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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사건-The British Occupation of Komundo(1885-1887)

한부울 2009. 4. 18. 14:04

동중국해 East China Sea http://blog.daum.net/han0114/17047292 

 

여기서 우리가 인지 할 수 있는 것은 열도에 신일본이라는 국가가 생성되고 있는 과정을 우리가 간접적으로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왜구무사집단 즉 해구 해적집단은 신일본(명치정권)의 주요구성원이었다.

신일본이 생성되기전에는 양자강 이남지역 절강성, 복건성, 광동성등지에 해안 연안지역을 걸쳐 거류하고 있었던 집단이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역사는 거짓을 말하면 안된다.

만약 일본이 1885년까지 열도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한반도거제도란 것은 거짓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아래 여러가지 상황에서 한반도거제도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어렵다.

 

거문도를 찾으려면 동지나해에 속한 대만과 제주도와 대마도 그리고 양자강 입구에 있는 섬을 찾아야 한다.

영국이 한반도 남해 수많은 섬들을 놓아두고 하필 거문도를 택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왜 거문도 보다 더 큰 섬, 제주도 외 수많은 섬들을 바로 옆에 덩그라니 두고 거문도를 선택하고 제2의 홍콩이라고 했던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지금의 거문도가 그 당시 거문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1.현재 블라디보스톡이 아니라 구 블라디보스톡을 찾아야 하고

2.동지나해에서 군사적으로 주요한 지역적 상황을 고려해야 하며

3.상해와 전선을 부설 할 수 있는 곳(위치적으로 보면 제주도와 먼저 부설하는 것이 맞다.)

4.홍콩과 버금가는 국제 항이 있을 곳

5.당시 일본 각지의 어민이 이주하여 수산가공, 철공·조선, 오락, 숙박, 공공시설 등을 마련해 취락을 형성해 나가 동중국해에 있어서의 중요한 어업기지가 되어야 한다.(단 1885년이라면 신일본[명치] 이 열도로 이전 또는 과정이라고 볼 때 신일본의 구성원인 왜구무사집단이 지금의 양자강 이남과 복건성 등에 거류하였을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되는 부분이다.)

6.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 일본은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한 조선에 대할 권리를 폐한다라고 하는 문구에서 남해 다른 섬들은 다 놓아두고 거문도가 포함된 이유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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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사건 The British Occupation of Komundo(1885-1887)

 

[클릭원본]

한반도거문도이다. 그러나 1885년에 발생된 거문도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거문도이다.

 


1885년 4월에 거문도는 영국 해군 본부의 명에 의해, 영국 해군의 3척의 군함, 아가멤논

(HMS Agamemnon), 페가수스 (HMS Pegasus), 파이어 브랜드 (HMS Firebrand)에 의해 점령되는 사건이다. 이것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Panjdeh Incident 분쟁에 직면해, 러시아의 신장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은 청나라와 일본에 거문도의 점거를 통고하고 주민을 동원해 병사나 방어 시설을 구축하면서 샹하이와의 간에 전신선을 부설했다.


청나라는 당초, 러시아에의 대항책으로서 조선에 대한 자국의 우선권을 국제적으로 내세우고 확인받기 위해 영국에 의한 거문도점거를 어느 정도는 인정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조선 문제에 발언력을 가지는 이홍장의 강한 반대로 태도를 바꾸어 영국에 퇴거를 요구하는 것과 동시에 조선 정부의 지원으로 현지조사를 위해서 政府有司堂上·엄세영과 외무협변(외교고문)를 맡고 있던 메렌드르후를 파견하여 거문도의 영국 해군의 지휘관이나 나가사키에 체재하고 있던 영국 동양 함대 사령관과 교섭을 시도했지만 결정적인 해결책을 얻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영국은 거문도를「 제2의 홍콩」이라고 기정사실화하였지만, 각국의 반대는 강경했다. 러시아 공사 베바(Karl Ivanovich Weber朝鮮語: 韋貝 위패)는, 러시아가 영국에 대항해 조선의 적당한 토지를 점령하는 것을 공언하고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실시했다. 아프가니스탄에 있어서의 러시아의 위협이 감소된 후, 영국과 청나라의 사이에 교섭으로 최종 영국 함대는 거문도의 기지를 폐할 것을 결정한 영국인은 1887년 2월 27일에 기지를 파괴해 떠났지만 그 후에도 그들은 섬을 계속 방문했다. 젊은 수병을 거기에 매장하는 일도 있었다. 섬들이 일본의 통치에 들어간 1910년 이후 빈번한 방문은 없어졌다.


섬에는 10명의 영국인 수병과 해병이 매장되고 있다.


1886년 3월, 소총의 폭발 사고로 죽은 알바트로스호의 승무원, 윌리엄·J·마레이 일등 수병과 찰즈·데이르 소년병. 

1903년에 죽은 알비온호의 젊은 수병, 알렉스·우드 상등병조 외 7명의 영국인 수병 및 해병. 


일제시대


20 세기 초두, 거문도에는 야마구치현(山口県)의 선주가 이주해 멸치나 청어 소금 제조를 하여 큰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을 효시로서 포화 상태에 있던 연해어업에 단념한 서 일본 각지의 어민이 이주하여 수산가공, 철공·조선, 오락, 숙박, 공공시설 등을 마련해 취락을 형성해 나가 거문도는 동중국해에 있어서의 중요한 어업기지가 되어 갔다. 1942년(쇼와 17년)의 조사에 의하면, 古島(巨文里)에는 내지인 78호(309명)·조선인 223호(1092명)의 합계 301호(1401명)가 거주하고 있던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함께, 일본인은 거문섬을 떠났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는 「일본은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한 조선에 대할 권리를 폐한다」라고 거문도가 특기 되어 일본이 이 섬에 대한 주장을 폐했을 때에는 일본인의 무덤도 철거되었다. 그러, 영국인의 무덤은 지금도 남아 있다.

 

                                               동중국해 東シナ海(East China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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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러 밀약설(韓露密約說)은 조선 말 청나라와 일본 양국의 세력을 견제하고 왕실의 보호를 위하여 러시아 제국의 협력을 얻으려던 전후 2차에 걸친 비밀 교섭이다.


제1차 교섭


러시아는 1884년(고종 21) 한 러 수호통상 조약체결 이후 급속도로 조선에 대한 세력이 강대해지던 중 갑신정변으로 인한 청·일 양국의 정세가 험악해지자 조정은 불안을 느끼고 러시아와의 접근을 꾀하게 됐다. 이에 1884년(고종 21) 조정의 일부 친러파는 묄렌도르프를 중계로 하여 러시아 정부에 보호를 요청하는 비밀 교섭을 시작하였다.


그동안의 경위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부 일본 측 사료에 따른 것이며, 또한 그 기사의 내용이 모두 일치되지 않아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이 사실이 폭로되자 국제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켜 묄렌도르프는 면직(免職)되고 청·일 양국은 흥선대원군을 다시 귀환시켜 친러파인 민씨 일파의 세력과 맞서게 하였다.


한로 수호 통상 조약(韓露修好通商條約)은 1884년(고종 21)에 조선과 러시아 제국 간에 체결된 조약이다. 1884년 음력 5월 베베르는 조선과 국교를 맺기 위하여 조선에 들어와 묄렌도르프를 설복하여 그로 하여금 알선을 교섭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외무독판 김병시(金炳始)를 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베베르와 회담하여 조약을 맺고 1885년 음력 5월 25일(양력 7월 7일)에 한로 조약의 비준을 교환하여 정식으로 국교가 수립되었다.


조약의 중요 내용은 우호 관계의 유지, 최헤국 대우(最惠國待遇), 선박 왕래의 관세에 관한 규정, 밀무역의 금지, 치외 법권의 인정, 통상장정(通商章程)은 만국(萬國)의 통례에 따를 것, 특권의 균등한 부여 등이었다.


제2차 교섭


그동안 청나라는 원세개를 주한 총리(駐韓總理)로 임명하여 내정을 적극적으로 간섭하고 한편 대원군을 입국시켜 민씨 일파에 위협을 주었다. 이러한 사태에 당황한 척신(戚臣)들은 또 다시 러시아와의 접촉을 꾀하여 새로 부임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Waeber : 韋具)에게 보호를 요구하고 군함의 파견까지 간청하였다. 이에 베베르가 문서를 요구하자 민비 등은 총리내무부사(總理內務部事) 심순택(沈舜澤)의 명의로 문서를 만들어 국보(國寶)와 총리대신의 도서(圖書 : 도장)까지 날인해 보냈다. 이러한 교섭에 대하여 미리부터 반대하던 민영익은 사태의 진전을 우려하여 원세개에 통고하니 문제는 또다시 중대해졌다.


이 사건은 명의로 문서에 날인한 심순택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고 한편 러시아 정부도 이를 부인하였으나 원세개는 이를 중대시하여 임금의 폐위를 주장하기까지 하는 강경책을 썼다. 그러나 청나라 정부의 사정으로 폐위는 실현되지 않고 밀약설을 추진한 조존두(趙存斗) 등의 유배(流配)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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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거문고사건당시 청나라니 원세개니 이홍장이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 영향력이 존재하였다는 것일 뿐 나라나 국가가 개입하였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평소 우리가 역사를 보는 관점에서 필요 이상으로 혼돈을 느끼며 정립을 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청나라라는 개체와 그 청나라 신하인 원세개 또 이홍장에 대한 잘못된 상식에 대한 의거하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한반도조선이라고 단정하고 중국이라는 대륙에 명나라이어 청나라라는 국가개념이 있었고 그 청나라에 소속된 원세개와 이홍장이 전례에 따라 속국인 조선에 감시 감독요원으로 파견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겠금 모든 역사서가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륙에는 조선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시아대륙을 통치하는데 필요한 다각적인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조선말엽에 발생한 거문도사건 같은 일들을 정확하게 진단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명과 청은 대륙조선이라는 국가개념아래 다민족을 아우를 수 있는 정치집단으로 성립되었고 정치적 집단이라고 할 수 있으며 조선말 원세개와 이홍장은 그 정치적인 집단인 소속에 우두머리 내지 수장 또는 지금으로 보면 대륙조선의 여당 책임자 또는 대륙조선정치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위치에 준하는 것일뿐 일제가 의도적으로 명청이라고 하여 나라 즉 국가 개념으로 만들어 한반도조선과 별개로 보게 함으로서 발생하는 모순인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그렇게 보지 말고 대륙조선의 정당으로서 정치집단으로서 본다면 반도조선역사가 아니라 대륙조선역사라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정확하게 진단 할 수 있는 능력과 근원이 생성된다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혼란으로 증폭되는 조선사에 미스테리를 해소할 수 있는 지름길임을 우리가 먼저 자각할 일인 것이다. [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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