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사건

임오군란(壬午軍亂)과 우라비혁명(Urabi Revolt)

한부울 2012. 9. 19.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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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壬午軍亂)과 우라비혁명(Urabi Revolt)

 

글쓴이:한부울

 

본 블로그에서 전개되는 글은 세계삼한역사 관점으로 보았을 때 판단된 이야기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이나 우라비혁명(Urabi Revolt)은 모두 군인들에게 관련된 역사 사건이고 이야기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군인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군인이 정치적인 욕심을 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면 바로 사기(士氣, morale) 진작(振作)문제이다.

군대의 군악대(軍樂隊)가 왜 필요할까?

군대의 사기를 고취(鼓吹)하고 진작(振作)시키는데 아주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고취와 고무(鼓舞)라는 한자가 있는데 이것도 똑같은 이치이다.

고취(鼓吹)는 용기와 사기(士氣)를 북돋워 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고(鼓)는 북을 치는 것이고 취(吹)는 피리나 나팔을 부는 것을 뜻한다.

고무(鼓舞) 역시 북과 춤추는 것을 말하는데 현대적으로 하면 위문공연이다.

이것은 전장에서 사기를 진작시키는 수단으로서 군인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그 만큼 군인에게 사기는 전쟁에서 승패를 가름할 수 있는 잣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군인을 사기를 먹고사는 사람들이라 말한다.

그런가하면 군인들을 보고 명예를 중시하는 신사라고도 한다.

이 명예안에 목숨을 걸 수 있는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멋진 군인과 사관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생성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군인은 사기도 중요하지만 그에 따른 명예 역시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사전에 보면 사기(士氣, morale)는 사기(morale)란 도덕(moral)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할 정도로 엄하고 무거운 뜻을 가졌다는 것이다.

사기(士氣, morale)란 용어 역시 예부터 주로 군대(軍隊)에서 사용되어 왔던 용어라고 하였고 19세기초 나폴레옹은 "군대에 있어서의 사기와 장비와의 비율은 3대1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사기는 예로부터 군에서 매우 중시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임오군란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설마 이러한 원칙의 내용을 반도역사학자라고 모를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임오군란 정도의 군란이라면 나라가 온전할 수가 없다.

그 이후 나라가 계속 유지 되었다는 사실 또한 의문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한반도 역사는 조선이 계속 유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기문제는 또한 현대에 들어서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인데 대한민국의 군인복무규율에서도 ‘사기는 군 복무에 대한 군인의 정신적 자세’라 정의하고 ‘군대의 강약은 사기에 좌우된다’하면서 그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인의 사기에서 주요요소는 ‘의식주’란 사실이다.

국방부자료에 따르면 조선(朝鮮) 정조22년 1798년에 지은 병서(兵書) 무신수지(武臣須知)에서도 “먼저 농사에 힘쓰고 무예를 익히는 법을 강구한 다음에야 군사들의 마음이 화합할 수 있다”며 배고픈 병사는 배불리 먹게하고 좋은 환경에서 훈련한 병사의 전투의지나 전투능력을 따라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했다는 것은 군인의 사기문제에서 의식주(衣食住)는 더 이상 논할 필요조차 없는 것으로 군인에게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 prerequisite essential)한 것이라고 해야 맞다.

 

그런데 한반도 조선(朝鮮)역사의 임오군란(壬午軍亂)을 보면 이러한 기본적인 사실조차 무색하게 하는 사건이 전개되는데 실제로의 사실인지 진의조차 분간하기 쉽지 않는 한심한 역사설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건개요를 보면 임오군란(壬午軍亂)는 1882년(고종19) 6월 9일 구식군대(舊式軍隊)가 일으킨 병란(兵亂)으로서 신식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別技軍)이 급료와 보급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데 비해 구식군대인 무위영(武衛營), 장어영(壯樂營) 2영(營)의 군졸들은 13달 동안 봉급미를 받지 못해 불만이 높았고 그러던 차에 겨우 한 달 치의 급료를 받게 되었으나, 그것마저 선혜청(宣惠廳) 고지기(庫直, 庫子)의 농간으로 말 수가 턱없이 부족한데다 모래가 반 넘어 섞여있어 이에 격분한 구식군졸들이 고지기를 때려 부상을 입히고 선혜청 정삼품 당상(堂上) 민겸호(閔謙鎬)의 집으로 몰려가 저택을 파괴하고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이 사건 발단이다.

군비를 착복했다는 이유이다.

그것도 부패한 탐관오리(貪官汚吏, corrupt official)들이 군인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사기의 주요요소라고 할 수 있는 의식주를 빼앗은 것이다.

이것은 엄밀히 따지자면 생명과도 같게 여기는 군인의 명예를 도둑질한 것이다.

 

조선초기의 병란(兵亂)은 정치적인 욕심이 있었던 이성계 위화도 회군 사건이 유명하다.

일제가 만든 한반도 역사이기에 군란의 주체 이성계가 사대주의를 신봉하는 것으로 만들어 명을 상대로 하기 싫은 전쟁을 고집하는 정부에게 노골적 불만을 표시하고 군을 되돌려 오히려 정부를 친다는 사건이다.

결국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시발이 된 것이다.

이것은 말하나마나 쿠데타이다.

임오군란의 문제는 소수의 신식군인(新式軍人)보다 대다수인 구식군인(舊式軍人)들에게 생명과도 같고 명예라고 할 수 있는 사기(士氣, morale)를 현저하게 저해하는 조치가 믿었던 정부로부터 있었고 군인들 사기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의식주에 관계되는 급료와 보급문제에서 국가가 관리를 매우소홀하여 차별했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나라에서 이러한 일은 생길 수가 없다.

한 예를 들어 북한을 보면 식량이 부족하여 죽어가는 일반인민들에게 공급할 수 없어도 인민군들에게 식량을 공급하여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북한 권력층의 의지에서 보듯이 정상적인 나라이라면 이러한 역사를 지속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고서야 이러한 일이 도저히 발생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더군다나 국가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군인들에게 조심성 없이 이렇게 막 처우를 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사실이다.

군인입장에서 보면 실제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면 누군들 반란을 가슴에 품지 않겠는가 한다.

그런데도 이러한 일을 겪으면서도 한반도 조선은 지탱한다.

한반도 조선이 이러한 상황이 과거에 비일비재 하였음에도 지속되는 특성이 있었다.

 

그런데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때 문제는 이러한 말도 안되는 임오군란(壬午軍亂)사건의 시기가 1882년이라 대조선(大朝鮮)이 해체된 년도 1881년에서 바로 이듬해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세계삼한역사에 대입하면 반도역사에서 풀리지 않는 의문도 쉽게 해결되고 자연스럽게 풀려 이해가 금방 된다는 사실이다.

결국 세계를 지배하던 대조선(大朝鮮)이 해체되고 그 이듬해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

바로 차별을 받는 군인들이 느껴야 할 나라를 잃은 서러움인 것이다.

그것을 억지로 한반도 조선에 끼워넣기 하려고 하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곤란하게 된 이유인 것이다.

그러나 반도역사는 조선말기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군란으로만 보았으며 나라가 망할 징조가 있음에도 심각하게 기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세계삼한역사적으로 볼 때 솔직히 구식군대(舊式軍隊)라 함은 해체된 대조선(大朝鮮)의 군대이라는 것이고 신식군대라 함은 대조선(大朝鮮)을 해체시킨 신생권력주체 핵심군대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풀리는 문제이다.

 

반도역사는 임오군란을 계속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군란이 일어나자 정부에서는 김춘영, 유복만, 정의길, 강명준 등 4명을 주동자로 잡아들여 포도청에 가두었다.

반도역사에서 이 사건을 풀이하길 하급군병과 서울 빈민층의 불만이 민씨정권(閔氏正權)에 대한 투쟁을 촉발하여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

앞에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언급한 대조선(大朝鮮)이 해체되었으니 힘을 잃은 조선의 군대는 찬밥신세가 된 것이다.

별기군(別技軍), 신식군대(新式軍隊)는 1881년 대조선(大朝鮮)을 마침내 해체한 세력들의 주체라 할 수 있는 군대이기 때문에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세력을 반도역사에서는 민씨정권(閔氏正權)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민씨정권(閔氏正權)은 대조선을 해체한 세력이거나 아니면 해체한 세력을 등에 업고 있는 하수인, 허수아비 정권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나중에 또 한번 이야기 하겠다.

 

한반도 역사에서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구체적으로 기술한 것을 보면 서울의 하급군병은 대부분 서울의 빈민층 가운데서 충당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빈민층과 마찬가지로 낮은 급료 때문에 대부분 적은 자본으로 수공업, 상업을 하거나 도시근교에 야채를 재배해서 팔거나 막노동에 종사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계층이고 서울의 빈민층은 도성내의 빈촌이나 교외, 한강연안지역의 변두리마을 등에 촌락을 형성하고 집단적으로 거주했다는 것이다.

소위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untouchable)과 비슷한 출신이라는 말이다.

이들 빈민은 민씨정권(閔氏正權) 아래 각종 수탈을 받았을 뿐 아니라 개항(開港?)이후 영세 수공업의 몰락, 미곡수출로 말미암은 곡가 앙등 등으로 생계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었다 하였다. 더욱이 하급군병들은 5군영(軍營)의 폐지로 일자리를 잃게 되었을 뿐 아니라 남아 있는 군병들도 별기군(別技軍)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처우에 불만을 품었으며 13개월이나 급료가 지불되지 않자 불만은 한층 고조되었다는 것이고 결국 폭발한 것이다.

무위대장 이경하와 선혜청 당상 민겸호에게 붙잡혀간 사람들을 풀어달라는 등소(等疏)를 올렸다.

등소가 실패로 돌아가자 모인 군병(軍兵)들은 민겸호의 집에 불을 지르고 무력행사에 돌입했다.

동별영 창고를 열어 각종 무기를 꺼내 무장하고 무위영과 장어영의 다른 군병들을 소집했으며, 영세상인, 수공업자 등도 군병에 가세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군란(軍亂)이자 민란(民亂)의 성격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들은 포도청을 습격해 붙잡혀간 사람들을 구출하고 의금부로 가서 죄수들을 풀어주었으며, 별기군 교련장을 습격하고 경기감영과 일본공사관(日本公使館)을 습격했다.

시간이 갈수록 하급군병, 빈민들이 가세해 대규모의 세력을 형성했으며 10일에는 흥인군 이최응의 집을 습격, 살해하고, 민비를 공격하기 위해 창덕궁으로 몰려가 민겸호, 김보현 등을 살해하고 민비를 찾기 위해 사방을 수색하였다.

그러자 사태를 수습할 능력을 잃은 고종(高宗)은 대원군(大院君)에게 정권을 넘겼고 대원군은 곧바로 정상적인 급료지급을 약속하고 별기군(別技軍), 신식군대(新式軍隊)을 폐지(?)했으며 5군영 체제를 복구시키는 등 사태수습에 나서 폭동은 가라앉았으나 군병(軍兵)들은 소규모 부대를 이루어 활동을 계속했다.

사실 대원군이 신식군대를 폐지 했다고는 하나 그것은 역사적으로 쉽지 않는 일이다. 

대원군(大院君)정권이 들어서자 일본(日本)과 청국(淸國)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위해 즉시 군대를 파견했다.

병력을 이끌고 서울에 온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는 주모자 처벌, 피해보상, 개항(開港) 및 통상의 확대, 병력주둔을 비롯한 8개 조항을 요구했으나 대원군(大院君)은 일본(日本)의 이러한 요구에 무력(武力)으로 대응할 방침을 세우고 마산포(馬山浦)에 상륙중인 청국(淸國)군에게 일본(日本)군을 견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서울에 들어온 청군(淸軍)은 대원군(大院君)정권과 일본(日本)측을 중재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대원군(大院君)을 청국으로 납치(?)해가는 한편, 군대를 몰아 서울시내와 궁궐을 장악했다.

대원군(大院君)정권이 민씨정권(閔氏正權)의 폭압과 외세의 침략을 막아줄 것을 기대했던 군병과 서울의 빈민들은 청군(淸軍)에 저항하여 무기를 들고 곳곳에서 소규모전투를 전개했다. 청군(淸軍)은 대원군(大院君)세력을 체포, 투옥하여 대원군(大院君)정권을 무너뜨리는 한편, 군병(軍兵)의 집단적 거주지인 왕십리와 이태원을 공격하여 저항세력을 진압했다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어쨌거나 반도역사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역사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던 1882년에 중동 이집트(Egypt)에서 일어난 우라비혁명(Urabi Revolt)을 들여다 보자.

여기서 주요하게 볼 것은 영국(英國)과 프랑스(佛蘭西), 이집트(Egypt) 또한 오스만제국(Osman Turk Empire)과의 관계설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이집트(Egypt)는 다민족, 다종교 국가 오스만제국(Osman Turk Empire, 1299-1922)영역내에 있던 속지였다.

1882년이라면 영국(英國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1801-1922)의 빅토리아(Victorian,1819-1901,재위:1837-1901)여왕이 본격적으로 아시아 인도(印度)대륙에 들어가는 것을 전제할 때 수에즈운하(Suez Canal, The Highway to India, 1859-1869)가 매우 필요했던 시기라고 보인다.

실제 수에즈운하 명칭에서 다르게 수식한 것을 보면 The Highway to India 즉 “인도로 들어가는 고속도로”라는 영문이 그러한 환경을 잘 반영하고 있다.

바로 1882년 9월 13일에 있었던 앵글로이집트전쟁(Anglo-Egyptian War)은 다분히 이집트(Egypt) 침탈을 목적으로 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반면 이집트는 이 시기에 근대화된 국가로 만들기 위해 모든 개혁을 단행한다.

그 중 하나가 수에즈 운하(Suez Canal, The Highway to India, 1859-1869)인데 이 운하를 만들기 위해 12년이 걸렸으며 수만명을 넘는 노동자들이 혹사를 당했고 그 때문에 이집트는 엄청난 빚을 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프랑스(제2제국, Second French Empire,1852-1870)의 차관에 의존한 것이라 이집트로써는 해결책이 서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3공화정French Third Republic, 1871-1940)는 프로이센 왕국(Kingdom of Prussia1701-1918)과의 보불전쟁(普佛戰爭1870-1871)에서 패배하여 훗날 독일제국이 되는 프로이센에게 50억 프랑의 빚을 갚아야 할 처지였기 때문에 프랑스의 차관을 갚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을 영국은 이러한 약점을 이용하여 1875년 11월 14일 일요일 저녁 영국 빅토리아시대(Victorian,1819-1901,재위:1837-1901), 후기(1870-1901)의 수상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1804-1881재임:1874-1880)는 유태인 재벌이고 영국은행가이며 정치가인 라이오넬 로스차일드(Lionel Rothschild, 1808-1879)에게 400만 파운드 빌려 수에즈운하 주식 17만주를 매입하고 1876년에 이집트를 보호국(保護國)으로 만들어버렸다.

영국 빅토리아시대(Victorian)후기(1870-1901)는 종전과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이집트의 종주국인 오스만제국(Osman Turk Empire, 1299-1922)역시 개혁과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서구제국으로부터 거액의 차관(leverage, 資本負債率)을 사용하였고 그래서 결국 서구인들의 국내무역을 더욱 확대하게 하였으며, 제국은 차츰 경제면에서 서구나라들의 반식민지가 되어가는 처지가 되었으며 그 결과, 유럽경제와 농산품 수확량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 제국 재정은

1873년의 가뭄과 1874년의 대홍수로 생활의 기반을 잃은 국민들에게 1869년부터 시작된 군대 개혁에 의한 병역 의무와 가중되는 조세 부담으로 고통을 안기게 되었으며 특히, 조세 부담률은 국가의 외채 상환 압박으로 더욱 증대되어 1875년 서구 금융공황이 밀려오자 끝내 제국은 파산하고 만다.
1875년에는 외채 총액이 2억 파운드에 달했다.

오스만제국 술탄 압뒬하미트 2세(Abdul Hamid II, 1842-1918)는 결국 모 유태인 자본이 5억 파운드나 되는 제국의 부채를 대신 갚아주었다는 일화가 있었다고 하니 이 시기에 서구 잉여자본(剩餘資本, surplus capital)은 세계질서를 틀어쥐고 있던 기존 기득권 세력들에게 무차별적 자본공격이 가해졌음을 알 수가 있다.

약세를 본 러시아가 1877년에 오스만에 대한 전면전을 시작하였고 유럽 전선에서 가지 오스만 파샤(Gazi Osman Pasha), 동부 아나톨리아 전선에서 아흐메트 무흐타르 파샤(Ahmet Muhtar Pasha)에 의한 영웅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이 1878년에 러시아에게 참패하여 경제적으로 완전 몰락한다.

제국이 완전히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나는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이때까지 고려(高麗)는 오스만으로 존재한 것이라고 본다.

많이 축소된 오스만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에게 패한 1922년까지 고려(高麗)역사(歷史)를 짊어지고 있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실제로 신생영국(新生英國)이 당시 함선을 이끌고 본격적으로 항해 식민지를 점령하기 시작한 것은 1882년 들어서 부터였고 그 첫 번째가 서부아프리카 시에라리온(Sierra Leone)이 대상이 되었다.

당시 영국(英國)은 대서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고 새로운 활동지역인 대조선의 영역이었던 인도대륙(印度大陸)으로 쉽게 들어가기 위해선 아프리카 남단을 힘들게 돌아들어가는 종전항로가 아닌 결국 다른 길이 필요했던 것이 틀림이 없다.

 

1787년 서부아프리카 시에라리온(Sierra Leone)에 영국(英國)에서 이송되어 온 북아메리카 해방노예와 백인여성들이 정주(定住)하게 하였다는 사실은 현재 영국본토에 있었던 대조선(大朝鮮)과 자연스럽게 연계할 수 있는 것인데 1896년 새로운 영국(英國)이 제 정비한 후 아프리카 내륙지방을 보호령으로 선언하였다는 사실은 1787년 영국(英國)이 하였던 정책 성격과 전혀 다른 조치였음을 우리는 간파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기존 세계지배세력들은 새롭게 파생된 자본력을 감당하지 못하는 총체적인 우를 범했다고 보인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본력이 감퇴되어 원자재를 헐값으로 넘기게 되고 그것이 다시 순환하여 고가(高價)에 수입하게 되는 악순환이 전개되면서 특히 오스만제국을 볼 때 그러한 환경에서도 자본을 가진 서구세력들에게 점차 제국의 영역이 침식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래도 영역을 지키기 위하여 전쟁이 필요하였으며 무리한 차관을 쓴다든지 서구의 잉여자본에 의지하여 빚을 지는 형상이 반복되어 경제력이 약화되어 결국 신생서구세력들에게 점차 모든 것이 넘어가게 되고 그들에 의해서 지배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환경을 이용한 영국은 최소한 1881년 이전 영국(英國)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 수에즈운하는 이집트가 소유권을 가진 것처럼 하였지만 아마도 대조선(大朝鮮)이 계획한 거대토목사업으로서 대조선(大朝鮮)사람에 의해 시공되고 완공되었다는 본다.

이런 대토목공사가 대조선의 발목을 잡았을 수도 있다고 보인다.

수에즈운하를 시공하였던 프랑스(최소한 2공화정)가 경제적으로 힘들었다는 사실 또한 대조선과 같은 처지라고 볼 때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왜 대조선이 1881년 해체되었을까?

이것은 세계삼한역사를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본력의 궁핍이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벌써 대조선이 1881년에 해체되기 이전에 수에즈운하를 시공(1859)하고 완공(1869)하였다고 볼 수 있으나 부채때문에 힘들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오스만제국 역시 경제적으로 크나큰 타격을 받았다는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일치한다.

때문에 이 수에즈운하가 신생영국(新生英國:빅토리아시대 후기)에게 필요하였을 것이고 아직 대조선의 입김이 남아 있는 이집트를 점령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어쨌던 이러한 처지의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정상적인 협력관계가 1914년까지 계속되었다.

 

또 이러한 사실과 함께 특별하게 볼 것은 1882년3월2일 퀸 빅토리아(Queen Victoria, 1819-1901) 여왕을 암살하려다 실패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범인은 스코틀랜드 사람(Scotsman) 시인(詩人)인 로드릭 맥클린(Roderick Maclean, ?-1921)인데 이 사람은 빅토리아여왕에게 우송한 자기의 시(詩)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1882년3월 2일 윈저(Windsor) 영국여왕 빅토리아에게 권총으로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 이것은 40년 기간 동안에 빅토리아를 상대로 한 8번째 마지막 시도였다하니 이것 역시 우스광스러운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암살사건은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던 중 구식군인(舊式軍隊)들이 민비를 찾아 살해하려고 했던 것과 같다고 느끼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놓치지 말아야 할 사한은 1882년 5월 8일에 미국에서는 중국인에 대한 미국이민을 제한하는 법이 발의되고 이 법은 같은 해 8월 8일 미국의회에서 통과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미국 내에 거주하거나 체류하고 있던 중국인(中國人)들을 내쫓는 법안인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마지막으로 중요하게 볼 것은 바로 1882년 5월 20일에 있었던 3국동맹-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의 동맹(Triple Alliance is formed between Germany, Austria-Hungary and Italy:1882-1915)이 체결되는 것이었다.

이 나라들은 대조선과 함께 하던 구(舊)세력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제1차세계대전에서 연합군과 대적한 독일을 대표로 하는 구세력이라고 하는 국가들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 역시 대조선이 해체되고 난 후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보이는 것이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생한 당시 이집트(Egypt) 우라비혁명(Urabi Revolt)상황을 이렇게 자료에서 말한다.

1870년대의 이집트(Egypt)는 정치적으로 부패하고 동시에 재정파탄 상태였다.

이스마일·파샤(Isma'il Pasha, 1830-1895,재위:1863-1879)총독에 의해 만들어진 거액인 부채(leverage, 資本負債率)는 반제불능 상태에까지 몰려, 프랑스와 영국에 의해 이집트의 재정(財政)이 관리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고 이스마일 총독은 이집트인에게 접근하고 있는 이러한 외부 환경을 타개하기 위해 분발(奮發)하려고 할 때 영국과 프랑스가 이스마일을 강제적으로 퇴위시키고 동시에 그들의 말을 잘 따를 타우피크1세(Tewfik Pasha、1852-1892 재위:1879-1892)를 총독(總督, Khedive)자리에 앉히고 만다.

이집트의 상류사회, 육군, 경제계는 서서히 유럽인(통칭:대조선의 반대되는 신생세력)에게 지배되었으며 유럽식의 법리체계가 도입된 것 때문에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인 이집트인의 공무원이나 군인들은 분개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유럽인이 이집트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것에 대하여 그들 스스로의 출세의 길이 막히는 것에 대해서 늘 불안하게 생각하였으며 농민들은 재정결핍에서 생성되는 무거운 세금에 불평이 늘어만 갔다.

이러한 상황은 한반도 역사와 다르지 않다.

지난 무하마드·알리(Muhammad Ali, 1769-1849)왕조의 건설에서 크게 활약한 터키계(Turk)의 용병(傭兵)들 존재도 유럽인들의 불평등한 지배와 못지 않게 토착인인 이집트인들의 불만을 더욱자극해 나가는 요인이 되었다.

이 때 터키계는 한반도 역사의 청나라와 비교가 됨을 알 수 있다.

터키계(Turk)의 용병(傭兵)들은 정부와 군대를 지배하고 있었고 케디브(Khedive)에 의해 교육(教育)면에서도 우대되고 있었으며 타우피크(Tewfik Pasha)내각은 이러한 터키계의 사람들에 의해 조각(組閣)되고 있었다. 

재정상태의 악화는 군대(軍隊)의 구조조정(business restructuring)으로 해결하고자 하면서 겨우 연명조치(延命措置)가 베풀어졌다. 1874년에는 94,000명이 소속되어 있었지만, 1879년에는 36,000명까지 감소되었다. 게다가 더 많은 구조조정(business restructuring)이 계획되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러한 상황은 이집트국내에서 지식인이라고 하는 고등교육을 받은 군인들이 실직한다고 하는 최악상황을 안게 되어버렸던 것이었다. 이에 더하여 경제 궁핍으로 오스만제국(Ottoman Turk Empire)의 쇠퇴를 이용하여 1875년부터 1876년에 걸쳐 수단, 에티오피아를 점령, 이집트 아프리카제국을 만들 의도로 벌렸던 에티오피아(Ethiopia)와의 전쟁(The Ethiopian-Egyptian War: 1874–1876)도 이집트 군인(軍人)들에게 불만을 더해가는 요인이 되었다.

1870년대부터 1880년대의 이집트는 출판(出版)이 활발하게 되어 신문도 발행되게 되었다.

이집트인들의 문자해독율인 문맹퇴치율도 향상되어, 반 왕정(反王政)의 여론이 조성되는데 충분한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었다.

 

한반도 조선역사는 대원군으로 집약되지만 그것과 다르게 이집트는 영웅이 드디어 나타난다.

이것이 정상적인 역사이다.

바로 지금까지도 이집트의 민족주의자  또는 영웅이라고 칭송되는 당시 대령 우라비(Ahmed Orabi or Ahmed Urabi, 1841-1911)라는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이집트 지식인, 군대장교, 농민들의 불만을 표현했던 사회정치적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중동의 주요 이슬람 학문기관인 카이로(Cairo)의 알아자르(AL-Azhar)에서 공부했다. 군대에 징집되어 1875-1876년의 이집트·에티오피아 전쟁(The Ethiopian-Egyptian War: 1874–1876)때 병참부 장교로 근무한 후 대령으로 진급했고 1879년 이집트 총독(總督, Khedive) 이스마일 파샤(Isma'il Pasha, 1830-1895,재위:1863-1879)에 대한 군장교들의 반란에 가담했다. 젊은 나이에 최고의 계급을 독점한 투르크(Truk)인 및 체르케스인(Adygea) 장교들을 제거하는데 목표를 둔 군대 내 비밀결사에 가담했고 1881년 이들에 대한 반란을 주동했으며 그는 "이집트는 이집트인에게"(Miṣr li'l Miṣriyῑn)라는 구호 아래 민족 영웅으로 등장하였
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은 발생과 더불어 대원군에 의해 소멸되는 것으로 기록되지만 이집트 우라비 혁명(Urabi Revolt:1879-1882)은 일단 성공한다.

1881년의 여름에 대령 우라비(Urabi)가 지도하는 이집트인의 지도자층과 총독(總督, Khedive)타우피크1세(Tewfik Pasha、1852-1892 재위:1879-1892)의 사이에서의 긴장이 높아졌다.

9월 총독(總督, Khedive)은 우라비에 대해서 모든 일자리에서 물러나 카이로를 떠날 것을 명령했지만, 우라비는 케디브(Khedive)의 명령을 거역하고 터키계(Turk)의 내각 총 사직과 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사람을 세워 새로운 정권의 수립을 요구했다.

결국 총독(總督, Khedive)타우피크(Tewfik Pasha)는 민심을 등에 업은 우라비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고 우라비와 그의 지지자에게 정권을 이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882년 1월 8일, 프랑스와 영국은 공동으로 케디브(Khedive) 타우피크(Tewfik Pasha)가 정부의 대표성이 있다는 것을 선언했다.

이 공동선언은 우라비(Urabi)를 수반으로 하는 정권을 화나게 하고 말았다.

우라비(Urabi)정권은 지금까지 정권을 지배해 온 유럽인들을 추방하는 것과 동시에 많은 터키계공무원도 해고를 한 우라비(Urabi)의 개혁은 유럽인 및 대토지소유자, 터키계(Turk)의 엘리트층, 고위성직자, 사제(司祭:Ulama), 시리아계의 기독교인(基督敎人)의 반발을 불렀다.

우라비(Urabi)의 지지층은 낮은 지위의 울라마, 이집트계의 공무원층, 지방출신의 지도자들이었다.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주교제의 기독교 교파, 콥트(Coptic Orthodox Church of Alexandria)교는 양쪽 모두의 입장에서 분리되었는데 코프트 교도에게 있어 유럽인이 이집트에서 실시한 모든 행위자체는 용서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종교(多宗敎) 사회인 이집트에서 같은 크리스트교도인(基督敎人) 시리아계의 기독교인(基督敎人)들과 여러가지 분야에서 라이벌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코프트 교도들은 우라비를 지지함으로서 기층민을 통합하게 된다.  

한편으로 한반도 역사에서 청(淸)이라고 판단되는 오스만제국(Ottoman Turki Empire)의 술탄(sultan)에게도 서로 접촉을 시도한다.

타우피크(Tewfik Pasha)는 술탄(sultan)에게 군대의 파견을 요청했지만 술탄(sultan)은 해외의 크리스트교도의 간섭에 대해서 분루하고 있는 이슬람교에 대해서 군대를 파견하는 것은 유익하지 않다고 하였고 우라비 역시 타우피크가 케디브(Khedive)의 지위에서 물러나는 것을 요청했다는 사실에서도 술탄(sultan)은 거부했다.

이것은 한반도 역사가 말하는 청(淸)과의 관계와 전혀 다른 상황을 낳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역사는 청이 들어와 온갖 만행을 다 저지르기 때문에 오히려 적대감이 증폭되어 폭동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다른 것이다.

그러던 중 1882년 6월 11일의 낮,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대로에서 폭력사건이 발생했다.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그리스인, 몰타인, 이탈리아인의 경제인들을 습격하여 약 50명의 유럽인과 250명의 이집트인이 살해가 되고 말았다. 이 폭동이 발생한 이유는 잘 알지 않지만 케디브(Khedive)타우피크(Tewfik Pasha)와 우라비(Urabi)는 서로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5년정도 차잉가 나지만 운요호사건과 비슷하다고 여겨진다.

 

한편으로 우라비(Urabi)의 인기가 계속 올라가자 위협을 느낀 타우피크(Tewfik Pasha)은 프랑스와 영국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타우피크(Tewfik Pasha)는 한반도 역사에서 민씨정권(閔氏正權)과 비교가 된다.

이집트군의 총사령관이던 우라비(Urabi)는 다시 저항군을 조직하고 타우피크(Tewfik Pasha)총독을 배신자로 선언하기에 이르런다.

우라비(Urabi)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해안의 포대를 수비하고 있는데 최후통첩을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받는다.

그 내용은 포대를 무장해제 할 때까지 시가지를 포격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최후통첩(最後通牒, ultimatum)은 우라비에게 무시되어 영국해군은 뷰챔프 시모아(Frederick Beauchamp Paget Seymour, 1821-1895)의 명령으로 포대에 포격을 개시했다.

프랑스 해군 역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포격에 참가했다.

영국해군은 이집트군의 저항이 있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을 점령에 성공한다.

그러면서 점차 혁명이 이집트(Egypt)전체에 퍼지자 영국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집트(Egypt)에의 개입을 본격화했다.

9월이 되자 영국 육군은 운하지대에 상륙했다.

운하지대에의 진출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및 카이로(Cairo)의 점령에 앞서 실시되는 명목상 군사작전이었으나 영국의 최대관심사는 영국이 이집트에 공여해 온 많은 차관을 우라비(Urabi)가 파기할 것으로 생각하고 대신 수에즈운하(Suez Canal, The Highway to India, 1859-1869)의 지배에 들어간다는 계획이었다.

마침내 1882년 9월 13일 영국육군원수 울즐리(Garnet Joseph Wolseley)의 지휘 아래 수에즈운하 중간 항구도시 이스마일리아(Ismailia)에 상륙한 영국군대는 우라비(Urabi)의 군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려 승리하였다.

이것이 앵글로이집트전쟁(Anglo-Egyptian War)의 일환인 텔엘케비르전투(Battle of Tel el-Kebir)이다. 결국 우라비(Urabi)는 체포되었고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반란자(反亂者)라는 이름을 붙여 처벌하려고 하였지만 민중의 사이에서는 우라비(Urabi)는 이집트를 식민지(植民地)지배로부터 해방(解放)시켜주는 영웅(英雄)이었던 점을 감안하여 실론(스리랑카)으로 추방하게 된다.

이후 여러자기 명목으로 영국(英國)은 이집트(Egypt)를 보호국화(保護國化)했지만 1922년 독립이후에도 이집트(Egypt)에 내정 간섭을 계속하게 된다.

그것은 1952년의 이집트에서 일어난 이집트혁명 (Egyptian Revolution)까지 계속되었다.  

우라비(Orabi Pasha,Ahmed Orabi or Ahmed Urabi, 1841-1911)의 평가는 이집트에서 최초의 반식민지 운동이라는 사실에서 이집트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부각된다.

특히,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1918-1970 재임:1958-1970) 정권 시대에는 우라비 혁명은 외국의 부당한 점거에 대해서 싸운 훌륭한과업이라고 하는 평가가 내려지고 있었고 1950년대 후반이 되자 우라비 혁명의 평가는 이집트뿐만 아니라, 범아랍주의(Pan-Arabism) 대두와 함께 제국주의에 대한 아랍세계의 저항으로서 의미가 있다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의문을 제기 하는 것은 우라비가 반역자로 몰려 유배간 곳이 실론 지금의 스리랑카라고 하였다.

실론(Ceylon)은 지금의 스리랑카(Sri Lanka)이다.

15세기 이후 포르투갈 시대 때는 세일료(Ceilao)로 불렸고, 네델란드시대 때는 세일란(Ceylan)으로, 영국제정시대 때는 실론(Ceylon)으로 불렸다. 1972년부터 스리랑카(Sri Lanka)라고 지칭했다.

우라비가 유배를 간 것과 대원군이 청나라에게 납치되어 4년간 천진(天津) 보정부(保定府)에 억류되어 생활하였다 것과 상황이 비슷하다.

 

어쨌던 위 두 사건을 비교 해보면 시대적인 상황이 매우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군인은 어느 국가이던지 극단적으로 쿠데타(coup d‘ Etat)를 발생시킬 수 있는 에너지라 할 수 있다.

왜 쿠데타가 일어날까?

그것은 불안한 정치에 군사력을 동원한다는 것만큼 안전한 것이 없다는 믿음이다.

민씨정권(閔氏正權)은 허수아비정권으로서 이집트의 타우피크1세(Tewfik Pasha、1852-1892 재위:1879-1892)정권과 비교할 수 있다.

한반도 역사의 민씨정권은 일본과 청나라를 의존한 것이라면 타우피크1세는 영국과 프랑스를 의지했다는 것이고 한반도 역사에서는 청군은 오스만제국으로 비교될 수 있으며 물론 일본은 영국과 프랑스로 비교됨을 알 수가 있다.

대원군은 우라비혁명(Urabi)을 이르킨 우라비(Ahmed Orabi or Ahmed Urabi, 1841-1911)정권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원군은 신분을 다르게 만들었고 첫째 군인이 아니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한반도 조선 역시 개화기에 임오군란이 발생했다는 것이고 이집트도 개화기의 열풍에 휘말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표면화한 것은 정부의 재정궁핍이다.

한반도 조선사는 이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으나 군인들의 월급을 13개월씩 밀렸다는 것은 재정궁핍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가 있다.

이집트의 우라비혁명은 정부가 수에즈운하를 건설하는데 쏟아 부은 재정에서 거액의 부채로 남아 반제불능 상태에까지 몰렸고 자본을 제공한 프랑스와 영국은 이집트의 재정(財政)을 관리하는 상황까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절대 정부 운영이 자주적이라고 할 수가 없다.

권력엘리트들은 보수(保守)세력과 혁신(革新)세력으로 구분되기 시작하면서 두 세력 간의 권력투쟁이 심해지면서 모든 고통은 가난한 기층민(基層民)이 부담해야 하는 총체적 난맥으로 두 역사가 공히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반도 조선에서는 개화파(開化派)와 수구파(守舊派)의 대립에서 민비와 대원군 간의 권력투쟁이 첨예화 되었으며 우라비혁명 역시 친(親) 서방정권 총독(總督, Khedive) 타우피크1세(Tewfik Pasha、1852-1892 재위:1879-1892)와 혁명세력인 우라비(Colonel Ahmed Orabi or Ahmed Urabi, 1841-1911)와 대립이 그렇다.

1876년(고종 13)에 맺어진 한일수호조약((韓日修好條約, 강화도조약)으로 인해 대원군이 취한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왕의 친정(親政)으로 변하면서 민씨정권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볼 때 한반도 조선에서 일어난 임오군란과 우라비 혁명의 발단은 거의 같은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임오군란의 발단은 구식군대의 처우가 신식군대와의 차별을 두어 분개하게 했으며 이집트의 우라비혁명 역시 터키계(Turk)의 용병(傭兵)들이 정부와 군대를 지배하고 있으면서 모든 면에서도 우대되고 있었고 심지어 권력기관인 내각조차도 터키계의 사람들에 의해 조각(組閣)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임오군란을 보면 군란과 민란이 뒤 섞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우라비혁명 역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란(軍亂)도 심각하였지만 기득권에 속하지 않고 사회 밑바닥에 있어 사회전반을 지탱해주는 기층민(基層民)의 불만도 두 역사 모두 극에 달했다고 볼 수 있다.

민씨정권이 개화정책을 추진하여 일본과 구미제국과의 교섭통상관계가 이루어지면서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이런 가운데 개화파 관료가 제도개혁에 따라 대거 등장하자 수구파의 반발이 격화되었다는 사실은 우라비 혁명과도 똑같이 연결된다.

우라비혁명 역시 유럽세력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 경제침략이 있었고 그로인한 재정압박은 그대로 군인과 기층계급층에게 부담으로 가해 졌으며 모든 경제활동에서 소외시키는 정책이 일어나면서 봉기를 자초했다는 것이고 한반도 조선역사 역시 민씨정권이 인사행정의 문란, 매관매직, 관료층의 부패 및 국고의 낭비, 일본의 경제침략으로 인한 불만 등은 한 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매우 같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두 사건에서 결정적으로 같다고 여기는 것은 임오군란에서 흥분한 군인과 기층민들이 일본 공사관을 조선인들이 습격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1882년 6월 11일의 낮,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대로에서 그리스인, 몰타인, 이탈리아인의 장사꾼을 습격하여 약 50명의 유럽인과 250명의 이집트인이 살해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결국 이것을 핑계삼아 영국과 프랑스는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점령한다.

 

여기서에서 불현듯 생각나는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결과 한반도 역사에서 일본은 영국과 프랑스라고 할 때 우리는 한반도 역사를 다시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이런 역사사실에서 그저 한심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운요호사건을 한 번 간략하게 보자.

운요호사건 발단은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측량을 구실로 정부 동태를 살피다가 수비대에 걸려 전투를 벌인 사건이며 이것을 트집잡아 강화도 불평등조약을 맺었다는 이야기다.

얼마나 황당한 이야긴가?

이런 이야기가 가능한 것은 그들이 한반도조선을 초라하게 꾸민 결과이다.

감히 조선이 그들에게 문호개방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이에 불만을 품엇다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고 어떻게 지금 열도에 있는 일본이 열강 세력에 앞서 조선 진출을 시도하는 계획을 세웠는가 하는 말이다.

그 타개책으로 무력시위로써 조선당국을 굴복시키고자 하였다?

한반도 조선역사는 1875년 이러한 말 같지도 않는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과 1876년 무력으로 위압하여 강화도에서 1876년 2월 26일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朝日修好條規)을 체결하면서 1876년 2월 27일 부산항(釜山港)을 개항케 한 역사라고 하지만 나는 절대 믿을 수 없다.

그리고 임오군란(壬午軍亂)과 우라비혁명(Urabi Revolt)의 사건을 종합할 때 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개항케 한 사실도 부산항 개항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게 한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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