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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 주는 단서(端緖) 캘리포니아
글쓴이:한부울
나폴레옹과 홍경래
조선역사의 홍경래
조선역사와 프랑스의 오묘한 만남
유럽역사의 위치와 코리아가 중국이라는 실마리
한반도 역사 혼란과 확신
친구블로그님들을 대상으로 쓰는 글이니 훨씬 편해진 마음이다.
종전에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해 시원치 않았는데 이제 하고 싶은 말 부터 시작할 수 있어 마음이 새롭다.
단언적으로 나폴레옹은 홍경래이다.
이런 현상을 일부 신비주의자들은 독일어 '이중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는 도플갱어(doppelganger)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앞으로 이야기될 것이만 나폴레옹은 프랑스 또는 영원권의 사람이고 홍경래는 반도역사의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원래 하나의 역사인물을 이렇게 분리시켜버렸던 것이다.
이것이 근세사가 가지고 있는 최악의 잘못이다.
때문에 글쓴이는 나폴레옹을 삼한의 프랑스계라고 하고 싶다.
이러한 이중성을 교묘하게 역으로 이용한 것이 바로 근세기 역사새판짜기였다.
인도유럽어족에서 사라진 언어 베다 산스크리트어(吠陀梵語:Vedic Sanskrit)를 바탕으로 한 역사를, 라틴어(拉丁文:Latin), 그리스어(希臘語:Greek), 페르시아어(波斯語:Persian), 그리고 영어까지
각기 인물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원래 역사인물이 하나에서 두명, 세명으로 손오공 마술처럼 불어난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역사를 분리하기 위한 편법적인 수단이었다.
그것은 타고르가 분명하게 언급한 것처럼 Where the world has not been broken up into fragments by narrow domestic walls
하나의 조선(The Chosen ones)의 거대한 나라를, 자본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조각조각 분리시켜야 이윤이 증대된다는 원칙이 고수되었다고 볼 수 있어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에서 근세기에 이러한 자본력 증대를 목적으로 한 서세들의 농간에 의해 세분화 즉 발칸화가 시작되면서 분열되기 시작하였고 곳곳에서 충돌이 야기되어 분쟁이 격화되면서 거의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대륙의 국가들은 1810년부터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
이러한 분리의 역사가 이중 삼중 토플갱어의 근세사가 된 것이다.
후일 대조선이 해체되고 난 후 1882년부터 그때까지 조용했던 동아시아대륙에 신중국이 들어서면서부터 중국 즉 chinese 라고 호칭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본래의 소속은 하나의 거대한 국가였고 그 안에서의 그들의 소속은 협소적으로 영국고을, 프랑스고을, 러시아고을, 독일고을, 오스트리아고을 등으로 지역, 고향등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사람들은 그러한 하나의 거대한 조직내에 영국계, 프랑스계, 러시아계, 독일계 등으로 이해 될 수 있어야 한다.
대조선의 심각하던 파벌싸움에 이러한 환경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느낄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역사 대혼란이다.
대조선(고려)은 다양한 문화, 종교, 인종들을 포용하던 다원체제의 하나의 국가였음이 틀림이 없다.
예를 들어 초기 인쇄기술을 가지고 있던 쿠텐베르크는 역시 독일계 고려사람이다.
이 사람은 라틴어 인쇄 기술자로 서양사에 등장하는 모순을 낳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여러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릴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님도 나폴레옹과 홍경래의 끊어질 수 없는 관계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조선역사와 홍경래
[자료찾기-1]순조 12년 임신(1812,가경 17) 4월28일 (경오)
적을 평정한 일에 대한 교문
豈料仁賢之邦, 遽有反逆之變。’ 駭機猝發於暮夜, 始也一夫之狂呼, 凶鋒殆迅於飄風, 乃者八州之連陷。 澟乎顔平原之罵賊, 義士獨有一焉, 靡然范陽令之開門, 亂逆何其多也? 向非條候東出之擧, 幾致巢賊西犯之憂。 逆賊景來, 本以蟲豸之〔微〕, 久稔梟獍之惡, 奸鄕猾校之無不締結, 起自營下小胥, 强盜流氓之爲其脅從, 至稱平西元帥。 不視天則劃地, 先倡讖緯之妖言, 乃戕倅而劫符, 非惟竊據之〔凶〕計, 橫山渤海, 寔繁無賴之流, 綠林黃巾, 復起有道之世。 禧著、昌始、君則、齊初、士用等, 或藉土豪村富, 久矣異圖之潛滋。 或稱術士軍師, 居然同惡之相濟, 負其牛羊之力, 甘作〔爪〕牙, 蠢爾豺虎之群, 托爲心腹。
그런데 어찌 어진 사람이 사는 땅에서 갑자기 반역의 변고가 있을 줄 생각이나 했으랴? 놀라운 일이 어두운 밤에 졸지에 일어났던 것이니, 처음에는 한 사내가 미친 듯 부르짖었던 것이나, 흉봉(凶鋒)이 거의 회오리바람보다 빨랐고, 어느덧 여덟 고을이 연달아 함락되었다. 늠름하게 안평원(顔平原)처럼 적을 꾸짖은 의사(義士)는 오직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고, 범양영(范陽令)처럼 활짝 문을 열어주었던 난역(亂逆)들은 어찌 그리도 많았던가? 만약 조후(條候)가 동쪽으로 나가 싸운 일이 아니었더라면, 거의 소적(巢賊)이 서쪽을 범하는 근심이 있을 뻔하였다. 역적 홍경래(洪景來)는 본디 벌레 같은 미물로 오랫동안 효경(梟獍)의 악을 쌓아왔으며, 간활(奸猾)한 향리, 장교와 체결(締結)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영 아래의 보잘것없는 아전부터 강도나 유민으로 협종(脅從)이 된 자들까지 심지어 평서원수(平西元帥)라 일컬었던 것이다. 하늘의 법을 무시하고, 땅에 금을 그어 참위(讖緯)의 요언(妖言)을 선창(先倡)하였고, 고을 수령을 죽이고 인부(印符)를 빼앗았으니, 단지 빼앗아 웅거할 흉계로 횡산(橫山), 발해(渤海)에 무뢰배들을 불리고자 했을 뿐만이 아니라, 녹림(綠林)과 황건(黃巾)이 다시 도(道)가 있는 세상에 일어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희저(李禧著)·김창시(金昌始)·우군칙(禹君則)·이제초(李齊初)·김사용(金士用) 등은 혹 토호(土豪)와 시골의 부자들에게 의탁하여 오랫동안 이도(異圖)를 몰래 꾸며왔다. 혹은 술사(術士)니 군사(軍師)니 하며 어느덧 같이 악을 함께 하는 무리들을 도와주자, 소와 양과 같은 힘을 믿는 자들은 달갑게 조아(爪牙)가 되었고, 굼실굼실 하는 승냥이나 범과 같은 무리들은 의탁해 심복(心腹)이 되었다.
위는 조선왕조실록기사인데 순조(純祖1790-1834,재위:1800-1834)가 평서원수(平西元帥)라 일컫던 홍경래(洪景來, 1771-1812)의 난을 평정하고 조신(朝臣)들이 모여 축하하는 일을 인정전(仁政殿)에서 거행하였는데, 임금이 임석(臨席)하지 않고 권도(權道)로 식(式)만을 거행(擧行)하면서 내린 교문(敎文)의 내용이 위와 같다.
이 내용을 간단하게 들여다보면 조선(朝鮮)을 칭한 것인지 고려(高麗)를 칭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땅’에는 성인(聖人) 버금갈 만한 재덕(才德)이 있는 사람이 사는 땅(邦), 즉 나라인데 갑자기 ‘反逆之變’(반역의 변고)가 있었다는 것으로서 홍경래가 부르짖은 것이 대단하여 ‘八州之連陷’여덟 고을(州)이 연달아 함락 또는 점령되었고 어떤 고을(州)은 활짝 문을 열어주었던 반역자가 많았다고 하였다. 또 이 교문은 홍경래를 미물이라고 하면서 조경(梟獍) 즉 태어나자마자 어미애비를 죽게 한 불효자이고 교활(奸猾)하여 모든 자들이 평서원수(平西元帥)라 일컬었다 하였으며 홍경래는 하늘의 법을 무시하면서 마음대로 땅에 금을 그어(劃地), 미래의 길흉에 대한 예언이라 하는 요언(妖言)을 선창(先倡)하였고, 고을(州)수령을 죽이고 관인(官印)과 명부(名符)를 빼앗았으니, 단지 빼앗아 웅거할 흉계로 횡산(橫山), 발해(渤海)에 무뢰배들을 불리고자 했을 뿐만이 아니라, 도둑의 소굴과 도둑떼들이 다시 도(道)가 되는 세상이 되게 하였다는 내용이다.
결국 홍경래는 나중에 횡산과 발해에서 무뢰배들을 불렸을 것이란 사실을 예측할 수 있게 하고 반도역사 발마따나 그 무뢰배들이 나폴레옹을 하늘처럼 떠 받들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횡산과 발해가 어디에 있었는가 알게 되면 그 무뢰배들의 활동영역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횡산과 발해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 하기로 하자.
평안도(平安道) 용강(龍岡)출신의 홍경래(洪景來)가 난(亂)을 일르킨 동기로 고향인 평안도(平安道)에는 300년 이래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없었고, 서울사대부는 이들과 혼인하거나 벗하지 않는 등 조정에서는 서토(西土)를 버렸다는데 불만을 품은 세력을 규합하여 사회적 모순이 팽배한 전부(田賦), 군정(軍政), 환곡(還穀) 즉 삼정(三政)에 대한 개혁조치를 단행하려고 난을 일으켰는데 이를 민란(民亂)이라고도 한다.
즉 레벌루션 혁명(Revolution)이다.
결국 홍경래를 정주성전투(定州城戰鬪:1811.12.30-1812.4.19)에서 패하게 되어 소멸되었다는 것인데 이 때 “죽은 홍경래는 가짜 홍경래이다. 진짜 홍경래는 살아 있다.”라는 소문이 이어지면서 곳곳에서 저항하는 무리들이 발생하였고 14년후 순조26년(1826)에는 관서괘서사건(關西掛書事件)의 죄인으로 국문을 받던 김치규(金致奎)는 홍경래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죽지 않았다고 진술하기도 하였다고 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현재 반도역사의 이야기는 홍경래 난을 한반도에 맞게 최대한으로 축소하였거나 사건 본질과 다르게 왜곡되어 기록된 것일 수도 있어 믿을 것이 못된다.
결과적으로 당시 왕조에 불만이 있었던 민중들이 홍경래를 장군(將軍)이라 호칭하며 끝까지 존경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반도역사는 정작 홍경래의 출신 성분부터 시작하여 그에 대해선 아직 뚜렷한 정설이 없다 라고 얼머무리는 것을 보면 우리가 알 수 없는 사실들이 얼마나 숨어있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조선역사와 프랑스의 오묘한 만남
위 교문에서 단번에 사건이 축소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고을이라고 한 해석이다.
원문에는 분명 주(州)라고 나타난다.
하기사 반도역사에서 고을을 주(州)라고 표현했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많은 질문을 달고 다닐 것이 분명하여 일제학자들이 답변이 궁해질 것이 틀림이 없다.
때문에 주(州)를 고을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주(州)가 과연 고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성(省) 또는 자치구(自治區)에 속하며 그 밑에 현(縣) 또는 시(市)가 있다는 것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고을’이란 표현은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주(州)는 유럽 땅에 금을 그어(劃地) 나라라고 칭하는 모든 것들이 이 고을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이러한 실체를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죽은 홍경래는 가짜 홍경래이다. 진짜 홍경래는 살아 있다.”이러한 소문이 14년간이나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폴레옹이 1821년에 죽었으니 살아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즉 정주성전투(定州城戰鬪)에서 홍경래는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반도역사에서는 그 뒤 행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계삼한역사 관점에서 홍경래의 관서병란(關西兵亂)의 정주성전투(定州城戰鬪:1811-1812)는 이와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1769-1821,재위:1804-1814)의 1812년에 있었던 러시아침공(vasion of Russia)과 상당히 비교되는 사건이고 흐름상 거의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정주성(定州城)은 모스크바가 되어야 한다.
모스크바도 근세기에 생긴 지명이다.
때문에 반도역사에서도 이 정주성전투를 기준으로 하여 홍경래의 세력들이 패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나폴레옹 역시 러시아침공을 끝으로 세력들이 거의 소멸되었다는 사실은 그 시기와 내용이 같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다 알다시피 나폴레옹은 1804년부터 1815년까지 프랑스의 황제였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근세사이다. 이 사람은 세계인물이었지만 홍경래는 반도역사의 겨우 이름정도 등장하는 보잘 것 없는 인물로 처리되었다.
일개 장군을 황제라고 띄운 것이라면 서세가 근세사를 만들면서 마치 유럽역사를 높이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대조선 내에서도 홍경래가 일으킨 영향력은 당시에도 대단한 것이라고 보여지면 이것이 세계사로 옮겨 졌으니 나폴레옹이 세계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반도역사에서는 홍경래의 출신성분조차 알 수 없는 것과는 달리 나폴레옹은 자세하게 기술되고 있는데 그는 이탈리아의 서쪽, 프랑스의 남부에 있는 코르시카(Corsica)섬 출신으로서 이 섬은 원래 북아프리카 흑인들의 거주지라고 알려져 있으며 근세기까지 제노바(Genoa)의 영토로 있다가 1768년 프랑스에 팔린 일 년 뒤인 1769년 아작시오(Ajaccio)마을 하급 귀족집안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태어났다고 한다.
솔직히 고을에 불과했던 프랑스가 돈을 들여 이태리 제노바(Genoa)마을 소속의 작지 않는 섬을 매입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것도 이상하지만 이 코리시카가 본래 프랑스인들의 본래거주지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솔직히 근세기 유럽사를 만들면서 꿰 맞춘 느낌이 없지 않다.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발랑스(Valence)에 주둔한 ‘라 페르 연대(Régiment de La Fère)’포병소위로 임관한 1789년 바스티유(Bastille)감옥의 함락 소식을 듣고 나폴레옹 자신도 프랑스혁명(French Revolution:1789-1794)대열에 참가하여 급진파이고 공화주의자인 자코뱅파(Jacobin)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다가 체포되었고 이어 풀려나 1792년에 코르시카(Corsica)로 귀향하였으나 혁명정부로부터 군사재능을 인정받아 군장교로 선임되었고 혁명 정부에서 1797년 비엔나(Vienna), 룸바르디아(Lombardia)점령하여 업적을 쌓아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기회삼아 1799년 쿠데타를 일으켜 30세 나이로 프랑스정권을 접수한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쿠데타로 프랑스정권을 접수하였다는 사실에서 어느정도가 국가인가에 대한 의문도 없지 않다.
프랑스 전체로 볼 것인가 아니면 고을 정도 또는 마을 정도인가에 대한 확실한 근거가 없다.
그 뒤 국민투표에 나타나는 주민 숫자가 터무니 없이 적어 그러한 의혹을 가지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말한 반역패당 수준이라면 어느정도의 세력이었을까?
그는 이어 오스트리아를 굴복시켰고 북이탈리아를 보호국으로 삼았으며 영국이외는 유럽세력들을 그의 손아귀에 넣었다는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서 홍경래가 여덟 고을(州)을 연달아 함락하였다는 사실과 일치하고 그가 마음대로 땅에 금을 그었다는 표현에서 분열과 분리를 목적으로 한 행동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볼 때 근세기의 19세기 초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분열주의가 혹시 나폴레옹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이어 나폴레옹은 그렇게 점령한 고을 주(州)에서 삼정(三政)에 대한 개혁조치를 단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나폴레옹코드(Napoleonic code)이다.
Life changed for millions when Napoleon introduced the Napoleonic code.
Otherwise known as the Civil Code, the Napoleonic Code created a unified, logical system of law across all of Europe.
위 내용을 보면 나폴레옹이 나폴레옹 코드를 처음으로 창안 했을 때 수백만의 인생이 바뀌었다 하였다 하였다는 것이고 시민법전(Civil Code)이라고 다르게 알려진 나폴레옹 코드는 모든 유럽 전반을 가로질러 통일되고 논리적인 법체계를 창조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유럽전체라고 하기에는 무엇인가 설명이 부족하다.
1804년 법 앞에의 평등, 국가의 세속성, 종교의 자유, 경제활동의 자유를 중심으로 한 나폴레옹법전(Napoleonic France)을 제정하였다는 사실에서 보더라도 홍경래가 추구한 기득권세력에게 저항한 사실과 일치하고 사회적부조리를 타파하고자 한 것에서 법을 만든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가 있다.
이렇게 나폴레옹은 1804년에 국민투표에 의하여 찬성표 3,572,329와 반대표 2,569로 초대황제가 되었다는데 이것은 당시 프랑스 고을(州)의 전체 인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으로서 세계역사인구자료(POPULATION STATISTICS)데이터를 보면 1806년 깃 점에 프랑스 전체인구가 29,107,000 명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실제 투표한 인원은 전체인구의 약 12%의 수준임을 알게 한다.
이때 참고로 영국 고을(州)은 11,380,000명에 불과할 뿐이다.
이것은 일부의 지역에 한정 된 것으로서 대조선전체, 유럽전체를 나타낸 의사가 아님을 분명하게 알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에서 상당히 많은 혼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세계삼한역사 관점으로 보지 않으면 당시에 벌어졌던 유럽과 조선의 간격에 비슷한 사건을 정확하게 풀이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서양사는 있는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서 이해 할 수 있으나 반도역사는 이러한 상세한 부분을 감추었다고 보기 때문에 비교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나폴레옹의 준동으로 분명 유럽이란 역사공간에서 그동안 기득권층인 귀족에게 억눌림을 받던 부르주아지(有産階級:bourgeoisie)와 민중들은 자기 고을(州)을 침공하는 프랑스고을 혁명군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환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초기에 홍경래역시 민중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 혁명군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날이 갈수록 프랑스고을 혁명군들은 점령 고을(州)에서 갖은 횡포를 부려 원성이 잦아지게 되었고 결국 등을 돌리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는 것이 나폴레옹과 홍결래의 극복할 수 없었던 공통적인 문제점이라는 것이 세계삼한역사관점이다.
설명에서 보면 유럽판도에서 당시 영국은 섬(島)나라, 즉 고을(州)라는 지형상(地形上)장점과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지금 유럽지형을 보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유럽의 역사는 근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있다면 이것도 재검토되어야 할 편견이다.
영국이 프랑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이유로 저 유명한 1805년 10월에 있었던 트라팔가르 해전(Battle of Trafalgar)을 드는데 허레이시오 넬슨(Horatio Nelson,1758-1805)이 이끈 영국 해군에게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가 완패 당하면서 21척의 함선들이 나포를 당하는 수모를 끝으로 영국 상륙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물론 제해권도 가질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어쩌면 나폴레옹의 근간을 해치는 전쟁패배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코리아 서해안이란 제목으로 글을 쓸 예정이지만 코리아 서해안을 방문하면서 멕스웰 함장이 이끌고 온 주함 알세스트호(Alceste)역시 프랑스 함선으로 영국이 포획한 것이라고 한다.
서세가 당시 대항해시대를 구가 했다는 사실은 물론 해양을 정복하였던 시절이다.
이 항해가 가져다 주는 이익은 엄청났기 때문에 쉽사리 바다를 포기할 수 없다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1년후 1806년 대륙봉쇄령을 내렸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19세기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매우 허황된 상황이며 엄청난 모순을 낳고 있다.
제해권을 영국이 가지고 있는데 수슨 수로 대륙 봉쇄령을 내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적어도 대륙 봉쇄령을 내리려면 제해권을 장악하는 것이 순서이다.
이렇듯 말도 안되는 대륙봉쇄령을 내려 유럽 고을(州)들로 하여금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일제히 금지시켰으나 러시아 고을(州)만이 대륙봉쇄령을 어기자 1812년 6월 23일에 나폴레옹이 450,000명의 군을 이끌고 러시아 고을(州)을 침공(vasion of Russia)하였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의 말을 듣지 않았던 러시아 마을은 기존 봉건제왕이 관할하던 주요 성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러시아 고을이 어디쯤에 있었던 것인가에 대한 사실도 추후 밝혀보겠다.
현재 러시아가 아닐뿐만아니라 모스크바도 현재 위치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영국과 프랑스의 인구 수를 따질 때 분명 프랑스가 거의 2.5배가 넘는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러시아만을 빼놓고 거의 전 유럽지역을 장악했다고 하였다.
때문에 영국과 대결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그런 작전상 이유로 인하여 러시아를 침공하였다는 설명인데 그러나 제해권을 영국에게 빼앗긴 마당에 육군만으로 러시아를 통제하겠다는 발상이 얼마나 무모한 생각인가 하는 점에서도 전쟁의 화신이라고 알려진 나폴레옹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하는 이상한 부분들이다.
어쨌든 나폴레옹의 45만(萬)명이라고 하는 대규모의 육군병력은 러시아 침공 전쟁에서 큰 손상을 입었고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면서 결국 황제자리에서 실각하고 말았다고 한다.
하기사 동양사에서도 반란을 일으켜 칭제한 사실은 비일비재하다.
그는 재차 그에게 유리한 상황을 이용하여 재기하려고 1815년 다시 복귀하였지만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1815.6.18)에서 영국, 네덜란드 및 독일(프로이센) 등이 포함된 기득권 연합군에게 결정적으로 패하면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1801-1922)의 조지 3세(George III, 1738-1820,재위:1760-1820)와 이은 조지 4세(George IV, 1762-1830,재위:1820-1830)가 세계질서를 장악하는 상태로 세계경영권이 넘어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시기가 조선 순조 재위기간(1800-1834)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때는 정치적으로 벽파(僻派)라 하는 안동김씨가 세력을 강화하던 때이다.
그러니 결국 하나의 국가 대조선의 질서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은 1801년에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1707-1801)과 아일랜드 왕국(Kingdom of Ireland:1542-1801)이 합병하여 성립한 왕국이다.
이때부터 순조(純祖1790-1834,재위:1800-1834)가 등장한 것이다.
프랑스혁명(French Revolution:1789-1794)으로 인하여 영향을 받아 1801년에 일어난 아일랜드 왕국(Kingdom of Ireland:1542-1801)의 반란도 눈여겨 볼 역사사건인데 어쨌던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을 브리티쉬(British)라고 하고 이것을 혼용하여 현재는 영국이라고 하는데 부리티쉬(British)가 현재 영국이란 보장이 없다.
결국 브리티쉬는 나폴레옹을 제압하였으며 이 브리티쉬관할 권에 있는 동인도회사령(領) 세인트헬레나(Saint Helena)의 동북쪽 롱우드(Longwood)에 나폴레옹을 유배하게 된다.
(1)Longwood (c.1785) is a house located at 10417 River Road in East Baton Rouge Parish, Louisiana. Directly across the street is a levee holding back the Mississippi River.
(2)Longwood (Natchez, Mississippi)
왜 유럽사에서 위치문제가 자꾸 대두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은 유럽사가 근세기에 만들어진 역사이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최후의 워털루전투도 전투위치가 워털루(Waterloo)가 아니라 라-벨르-알리앙스(Schlacht bei Belle-Alliance)라고 알려지기도 하여 이 근세사에 대한 분명하지 않은 사실들이 산재되어 나타난다는 사실도 현재 유럽사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정말 홍경래난과 나폴레옹혁명은 같은 사건인가?
반도역사에서는 8개의 고을(州)을 함락시키고 점령한 이 홍경래의 관서병란(關西兵亂)을 전혀 비중 있게 처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도대체 사건전체를 알 수 없도록 하였고 또한 홍경래를 비롯한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을 전혀 들어내 놓고 있지 않고 있어 명확한 사건 진단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같은 사건일 것이란 사실을 감지하게 한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분명하게 나타는 것은 홍경래와 나폴레옹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처럼 바로 조선의 숙종, 영조, 정조가 루이14세, 15세, 16세와 동일하게 이어지는 역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프랑스왕실상징 Fleur-de-lys(백합꽃 또는 붓꽃)에서 본 대조선의 그림자
http://blog.daum.net/han0114/17050527
숙종과 루이14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5
영조와 루이15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6
정조와 루이16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7
때문에 조선의 숙종, 영조, 정조는 프랑스 고을(州)의 역사로 연결될 수 있고 전통적인 역사흐름이라고 보았을 때 그것을 입증한다고 볼 수 있고 또한 프랑스혁명이후부터는 순조로 넘어가는 과정이 반도역사의 사건 흐름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계파싸움이 전이되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유럽사에서는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결국 대조선 또는 고려에서는 어쨌던 프랑스혁명에 영향을 받은 여러 조선 고을(州)들이 너도나도 혁명대열에 합류하는 모양새로 나타났을 것이라고 보이며 결국 서토(西土)는 그들에 의해 금이 그어지는 분리 형태가 급속하게 생성하기 시작한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나폴레옹은 그의 나이 51세(1821)때 영국(British)동인도회사령(領) 세인트헬레나(Saint Helena)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이를 암살 또는 암이라고 하여 또 다른 의혹을 낳게 하고 있다.
암살은 무엇때문에 암살한 것일까?
나폴레옹의 입을 막기 위한 것이라면 분명 나폴레옹을 유배한 세력의 짓이었을 것이다.
순조26년(1826)에 관서괘서사건(關西掛書事件)의 죄인으로 국문을 받던 김치규(金致奎)가 홍경래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죽지 않았다고 진술한 것이라던가 정주성전투에서 홍경래가 죽지않고 살았다고 하는 사실등에서도 나폴레옹의 생사와 함께 홍경래의 존재사실도 클로즈업(close-up)되는 것이 사실이다.
영국(British)은 20여 년에 걸친 프랑스혁명(French Revolution:1789-1794)과 나폴레옹전쟁(French revolutionary and Napoleonic wars,1792-1815)을 드디어 종결짓고 유럽의 신질서체제확립을 위한 비엔나회의(Congress of Vienna:1814-1815년 6월)를 주도하며 세계 식민지 건설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것이 현재 근세사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영국이 식민지 기반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나폴레옹 때문이라는 것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는데 분명 영국은 당시의 기득권 세력이 맞다.
하지만 영국을 잉글랜드라고 고집하는 이상 그것의 대한 결론은 쉽지 않다.
유럽역사의 위치와 코리아가 중국이라는 실마리
[자료찾기-2]
순조16年(1816) 7月 19日(丙寅)
이재홍이 충청도 마량진 갈곶 밑에 이양선 두 척이 표류해 온 일을 보고하다
○忠淸水使李載弘狀啓以爲:
馬梁鎭葛串下, 異樣船二隻漂到。 該鎭僉使趙大福, 地方官庇仁縣監李升烈聯報以爲, ‘漂到異樣船隻, 雖多費人力, 多用船隻, 莫可曳入。 故十四日平明, 僉使縣監, 同往異樣小船所浮處, 先以眞書問之, 以不知搖頭, 更以諺文問之, 又以不知揮手。
충청 수사(忠淸水使) 이재홍(李載弘)의 장계에,
“마량진(馬梁鎭) 갈곶[葛串] 밑에 이양선(異樣船) 두 척이 표류해 이르렀습니다. 그 진(鎭)의 첨사 조대복(趙大福)과 지방관 비인 현감(庇仁縣監) 이승렬(李升烈)이 연명으로 보고하기를, ‘표류하여 도착한 이양선을 인력과 선박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끌어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4일 아침에 첨사와 현감이 이상한 모양의 작은 배가 떠 있는 곳으로 같이 가서, 먼저 한문으로 써서 물었더니 모른다고 머리를 젖기에, 다시 언문으로 써서 물었으나 또 모른다고 손을 저었습니다.
人物則箇箇削髮, 頭著則或以黑毛爲之, 或以繩爲之, 形如銅鑪臼。 衣服則上衣或白三升, 或黑氈, 右袵結單錘, 下衣多着白三升, 而如行纏狀, 其製甚狹, 僅容其胯。 襪子則以白三升揮裹, 履則以黑皮造之, 狀如發莫, 以纓納之。 所持之物, 或佩金銀環刀, 或佩金銀粧刀, 或佩乾靈龜。 或持千里鏡。 而其人名數, 間間滿載, 難以詳計, 似近八九十名。 又往其大船而問情, 則人物服色所佩所持, 一如小船, 而以眞以諺, 俱以不知搖頭,
사람은 낱낱이 머리를 깎았고, 머리에 쓴 모자는 검은 털로 만들었거나 노끈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동로구(銅鑪臼)와 같았습니다. 의복은 상의는 흰 삼승포[三升布]로 만들었거나 흑전(黑氈)으로 만들었고 오른쪽 옷섶에 단추를 달았으며, 하의는 흰 삼승포를 많이 입었는데 행전(行纏) 모양과 같이 몹시 좁게 지어서 다리가 겨우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버선은 흰 삼승포로 둘러 쌌고, 신은 검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발막신[發莫]과 같고 끈을 달았습니다. 가진 물건은 금은 환도(金銀環刀)를 차기도 하고 금은 장도(金銀粧刀)를 차기도 하였으며, 건영귀(乾靈龜)를 차거나 천리경(千里鏡)을 가졌습니다. 그 사람의 수는 칸칸마다 가득히 실어서 자세히 계산하기 어려웠으나, 8, 90명에 가까울 듯하였습니다. 또 큰 배에 가서 실정을 물어 보았는데, 사람의 복색, 패물, 소지품이 모두 작은 배와 같았고, 한문이나 언문을 막론하고 모두 모른다고 머리를 저었습니다.
위는 코리아 서해안에 들어왔던 영국 이양선에 대한 기록인데 조선왕조실록기사 순조16年(1816) 7월 18일(丙寅) 양력으로 1816년 9월 10일(화)에 "충청수사(忠淸水使) 이재홍(李載弘)이 마량진(馬梁鎭) 갈천(葛串)에 표류한 이양선 두 척에 있던 사람들과 여러 가지 질문을 한 것을 토대로 임금에게 사건보고서를 올린 기사 내용이다.
이 사건은 다시 '코리아 서해안 찾기'에서 다루기로 하고 우선 나폴레옹을 만나 인터뷰하는 과정만을 설명하기로 한다.
영국 이양선 두 척은 맥스웰(Murray Maxwell:1775-1831)함장이 이끈 1000톤 급인 알세스트호(Alceste)와 바실 홀(Basil Hall:1788-1844)대령이 이끈 237(톤bm)밖에 되지 않는 소규모의 블릭 슬루푸급(Brig-sloop)급인 리라호(Sloop Lyra)이다.
이 수송선들의 코리아 행로에 대해 간단하게 기술하면 1816년 2월 19일 영국에서 출발하여 천진(天津)에 도착한 시간이 7월 27일 이었다고 하는데 소요기간은 5개월 8일 이었다.
천진(天津)에 사절단을 내려주고 이들이 북경에서 중국내륙 운하 길을 경유하여 다음해 1817년 1월 1일 광동(廣東)에 도착할 때까지 약 5개월 간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이 수송선 두 척은 '코리아의 서해안'과 '류큐섬' 그리고 '유황섬'을 탐험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코리아 서해안 해도(海圖)작성의 임무를 띤 맥스웰 함장과 바실 홀은 8월 29일 위해위(威海威)를 출발하여 9월 1일 동틀 무렵 조선의 육지가 동쪽에 나타나는 것을 보았고 일행은 황해도 대청군도에서 남하하면서 처음으로 해도(海圖)작성을 착수했다 하였으며 코리안을 처음 목격한 것은 소청도 남쪽 바다입구에 있는 소청리(小靑里)에서였다 한다. 제일 남쪽 섬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만(灣:[葛串])’에 닻을 내리자 얼마 안 있어 5, 6명의 주민이 작은 배 하나를 타고 왔고, 50야드 가까이에 이르자 배를 멈추어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였으나 섬 주민들은 오지는 않았으며 마냥 호기심과 경계의 빛으로 바실 홀(Basil Hall)일행을 바라보고 있어 오히려 그들이 보트를 타고 주민들에게 가까이 갔으나 주민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고 한다.
놀라지 않았다는 것은 주민들이 그들의 행동을 감시한 것이라고 풀이 할 수 있다.
이어 바실 홀과 맥스웰 일행이 해안으로 노를 저어 어느 마을에 상륙하자 그들이 뒤따라왔다고 바실 홀의 기행문에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결국 맥스웰과 홀 일행은 9월1일에는 백령도 앞 대청군도에 도착했고, 9월4일 마량진(馬梁鎭)에 도착하여 첨사 조대복(趙大福)과 현감 이승렬(李升烈)등과 조우하게 된다는 사실을 위 조선왕조실록으로부터도 확인 할 수 있는 상황이다.
분명 바실 홀의 기행문에는 중국(Chinese)과의 정치적 교섭과 겸사하여 길목에 있는 황해(黃海)와 발해(渤海)연안의 답사와 연구를 목적으로 방문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들어가면 오히려 탐사는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나폴레옹을 만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키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영국에서 브라질을 경유하여 혼곶을 돌아 태평양으로 들어가 동아시아대륙에 도착하였다고 하지만 이 항로 소요기간은 5개월 8일 이었다는 사실은 여러가지 사건을 예고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난관이 있었다는데 선장 맥스웰(Murrey Maxwell)이 이끈 주함 알세스트호(Alceste)는 오던 길과 다르게 인도아대륙 즉 동인도회사로 가는 과정에서 1817년 2월 18일 자바해(Java Sea)에서 암초에 좌초되어 침몰하고 말았다.
이것은 결국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듯이 이미 표류하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득시 골병이 든 것이다.
다행히 이들은 모두 구조되었다 하고 이 소형선 리라호(Sloop Lyra)는 인도(印度)를 경유하여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대서양으로 들어가 8월 11일 세인트 헬레나(Saint Helena)섬에 닿게 된다 하였다.
문제는 여기서 나폴레옹을 만난다는 사실이다.
이 기간도 따지고 보면 2월 18일 자바해에서 침몰한 과정이 있었음에도 거의 5-6개월 정도만 소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대체 237(톤bm)밖에 되지 않는 소규모의 블릭 슬루푸급(Brig-sloop)을 타고 이런 머나먼 항로를 항해했다는 것도 전설같이 들리지만 왜 오던 길로 가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각에서 떠나질 않는다.
인도(印度)를 의식한 것이다.
인도가 인도아대륙에 있었다고 하였으니 어쩔 수 없이 지금도 동남아시아 해로를 운행하기가 힘드는 곳인데 기어코 이 항로를 택했다고 하니 어쩔 수가 없다.
어쨌던 이렇게 항해하여 8월 11일에 세인트 헬레나(Saint Helena)섬에 도착하여 그 배에 동승한 암허스트(Jeffrey William Pitt Amherst)와 멕스웰(Murray Maxwell)그리고 바실 홀(Basil Hall)은 8월 14일 떠날 때까지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과 인터뷰를 하게 된다.
[자료찾기-3]Narrative of a voyage to Java, China, and the great Loo-Choo island: with accounts of Sir Murray
Maxwell's attack on the Chinese batteries, and of an interview with Napoleon Buonaparte, at St. Helena
CHAPTER VII
I had carried with me, at Count Bertrand's suggestion, some drawings of the scenery and
costume of Loo-Choo and Corea, which I found of use in describing the inhabitants.
When we were speaking of Corea, ho took one of the drawings from me, and running his eye over the different pars, repeated to himself, "An old man with a very large hat, and long white beard, ha!-a long pipe in his hand-a Chinese mat-a Chinese dress, -a man near him writing-all very good, and distinctly drawn."
He then required me to tell him where the different parts of these dresses were manufactured, and what were the different prices-questions I could not answer.
He wished to be informed as to the state of agriculture tin Loo-Choo whether they ploughed with horses or bullocks-how they managed their crops, and whether or not their fields were Irrigated like those in China, where, as he understood, the system of artificial watering was carried to a great extent.
The climate, the aspect of the country, the structure of the houses and boats, the fashion of their dresses, even to the minutest particular in the formation of their straw sandals and tobacco pouches, occupied his attention.[세계삼한역사연구]
[자체번역]나는 회계사 버트의 제안으로 유구(Loo-Choo)와 코리아(Corea)의 주민 생활을 찾아 묘사하기 위하여 풍경과 의상을 어느 정도 옮겨 그려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그에게 코리아를 말할 때 그는 나의 그림 중 하나를 가지고 가 빠르게 훑어보면서 혼자 되뇌길 "엄청나게 큰 모자를 쓴 노인장이 긴 흰 수염을 하였네 하! 그의 손에 긴 담뱃대가 들려있고 중국 메트(Chinese mat), 중국 의상(Chinese dress), 그의 가까이에 글을 쓰고 있는 사람까지, 자세하게 아주 잘 그렸구나." 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노인장이 입은 옷과 그 외 다른 종류 것들이 어디서 제조되며 가격은 어느 정도하는지 물었지만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유구(Loo-Choo)의 농경에 대해서 알고 싶어 했는데 그들이 관리하는 말들이나 거세한 수소(bullocks)들로 경작하는지 또는 그들의 경작지들이 그가 알고 있었던 운반에 크게 좌우되는 중국의 치수시스템 처럼 관개가 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고 싶어 했다. 기후, 그 나라의 외경, 집들의 구조와 보트(배), 의상, 밀짚으로 만든 샌들과 담배파우치 등 굉장히 상세한 형성관계까지도 그가 알고 싶어 했다.[세계삼한역사연구]
앞에서 이미 홍경래의 관서병란(關西兵亂)과 나폴레옹의 혁명전쟁을 통해 사건 동질성을 여러 각도로 알아보았다.
1815년 나폴레옹의 최후전쟁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1815.6.18)에서 패배로 끝남에 따라 백일천하로 끝나자 유럽에서는 신성동맹(神聖同盟)이 결성되는데 이것은 기득권이 더욱 결집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기존 하나의 국가 대조선의 영향력은 변함없었다고 할 수 있고 다시 조선이 주체로 한 기득권 신성동맹(神聖同盟)은 영국, 독일(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4국 동맹으로 나타나고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앞에서 보았듯이 이들 명칭은 고을명칭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이것이 하나의 국가 대조선이 주도한 것이라면 분명 세도세력 벽파(僻派)라 하는 안동김씨가 세력이 주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나폴레옹에 의해 얼마간 광풍이 몰아쳤지만 기득권세력은 공고하게 결집되는 상황을 맞이한다는 사실이다.
1816년 바실 홀(Basil Hall)의 코리아 서해안 방문은 이러한 시대적 환경이 바탕이 되는 것으로서 결국 영국(브리티쉬)은 코리아(중국)를 찾게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나폴레옹의 분리세력인 동조세력들은 고려를 찾게 된다는 사실과도 연결된다.
영국은 지금은 구분이 없게 되었지만 당시 영국과 브리티쉬(British)가 같다고 할 수 없고 브리티쉬가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1801-1922)이라면 현재 영국인가 하는 점도 많은 의문점을 남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현재 영국은 대조선의 영국고을이라는 점과 반조선세력임도 상기 할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잉글랜드의 하노버 왕가(House of Hanover:1714-1837)가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조지 4세(George IV, 1762-1830,재위:1820-1830)를 끝으로 브리티쉬가 세력을 놓고 뒷전으로 밀려난다는 사실이다.
하노버왕가에서 거부당하던 빅토리아여왕(Queen Victoria,1819-1901,재위:1837-1901)체제로 넘어가면서 모든 것이 현재 영국으로 변모된다는 점도 특이하게 볼 문제이다.
그러한 사실들을 명확하게 읽을 수 있는 단서가 바로 위 나폴레옹의 인터뷰 내용이다.
위 영어문장은 바실 홀(Basil Hall)이 1816년 9월1일부터 9월10일까지 코리아 서해안을 방문하고 귀로에 1817년 8월 11일 나폴레옹이 유배된 세인트 헬레나(Saint Helena)섬에 도착하여 나폴레옹과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바실 홀이 코리아에서 그려 가지고 간 위 삽화그림['코리언 관리와 그의 비서'Corean chief and secretary]을 보고 나폴레옹이 즉흥적으로 한 말을 그대로 적은 것인데 바실 홀 기행문(Narrative of a voyage to Java, China, and the great Loo-Choo island: with accounts of Sir Murray)에 나타나는 내용이다.
놀라운 사실들이다.
나폴레옹의 말들을 가감 없이 살펴보자.
나폴레옹이 바실 홀의 그림을 보는 순간 독백 비슷한 말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는 대뜸 "엄청나게 큰 모자를 쓴 노인장이 긴 흰 수염을 하였네 하! 그의 손에 긴 담뱃대가 들려있고 중국메트(Chinese mat), 중국의상(Chinese dress), 그의 가까이에 글을 쓰고 있는 사람까지, 자세하게 아주 잘 그렸구나" 혼자말로 되뇌이었다 한다.
심신이 구속되던 유배생활 동안 상당히 눈에 익숙한 그림을 순간적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심리적인 각도에서 보아야 하는데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보자마자 ‘중국의상(Chinese dress)’이라는 말이 혼자 말처럼 튀어 나온다.
분명 차이니즈(Chinese)는 중국(中國)의 영어 단어가 맞다.
1816년이니 이때 중국(中國)은 동아시아대륙의 청(淸)나라고 하는 국가이다.
현재까지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위 바실 홀의 삽화그림에서 아무리 뜯어보고 살펴보아도 나폴레옹이 중국의상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 양태(凉太)가 큰 갓을 쓴 조선(朝鮮)관리가 입은 두루마기 정도로서 조선의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조선의 갓도 사실상 따져보면 태양 직선광선이 내리쬐는 기후가 매우 더운 곳에서 쓰던 뜨거운 햇빛 차단 모자이다.
아열대기후나 열대기후에서 웃차림새였다고 볼 수 있다.
왜 조선관리 의상을 보고 나폴레옹은 중국의상이라고 하였을까?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중국은 중원이라고 쓰였으며 그곳은 멕시코 주변으로 나타나고 있다.
본래 멕시코 땅은 켈리포니아영역을 북쪽으로 넘어서는 영역을 자랑하고 있다.
이것을 스페인땅이라고 근세사는 표시한다.
나폴레옹이 순간적으로 그림을 보고 즉흥적인 감탄사를 낸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익숙했기 때문이며 유배생활로 억압된 심리상태라고 할 때 그렇다면 생면부지의 그림이 아니었던 것이다.
코리아는 후일 편집과정에서 적당하게 조정 재배열 된 것이라고 보이고 나폴레옹은 코리아란 실체를 알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그는 그림을 보는 순간 눈에 익었던 형상에서 조선의상을 입은 관리가 중국관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분명 중국 메트(멕시코형메트)도 알고 있었으며 관리 옆에 멕시코형의 얼굴을 가진 서기까지 오히려 친숙한 느낌으로 자연스럽게 평소에 알고 있던 사실이 눈 앞에 나타나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탄성을 질렀다고 할 수 있고 분명한 것은 그가 그러한 심리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 바로 "매우 자세하게 잘 그렸다"라고 평가한 사실이다.
모르던 형상이라면 어떻게 잘 그렸다고 할 수 있을까?
때문에 당시 차이니즈(Chinese)라고 하는 중국 사람들은 모두 큰 햇빛차양을 한 갓과 두루마기차림을 하였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은 중국 생활이 관습적으로 몸에 익숙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나폴레옹은 바실 홀의 삽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동양인의 모습이 분명히 아님에도 아주 자세하게 상세히 또렷하게 잘 그렸다고 칭찬한 사실이다.
현재 동아시아대륙 중국사람은 동양인이라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나폴레옹의 상식에서 중국 사람은 조선의상을 입고 멕시코 풍의 사람을 고용하며 백인 카프카스 인종 'Caucasian race 이었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어찌 놀라운 사실이 아닌가?
나폴레옹이 중국사람을 알고 있었고 조선의상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코리아가 중국이고 나폴레옹 역시 중국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미 본 블로그 글 '삼한역사 말살의 도구로 사용된 삽화(揷畵)와 사진(寫眞)의 진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8 '이란 글에서 유태계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1903)의 삽화를 게시하면서 이 그림 중 한 사람은 갓을 쓰고 한 사람은 망건을 쓴 삽화그림을 볼 수 있었고 삽화 아래에 분명하게 카프카스 인종 'Caucasian race(1880)'이라고 기재 되어있다는 사실에서 조선인차림의 백인이었음을 알게 했다.
그렇다면 조선의상을 하고 있는 코리언은 백인들도 끼여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백인들의 의상이었던 것으로 판명딘다.
이것은 당시 코리아(高麗朝鮮)들의 체제가 다문화(多文化), 다종교(多宗敎), 다인종(多人種)으로 다원주의(多元主義:pluralism)체제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반도 역사 혼란과 확신
또 한 가지 위 나폴레옹 말 중에‘유구(Loo-Choo)의 농경에 대해서 알고 싶어 했다는데 유구인들이 관리하는 말들이나 거세한 수소(bullocks)들로 경작하는지...’이란 문장에서 거세한 수소 ‘불록’이야기가 나온다.
Bullock's, a defunct department store chain based in Los Angeles, California
여러자료를 찾아 본 결과 불록은 영국 잉글랜드나 북아메리카대륙(North America)에서 통용되는 것으로 특히 “불록스(Bullock's)”라고 하는 상표는 20세기초 캘리포니아 로스 앤젤레스에 본사를 둔 백화점체인으로서 이 지역에서 산출되는 거세한 수소들을 아리조나와 네바다에있는 상점과 모든 캘리포니아에 공급하였던 것으로 운영되었으나 지금은 소멸하였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이 거세한 수소에 대하여 상당한 조예(造詣)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유구가 있었던 곳도 그곳을 비켜갈 수 없다고 본다.
또 나폴레옹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담배 파우치(tobacco pouches)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을 알 수 있는데 바실 홀의 그림에서 보면 코리아 관리 옆에 서 있는 아이가 오른손에 들고 있는 박스 모양을 한 케이스가 보인다.
그것을 파우치라고 한 것인데 이것은 19세기 미국 사진들을 보면 주석(tin’s)으로 만든 파우치(Cigars Tin Box Mail Pouch Tobacco), 담배 통임을 알 수가 있다.
나폴레옹이 본 그림에서 우리 코리아의 과거 모습을 읽게 한다.
그렇다면 바실 홀이 방문했다고 하는 곳은 거세한 수소가 많이 양산되었던 곳이며 곧 그곳은 코리아(高麗朝鮮)와 멀지 않는 곳으로서 서해안이라고 할 수 있으며 홍경래가 관서병란(關西兵亂)을 일으킨 곳으로 서토(西土)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횡산과 발해일 수도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나폴레옹이 유배된 곳도 대서양 남부 바다가운데가 아니라 서토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임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냉정하게 한 번 생각해 보자.
멕스웰(Murray Maxwell)함장과 바실 홀(Basil Hall)의 기행문을 보면 주함 1000톤 급인 알세스트호(Alceste)가 침몰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기어코 237(톤bm)밖에 되지 않는 리라호(Sloop Lyra)에 의지하여 인도아대륙을 거치고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엄청난 항로를 항해하는 것도 부족하여 물론 귀로 도중이라고 하지만 암허스트경과 멕스웰, 바실 홀까지 나폴레옹을 만나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나폴레옹은 영국이 유배시킨 것이다.
스콜틀랜드인이라고 하지만 그러한 영국인들이 영국배를 이용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나폴레옹을 접견했다는 것은 잘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다.
나폴레옹을 그들이 동조한 것이라면 분명 영국이란 당시 주체는 구분되고 달라야 한다.
나폴레옹은 중국 즉 브리티쉬를 상대로 전쟁한 것이면 중국에 의해 유배된 것이 틀림 없다.
또한 암허스트 사절단이 중국에 가서 나폴레옹을 면담할 수있는 허가를 받았다는 것이 글쓴이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중국 즉 브리티쉬가 관할한 영역의 섬에 유배되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중국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으면 면담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사는 이것을 이러저리 혼란스럽게 짜집기 한 것이지만 이제 사건 전반이 이렇듯 훤하게 보이니 어떡하겠는가?
이렇게 된다.
인도가 만약 서인도제도에 있었고 동인도회사가 서인도제도에 있었다면 기어코 아프리카남단을 돌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며 인도가 아시아권 인도아대륙이라고 하다 보니 영국아일랜드로 들어갈 수 있는 길목 세인트 헬레나(Saint Helena)섬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분명 이 두척의 수송선은 영국에서 떠날 때 브라질을 경유하여 아프리카남단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남아메리카대륙 혼곶을 돌았음을 알 수 있다.
영국이라 한 것도 현재 영국이 아닐 수 있고 영국(브리티쉬)은 중국이고 순조가 있었던 조선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코리아이고 고려이며 넓게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나폴레옹은 습관적인 기억을 상기한 것이고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감동한 것이다.
궁금증이 발동하였는데 이것을 어떻게 만든 것이며 가격은 얼마정도하는가도 물었던 것이다.
아마 자기도 그런 차림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나폴레옹은 이 당시 영국인이라고 하는 자들과 중국과의 외교문제와 앞으로 대처할 문제를 놓고 조언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지는데 중국과의 전쟁은 피해야 하고 반대했다는 사실도 그가 평소에 가진 하나의 국가에 대한 애증이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한 가지 더 첨부할 것은 잉글랜드의 남서부 출신 암허스트와 달리 멕스웰과 바실 홀은 바로 스코틀랜드 귀족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스코틀랜드는 전통적인 캘트족으로 고구려인들의 혈통이다.
나폴레옹의 유배지도 결코 동아시아대륙의 청(淸)이 아닌 중국(中國), 코리아(高麗朝鮮) 즉 브리티쉬(British)의 영역으로서 지금의 세인트 헬레나(Saint Helena)가 아닐 수도 있다.
아마도 근세기에 서헤들에겐 태평양바다가 서쪽이라고 하여 꺼려했을 것이란 판단도 없지 않다.
그곳은 지진과 화산대이니 겁낼 만도 하였을 것이다.
큰 죄를 지어 유배되었다면 이곳이 가장한 적합한 지역이라고 볼 때 그곳 섬 중의 옛 지명 롱우드(Longwood)를 찾으면 맞을 것이란 생각도 있다.
분명 간단한 의상하나로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던 나폴레옹이 지적한 중국의상, 그리고 그렇게 오랜 시간 나폴레옹이 익숙하게 보아 왔던 모습들은 바로 바실 홀의 그림에서 볼 수 있었다는 것이고 그곳은 바로 코리아(高麗朝鮮)이며 브리티쉬(British)라고 하는 나폴레옹을 유배시킨 주체가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그것을 근세기 동아시아대록에 신중국이 들어서면서부투 중국(中國)이라고 했을 것이다.
다 잘 아시다시피 차이나는 실제로 중국을 호칭한 것이 아니다.
지, 진, 지나, 시나, 실라, 신라 등으로 불렸을 것이란 예상도 할 수 있어 신라가 스페인과 연결된다면 그곳은 바로 멕시코 옛 땅이 될 수가 있다.
영국고을(州), 프랑스고을(州), 오스트리아고을(州), 러시아고을(州)등으로 불리었던 것은 모두 고려영역일 수도 조선 영역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허튼 소리라고 들으면 안된다.
마지막으로 코리아(高麗朝鮮)가 중국이라는 단서를 제공한 나폴레옹은 반도역사의 홍경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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