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사건

임진왜란을 다시 보아야 할 이유-대륙조선은 india, indies

한부울 2010. 4. 8.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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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다시 보아야 할 이유

 

타고르와 인디즈(indies 대륙조선) 

http://blog.daum.net/han0114/17049852

임진왜란 왜장 최종목표는 인도였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423
임진왜란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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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조선은 india, indies일 가능성이 있다.

대륙이라 함은 신중국대륙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SINA 대륙은 곧 1882년 이후에 만들어진 신중국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니 대륙이라 함은 포괄적으로 넓은 의미를 더 하는 것이 맞는 이야기다.

먼저 이야기를 하기전에 우리가 결정해야 할 것은 바로 인도나 인디즈가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워낙 우리는 근대사에 빠져 있었고 더군다나 반도역사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에서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현재 인도라고 하는 아시아대륙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아 어쩌면 이 인도와 인디즈의 실체를 밝히면 임진왜란이 발생한 실제 영역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강하다.

그렇더라도 현재 상황을 그대로 설정하고 이야기를 먼저해 본다.

 

항해시대 15세기 예수회가 식민지 쟁탈전과 병행하여 그렇게도 공세적 선교 활동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미얀마에서는 1721년에 들어서야 처음으로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동인도와 자바등지는 이미 서양세력 천지가 되었는데 무엇때문에 전파되지 못했을까?

미얀마는 바로 엄청난 힘으로 외세를 차단하던 세력 대륙조선이 존재한 것이라고 해야 맞다.

 

1510년(AD) 포르투갈이 고아를 점령.
1510년 포르투갈의 알부케르케, 비자푸르 왕국으로부터 고아 지방을 빼앗아 동방제국의 전초기지로 삼음.

1511년(AD) 포르투갈 고아를 점령, 말라카도 점령하고 인도 영유의 발판을 닦음.

1533년(AD) 포르투갈인의 미얀마 해안 침범이 잦아짐.

1543년(AD) 포르투갈인이 일본 다네가섬[種子島]에 표착, 신무기 철포·화약총을 전함.

1544년(AD) 사량진왜란(蛇梁鎭倭亂).

1549년(AD) 일본에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그리스도교 전래. 스페인의 F.자비에르, 일본 가고시마[鹿兒島]에 상륙, 그리스도를 전함.

1555년(AD) 을묘왜변(乙卯倭變). 왜구들이 조선 전라도 일대를 유린함과 동시에 중국 난징(南京)을 위협.

1557년(AD) 중국이 포르투갈인들의 마카오(澳門:현재마카오가 아닐 가능성이 많음)거주를 허가. 1562년(AD) 왜구들 중국흥화(興化-贵州省)를 점령. 일본이 포르투갈에 개항 시작.

1563년(AD) 중국에서 척계광(戚繼光) 등이 복건(福建) 평해(平海)에서 왜구를 격퇴하고 흥화(興化-贵州省)를 회복.

1567년(AD) 포르투갈 선박,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입항, 일본과의 교류 시작.

1575년(AD)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왜국이 조선침략을 위해 전선을 건조하고 있음을 통지.

1584년(AD)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와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싸움.
1586년(AD) 이에야스가 오사카 성을 방문, 히에요시의 신하가 됨.

1587년(AD) 일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그리스도교 금지령을 공표하였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표면적으로 대륙조선의 령을 따라 통치하였다고 보인다.

1590년에 일본 영역을 풍신수길이 통일하였다.

불과 2년후 풍신수길은 대륙조선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킨다. 이것이 반도사에서 말하는 임진왜란이다.

1592년(AD) 임진왜란(壬辰倭亂) 시작.

 

왜구란 단어 뒤엔 분명히 서양세력들이 존재한다.

서양세력들이란 대항해시대를 구가한 세력들을 말한다.

포르투갈이란 서양세력은 왜구란 정체뒤에서 실질적으로 반란을 조종하였다는 여러가지 상황이 들어난다.

인도 남부지역을 점령하고 무자비하게 갈취한 막대한 자본과 그 자본으로 만든 신식무기를 가지고 뒤에서 얼마든지 조종하였다고 볼 수 있고 스스로가 왜구가 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1597년(AD) 정유재란(丁酉再亂) 약 20만의 왜군 상륙

또 2차 정유재란 역시 그렇다.

 

네덜란드인들이 자바에 처음나타난 시기가 1595년이고 이때 많은 선교단들과 함께 들어 왔을 것이라고 추증되며 때문에 외세를 경계하던 대륙조선에서 그들을 탄압하였다고 보인다.

때문에 일본 나가사키에서 많은 가톨릭교도들이 그 해 순교(훗날 26성인 추대)했다고 보인다.

추측컨데 대륙조선 땅인 나가사키에서 천주교 탄압이 있었고 왜구라 판명되는 서양세력들이 이에 반발하여 조선과 전쟁을 벌렸던 것이 왜구를 가장한 정유재란 이라고 할 수 있다.

 

1차는 포르투갈이

2차는 네덜란드가 벌렸던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처음 모병하고 출병한 곳이 어디겠는가?

바로 인도 남방을 깃점으로 해역이 연결되는 자바 근역이라고 추리 할 수 있다.

 

위 지도는 인도를 분명 중앙아시아에 표시하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자료의 한계로 인하여 분명히 다 알 수 없지만 바로 임진왜란이라는 난이 발생한 원인을 다시금 분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그 당시 국제정세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왜구가 국제정세에서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그기에 앞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로 대륙조선이라는 실체이다.

임진왜란은 우리가 보았을 때 왜란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시대적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리국제전쟁의 성격이 강하다.

왜구를 용병으로 사용한 서양과 대륙주체세력인 동양과의 전쟁이란 말이다.

무기와 전쟁자금 및 전략을 공급하고 인적자원은 왜구를 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급자 그 주체가 누구냐는 것인데 바로 포르투갈이라는 실체이다.

대륙조선이라 함은 대체적으로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아시아 전체 즉 인도대륙과 동남아지역을 직간접적으로 통치하던 거대한 제국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대륙조선의 지배조직을 크게 보면 중앙정부(천자, 즉 황제가 있는 지휘부)를 중심으로 한 분권제국으로서 각 지방권력을 인정하는 조직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지금 중공조직망처럼 자치권을 부여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명과 조선의 혼란은 이러한 관점에서 풀 수 있다.

명은 대륙조선이란 타이틀 내에 중앙정부를 지칭한 것으로서 로얄(royal)계층이라고 보면 된다.

명은 대륙조선 내에 존재하는 상징적인 호칭이라고 볼 수 있다.

대륙조선의 황제가 있는 곳은 명이라 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역사혼란은  조공(朝貢)이란 단어에 모여지는데 근세기 이익집단정치모사꾼과 역사이단자들에 의한 것으로서 마치 제후국인 왕이 천자국인 황제에게 무엇이든 바치는 것처럼 호도하여 조작하였던 결과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상적으로 황제(똑같은 최고위 지배 권력임에도 대륙사와 반도사를 구분 분리키 위하여 황제와 왕이란 등식을 만들었을 뿐 실제는 대륙조선의 왕이 황제라 보아야 마땅하다.)에게 지방 관리(반도사로 따지자면 제후국인 셈이다)들이 토산물을 바치는 것을 진상(進上) 또는 토공(土貢), 조공(朝貢: 朝廷에 進上하는 행위)이라 하였음에도 그것을 호도하고 조작하여 나라대 나라 즉 대국과 소국이라는 얄팍한 공식을 적용하였던 것이다.

더 이상 복잡한 내용은 없다.

간단하다.

그러한 지배구조가 대륙조선이기 때문에 각 행정부처 지방부처가 독립 나름대로 통치권을 행사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권력구조에서 서양세력들이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넘보게 되었던 것이다.

후 대륙조선이 약해지면서 중앙아시아도 그들의 목표가 되었던 사실이 이후에 나타난다.

14세기 말엽 1590년도에는 서양세력을 대표하며 예수회를 대표하던 포르투갈이 마침내 인도남부와 말라카해협을 손아귀에 넣고 대륙조선 침략의 발판으로 삼으려 수단과 방법을 찾던 시기라고 보인다.

물론 그 곳은 서양에서 찾는 진귀한 물건(향료, 금, 보석등)들이 즐비하게 산출 되는 곳이도 하다. 

대륙조선의 영향력이 덜 미치는 곳에서 일찍부터 해상무역으로 자본을 증대시킨 포르투갈은 조총이라는 신식무기를 대량으로 생산하였고 왜구무사집단정치세력에게 공급하면서 더불어 전쟁비용 및 후방지원하는 조건으로 유도하여 앞장세우고 대륙조선 침략을 진두지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왜구무사집단정치세력은 그 당시 대륙조선으로부터 따돌림 당하는 해적신분에 있었을 가능성이 많고 상당한 불만을 가진 세력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풍신수길(豊臣秀吉)이라고 보여 진다.

대신 덕천가강(德川家康)은 풍신수길과 달리 친대륙조선 노선을 택한 정치적인 인물이라고 보여지며 왜란 말미에 풍신수길의 실패를 이유로 사망(심장마비, 암살, 처단)으로 몰고간 장본인이 아닌가 한다.

풍신수길은 예수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장려했음을 알 수 있는 반면에 덕천가강은 예수회를 탄압하고 배척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대륙조선을 흠모하며 나중에 대륙조선이 봉하는 대장군 지휘에 오른다.

이것이 대륙조선이 인정하는 즉 자치권이 부여되는 막부(대장군정권)시초가 된다.

이 막부정권은 명치정권(친 서양정권)이 들어 설 때까지 대륙조선을 섬겼다고 볼 수 있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은 포르투갈이 내세운 인물일 수도 있으며 포르투갈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왜구용병들은 포르투갈 지휘를 잘 따르고 그들의 종교를 이해하며 동화하려고 애를 쓰던 인적자원이기에 당연히 전쟁에 앞장세우려 했을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말라카 해협이니 거대한 장벽으로 등장한 대륙조선을 타개할 방법으로 바로 왜구를 앞장세워 대륙조선을 치게 하였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위키자료에 보면

Toyotomi Hideyoshi led the newly unified Japan into the first invasion(1592-1593) with the professed goal of conquering Korea, the Jurchens, Ming Dynasty China and India.

풍신수길(豊臣秀吉:Hideyoshi)이 임진란을 일으키며 목표하였던 곳은 조선이 아닌 한국(반도를 의식하였다고 봄)을 먼저 치고, 여진을 치며, 명 중국(Ming Dynasty China)을 치고, 마지막으로 인도를 친다는 내용이다.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인도(India)가 왜 나올까 하는 의문이다.

풍신수길이 침공하겠다고 계획한 최종지역으로서의 인도는 그 당시에도 印度와 India 로 불렸을까 하는 의문이 동시에 든다.

혹 그렇다면 인도(India )란 칭호는 서양에서 대륙조선을 간접적으로 지칭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요즘 분석하는 과정에서 혹 india, indies 가 서양입장에서 볼 때 대륙조선이 아닌가 하는 물음이 계속 끊이질 않는다.

고려까지 corea, coree, core 등으로 불리었지만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조선이라는 구어가 생소하여 india, indies 로 받아 들렸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하고 있다.

어쨌든 근세기 기록은 일본이란 곳이 지금의 열도라고 단정하기 때문에 넘어서는 과정에서 반도는 숙명적으로 포함되어 분명 의도적으로 korea라고 표현했을 것이란 생각이지만 1590년대 당시 왜구 주체세력이 지금의 열도에 있었다는 것은 맞지 않고 오히려 아열대기후로서 지금의 수마트라, 자바지역과 싱가포르 말라카 반도 남단을 근거지로 삼았다고 보여 지는 면이 더 많이 나타난다.

때문에 인도(天竺)가 대륙조선이란 사실을 숨겼을 것이란 판단이다.

지금도 명은 명나라로 역사상식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명은 대륙조선 내에 상징성으로 존재해야 마땅하다.

다시 말해 대륙조선 최고지배자가 바로 대왕이고 황제이고 천자이며 거처하던 곳을 명이라 하였지만 이것은 동양에서 불리던 것으로 서양인들은 이것을 indi, indo, india, indies 라고 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한 제국을 포르투갈이 공격하였던 것인데 근세기 역사재편과정에서 임진왜란을 아주 단편적으로 만들어 무대를 한반도로 하여 왜구가 난의 주체인 냥 둔갑시킨 것이라고 보여 진다.

난세의 영웅 이순신을 일본 스스로가 부각한 이유도 다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순신에게 패한 일본이 이순신을 부각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않는 경우이다.

즉 임진왜란이란 사건을 들어내고 띄우겠다는 심리가 강했다고 보여진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라가 크면 불만세력은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서세가 그러한 불만세력들을 충동질하며 대륙조선을 위기 빠뜨리고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 전쟁이라고 할 때 400년이 지난 지금처럼 서세가 주도하는 세계역사구도를 원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판단되는 바다.

그러한 혼란 중심에는 분명히 근세기에 감쪽같이 사라진 대륙조선과 영국의 긴(1858~1950)식민정책영향으로 아직까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는 인도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망각할 수 없는 인도 시인 타고르가 읊은 동쪽 고요한 나라,  동방의 등불이란 은유의 시가 대륙조선이란 근세기 풀 수 없는 역사적 수수께끼와 함께 아픔이 되어 가슴을 짓누른다.[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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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르(Rabindranath Tagore1861.5.7~1941.8.7)

명문 집안에서 성장해 전통적인 인도 고유의 종교·문학에 친숙해짐과 동시에 영국문학도 배웠으며 진보적인 아버지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1877년 영국에서 약 1년 머물고 돌아온 뒤 우울과 번민 속을 헤매다가 1880년 시집 《아침의 노래(1883)》를 발표, 예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동방의 불꽃》과 《패자(敗者)의 노래》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이란 시 탄생의 진짜내용

이시는 타고르가 일본에 왔을 때 한국의 모 신문사 기자의 부탁으로 쓴 시이다.
타고르는 인도의 시성이다 .

그는 역사 학자며 초창기 부터 전해 내려오는 흰두교 경전 베다 연구의 거목이며, 철학자며,  교육자며, 정치가며, 외교가였다.

 

그가 베다(veda 인도最古의 聖典)를 연구 하다가 발견 한 아리안족(Aryan)의 인도 진입 과정을 읽게 된다. 아라랏 고개를 넘어 검은 바다를 지나 우랄산맥을 넘어 타림분지를 지나 흰두쿠시산맥을 넘어 인더스(indus)평원인 샤프타 신드후(Shapta Sindhu)지방에 정착하였아리안족의 행적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함께 길 떠난 무리의 주류를 추적하게 된것이다. 처음에는 일본이라 생각 했는데 한국의 단군신화를 접하고 베다의 나타난 단군의 나라와의 수많은 교류와 그들의 가르침을 발견하고 그게 우리나라라는 사실을 일본에 오기 전에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참으로 힘 없고 인구도 얼마 안 되고 한 우리나라를 창조주가 계획한 숨겨논 앞날을 바라보고 우리나라를 그토록 극찬 할수  있었다 한다.

(타고르의 자서전에서 발췌)

아리랑 고개, 아라랏 고개, 아라랏(Ararat)산 http://blog.daum.net/han0114/17049876 

 

(1)동방의 등불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하여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은 곳

무한히 퍼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The Lamp of the East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 - 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Where the mind is without fear and the head is held high ;

Where knowledge is free ;

Where the world has not been broken up into fragments by narrow domestic walls ; Where words come out from the depth of truth ;

Where tireless striving stretches its arms towards perfection ;

Where the clear stream of reason has not lost its way into the dreary desert sand of dead habit ;

Where the mind is led forward by thee into ever-widening thought and action- Into that heaven of freedom, my Father, let my country awake.

 

(2)패자(敗者)의 노래


퇴각의 길목 지키며 패자의 노래 부르라

선생이 내게 요청하니

패자란 남몰래 선생이 사랑하는 약혼자이기에

어둔 빛 너울을 그녀가 쓰고 여느 사람에게 얼굴을 가리나

가슴 깊이 어둠속에 빛나는 보배를 간직했네.

그녀는 밝은 햇빛에 버림받아 밤에는 번쩍이는 눈물 흘리며

이슬 젖은 꽃, 손에 들고 바라고 있네.

신에게 광명을 갖다 주길 말없이 눈을 내리감은 채

바람과 함께 불평소리 나도는 그의 집을 그녀는 뒤로 했네.

그러나 별들이 고욕을 나타내는 사랑스런 얼굴을 가진

그녀의 영원한 사랑의 노래에 힘을 돋구지.

고독의 방문 열렸네, 부름이 왔어.

그대 가슴을 두근거리네. 어둠 가운데, 뜻있는 시각의 불안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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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부흥기

 

대항해시대와 식민지제국:15세기 초 포르투갈의 왕자 엔리케는 상업적 이익을 찾아서 북아프리카의 세우타를 점령하고, 또 대서양의 탐험을 장려하여 카나리아제도를 비롯한 대서양의 여러 섬을 발견하였고, 15세기 중엽에는 적도 근처의 아프리카 서안에 도달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에스파냐도 해외탐험에 나섰다. 이사벨라 여왕의 원조를 받은 C. 콜럼버스는 1492년 서인도제도를 발견하였다. 이 일련의 탐험을 유럽역사학에서는 <지리상의 발견>이라고 한다. 에스파냐는 포르투갈과 경합, <신대륙> 아메리카에 광대한 영토를 획득한 뒤, 무역을 왕의 통제 아래 두고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에스파냐·포르투갈의 식민지경영은 항해·탐험을 추진한 <콘키스타도레스(정복자)>에게 보상으로서 획득지의 전권을 맡기는 봉건적인 것이었으며, 원주민(인디오)에 대한 학대와 수탈은 가혹한 것이었다. 특히 금·은을 채굴하는 광산업은 막대한 이익을 낳았으며, 금·은의 유입은 이른바 가격혁명을 일으켰다. 이사벨라와 페르난도의 손자인 카를로스 1세는 합스부르크가(家)의 혈통을 이어 신성로마황제(카를 5세)가 되었고, 16세기 전반의 40년 동안 에스파냐와 식민지 외에도 네덜란드·부르고뉴 등의 영토를 지배하여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과시하였다. 카를로스 1세는 코무네로스의 난을 진압하여 에스파냐에 절대주의체제를 수립하고 모직물공업 등의 경제발전을 추진하였다.

 

황금의 세기:16세기 중엽부터 17세기 후반까지를 <황금의 세기>라고 한다. 전성기는 16세기 후반의 펠리페 2세 시대였다.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왕의 후계자 계승 문제에 개입하여 포르투갈 왕위를 계승하고, 1640년까지 에스파냐왕이 포르투갈을 병합하여 포르투갈왕이라 칭하였다. 펠리페 2세는 1571년 레판토해전에서 오스만투르크를 격파했으나, 이것은 동시에 에스파냐 몰락의 시초이기도 하였다. 전근대성이 강한 에스파냐의 산업은, 새로이 발전하고 있던 영국·네덜란드의 근대적인 산업에 압도되기 시작하였다. 유럽의 종교개혁에 대하여 에스파냐는 반(反)종교개혁의 본산이 되어 종교재판과 유대인·무어인에 대한 박해를 추진하였다. 이러한 박해의 결과 경제적 기반이 크게 흔들렸고 노동력은 격감하였다. 게다가 에스파냐의 지배에 반대하여 네덜란드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 79년에는 네덜란드의 7주가 사실상 독립하였다. 88년에는 네덜란드의 독립을 지지하는 영국과 도버해협에서 해전을 벌였는데,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대패하여 제해권을 영국에 넘겨주었다. 이것이 에스파냐의 쇠퇴를 암시하는 사건이 되었다. 따라서 <황금의 세기>는 에스파냐제국이 몰락하고 사회가 쇠퇴하는 과정이 되었지만 문화사적으로는 연극·문학·회화 등의 화려한 융성기였다. M. 세르반테스, 로페데 베가, 엘 그레코 등이 유명하다.

 

임진왜란 당시 포르투갈의 실질적인 지배는 스페인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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