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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선통신 역사로 본 뉴욕과 경성

한부울 2015. 7. 8.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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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선통신 역사로 본 뉴욕과 경성

 

글쓴이:한부울

 

런던과 오사카

 

통신(通信:communication)에 대한 설명을 백과사전에 찾아보면 인간의 의사·지식·감정 또는 각종 자료를 포함한 정보를 공간적 격지(隔地)사이에서 주고받는 작용이나 작위(作爲) 또는 그 현상을 말한다고 되어 있다.
통신에는 유선통신과 무선통신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유선통신의 역사는 송·수신 양자가 전선으로 연결되면서 그것에 의하여 신호가 매개되는 전기에 의한 통신으로 1837년 매사추세츠 주(Massachusetts)출신 새뮤얼 핀리 브리즈 모스(Samuel Finley Breese Morse,1791-1872)에 의하여 전신기(電信機:telegraph)가 발명되면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진다.
그리고 마침내 1866년에 대서양 횡단 해저케이블이 완성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글쓴이의 생각은 다르다.

장거리 해저 중계 방식으로는 37㎞ 또는 44㎞마다 해저 중계기를 사용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있는데 이것은 당시 조건상황상 이러한 중계기설치문제가 있어 대양횡단 케이블도 역사기록으로만 존재한 것으로 실제 대서양을 횡단하여 케이블을 설치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비로소 대서양해저케이블이 완성된 것은 1956년에 미국과 영국 간을 잇는 대서양 횡단 제1케이블(TAT-1)의 부설로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1876년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과학자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1847-1922)에 의하여 먼 거리란 텔레(tele)와 목소리를 뜻하는 폰(phone)의 조합어로 전화기(電話機:telephone)가 발명되었고 일반가입자를 대상으로 하는 전화교환업무가 비교적 근거리 범위 내에서 바로 실용화되었으며 이어 마침내 3극진공관이 발명되면서 이것을 이용하여 전화간선에 삽입하여 음성신호를 증폭할 수 있는 중계기(中繼器)가 만들어져 원거리의 통화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이 전선은 북아메리카대륙 철도건설과 맞물려 이어지면서 1915년 1월 25일에는 동부 미국 뉴욕과 서부극단 샌프란시스코를 잇는 4,700km의 대륙횡단 전화회선이 개통되었다고 하였다.
 
무선통신의 역사는 어떨까?
무선통신에서 절대적인 공헌자를 꼽으라면 당연히 이태리계 영국인 굴리엘모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1874-1937)라 할 수 있다.
1894년부터 마르코니는 볼로냐 근처의 가족 사유지에서 96%의 니켈과 4%의 은가루를 진공 속에서 밀봉한 것을 사용하여 변조된 전파로부터 본디의 신호를 끌어내는 장치 검파기(檢波器:detector)를 만들었고 전파를 더욱 멀리 보내기 위하여 접지된 양극을 이어 전류를 통하게 하는 쇠붙이 공중도선(導線:conductor)을 설치 일차성공하였고 이를 특허를 받았다.
1895년 6월 7일에는 헤르츠파(波)의 응용에 착안 집에서 무선전신 실험을 시작했고 마침내 성공했고
1897년 8월에 마르코니는 세계 최초의 무선전신회사인 무선전신신호회사(Wireless Telegraph and Signal Company)를 설립하였다.
1898년에 프랑스 정부의 위촉으로 도버 해협에서 50km 거리의 송신에 성공하여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무선전신시대를 열었다 하였고,
마르코니는 사업을 더욱 확장하여 1899년에는 미국 마르코니 회사를, 1900년에는 마르코니국제해상통신회사를 설립하였다.

1900년에는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해군의 군함에 무선전신시설을 설치하여 121km 거리에서 소식을 교환할 수 있게 하였던 것 같다.
1901년 12월 12일 마르코니는 1600 마일(2,575km) 떨어진 영국 잉글랜드 서남부 콘월 주(Cornwall)의 폴듀(fall due)에서 캐나다 뉴펀들랜드(Newfoundland) 세인트존스(Saint John's)사이를 무선으로 잇는 무선모스통신을 역사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마르코니는 같은 해 단일 안테나에 의한 동조식(同調式) 및 다중전선동조(多重電信同調) 방식, 다음해 자기검파기(磁器檢波器), 1905년 수평지향성(水平指向性) 안테나 등을 발명하고 그 후 그의 회사에 존 앰브로즈 플레밍(John Ambrose Fleming,1849-1945)등 많은 과학자들을 고문으로 맞아들여 통신거리의 연장, 동조의 개선, 공전(空電)·혼신(混信)의 제거 등 무선통신의 기술적 향상에 전력을 기울여 이후 무선통신은 실용화가 되었고 1907년에는 유럽과 미국 간의 통신사업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1907년 미국의 대조선인이라고 판단되는 리 디포리스트(Lee de Forest)에 의해 양음극 사이에 격자극을 삽입한 삼극진공관(三極眞空管)발명이 이어졌고 이것이 반도체소자(半導體素子:semiconductor device)로서 1948년 개발된 트랜지스터(transistor)로 발전한 것이다.

여러 과학자들이 앞을 다투어 발명품을 낳았고 무선통신에 이어 라디오방송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으며 여러 나라에서 경쟁적으로 시험방송을 실시하던 중 1920년 11월 2일 미국(米國)피츠버그에서 "KDKA" 방송국이 처음 개국하게 된다.

방송역사도 한번 살펴보면 브리티시(British)라고 하는 영국에서는 1920년에 마르코니(Marconi)무선회사에 의해서 실험방송이 행하여졌으나 1922년 11월에 가서야 영국 공영방송사 영국방송협회(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가 설립되면서 최초의 뉴스 프로그램 방송을 개시하였으며 11월 14일에 런던(Lodon-2LO), 15일에 버밍엄(Birmingham-5IT), 맨체스터(Manchester)-2ZY)에서 차례로 개국하게 된다.
1921년에는 프랑스(France)국영라디오 방송이 실시되고 1922년 8월 16에 다시 미국 AT&T 자회사인 웨스턴전기의 뉴욕의 방송국(WEAF)이 설립이 되어 최초의 상업광고가 시작되었으며 1922년 9월에 러시아가 최초의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23년에는 독일(獨逸)에서 라디오 방송이 실시되었고 같은 해 뉴욕(New York)과 보스턴(Boston)을 연결하여 동시방송이 실시되었다고 한다.
1924년 11월 29일에 영국BBC 를 모방하여 사단법인 도쿄 방송국을 설립하고 1925년 7월 12일에 도쿄 방송국, 도쿄시 시바구(芝區:현재의 도쿄 도 미나토 구 일부분)에서 중파방송의 본방송 개시하여 오늘날 이것이 "NHK"라 하는 것이고 이어 오사카(大阪), 나고야(名古屋)가 그 뒤를 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같은 시기인 1925년 7월 27일 영국에서는 각 지역 라디오방송국의 전국방송을 위한 라디오 채널 "BBC National Programme"의 방송 시작하였으며 1925년부터 방송을 내 보낸 것을 시작으로 1927년 1월에 다시 국왕의 특허장(Royal Charter)에 근거하는 공공방송 영국방송협회(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가 새롭게 조직된다.
이것은 역시 1926년에 설립되었다고 하는 일본방송협회(日本放送協會:Japan Broadcasting Corporation)와 다르지 않다.
1926년에 뉴욕방송국(WEAF)은 "NBC(National Broadcasting Company)"로 진화하였고 "CBS(Columbia Broadcasting System)"도 1927년도부터 시작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무선 방송을 시작했다고 하던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은 1926년 11월 30일 설립허가되면서 12월 9일에 방송용 사설 무선전화시설이 허가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전체적으로 경성방송국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 아닌 것으로 나타나는데 문제는 위치가 뉴욕이 아니라 한반도라는 점이다.

생각해보라.

어떻게 무선이 겨우 시동된 상태에서 본격적으로 뉴욕을 중심으로 일어난 방송개국여파가 수만일 떨어진 한반도와 열도에 밀어닥쳤다고 괴변을 말할 수 있는가?

솔직히 일본은 방송국전체를 스스로 영국을 모방했다고 하지만 영국방송협회(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와 일본방송협회(日本放送協會:Japan Broadcasting Corporation)는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日英直通

1924124일 동아일보 기사

조선총독부체신국에서 조선에 무선전화를 실시할 계획이 있어서 모든 것은 준비하는 중이더니 근대 그 준비가 거의 끝나서 일전에 소규모로 실험까지 하였다 한다. 이 무선전화는 명년부터 우리도 실용하게 될 것이라 한번 상식적으로 설명하랴는데 전화설명은 명일로 밀으로 금일에는 우선 전신부터 설명하려한다.

 

무선전신은 격리(隔離)한 양자간에 전선없이 전신(電信)을 통함이니 전에 도전식(導電式)이니 유전식(誘電式)이니 칭하는 것이 있었으나 실용에 적당치 못하였고 말코니(Marconi)가 전파식(電波式)을 발명한 뒤에 비로서 세계에 보급하게 된 것이니 말코니는 이태리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미를 가진 이태리 사람으로 전파를 응용하여 통신기를 창작하려고 노력한 결과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그가 뉴펀들랜드(Newfoundland)에서 대서양횔단실험에 좋은 성적을 얻었을 때 그의 명성은 벌써 세계적이 되었었다.

전파는 무엇인가?

대개 전기에 음양이종(陰陽二種)이어서 동종(同種)은 서로 배척하고 이종(異種)은 서로 견인하며 이종이 서로 견인함으로서 이종전(異種電)을 선()으로 연결하여 전류를 얻을 수 있고 전류가 양자간에 평균을 얻기까지 계속함으로서 그 평균이 되지 못하는 차()를 전압이라 칭하니 이는 다 보통 하는 사실이다.

독일 물리학자 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Heinrich Rudolf Hertz:1857-1894)가 전기진동을 연구하여 전파가 발생함을 증명하였으니 전파는 그 성질이 공기의 파동과 흡사한 것인데 그 속력이 광파의 속력과 같아서 일초간에 186,000(:mile)를 진행한다고 한다.

이 전파를 전하는 것은 빛의 파동 에테르(aether)이니 이 에테르의 성질을 구명한 것은 영국 물리학자 올리버 조지프 로지(Oliver Joseph Lodge:1851-1940)의 힘이다.

무선전신의 발신기, 수신기는 제도가 복잡하나 구경발신기(究竟發信機)는 인위적으로 방전하는 기계요, 수신기는 발신기에서 발생한 전파가 감응하는 기계이다.

전신부호는 장단이음(長短二音)을 종종배합한 것이니 이라 함은 단음(短音)이요, “라함은 장음(長音)이다.

예로 숫자를 부호로 보이면 아래와 같다.

1*****6****2****7****3****8****4****9****5****0*****.

무전발신기로 잠깐 방전하면 전파가 적게 일어나서 이되고 오래 방전하면 전파가 많이 일어나서 가 되는 것이다.

무전을 만국공동부호가 있어서 일반통신에 사용하고 군용은 비밀이라 각각 암호를 사용한다.

 

무선전신이 발명된 뒤에 첫째 항해의 위험이 적어 졌고 또 그 외에도 여러가지로 이용되어 편의함이 적지 아니하다.

무선전신의 전달되는 범위는 일정하지 못하니 전파의 강약관계는 물론이요, 지면과 계절과 방위의 관계도 적지 아니하고 더욱이 일광관계로 주야의 차이가 커서 밤이 낮보다 3배에서 5배 멀리 들리는데 대개로 말하면 그 거리는 약 2,000(:mile)라고 한다.

미국중앙무선전신국에는 유선으로 전달된 전문이 자동적으로 전파가 되어 사방에 전달하게 되어 무선유선이 교묘하게 연락된다고 한다.[동아일보]

 

1920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신문발행을 허가된 언론으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을 선정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들 언론은 지극히 친일적인 모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두 신문사는 거의가 뉴욕을 중심으로 하는 뉴스를 그대로 옮겨 받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황색언론이라고 이름지울 수밖에 없다.

위 보도는 삼극진공관(三極眞空管)발명이 되면서 무선통신이 본격적으로 사업화되던 시기임을 알 수 있는데 1924124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조선총독부체신국에서 조선(朝鮮)에 무선전화를 실시할 계획에서 소규모로 실험까지 하였고 이 무선전화는 내년 1925년부터 실용하게 될 것이라는 이상한 보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한반도라고 하는 사람들은 제발 없길 바란다.

무선통신전화를 1925년부터 대한제국(大韓帝國)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더욱 놀라눈 것은 위 표는 1927년 세계사연대표임을 알 수 있다.

1927년 5월 1일 경성에서 오사카 간 정식으로 무선통신이 개통되었다는 이야기다.

재론하지만 절대로 한반도 경성이니 열도 오사카이니 따위를 생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문제는 January 7 -The first transatlantic telephone call is made via radio from New York City to London. 의 짧은 영문 기록이 우릴 경악케 한다는 사실이다.

1927년 1월 7일 뉴욕(New York)에서 런던(Lodon)간 무선전화가 개통된 것을 생각해보면 1924년 늦은 시기에 무선통신실험하였고 1925년 실행될 수 있는 것에서 볼 때 한반도 조선에서 이러한 계획이 얼마나 앞선 것인가를 알 수가 있다.

낙후되었다고 하는 아시아대륙 그것도 일제식민지상태에서 침탈의 의한 가난이 찌든 한반도 사정에서 일반 조선인들도 무선통신 해택에 동참할 수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인가?

이 당시의 무선통신의 반경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를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이야기가 들어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7년 5월 1일 경성(京城)에서 오사카(大阪)간 정식으로 무선통신 개통이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1927년 1월 7일, 4개월 차이밖에 나지 않는 거의 같은 시기에 앞서 뉴욕에서 런던사이에 무선통화가 개통된 사실을 동일하게 보지 않을 수 없다는 놀라운 이야기다.

즉 경성은 뉴욕이며 오사카는 런던이란 공식이 성립된다.

 

위 1927년 세계사연대표에서 알 수 있는 놀라운 사실은 이것 뿐만아니라 일본군 제1차 산동출병이라는 사건에서 미국해병대가 출병되었다는 사실과 같고 이것은 곧 미국이 일본처럼 동양역사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

 

산동출병은 일본이 아니라 미국해병대이다.

United States Marines from the 4th Marine Regiment in Shanghai China (1927-1941).
중국 상하이(1927-1941)때 미국 해병대, 제4해병연대
The United States, sent troops to protect American citizens and American property in the Shanghai International Settlement during the Chinese Civil War and the Second Sino-Japanese War. These troops, along with other foreign troops were allowed under the treaties the Chinese government had been forced to sign with many Western nations.
미국은 중국의 국공내전 즉 남북전쟁(Chinese Civil War)과 중일전쟁(Second Sino-Japanese War)중에 미국 시민 및 상하이 국제정착에 대한 미국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이 부대는, 다른 외국 부대와 함께 중국 정부에게 많은 서방 국가와 함께 조약에 서명을 강요하였다.

미국의 남북전쟁도 따져보면 내전이라고 풀이 할 수가 있다.

 

 

                                        [1927 뉴욕-런던 간 무선전화 개통(1927.1.7)]

 

그것은 곧 동양역사가 서양사에 들러리 역할을 충실히 했다는 것이다.

서양의 존재하지도 않았던 미국이 일본이 되고 브리티시가 잉글랜드가 되었다가 영국되는 것 같지만 결국 동양사에서는 일본이 되며 네덜란드가 역시 동양사에서 일본이 되는 식으로 나타난다.

중국산동출병한 것은 일본이 아니라 미국 해병대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일영직통무선개시

동아일보 1929813일 기사뉴스

명고옥발[名古屋發] 나고야(名古屋)무선전신국(無線電信局)에서는 예정대로 십일(十日)부터 일영간(日英間)직통(直通)무선전신사무의 취급을 개시하였다.

영국(英國)으로의 수신(受信)은 금후(今後) 오후팔시(午後八時)부터 익조팔시(翌朝八時)까지 계속적으로 취급하고 근()히 십이분여(十二分餘)로 도달한다는데 종래는 해저전신(海底電信)에 의하여 다수의 중계를 경()함으로 오륙시간(五六時間)을 요한 것이다.

 

위 사실도 1929년 8월 13일 동아일보기사인데 무선통신전화가 1927년 1월 7일 뉴욕과 런던간 개통이 되고 난 2년 후인 1929810일 나고야(名古屋)무선전신국에서 일본(日本)과 영국(英國)간 직통무선전신사무 취급을 개시하였다는 보도이다.

마르코니에 의해 단파를 사용하는 통신을 시험한 결과 1924년에는 파장이 30m(주파수 10MHz)인 단파는 낮에도 소멸되지 않아 장거리 통신에 장파만큼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 무선통신이 가능했다고 할 때 이것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간의 무선통신인 것을 감안해야 하는 것이며 1929년에 들어 유럽대륙의 영국과 동아시아대륙 일본열도 사이 무선통신이 가능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임이 백일하게 밝혀지는 이야기다.

어쨌거나 이러한 통신보도기사를 통하여 1920년대의 세계사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흡족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명명백백 현재 들어난 것은 1927년 대서양횡단무선통신이 이루어지던 도시의 이름에서 뉴욕은 경성이라는 사실과 런던이 오사카라는 사실등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기념비적인 역사찾기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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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역시 "비채마음 선생님"의 조언으로 쓰게 되었음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