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사건

제주도의 민란과 회민(回民)

한부울 2009. 7. 13. 01:29

제너럴셔먼호가 조선 대동강으로 들어가기 전 첫번째 기착지가 chefoo 라고 하였는데 그 chefoo가 발음이 제주(jeju : 濟州)와 비슷하다.

19세기 서양지도 상 chefoo를 현재 연대 烟台:Yantai)옌타이라고 하고 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General Sherman號)  http://blog.daum.net/han0114/17047463 

 

우리는 제주(濟州)라고 하면  제주도라고 한다.

지금 한반도에 제주도(Quelpaert)란 명명은 1910년 이후 일제가 대륙지명 옮기기 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강화 역시 강화도가 되버린 이유가 같다.

그렇다면 제주도가 아닌 제주는 어디인가?

지금 한반도 제주도라고 무조건 연결하려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그리고 강화도 역시 그러한 범주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 

제주와 강화는 한반도 섬이 아니라 산동성에서 마땅히 찾아야 한다.

 

아래 논문에서 회민을 민회라고 해석했다.

민회가 아니라 회민어야 한다.

제주민란은 조선 산동에서 벌어진 카톨릭과 회교도등 복합적 민교의 종교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하나 추론이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산동성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난 민란과 직접적인 관계설정이다.

 

만약 제주가 산동이라면 그곳은 옛부터 여러 민교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민간종교 집단 반란은 18세기에 이어19세기 마지막 의화단 사건까지 지속된다.

 

1774 왕륜의 청수교 반란,

1813 임청 이문성 천리교반란,

1851 2월 오대기(五大旗)반란

1861-1863 팔괘교(八卦敎)반란이 있었으며

1899~1901 의화단운동이 실패로 끝나 대륙조선(청)은 끝장나고 만다.

의화단운동이 벌어지기까지 복잡한 양상의 혼란이 겹쳐진다.

그 속에는 대륙조선과 청이란 실체가 표면적으로 뒤바뀌는 결정적인 이유가 발생하게 된다.

 

팔괙교(八卦敎)는 天理敎 인데


(병)Tianli Jiao (웨)T'ienli Chiao (영)Heavenly Reason Society.

중국 청대(淸代)의 민간 비밀교회.


원래 명칭은 팔괘교(八卦敎)이다. 백련교(白蓮敎)의 한 분파이며 팔괘의 구분을 조직 형식으로 삼았다. 앞서 백련교의 난은 진압되었으나 그 조직은 사회 내부에 뿌리 깊게 박혀 있어서 여러 지파로 갈리게 되었는데, 팔괘교·영화교(榮華敎)·홍양교(紅陽敎)·백양교(白陽敎) 등의 이름으로 저마다 교세의 확장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팔괘교가 가장 교도가 많아서 허베이 성[河北省], 허난 성[河南省], 산둥 성[山東省], 장쑤 성[江蘇省] 등의 여러 지역에 퍼져 있었다. 팔괘교는 무생노모(無生老母)를 신봉하고 태양을 숭배했다. '진공가향'(眞空家鄕)을 천당으로 삼았고 무생노모를 상제(上帝)로 여겼다. 입교(入敎)할 때는 돈과 식량을 헌납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종복전(種福錢)·근기전(根基錢)이라고 했다. 이들은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1813년 감괘(坎卦) 교주 임청(林淸)과 진괘(震卦) 교주 이문성(李文成)은 허베이 성, 허난 성의 교도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반란을 일으키기 전날 밤 팔괘교의 명칭을 천리교로 바꾸었다. 같은 해 9월 또 한차례의 반란을 일으켜 베이징[北京]의 청나라 궁궐까지 공격하는 등 크게 영향을 미쳤다.


제주 민란은 혹 위 산동 팔괘교(八卦敎)란이 아닌가? 궁금하다.

********************************

제주도의 민란

 

< 目 次 >

1 . 머릿말

2 . 임술년 농민란

3 . 방성칠란

4 . 이재수란

5 . 결어


1 . 머 릿 말


제주도는 탐라가 신라에 복속되어 자주권을 상실한 서기 662년 이후 중앙봉건정부의 수탈과 몽고 왜구 등의 침략, 대한제국시대의 제국주의 열강과 그에 뒤이은 일제와 해방이후 미군과 반민중세력으로부터 침탈을 받아온 수난의 땅이다. 그러나 섬이라는 변방 특유의 공동체 정신으로 한데 뭉쳐 자신을 사르고 민중을 위하는 장두정신으로 굴함없이 싸워온 항쟁의 땅이다. 특히 조선후기 사회는 삼정의 문란 및 매관매직 등 사회적 혼란과 더불어 봉건지배 봉건화에 대항한 민중의 끊임없는 항쟁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2 . 임술년 농민란


철종 13년인 1862년에 발생한 임술년의 농민항쟁은 강제검의난 이라고도 불리운다. 같은 해 2월에 진주에서 불이 붙어 삼남지방으로 번졌던 육지의 민란에 자극을 받아 일어난 것으로 대정현 사람 강제검과 제주 봉개리 사람 김흥채 같은 이들이 중심이 되어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일으킨 것이다. 9,10,11월에 걸쳐 3차례나 봉기하였고 3차봉기 때에는 다음해 1월까지 제주목 전체를 장악하기도 하였다. 場稅를 지나치게 많이 거두는 것,부역을 불공평하게 매기는 것,또 환곡에서 부정이 많이 저질러 지는 것 등의 이유로 발생하였는데 신분적 차별과 더불어 과도한 조세부담을 져야 했던 대다수 도민들은 이러한 항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고 봉건정부는 이러한 도민들의 요구를 들어줄 능력이 애초에 없었기 때문에 봉기는 다음의 봉기를 잉태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읍정을 장악하기까지 했던 봉기는 다음해 1월에는 진압되고 장두인 강제검과 김흥채는 체포 즉시 처형된다. 그러나 1890년(고종 27) 12월에 발생한 김지의 난과 1896년(건양 1) 3월에 발생한 강유석과 송계홍등이 중심이 된 민란이 같은 맥락에서 발생하였다.


3 . 방성칠란


1898년에 일어난 방성칠란도 임술년 농민란과 비슷한 각종 세의 과도한 징수가 그 원인이었다. 당시 제주도에는 갑오농민전쟁 이후 잔당들이 관군의 체포를 피해 제주에 숨어 들어와 정착하여 살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인 방성칠이 수탈로 민중의 원성이 높았을 적에 토지세의 부당함과 여러가지 악폐를 들어 화전민과 가난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도록 하였다. 여기에 각 촌으로부터 수많은 민중이 호응하여 제주성을 점령하였고 목사는 부상한 채로 도망쳤다. 이 난에서 특기할만한 사실은 단순한 조세저항적 성격을 넘어서 독립국가의 건설이라는 조선왕조 자체를 반대하는 운동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다른 민란과 성격상의 차이점을 나타내나 결국 방성칠란 역시 내부의 갈등과 1862년 항쟁의 경우와 비슷하게 조천리를 중심으로 한 토호들과 유배인들을 중심으로 한 세력에 의해 한 달여 만에 진압되고 방성칠 등 그 수뇌들도 처형되었다. 그러나 뒤이어 발생하는 이재수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4 . 이재수란


광무 5년인 1901년 5월에 일어난 이재수란은 신축년의 난 혹은 천주교난 이라고도 하여 지금도 제주도민의 머리에 깊이 새겨져 있다. 외래 종교에 대한 토박이 민중의 저항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제주도의 근대역사에 여러모로 중요한 성격을 지닌 난이었다. 특히 600여명의 천주교민 사망자를 내어 프랑스와의 국제적인 외교 사안으로까지 비화되었다.


1) 민란의 배경


(1) 제주도의 사회경제적 조건


제주도는 구한말 농민층 분해와 지주경영이 강화되던 육지 상황과는 달리 봉건적 신분제나 지주전호제가 대단히 미약하였고 육지의 산간지방에서처럼 중소지주나 영세한 자작농 자소작농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미개간 국유지가 많고 어업 목축등의 보조생계수단이 확보될 수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무산자나 임노동자 또는 걸인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사회경제적 동질성이 강하였고 이는 농민 항쟁시 동일한 적대세력에 대한 강한 계급적 연대성을 발휘하여 전도민이 참여할 수 있었던 조건이 되곤 하였다. 또한 제주민란 발생의 공통적 배경으로 특유의 토지보유구조와 주세수취구조를 들 수 있다. 원래 제주도의 경지는 公土로써 전답에는 소유권이 없었으며 그 매매 역시 오직 사용권의 매매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농민들도 지세가 아닌 지대를 납부하는 국가소작인으로 존재하였다. 따라서 경작권 사음권 지대율 등이 불안하고 이를 매개로 한 봉건적 수탈 착취가 용이하게 자행될 수 있는 토지보유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제주도는 공물상납을 제외하고는 행정과 재정 운영이 거의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중앙의 지배를 거의 받지 않는 자의적인 통치구조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관의 악용의 소지가 많았다. 그래서 제주도에 부임한 목사들은 거의 다 수탈을 일삼았다고 한다. 그래서 제주도민은 전통적으로 국가권력의 수탈에 대한 저항의식이 강하였다.


(2) 조세수취문제와 제주도에서의 세폐


광무정권은 수취제도의 근대적 개혁이란 명목하에 지방재정을 전부 중앙 재정에 편입시켜 일원화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국가 지주제를 강화시키려는 한편 지대와 지세를 인상시켜 농민에 대한 수탈을 가중시켰다 또한 부족한 재원을 확충하기 위해 전에 없던 호주세, 어장세, 시장세 등의 각종 세목하에 잡세를 부과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이같은 조세와 잡세의 수취는 중간 수취자에 의해 배가되는 양상이었다. 광무정권은 稅監,捧稅官 등으로 불리우는 세원을 파견하여 세원조사와 세금납부를 독촉하였다. 이들 세원은 조세수취과정에서 해당 사항이 안되는 전답 물품에까지 과세하거나 기존의 경작권 사음권 등에 간섭하여 재래의 토지보유구조를 재편성시키는 등 작폐를 불법적으로 자행하였다. 제주도에 파견한 봉세관 강봉헌은 전권을 행사하면서 징세가 가능한 거의 모든 토지와 산물을 조사하여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그 중 한 예로 논 1두락에 10량을 부과하였다. 이는 여타 지역의 3배에 해당하는 무거운 액수였다. 조세업무를 장악한 봉세관의 지위는 실질적으로 지방관보다 우위에 있었다. 이것이 제주 특유 조건과 결합되면서 수탈은 한층 더 극렬히 표출되었다.


(3) 천주교 문제와 제주도에서의 교폐


19세기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침략은 천주교의 교세확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86년 한불수호조약과 1896년 교민조약 등으로 선교와 신앙의 자유를 획득한 프랑스 천주교는 실제 구한말 국가 내의 국가와 같은 조직체계를 통해 치외법권적인 특권을 누리면서 포교활동을 꾀하였다. 당시 제주도 인구 2.5%에 해당하는 비율이 신자가 되었는데 이는 순수한 종교적 차원이라기보다 치외법권적인 특권을 누리는 신부를 배경으로 그 특권과 보호 원조를 향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천주교에 입교한 교인들은 자신들도 곧 法國人이라는 치외법권적 명의하에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채 갖가지 불법행위를 자행하였으며 심지어 私刑까지 마음대로 시행하였다. 또 봉세관 강봉헌이 일부 불량한 천주교도들을 세금 징수인으로 채용하였는데 그들은 지세를 비롯한 잡세 심지어는 가축 수목 계란까지 일일이 세금을 매겼다. 이에 따라 관헌의 수탈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천주교도들에게 집중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반 천주교의식을 공동의 적으로 인식하였다. 그 결과로 봉세관, 천주교인, 유배인이 결합되고 지방 통치세력, 일반 민중들이 결합되는 형태로 침략 침탈적인 외래세력과 방위적인 도민간의 적대적인 대립축이 형성되어 나아갔다.


2). 전개과정


(1) 1단계 : 민회


1901년 4월 대정군 읍내에서는 尙武仕를 조직하여 군민의 궐기를 촉구하고 제주성내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민회에서는 봉세관의 세폐와 천주교인들의 교폐를 성토함은 물론 제주성으로가 이들 폐해를 시정해 줄 것을 목사와 봉세관에게 등소하기로 결의하였다. 점점 발전된 민회의 운동노선은 어디까지나 집단적인 等訴를 통해 운동을 관철시키려는 온건적 합법적 비폭력적 차원에 있었다. 이 같은 방법은 1898년 官을 상대로 무력에 의존하였다가 비참한 최후를 가져온데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 민회 등소의 성격은 봉건적인 수탈적 조세수취구조의 변혁에 1차적인 주안점을 둔 반 봉건운동이었고 천주교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5월 9일경 대정군수 채구석이 민회소를 찾아가 그 원인을 물었을 때 주로 세폐를 호소하였기 때문이다. 등소의 대상도 목사와 봉세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프랑스 신부와 교인들의 대응전략은 이 민회를 어디까지나 천주교를 타도하기 위한 반란으로 규정, 회민을 폭도로 간주하고 무력에만 의존하려 하였다. 결국 천주교측은 5월 14일 계획대로 민회 장두 내지 적극가담자들(오대현을 비롯한 6명)을 잡아들였는가 하면 인명을 살상함은 물론 대정 제주군의 무기고를 열어 중무장하기도 하였다. 민회의 실상을 무시한 천주교 측의 무력적 강경대응은 오히려 도민들로 하여금 온건노선에서 무력투쟁에 의거한 강경노선으로 급선회하는 새로운 운동의 국면으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회민(回民)은 이슬람 인이다.


(2) 2단계 : 3군민의 총봉기와 무력항쟁기


5 월 15일 민군은 프랑스 신부가 지휘하는 제주성내 무장교인들을 상대로 전투적인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민군은 서진 장두 이재수와 동진 장두 강우백의 지도하에 17,18일 경에는 제주성 남문 밖 황사평을 중심으로 포진하여 교인과의 공방전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교인에 대한 처형이 매일 시작되었다. 이에 반해 천주교측은 5월 17일 프랑스 신부와 최형순이 교인들을 이끌고 성외에 출격하여 민군에게 먼저 발포하여 13여명(또는 21명)을 사살하였다. 이에 분노한 민군측이 성내 주민에게 통문을 보내 성문을 열라고 호소하여 5월 28일 민군은 5월 23일부터 제주성내의 주민들이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봉기하여 내응한 것에 힘입어 제주성에 무혈 입성하였다. 입성한 민군은 성내에 있던 교인들을 처형하여 민군에 의해 죽은 교인수가 거의 30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들이 내세웠던 주장은 세 가지로

첫째 봉세관의 폐를 바로 잡는 것,

둘째 천주교도의 폐를 없애는 것

세째는 방성칠란 때 반농민적이었던 봉건 반동세력에 대한 처단 등이었다(이것으로 방성칠란의 잔존분자가 상당수 참가한 것을 알 수 있다)


(3) 3단계 : 중앙정부군관의 대치와 재등소기


5월 31일 270명의 프랑스해군과 새로 부임하는 신임목사 그리고 도민의 원망의 대상인 신임 대정군수 강봉현 등을 태운 두 척의 프랑스 군함이 제주도에 입항하였다. 또 6월 2일에는 진위대 강화병정 100명과 미국인 고문관 산도 (W.F Sands)가 급파되었고 일본 군함까지 출동함에 따라 사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프랑스 군함의 제국주의적 무력시위와 이에 따른 장두의 체포전령은 이후 도민들을 더욱 자극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 신임목사와 중앙정부군의 중대장은 중앙정부의 명에 따라 효유에 의한 자진해산이라는 온건적인 진압책, 즉 선 해산 후 민폐개선이라는 조건으로 동서진 민군과 협상하면서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이 진압책은 민군을 일단 해산시킨 뒤 장두들을 체포할 여지가 그 이면에 있는데다, 민군의 운동 목표였던 세폐와 교폐에 대한 확실한 보장과 장두들을 체포하지 않겠다는 약속없이 민군이 무조건 해산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큰 진전을 볼 수 없었다. 동서진 민군은 목사와 진위대 중대장 홍순명으로 대표되는 중앙정부와 협상을 도모하면서도 무장을 한 채 계속 저항을 하는 한편 합법적인 공간을 활용하여 등소를 통해 운동 목표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3) 결 말


중앙정부는 효유에 의한 진압방법이 효과가 없게 되자 찰리사와 증원부대를 급파하고 이 사건에 유배죄인들이 깊이 관련된 점을 감안하여 이들을 移配하라는 조칙을 내리는 등 적극적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 그래서 6월 10일에는 찰리사 황기연과 심군참령 윤철규를 비롯한 200명의 진위대와 13명의 순검이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민군의 지도자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 등 40여명의 관련자와 전봉세관 강봉현. 전 대정군수 채구석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결국 세명의 민군 지도자는 교수형에 처해졌으나 강봉천과 채구석은 뒤에 무죄 방면되었다. 이와 같이 이재수란은 결국 중앙정부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한편 1904년 프랑스 공사는 민군에 의한 교회의 피해에 대하여 총 6,315원의 배상금을 요구하였고 제주도 3군의 도민들은 연대적인 책임을 지어 이를 부담하였다.


4) 의의와 한계


1901년 제주민란은 세폐와 교폐의 혁파라는 운동목표를 놓고 각계각층이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전 도민이 참여한 연합운동으로 그 주도층이 하층 민중에 있었던 반봉건 반제 민중항쟁으로서 그 의의를 인정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중앙 정부를 시종 협상의 대상으로 인정하였다는 점과 부수적인 현상이었지만 같은 외세이자 침략세력인 일본인에 협력을 요청한 사실, 그리고 향장이었던 오대현과 관노였던 이재소로 대표되는 동서진간의 계급적인 갈등은 이 민란의 한계점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제주 도민들은 이 항쟁을 통해 기존의 조세 수취구조를 개선하는 17조항의 전령과 교폐방지를 위한 교민화의 약정을 얻어내는 실질적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5. 맺 음 말


제주도의 민란은 비록 특유의 정치적 분리주의 내지 독립주의적 성향이 내재해 있었을지라도 기본적으로 열악한 사회경제 구조 속에서 봉건적지대와 공물을 통한 수탈이라는 구조적 모순에 저항한 반 봉건 운동이었다. 이는 봉건적 모순에 대한 제주도민의 주체적인 민중 저항 역량을 말해주는 것이다.


** 참 고 문 헌 **


1. 김양식, <1901년 濟州民亂의 再檢討>, <<제주도연구>>6집, 1986.

2. 망원한국사연구실 19세기 농민항쟁연구분과, <<1862년 농민항쟁연구>>, 동녘

3. 김진봉, <철종조의 제주민란에 대하여> <<사학연구>>21, 1969

4. 강재언, <<한국근대사>> 한울,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