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사건

믿을 수 없는 근대사

한부울 2014. 3. 25.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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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는 근대사

 

글쓴이:한부울

 

나는 앞 글에서 임진왜란을 일으킨 풍신수길(豊臣秀吉:1537-1598)을 포르투갈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덕천가강(德川家康:1543-1616)을 네덜란드인이라고 하였다.

모두 동아시아대륙사에 이용된 가공인물이다.

근세사에서 시기적으로 당시 서세라고 하여 전면에 등장한 나라가 포르투갈이며 그 이후 포르투갈이 물러난 후 네덜란드가 등장했기 때문이며 시간적으로도 거의 일치한다.

서양사에서는 이런 도식을 언제까지나 기정사실화하려고 노력하고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에 포르투갈이니 네덜란드이니 하는 따위에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단언할 수 있다.

존재하였다면 당시 지배세력인 대삼한제국내에 있었던 마을이나 고을 정도의 이름이었을 것이고 그것에 흔적이 있을 수는 있다.

이것들은 근세기에 서세에 의해 세부적인 역사가 생성되고 그들만의 우월한 역사가 만들어지면서 시대적 굴절형상에 의해 파생된 나라명이고 국가명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가공인물이라고 판단되는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최후는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 아래 자료를 통해 알아보자.

 

게이초(慶長3년:1598) 음력 8월 18일 고다이로(五大老:5명의 다이묘大名)필두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차남:자살)의 보호역을 맡은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에 후사를 부탁하고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죽었다. 사인은 脳梅毒, 痢病(赤痢・疫痢)위암, 독살등 여러 설이 있다. 향년 62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날 안으로 히데요시는 아미다 산(阿弥陀山?)에 매장되었다. 히데요시의 묘는 화려하게 조성되었지만, 병력의 사기 문제 때문에 조선에 출병되어 있는 왜군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을 알아서는 안되기 때문에 장례는 치러지지 않았으며 그의 죽음을 비밀로 하였다. 그러나 세키가하라(關ヶ原,Sekigahara)전투이후 무덤은 폭파되어 소멸되고 만다. 이는 조선과의 외교관계 회복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임진왜란의 원인이 된 장본인의 무덤을 처단함으로써 조선에 임진왜란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요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전쟁이였음을 보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리 마저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1615년 도쿠가와의 공격을 받아 어머니 요도도노와 오사카 성에서 자결하는 바람에 도요토미 가문은 2대로 끊어지고 말았다.[일본위키]

 

윗 글을 보고 솔직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실제 주인공인 풍신수길이 실존했는지 가공인물인지 밝힐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가 일으켰다는 임진왜란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행적은 마치 뜬구름 소설과도 같은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고 결말도 사실이 아닌 이상 이야기형태의 소설 글 말고 신뢰성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해야 맞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일본 대하소설 1953년에 출간된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가 쓴 대망(大望:원제:徳川家康 第1-26 大日本雄弁会講談社 1953―67のち文庫)이 그렇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국지 역시 이러한 비판을 벗어날 수 없는데 명나라 나관중의 나본(羅本), 청나라 모종강의 모본(毛本)으로 이어지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역시 연의(演義)라고 하면 소설과 같은 창극이라는 뜻인데 후세에 극을 가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들을 우리나라 한반도에서 여러사람들이 번역하면서부터 완전히 다른 역사로 만들어지게 된다.

소설을 빙자한 역사로 인식하거나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극적인 것을 가미하니 더욱 현실적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누군가가 세계삼한역사 소설을 장편으로 쓴다면 아마도 지금 내가 노력하는 것 보다 현실성에서 배가 될 것이 틀림이 없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잘못하면 우리가 밝히려 하는 것이 전부 진짜 소설처럼 인식되게 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또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대망이니 삼국지연의니 하는 것들은 소설같은 이야기지만 세계삼한역사는 소설이 아니라 진실의 역사라는 점을 우리는 반드시 인식해야 도둑이 주인 노릇하는 꼴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차 풍신수길이 죽어 묻었다고 하는 곳이 '아미다산'이라고 하는데 열도에서 이 지명이 명확하지가 않다는 사실이다.

하기사 일본 열도의 지명은 한마디로 역사지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모를 수가 없다.

바르게 이야기 하면 정확한 위치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비밀로 붙였던 무덤이 세키가하라(關ヶ原,Sekigahara)전투 이후 폭파되었고 사라졌다는 것인데 이러한 이야기는 다분히 무엇인가 신비롭게하기 위한 것이나 꾸미면서 큰 틀에 꿰 맞추려 했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세키가하라(關ヶ原,Sekigahara)전투는 1601년 잉글랜드 런던에서 일어났다는 로버트 데버루(Robert Devereux)의 반란사건과 시간적으로 내용에서도 비슷하다.

 

일본의 독특한 역사를 보면 아무것도 누구에도 구애됨이 없는 그들만의 역사란 특징이다.

첫째 그들의 독특한 천황제를 들 수 있는데 기원전 660년 재위된 초대왕 신무(神武)로부터 줄곳 천황이라고 하면서 현재까지 이어졌다고 하는 것도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이것들이 모두 거의가 신화와 연결된다.

실제로 동아시아대륙사나 삼한역사기록을 살펴보아도 천황이란 제도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한 제도가 있었다고 치더라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떻게 기원전부터 끊이질 않는 재위 대를 지속할 수 있고 망하지 않는 제국이 있을 수 있는지 가히 불가사이(不可思議)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일본이란 이름 자체가 수많은 나라들을 다 포괄적으로 수용한다는 애매모호함 때문이다.

아니 그들의 나라들을 일일이 만들어 낼 방법이 없었다고 하는 편이 맞다.

현재 왕인 아키히토(明仁)를 125대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은 세계 역사에도 없는 독불심리이다.

역사는 언제나 마음먹은대로 그들이 고칠 수 있고 마음에 안들면 조작할 수 있는 것이기에 진실의 역사에 대해선 도무지 알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서세의 똥을 먹는 종족이었다고 하지만 이러한 건방진 도식은 천하에도 없는 것이다.

주위에서"잘못된 역사"라 해도 그들이 역사라고 하면 역사일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있다는 점은 안하무인 그 자체인 것이다.

그들의 역사는 고치고 조작하고 날조하여 생성된 것이라고 할 때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을 두고 바른 역사라고 하는지 따위는 그들에게 통할리가 없다.

그것을 근세기 일제망령을 통하여 특권의식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아시아대륙사와 한반도사를 그들이 주도하였으니 자만할만도 할 것이다.

그렇듯 엉터리로 만들었음에도 장해될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 현재 동아시아대륙역사는 일본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일본역사가 기본이 된다는 설도 과장된 것이 아니다.

그렇듯 그들이 틀을 만들었으니 그것을 근간으로 하여 만들고 조작한다 하여도 잘못될 것이 없다.

일본사서(日本史書)라 할 때 어떤 것이 진실된 역사인지는 그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의 역사가 진실이 아닌 것을 알아도 그들의 역사는 진실이라고 믿으면 진실역사가 되는 것처럼 마치 서세가 하였던 우월감에 의한 자만만을 배우고 추종하여 답습한 결과라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탈아입서(脫亞入西) 또는 탈아입구(脫亞入歐)라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이 동양인이 아닌 서양인으로 탈바꿈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발상에서 출발된 것이라고 할 때 그들의 행보는 가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그들의 역사는 짜 맞추어 놓은 유적들과 짜 맞추어 놓은 역사라는 이름의 수많은 책을 제외하고서 진실을 말할 것은 그들 어디에도 없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설명이다.

그것을 진짜역사보다 더 진짜라고 강조한다.

일본사서를 만들기 위해 벌였던 모든 일이 완성이 되었으며 그만큼 한반도에 심혈을 기울렸다는 것이며 일제가 36년 동안 지배체제 아래 치밀하게 짜 맞추어 만든 유적들은 일본사서의 토대가 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누구도 거부할 수 없도록 치밀하게 만든 것이 비록“셋트장”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이미 역사가 된 마당이니 거칠 것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무한의 자신감에서 역사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독도역사 그들은 이러한 점에서 자신감을 내비치는 것이다.

위안부문제도 그들이 부정하고 아니라면 그것이 인정될 수밖에 없다는 자신감 또한 그들에게 분명히 존재한다.

이것은 가당찮은 소설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다.

 

In 1595, he failed to conquer the port of Las Palmas, and following a disastrous campaign against Spanish America, where he suffered a number of defeats, he unsuccessfully attacked San Juan de Puerto Rico, eventually losing the Battle of San Juan.

The Spanish gunners from El Morro Castle shot a cannonball through the cabin of Drake's flagship, and he survived; but a few weeks later, in January 1596, he died of dysentery when he was about 55, while anchored off the coast of Portobelo, Panama, where some Spanish treasure ships had sought shelter. Following his death, the English fleet withdrew.

Before dying, he asked to be dressed in his full armour. He was buried at sea in a lead coffin, near Portobelo. Divers continue to search for the coffin.

1595년 라스팔마스 포트(port of Las Palmas)탈취에 실패하고 스페니시아메리카와의 싸움에서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뒤,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의 산 후안(San Juan)의 싸움에서 마저 패한다. 산 펠리페 델 모로 섬(Fort San Felipe del Morro:El Morro Castle)에서 에스파냐 출신의 포격수가 드레이크가 탄 배를 향해 대포를 쏘았지만, 드레이크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몇 주 후 1596년1월, 에스파냐의 보물선(인디아스 함대)이 피난처를 찾고 있던 파나마의 포르트베로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정박하고 있던 중 그는 죽었다. 사인은 이질에 의한 병사였고 그때 그의 나이는 55세였다. 죽기 직전에는 병상에서 갑옷을 입으려고 하는 등 정신착란 상태를 보였다고 한다(죽을 때 멋있게 죽고 싶었던 것이라고도 한다). 생에 자식은 없었으며, 시신은 납으로 만든 관에 넣어져 포르트베로(Portobelo, Panama)부근의 바다에 수장되었다. 오늘날까지 다이버에 의한 수색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위키]

 

 

위는 잉글랜드 엘리자베스1세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다고 하는 16세기 “해적왕”으로 더 유명한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1540-1596)의 죽음에 이른 설명이다.

 

현재 영국 잉글랜드 플리머스(Plymouth)에 있는 언덕에 세워진 그의 동상과 전쟁비가 있는데 sir 를 앞에 붙이고 있다.
English explorer and admiral who was the first Englishman to circumnavigate the globe and who helped to defeat the Spanish Armada.

위는 프랜시스 드레이크에 대한 영어사전 설명이 간략하지만 서양세력들의 역사성이 무엇인지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위에 보듯이 16세기 해적왕으로 이름하였던 사람을 영국의 탐험가이며 제독이라고 하고 있으며 세계일주를 한 최초의 영국인이라고 하였고 당시 신라라 판단되는 스페인무적함대를 격파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Statue of Sir Francis Drake and the War Memorial-geograph org uk1451135]

 

 

이렇듯 서세의 상징적인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근세사에서 이를 해적이 아닌 마치 탐험가 인물로 부각시키거나 묘사한 점이 많고 특히 엘리자베스의 지원 운운하였다는 것에서도 서세의 역사가 결국 해적과 친밀성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풀이 할 수밖에 없다.

이 해적왕 드레이크가 스페니쉬 아메리카(Spanish America)와의 대결에서 결국 패하고 죽게 되는데 이 스페니쉬아메리카(Spanish America)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이를 아메리카대륙에 있던 신라(新羅)라고 하고 싶다.

왜냐하면 본 블로그의 글 "무릇 산자고(山茨菰:Scilla)로 본 신라(新羅) http://blog.daum.net/han0114/17049746 "란 글에서 "신라(新羅)를 신성로마제국으로 보는 이유"로 합스부르크왕가와 연결된다는 것을 설명하였으며 합스부르크 왕가(The House of Habsburg)는 오스트리아제국과 연결되면서 aus- (“to shine”) (see aurora, dawn). 오스는 밝다, 여명을 보다, 새벽이라는 뜻을 가져 태백신(太白神)이 새벽 사백력(斯白力)으로 지칭되고 이것이 시베리아-서벌-서불-서라벌-사로(斯盧)-사라(斯羅)-서라(徐羅)-경주-금성-신라(新羅) 등으로 풀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 한바가 있다.

그렇다면 영국의 엘리자베스1세가 지원한 해적왕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곧 "대해상국" 신라(新羅)에게 도전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합스부르크스페인 왕가(The Spanish Habsburgs:1506–1700)시절이며 바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The Sun Never Sets:1516–1700)"을 구가한 시대였고 스페인 황금시대(God is Spanish:1596–1626)였던 것이다.

이때 스페인 보물함대(Spanish treasure fleet:silver fleet, plate fleet or West Indies Fleet)라고 하거나 실버함대, 금장식한함대, 혹은 서인도함대등으로 불리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함대에게 16세기 해적왕 드레이크는 완전히 박살이 나고 죽음에 이른 것이다.

이 결과 지원을 아끼지 않던 잉글랜드는 왕 엘리자베스1에서 제임스 1세(James I)로 바뀌는 상황까지 발전한다.

 

                                 [The Sun Never Sets Spanish Empire:1516-1700]

 

다시 풍신수길 이야기로 넘어가면 이처럼 합스부르크왕가의 대신라를 상대로 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 말인데 이때 스페인골든시대가 1596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감안 할 때 풍신수길이 과연 이러한 신라를 상대로 얼마나 설쳐될 수 있었던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결코 우리는 한반도 역사가 아닌 세계삼한역사 1516-1700관점에서 보려 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마도 그 때 삼한제국을 침략한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과 진배없는 것이다.

당시 해적왕 드레이크를 지원한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1세(Elizabeth I, 1533-1603,재위:1558-1603)는 지위뿐만아니라 목숨 부지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실제로 이 때 잉글랜드(Kingdom of England:927-1707)에는 1596년부터 1597년동안 흉년이 들어 나라 꼬라지가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며 만약 이 때 실제로 조선을 침공하였던 설정이 있었다면 아마도 흉년에 나라 자체도 부지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잉글랜드 국민들이 사기를 잃고 방황했다고 했겠는가?

당시 잉글랜드 상황을 보면 아일랜드를 침공하려다 실패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 엘리자베스가 관직을 박탈 한 것에 불만을 품은 에식스의 백작 로버트 데버루(Robert Devereux)는 30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1601년에 런던에서 대중봉기를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반역죄로 처형되었다는 사실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도 1600년 6월 석전삼성(石田三成1563 -1600)과 덕천가강(徳川家康)이 세키가하라(關ヶ原,Sekigahara)전투에서 일전을 치룬다는 상황설정이 거의 같다 할 수 있다.
한번 생각해보라.

합스부르크가 신라인 것이 확실한 사실이라면 그리고 해양제국으로서 중앙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대륙을 지배한 것이 사실이라면 감히 왜구 해적들이 날고 긴다 하여도 해적왕 드레이크 꼴이 나지 않겠는가?

분명한 것은 이 때 해적들 누구도 삼한제국을 상대로 침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로 정리되어야 한다.

 

본래 15세기부터 출몰하기 시작한 해적들은 나름대로 그들의 항로를 기억하기 위해 항해일지를 작성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그들의 항해일지가 근대사의 역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역사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살인자인 콜롬버스도 그렇지만 모두 신분은 변함없이 해적이다.

당시 삼한제국의 제왕들은 해적이라면 무조건 경고없이 체포하거나 사살하도록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세사가 해적들을 이렇듯 탐험가로 묘사하고 항해사로 기록하는 것을 보면 비정상적인 역사형태라는 것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앞서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자료에서도 그의 사인으로서 해적들의 일상적인 질환 뇌매독(脳梅毒:Syphilis)이라는 성병, 이질(痢疾), 위암 그리고 신비주의에 의한 독살등 여러 설이 있다 하였으나 해적왕 드레이크(francis drake)는 이질(痢疾)에 의한 병사라고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을 보면 이 두 인물 중 드레이크 보다는 풍신수길 쪽이 가공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은 그의 가족들이 모두 몰살한 것으로 처리되었고 그의 시신이 묻혀 있었던 묘지 조차 세키가하라(關ヶ原,Sekigahara)전투후 파괴되어 남은 것이 없다고 정리된 것은 가공인물이라는 의문을 더욱 짙게 하는 부분이다.

반면 해적왕 드레이크(francis drake)의 시신은 납(lead coffin)으로 만들어진 관에 넣어져 수장하였다고 하였는데 지금까지 찾지 못하였다고 하고 있는 것도 어쨌거나 공통적으로 그들의 실체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이란 국명은 근세기의 서세신흥세력들을 총칭해서 부르던 명칭으로 존재하다가 근세기 동양사가 만들어지면서 열도 일본으로 자리한 명칭이라고 앞전에서도 이야기 했다.

이것은 과거 해적들의 온상이라고 할 수 있는 잉글랜드의 행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 일본과 비유하다가 보면 잉글랜드는 아일랜드를 한반도에 곧잘 비유하겠금 하게 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하여간 이러한 상황들을 볼 때 근세사는 실체가 불분명한 인물들을 여기저기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들은 각기 역사에 맞게 영웅주의와 신비주의에 빠지게 하였다는 오해를 쌓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다 아다시피 한반도 조선의 이순신장군은 노량해전(露梁海戰:1598)에서 왜구의 유탄을 맞고 전사하면서 남긴 말이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였다.

즉 자신의 죽음따위는 문제가 아니니 전쟁을 승리할 수 있도록 아군들의 사기를 꺽지 말아야 한다는 주문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전쟁의 승패 책임을 지고 있는 고급지휘관이라 하지만 순간 죽음을 앞 두고 초월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쉽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애국적 존경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만큼 전쟁이 치열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며 영웅주의에 따른 무거움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런데 위 일본 위키자료를 보듯이 이순신장군을 그대로 복사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도록 왜란의 두목 풍신수길(豊臣秀吉)역시 죽음을 앞두고 똑같은 말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영웅주의를 모방했거나 역사사실에서 분명한 조작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또한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Battle of Trafalgar)의 영웅 허레이시오 넬슨(Horatio Nelson,1758-1805)제독도 이순신과 풍신수길이 남긴 말과 거의 비슷한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는 것은 사실이라기 전에 어떻게 이처럼 거의 같은 말을 동서양 가릴 것 없이 유행처럼 유언으로 남겼다고 하는 것인지 근세사에는 이렇듯 영웅주의가 만연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잉글랜드이 드레이크와 일본의 풍신수길이 동일한 인물이고 사건 설정이라는 상황에서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도플갱어(Doppelgänger)란 설정에서 가공인물이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러시아학자 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의 저서 새로운 역사(New Chronology)에서 한 말, 근세사의 모순들은 1534년 8월 15일에 군인출신 로마 가톨릭 수사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 Ignatius of Loyola:1491-1556)에 의하여 창설되었다고 하는 예수회(Society of Jesus)의 음모"라고 한 사실등을 감안할 때 근세기에 서양세력들에 의해 조작된 사건들은 어마어마하게 많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오히려 저 많은 사건들 중에 어느 것이 진실역사인가 묻는 것이 더 합당한 것이라고 본다.

이와같은 것들은 어떤 하나의 역사사실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면서 벌어진 해프닝일 것이다.

더군다나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한 말이라 하였으니 극적인 긴박감을 수반할 때 똑같은 상황에서 벌어질 수 있는 실제라 하기에는 너무 흔하게 적용되었다는 사실에서 의미가 반감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소설이나 극적인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기획된 연출고 다르지 않다는 생각까지 미치게 한다.

 

솔직히 냉정하게 이야기 한다면 한반도 역사는 일제가 만든 것이란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반도 역사 속에 이순신장군은 일제가 만든 영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내겠지만 그렇더라도 일제가 36년간 한반도 지배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일제가 지배한 사실은 인정하는데 어째서 일제가 한반도역사를 만들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못할까?

원인이 있다면 결과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존엄성이 있다 하여도 근원적인 문제는 일제가 36년간 그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하여 치밀하게 기획하고 만든 한반도 역사에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농간을 부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냉정하게 판단해야 하고 이러한 존엄성 문제도 냉정하게 바라볼 수있어야 한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갈등을 유발시키려 했다는 사실도 생각할 수있는데 이것을 기획한 일제에 입장에서 설령 이러한 모든 조작행위가 밝혀진다 하더라도 이미 영웅주의에 의한 이순신장군이란 존엄성을 부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서적으로도 우리가 그들의 조작사실을 쉽게 부정할 수 없을 것이란 예측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도 할 수가 았다.

그런 이유에서 한가지 사실을 더 한다면 반도역사 주장처럼 한산도 대첩과 명량대첩과 노량대첩등 이 발생한 곳이 정말로 한반도라고 한다면 그래서 그러한 증거를 찾기 위해 그동안 값비싼 장비를 대동하고 수많은 다이버들이 한반도 남해안의 해저 밑바닥을 이 잡듯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거북선이란 파선의 흔적초자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은 결국 한문이름의 이순신장군은 한반도역사에서 가공된 인물로 존재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다.

 

한반도 역사의 정체가 탄로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이지만 한반도 남해안에서 거북선찾기와 거의 비슷한 경우가 바로 일제총독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안중근의사의 유체찾기인데 이 경우도 1910년 지금의 산동반도 대련시의 려순(旅順)감옥에서 순국한 뒤 그곳 가까이에 묻혔다는 기록과 함께 정부까지 나서 유체 찾기를 수차례 시도했지만 결과적으로 찾을 수 없었던 사실과 똑같은 것이라고 할 때 이것은 바로 한반도역사가 진실의 약사가 아님을 말하는 것으로서, 한반도 역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일본열도역사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대륙 전체역사가 그렇듯 근세기에 치밀하게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풍신수길(豊臣秀吉)과 드레이크(francis drake)는 시대적으로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해적으로 존재하였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한쪽은 진짜이겠지만 한쪽은 거짓 가공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쪽이 진짜라 할지라도 미화된 측면이 많을 것이다.

영국해적왕인 드레이크(francis drake)는 그의 시신을 현재까지 찾을 수 없다는 것이지만 그래도 향후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고 있는 반면에 동아시아대륙의 열도 인물 풍신수길(豊臣秀吉)은 그러한 기대감조차 가질 수 없도록 더 나아가 실제 존재한 인물인지 확인조차 할 수 없도록 역사 전개되는 이야기 과정에서 아예 추후 사실여부를 따질 수 없도록 원천적으로 깔끔하게 정리해버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후세 풍신수길 찾기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도록 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결국 풍신수길은 가공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같은 무모한 짓을 벌였을까?

이치적으로 매우 간단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란 사건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동아시아대륙사에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비중이 있기때문에 그것과 연관되는 모든 역사만들기에 바탕이라고 볼 수 있으며 현재 열도에 일본(日本)을 생성시킬 수 있는 근거로서 기어코 만들지 않으면 안되는 조작 역사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삼한역사(三韓歷史)에서 왜(倭)란 이름으로 기생(寄生:Parasite)역사가 분명하게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왜(倭)란 이름으로 사건 형성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시도한 임진왜란이란 것을 알 수가 있다.

실제로 동서양을 합쳐 이러한 사건이 실제로 존재했는가에 대한 문제가 분명하게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이러한 사건을 당시 있을 수 조차 없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가공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동아시아대륙사에서 최대한으로 확대시켜 조선(朝鮮)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주고 명나라가 이 사건으로 망한다는 제한된 사건 프레임(frame)만들기가 일제에게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지금까지 따지고 볼 때 명나라는 나라가 아니라 조선의 중앙정부였다.

조선은 그대로 있고 중앙정부는 지금처럼 정치를 잘못하면 교체되는 것이 정치권력의 순리라고 볼 때 명나라가 망한 것이 아니라 명조(明朝)에서 청조(淸朝)로 순환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아니면 신라계에서 고려계로 바뀌었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대신 대조선 정부가 바뀌는 것일 뿐 역사주체가 가지는 영향력은 크게 없었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다.

이순신이란 영웅 탄생은 조선건국이후 최대의 위기라는 설정에서 이 왜란(倭亂)을 잘 수습한 절대적인 영웅이 필요하였을 것인데 그것은 임진왜란이란 사건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것이었으며 때문에 영웅 이순신이 아니었으면 조선은 풍신수길(豊臣秀吉)에게 점령당하고 지배받았을 것이란 소름끼치는 암시와 함께 왜구가 조선인에게 벌였던 잔악함과 잔혹함을 세부적으로 묘사하게 하여 그들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효과를 노렸을 것이고 설정된 한반도 조선인들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그들에 대한 공포심,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는 상황을 연출한 것이 틀림이 없다.

 

임진왜란은 일제의 조선지배까지 계산에 넣고 포석으로 사용한 것이라 할 때 임진왜란이란 프레임은 일제가 만든 것임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단연코 임진왜란이란 사건자체가 일제에 의해 꾸며진 사건이란 펙트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것은 임진왜란이 종료된 1598년 부터 거의 300년 후에 일을 예상하고 예측하여 그들이 일제가 될 것을 암시하였다는 이야기며 동시에 향후 한반도 조선인을 굴복시켜 일제가 한반도 조선을 지배할 수밖에 없었다는 간교한 레임이 깔려 있는 다목적용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가차없이 임진왜란 이후 호(胡)가 호(胡)를 굴복시키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며 병자호란이란 사건이 또 만들어지며 한반도에 있는 조선왕조는 근본적으로 외부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국가체제라는 사실과 스스로 독립할 수 없는 무능함을 알리며 극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 바로 인조대왕의 삼전도(三田渡)굴욕까지의 연출이다.

물론 이와같은 사건은 빼놓지 않고 한반도에는 살아 있는 유적을 철저하게 심어놓았다는 사실은 이야기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설정이다.

이런 와중에도 신하들의 당파싸움과 부패성을 부각시켰으며 때문에 도저히 조선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민족이라는 노예근성까지 심어놓았다고 볼 수 있고 이러한 노예근성을 그들이 조작하여 만든 역사를 통하여 조선인에게 뼛속까지 전달되게 하였고 일제가 조선역사를 지배하는 불합리에 대한 정당성과 당위성을 동시에 노리며 그들이 조선을 언제까지고 지배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임진왜란이란 사건 생성은 애초부터 한반도 민족에게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로 존재한다.

한반도에 왜구들이 몰려 들어오지 않았을 뿐더러 거북선을 만들지도 않았으며 애초부터 한반도에서 왜구와의 싸움자체가 없었던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냥 덮어 씌운대로 덮어 쓸 수밖에 없었던 쓰디쓴 굴욕의 문신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 임진왜란이란 가짜 역사사건에 우리가 자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굴욕을 느낄 필요도 없다고 본다.

우리가 스스로 자괴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펙트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제  더 이상 허구사실에 가위 눌릴 필요가 없다.

다만 이런식으로 역사를 만들어 놓았다면 그들이 노린 것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허구의 역사사실을 이제부터 우리들 머리속에서 깔끔히 씻어버리고 과감하게 벗어던질 수 있는 용단이 필요하며 그들이 원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인지 알아 그것부터 완전하게 싹을 잘라 뿌리까지 뽑아야 할 뿐이다.

그들이 뿌려놓은 노예근성이란 씨앗은 우리의 혼을 파 먹는 박테리아이다.

나는 잠시 이런 생각도 해본다.

그들이 삼한역사에 얼마나 많은 열등의식이 있었으면 이런식으로 삼한역사를 난도질을 했을까?

참으로 이렇듯 서세들이 없애고자 안달하고 극복하려고 애를 쓴 역사가 삼한역사라니 우리가 감히 꿈도 꿀 수 없었고 상상할 수도 없었던 참으로 벅찬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서세도 삼한역사를 그냥 두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것만큼은 우리에게 어떤 시련이 있었다해도 또는 그것을 누가 뭐라해도 삼한역사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긍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임진왜란을 생각하면 이순신장군을 떠올리게 되고 이순신장군을 떠올리면 임진왜란이 캡쳐(capture)되어 나타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그들이 남긴 교육효과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일제가 만들어 놓은 망령하고 산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들은 전부 잘못되고 엉터리같은 역사에 기인한 것이다.

지금도 우리의 위대한 세계삼한 혈손의 혼이 왜구의 망령에 의해 갉아 먹히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하다면 그들이 그토록 목적한 바는 달성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요행스럽게도 우리가 이러한 가짜역사를 하나하나 깨우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머리속에 기억하고 있는 모든 거짓의 역사를 떨쳐 낼 수 있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새롭게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설혹 우리가 이러한 거짓 역사에서 벗어나 시궁창에 던져 밟아버리고 또한 죄다 잊어버린다고 하여도 일본 열도에는 한반도인들의 기억을 새롭게 자극할 것들이 지천에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들은 언제까지고 우리 혼을 맴도는 망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은 귀무덤이다.

이것은 사실여부를 확인 할 수 조차 없는 16세기 임진왜란때 조선인들의 귀를 잘라 묻었다고 하는 귀무덤이 그렇고 또한 존재하지도 않았던 전쟁 망령 신사로서 야스쿠니신사가 남아 있는 것은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허황된 역사를 상징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버렸던 기억을 언제까지고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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