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사건

세조반정-계유정란(癸酉靖亂)

한부울 2009. 5. 21. 15:58
계유정란(癸酉靖亂)의 모티브가 되었던 정난(靖難)의 변(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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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반정(中宗反正)은 과연 한반도 조선사가 맞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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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반정-계유정란(癸酉靖亂)

[세계일보]2008.10.08 22:03


1453년 10월 10일 단종의 삼촌이며 세종대왕의 2남인 수양대군이 동생인 안평대군과 손을 잡은 좌의정 김종서 등 정부의 핵심인물을 제거한 사건.


세종 사망 후 왕위는 장남 문종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던 문종의 병약함은 세종의 근심거리였다. 1450년 2월 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종은 대부분의 시간을 병상에서 보내다가 1452년 5월 사망했다.


사망 직전 문종은 이제 겨우 12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세자가 걱정이 되었다.

문종은 고명대신(誥命大臣 : 왕의 유지를 받드는 대신) 김종서, 황보인 등을 불러 마지막으로 세자를 부탁하고 눈을 감았다. 김종서, 황보인 등은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세종의 3남인 안평대군과 손을 잡았다. 권력욕이 강하고 야심만만한 수양대군보다는 조정의 대신들과도 비교적 친밀한 교분을 가진 학자풍의 왕자 안평대군이 이들에게는 훨씬 부담이 적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들의 권력 강화에 대해 수양대군은 칼을 갈고 있었다. 누구보다 김종서가 그의 주된 목표였다. 운명의 날 새벽, 세조는 측근인 권람, 한명회, 홍달손 등을 불러 구체적으로 김종서 제거계획과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은 김종서의 집을 직접 방문하여 김종서에게 청을 드릴 것이 있다며 편지를 건넸고, 김종서가 편지를 보려고 고개글 숙이는 순간 수양을 대동한 심복 군인 임어울운이 재빨리 철퇴를 휘둘렀다.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김종서가 쓰러지자 아들 승규가 아버지의 몸을 덮었다.


그러나 다시 날아온 수양의 심복 양정의 칼을 맞고 두 사람은 쓰러졌다. 세종 때 북방 육진 개척에 큰 공을 세우며 오늘날 우리 영토를 확립하는데 주역이 된 인물, 대호(大虎 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여진족에겐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이었지만, 수양의 계획된 기습공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수양대군은 단종을 압박하여 1455년 조선의 7대왕 세조로 자리를 잡는다.

김종서 살해 후 수양은 왕명을 빙자해 황보인(우의정)을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을 불러들이게했다. 그리고 이미 한명회 등에 의해 작성된 살생부에 따라 '김종서가 황보인, 정분 등과 모의하여 안평대군을 모의하려 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정부의 핵심 인물들을 제거하였다.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에 따라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 살부(殺簿)에 포함된 인사들은 처형되었고 정인지, 신숙주 등 생부(生簿)에 포함된 인사들은 목숨을 부지하고 세조의 대표적인 참모가 되었다. 이날 만큼은 염라대왕 못지않은 권세를 누린 한명회였다. 대군중에서 가장 큰 경쟁자인 수양의 동생 안평대군은 강화로 유배한 후에 사사(賜死)되었다.


세조의 참모로 자리를 굳힌 신숙주, 정인지, 양성지 등은 세조를 도와 조선전기 학술과 문화사업을 주도해 나갔다.세조의 의지대로 태종시대에 그랬던 것 처럼 육조직계제가 회복되어 왕권이 강화되었다. '경국대전'이나 '국조보감' '동국통감'과 같은 편찬물은 왕권강화와 함께 신하들의 역량을 적재적소에 투입한 세조시대의 주요 성과물이었다.


당시에도 사육신과 같이 수양대군에 직접 대항하다가 처형된 지식인을 비롯하여 벼슬을 버리고 재야에 은거하면서 비판활동을 전개한 학자들이 상당수에 이르렀고, 이들은 결국 조선전기 사림파의 뿌리가 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공식기록인 '노산군 일기'는 세조의 힘에 밀려 단종은 '노산군'으로, 수양대군은 '세조'로 기록하였고, 그 후의 어떤 왕도 세조의 집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단종의 묘호회복과 사육신에 대한 복권도 200여 년이 훨씬 지난 숙종 때에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1691년(숙종 17년) 숙종은 사육신의 복작(復爵)을 명하면서, '이 일은 실로 세조의 유의(遺意)를 계승하고 세조의 큰 덕을 빛내는 것이다'라고 하여 세조의 치명적인 아픔을 가능한 건드리지 않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숙종시대에 단종과 사육신이 명예를 회복하면서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대한 면죄부가 사라졌다.


2008. 10. 8. 수. 세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