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사건

중종반정은 과연 한반도 조선사가 맞는가?

한부울 2009. 5. 5. 15:25
고려는 유나이티드 코리아 고려연방국가였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6399

계유정란(癸酉靖亂)의 모티브가 되었던 정난(靖難)의 변(變) http://blog.daum.net/han0114/17047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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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반정(中宗反正)은 과연 한반도 조선사가 맞는가?

 

글쓴이:한부울


우리나라 대통령께서 요번 달 10일부터 중앙아시아를 방문한다는데 순간 묘한 감정이 생긴다.

사마라칸크, 부하라, 헤라트, 타슈켄트, 시르다리아 강(북), 아무다리아 강(남),  사이에 트란속시아나, 참 귀에 익은 도시와 강이고 알 수 없는 정()이 흐르는 단어들이다.

지나대륙은 붉은 것이라면 중앙아시아는 푸른색이 강하다.

또한 붉은 것은 불교에 가깝다고 한다면 푸른 색은 이슬람에 가깝다.

태극은 붉은 것과 푸른 것이 음양으로 공존하여 상생원칙에 합치하는 일체를 표현하고 있다.

우주질서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인가?

 

한반도조선사를 보면 500년 기간동안 대변혁을 떠 올릴 수 있는 사건이 세차례 있었다.

한번은 중종반정이고 또 한번은 인조반정이었으며 마지막으론 철종의 불확실한 계보이다.

그리고 모든 역사과정에 나타나고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그래서 간과할 수 없는 사색당파란 개념적 풀이에서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차이가 없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순서대로 중종반정부터 따져 보고자 한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중종반정(中宗反正)은 소위 임금이 물러나는 쿠데타인데 군인(무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야당인 사람파에서 학정을 못이겨 들고 일어난 정치적인 쿠데타 사건이라고 할지라도 대변혁이고 국변인데 조선이란 나라는 그대로 법통을 이어가며 온전(?)했다고 서술되고 있다.

 

한반도 조선사를 보면 반정(反正)이라고 하는 국변(國變)이 한차례도 아니고 두차례나 있었는데 그 당시 소위 나라의 주체(하늘과 일치된 권력)가 졸지에 뒤바뀌면서 천지가 요동친 대변혁적인 사태이었음에도 나라가 그대로 온전했다고 하는 것에서 쉽게 이해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숨겨져 있을 것이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반정이란 뜻이 무엇인가 부터 알아보자

사전에[反正] <명사>

① 본디의 바른 상태로 돌아가게 함.
② 나쁜 임금을 폐하고 새 임금을 대신 세우는 일

이라고 나온다.

임금이 나쁘다 좋다란 개념이 무엇일까 갑자기 의미가 심장해진다.

지금도 나랏님이 나쁜지 좋은지 알려하면 여러 체널을 동원하여도 쉽지 않는데 그 당시 형편으로서 백성된 입장에서 임금이 좋은지 나쁜지 가려 판단하여 행동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정이 두차례나 존재했다는 것은 뜻의 의미와 전혀 다르게 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이다.

중종이후 나쁜임금이란 스스로 구속 틀을 만들어 연산군을 파했다면 그 나쁜임금이 되지 않도록 밤낮으로 경계하며 불안감에 임금스스로가 시달리는 형편으로 처해졌다는 사실은 군권 즉 절대권력을 가진 왕으로서 견디기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각색에 의한 픽션이라는 생각이다.

그와 같은 경우는 군왕의 입장에서 죽음보다 못한 치욕적인 상황이고 고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함에도 그와같은 사실에 벗어나거나 대비하지 못하고 117년 후 광해군이 또다시 같은 정변에 희생되었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허구란 생각이 강하다.

차라리 전쟁이 일어나 국왕이 피살되고 망하는 경우가 더 이해하기 싶고 편하다.

이와같은 사실에서 1506년 부터 1623년 사이에 우리가 알아선 안되는 그 무엇인가 조선사에서 벌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사이에 전쟁도 임진왜란이 있었고 병자호란이 있었다.

왜란, 호란? 내전이다.

공교롭게도 두 변혁기 사이에 큰 난(전쟁?)이 두번씩이나 있었다.

그래도 온전했다.

임진왜란은 이순신장군이 있어 온전했다.

병자호란은 인조가 땅에 머리를 쳐박고 항복하는 것으로 온전했다.

정변으로 임금이 무너지고 큰 전쟁으로 나라가 쑥대밭이 되어 온나라가 시달렸는데도 나라가 망하지 않고 불사조처럼 법통, 대통을 어렵지 않게 이어갔다(?).

정말 대단한 나라이고 불굴의 민족이 아닌가?

불굴? 아무리 두들겨 맞아도 괜찮다고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수십번 수백번 다시 일어서 불굴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보고 있는 강자는 무슨 마음을 먹었겠는가?

차려둔 밥을 먹어치우지 않고 그대로 보고 군침만 흘리겠는가?

고려때도 마찬가지다.

몽고군이 막강한 군사력으로 8차에 걸쳐 무자비하게 공격 즉 침략을 받고서도 왕이 忠을 붙이고 몽골식 이름만 하나 얻는 조건으로 봉국이라고 하여  망하는 것을 살려 보장해주고 고려왕조를 보존하였다는 사실 또한 소설같은 이야기로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따른다.

 

승자역사관에서 보았을 때 나라는 보존할 값이라도 그래서 법통, 대통은 이어가더라도 임금은 나약하고 무능하여야 하며  정변에도 쫒기고 전쟁에도 쫒기는 그야말로 허수아비신세 같은 존재로 만들어져야 하고 그런 왕들이 만든 허접한 역사만 존재하게 하여 조선에 대한 열등감만 고취하면 충분하다는 논리가 적용된 것이라 그 이상에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다.

이러한 행태가 바로 한반도역사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하지 못한 역사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한 구실을 만들고 실체화한 그들 역사찬탈세력들이 그렇게 한 의도가 무엇일까?

기회만 있으면 사대하고 의존하고 당파싸움이나하고 지질이도 못난 민족으로서 남아야 하며 섬기는 왕 또한 허수아비같은 왕이기에 고사에서 그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조선이란 한계를 만들기 위한 술책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것인가?

만약 위의 사전 뜻이 정확하게 적용된 것이라면 그 당시부터 임금은 소위 하늘과 같은 권력자일 수가 없다는 말이 되고 임금이 정치 한번 까닥 잘못하면 곧 폐위로 이어지고 죽음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절대권력자라고 당당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연산군은 그렇다치더라도 사실 광해군은 반정을 당할 만큼 폐정을 했다고 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정으로 폐인되고 끝내 감금되어 죽었다고 나온다.

이러한 사실들이 한반도조선사 전체를 의심케 하는 대목인 것이다.

봉건제도 군왕정치 전제정치가 무엇인가?

이러한 사태가 두번씩이나 있었음에도 후대 국왕들 모두 폐위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며 자연스럽게 인식했다는 사실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며 아무리 죽은 자의 역사라고 할지라도 법통을 잇는 후대왕조에서 최소한 변명이나 대책정도는 마련했을 것이라고 판단되지만 그러한 사실은 없다. 그냥 방치하고 방관하며 또는 침묵하였다는 것은 현재가 아닌 그 당시 봉건사회체제에서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되물을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모든 사실에 비추어 보면 단순한 정변이 아니라 그 무엇인가 우리가 알 수 없게 하는 거대한 변혁이 존재하였거나 그러한 대변혁을 감추려고 사료전체가 근세기들어 누군가에 의해 무단히 고쳐지면서 소설같은 전개형식을 빌어 꾸며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요지이다.

 

1506년에는 중종반정이 있었고 1623년(광해군15)에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있었다.

과연 연속된 두 반정 117년 사이에 조선에서 아니 조선사에서 무슨일이 벌어졌겠는가?

이것이 밝혀지면...

아마 세상이 한번 더 요동치고 까무라칠 일이 될 것이다.

가능하고 고려할 경우가 없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저 찾아볼 뿐이다.

 

중종반정은 1506년(연산군 12)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 등 이른바 훈구세력이 임사홍(任士洪)·신수근(愼守勤) 등의 궁금세력(宮禁勢力)과 결탁해 폭정, 학정(虐政)?을 거듭하던 연산군을 폐위시킨 사건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감안할 수 있는 것은 임금으로서 도리를 지키못한 연산군의 폭정을 들어내놓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부족하다.

 

발발하게 된 동기로서 연산4년(1498)과 연산10년(1504)에 있었던 무오사화 와 갑자사화를 한번보자.

 

무오사화는 훈구파(여당)와 사림파(야당)간의 갈등이다


사림파는 성종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3사(三司)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면서 유자광 ·이극돈·윤필상 등 집권세력을 비판했다. 김종직은 남이의 옥사가 유자광의 무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김일손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구할 것을 주장하고 세조대의 실정을 비판하는 한편 이극돈의 비행을 문제 삼았다. 또한 이목은 윤필상을 불교숭상을 주장하는 간귀(奸鬼)로 지목하여 탄핵했다. 사림을 중용한 성종의 재위기간 동안에 효과적인 반격을 하지 못했던 훈구파는 연산군의 즉위를 계기로 중앙정계에서 사림세력을 제거하고자 했다.


사화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것은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이었던 김일손이 사초에 실었던 일이었다. 1498년 실록청(實錄廳)이 개설되어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자 실록청의 당상관으로 임명된 이극돈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의 즉위를 비방하는 것이라고 지목하고 이 사실을 유자광에게 알렸다.


유자광은 노사신·한치형·윤필상·신수근 등과 사림파로부터 탄핵을 받고 있던 외척과 함께 김종직과 김일손이 대역부도(大逆不道)를 꾀했다고 연산군에게 보고했다. 연산군은 김일손·이목·허반 등을 보름간 스스로 신문하여 "간사한 신하가 몰래 모반할 마음을 품고 옛 일을 거짓으로 문자에 표현하며, 흉악한 사람들이 당을 지어 세조의 덕을 거짓으로 나무라니 난역부도(亂逆不道)한 죄악이 극도에 달했다"며 김종직과 그의 문인들을 대역 죄인으로 규정했다.


이에 이미 죽은 김종직은 대역의 우두머리로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는 형을 받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서들이 불살라졌으며, 김일손·이목·허반·권오복·권경유 등은 세조를 욕보였다고 처형했다.


그리고 표연말·홍한·정여창·이주·김굉필·이계맹·강혼 등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의 내용에 동조했거나 김종직의 문도로서 당을 이루어 국정을 어지럽게 했다는 죄로 곤장을 맞고 귀양을 보냈다. 또한 김종직의 관작만을 빼앗자고 주청한 대간(臺諫)들도 모두 논죄되었으며, 어세겸·이극돈·유순 등은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알리지 않았다고 하여 벼슬에서 쫓겨났다. 반면 무오사화를 주도한 윤필상·노사신·한치형·유자광 등 훈신들은 논밭과 노비 등을 상으로 받았다.

 

현대 정치도 그렇지만 정치는 서로를 견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극단적으로 미워하며 증오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 죽어 나자빠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 약점을 잡고 치명타를 날리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기회가 생기면 총력을 기우리고 야당이라면 당연히 집권세력 즉 여당으로 탈바꿈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정치에서 변할 수 없는 순리라고 본다. 물론 지금과 그 당시 현실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부분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조의제문이라는 문제로 이처럼 쑥대밭이 되어야 하였는지 세세하게 풀어 볼 문제이다.


갑자사화는 왕과 재상들 사이에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싸움이라고는 하지만 무오사화의 결과 언론직을 장악하고 있던 사림은 큰 피해를 입었고 언론도 위축되었으며 주도권은 왕과 훈구 재상에게 돌아가 연산군이 언론의 견제가 약화된 상황에서 사치와 낭비를 일삼아 국가재정은 궁핍해졌고 그 재정 부담을 백성뿐 아니라 훈구 재상들에게 지우자 재상들과 연산군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던 것이 시발이 되었다.


왕과 재상의 갈등이 심화되자 재상들은 궁중의 경비를 절약하고 왕의 방종을 견제하려 했으나, 외척인 신수근(愼守勤 : 연산군의 비인 신씨의 오빠)을 중심으로 임사홍(任士洪) 등이 연산군을 지원하면서 오히려 사화를 야기하여 훈구 재상들이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훈구파를 몰아내기 위하여 외척 신수근과 임상홍은 연산군 생모인 윤씨의 복위문제를 들고 나왔다. 연산군의 생모인 성종비 윤씨는 질투가 심하고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성종은 1479년(성종 10) 폐비하고 다음해 사사(賜死)까지 하였다(소위 윤씨폐비 사건이다).


왕과 재상과의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이러한 사실이 임사홍에 의해서 연산군에게 알려지자, 연산군은 이 사건과 관련된 성종의 후궁인 엄숙의와 정숙의를 죽이고 그의 아들 안양군(安陽君)과 봉안군(鳳安君)은 귀양보내어 사사했다. 또한 윤씨를 왕비로 추존(追尊)하고 성종 묘에 배사하였다. 연산군은 이때 반대한 언관 권달수(權達手)를 죽이고 이행(李荇)은 유배하게 된다.


그 당시 폐위사건을 방관하거나 찬성하는 사림관료들은 참형 내지 부관참시하거나 다수가 숙청을 당하고 그 자녀와 가족 그 이외 친족까지 연좌되어 그 피해가 무오사화를 뛰어넘었을 정도로 확대가 되었다.


그 결과 견제세력을 제거한 연산군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으나, 그것은 정당성과 권력기반을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고 연산군의 방탕한 행위가 심해지면서 그 폭정의 피해가 나라와 백성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심각해지자 훈구와 사림이 결속하여 반격 쿠데타가 발생됨으로서 연산군은 폐위되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이다.

이와 같은 사실이 정사라면 두 사화가 연이어 일어나 관료사회는 물론이고 민심이 흉흉해지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니 쿠데타가 일어난 게 틀림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보지 못할 이유가 또한 있음을 지금부터 냉정하게 되짚어보아야 할 일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계속 1편]

붕당은 정말 당파만을 위한 파벌싸움이었는가?

아니면 우리가 반도사관으로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아시아고려, 대륙조선이란 거대한 정치적 환경이 가져다 주는 붕당은 아니었는가?

조선시대 붕당(朋黨)은 당쟁으로 보아야 하는가? http://blog.daum.net/han0114/17049081 


[계속 2편]

티무르제국과 조선의 관계설정.

티무르제국과 조선의 관계?  http://blog.daum.net/han0114/17048289


[계속 3편]

고려는 원정권과 티무르정권 그리고 조선정권을 동시에 다 포용 할 수 있는 연합체 가 아닌지 밝혀 볼 일이다. 최소한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정문부(鄭文孚)를 대장군으로 한 함경도 의병(정규군사)의 전승을 기념하여 거대한 석비(북관대첩비)를 연합복장차림의 군사들이 밧줄로 세우고 있는 옛 그림에서 보면 "고려지경(高麗之境)" 라고 명기하여 경계로 삼았던 것 같은데 그 때까지 통칭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고려라고 사용하였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 때까지 고려가 국제적 외교관계에서 존재하였다는 말이고 그러한 존재가 위 연합주체성격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계속 풀어 볼 문제이다.

 

덧 붙여 북관대첩비 그림에서 고려지경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 곳이 산악지대가 험준한 함경도라면 그 이북을 경계로 삼았다고 이해가 되는데 혹 왜구가 우리가 알고 있는 왜구 말고 또 다른 왜구라는 존재가 그것도 함경도 이북까지 근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또한 풀어볼 문제이다.

또 다른 왜구라 함은 지금 열도세력인  Y염색체 하플로그룹(haplogroup D)이 아닌 다른 인종의 왜구라 할 수 있다.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의 의문투성이 http://blog.daum.net/han0114/17047429

북관대첩비는 왜구를 토벌했다는 석비이다.

전통적으로 의병이라 함은 현직 군사가 아닌 자원, 지원병으로서 예비군 처럼 언제든지 나라가 위급 할 때 호국정신을 살려 스스로 나서는 것을 선비정신이었다고 보이고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였을 것이란 가정이 선다. 의병이니 뭐니하는 따위는 반도사관이 의도적으로 왜(일본)란 존재를 부풀려 대단한 세력처럼 만들고 종래 일본이 생성한 당위성을 나타내기 위한 술책이었다고 보면 왜구란 용어는 특별하게 정리되지 않았던 용어인 것 같다. 조선통치체제에 반한 반란군들이 여러종족 또는 인종들 구분없이 조선영역에서 남북쪽, 해변, 산악을 가리지 않고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통칭 왜구라 하여 바다가 아닌 산악지대 북관에서도 토벌하여 경계로 삼고 정리한 전승기념 표석이라고 이해 해야 한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