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사건

코라이(高麗 CORAY)의 해상무기

한부울 2015. 10. 17.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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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라이(高麗:CORAY)의 해상무기

 

글쓴이:한부울

 

역사 편견이 가지는 문제점과 원인분석
서양인들 시각에서 출발한 코라이 해상무기 편견
거북선 덮개인가 아니면 함선 상단 층계 갑판인가?
미사일형 포탄

 

역사 편견이 가지는 문제점과 원인분석

 

여기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 편견(偏見)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한다.

역사편견은 거의 고정관념(固定觀念)과 비슷한 것으로 특히 한반도인들에게 인식되는 것은 절대적이며 이것은 식민사관에 의해 완전히 굳어진 사회적 지각 또는 인식이라 할 수밖에 없다.

요사이 보도에는 식민지기간동안 쌀을 수출한 것인가 아니면 수탈당한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미 식민지역사가 기정사실화된 상태에서는 수탈과 상반되는 답을 구하기 위해 아무리 설명과 그에 대한 논리를 펼치더라도 종국에는 수탈이 정당한 것이라고 결론날 수밖에 없는 무의미한 토론이다.

그만큼 한반도인들에게 식민사관은 믿음이고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면 식민사관이 형성된 것은 다분히 19세기말부터 생성된 것으로서 한반도에 방문한 서양인 선교사와 탐험가, 선구적지식자들에 의한 것으로 이들은 그들이 체제훼방꾼이며 음모꾼들이란 사실을 숨긴체 겉으로 개방과 개몽을 목적으로 한 것처럼 포장하고 미화하면서 수많은 여행기록물과 삽화, 그에 따른 조잡한 증거물을 바탕으로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다는 점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실제로 본 것과 다른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것은 그들도 알고 시작한 것이지만 애초부터 한반도에는 역사가 될만한 기록들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이 한반도에는 들어올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들이 실제로 움직였던 장소가 한반도가 아님에도 1945년부터 뿌려진 자료들에 의해 조작된 상태에서 지금 한반도라 인식되고 각인 된 점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선지식자들이라고 하는 검은머리 유학파 코라이들이 앞장선 것은 의심할바가 못되며 수많은 번역가들도 한 몫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뉴라이트란 무엇인가?

뜸금없지만 거쳐가는 식으로 생각해보자.

뉴라이트라는 것은 새로운 우익보수를 지칭한다고 하지만 엄밀하게 따진다면 일제를 안고가자는 것이기 때문에 한반도인들의 정서와는 절대적으로 맞지 않고 충돌할 수밖에 없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들을 친일파라 하기 이전에 기존 역사사실을 어느정도 알기 때문이란 생각에 미치며 그들도 식민사관 자체가 싫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일제를 열도일본으로 알고 있는 한 그들은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한반도역사를 잉태하게 한 일제(日帝)란 실체에 대한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그들이 갈 곳은 어설프게도 한반도와 가까운 일본이며 열도일본인들이라는 것이 실로 안타까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잘못된 주장은 주도가 누가 되었던 간에 올바른 역사관아래 신중해야 하는 것이며 식민역사탈피가 아니라 오히려 한반도인들에게 모멸감과 자괴감에 빠지게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솔직히 벗어던질 수만 있다면 식민지역사를 벗어던지고 식민지역사를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는 새로운역사, 새로운국가체제 아래에서 나 자신뿐만아니라 미래자식과 자손들이 구김살없이 자랑스러운 코리아인으로 살아가게 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DNA처럼 남아 있는 식민사관이 싫고 온갖 피해의식과 자학이 난무하는 한반도사관은 정말 싫은 것이다.

 

선지식자들에게 서양인들이 기록한 사실을 무조건 믿어야 하는가 묻고 싶다.

그것은 턱도 없는 망발이다.

그들이 15세기부터 해양세력들이라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해적이다.

해적들에게 무슨 역사가 존재하였겠는가.

그러나 그들에게 엄연히 역사가 있고 그것을 서양역사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월주의 빠진 유럽사라고 한다.

바탕이 해적이니 역사까지 도적질 하였다고 의심치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인도양에서 설치고 있는 아프리카 소말리아해적들을 인간취급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유럽인들이다.

역지사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닌가?

 

사실 따지고 보면 본래 서양인들이 남긴 코리아에 대한 기록들을 원망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 생각도 있다.

문제는 그 기록들을 악용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서세라 함은 15세기부터 해양세력 또는 해적을 신분으로 하는 근본이 없는 세력들로서 18세기 자본을 등에 업고 기존 체제를 무너뜨리며 신흥자본주의 세력들로서 근세기에 자본주의제국을 만든 세력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하나의 역사, 하나의 체제에서 존재한 꼬레아에 대한 진실된 기록이라 할지라도 체제무너뜨리기에 나선 서세가 이를 여러 언어로 번역하면서 분리하였고 목적에 맞게 편집한 사실과 그렇게 편집된 것들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번역자들의 올바른 역사관의 결여를 악용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반도에 서양인들이 남겼다는 모든 번역본들은 한마디로 다 쓰레기라고 하여도 모자라지 않는다.

진실된 역사사실과 바른 역사를 바탕으로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번역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역사사실을 조작하고 왜곡하거나 날조하여 위치와 장소를 숨기거나 속이고 그것을 기록이란 핑계로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하는 모든 행위에 대한 것을 부정해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근세기에 서양인들이 남긴 모든 기록들은 이러한 문제 중심에 있다는 사실이다.

설령 원기록자가 정확한 기록을 남겼더라도 서세의 의해 변질되었을 수 있는 소지가 많고 이어 다시 동아시아 특히 한반도의 식민지사관에 몰입된 어설픈 번역자들에 의해 변질이 더 심해지면서 막상 우리가 그 기록을 알게 될 때는 본래 기록과는 완전히 단판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야기다.

 

한반도 번역자 특히 역사관계 기록을 번역한 지식자들은 이에 반성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들이 역사의 큰 문제점을 간과하거나 방관한 사이에 한반도 역사는 그들에 의해 축소되고 왜곡되었으며 사실과 다르게 나타나 한반도 구성원들에게 피해를 주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들에 의해 기정사실화된 한반도 역사의 결과에 대해 책임없다 할 수 없다.

본 블로그의 일관된 주장에서 바라볼 때도 19세기말엽 조선(朝鮮)이라는 거대한 하나의 체제가 서세의 자본력(금융노름)에 의해 무너지면서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오리엔트문화를 장악한 서양인들은 역사가 없는 열등한 자신들에게 우월한 역사가 필요했고 오리엔탈문화를 파괴함과 동시에 역사바꿔치기가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오리엔탈문화가 존재하던 빈 공간에는 동양문화의 전통성 대신 서양우월주의에 따른 기독교를 세우고 그들이 선점한 정보와 지식을 조작하여 끼워넣기하면서 그들의 서양문화(西儒:Western Confucianism)를 창조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西儒:Western Confucianism-중국이름으로 활동한 예수회선교사들 이탈리아출신 마테오리치(利瑪竇, Matteo Ricci:1552-1610), 독일출신 요한 아담 샬 폰 벨(湯若望,Adam Schall von Bell:1592-1666), 벨기에출신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南懷仁:Ferdinand Verbiest:1623-1688)

孔子說君子周而不比小人比而不周"The superior man is catholic and not partisan. The mean man is partisan and not catholic."
위 그림에 보면 스코틀랜드 출신 옥스퍼드대학(1876-1897)중국어교수를 지낸 제임스레게(理雅各,James Legge:1815-1897)에 의해 번역된 논어(論語)중 한문장으로 "군자는 두루 친하며 패거리를 짓지 않고 소인은 패거리를 지으나 두루 친하지 않다."하였지만 그들은 패거리를 만들어 그들만의 서양문화를 만든 것은 이율배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수회 선교사 이탈리아출신 마테오리치(利瑪竇, Matteo Ricci:1552-1610)는 중국철학(儒學)을 유럽에 소개하기 위해 라틴어로 유교 고전을 번역했다고 알려지는 사람인데 본 블로그 글"악라사관기(鄂羅斯館記)로 본 대한제국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4"에서 심전고(心田稿) 제2권 악라사관기(鄂羅斯館記)에 기록된 것에서 악라사관 정문에 세워진 예수상을 악라태자(鄂羅太子)라 하고 별도이름이 이마두(利瑪竇)라 한 사실과 악라태자가 중국(中國)에서 피살되었다고 한 것은 이시기에 중국에서 활동했다고 하는 이태리 출신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1552-1610)의 중국식 이름이 이마두라는 사실과 일치하는 것도 사실 날조가 어느정도 심했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문제이다.

예수회가 어떤 식으로 이를 조작하고 엉뚱하게 이끌고 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던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할 때 서양문화가 동양문화로부터 기인했다는 사실은 일단 분명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을 또 다른 관점으로 풀어 볼 때 악라사가 점령하였던 유럽임을 감안하고 유럽대륙에 악라사계 예수회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점도 감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쨌던 근세기 역사는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서세는 20세기 초엽에 거대하게 축적된 유대자본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전세계인을 상대로 서양인우월주의에 의한 서유(西儒:Western Confucianism)홍보에 나섰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서유(西儒:Western Confucianism)를 장착한 카톨릭 예수회는 적어도 동양문화를 기반으로 완성된 것이다.

이에 더하여 미국유대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범기독교 신자들의 공격적인 선교활동은 코리아를 무차별적으로 개방과 개몽이란 명목으로 체제흔들기에 나섰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때가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에 이은 갑신정변(甲申政變)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코리아에는 유학 열풍에 휩싸이고 모두 북아메리카대륙으로 마구 떠난다.

실제로 한반도에서 북아메리카대륙으로 떠난 유학자들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본 블로그 글 "유학파와 한반도(2)-이승만박사의 이상한 행적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9" 소제 '다)유학파들의 역사탈출'에서 충분하게 알아보았듯이 각나라에 맞춰 현지출신 유학파들을 포진시켜 100년을 내다보고 미래 교육프로그램을 제작완성시키면서 명실상부 서양유교는 세계문화가 되어버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이렇듯 서양유교에 의한 교육에 파묻혔던 아시아계 번역자들은 기존 역사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렸을 것이고 이들에 의해 양질이던 아니던 각종 번역서가 양산되었으며 그것에 따른 논문, 학술서가 줄줄이 이어지면서 사제관계의 특수성과 연결되면서까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형태를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던 점을 생각할 때 그 여파가 세계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인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러한 서세우월주의 학문들이 서양역사와 함께 세계곳곳에 안착하고 현재에 이른 것이다.

이를 어떻게 막을 수가 있었겠는가?

제3세력의 비판과 검증이 없이 만들어진 서세역사는 얼마나 왜곡된 방향으로 결과물이 나타날 것인지를 충분하게 인지할 수 있는 문제이다.

 

이러한 부합리한 상태에서 한반도역사가 자연스럽게 완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열도일본인들도 한반도 역사신세와 처지가 다르지 않는다.

열도일본사가 만들어지는 것도 서양역사를 배제하고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

다만 한반도역사와 처지가 다른 것은 서세들에게 특별대우를 받게되었다는 것인데 코리아 즉 삼한역사를 망쳐놓은 장본인이 서세가 아니라 열도일본인이 되겠금 하였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이것은 매우 난해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이러한 구도가 거의 확실한 것이다.

서양사입장에서 동양문화권에 반드시 일제가 존재해야 했기 때문에 한반도와 가까운 열도에 일제(日帝)를 만들 수밖에 없었고 열도일본인들에게 일제에 대한 모든 권한과 그들이 자행한 오역들을 물려주고 스스로가 교묘하게 빠진 것이다.

현재 한반도 구성원들의 국명이 대한민국이면서도 왜 대한제국의 법통을 유지할 수 없었을까?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세력들이 전부 서양문화와 서양철학을 익힌 지식자들이란 점을 우리는 무시할 수가 없다.

이것이 진실된 역사에서 어떤 국가체제로 나타난 것인지에 대한 답을 지속적으로 구할 밖에 없다.

대한제국은 어떠한 경우라도 그냥 사라질 수밖에 없는 처지의 역사로 존재하게 만든 것이다.

그것은 열도일본이 일제가 되는 상황과 맞물려 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기존사관에 의한 편견을 따진다고 하니 혹자들은 지금까지 인류가 겪었던 역사현상에 대하여 그것에 적합하지 않은 의견이나 견해를 가지는 태도라고 나무라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반도 역사는 애초부터 식민사관이란 틀에 의해 처음부터 조작되어 만들어졌다는 확고한 판단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검증과 비판이 필요치 않다는 것은 한쪽으로 치우친 판단이나 의견이 지배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것이 과연 잘못된 역사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미 역사가 날조되어 조작된 상황에서 편견과 고정관념에 따른 것이 굳어진 역사상식이라면 공정(公正)한가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 자체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며 의심스럽다는 것은 다분히 역사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판단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잘못된 상식에 지배받고 있다는 것이며 한반도 구성원으로 매우 불행한 이야기다.

역사상식이 적어도 정당하고 정확해야 함은 물론이고 이제는 동서양 공평하고 올바르다는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확실한 검증과 비판이 따라야 하는 것이며 이에 글로벌화된 각나라에서 사회적인식이 기존상식에서 탈피하여 유연성을 가지고 이러한 어려운 문제를 관찰 할 수 있는 대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뜻만 그렇지 실제상황은 비관적이고 요원할 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완전히 돌처럼 굳어진 한반도식민사관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포기할 수 없는 것이기에 오늘도 이러한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한가지 파헤쳐보고 있다.

 

서양인들 시각에서 출발한 코라이 해상무기 편견

 

그것에 한 예가 바로 근세기 문제가 되고 있는 거북선실체와 그에 따른 무기상황을 과연 우리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세계사의 모든 사실을 종합할 때 분명코 오리엔탈문화가 우위에 있었다.

사실상 유럽사 또는 서양사라는 것은 근세기 프랑스혁명에 의한 부르조아(bourgeois)준동을 깃점으로 나타난 서양인을 전제로 한 것으로 세계사적으로 볼 때 지극히 차별적인 서양우월주의 결과물에 불과할 뿐이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분명코 오리엔탈문화가 시초이고 주체라고 볼 수 있지만 특히 동아시아대륙사를 보면 오리엔탈문화전체를 서양역사에 편입시켜 서양역사가 되게 한 사실과 서양역사를 끊임없이 추종하는 부차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중국역사가 그렇고 한반도역사가 그러하며 또한 일본역사가 그렇다.

서양인들은 선교사, 탐험가, 과학자, 지도제작자란 이름으로 근세기 전반에 걸쳐 지배하였고 그들의 역할은 대단한 것으로 나타나 마치 동양사가 사라진 것처럼 만든 것이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동양인은 세계사에서 솔직히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엑스트라역에 불과하고 영향력도 미미할 정도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이것은 동아시아대륙사라 할지라도 반드시 서양인들에 의해 주도된 역사이어야 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때문에 근대사뿐만아니라 세계사는 서양우월주의에 의한 역사라는 것이다.

근세기에 한반도 역사가 존재하는 바탕에는 서양인들이 남긴 기록이 한 몫했다는 것을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만큼 동양인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유독 서양인들의 기록들을 중하게 여겼던 이유가 궁금하다.

사실판단을 서양인의 기록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도 솔직히 불만이다.

서양인들이 남긴 기록들이 과연 부정없는 사실이고 동양인의 기록보다 더 정확한가에 대한 물음은 근원적으로 풀 수 없는 문제지만 특히 해양세력이라고 하던 그들의 15세기부터의 신분은 해적이다.

해적신분을 가졌던 그들의 활동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어찌 나 뿐만이겠는가.

현재 아프리카 소말리아해적들과 같은 신분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상식들이 엉뚱하게 전달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엇때문에 해적신분이었던 15세기에서 적어도 18세기까지의 그들의 기록을 우리가 신뢰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문제는 어쨌거나 실체도 분명치 않는 서양인들의 기록들이 오늘날 특별한 검증도 없이 난무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서양인들의 기록을 언어해독이 가능한 기존 한반도사관을 전제한 한반도인들이 경쟁적으로 번역했다는 사실이다.

이렇다면 검증과 비판에 자유로워야 할 역사가 공정하다고 할 수가 없다.

글쓴이의 생각이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조금만이라도 바르게 역사를 알았더라면 참으로 좋은 번역작품들이 많이 나타났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어릴때부터 서양교육을 받고 서양인들의 종교를 바탕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존 역사를 볼 때 서양위주의 편견이 앞 설 수밖에 없고 그것에 대한 비판력이 떨어질 것이 틀림없다.

때문에 기존 번역 서적의 내용에서 전부를 말할 수 없겠지만 이러한 역사오류들은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을 하게 하는 것이다.

 

아래 세 개의 문장을 게시하는 것은 2011년 이사벨 여왕 훈장, 2010년 카를로스 3세 십자훈장을 수여받고 스페인 한림원 종신회원이기도 한 박철(朴哲)교수의 저서“16세기 서구인이 본 꼬라이(CORAY)원제:그레고리오··세스뻬데스(Gregorio de Céspedes)”글을 참고로 빌어온 것이다.

이 책에서 번역자의 글을 전부인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을 인용하면 저자에게 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적인 판단을 위해 순수한 번역문장만 가지고 몇가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살펴보려는 것이다.

 

기술된 일부내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1]1592년 예수회 연례보고서 부록에 기술된 내용[241p]

그들의 배는 매우 견고하고 거대하며 윗부분을 덮은 배(거북선을 지칭하는 것임)들을 갖고 있는데 이 배들은 접전 시에는 불을 내 뿜는 장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일종의 철포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포탄을 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에 물고기의 꼬리 부분과 똑같은 형태인 끝이 뾰족하고 어른의 다리만큼 굵은 화살을 발사했다.”

 

[2]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1532-1597)가 쓴 거북선에 관한 기록[242p]

배의 상단은 덮개로 덮여 있는데 매우 크고 튼튼한 선박이며 화력이 좋은 무기들을 장비하고 있다. 적과 조우할 때에는 고기의 꼬리부분같이 끝이 뾰족하며 사람의 다리 두께만 한 화살을 쏜다.”

 

[3]루이스 데 구스만(Luis de Guzmán)<1592년 일본 예수회 연례보고서 부록>에 나와 있는 많은 기록들을 참조하고 있다.[243p]

배들은 매우 강력하며 적과 조우할 때 사용하기 위한 화력이 좋은 무기들을 적재하고 있다. 끝이 뾰족한 쇠로 되어 있는, 사람의 다리 두께만 한 화살을 쏘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 외에 꼬라이 병사는 일반적으로 짧고 두께가 얇은 칼을 사용하며 미늘창도 아주 능숙하게 사용한다. 그래서 중국인들도 그들에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위 세 문장 속에 공통적인 사실 2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다.

하나는꼬라이 배가 매우 견고하고 거대하며 윗 부분을 덮은 배라 한점과 다음은 그 배에 장착된 물고기의 꼬리 부분과 똑같은 형태인 끝이 뾰족하고 어른의 다리만큼 굵은 화살이란 내용에 주목하는 것이다.

 

먼저[1]번 글에서는 그들의 배는 매우 견고하고 거대하며 윗부분을 덮은 배(거북선을 지칭하는 것임)들을 갖고 있는데...”에서 윗부분을 덮은 배라고 하니 번역자는 이것을 거북선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단정을 내렸다.

물론 거북선은 덮개가 있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하지만 덮개가 있다고 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거북선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섣부런 판단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거북선의 실체에 대해서 정립된 것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상 거북선이라는 현재 모양도 일본인에 의해 구상된 것이다.

한반도 역사사실에서 먼저 자문을 구하는 쪽이 한반도 사학자들이며 자문을 열도사학자들이 담당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구조라 할 수 있다.

자기나라의 역사사실의 자문을 구할 곳이 없어 역사적으로 적대하던 열도일본사학자라니 한심하기 이를 때 없는 것이다.

열도일본사학자에게 자문하면 삼한역사 정신에는 전혀 흠집이 없겠는가?

 

위 기록을 보더라도 당시 왜구선박 뿐만 아니라 서양인들의 선박들은 아무래도 꼬라이가 보유하고 있는 일반선박보다 규모와 질 모두가 떨어져 스스로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이런 글을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글 속에 그런 뉘앙스를 충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것을 떠나 번역자들은 언어학적으로 보면 분명 존경받아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한반도 번역자들은 하나같이 서양인들이 기록한 사실에 너무 완벽한 것으로 믿음으로 해서 특별하게 비판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번역도 보면 원작자는 포르투갈 선교사 그레고리오··세스뻬데스(Gregorio de Céspedes)라 하였다. 그런데 스페인어로 해석되고 번역된 점이다.

물론 기록 그대로 가감없이 번역하는 것이 맞겠지만 한반도 역사관계사실에서는 좀 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며 번역자가 남긴 사실들은 곧 역사가 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주제넘지만 권고하고 싶은 것은 번역자들은 역사사실에 대한 책임감도 동시에 가져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서양인이라고 하여 전지전능(全知全能)할 수 없다.

오히려 당시 해양시대인 만큼 그들은 선교사라고 하지만 해적신분과 함께 생활했다고 전제할 때 부귀영화, 벼락출세,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남의 것을 탈취하고 도둑질하기 바쁜 어쩔 수 없는 해적신분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수많은 역사기록물을 번역하다보면 한반도지형이나 기후, 관습등 한반도역사에 맞지 않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지만 지금까지 번역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아마도 밝히기를 꺼려했을 것이다.

설혹 이치에 맞지않고 어긋나는 사실이 발견된다 할지라도 기존 한반도사관에 맞춰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관념적인 문제가 없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 역사에서 거북선을 말했기 때문에 번역자는 그 관성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데 이견을 피력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이야기다.

 

본 블로그의 글"[1]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 귀선(龜船)과 거북선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2"에서 조선왕조실록 태종(太宗13:1413)25일 기사 임금이 임진도(臨津渡)를 지나다가 거북선[龜船]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는 것에서도 보면 기록자체가 단순하다고 하겠지만 군세자체가 왜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조선 수군력이 우세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거의 일방적인 게임에서 임금이 간혹 걱정없이 왜선과의 충돌광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기록된 것이다.

군세가 조선이 절대적인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또한 태종(太宗15:1415) 716일 기사에는 병조 탁신(卓愼)이 임금에게 보고하길, "거북선[龜船]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라고 하였던 것도 당시 병조라면 요사이 국방장관인데 군세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며 분명 귀선은 충돌하여도 전혀 손상이 없는 규모나 크기로 견고하게 제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탁신은 더욱더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 것을 임금에게 제가 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거북선 덮개인가 아니면 함선 상단 층계 갑판인가?

 

역사 편견(偏見)이라는 것은 우리가 귀선(龜船)즉 거북선이라고 하니 무조건 거북형태만을 생각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한자로 구, ()는 동물 거북을 말하는 것이지만 땅이름과 나라이름 대명사로 존칭되고 또는 거북은 천여 년을 살 수 있다고 하여 장수(長壽)를 상징하기도 하며 화폐의 패물(貝物)로 여기든가 아니면 각()과 같아 껍질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어 다향한 상징성에 이 한자가 붙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껍질을 거북 등과같이 굴곡 형상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선박형태가 기이하지 않다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놓고 이 문제를 풀어보아야 한다.

한반도에서 열도일본학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영향도 있었다지만 사실상 존재하지도 않았을 거북선을 상상력으로 마구 그려낸 것은 열도일본사학자들에 의한 것이라면 이것은 실체라고 볼 수 없다.

때문에 어떤 형태의 것이 진짜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쨌서 귀선이라 하는데 거북선만 생각해햐 하는가.

거북선 또한 일본인들이 그려준 거북선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도 필요하다.

또한 사서(史書)에서 귀선(龜船)의 구체적인 형태를 설명한 것에서도 보면 조선왕조실록 선조(宣祖29:1596)117일 기사에 공조참판(工曹參判) 조인득(趙仁得)이 말하길 "소신이 황해도에 있을 때에 한 척을 만들어, (揷之以劍, 似若龜背)()을 꽂고 거북 등()과 같이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한 남이공(南以恭)이 말하길 (四面飾以板屋, 狀若龜背, 以鐵釘揷於傍兩頭)4면을 판옥(板屋)으로 꾸몄고 그 형상은 거북 등()같으며 쇠정(鐵釘)을 옆과 양머리에 꽂았는데, 왜선과 만나면 부딪치는 것은 다 부서지니, 수전에 쓰는 것으로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한 것에서 볼 때 쇠정이나 쇠창살을 꽂은 곳이 꼭 거북선의 등()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라고 이글에서 글쓴이가 주장하였던 것이다.

거북이 등과 같이라고 하였으니 굴곡이 지게 양면을 도드라지게 만든 배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는 문제이다.

 

마치 10세기 말 이후 중국의 영남지방에 있는 수상생활자의 호칭 단민(蜑氓)들이 짓고 있던 모양의 판옥(板屋)이라고 하는 형태문제도 거북선 형태와 동일하게 구상한 것으로서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사학자들의 자문을 요구받고 형태를 상상력으로 그렸다는 것은 더 이상 논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문제는 어쨌거나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의 판단이 전무한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판옥선의 형체에 관해 자세한 기록은 없다 하였다.


다만 일제시대때 증보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를 이야기를 하나 이것은 일제에 의해 손을 탄 것임을 알 수 있고 그림은 위에 언급한 사실처럼 상상력을 동원한 것인데 서양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잡하게 그렸다는 점이 특이하다.
동양권의 배들은 하나같이 배의 척추라고 할 용골(龍骨, keel)이 없는 대신 평탄한 저판(底板)이 이를 대신한다고 하는 것도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이야기다.
판옥선이라 함은 배 위에 단민(蜑氓)의 수상가옥처럼 판옥(판자집)을 지었다는 뜻인데 3층구조 되어 있다.

그렇다면 서양인들에게 판옥선 같은 배가 없었던가.

아니다.

모양은 다르지만 판옥선 같은 배의 형태 그림들이 보인다.

 

흔히들 용감무쌍한 왜구들이 배위에 뛰어오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거북선 등에 창살을 꽂았다고 하는 것도 열도왜구들의 잔인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매우 넌센스같은 이야기다.

왜구는 단순히 해적일뿐이지 공중으로 떠다니는 괴물이 아니며 단순하게 보자면 그들도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공포와 두렵고 위험한 것을 모르는 바보들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임진왜란에서 거북선에 덮개가 있다고 하는 것도 전략적인 측면에서 보면 솔직히 전세를 파악하는데 장애가 될 뿐 방어적인 효과에 비해 전술적으로도 도움이 될 수가 없는 함선형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마치 군사들의 눈을 가리고 전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적의 통태를 파악할 수 있는 시야확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해상전투에서 뚜껑을 덮고 무슨 전투를 하겠다는 것이며 단지 조선수군들이 화살공격을 두려워하는 겁쟁이처럼 폄훼하여 거북선 등으로 달려드는 왜구와 비교되게 하였음이 보인다.

사서(史書)에서도 굴곡을 이야기하는 거북 등()이라고만 하였을 뿐임에도 기어코 덮개()를 씌운 것이라 하는 것은 후세사가들이 보탠 것이라 볼 수 있고 사서 어떤한 기록에서도 덮개()란 기록단어를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은 결코 귀선이라고 하였지만 거북선처럼 생긴 덮개, 두껑이 덮인 형태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위 게시한“16세기 서구인이 본 꼬라이(CORAY)"번역본에서는 마찬가지로 그레고리오··세스뻬데스와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 모두에서 사서(史書)기록에 없는 덮개()를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거북선 덮개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귀선[龜船]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할 수 없도록 견고하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견고하다는 것은 배 갑판이 아니라 배면이다.

배가 배끼리 충돌하게 될 때 가장 취약한 곳이 바로 배 면이다.

그들의 배는 매우 견고하고 거대하며 윗부분을 덮은 배들을 갖고 있다한 것을 다른 규모의 함선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글쓴이가 단언하길 어떠한 역사사실에서도 과거 없었던 사실이 새롭게 있을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대로 과거에 있었던 사실이 갑자기 사라질 수도 없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즉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북선의 형태가 존재한 것이 사실이라면 동서양 어떤 곳에서라도 그와 비슷한 모양의 배가 존재했어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할 때 기존 존재한 선박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거북선과 같은 모양이 없다는 것은 기존 선박을 잘못된 해석으로 인한 오류라는 것이다.

견고하고 거대하게 만들어진 배가 분명하게 어떠한 경로든지 우리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거북선으로 알고 있지만 역사가 빼앗기면서 모든 것을 상실한 것이라고 보았을 때 바로 서양인 것이 되어버린 거대한 함선들을 눈여겨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본 블로그 시리즈 글"[2]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92척의 전선(戰船)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3"에서 이미 92척의 전선(戰船)은 전열함(戰列艦:line-of-battle ships)이란 사실을 명확하게 밝혔다.

즉 서양인만의 전유물처럼 된 전열함이 어쩌면 코라이의 함선일 수 있다는 가정이 충분했던 것이다.

아래 그림과 같이 단층이 아닌 2층갑판, 3층갑판의 함선이 건조 될 때 자연스럽게 규모가 거대해 질 수밖에 없고 견고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하기사 판옥선도 3층 구조이라 한다.

위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배 옆 면을 보면 굴곡이 되어 마치 거북의 등과 같지 않는가?

 

                                                        [포르투갈형 범선]

 

대항해시대 당시 서세(西勢)들의 주된 배를 보면 가로돛식 범선(Caravel)으로서 이를 포르투갈모델(Portuguese models)이라고 하며 소형쾌선으로 라운드범선(round caravels)이라고도 불리는 것으로서 그 규모로 보면 150-180(tons)에서 그 이하는 100-125(tons)임을 알 수가 있다.

이런 규모라면 너무나도 보잘 것이 없는 것이다.

1498년 인도로 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1469-1524)와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1451-1506)가 이끌었던 배가 이와같다는 사실은 여러가지 그들의 선박건조술의 한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문제이다.

이러한 것과 비례할 때 갑자기 선박기술이 서양인에게 발전했다고 주장하는 면이 없지 않다.

16세기 초에 브리티시(British)에서 개발한 프리깃(Frigate)함 맨오브워(Man-of-war)가 있다 한다.

그 이후 2층갑판형인 대형범선 갤리온(Galleon)으로 발전되었으며 17세기부터 등장하는 2층 또는 3층의 포열과 갑판을 갖춘 전열함(戰列艦:ship of the line)으로 크게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삼한 국가 중 고구려를 제외한 신라와 백제는 대해양국(海洋國)임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대조선이 붕괴되기이전까지 대양을 휘어잡고 있었던 세력은 과연 서양인이어야 하는가.

아니다.

그들이 15세기 대항해시대라고 부르짖는 동안에 온 지구를 항해했다고 하는 선박규모가 위에서 게시한 것과 같은 포루투갈 모델 또는 스페인 선박은 200톤 미만의 카라벨(Caravel)이었다고 하는데 한마디로 조각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도대체 이런 규모의 선박을 이끌고 온 지구를 밥먹듯이 항해했다고 하였으니 어찌 그들의 항해기록을 온전히 믿을 수 있겠는가.

본 블로글 시리즈 글 "1886년 코리아의 해군력"에서 이야기 했듯이 오래전부터 코라이는 선박술이 발전하여 어마어마한 선박을 보유할 수 있었다는 것을 확인한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서양인들이 대항해시대를 구가전부터인 태종(太宗13-15年:1413-1415)년대에 왜구 즉 서양배들과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함선들이 모두 실로 크고 견고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서양인들이 하나같이 꼬라이함선을 견고하고 거대하다고 한 것은 분명 서양인 특히 포르투갈 또는 스페인 해적들이 가지고 있었던 라운드범선(round caravels)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그들 스스로도 밝힌 것이 분명하다.

층계를 올리려면 덮개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이야기로 덮개가 있다는 것은 판옥선이 아니라 2, 3층갑판을 가진 거대한 함선이라는 이야기.

이것은 층층간 갑판을 말한 것이다.

또 다른 포르투갈인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의 일본사(Historia de Japam)에서는 꼬라이의 선박들은 크고 견고하며 상단이 덮여있다 한 것처럼 이 덮개라는 말이 편견이 되어 우리나라 역사를 형편없게 만든 발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사일형 포탄

 

또 하나가 문제의 기록을 살편본다.

바로 물고기의 꼬리 부분과 똑같은 형태인 끝이 뾰족하고 어른 넓적다리 두께의 화살이라는 문구이다.

그랬더니 한반도에서는 이를 아래 같은 모양이라고 견본까지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형태 구상은 열도일본사학자의 엉뚱한 발상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은 물론이다.

 

위는 [나무위키]의 자료인데 이순신 장군과 맞선 구귀가융(九鬼嘉隆)자손들이 소장했다고 하는 문제의 그림으로서 위 한반도의 이상한 형태의 포탄 시발이 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생각해보라.

위를 어떻게 사석포라는 케논(Cannon)에 장착할 수 있으며 화약이라는 바탕도 없이 이것이 날라 상대 함대를 치명적인 피해를 준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포르투갈인이 말한 끝에 쇠조각이 붙어 있다 하였건만 시늉만 것이다.

전부 나무조각처럼 한 이 모양을 두고 임진왜란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망신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넓적다리 두께 만한 화살을 장착한 것이라면 최소한 미사일(missile)과 같은 형태의 모양을 그려볼 수 있고 이것을 적 함선에 쏘는데 파괴력이 어마어마했다는 사실을 아래[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의 일본사(Historia de Japam)에서 좀 더 자세하게 알 수가 있.

이 포르투갈인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1532-1597)는 한반도에 오지도 않고 마카오(澳門:Macau)에 있으면서도 임진왜란을 꿰뚫고 일본사(Historia de Japam)란 책을 저술했다고 하는데 이상하기는 다 마찬가지다.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의 일본사(Historia de Japam)그들의 선박들은 크고 견고하며 상단이 덮여있다. 화약통과 화기를 사용하고 쇠로 된 사석포(射石砲)와 비슷한 것이 있는데 탄환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사람 넓적다리 굵기의 나무 화살에 물고기 꼬리처럼 갈라진 쇳조각을 붙여 사용한다. 이것이 부딪히는 것이라면 모두 절단하기 때문에 아주 위력적인 무기이다.

 

보통 서양인들이 짧은 포신에서 발사하는 포탄은 형태가 공(ball)같은 모양인데 반해 임진왜란에 참여한 포르투갈인들에게는 꼬라이함선에서 발사되는 포탄이 매우 생소한 포탄이었다는 것을 그들의 하나같은 기록에서 알 수가 있다.

이것을 특별하게 서양명칭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이해하기 쉽게 넓적다리 두께의 화살모양이라 한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떤 형태의 모양이었까?

 

 

일단 위 발사체인 케넌(Cannon)에서 발사될 수 있는 조건이 가능해야 할 것이다.

글쓴이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함은 서세(西勢) 특히 예수회를 가장한 포르투갈의 침략이라고 단정지을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일본을 앞세우고 있지만 포르투갈인들이 너무 방대하게 참여한 사실이다.

당시 꼬라이는 수많은 서세해적들을 상대로 방어를 위한 무기를 개발하였을 것이고 해적들이 짧은 포신에서 발사되는 평범한 포탄을 뛰어넘는 발전된 무기기 필요했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하고 그것으로 대비했을 것이다.

때문에 이들이 보았던 모양의 포탄이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사람 넓적다리 굵기의 포탄(砲彈:Shells)이라고 하면 기다란 포신에서 발사될 수 있는 미사일(missile)같은 모양의 포탄이어야 한다.

또한 미사일을 예를 들었지만 내용에서 평범한 포탄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명확한 형체를 알 수가 없다.

프로이스는 꼬라이의 무기로서 화약통과 화기를 사용하고 쇠로 된 사석포(射石砲:bombard)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사석포의 라틴어 봄바드(bombarde)라는 말은 1380년경에 쓰여진 프랑스의 기록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하였는데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프랑스(France)가 조선(朝鮮)으로 나타난다는 사실과 비교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며 탄자와 추진제를 화기의 앞쪽을 통해 넣는 화기 전장식(前裝式:muzzleloading)의 케넌(cannon)임을 알 때 물고기 꼬리 화살모양이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놀라운 무기가 상상이 된다.

일단 서세의 무기보다는 성능이 월등히 앞섰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16세기 초에 브리티시(British)에서 개발한 프리깃(Frigate)함 맨오브워(Man-of-war)에 케넌(cannon)이 장착되었다고 한다.

브리티시는 영국이라고 하지만 당시 잉글랜드는 아니다.

그리고 프로이스는 꼬라이는 화약통(火藥筒:Gun Powder Flask)을 가진 것은 물론이고 화약(火藥:gunpowder)을 이용하여 총탄등을 발사하는 무기 화기(火器)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중복된 사설이지만 분명하게 포르투갈인들이 기록하고 있다.

충분히 케넌을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이야기다.

전장식 캐넌이라 함은 공성전(攻城戰:siege warfare)에서 무거운 돌덩어리를 쏘아 보내는데 사용되는 무기라고 서양역사에 알려져 있다.

캐넌(cannon)의 역사에서 최초의 기록은 1132128, 송나라(:960-1279)한세충(韓世忠:1089-1151)이 복건성을 점령할 때 사용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유럽 최초의 캐넌은 13세기 국토수복운동때 에스파니아 즉 이베리아(Iberia)라는 기독교 스페인세력이 처음 사용했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에스파니아라고 하는 카스티야(Castilla)왕국이라면 본 블로그 글 "COREA, CORIA, CORREA, KORAI의 실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1"에서 밝힌 코리아(高麗:COREA)을 말하는 것이다.

어쨌던 케넌은 공성전에서 적의 방어시설로 갖가지 투사체를 쏘아보내는데 사용되었고 설명자료에는 돌덩어리나 쇳덩어리는 물론이고, 불타는 물건이나 생석회를 먹인 직물, 그리스의 불등도 사용되었다고 하였으니 사람 넓적다리 굵기의 나무화살에 물고기 꼬리처럼 갈라진 것으로 머리에 쇳조각을 붙여 사용한 무기 실체 또한 케넌을 이용하여 발사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때문에 이것이 부딪히는 것이라면 모두 절단하기 때문에 아주 위력적인 무기라 한 것이다.

이것을 한반도 역사에서는 그냥 나무화살이라고 하거나 일본인들에 말을 그대로 믿어 조잡한 형태의 이상한 포탄이라고 믿고 있으니 어찌 한심하다 하지않을 수 있겠는가.

아마도 그레고리오··세스뻬데스(Gregorio de Céspedes)나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1532-1597)는 이와같은 거대하고 견고한 배에 장착한 케넌을 난생 처음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진실로 밝혀 알게 한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늘날 일본열도인들에게 괜한 피해의식을 가지지 않아도 될 것이다.

왜 쓸데없이 자존심이 상하게 매냥 움츠리게 하는가.

왜 우리나라 역사가들은 이러한 사실의 역사를 밝혀 자랑스럽게 만들지 못하고 그저 열도일본인들이 시키는 대로 형편없이 만들어 놓기에 온정신을 다 팔고 끝내 영혼까지 팔지못해 안달을 하는가.

진정 무엇이두려운가?

밥그릇이라고 하지 말라.

 

                       [French "Arrow" armour-piercing round, a form of APFSDS]

 

여기서 좀 더 물고기 꼬리 모양의 화살포탄의 정체를 생각해보기로 한다.

기록처럼 끝에 쇠조각을 붙인 물고기 꼬리같은 화살 모양을 한 포탄이라 함은 물고기 꼬리같은 날개는 포탄 궤적의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것으로 지금 우리가 생각해보더라도 당시 그야말로 첨단 무기이임을 알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서양에서 공개한 이 시대의 무기 중 이와같은 모양의 포탄이 실존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에게 상당히 충격적인 무기로 다가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며 이런 대해양시대의 신무기는 밝히지 않고 숨겼을 가능성 또한 높다.

그러한 예는 바로 철갑탄으로 나타나는 모양의 포탄을 프랑스에서는 화살(Arrow)이라 한 것이다.

일맥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폭약을 가지지 않더라도 순수히 핀(fin)에 의한 운동에너지만으로 목표물을 관통하는 포탄을 말하는 것으로 날개 안정식 분리 철갑탄(APFSDS:Armor Piercing Fin Stabilized Discarding Sabot)을 말하는 것인데 당시 임진왜란 때 꼬라이 함선에서 발사되는 화살 모양의 포탄과 매우 흡사한 것이다.

아마도 이와같은 모양의 포탄이 아니었는가 판단된다.

 

이번에는 상당히 글쓰는 공백이 컸기때문에 독자분들에게 그저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어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엇인가 새로운 글을 쓰기 위해 향상 고민하고 있음도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제는 나름대로 신선하다고 생각하는 임진왜란시 코리아의 무기를 한번 살펴보았다.

()나라가 고려(高麗)라는 사실은 이미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충분하게 알려진 사실이고 거대한 꼬라이(Coray)영역에는 해적이라 할 수 있는 일본왜구들이 일상적으로 침범하는 것을 대비하기 위하여 국가적으로 견고하고 거대한 배를 건조하였으며 바로 첨단 무기의 결정판이라고 하는 끝에 쇠조각을 붙인 물고기 꼬리같은 화살 모양을 한 포탄을 개발하였을 것이고 그리고 충돌때마다 적선에 발사하고 박살을 냈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케넌을 사용한 발전된 무기로 그 화력을 충분하게 상상할 수 있다.

비록 지금의 모든 정보가 서세(西勢)가 장악하고 그것들을 그들이 조정하며 업데이트하는 그들의 소유물로 변했지만 밝혀진 이와같은 첨단무기상황의 진실들은 세계삼한역사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하여도 부족함이 없을 것임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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