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천(深圳)은 부산이고 임진왜란이 발발된 곳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49804
***********************************
영국은 청나라를 Qing Dynasty라 하지 않고 청정부(Qing Government)라 했다?
chine, chinois(조선)의 청정부(Qing Government)라 해석할 수 있다.
아래 첫 그림 1797년도 한반도 부산 해도라고 하는데 쉽게 동의 할 수가 없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 당시 상황에서 잘못된 점을 반박할 수 있게 하는 명확한 증빙자료나 제시할 끈덕지가 전혀 없다는 슬픈 현실이 존재 할 뿐이다.
힘들게 올려주신 귀한 자료를 가지고 주제넘게 가타부타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지금 바로 확인 할 수 있도록 자료를 제공함으로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할 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치가 있고 중요하다고 본다.
영국 함대가 동해에 들어와 부산을 1797년 조사하였다고 하였는데 결과물 해도를 50년이 흘러 1840년에 발행하였다고 한다.
1840년은 7월17일 제1차 아편전쟁 시작 되던 해이다.
그런데 영국이 어찌하여 오키나와 근거리에서 주선인 Providence을 파선당하고 용케(?)도 구한 스쿠너선을 이용하여 홋가이도와 한반도 부산만을 측정하고 돌아가야만 했을까?
그들이 남긴 기록은 마카오에서 일단 겨울을 난다고 하였는데 한반도 부산을 측정한 달은 10월이다.
대륙은 그들에게 잘 차려진 밥상이었지만 침만 흘리고 있을 때이다.
그러한 밥상은 거들더 보지도 않았다?
말이 되는가?
일확천금 엄청난 부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하여 수십년 계획하고 침탈할 기회를 잡으려 혈안이 되던 그들이 어찌하여 대륙을 제사밥 보듯이 하였겠는가?
서세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거주권만으로 만족하면서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늑대가 고기를 앞에 놓고 주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어색함이다.
그 마당에 대륙거점을 조사하지 않았으며 정탐 위한 측정을 전혀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숨기려 하는 거짓말이다.
그리고 엄청난 노력으로 힘들게 만든 최신예 범선을 한반도 부산만 측량하고 돌아갔다는 자체가 무엇인가 아귀가 맞지 않는 엉터리 같은 기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 그들이 조사하고 측량한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 그것도 광주 해안이라고 해야 한다.
그곳은 영국이 43년동안 절치부심 기회만을 엿보고 기다리던 대륙침공 계획을 비로소 실현 할 수 있는 곳으로서 1840년 아편전쟁이 일어났던 주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줄기차게 수차례 무수한 배들을 파견하여 대륙주위를 맴돌게 한 것이다.
산악투성인 한반도를 집어먹기 위해?
그렇다면 한반도가 그 이후 영국에게 크게 훼손 당하는 일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없었다.
현재 한반도가 군사적인 면에서 지역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은 열도에 일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들 대륙을 침범하는데 길목역할을 하는 역학적 구도에 중요성을 말하는 경우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임진왜란 발생 지역을 조작한 일이다.
하지만 1797년은 물론이고 1840년까지 미안하게도 열도에 일본이란 존재가 없었다고 해야 한다.
일본이 열도로 이동한 시기는 1872년 이후부터이다.
그렇다면 한반도는 그렇게 중요한 위치가 못된다.
Providence가 홋가이도를 조사했다고 하는 것은 지금 오키나와(유구가 아니다)에서 파선 당한 것이라고 기록을 남기고 위치적으로 맞추기 위해 홋가이도를 인용했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한반도와 관계설정을 하기 위한 수단이지 파선 당한 곳을 정확하게 지정한다면 바로 광동 즉 광주 해안과 가까운 남지나해 해남도를 홋가이도라고 하였을 가능성과 파선 당한 곳은 필리핀 루손 섬일 가능성을 제기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당시 역사는 항해일지(日志)의 역사이고 삽화의 역사이다.
영국뿐만 아니라 그 외 서양제국에서 남긴 자료 무엇이든 또는 일평생 해적질을 하고 돌아 다녔던 무지한 개인이든 관리이든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증빙할 자료를 남겼다는 사실만으로 무조건 그 당시 역사로 취급하였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도깨비 같은역사가 아닐 수 없다.
조선은 자신의 나라의 지명이 잘못되었음에도 기록을 바로 잡고자 요청도 할 수 없었고 항의조차도 할 수 없는 무지하고 무력한 나라였던가?
아무리 조선의 사람이 없어도 조선이 한반도에 위치하였다면 서양이 만든 지도에 한반도 지명하나 제대로 바르게 발음하게 하지않고 잘못표기된 부분을 변변한 항의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면이다.
어쨌던 아래 해도를 부산 해도라고 주장하는 것은 상식을 도외시하는 엉터리인 것이다.
1797년 영국이 측량하였다는 지도 원본을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근세기 서양주도에 의한 동양역사재편작업과정에서 지명이 완벽하게 다르게 조작된 해도임에도 우리는 무작정 믿고 따를 수밖에 없다.
근세기 한반도와 관련된 주요사건의 지도를 보면 사건지역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지만 하나같이 조각삽화이고 짤라진 지도라 전체구도를 볼 수 없게 만들어 우리들에게 제시한 것들 뿐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핵심을 속이려고 한 것이 틀림이 없다.
19세기 이후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한다면 아편전쟁이후 역사는 그들 서양세력들의 독무대 같은 역사였고 두말할 것도 없이 서양주도 역사였다.
더 이상 무엇을 더 말하리.
부산해도가 1840년에 발행했다는 것은 아편전쟁을 대비한 작전상 지형도를 완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편전쟁이 부산에서 일어났는가?
그 당시 서양인이 그린 지도 어디에도 Pusan 이란 명칭은 없다.
이 글에도 Cape vashon 이라 했다하고 Chosan Harbour 라고 했다 한다.
Vashon is a census-designated place (CDP:國勢調査指定地域) in King County,
Washington, United States 이다.
조선(chosun, choson, Chosan)이란 나라명칭을 일개 도시항구에 갖다 붙였다?
아무리 약한 나라라고 할지라도 외교 관례상 있을 수 없는 짓이다.
그러한 지도를 내미는 것은 한마디로 도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흐릿하지만 아래 사진에 보면 CHONAN Harbour 라고 되어있다.
chonan 이 어디일까?
Ch가 천지다.
비슷한 이름은 canton(광동)과 chusan(주산)이 있다.
chonan=chosan =chusan =舟山(절강성)
모르면 수수께끼고 힘센놈이 이긴다.
대륙조선의 지명을 여기다 맞추고 저기다 맞추다 보니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다.
영국에서 청나라를 청 정부 Qing Government 라 했다.
Qing Government(淸 정부)가 china 이고 chinese 이며 chine 인가?
아니다.
대륙조선의 청 정부일 뿐이다.
이렇게 볼 때 부산은 광주(廣州: 홍콩, 마카오)일 가능성이 있고 상해일 가능성도 있다.[한부울]
현 부산항 구글지도인데 1797년 부산 해도라고 하는 그림에서 비교 하여 보더라도 얼토당토하지 않는 지도임을 알 수 있다.
문제가 되는 1797년의 지도그림 이외에 해도는 현 부산항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1797년도 해도는 그 당시에 현 한반도 부산을 그렸다고 볼 수 없다.
일본이 1872년 열도에 들어간 후 부산을 한반도에 고정시키기 위하여 서세와 합작하여 중요한 여백을 잘라내고 알아 볼 수 없게 만들어 조각난 그림만 남기고 부산항이라고 우기는 것이라고 본다.
신미양요 강화도 해전도도 역시 이런식이다.
***************************************
부산 수심측량역사
1797년에 측량한 부산항 수심도 - 한상복 박사님 제공
이 해도는 영국의 Broughton 일행이 1797년 10월 약측한 결과를 영국해군성 수로부에서 1840년 4월 해도번호제1259호로 발행했다. 상이말의 별칭을 Cape Vashon 이라 하고, 그 위치를 35° 2' N 129° 7' E로 측정했다.
Broughton이 1804년 출판한 "북태평양 탐사 항해기"로 인해 부산항이 "조선항(Chosan Harbour)"이라는 이름으로 서양세계에 구체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영국해군성 발행의 이 해도는 1840년 당시의 국제정세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1859년도에 측량된 부산항 수심도 - 한상복 박사님 제공
이 해도는 1859년 5월과 11월에 John Ward 가 H.M.S. Actaeon과 Dove호를 지휘하여 부산을 방문했을 때 측량한 것이다. 초판본은 1860년 10월 10일 영국 해군성에서 해도번호 제1259호로 발행한 바 있으며, 이 해도는1861년에 수정을 하여 재판으로 발행한 것이다.
1875년도에 측량된 부산항 수심도 - 한상복 박사님 제공
이 해도는 1875년 7월 일본국 해군함정 제2정묘호 사관들이 부산항을 측량하고 곧 이어 일본해군 수료로에서 발행한 것으로 원도면의 크기는 93×78.6cm이다. 1875년 당시 부산항 모습뿐만 아니라 그때의 정세까지를 종합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는 역사기록이다.
1955년도에 측량된 부산항 수심도 - 한상복 박사님 제공
이 해도는 1955년 12월 대한민국 해군 수로국 발행 해도의 제3판으로 1959년 6월에 발행되었으나 제1판과 거의 동일하며 1955년 당시의 부산항 모습을 알려준다.
*********************************************
Nathaniel Bowditch 저술 - 1826 - Language Arts & Disciplines 위치 측정 자료
*********************************
hydrography 해양·호소·하천 따위의 수계(水界) 지리학
anchoring in Volcano bay which was surveyed as also Endremo harbour.
Continuing along the coast to Spanbay island and Marikan(one of the Kuril islands) through Vries strait and the strait of Taugar along the East coast of Japan to Yeddo bay and the Fatsisio to Macao.
At Macao the small schooner built at Otaheite by the mutineers of the Bounty was purchased for 파운드 1500 and fitted as a tender and the voyage continued in April 1797 for the island of Lamay and Pa-chusan island.
In May 1797 the Providence was wrecked off the island of Typingshan of the Meiacosima group the crew being rescued by the tender and conveyed to Canton here the greater number were transhipped to the swift and the east indiamen under ber convoy Commander Broughton continuing in the tender for the coasts of Tartary and the corea.
Lieut Hayward one of the officers set adrift witeh Bligh of the Bounty commanded the Swift which was lost on the return voyage to England with all hands.
Visiting and esamining June 1797 the Pescadores, Kelung harbour and Eastern coasts of Japan to Endermo harbour for the second time thence through Tsugar strait along the west coast dof Yesso to 52도 N. latitude in the gulf of Tartary.
Here it was partially examined, Macao being again reached 27th November of the same year and then to Trincomalee. At Trincomalee passage was taker to England which was reached in February 1799.
*********************************
This is a special little known story about the ship Providence which made a scientific discovery voyage in the North Pacific Ocean and moored during this voyage in the harbor of Pusan in 1797. The captain was William Robert Broughton (1762-1821).
By the eighteenth century, voyages in the interest of science became more prevalent, particularly as they related to hydrographic surveying.
Lieutenant William Robert saw much service along the coasts of Northwest America and Northeast Asia, and in the East Indies. In 1790 he was appointed to accompany Vancouver on his famous voyage, and surveyed the Columbia River and the adjacent coast.
Broughton was commander of the Chatham, the companion vessel to Vancouver's own ship. Broughton was born in 1763 in Cheshire. He joined the Navy and served as a Midshipman under Captain Knight in the American Revolutionary War in 1776. He served again with Knight on HMS Victory in 1790.
He was unknown to Vancouver when appointed to the Chatham shortly before the voyage. In late 1792, Broughton took the Chatham into the mouth of the Columbia River, the boundary between present day Oregon and Washington. He proceeded up the river, charting its course to a point above Portland. After rejoining Vancouver and sailing to Monterey, Vancouver sent Broughton back to Britain with news of the negotiations he had held with the Spanish at Nootka and asking for further instructions. Broughton reached London in July 1793.
Broughton was promoted and given command of HMS Providence in October 1793 and instructed to rejoin Vancouver. He was still in Britain in October 1794 and was delayed further until February 1795 when he finally sailed from Plymouth. He was too late to meet Vancouver, who was already in the Atlantic on his way home and reached Nootka in March 1796. Broughton decided to cross the Pacific and undertook a survey of the Yellow Sea and parts of Korea and Japan.
He arrived on Jan. 1, 1796 at Hawaii and departed at Feb.. 20, 1796 on his way to the east coast of Asia.
In 1797 the ship headed into Naha Harbor later the ship wrecked off the coast of the Miyako- Tarama Islands and the crew was helped by the local population. Broughton however had taken the precaution of securing a second ship, the Prince William Henry in Macao, in which he completed the voyage. Broughton published his log book in 1804 in the form of a book. Here you can find part of the logbook and the Korean documents about the encounter.
This is the first official encounter between a British ship and the Korean government. only the has been replaced with a normal s to make it easier to read. Look for instance at (part of a sentence) is rewritten as: ast sid
Since I didn't want to ruin the lay-out of the pages, just hit the "back" button of your browser to go back to this page. Another possibility is: I made under the title of every page, a navigation bar, point your mouse here to see how it works, so you can navigate in that way as well, the last possiblity is to click on the page numbers to go to the next page.
***************************
HMS Providence (1791)
Name: |
HMS Providence |
Builder: |
Perry &Co, Blackwall |
Launched: |
23 April 1791 |
Acquired: |
February 1791 |
Commissioned: |
April 1791 |
Fate: |
Wrecked on 16 May 1797 |
General characteristics | |
Class and type: |
sloop-of-war |
Tons burthen: |
406 tons |
Length: |
107 ft 10 in (32.9 m) (overall) |
Beam: |
29 ft 1 in (8.9 m) |
Draught: |
7 ft 8 in (2.3 m) (standard) |
Depth of hold: |
12 ft 3 in (3.7 m) |
Propulsion: |
Sails |
Sail plan: |
sloop |
Complement: |
100 |
Armament: |
10-guns: (later 12) 10 × 4 pdrs (altered to 18 x 4pdrs in 1797) 14 x ½pdr swivels |
HMS Providence는 영국해군의 슬루프 범선이었다.
Providence는 Perry & Co에서 주식에 대해 구입되었다,
1791년 2월의 Blackwall에서 건조가 1791년 4월 23일에 착수되었고, 그 달 Bligh 지휘아래 취역하였다. Providence는 1,267 파운드를 들여 Woolwich에서 구리가 입혀졌고 다시 3,981파운드를 들여 Deptford에서 구리를 입혔다.
6대1의 비율로 간주되면서 Providence는 1791년 8월 2일에 태평양을 향해 항해했다. Bligh의 임무는 태평양에서 breadfruit 나무와 다른 식물의 견본을 모으기 위해였다. 그는 그것을 서인도제도에 수송했고 견본은 빈센트 성에서 왕립 식물원에 주어졌다.
Providence는 1794년 2월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1793년 9월 30일에 슬루프 범선으로서 re-rated(재편)하게 되었다. Providence는 Woolwich에서의 또 다른 수리를 거쳐 William Robert Broughton 2등 해좌의 지휘하에 1793년 10월의 재취역하게 된다.
Broughton는 1795년 2월 15일에 밴쿠버 탐험과 대영제국 회답하도록 명령받았다. 오랜 원정 끝에 Monterrey에 도착한 상태에서 Robert은 밴쿠버의 조사 직무를 미완으로 남기고 동아시아의 연안을 측정하고 해도에 기록하기 위하여 최종 출항할 것을 결정했다. 그의 탐험 항로에 있는 Caroline 섬을 "해군본부의 P. 스테판 각하의 딸을 찬사하는 뜻에서 캐롤라이나 (그것은 나중에"Caroline"가 되었다)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Pedro Fernadez de Quiros가 되었다가 포르투갈의 탐사자가 스페인을 대신하여 항해 하면서 불렀던 이름이 "코이산족 khoisan Bernardo라고 칭했다."
Providence가 아시아를 향해하면서 그 승무원들은 Macau 에서 겨울철을 지나기로 하고 멀리 바라보이는 Hokkaid(홋카이도) 연안을 조사했다.
Broughton는 1797년 5월 16일 Providence는 오키나와 미야코지마에서 파선되었고 운이 좋게도 작은 스쿠너선을 구입할 수 있어 Broughton 과 그의 승무원은 임무를 계속 수행하였으며 1799년 2월 집으로 돌아왔다.
HMS Providence was a sloop of the Royal Navy, famous for being commanded by William Bligh on his second breadfruit voyage between 1791 and 1794.
The Providence was purchased on the stocks from Perry & Co, Blackwall in February 1791. She was launched on 23 April 1791 and commissioned under Bligh that month. She was coppered at Woolwich for the sum of £1,267, and then again at Deptford for £3,981.
Rated as a sixth rate, she sailed for the Pacific on 2 August 1791. Bligh completed a mission to collect breadfruit trees and other botanical specimens from the Pacific, which he transported to the West Indies. Specimens were given to the Royal Botanic Gardens in St. Vincent. Providence returned to Britain in February 1794, having been re-rated as a sloop on 30 September 1793. She underwent another refit at Woolwich and was recommissioned in October 1793 under the command of Commander William Robert Broughton. Broughton was ordered to rejoin the Vancouver Expedition and departed Britain on 15 February 1795. Reaching Monterrey long after the expedition made its final departure, Robert decided (correctly) that Vancouver would not have left his surveying task unfinished and departed to chart the coast of east Asia.
In the course of his explorations, he named Caroline Island Carolina (which later became "Caroline") "in compliment to the daughter of Sir P. Stephens of the Admiralty.". This name superseded that given by Pedro Fernández de Quirós, a Portuguese explorer sailing on behalf of Spain; his account names the island "San Bernardo."
Providence voyaged to Asia as the crew surveyed the coast of Hokkaidō before wintering at Macau. There Broughton purchased a small schooner which proved providential when, on 16 May 1797 Providence was wrecked at Miyako-jima, south of Okinawa. Broughton and his crew continued the mission in the schooner, exploring northeast Asia, and returned home in February 1799.
************************
A modern interpretation of the landing on New Providence. Wasp is in the center background, Providence is to the right. The two “prize” sloops appear to be ashore to the left.
'세계삼한역사 > 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탈아입구란 왜구가 일본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조선에 대한 반역이었다. (0) | 2009.09.19 |
---|---|
1816년 조선해안 COAST OF COREA 방문한 이양선원 (0) | 2009.09.07 |
대륙조선을 찾아왔던 이양선들 (0) | 2009.09.04 |
대륙 판케익의 먹구름? (0) | 2009.09.04 |
하멜 표류기를 조작한 이유 (0) | 2009.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