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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불(Greek fire)과 고려(高麗) 맹화유(猛火油)는 같은 것인가?
[기벌포해전(伎伐浦海戰:673년)=673년에 있었던 살라에움해전은 같다]
석유(石油:petroleum)-아시아고려연합의 실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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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으로 따져 고려(高麗, AD960-AD1392)와 그리스 불(Greek fire)이 사용된 시점(AD673, 674)과는 많은 시간차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쉽지 않다고 하더라도 고려 이전 신라(新羅, BC57-AD 935)가 그리스 불의 진짜 주인공이라면 인용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고 본다.
그러나 신라의 기록에서는 석유란 자체기록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하겠지만 다 같은 삼한역사의 전통 이음으로 보았을 때 고려 기록을 바탕으로 대체는 가능한 이야기가 된다.
본 블로그 2009.09.19 에 실린 윗글에서 석유(石油:petroleum)란 내용으로 도저히 한반도라 할 수 없는 고려연합의 실제 영역적인 문제를 냉정하게 집어보았던 적이 있다.
그 글에서 맹화유가 즉 석유가 나온 곳이 대륙 섬서성(陝西省) 고노현(高奴县)이라 했는데 고노현은 지금의 연장현(延长县)으로서 그곳은 현재 대륙자원지도를 보더라도 실제 석유가 매장되어 있는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대륙 고노현(高奴县)이란 장소가 유라시아에 있던 지명이 근세기에 이동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 고려가 한반도에만 존재했다는 사실은 터무니없는 거짓이라는 것을 명명백백 밝혔던 바다.
최소한 현재 고노현이라고 하여도 대륙 그곳에서 몇 천 리 서쪽 밖이면 분명 유라시아와 지중해와 만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던 그곳까지 고려의 영역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못된다.
반도사관에 매몰되어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죽었다 깨어나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지만 우리나라 사서가 아니라 대륙사서를 통한 결과인 것이다.
대륙사서까지 고려가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결국 증명하는 것인데 도무지 우리가 믿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믿는다는 말인가?
이렇게 볼 때 반도사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바르게 이야기하여도 믿지 않으려하니 그 폐해는 낭폐에 가깝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스스로가 못났으면 그만이지 물귀신이 되겠다고 야단들이다.
고려(高麗, corea, korai)에서 발생한 지진(地震)지역은 지중해와 중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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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기록으로 본 고구려(高句麗)는 그리스(Gre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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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가 고려에 났다고 하는 사실에 부정할 수밖에 없는 식민지사관에 빠진 부류들에게 애잔한 감정이 없지 않다.
그러나 석유문제가 아니라도 이미 본 블로그에서 현대적 과학으로 풀 수밖에 없는 지진 (earthquake, 地震)자료를 가지고 삼국사기기록으로 나타난 고려에서 발생한 지진역사기록을 따져 본 결과 삼한역사의 위치 영역이 지중해 근해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혔다.
고려 뿐만아니라 신라, 백제 고구려까지 삼한의 나라가 모두 이와 같다는 사실을 본 블로그에서 증명했던 바였다.
신라(新羅) 지진(地震)은 바로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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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이 왜 신라마(新羅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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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반란(東京反亂)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난 십자군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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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석유가 고려에서 났다는 사실과 함께 지진기록까지 고려영역이 지중해근해라는 사실이 밝혀진 마당이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영역적인 문제로 왈가 왈부 할 일이 없어야 맞다.
그렇다면 삼한의 국가들은 연합, 또는 연방국 형태로 지중해근해, 근방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서 이를 전제하고 고려 맹화유와 그리스 불과의 동일 관계 문제를 풀 수밖에 없는 것이 되었다.
고려 또는 삼한 역사의 영역이 지중해연안에 있었다면 그리스불과 고려 맹화유(猛火油)는 다를 수가 없다는 것이 틀이 잡힌 것이다.
그러나 고려가 시대적 시간차 때문에 직접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면 대신 그리스 불이 존재하던 시대에 신라(新羅, BC57-AD 935)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먼저 석유가 고려에 났던 사실을 기록으로 살펴보자.
예(1):石油:猛火油。出高麗之東數千里。日烘石熱所出液之。惟眞琉璃器貯之。入水涓滴。烈焰極發。餘力入水。魚鼈皆死。邊人禦賊。此石腦油也。[昨夢錄]
석유(石油) ○ 맹화유(猛火油)는 고려의 동쪽 수천 리 밖에서 나는데, 해가 돌을 뜨겁게 달구면 나오는 액체이다. 이것은 오직 진짜 유리로 만든 그릇으로만 저장할 수가 있다. (물에 들어가면 물방울이 일어나면서 몹시 맹렬하게 불꽃이 일어나며, 타고 남은 힘이 물속으로 들어가 물고기가 모두 죽는다.) 변방 사람들이 적을 막는 데 쓴다. 이는 석뇌유(石腦油)이다. 《작몽록(昨夢錄)》
한글판 이시진의 "본초강목"에서 언급한 "작몽록" 부분 해석을 보면,
"그것이 한참 타고 있을때 물이 들어가면, 열염(烈焰)이 일어나고, 갑자기 여력(餘力)을 발한다. 물에 넣으면 어별(魚鱉)이 몰사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2):[黃衷海語。猛火油出高麗。滅夏日初出時烘石。極熱則液出。他物遏之。卽爲火。此未然。恐出樹木者是也。]
○ 황충(黃衷)의 《해어(海語)》에, “맹화유는 고려에서 나온다. 한 여름에 해가 처음 뜰 때 돌을 달구어서, 돌이 아주 뜨겁게 달구어지면 액체가 나오는데, 다른 물체가 여기에 닿으면 즉시 불에 탄다. 그런데 이 맹화유는 그렇지가 않으니, 아마도 나무에서 나오는 진액(津液)인 듯하다.” 하였다.
예(3):石油。高麗有之。自石巖流出。與泉水相雜。汪汪而出。肥如肉汁。土人以草挹人缶中。墨色頗似淳漆。作雄硫氣。土人多以燃燈甚明。得水愈熾。不可入食。其烟甚濃。燒其煤作墨。光黑如漆。勝于松烟。[本草綱目]
○ 석유(石油)는 고려에 있다. 석암(石巖)으로부터 흘러나오는데, 샘물과 서로 뒤섞여 솟아 나오며, 미끄럽기가 고기 기름과 같다. 그 지방 사람들이 풀에 적셔서 항아리 속에 보관한다. 색이 검어서 자못 옻칠[漆]과 같으며 웅류기(雄硫氣)를 만든다. 그곳 사람들이 대부분 이것으로 등불을 밝히는데, 아주 밝다. 물과 만나면 더욱 맹렬하게 타며, 먹을 수 없다. 그 연기가 아주 짙어서 그을음을 긁어모아 먹[墨]을 만드는데, 광택이 나면서도 옻처럼 검어 송연묵(松烟墨)보다 좋다.《본초강목(本草綱目)》
위 예(1-3)에서 보면 고려에서 석유가 나왔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가 못된다.
반도사관으로서 보았을 때도 그렇게 생각해야 하겠지만 더군다나 반도사람이 아닌 반도사에서 모화사상의 근원인 중국이라 칭하던 송나라사람 강예지(康譽之)의 작몽록<昨夢錄>에서, 또 1536년 명나라사람 황충(黃衷)이 동남아 역사와 지리 및 중국 남양의 교통상황을 기록한 책인 해어<海語>에서, 중국 명(明)나라 때 이시진(李時珍:1518-1593)이 저술한 의서(醫書)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도 모두 하나같이 고려에 석유가 나온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분명 고려에서는 석유가 나왔다는 사실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냉정하게 생각하고 다 알다시피 한반도에는 석유가 전혀 나오지 않는 지역이다.
송(宋) 나라 강여지(康譽之)의 작몽록(昨夢錄)에 이르기를 “고려의 동쪽에 맹화유(猛火油)가 나는데 한여름의 태양열(太陽熱)에 돌이 뜨겁게 달면 액(液)이 나오며 그 액이 다른 물체에 닿으면 불이 붙으므로 유리그릇에만 담을 수 있다. 서북 방성고(防城庫)에 못(池)을 파서 맹화유를 저축했는데 한 달이 되지 못해서 그 못의 흙이 모두 적황색(赤黃色)으로 변하였으므로 또다시 못을 파서 옮겼다.” 하였다.
맹화유는 석유가 되기 전에 원액이라고 볼 수 있는데 나프타(naphtha)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위글에서도 맹화유는 다른 물체에 닿으면 불이 붙는다 했고, 담을 수 있는 것은 유리그릇뿐이라고 했으며 무기고인 방성고(防城庫)에 못을 파서 맹화유(猛火油)를 담아 놓았더니 흙이 모두 적황색(赤黃色)으로 변하였다 하는 사실은 거의 성질상 나프타(naphtha)란 추측을 가능케 하고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리스 불”로 인식할 수 있는 조건으로 충분하다는 말이된다.
맹화유(猛火油)는 석유를 원유를 증류할 때, 35∼220℃의 끓는점 범위에서 추출되는 탄화수소의 혼합체로 끓는점이 낮고 불이 쉽게 붙는 성분이어서 물을 뿌려도 불이 잘 꺼지지 않기 때문에 화염방사의 연료로서는 최적이라고 [네이버 백과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위의 풀이를 보더라도 고려에서 났다는 맹화유(猛火油)는 다른 물체에 닿으면 불이 붙는다는 “그리스 불”처럼 화염방사기 연료로서 최적이라고 여겨지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또 중국 송나라의 무기로 알려진 맹화유(猛火油)를 담은 맹화유궤(猛火油櫃)를 설명한 것을 보면 맹화유궤는 석유를 성분으로 하는 맹화유(猛火油)를 사용한 화염방사기로 ‘맹화유를 담는 궤짝’이라는 뜻이라 했고 송나라 때 성벽에 달라붙어 기어오르는 병을 물리칠 때나 수상전에서 적의 배를 불사르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하는데 이것은 이슬람병사들이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릴때 모습과 비슷하고 그리스 군사 즉 비잔티움제국 수군들이 이슬람병사들을 해상에서 이 그리스 불로 불태워 수장시키는 모습을 보는 듯하여 동일 장면으로 추측하기에 충분하다는 말이다.
물론 송나라가 고려라는 사실은 고려와 몽골편에서 수 십 번 이야기 한바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실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송나라가 가진 맹화유와 고려에서 났다고 하는 맹화유는 다르다고 크게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과연 이것이 고려의 맹화유(猛火油)의 실체라면 그리스의 불(greek fire)과 같은 면이 너무나도 많고 서로의 공통점에서 공히 무기사용이 가능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터넷사이트[역사 속에 신무기]의 글에서 보면 “맹화유(猛火油)를 담은 맹화유궤(猛火油櫃)는 이슬람의 콘스탄티노플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비잔틴 제국이 673년 살라에움 해전에서 처음 사용한 그리스 화약(greek fire)과 동일한 성격의 무기이다. 아직 두 무기 사이의 관계나 연관성에 대해 명확히 규명된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적 개념의 화염방사기(火焰放射器, flame thrower)에 비견할 수 있는 이 두 무기는 공통점이 매우 많다”는 사실에서 보더라도 본 블로그의 생각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도 맹화유가 나프타(naphtha:가연성 액체 탄화수소 혼합물)로 추정된다고 까지 했다.
그것은 성질이 같다는 것 이외 고대 페르시아(Persia, BC700-BC330)에서 휘발성 약체 연소물을 발견했다는 것이고 이를 '나프토'라고 부른 것이 어원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네이버백과사전은 송나라 맹화유궤(猛火油櫃)구조를 자세하게 설명하였는데 연료통으로 쓰이는 커다란 함 위에 분사기인 횡통(橫筒)을 장착하고, 횡통에 찰련장(擦練杖)이라는 봉을 넣어서 앞 끝부분에 화루(火樓)라는 부품을 부착시켰고 사이펀(Siphon: 높은 곳에 있는 액체를 용기를 기울이지 않고 낮은 곳으로 옮기는 연통관)을 이용하여 연료가 횡통으로 올라와 점화를 시키면서 앞으로 발사되는 구조라 했다.(아래 그림도식)
그렇다면 맹화유궤(猛火油櫃:네이버사전)설명에 이어 그리스 불에 대한 기록도 한번보자.
[그리스의 불]
[Hand siphon for Greek fire, medieval illumination]
반 기독교인이며 영국역사가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의 [로마제국 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에 의하면 이슬람군은 전혀 저항을 받지 않고 보스포루스(Bosphorus)해협을 건너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포위하였다.
674년 동로마는 수십 년간 아랍군에 밀리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예 그 도성이 포위당하기에 이른 것이다.
야지드(Yazid)가 이끄는 아랍군은 지금까지의 승세로 볼 때 자신들이 패할 일은 없다며 의기양양하였지만 몇 가지 중요한 변수가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은 테오도시우스 황제(Flavius Theodosius, 408-450,재위:401-450)가 지은 난공불락의 거대한 성벽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이슬람군도 수십 년간 싸우면서 많은 성채들을 보았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성벽 같은 거대한 방벽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아랍군은 정면공격을 시도하여 보았지만 이중성벽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갖가지 발사물, 그리고 성벽 앞의 해자에 막혀 큰 손해만 입고 번번이 실패하였다.
아울러 동로마군에게는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무기가 생겼다. 바로 ‘그리스의 불
(Greek Fire)’이라 불리는 액체 화약이었다.
전통적인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의 불은 7세기 중반에 시리아 출신의 동로마 사람 건축가인 칼리니코스(Kallinikos)가 여러가지 재료를 섞어 발명한 액체 화약이다. 일설에는 칼리니코스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던 무기였는데 시리아가 아랍세력에게 점령당하면서 피난을 한 칼리니코스가 콘스탄티노플로 가져온 것이라 하였다. 또 다른 설은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던 학자들이 여러 가지 재료를 가지고 실험을 하다가 우연히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발명하였건 간에 대부분의 무기와 배가 나무로 되어있던 시절에 그리스의 불은 핵폭탄이나 다름없었다.
불이 붙기만 하면 빠르고 뜨겁게 타올랐고 물을 부어도 끌 수가 없었다.
이슬람군에게는 콘스탄티노플의 거대한 장벽을 파해(破解)할 방법이 없었고, 한편 콘스탄티노플은 흑해를 건너 우크라이나 지방(Ukraina)에서 생산되는 식량을 안전하게 바닷길로 공급받으면서 1차 콘스탄티노플 전투는 지루한 공방전이 되었다.
이슬람군은 따뜻할 때는 공격하다가 겨울이 되면 120km밖의 시지쿠스(Cyzicus)섬에 구축한 보급기질로 후퇴하여 쉬다가 다시 공격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아울러 아랍군이 다시 건너와서 공격하게 되면 동로마 해군은 그리스의 불을 활용하여 아랍군의 보급선들을 공격하였고,
이슬람군은 계속 공격은 하면서도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지리한 포위전을 끝낸 것은 677년 콘스탄티노플 앞의 마르마라해(海, Sea of Marmara)에서 벌어진 대규모 해전이었다.
동로마 해군은 그리스의 불을 큰 통에다 채운 다음 긴 관에 바람을 불어넣어 마치 화염방사기와 같은 원리로 이슬람 해군을 대파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식량사정이 좋지 않던 이슬람군은 본격적으로 굶주릴 위기에 처하였고 결국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그러나 물러가는 와중에 아랍 함대는 폭풍을 만나서 더 많은 피해를 입은 다음에야 겨우 귀항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에 의하면 수년간의 전쟁으로 약 3만의 아랍군이 전사하였고 동로마에서 움마이야 왕조(The Umayyad Caliphate, 661-750)의 도성인 다마스쿠스(Damascus)로 사절이 파견되었으며 약 30년동안 싸우지 않기로 하는 평화협정이 맺어졌다 한다.[이장환 글]
[그리스의 불을 사용하는 비잔티움 해군(11세기)]
인터넷상에 있는 이장환 님의 글인데 이글에서 보면 당시 그리스불이 사용되었던 상황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 불을 한어자료에 보면 희랍화(希臘火) 혹은 라마화(羅馬火), 비잔티움인(拜占庭人,Byzantium)들은 이를 야화(野火), 해양지화(海洋之火), 유동지화(流動之火), 액체화염(液體火焰), 인조지화(人造之火), 방비지화(防備之火) 等等 으로 다르게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상당히 많은 이름으로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 불이 신라와 연관되는 상황도 우리가 무시 할 수 없다.
놀랍게도 위 그리스 불이라는 글을 보면 그리스 불이 탄생하게 한 673년에 일어난 해전, 이 전쟁 역시도 년대적, 시대적 또는 사건 상황등으로 보았을 때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의 기벌포해전(伎伐浦海戰)과 닮았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년대만 같다고 하는 것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중요한 것은 본 블로그에서는 이미 신라와 비잔티움제국은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위에 적시한 본 블로그의 글인데
(1)신라(新羅) 지진(地震)은 바로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지역이다.란 글
(2)콘스탄티노플이 왜 신라마(新羅馬)이다.글
(3)동경반란(東京反亂)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난 십자군사건이다”란 글에서 이미 신라와 비잔티움제국이 같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렇다면 신라의 기벌포해전(伎伐浦海戰)은 당시 당나라와 신라와의 싸움 나당전쟁(羅唐戰爭, 670-676)에 일환이었지만 그리스 불이 사용된 해전인 살라에움(673)과 거의 같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네이버백과사전에 보면
기벌포해전(伎伐浦海戰)은 676년(문무왕16년) 신라해군이 기벌포(伎伐浦)에서 당나라 해군을 크게 이긴 싸움이라고 했고 645년 신라와 당나라가 군사동맹을 맺고 연합해 660년 백제를 무너뜨리고,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나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 이후 당나라는 그 지역을 직접 지배하고, 신라마저 지배하려고 했으며 또한 김춘추와 당(唐) 태종 사이에 백제와 고구려의 평양이남 땅을 신라에게 주기로 약속한 영토분할약정을 당나라가 어김으로써, 신라는 독자적으로 백제의 옛 땅에 대한 적극적인 점령정책을 펴나갔으며 마침내 나당전쟁(羅唐戰爭, 670-676)이 벌어졌다.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싸움은 670~676년까지 7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신라가 675년 매초성(買肖城)에서, 이듬해 기벌포(伎伐浦)에서 당나라를 크게 깨뜨려 나당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했다. 676년 11월에 있었던 기벌포해전(伎伐浦海戰)은 당나라 군사가 북쪽의 천성(泉城)과 매초성에서 신라군에게 크게 패하고, 당의 설인귀(薛仁貴)가 그 남은 군사를 이끌고 바다로 남하하자 신라군이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이들을 공격해 이긴 싸움이다. 신라는 673년 함선 100척을 보내어 서해를 지키면서 적극적인 방비책을 마련하고 있었는데, 676년 설인귀의 해군이 기벌포로 내려오자 이곳에서 큰 접전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사찬(沙飡) 시득(施得)이 이끄는 신라 해군이 졌으나 크고 작은 22회의 싸움에서 결국 당나라 해군을 크게 무찔러 적군 4,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 전투는 매초성 싸움과 더불어 나당전쟁을 끝맺는 중요한 싸움으로 신라가 승리함으로써 당군을 축출할 수 있었다고 했다.[네이버백과사전]
[투석기-greek fire catapult]
위 백과사전의 기벌포해전의 기록을 보더라도 결국 기벌포해전은 나당전쟁을 끝 맺는 중요한 싸움이라고 했고 그리스 불을 사용한 해전 역시 673년 콘스탄티노플이 사라센군에 678년까지 포위되었으나 ‘그리스 불(火)’을 사용함으로서 이를 격퇴시켜 결국 이슬람군과 이후 30년간 전쟁을 하지 않는 조약을 맺었다는 결과가 같은 전쟁이라고 할 정도 실제상황이 같다는 사실이다.
이상은 신라와 비잔티움이 같은 나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는 충분한 개연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리스 불”의 실체를 밝히는 일인데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가 테오파네스(Theophanes)에 따르면 이 '그리스 불'화기를 처음 만든 것은 670년경 유대의 헬리오폴리스(Heliopolis) 출신의 건축가이자 화학자 기술자인 칼리키누스(Kallinikos)라고 했고 이 화기를 만드는 비법은 비잔티움 제국에서 일급비밀로 간주되어 워낙에 비밀이 철통같이 잘 유지되었던 탓에 현재까지도 그 정확한 성분을 알지 못할 정도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덧붙이고 있다.
왜 이처럼 알려지지 않도록 만들었을까?
무엇이 겁나 비잔티움은 이러한 비밀을 안고가야 했을까?
이것은 근세기에 펼쳐진 역사판짜기 동일선상에 놓고 보아야 할 사한이라는 것이다.
신라와 고려, 비잔티움과 오스만제국 그리고 아랍제국간의 복잡한 역사관계를 숨겨야만 했던 근세기 역사학자들의 고민이 알게 모르게 밀착되어 묻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모든 자료에서 이 화학적인 방법의 비밀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자료로 보면 거의 다 밝혀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순수한 황, 주석, 사르코콜라(페르시아 고무), 역청, 녹인 초석, 석유, 송진을 준비한다. 이것들을 끓인 다음 밧줄에 스며들게 해서 불을 붙인다. 이 불은 소변, 식초, 모래로만 끌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단편적인 것일 수도 있고 또한 분명치 않는 훗날 역사가의 추측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거의 성분을 밝혀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는 주장이다.
자료가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그것과 다르게 자세한 자료가 그들에겐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한 것이다.
위자료에서 보듯이 전혀 그리스 불을 만들 수 없는 신빙성이 없는 설명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보더라도 그리스 불의 제조방법이 거의 자세하게 나열되고 있다는 점은 결국 오스만제국에게 비잔티움제국이 망하면서 그 기술이 강압에 의한 것이나 아니면 자연스럽게 전수 되었을 것이라는 간단한 추측정도는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근세기에 역사판짜기 과정에서 교묘하게 신라와 고려, 비잔티움과 오스만제국, 아랍제국간의 관계가 면밀하게 밝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어떤 식으로 든지 사실과 다르게 왜곡, 또는 조작으로 비밀이라는 틀을 씌웠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 삼한역사찾기와 연결되지 않을 수 없는 숙명적 만남으로 보아 오히려 기쁘기까지 하다.
그리스 화약은 폄프나 관을 이용하여 적군의 함선에 뿌릴 수도 있고 항아리에 담아 던져서 터뜨릴 수도 있었다고 하고 또한 길고 좁은 호스(Hose) 같은 관으로 목표물을 향해 발사도 가능했다고 한다.
이렇게 발사되면 기름 같은 액체가 불에 타는 것으로 바다 표면에 그대로 떠있어서 나무로 된 선체에 불이 쉽게 옮겨 붙어 수장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신무기는 비잔티움 제국이 아랍인과의 여러 차례의 전투 및 루스족(Rus)의 침입과 제4차 십자군(1202-1204)의 침입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을 상대로 큰 활약을 하였고 그리스화약은 중세시대의 가장 강력한 비밀무기였으며 비잔티움의 적들은 항상 이 무기를 두려워했다 한다.
요새 같으면 핵무기나 수소폭탄 같은 의미가 있었다는 것이다.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이 오스만제국에 멸망할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도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오스만제국에서 이러한 무기제조법을 본체만체 무시하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솔직히 고려연합아래 오스만제국도 있었다면 오스만제국은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고려연합이 존속될 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은 유럽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초조함을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라이벌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들 서양사가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그 전까지 유럽을 장악하던 오스만제국은 1571년 마침내 유럽연합함대와 레탄토(Battle of Lepanto)에서 격돌하였는데 유럽연합함대는 최신 신형무기대포를 장착하여 그결과 오스만제국이 참패하고 그 때부터 서양사가 동양사를 넘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 동 시대에 고려 최무선(崔茂宣, 1325-1395)이 화통도감(火桶都監, 1377-1389)을 통해 18종의 화약무기를 개발하면서 화포해전을 발명했다는 사실을 연계시켜 고려가 세계문명을 좌지 우지 했다면 이는 고려가 동양에서 서양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풀이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이 글에서 동양인 최무선이 동양사가 서양사로 넘어가게 한 장본인이었다는 것인데 동양사 입장에서 보면 못할 짖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 블로그에서는 가당찮은 이야기로 치부할 수밖에 없고 조금 앞선 생각을 한다면 적어도 1571년까지는 오스만제국이 유럽전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역시 고려는 이러한 강력한 힘을 가지게 한 집합체로서 또는 모체로서 존재했다는 사실을 간파 할 수가 있다.
이렇게 보면 더욱 그리스 불은 신라에서 고려로 자연스럽게 넘어가 공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스만제국에 없는 대포를 서양연합함대가 장착했던 것이 아니라 같은 대포라고 하여도 질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고려가 대포를 먼저 발명하여 오스만제국함대에 장착시켰으나 질적인 문제가 있어 실패하였다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고 고려의 앞선 무기기술은 그리스 불이 자연스럽게 넘어오면서 공유하였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결국 고려의 강력한 무기는 유럽사에 중요한 모체 또는 변수로 작용했다는 사실에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이상에서 보았을 때 고려에서 났다고 하는 맹화유가 그리스의 불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사실을 이치적으로 따져 보면 그리스 불이 생성되었다고 하는 그 곳에는 신라와 고려가 분명히 뚜렷한 문신이 되어 깊이 각인, 존재하였다고 결론 내려도 무방할 것 같은 생각이 마구든다.
마지막으로 최두환 박사의 번역 글을 바탕으로 이 글을 총체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예(4): (1) In the winter of 1894, when I was about to sail for Korea (to which some people erroneously give the name of "The Korea"), many interested friends hazarded guesses at its position, - The Equator, the Mediterranean, and the Black Sea being among them, a hazy notion that it is in the Greek Archipelgo cropping up frequently. It was curious that not one of these educated, and, in some cases, intelligent people came within 2000 miles of its actual latitude and longitude.
[Mrs. Isabella L. Bird Bishop, <Korea & Her Neighbours>(London, John Murray, Albenarle Street, 1898) Introductory chapter]
[1894년 겨울, 내가 Korea(조선)로 출항하려 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The Korea"라는 이름으로 잘못 붙여주었지만, 관심을 가진 많은 친구들은 조선의 위치에 대해 추측들을 막 해댔다. 조선은 '적도'라느니, '지중해'라느니, '흑해'에 있다고 하는 식이었으며, '그리스의 다도해'가운데에 있다고 하는 견해가 자주 제기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 교육받은 유식한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도 조선의 실제 위도와 경도로부터 아무도 2000mile(3218km) 안으로 들어 가보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여기에 "Korea"와 "The Korea"가 있고, 저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그가 기행한 1894년에 처음으로 "The Korea"가 잘못되었다고 지적을 하면서 그 위치가 1898년까지도 유럽인들은 지중해, 흑해, 그리스의 다도해 가운데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1900년까지도 유럽 사람들은, 비록 몇멸 사람들일지라도, 조선을 "The Korea"라고 늘 부르고 있었으며, "The Korea"[조선]의 지리적 위치가 지중해, 그리스의 다도해, 흑해에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그것을 유럽인들의 오해라고 변명을 해주고 있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거짓이라면 "지중해, 그리스의 다도해, 흑해"에 살던 사람들은 아마도 바보임에 분명하다. 그곳이 "The Korea" 이었는데 말이다. 그것을 아니라고 말하니 우습지?!
다시 말해서 조선의 서쪽 끝은 지중해였던 것이며, 그곳이 조선의 서해였다는 말이다. 그러니 1900년대에 "The Korea"라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동쪽 끝 반도 "Korea"에서부터 서쪽 끝까지 포함한 아시아 전체가 "The Korea"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아시아 자체가 조선이라는 말이다.[ 아시아=조선:최두환]
이 글은 1894년 조선을 방문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L. Bird Bishop)의 <Korea & Her Neighbours>란 책에서 중요한 부분을 최두환 박사가 번역한 글인데 이 문장에서도 똑 같이 결론 내리고 있다.
당시 늘 유럽인들이 “The Korea” 라고 불렀다고 하는 조선은 연합, 또는 연방국가체제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들이 스스로 대조선의 지칭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솔직히 근세기에 이런저런 소설이나 기행문같은 것들은 모두가 실제 고려와 조선을 없애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역사찾기 하는 입장에서는 신뢰성을 별로 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워낙 부족한 자료 현실로 인하여 그들이 남긴 글에 헛점을 찾거나 그들이 둔감하게 생각한 것들을 찾아 필요한 자료로 사용하는 것도 부족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이러한 글을 인용하면서 면밀하게 검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도 마찬가지지만 최두환 박사가 이야기 한 것처럼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글에서 그들이 간과한 부분만을 찾아 진실을 역으로 반전을 시킬 수 있다는 확신도 하기에 구애됨이 없이 이글을 인용하는 것이다.
이글에서도 보지만 당시 잘났다고 하는 지식인들이 The Korea 라고 할 정도의 실체를 알 수 없었다는 사실과 그들 중 한사람도 조선의 실제 위도와 경도로부터 아무도 2000mile(3218km) 안으로 들어 가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해 할 수 없다고 하였지만 그 만큼 The Korea 라는 실체를 숨기고 싶어하는 속셈이 깔려 있다는 것을 은연중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사실에서 최종 검토 자료로 위 기벌포해전(伎伐浦海戰) 기록을 보면 “신라는 673년 함선 100척을 보내어 서해(西海)를 지키면서 적극적인 방비책을 마련하고 있었는데...”에서 서해(西海)는 바로 지중해(地中海, Mediterranean Sea)를 말하고 있음을 최두환 박사의 번역 글에서도 알 수 있는 역사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덧 붙인다면 지중해가 서해(西海)라는 문제도 결국 오스만제국이 제1차세계대전에서 영국에게 패하면서 해체되는 순간이 19세기 말엽이라 아메리카에서 밀고 들어온 신생세력들에 의해 저질러 진 것이라면 원래 고려가 상당히 동쪽으로 밀려난 상태였다고 볼 수 있고 그렇다면 실제 신라가 당과의 전쟁한 곳은 유럽전지역을 대상으로 한다면 서해가 지금의 대서양이 될 수 있다는 점도 무시 할 수 없다. 어떻든 결국 그리스 불과 고려의 맹화유는 같은 역사이고 결국 같은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클릭원본-지중해에서 2000 마일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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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와 The Korea 문제?
[네이버지식-shk6301]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유명사와 정관사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고유명사는 다음 2가지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l 원래부터 고유명사 (Clinton, America, Korea ...)
l 원래는 보통명사 (the United States, the Republic of Korea ...)
원래부터 고유명사인 것은 하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식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관사를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Korea는 원래부터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the를 붙이지 않아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보통명사에서 고유명사로 바뀐 것은 인위적으로 고유명사를 만든 것이라서 '바뀌기 전 보통명사와 바뀐 후 고유명사를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야기합니다.
이런 문제는 '정해진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정관사와 대문자가 해결해줍니다.
제1원칙 : 원래부터 고유명사인 것에는 the를 붙이지 않고 보통명사에서 고유명사로 바뀐 명사에 the를 붙이고, 첫 철자를 대문자로 쓴다.
(a) a white house(하얀 집) vs. the White House(백악관)
(b) a British museum(한 영국 박물관) vs. the British Museum(대영 박물관)
제2원칙 : 보통명사에서 고유명사로 바뀐 지명은 쉽게 인식할 수 있는 경우(자연적인 경계가 있는 경우)에 정관사 the를 생략할 수 있다.
이것은 가족 끼리 대화할 때 “How is mother? (엄마 어때?)”에서 mother 앞에 the를 생략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가족끼리는 '엄마'가 고유명사처럼 분명한 존재이기 때문에 the를 붙이지 않아도 금방 '누구네 엄마'인지 알 수 있습니다.
1) 자연적인 경계가 있는 지리적 이름 → the를 뺌
(1) 호수 : Lake Alice, Lake Michigan
(2) 산 : Mount Everest, Mount Halla.
(3) 공원 : Central Park, Hyde Park
(4) 역 : Seoul Station
(5) 공항 : Kimpo Airport, Kennedy Airport
(6) 항구 : Pusan Harbor
(7) 광장 : Acropolis Square, Times Square
2) 인위적으로 경계를 그어야 하는 지리적 이름 → the 붙임
(1) 반도 : the Korean Peninsular
(2) 사막 : the Sahara (Desert)
(3) 산맥 : the Alps, the Himalayas
(4) 강 : the Han River, the Danube
(5) 바다 : the Atlantic, the Pacific
(6) 운하 : the Panama Canal
(7) 해협 : the English Channel
(8) 군도 : the Bermudas, the East In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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