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셔먼호 사건(General Sherman號)
글쓴이:한부울
사실 지나간 역사를 우리가 판단하는데 이렇듯 갈등이 많을 순 없다.
늘 하는 말이지만 역사기록자체보다 사실에 입각한 이치를 따져 한치에도 어긋나는 것이 없이 맞아 떨어져 금방이라도 이해가 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기록의 신뢰성이다. 하지만 반도역사 기록은 그러한 신뢰성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예가 바로 제너럴셔먼호사건이다.
조선주체가 그때 한반도에 존재했다면 그래서 일본이 열도에 있었다면 그래서 통상요구가 주 목적이었다면 무엇때문에 구태어 천진까지 수고스럽게 항해하여 다시 남쪽 산동성 Chefoo(present day Yantai,Shandong)까지가서 그것도 임금이 있는 한양도 아니고 평양으로 들어간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이다.
일본 윤양호가 그랬던 것처럼 나가사기에서 부산으로 들어가면 통할 일이다.
아니면 1871신미양요처럼 일본을 거쳐 강화도로 들어가 왕을 만나면 된다.
이미 미국은 13년전 1853년 동인도 함대 페리제독이 일본 우라가항에 들어가 일방적으로 통상요구하여 막부정부로부터 수락받고 1858년 7월 29일 미·일 수호통상조약을 맺어 활발하게 왕래하던 때이다.
그렇다면 나가사기나 요코하마 등 국제항을 거쳐 곧바로 그것도 평양이 아니라 한양으로 들어 갈일이다. 그런데도 힘들게 멀고도 먼 천진으로 갔다가 다시 Chefoo(즈푸, 제주?)로 내려가 서해안을 건너 한반도 대동강을 거슬러 올랐다고 하는 것은 경제적인 면에서도 맞지 않는 일이다.
물론 천진에 용선계약문제 때문이었다고 하고 있지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Chefoo에서 출발한 일자도 "citation needed" 인용이 필요하다 할 정도로 분명하지가 않다.(8.9, 8.16, 8.19)
기어코 Chefoo에 간 이유가 무엇일까?
누구를 승선시키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모호하다.
그리고 항해과정에 기본인 일자기록과 방향기록이 무시되었다.
동서 방향을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이것을 요약하면 제너럴셔먼호가 들어간 곳은 대륙이란 사실을 숨기고 싶었던 것이다.
첨부한 지도를 자세한 번 보라.
무엇인가 이상하지 않는가?
Korea's west coast 한국서해안이다.
그러나 국제통용어는 yellow sea 황해이고 황해를 가로 지른 것이다.
yellow sea 라고 했으면 훨씬 이해하기가 빨랐을 것이다.
한국서해안 korea west 란 의미가 강하게 와 닿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west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어디인가?
옛 대륙평양이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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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간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성 강안을 공격하고 있는데 산세가 대륙산세이다.
[클릭원본]
1855 황하대개도 : 황하범람으로 산동 강소 접경을 흘러 들어가던 황하 하구가 현재와 같이 발해만으로 옮기게 된 사건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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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셔먼호 사건(General Sherman號)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1866년(고종 3년) 음력 7월 12일(양력 8월 21일)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던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를 평양 군민(軍民)들이 반격하여 불에 태워버린 사건이다.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제너럴셔먼호의 모습. 상선으로 팔리기 전에는 USS Princess Royal 이었다
1866년은 조선의 대외교섭사에 있어 중요한 한 해였다. 그해 초에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정책(禁壓政策)에 따라 프랑스 신부 9명과 천주교도 수천 명을 학살하는 이른바 병인사옥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조선의 배외 감정은 최절정에 달하였다. 프랑스 선교사 처형에 의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내침해 오리라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그해 8월 정체불명의 이양선(異樣船) 1척이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왔다. 이것이 곧 제너럴셔먼호였다.
셔먼호는 원래 미국인 선주 프레스톤(Preston,W.B)의 소유선이지만, 프레스톤이 텐진(天津)에 기항하였을 때, 텐진에 주재하던 영국 메도즈상사(Meadows and Company)와 용선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계약 기간중 셔먼호는 영국 상사에 위탁되어 있었다. 셔먼호는 80t급 증기선으로서 12 파운드의 대포 2문을 비치하고 있었으며 선원은 완전 무장하고 있었다. 메도즈 상사는 셔먼호에 조선과 교역할 상품을 싣고, 영국인 개신교 선교사 토머스(Thomas.R.J)를 통역관으로 채용한 뒤 8월 9일 즈푸를 출항, 조선으로 향발하게 하였다. 셔먼호는 백령도·초도(椒島)·곶석도(串席島)를 거쳐, 대동강 하구의 급수문(急水門)을 지나, 거침없이 대동강을 거슬러올라왔다. 셔먼호의 승조원은 프랑스 신부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내침할 것이라고 위협하면서 통상·교역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조선 관리는 통상·교역은 조선의 국법에 엄금되어 있다는 것, 외국선의 내강항행(內江航行)은 국법에 어긋난 영토 침략·주권 침해 행위라고 지적하면서, 대동강 항행을 강력히 만류하였다. 그러나 중무장한 셔먼호는 이를 뿌리치고 강행, 드디어 평양 만경대(萬景臺)까지 올라왔다. 조선 관리는 이렇듯 방자한 무법 행위에도 불구하고, 낯선 사람을 잘 대접한다는 이른바 유원지의(柔遠之義)에 따라 세 차례나 음식물을 후하게 공급하는 등, 구휼을 아끼지 않았다.
셔먼호는 장마 비로 창일(漲溢)한 강물을 타고 평양까지 올라왔으나 장마 비가 그치자 수량이 갑자기 줄어지매, 운항이 어렵게 되어 초조한 나머지 중군 이현익(李玄益)을 납치하는 등 난폭한 행위를 자행하였다. 그 결과 평양 군민과의 충돌이 벌어져 조선 군민 중에 셔먼호의 대포에 맞아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평양 감사 박규수(朴珪壽)는 화공으로 셔먼호를 불태우고, 선원은 몰살하였다. 사건 당시 토머스는 스스로 영국인이라 밝혔고, 프랑스 함대의 내침을 경고하였기 때문에 조선 당국은 이양선이 미국 상선인 줄 전연 모르고 있다가 미국 측 항의 각서를 받고서야 비로소 미국 배인 줄 알게 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뒤 미국은 1867년 1월 슈펠트(Shufeldt. R. W)의 탐문 항행, 그리고 1868년 4월의 페비거(Febiger. J. C)의 탐문 항행을 통하여 셔먼호는 조선으로부터 양이(洋夷)를 동반한 중국 해적선으로 오인 받았으며, 승조원의 도발적 행동으로 인하여 스스로 화를 당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미국 정부는 두 번에 걸친 탐문 보고서를 접하자, 슈펠트의 온건한 포함 책략에 따라 마침내 1871년 대한포함외교정책(對韓砲艦外交政策)을 수립하고 응징적인 조선 원정을 단행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신미양요이다.
제너럴셔먼호
포획: 1863년 1월 29일
미국 정부의 구매: 1863년 3월 18일
취역일: 1863년 2월 4일
민간에 판매: 1865년 8월 17일
배수량: 614톤
길이: 388.1미터 (127피트 4인치)
선폭: 10.5미터 (34피트 6인치)
흘수: 503센티미터 (16피트 6인치)
추진방식: 요트(Sail)
승무원: 150 명
무장:
4 X 8" Sg.
16 X 32 pdrs
원래 영국 군함이었는데, 1863년에 포획되었다. 남북전쟁에 북부군 군함 USS Princess Royal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공경매로 민간에 팔려서 제너럴셔먼호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미 해군이 보유한 기록과 다르다.
미국 해군의 공식문서에 따르면 프린세스 로열호의 민간 판매 시점이 평양에서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지 2년 뒤인 1868년이라는 것이다. 또한 평양 대동강이 아닌, 1874년 1월 10일 노스캐롤라이나 Cape Fear에서 침몰하였다.
혹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도 조선세력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근세기에 발생한 사건에서 기록과 모든 자료들이 서세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만들어지고 조작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때문에 위와 같은 사실에서도 당시 쓰러지는 동양의 거목인 대륙조선을 숨기기 위해 그들이 벌렸던 일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 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여러 자료를 뜯어보면서 가정 할 수 있게 하는 것 중 만약 생각지도 않게 호주가 제주라고 대칭되는 탐라 또는 섭라 였다면 그래서 영국이 침략하여 원주민들을 짐승처럼 학살하고 그들의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라면 위 노스캐롤라이나 예를 들 것도 없이 근세기 역사는 우리에게 한마디로 암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역사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날조된 반도역사에 파묻혀 비판이나 검증조차 할 수 없는 불구가 된 처지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제너럴셔먼호 탑승자
선장 페이지(Page, 미국인)
일등 항해사 윌슨(Wilson, 미국인)
선박 소유주 프레스턴(Preston, 미국인)
조지 호가스(George Hogarth, 영국인)
13명의 중국인
3명의 말레이인
영국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 한국어를 배웠기 때문에 통역으로 탑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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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원본]
The crew consisted of Captain Page, Chief Mate Wilson, and 13 Chinese and 3 Malay sailors. Also on board was the ship's owner, W.B. Preston, a British trader, and Robert Jermain Thomas, a Protestant missionary acting as an interpreter. They departed Chefoo (present day Yantai), China on August 6, August 16, or August 18[citation needed] 1866, and entered the Taedong River on Korea's west coast sailing towards Pyongyang. The depth of the Taedong River changed frequently due to rains and the tides, but the ship was able to navigate it and stopped at the Keupsa Gate, lying at the border between Pyongan and Hwanghae provinces.
승무원은 Page 선장, Chief Mate Wilson와 13명의 중국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3명의 말레이 반도의 선원, 배의 주인 (W.B) 프레스톤, 영국 무역업자와 Robert Jermain
Thomas(통역의 역할을 하고 있는 프로테스탄트의 선교사)등 배에 동승하고 그들은 Chefoo(present day Yantai,Shandong)출발했다. 8월 6일에 중국(텐진)도착, 8월 16일 또는 8월 18일[citation needed 인용이 필요?]1866 한국의 서해안 평양 쪽으로 향해하여 Taedong강으로 들어갔다(entered). Taedong River의 깊이는 비와 바닷물 때문에 자주 바뀌었다. 그러나 배는 그것을 조종할 수 있었고, Pyongan와 Hwanghae 지방사이 경계에서 있으면서 Keupsa Gate에 멈췄다.
Chefoo (present day Yantai, Shandong)
Chefoo (present day Yantai)
대륙 산동성(山東省) 치푸(Chefoo)
옌타이 [煙臺, Chefoo] 동의어 : 연대, 체푸 (병)Yantai (웨)Yent'ai (관)Chefoo라고 한다.
chefoostreet
인천기독교신문에 중화민국 산동(山東) 선교사 사병순(史秉淳) 목사 일대기에서 1913년 가을에 고국을 떠난 사병순은 박태로, 김영훈 목사 가족과 동행하면서 이미 중국을 다녀온 바 있는 선배 박태로 목사를 통하여 중국 선교지에 대하여 여러 이야기를 들게 된다. 선교사 일행은 여러 날 배 멀미로 고생을 한 후 중국 산동성(山東省) 치푸(Chefoo)에 도착하였다. 치푸(Chefoo)는 토마스 선교사가 조선(朝鮮) 선교를 위해 머물며 노력하던 곳이다...
Chefoo 라고 하는데 얼토당토 하지 않는 연대에 옌타이란다.
그런데 Chefoo가 jeju 제주(濟州)의 한자 음차라고 인식되는데 그렇지 않는가?
산동성 제주(山東城 濟州)
Keupsa Gate 를 반도사학자들은 (Kupsumun 急水門)이라고 했다.맞는가?
Kepus, Kueps, Kepus, eKups, Keup, Keupa, Keups, Keuos, Keups, Keupsa, Keupse, Keupsi, Keupso, Keups
三門峽지구황하 급류경황토구
삼문협이라는 것은 근세기에 만들어진 지명이다.
급수문이라고 한다면 급류가 빈번하게 용트림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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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영길리국) 표선기(英吉利國漂船記) http://blog.daum.net/han0114/17046155
여기서도 보면 1816년 영국 함선이 표류하여 충청도 마량진에 도착했다는 보고 기록은 천진에서 정박하다 표류했다고 한다.
조선말 기록에서 천진에서 표류하면 으례히 도착하는 곳은 한반도 서해안 어디 어디이다.
구한말 조선의 주체가 한반도로 들어 온 시기는 빨라도 1910년 이후로 본다.
그때까지 한반도에 조선 주체(왕을 포함한 지배세력)가 없었다.
한반도 서해안이라는 것은 서해를 말하는 것인데 서해는 대륙 서해이다.
인도차이나반도 서해와 오강원(五江原)이라고 하는 청장고원 수원지 황하, 양자강상류발원지이다.
서해는 대륙조선이 동남아와 대륙을 포괄한 것이라면 지금의 뱅골만 해안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자료를 찾아 본 결과 충청도는 미얀마까지 영역임을 확인 하였다.
만약 대륙조선이 인도까지 영역이라면 인도서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서해라 함은 인도차이나 반도 서해일 가능성이 많다.
마량진(馬梁鎭)역시 인도차이나 말레이반도 서해 어느 항구를 지칭할 가능성이 많다.
이양선들이 중국왔다가 바람 불면 표류하여 도착하는 곳은 한반도 충청도고 제주도라 하였다.
19세기 이양선들이 최정점에 달한 향료무역과 무주공산으로 남을 대륙영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눈을 켜고 달려 든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남해 동남아시아 말루카, 자바, 인도네시아, 호주 해엽임을 알아야 한다.
1910년 이후 36년간 주입하고 교육하고 쇠뇌하고 강제하고 그래서 만든 것이 한반도 역사이다.
그러한 반도역사 위에 마량진이라고 표시하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우리는 과연 무엇인가?
그저 답답할 뿐이다.
순조 16년(1816 병자) 7월 19일(병인)
이재홍이 충청도 마량진 갈곶 밑에 이양선 두 척이 표류해 온 일을 보고하다
‘영길리국(英吉利國)3696) 수사 관원(水師官員)에게 글을 주어 진명(陳明)하는 일로 해헌(該憲)에 보내니, 잘 알기 바랍니다. 금년 윤6월 초순 사이에 우리 영길리국에서 5척의 배로 우리 영국왕(英國王)이 차정한 사신과 수행한 사람들을 보내어 천진(天津) 북연하(北蓮河) 입구에 도착하여, 지금 왕의 사신 등이 모두 북경에 나아가 황제[萬歲爺]를 뵈었으나 천진 외양(外洋)의 수심이 얕은데다가 큰 바람까지 만나 배의 파괴를 면할 수 없기 때문에, 각 선척이 그곳에 감히 정박하지 못하고 지금 월동(粤東)에 돌아가서 왕의 사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귀국하려고 합니다. 이에 그곳을 지나게 되었으니, 해헌(該憲)은 음식물을 사도록 해 주고 맑은 물을 가져다 마시고 쓰도록 해 주십시오. 왼쪽에 우리 왕께서 보낸 사신의 인장(印章)이 찍혀 있으니 증거가 될 것입니다. 가경(嘉慶)21년 월 일에 씁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英吉利國水師官員下, 書爲陳明事。 送該憲知悉。 據本年閏六月初旬間, 有我英吉利國五隻船, 送我英國王差定, 從各人到天津北蓮河口, 今王差等, 俱進京朝, 見萬歲爺, 因天津外洋水淺, 遇有大風, 免不得壞船, 故各船, 不敢在彼處碇泊, 今要回粤東候, 王差回國, 玆經過此處。 請該憲給以買食物, 自取淸水飮用也。 左有蓋我王差印爲據矣。 嘉慶二十一年月日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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