 세 조정을 내리 섬겼으니, 나는 이제 생각할 때 두렵고 떨림을 금치 못한다. 동·서반(東西班) 3품 이상과 대간·홍문관들로 하여금 형을 의논하여 아뢰도록하라
조의제문(弔義帝文)
의제를 조문하는 글-김종직(金宗直)
丁丑十月日 余自密城道京山 宿踏溪驛 夢有神披七章之服 頎然而來 自言
정축십월일 여자밀성도경산 숙답계역 몽유신피칠장지복 기연이래 자언
楚懷王孫心爲 西楚霸王所弑 沈之郴江 因忽不見 余覺之 郴江에 잠겼다
초회왕손심위 서초패왕소시 침지침강 인홀불견 여각지 빈강
愕然曰 懷王南楚之人也 余則東夷之人也 地之相距 不啻萬有餘里
악연왈 회왕남초지인야 여칙동이지인야 지지상거 불시만유여리
而世之先後 亦千有餘載 來感于夢寐 玆何祥也 且考之史 無沈江之語
이세지선후 역천유여재 래감우몽매 자하상야 차고지사 무침강지어
豈羽使人密擊 而投其屍于水歟 是未可知也遂爲文以弔之惟天賦物則以予人兮
기우사인밀격 이투기시우수여 시미가지야수위문이조지유천부물칙이여인혜
孰不知尊四大與五常 匪華豐而夷嗇 曷古有而今亡 故吾夷人
숙불지존사대여오상 비화풍이이색 갈고유이금망 고오이인
정축 10월 어떤 날 나는 밀성으로 부터 경산으로 향하여 답계역에서 숙박하는데 꿈에 신(神)이 칠장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습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나는 초나라 회왕인 손심(孫心)인데 서초패왕에게 살해 되어 그래서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이르기를“회왕은 남초 사람이요, 나는 동이 사람으로 지역의 서로 떨어진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이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또한 천 년이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로움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어찌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것을 알 수 없으니 마침내 문을 지어 조문한다.
하늘이 사물의 법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사대와 오상을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라서 풍부하고 오랑캐라서 인색한 바이니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겠는가 그러기에 나는 오랑캐이요
又後千載兮 恭弔楚之懷王 昔祖龍之弄牙角兮 四海之波 殷爲衁 雖鱣鮪鰍鯢
우후천재혜 공조초지회왕 석조룡지롱아각혜 사해지파 은위황 수전유추예
曷自保兮 思網漏而營營 時六國之遺祚兮 沈淪播越 僅媲夫編氓\
갈자보혜 사망루이영영 시륙국지유조혜 침륜파월 근비부편맹
梁也南國之將種兮 踵魚狐而起事 求得王而從民望兮 存熊繹於不祀
량야남국지장종혜 종어호이기사 구득왕이종민망혜 존웅역어불사
握乾符而面陽兮 天下固無大於芉氏
악건부이면양혜 천하고무대어간씨
또 천 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한다 옛날 조룡이 아각을 가지고 노니 사해(四海)의 물결이 붉어 피가 되었어라 비록 전유와 추애일지라도 어찌 보전하겠는가 그물 벗을 생각에 급급했으니 당시 육국의 후손들은 숨고 도망가서 겨우 편맹과 짝이 되었다오. 항양(項梁)은 남쪽 나라의 장군의 자손으로 어호(魚狐)를 쪼치 일을 일으켰네.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에 따랐어라 끊어졌던 웅역(熊繹)의 제사를 보존하였도다.건부(乾符)를 쥐고 임금이 됨이여 천하에는 진실로 미씨보다 큰 것이 없었다.
遣長者而入關兮 羊狠狼貪 擅夷冠軍兮 胡不收而膏齊斧嗚呼勢有大不然者兮
견장자이입관혜 양한랑탐 천이관군혜 호불수이고제부오호세유대불연자혜
吾於王而益懼 爲醢腊於反噬兮 果天運之蹠盭 郴之山磝以觸天兮
오어왕이익구 위해석어반서혜 과천운지척려 침지산오이촉천혜
景晻愛以向晏 郴之水流以日夜兮 波淫泆而不返
경엄애이향안 침지수류이일야혜 파음일이불반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에 들어가게 함이여 역시 족히 그 인의(仁義)를 보았다. 양흔낭탐이 관군(冠軍)을 마음대로 평정하였구나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아아,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이여 나는 왕에게 더욱 두렵게 여겼어라 반서(反噬)를 당하여 해석(醢腊)이 됨이여 과연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구나 빈의 산이 우뚝하여 하늘에 닿음에야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녁을 향하고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흘러가는구나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른다.
天長地久 恨其可旣兮 魂至今猶飄蕩 余之心貫于金石兮 王忽臨乎夢想
천장지구 한기가기혜 혼지금유표탕 여지심관우금석혜 왕홀림호몽상
循紫陽之老筆兮 思螴蜳以欽欽 擧雲罍以酹地兮 冀英靈之來歆
순자양지로필혜 사진윤이흠흠 거운뢰이뢰지혜 기영령지래흠
천지가 장구한들 한이 어찌 다할까 넋은 지금도 표탕하다. 내 마음이 금석을 꿰뚫음이여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구나 자양의 노필을 따라감이여 생각이 초조하여 흠흠하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어 바라기는 영령은 와서 흠항하소서
[德田의 문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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