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반정(中宗反正)은 과연 한반도 조선사가 맞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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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반정-계유정란(癸酉靖亂) http://blog.daum.net/han0114/17047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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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영락제(3대 永樂帝, 1360.5.2~1424.8.12 제위1402~1424)가 번왕인 연왕(燕王)신분이었을 때 조카 건문제(2대 明惠宗 建文帝 朱允炆, 1377.12.5~ ? 제위1398-1402)의 역모를 두려워 하여 먼저 번왕들인 주왕(周王)·상왕(湘王)·제왕(齊王)·대왕(代王)·민왕(岷王)등을 제거하고 삼촌인 연왕(영락제)까지 제거하려고 하자 삼촌 연왕은 1399년 7월 북평에서 거병하여 조카 건문제 신하들을 제거하는 황실의 난을 정란의 난(靖難之變)이라고 하였는데 실제 따지고 보면 삼촌이 조카를 상대로한 쿠데타를 일으킨 역모사건이다.
일단 사건의 모양새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권좌에 앉은 세조와 흡사하다.
단종역시 죽음의 시기가 불분명하듯 건문제 역시 사망시기가 분명치 않다.
어쨌든 조카를 폐위시키고 권좌를 삼촌이 빼앗는 형국은 똑 같다.
년대로 따져 계유정란(癸酉靖亂)보다 정난의 변(靖難之變)이 앞서 있다고 하여 후일에 일어난 계유정란이 정난의 변을 모방한 것이라고 단정지우는 것은 맞지 않는 가정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근세기 역사재편짜기때 대륙 객가정치세력과 열도 왜구무사정치집단들이 동양사와 대륙역사를 재편하면서 기존 역사기록을 다르게 의도적으로 수정 또는 모사, 가필등 방법으로 고쳤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히려 명 정란의 난과 조선 세조의 계유정란을 동일한 사건으로 보아야 하지만 근세기 역사판짜기에서 아시아, 대륙조선이란 틀을 대륙 명과 한반도 조선으로 나누어 각색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할 것이다.
세조반정인 계유정란은 대륙에서 일어난 명나라 영락제 정난의 변일 것이다.
대륙 명에서 일어난 정난의 변도 삼촌 번왕인 연왕(燕王:永樂帝)이 조카 건무제를 폐위시킨 쿠데타 역모사건이고 한반도 조선에서 일어난 계유정란 역시 삼촌인 수양대군(首陽大君:世祖1417~1468, 재위 1455~1468)이 단종(端宗, 1441.7.23~1457.12.24, 재위 1452~1455)인 조카를 군사력을 동원하여 폐위시킨 역모사건이다.
총체적으로 볼 때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대륙에 근거하였던 조선에서 기존 세종대(단종)영역과 제후의 세조대 영역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나온 쿠데타 성격의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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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정란(癸酉靖亂)의 모티브가 되었던 정난(靖難)의 변(變)
[공산]2009/01/05 13:45
계유정란(癸酉靖亂)이란 주지하는 바와 같이 1453년(계유년) 10월 10일 단종의 삼촌이자 세종대왕의 차남인 수양대군이 동생인 안평대군과 손을 잡은 좌의정 김종서, 황보인 등 당시 조정의 핵심인물을 제거하고, 결국은 조카인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게 되는 사건을 말한다. 이 계유정란의 모티브가 되었던 정난(靖難)의 변(變)에 대해 소개할까 한다.
계유정란보다 앞서 중국 명나라에 있었던 정난의 변 또한 삼촌인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조카인 건문제(建文帝)를 제거하고 명나라의 삼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가 된 역사적 사건을 말한다. 일찍이 수양대군은 여러 차례 명나라를 다녀왔었고 그 와중에 이런 사실을 분명 알았을 것이다. 따라서 수양대군이 거사를 하기로 맘을 굳힌 것은 이 정난의 변도 상당한 작용을 했음이 분명하다.
명태조 홍무제
명성조 영락제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주원장(朱元璋: 이하 홍무제라고 칭함)은 그의 통치하에 있는 방방곡곡 모든 지방 말단까지 자신의 뜻이 남김없이 미치기를 원했다.
원래 기원전 3세기 진나라 시황제(始黃帝)가 전국을 통일하여 처음 중앙집권제를 완성하였지만, 그후로 차차 귀족들이 관직을 독점하여 한때 황제의 실권을 능가한 시대도 있었다. 그러다가 10세기 말에 귀족 계급이 사라지면서 대신 과거에 합격한 관료들의 황제의 손발이 되어 황제의 독재체제가 성립되기 시작했다.
홍무제(洪武帝)는 송나라 이후 발달한 군주의 독재권을 제도적으로 확립한 사람으로서 이때 확립된 황제의 존엄한 지위는 명에서 청나라에 계승되기에 이른다.
홍무제는 황제의 독재권을 제도화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면서 만반의 준비를 추진해갔다. 25세에 홍건적에 투신한 홍무제는 당시의 동료들, 즉 같은 홍건적 출신의 장군들인 서달(徐達), 상우춘(常遇春), 등유(鄧愈), 빙승(憑勝), 탕화(湯和) 등과는 사실 부하라기보다는 형님 동생하던 사이로서, 홍무제로서도 이래라 저래라 하고 소홀하게 다루기 거북한 입장에 있었다. 자연 홍무제의 직계 부하인 신흥 세력과 실권파의 홍건적 출신 사이에 마찰이 생기고, 홍무제로서도 옛 동료이자 공신이며 실권자인 그들을 제거할 필요성이 절실하게 되었다. 독재권의 확립에는 예나 지금이나 피의 숙청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에 홍무제는 조용히 독재에의 포석을 추진했다.
홍무제는 제위에 오를 당시에 마황후(馬皇后)가 낳은 표(標), 상(樉), 강(棡) 세 아들과, 공비(碽妃)*가 낳은 체(棣), 숙(橚) 및 그 밖의 비빈들이 낳은 아들이 여럿 있었다.
육당 최남선이 쓴 [고사통(故事通)]에 따르면 공비는 조선(고려)여자이며, 함산 공주(含山公主)를 낳은 한비(韓妃) 역시 조선(고려)사람이었다고 한다.
우선 14세인 맏아들 표를 황태자로 세운 후 실권을 쥐고 있는 공신 전원에게 그 보육관을 겸직토록 하였다. 물론 이것은 황태자의 교육을 위해서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 공신들에게 다음 대를 이를 황태자와 스스럼없이 친밀한 관계를 맺게 함으로써 심리적인 안도감을 주기위한 조치였다.
홍무제는 황태자에게 궁중의 치안권을 주는 한편, 황제 개인의 군대를 교묘하게 양성하였다. 황태자의 친동생인 상을 진왕(秦王)으로 봉하여 서안(西安)을, 강은 진완(晉王)으로 봉하여 태원(太原)을, 체를 연왕(燕王)으로 봉하여 북평(北平:지금의 북경지방)을 영지로 삼게 하는 등 여러 아들을 각지의 왕으로 봉하여 영지까지 나누어 주었다. 물론 아직 어린 그들을 영지에 부임케 하지는 않고 황제의 슬하에 두었으나, 각 영지에는 자연스럽게 왕의 친위대인 호위군을 조직토록 조처하였다.
홍무 11년(1378년) 왕자들이 20대 청년으로 성장하자 홍무제는 은밀히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해에 진왕(秦王)과 진왕(晉王)은 처음으로 자기 영지에 부임하여 이듬에 9월에 각기 호위병을 이끌고 금릉(金陵) 즉 남경(南京)에 돌아왔다. 10월에는 청해(淸海) 지방에 출정했던 목영(沐英)이 대군을 인솔하고 개선해왔다. 목영은 황태자가 어릴 때부터 침식을 같이 하며 황태자를 직접 키운 사람으로서 황제의 직계일 뿐만 아니라 양자이기도 해서 친아들과 다름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홍무제의 직계 부대가 슬금슬금 금릉에 집결을 끝냈다.
이해 12월 중서우승상 왕광양(汪廣洋)이 돌연 해남도로 추방되고, 뒤이어 쫒아간 칙사에 의해 도중에서 목이 달아났다. 이어서 다음해 정월 초이튿날 좌승상 호유용(胡惟庸)이 채포되어 나흘 뒤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황태자가 이끄는 군대는 금릉 성내의 홍건적 계열의 군영을 습격했다. 말하자면 친위대가 정부 실권자에 대해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 사건을 중국역사에서는 “호유용의 대역사건”이라고 한다.
[명사(明史)]에 따르면 호유용은 홍무제와 한 고향 출신으로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으며, 승상 자리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마음껏 세도를 부린 호유용은 그를 비난한 원훈 유기(劉基)를 독살한 혐의를 받고 있던 차에 북원(北元) 및 왜구와 통하고 불칙한 도당을 짜서 역모를 꾀하다가 탄로가 나서 일망타진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숙청된 연루자가 1만 5천명에 달하였는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이 사건은 홍무제가 조작한 혐의가 짙지만, 아득한 역사의 장막에 가려 진위를 알 길이 없다. 어쨌든 명나라 건국 이래 최초의 피의 대숙청은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하지만 피는 피를 부르고 숙청은 한 번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독재자는 외롭고 의심이 많이 마련이다. 고아 출신으로 형극의 길을 걸어온 홍무제가 말년이 될수록 남을 믿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어두운 과거가 화가 되어 비참한 콤플렉스와 자격지심을 일으켜 날이 갈수록 그의 성격을 더욱 비뚤어지게 몰고 갔다. 그의 신하들은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문자(文字)의 화(禍)”가 일어났다.
홍무제는 광(光), 생(生), 칙(則) 자를 혐오했다. 그것을 미쳐 모르고 글을 올린 학관(學官)들은 모조리 목이 달아났다. 빛 광(光)자는 까까머리 중머리를, 날 생(生)자는 중을, 법칙 칙(則)자는 도적 적(賊)자를 바꿔놓은 글자라고 해서 질색하고 싫어했다. 이들 글자 속에서 자신의 꺼림칙하고 잊고만 싶은 지난날의 모습, 즉 거지 중과 홍건적을 연상하여 그 모욕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발단은 홍무제가 “마상(馬上)에서 천하를 얻었으되, 다스리기는 문(文)으로 해야 한다”고 하면서 문인 학자들만 우대하는 데 불만을 품은 무장들이 빗대어 말하길 일찍이 홍무제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장사성(張士誠)의 사성이란 이름은 그가 우대해 준 문인들이 지어 올린 이름인데, 실상은 [맹자(孟子)]의 사성은 소인이다(士誠小人也)란 구절에 따온 이름으로서 뒤에서 간사한 문인들이 비웃는 줄도 모르고 무식한 장사성이 죽을 때까지 그 이름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빗대놓고 한 참소에 충격을 받은 홍무제는 의심과 콤플렉스가 범벅으로 발동하여 서슴없이 대숙청을 감행하고 걸핏하면 문무를 가리지 않고 신하들의 목을 쳤다.
홍무 17년(1384년) 봄, 건국의 무훈(武勳)인 조국공(曹國公) 이문충(李文忠)이 독살되었다. 그는 주원장의 조카로서 문무겸전의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으니, 자주 황제에게 간하다가 황제의 역정을 샀다고 한다.
그 이듬해 2월에는 무훈으로 으뜸인 위국공(魏國公) 서달(徐達)마저 독사하였다. 그는 주원장의 거병 이래 오른팔 역할을 한 개국원훈으로, 그의 딸은 3대 황제이자 정난의 변 주인공인 영락제의 황후였다. 일설에 그의 독사 원인은 고약한 종기를 앓던 그에게 그 병에는 절대 비상인 삶은 거위를 먹게 한 때문이라고 한다. 그 거위는 홍무제가 병문안차 보낸 것으로, 자결할 것을 암시받은 서달은 울면서 그 고기를 먹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홍무제 주변에는 음산하고 살벌한 공기가 감돌았다.
제도라는 것은 일단 정착된 후에는 처음 계획한 사람의 뜻과는 상관없이 독자적인 기능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홍무제가 처음에 여러 아들을 왕으로 봉하고 호위군대를 조직한 것은 부려 먹기 거북한 홍건적 출신의 군대와의 인연을 끊고 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분봉한 왕들이나 그 친위대 입장에서 보면 일단 호유용과 그 일파를 성공적으로 제거하긴 했지만 아직 홍건적 출신의 세력이 남아 있는 한은 마음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 점은 신흥 과거출신 관료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해를 같이 하는 이 두 세력은 서로 손을 잡고 홍무제 측근의 공신들에게까지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홍무 23년(1390년) 그들은 이선장(李善長)이 10년 전 호유용의 대역사건 때 역적 호유용을 비호했던 일을 들추어내서 들고 일어났다. 이미 63세의 늙은 황제는 77세의 이선장을 어전에 불러 지나간 세월을 회상하며 옛이야기를 나눈 끝에 여러 신하들을 향해 자기를 보아 이선장의 죄를 용서해 주도록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나 법은 엄연하고 여러 왕들과 관료들의 압력은 이미 황제를 능가할 만큼 성장해있었다.
홍건적에 몸담았던 이래 줄곧 주원장을 보좌해 온 문신의 으뜸인 이선장은 눈물로 황제 앞에 하직하고 집에 돌아가 목을 맸다. 뒤따라 4명의 늙은 공신들이 사형을 받고 후백무장(侯伯武將)을 포함하여 3만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제2차 숙청을 역사에서는 “호유용당(胡惟庸黨)의 옥(獄)”이라 한다.
이 제2차 숙청을 계기로 원훈 공신들에 대한 신흥 세력 연합체의 박해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으나, 사실상 승상(丞相)격인 황태자가 있는 동안은 공신들을 보호하여 지나친 행동을 못하게 막았다.
홍무 25년(1392년) 뜻밖에 황태자가 죽었다. 아직 39세의 한창 나이였다. 운남(雲南) 주둔지에서 이 비보를 들은 목영(沐英)도 비탄에 잠긴 나머지 급사하고 말았다. 여태까지 황제의 정무는 사실상 이 유능한 황태자가 대행하고 있었다. 홍무제는 손발이 잘린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늙고 병이 잦은 황제는 황태자의 죽음을 계기로 눈에 띄게 쇠약해졌다.
황태자가 병으로 죽자 관료파들은 황태손을 세울 것을 주상했다. 결국 황태자의 어린 아들 주윤문(朱允炆)이 황태손이 되었다. 이 무렵 홍무제는 이미 권력의 자리에서 겉도는 이름뿐인 황제였으나, 황태자와 어머니가 같은 진왕(秦王)과 진왕(晉王)이 어린 조카의 뒤를 봐주어서 황태손의 지위는 그런대로 안정되어 있었다.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의심 많고 잔인한 황제와 여러 왕 및 관료가 합심하여 드디어 공신들을 송두리째 얽어 넣기 위해서 이듬해 몽고 토벌 때 큰 공을 세운 맹장 남옥(藍玉)을 위시해서 다시 1만 5천명을 체포하여 죄를 묻고 처형했다. 남옥이 그 옛날 몽고 토벌 때 재물을 착복하고 원나라의 비빈(妃嬪)과 사통했으며 반역을 꾀했다는 것이나, 이유가 희박했다. 이른바 제3차 숙청인 이 “남옥(藍玉)의 옥(獄)”을 통해 주원장의 대업을 도운 원훈 장로와 홍건적 출신의 공신, 대관(大官), 소리(小吏), 병졸에 이르기까지 거의 씨를 말려버렸다.
이렇게 해서 홍건적 출신의 세력들은 된서리를 맞고 황태손의 앞길은 일단 안정된 것 같이 보였지만, 뜻하지 않은 변동이 일어났다. 공동의 적인 공신과 홍건적 계열을 일망타진하고 나자 득세하기 시작한 신흥 관료세력이 황태손의 독재체제를 지지하며 여러 왕들과 대립하게 된 것이다.
권력쟁취를 위한 허니문은 끝나고 동맹관계는 깨졌다. 그래도 진왕(秦王)과 진왕(晉王)이 건재한 동안은 괜찮았으나, 홍무 28년(1395년)에 진왕(秦王)이, 홍무 31년(1398년)에는 (晉王)마저 어이없이 죽고 말았다.
여러 왕들 중에서 이제는 북평에 영지를 두고 있는 연왕(燕王)이 우두머리였다. 그는 마황후의 태생이 아니라 조선 여인인 공비가 낳은 서출이였다. 조카이긴 해도 황태손과는 서먹하고 소원한 사이였다. 자연 신흥관료파와 여러 왕과의 대립은 황태손과 연왕의 대립으로 양상이 바뀌어 갔다. 이런 집안싸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행인지 불행인지 명태조 홍무제가 그 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그 때 나이 72세로, 셋째 아들 진왕(晉王)이 죽은 지 두 달 후의 일이다.
한 나라를 새로 세우기보다 세운 나라를 지키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홍무 31년(1398년) 명나라를 창업한 태조 주원장이 죽자, 황태손 윤문이 제2대 황제에 즉위하고, 연호도 다음해부터 건문(建文)이라 새로 고쳤다. 갓 스물이 넘은 건문제는 유학을 좋아하고 글재주도 있었으나, 우울하고 신경질에 여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태 조 홍무제에게는 아들이 24명 있었다. 일찍이 홍무 2년(1369년)에 여러 왕들을 각 지역에 봉하고 다음해 아홉 아들을 왕으로 봉했다. 홍무 13년(1380년) “호유용의 대역사건”을 치른 이듬해에 다시 10명의 왕을 새로 분봉(分封)했다. 이렇게 해서 홍무 24년(1391년)에는 황태자 이하 24명 제왕(諸王)들의 봉지가 확정되었다.
그 배치는 우선 동쪽은 만주에서 서쪽은 감숙(甘肅)에 이르는 만리장성 안팎의 군사상 요지를 골라서 12명에게 분봉하여 여진, 몽고, 서역에 대비하였다. 이들 변견을 지키는 12명의 왕을 흔히 새왕(塞王)이라 부른다.
다 음에는 호북(湖北), 호남(湖南), 사천(四川), 운남(雲南) 지방을 여섯 아들에게 분봉하여 묘족과 티벳족을 진무케하였다. 나머지 다섯 아들은 중원의 도적 소굴로 알려진 하남(河南)과 산동(山東)에 배치했다. 말하자면 금릉(金陵:남경)을 핵으로 하여 주씨 일문에 의한 전략적인 포석을 전국에 빈틈없이 편 것이다.
일반적으로 명나라의 봉건제를 한(漢)나라의 것을 모방한 제도라고 평가하지만, 그 성격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지방의 여러 왕에게는 영지도 토지도 백성에 대한 지배권도 없었으며, 중앙 정부에서 직접 봉록을 주었다. 상황에 따라서 3천명 내지 1만 8천명 내외의 정부 파견 호위병을 주둔시켜서 긴급시에는 지휘하기도 하지만, 그 경우에도 황제의 허락을 얻고 나서야 지휘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봉건 제도의 개념과는 다른 제도인 것이다.
그래도 서안(西安)의 진왕(秦王)과 북평(北平)의 연왕(燕王) 등은 변경을 지키는 데 필요한 대군을 지휘하에 두고 강대한 세력을 펴고 있었다. 건문제가 즉위하자 여러 왕들은 저마다 실력을 과시하며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건문제(建文帝)
한 편 건문제를 둘러싼 관료들은 새로 즉위한 황제의 독재권 확립을 위해 여러 왕들의 세력을 꺾는 작업에 착수했다. 먼저 연왕(燕王)과 같은 배에서 난 주왕(周王)이 작위를 박탈당하고 서인이 되어 운남에 유배되었고, 이어서 상왕(湘王)은 자살하고, 민왕(岷王), 제왕(齊王), 대왕(代王)이 연이어서 작위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건문제가 노리는 진짜 과녁은 북평에 있는 연왕이었다. 연왕은 태조 주원장의 여러 아들 중에서 가장 아버지를 닮아 영웅다운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21세에 북평에 부임하여 31세 때 만리장성을 넘어 멀리 몽고 원정에 첫 공을 세워서 태조로 하여금 새왕(塞王) 설치의 효과를 확신케 했다.
하지만 일찍부터 이 새왕제도에 대한 의혹이 싹트고 있었다. 그것은 중앙집권제와 지방분권제에 으레 따르기 마련인 모순이었다. 새왕제도는 한고조를 흉내낸 봉건제의 부활로 여겨져서 자연 황제와 봉건 제왕들이 엉켜 싸웠던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 같은 사태가 재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을 주상한 유신(儒臣)들은 골육의 정을 모함한다 하여 태조의 노여움을 사서 참수되었다. 황태자도 이 일을 문제 삼은 적이 있었고, 황태손도 이를 거론했으나 태조는 자기가 세운 탄탄한 절대 제정(帝政)의 효율성을 믿고 있었다. 황태자나 황태손 및 그 측근이 새왕제도를 불안해 한 것은 이미 라이벌로서의 연왕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황태자가 병사할 당시 비탄에 잠긴 황제는 감상적인 기분에 젖어 신하가 상주한 대로 황태손을 세우긴 하였지만, 뇌리에 자기의 후계자로서 연왕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지난날의 소식은 건문제나 연왕의 귀에도 전해졌을 것이다. 건문제와 연왕, 즉 조카와 삼촌은 어차피 언젠가는 황제의 자리를 놓고 골육상쟁의 실력대결을 할 숙명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배다른 형의 아들인 건문제가 즉위하자마자 자기의 친동생을 위시하여 동족의 여러 왕들을 차례로 숙청하는 것을 본 연왕은 그것이 결국에는 자신을 겨냥한 것임을 짐작하고 미리 손을 써, 건문 원년(1399년) 7월에 반란을 일으켰다.
금릉의 조정에는 여전히 상비군 50만 대군이 있었으나, “남옥의 옥”을 치르고 홍건적 계열의 장군이나 사병이 숙청된 직후라 뒤죽박죽으로 술렁이고 미쳐 체계가 잡히지 않은 시기였다. 또 아직 어리고 이상주의적인 건문제의 측근에는 황자징(黃子澄), 제태(齊泰), 방효유(方孝儒) 등 신진 소장 학자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학문에는 조예가 깊어도 정치에 서투르고 군사적 지식도 모자랐다.
방효유(方孝儒)
이에 비해 연왕의 친위병은 비록 병력은 적었으나 장기간의 국경방위를 통해 전투 경험을 쌓은 정예 부대였다. 또 연왕의 봉지인 북평(北平)은 지난날 원나라의 수도로서 그 주민 3분의 1은 몽고인이고 연왕의 주위에는 역전의 용사들이 호위하고 있어서 사기가 높았다. 특히 연왕의 측근에는 권모술수에 능한 도연(道衍)이란 괴승(怪僧)이 있었다. 그는 소주(蘇州)의 의생(醫生) 집안 태생으로 유학, 병법, 음양술 뿐만 아니라, 시문과 서화에도 능했다. 처음 연왕을 대했을 때 왕에게 흰모자를 씌워 드리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임금 왕(王) 자에 흰백(白)자를 얹으면 황(皇)자가 되니, 곧 연왕을 황제의 자리에 앉히겠다고 거리낌 없이 약속한 것이다.
연왕은 소문없이 거병을 계획을 추진하여 왕부(王府)의 후원에서 몰래 군사들을 조련하고 지하실을 파고 밤낮으로 병기를 만들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 시끄러운 소리를 가 밖에 새어나갈까봐 후원 근처에 수많은 오리와 거위를 사육하여 위장했다. 시간을 벌기 위해 연왕은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며 사람들의 눈을 속였다. 해괴한 뜬소문이 돌고 현지의 군수뇌부들은 혹은 황제편에 호근 연왕편에 쏠려 일촉즉발의 긴장된 나날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건문제는 1399년 북평 포정사 장병(張昺)에게 명하여 연왕부의 책임자를 체포하라는 칙명을 내렸다. 그러나 연왕이 선수를 쳐서 장병 이하 북평 주재 대신들과 장군들을 죽이고, 건문제 측근의 간신 제태와 황자징을 제거한다는 명분을 세우고 스스로 “정난(靖難)의 사(師)”라고 칭했다. 이에 근거하여 후세의 사가들은 이 내란을 “정난의 변(變)” 혹은 “정난의 역(役)”이라 부른다.
처 음 연왕측의 병력은 역전의 정예부대라고는 하나, 겨우 8천에서 1만명 내외에 불과했다. 그러나 거병한 당일로 신속하고 질서 정연히 북평성을 점령하여 수많은 황제편의 군대가 투항해왔다. 어찌 되었든 독재체제 실현의 수단으로 여러 아들들을 왕으로 봉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홍무제가 그것 때문에 말년에는 실권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만대불역(萬代不易)을 염원하며 눈을 감은 그의 상(喪)을 벗기도 전에 골육이 싸우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건문제 측근의 모사들은 말은 많으나 합심이 안 되었다. 건문제가 황태손이었을 때부터의 스승인 황자징은 의심이 많아 핵심을 찌르는 결단력이 없고 매사에 우유부단했다. 따라서 날카로운 병부상서 제태(齊泰)의 단도직입적인 견해와 의견이 맞지 않았다. 송염(宋濂)의 수제자이자 당대에 첫손 꼽히던 인물인 방효유(方孝儒)가 등장했을 때에는 이미 사태가 기울고 있었다.
연 왕이 거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미 예기했던 일이라 즉시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연왕 토벌군을 북상시켰다. 토벌군이 떠나기 전 건문제는 숙부를 죽였다는 오명을 피하도록 특명을 내려 토벌군의 사기가 떨어졌다고 한다. 어쨌든 추석 명절날 주연을 베풀다가 연왕의 기습을 받아 선봉대가 무너지고 토벌군은 어이없이 첫걸음에 패전했다.
건문제는 다시 50만 대군을 보내 북평성을 포위했다. 이 사이에 연왕은 열하(熱河)로 달려가서 영왕(寧王)을 제거하고 영왕부를 자기편에 끌어들이고는 돌아와서 북평 포위군을 안팎으로 협공하여 대파했다. 연왕의 군사는 승세를 몰아 산동, 하북을 공략했다. 당황한 건문제는 제태, 황자징을 파면하고 연왕에게 철병토록 요구했으나, 연왕은 도리어 정부군의 철병을 요구해왔다.
일진일퇴가 계속되었다. 그렇게 대치한 채 3년이 지났다. 건문제는 전투에 이기면 삼촌을 죽인 더러운 오명을 쓸까 걱정하고, 패하면 화를 내어 지휘관을 갈아치웠다. 그렇게 장기전이 되자 천하의 정세가 정부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하북, 산동의 여러 고을들도 차례로 수복되었다.
이때 건문제에게 원한을 품은 환관이 있어서 연왕과 내통하고 이쪽 속사정을 낱낱이 통보하여 귀중한 정보가 속속 연왕에게 넘어갔다.
건문 3년(1401년) 12월 속전속결주의를 결심한 연왕은 불시에 전선을 돌파하고 황하를 거너 회하(淮河)를 지나 금릉(金陵)에 육박했다. 건문제는 전국에 조칙을 내려 근왕병을 모집하는 한편 제태, 황자징을 다시 기용하고 대책을 강구했으나, 이미 때가 늦어 방효유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국토의 할양을 조건으로 휴전을 제의했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파죽지세로 양자강을 단숨에 넘어 건문 4년(1402년) 6월 어린아이 목을 죄듯 수도를 포위한 연왕의 군사들은 성앞에 밀어닥쳐 닥치는 대로 불을 질러 궁전 누각이 모두 불길에 휩싸였다. 황후도 불속에 몸을 던져 성과 운명을 같이 했다. 그런데 이 혼란 속에 건문제의 행방만이 묘연했다. 후에 불탄 잿더미 속에서 유골을 찾아내서 이를 건문제의 뼈로 인정하고 후히 장사지냈다고 한다.
일설에 건문제는 금릉성이 함락될 때 지하의 비밀통로를 통해 몸을 피해 중으로 변장하고 강남지방을 방랑했다고 하나, 민간의 전설일 뿐 [황명실록(皇明實錄)]을 위시해서 [명사고(明史考)], [명사(明史)] 등의 정사에는 이런 이야기가 일체 보이지 않고, 건문제는 금릉 함락과 운명을 같이 한 것으로 되어있다. 후일 영락제(永樂帝)에 오른 연왕은 건문제를 명나라 역사에서 말살하여 홍무에서 바로 영락으로 이어지게 연대를 개조했으므로 건문제는 명사(明史)에서 끝내 정당한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한 불행이 그 비참한 최후와 곁들여져 민간 전설이나 야사에 여러 가지 풍설을 남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50년 후 조선의 수양대군 역시 이 “정난의 변”을 모티브로 삼아 어린조카인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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