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사건

런던화재와 에도화재

한부울 2020. 2. 26.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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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화재와 에도화재

 

글쓴이:한부울

 

영국 잉글랜드의 런던대화재(Great Fire of London:1666.9.2-9.6)와 열도일본의 도쿄대화재(明暦の大火:1657.3.2-3.4)가 10년간격을 두고 선후로 분리되어 나타지만 도플갱어(Doppelgenger)의 한 쌍처럼의 사건으로 눈에 비치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영국의 수도가 런던이라면 당시 일본의 수도를 에도 즉 지금의 도쿄이다.

시기가 17세기 똑 같은 시대에 그것도 대화재라고 하여 수많은 피해를 발생시킨 것이 나란히 대화재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동양과 서양역사가 분리되고 동양과 서양 문화가 다른 것처럼 이식되어 있지만 사실상 같은 사건임을 명확하게 진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그러한지 알아보자.




이미 우리는 서양일본세력을 여러가지 경우를 통해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서양일본세력이라 함은 곧 서양주체세력으로 19세기전반에 걸쳐 들어나는 잉글랜드를 그것과 동일선상에서 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근세기 역사농단세력이 역사를 농단질한 키 포인트는 하나의 역사를 동양과 서양으로 분리시켜 놓았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의 사건이 분리되어 마치 동양에서 일어난 사실과 서양에서 일어난 사실이 독립적인 것처럼 만들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차적으로 약 10년간격을 두고 다른 사건처럼 나타내고 있는 것은 본 블로그를 통해 알아본 여러 예에서도 거의 10여년을 그렇게 똑 같은 간격을 두고 발생한 사건들이 하나의 사건이란 사실을 이미 밝혀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그들도 할 수 있는 짓이었다고 본다.

어찌 시간 분초까지 같을 것을 바라겠는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16세기역사때부터 일본과 잉글랜드는 매우 흡사한 면이 많다.

대표적으로 정해년(丁亥年)난리라고 하는 열도일본역사에서는 바로 오닌의 난(應仁-亂:1467-1477)이라고하며 정치적 변동 및 계속되는 내란의 시기인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쇼군(將軍)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벌인 내란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서세(西勢)의 총수라고 여겨지는 잉글랜드왕권을 놓고 랭커스터가(家)와 요크가(家)가 싸운 전쟁을 장미전쟁(薔薇戰爭:1455-1485)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시기에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어 정해년(丁亥年)난리라는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보면 곧 수차례의 장미전쟁의 일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 청교도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1599-1658,통치:1649-1658)에 의하여 찰스가 1세(Charles I,1600-1649,재위:1625-1649)가 처형당하면서부터 잉글랜드는 사실상 역사적으로 미아가 된다.

이것은 동시대에 일본역사에서도 나타나는 것처럼 공교롭게도 이때부터 에도 막부(江戶幕府) 또는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라고 하는 막부정권(1603-1868)이 시작된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수많은 다이묘들의 연쇄적인 충돌이 다반사로 존재하던 시대이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역사 미아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를 숙주로 하여 불사조처럼 재생하게 되었고 바로 1707년 연합법(Acts of Union:1707)에 의해 스코틀랜드와 합병에 의해서 국가명맥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고려와 스코틀랜드, 원과 잉글랜드 그리고 로마노프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5 "에서 스코틀랜드와 고려역사는 역사적으로 동질성을 말했고 결국 고려의 역사 전통성은 잉글랜드가 취하면서 스코틀랜드란 매개를 이용하여 놀랍게도 삼한전통성의 끄나풀을 잡고자 애를 썼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서양인들이 코리아라고 하는 명칭은 곧 고려라고 인식되는 것으로 고려건국초기에 이미 신성로마제국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밝힌바가 있다.

유럽군주전통성의 제일 머리 꼭대기는 바로 고려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고려는 그리스이다.

신라와 백제는 동서로마이다.

고스란히 삼한역사가 유럽역사로 탈바꿈한 것이 바로 핵심이다.

고려는 당시에 모든 서양인들의 정체성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현재 열도일본인들이 조선(朝鮮)만을 그들이 유별나게 폄훼하고 비하(卑下)하지만 고려(高麗)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들의 역사에서 잘 들어난다.

고려(高麗)는 일본인들에게 "카라[から]"고 하여 중국 당(唐)으로 묘사되기가 일 수 이다.

카라[から]라는 일본어는 한자로 바로 , , 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

조선 사람을 "漢人" 또는 "唐人"이라고 불리었다는 사실과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카라비토(唐人·漢人)로 불리었던 것과 조선이 제공한 문화가 거의다 중국문화라고 하면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고려, 조선은 삼한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거부할 수 없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삼한을 이끄는 것은 바로 천자이다.

천자가 거하는 곳을 중국이라 했다.

그곳에 서양인들은 해상무역의 창구가 존재하기 때문에 제일먼저 중국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본서기(日本書記)’의 기록에 카라카미한신(韓神)’이고, 결국 이 신화는 일본이 고대 한반도 도래인들에 의해 개척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삼한을 카라(から)라고 하고 통일삼한을 ""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옛부터 한당(韓唐)이라 하면서 카라(から)라 하였으며 현재의 일본 천황가에서도 신라신()소노카미(園神)’와 백제신()카라카미(韓神)’라 하면서 제사를 모시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본 블로그 글 "박견(狛犬)으로 본 사자상(獅子像)은 고려(高麗)의 상징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12 "에서 일본인이 만든 박견사전(狛犬事典:上杉千鄕著)에 실린 헤이안시대(平安時代:794-1185)의 박견(狛犬,こまいぬ)사진에서 일본에서 박()을 고려(高麗)라 한다는 사실을 일본사전에 분명히 하고 있으며 덧붙여 말하길 한반도 고대의 국명인 고구려(高句麗) 또는 고려(高麗)를 명사(名詞)로 붙인 것이고 이것은 고려(高麗)로부터 전래했지만 다른 의미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어찌보면 자기부정인 것이다.

고대 오리엔트(Orient), 인도(india)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사자(獅子)를 코끼리 ()로 대체하거나 또는 동시에 상()을 세웠고 고대 오리엔트 제국에서는, 성스러운 것, ()이나 왕위의 수호신()으로서 사자(獅子)를 이용하는 일이 성행했다고 보는데 그 좋은 예가 고대 오리엔트 신화에 나오는 괴물 스핑크스(Sphinx)라 했다.

스핑크스는 원래 동물의 왕 사자에 대한 주물(呪物)숭배(Fetishism)에서 비롯된 것으로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이나 성격이 달라졌다는 것도 일본이 본래 사자상을 박견(狛犬)으로 변형시킨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사전에서도 박견(狛犬)을 고려견(高麗犬), 당사자(唐獅子)라고도 하고 원형은 사자모형이며 인도(印度, india)에서 불상(佛像의 대좌(臺座)를 장식할 때, 더러는 사자의 의구(意區)를 썼다하고 한편 중국에서는 전한시대(前漢時代)부터 궁궐(宮闕)이나 묘실(廟室)앞에 수호신으로 석조 사자상(獅子像)을 안치한 풍습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통적으로 삼한의 풍습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에 따라 실제로 박견 즉 고려개, 사자를 문장으로 사용한 영국(잉글랜드)의 국장은 공식적으로는 지배권의 문장(Arms of Dominion)으로 알려져 있으며 문장 꼭대기 장식에서 커다란 왕관 위에 올라선 사자가 그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렇게 볼 때 고려(高麗)는 일본이나 잉글랜드에게는 전통역사주체임을 알 수 있다.



이제 두 화재를 보자.

먼저 일본화재를 보면 165732일 메이레키 대화재, 명역대화(明暦大火)라고 하고 후리소데 화재(振袖火事), 마루야마 화재(丸山火事)라고도 불리는데 일본 에도(江戸:지금의 東京都)에서 일어난 화재이다.

1590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1543-1616)는 에도를 근거지로 삼아 막부를 개창하여 첫 쇼군(재임:1603-1605)이 된가 지배하던 1603년부터 1868년까지 막부의 중심지였다.

이 화재로 에도(江戸)60-70%가 불에 탔으며 사망자는 100,000여명에 달했다고 알려진다.

에도 성()의 천수각(天守閣)을 비롯한 여러 건축물들이 소실되었고 에도 시가지가 파괴되었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상 이것들은 기록만 존재할 뿐 어디에도 이러한사실을 뒤받침할 길이 없다.

지금의 에도 즉 도쿄에 그러한 시가문화흔적을 말살시키기 좋은 것은 기록상 화재역사로 만들면 그이상 이야기 할 것이 없다.

한반도 역사에서 과거역사의 유물, 유적등을 무조건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하여 흔적자체를 지워버리는 수법이 바로 그것이다.  

이 화재가 발생할 때 고사이 천황(後西天皇,1638-1685,재위:1654-1663)이 재위했다고 하는데 이세신궁(伊勢神宮), 오사카 성(大坂城), 교토 다이리(内裏) 등의 화재와 메이레키 에도 대화재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지진, 물난리 등의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났으며, 당시 사람들은 천황의 부덕을 탓했고 천황 자신도 이를 괴로워하다 양위하였다고도 전한다.

마찬가지로 잉글랜드는 찰스1세의 아들 찰스 2세(Chalres II,1630-1685,재위:1660-1685)가 이와같은 혼란기에 집권하여 네덜란드와의 2차 전쟁과, 대역병이라고 하는 페스트전염병, 런던의 큰 화재(런던 대화재)로 시달렸다고 한 사실과 일치한다.
일본에서 발생한 메이레키 대화재(일본어: 明暦の大火)는 1657년 3월 2일(메이레키 3년 음력 1월 18일)에서 3월 4일(음력 1월 20일)까지 3일간 일본 에도(江戸)에서 일어난 화재로써 화재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하고 있는데 혼묘지(本妙寺)에서 미혼 여성이 입는 일본의 전통 예복 후리소데(振袖)를 불에 태우던 도중에 바람에 옮겨붙어 시작되었다는 설과 혼묘지에서 일어난 화재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었다는 설, 또는 에도의 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있던 에도 막부가 고의적으로 방화를 했다는 설이 그것이다.

개발계획을 하고 불을 지르는 것은 역사를 다시 쓴다는 의미가 더 크다.

이러한 이야기에서 위키자료를 보면 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는데 옛날 에도에서 17세 소녀인 우메노(梅乃)가 살고 있었고 부유한 전당포 가문의 외동딸이었던 우메노는 에도에서 열린 마츠리[]에 나서던 도중에 잘 생긴 소년의 모습에 반하게 되면서 소년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던 우메노는 부모에게 시집을 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부모의 반대로 인해 좌절했고 음력 118일에 상사병으로 인해 사망하고 만다. 우메노의 부모는 딸의 결혼에 반대한 것을 크게 후회하면서 슬픔에 빠지게 되고 며칠 뒤 에도의 큰 사찰인 혼묘지(本妙寺)에서는 우메노의 장례식이 열렸다. 일본의 장례식에서는 죽은 사람이 생전에 아끼던 옷을 관에 덮어주는 풍습이 있었고 우메노의 어머니는 우메노가 마츠리에 나서던 도중에 입었던 붉은색 후리소데를 덮어주었다. 어느 날 혼묘지에서 일하던 일꾼들이 우메노의 후리소데를 몰래 빼돌려서 시장에 팔았다. 그렇지만 3년 동안 우메노가 입었던 후리소데를 입은 3명의 소녀들이 매년 음력 118일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인해 사망하고 만다. 혼묘지에서 열린 소녀들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우메노의 후리소데를 알고 있던 일꾼들은 죄책감과 불길함에 시달리면서 이 사실을 스님에게 고백하게 되고 스님은 우메노의 부모에게 우메노의 한과 저주가 서린 후리소데를 불에 태워 없애기로 결정하였고 혼묘지의 스님은 뜰에 불을 피우는 동안에 불교의 경전을 외우면서 우메노의 후리소데를 불에 던져버린다. 그런데 불에 타고 있던 우메노의 후리소데가 예상치 못한 돌풍에 날아가면서 혼묘지의 본당의 지붕에 앉았고 우메노의 후리소데에서 시작된 불은 혼묘지의 본당과 사찰 전체를 불태웠으며 3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건조한 상태에서 강한 북풍이 불면서 불은 삽시간에 에도 전체로 확산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도쿄대화재(明暦大火:1657.3.2-3.4)라고 한다.

    

런던 대화재(Great Fire of London)166692일 새벽 2시경, 빵 공장에서 일어난 불이 런던 시내로 번진 대화재를 말한다.

당시 화재는 소방담당자의 무책임으로 인해 조기에 진화되지 않았고, 5일간 87채의 교회, 13천채의 집이 불탔다고 하였으며 당시 인구 8만 명 중 7만여 명이 집을 잃고 노숙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피해를 본 사람이 전체 인구 중 87%에 달한다.

공식 기록에는 단 3명만이 죽었다고 나와 있지만, 귀족(왕족)외의 빈민이나 일반 사람들은 전혀 국가에서 관여 또는 사망자 수를 기록하지 않았으므로, 훨씬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으로 예상한다 하였으며 이 화재로 세인트폴 대성당[Saint Paul's Cathedral]도 불타 버렸다.

이 성당만 탓겠는가.

이 런던화재지도를 보면 전 시가지에 3/2가 화재구역임을 알 수가 있다.

당시 영국 국왕인 찰스 2세는 이재민들에게 식량지급약속을 하였다.

찰스2세는 사실상 여기저기 망명생활을 하였고 런던페스트가 유행하면서 또 다시 런던 피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화재가 일어나기 1년전 1665년 부터 영국-네덜란드 전쟁(Second Anglo-Dutch War:1665-1667)이 발생했고 네덜란드는 재정을 정비하고 해군을 확장하여 무역을 진흥시켰으나, 잉글랜드는 1660년의 왕정복고 후 찰스 2세가 항해 조례를 갱신하고, 1664년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뉴네덜란드를 침공하여 뉴암스테르담을 점령하고 이를 뉴욕으로 고쳤다고 알려지며 그기에 더하여 다음 해 16653월 잉글랜드가 네덜란드에 선전포고하여 2차 전쟁이 개시되었으며 잉글랜드는 로스토프트 해전(Battle of Lowestoft)에서 네덜란드 해군을 무찔렀으나, 이후 프랑스가 네덜란드 편을 들어 참전했고 잉글랜드의 동맹국 뮌스터 공국도 참전했으나 프랑스에게 패배했다.

또한 전쟁과 별도로 같은 시기에 잉글랜드는 자연재해와 전염병 그리고 대화재가 발생하여 국가존망이 위태로웠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래도 견디었다는 것을 보면 잉글랜드란 나라가 참으로 신기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런던대역병(Great Plague of London:1665-1666)은 선페스트(Bubonic plague)로 이 병원균은 1894년에 이르러서야 밝혀진 것인데 이에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 박테리아로 밝혀졌으며, 주로 박테리아에 감염된 쥐벼룩이 사람을 물면서 전파되었던 것으로 토마스 곤블 박사(Dr Thomas Gumble)는 1665년과 1666년 동안 페스트로 인한 총 사망자 수는 약 20만 명이라고 추정했다.

페스트는 주기적으로 대규모 전염병을 일으켰으며 1603년에는 페스트로 인한 사망자가 3만 명, 1625년에는 3만 5천 명, 1636년에는 1만 명, 그 밖의 해에는 그 수가 적었지만 1650년 영국의 인구가 약 525만 명이었는데 1680년에는 약 490만 명으로 감소하였다는 것은 이와 같이 전쟁, 대화재, 그리고 대역병까지 큰 인명손실이 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특히 1665년부터 1666년 2년동안은 겹쳐발생한 재해때문에 잉글랜드는 엄청난 고난의 시대였다고 판단된다.

솔직히 이정도라면 도시국가는 거의가 피폐하면서 동시에 망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지게 서양주도세력으로 부활하고 나타난 것은 참으로 희귀하고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대화재가 발생한 곳이 일본도 수도이고 잉글랜드도 수도이다.

기록된 사건 년도만 10년정도 차이있을뿐이다.

똑같이 내전과 전쟁, 자연재해와 대화재 그리고 대역병으로 수많은 재산과 인명이 손실되는 형편에 있었고 도시, 곧 나라전체가 대 혼란이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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