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사건

골드러시(gold rush)와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 號)사건

한부울 2012. 6. 2. 19:54

******************************************

골드러시(gold rush)와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 號)사건

 

글쓴이:한부울

 

서세동점(西勢東漸)시대?

동서를 다 포괄하고 있는 삼한역사 틀에서 보면 위 단어의 의미는 없다.

삼한역사로 보았을 때 동서가 다 같은 의미였기 때문이다.

하나인 것이다.

그것이 근세기에 접어들어 그들이 만든 역사에는 동서양이 나뉘어진다.

그 말은 서양(西洋) 세력(勢力)들이 차차 동쪽으로 옮겨진다거나 서양이 동양을 지배한다는 뜻으로서 서쪽의 세력이 동쪽으로 점점 밀려온다는 것을 강조한 것인데 만약 그들이 본거지가 유럽이었더라도 바다라 치면 동쪽으로 밀려드는 상황은 아시아대륙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바로 대서양 또는 대동양을 넘어 아메리카대륙도 그 대상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대서양(大西洋)과 대동양(大東洋)의 사실적 개념은 이미 설명을 했다.

아메리카대륙이 삼한역사에는 분명 동양에 포함되었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서세동점이라하여 기어코 그들의 본거지가 유럽이라고 할 때 유럽에서 출발하였다면 아메리카에서 혼곶을 휘돌아 태평양을 넘어 아시아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항해시대를 꽃피었다고 하고 있으니 바다를 중심으로 세계를 그린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와반대로 땅을 중심으로 하여 동양(東陽)과 서양(西陽)을 구분하는 것이라면 육로 길로 유럽에서 아시아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극동아시아에서 역사가 차단된다는 한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현 근대사가 어느정도 이치에 맞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들이 활동한 무대는 주로 바다이다.

그래서 대항해시대라 했다.

그러니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들어가는 것도 서세동점이라고 할 때 여태 우리가 알고 있었던 역사개념과는 다르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라는 말이다.

이런 사실에다 미심쩍은 근대사를 미루어짐작컨데 이기적이고 분리, 분파적인 서양인들의 사고를 더 해 보면 19세기 당시는 아메리카대륙에서 벌어진 골드시대라고 하는 탐욕시대의 내면을 충분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사실이다.

 

당시 19세기 초 역사를 보면 남아메리카에서 연속적으로 독립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분화(分化)다.

1811년-베네수엘라˙파라과이˙에콰도르가 독립을 선언.
1813년-멕시코 모렐로스의 혁명의회 멕시코 독립 선포.

1821년-베네수엘라 독립. 페루˙멕시코˙도미니카 등 남아메리카 국가들 독립 선포.
1822년-그리스 독립 선포. 브라질 독립을 선포,
1823년-멕시코로부터 중앙아메리카 연방 분립.
1825년-볼리비아가 독립을 선포.
1828년-우루과이 독립.
1830년-콜롬비아가 콜럼비아(小)˙에콰도르˙베네수엘라 3국으로 분립
1832년-그리스의 독립을 승인.
1838년-온두라스˙니카라과가 중앙아메리카연방 탈퇴
1839년-네덜란드가 벨기에의 독립을 승인. 과테말라 독립
1841년-엘살바도르 독립.

 

어떤세력으로부터의 독립이고 분화(分化)일까?

동양의 유교나 도교 그리고 불교사상은 오히려 합치고 하나를 만들고자 노력하는 반면 예수회나 기독교는 있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고 억지로 분리하고 나누고자 애를 쓴다는 점이다.

최대한으로 쪼개거나 분리하여 서로 다른 분파를 만들고 힘을 약화시켜 그들의 지배하에 두거나 그러한 분파에서 파생하는 이해득실이 있어 그곳으로부터 더 많은 이득과 이윤을 가져다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네이 되면 첫째 힘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

그것들과 충돌하면서 생성되는 이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계산이다.

서로 아귀다툼하고 분쟁하게 하고 끝내 서로 총질해되며 파괴하면서 전쟁하는 결과는 산업발전을 촉진시키고 더 많은 자본을 필요하기 때문에 이윤과 이식은 자연스럽게 늘어날 수밖에 없으며 자본은 무한대로 증대할 수밖에 없는 논리고 증대된 자본에 의해 지배받을 수밖에 없는 이치이다.

이것이 바로 냉혈적인 자본주의 근원이라 할 수 있으며 서세의 실체라 할 수 있다.

약육강식은 이성이 자리잡을 수 없는 동물세계나 원시사회에서만 통하는 공식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첨단시대인 현대에 와서 더욱더 이러한 공식이 통하고 나아가 진리가 되어버렸다.

근대사가 인류에게 선물한 것은 산업발전의 해택보다 더한 공포심과 자괴감과 위화감내지 소외감을 각자에게 주고 있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삼한 역사의 물질보다는 정식적인 높은 가르침을 배격하고 그들의 물질우상을 세워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렇듯 잘난 서세의 근원지, 근거지는 어디였을까?

서세라 함은 앵글계(angle)와 라틴계(latin)언어를 사용하는 백색인종이다.

이 인종들을 아마도 삼한역사에서 왜(倭)나 왜구(倭寇)로 통칭되었다고 볼 수 있다.

늘 삼한역사 변두리에서 삼한인들을 못살게 구는 종족으로 존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왜는 지금 열도에 일본이 아니라 삼한역사를 부정하고 거역하면서 시도때도없이 달려들어 골탕먹였던 세력, 무리 모두를 일컫는 것이라고 해야 맞다.

그들이 근대사에서 신세계라고 하고 신천지라 하는 북아메리카는 분명 그들의 근거지가 아니었다는 반증이다.

 

하면 서세가 아메리카에서 들어오기전에는 어디에 있었을까?

 

유럽대륙은 고려연합이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삼한역사의 본거지라 할 수 있고 공백으로서는 러시아가 있었다는 북유럽영역이 있으며 아프리카대륙과 인도대륙 그리고 동남아시아대륙, 일본 정도라고 볼 수 있고 더 나아가 호주, 뉴질랜드까지를 설정할 수 있다.

왜 이런식으로 정하는가 하면 이 지역들이 그들이 만들어 내세운 대몽골군에게 침략당하지 않았다던 영역이기 때문이다.

위 열거한 영역에서 기거하거나 삼한 변두리에 머물던 세력들이 근세기들어 점차 산업발전으로 세력화하여 기존 세력인 삼한제국들을 해체하거나 제거하고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그들의 역사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이 활동한 시대는 대항해시대라고 하지만 침탈의 시대이고 탐욕의 시대라 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이 저질렀던 탐욕시대가 창출한 역사적 의문점 중에서 한반도란 영역에서 발생했다고 하는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 號)사건을 들여다보자.

 

우리는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연관시킬 수 있는 것은 당시 엄청난 골드러시라는 시대적 상황을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상선이라고 하는 제너럴셔먼호가 무엇때문에 한반도 조선으로 무작정 들어가게 되는 경위나 이유가 분명치 않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먼저 이 경위와 이유를 깨내지 않으면 안된다.

보통 상선이라 하여도 무역을 종용하기 위해서 무작정 남의 나라를 침범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다.

자칫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것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서세자료들을 보면 일본은 문화국인 반면 조선은 원시적인 형태를 벗어나지못한 낙후된 나라였다는 사실을 그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터이다.

잘못된 상식이라고 상식은 상식이다. 

이런 나라에 이렇듯 무작정 들어간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다.

무엇인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 어떤 유혹에 빠져 있었거나 아니면 늘 다닐 수 있는 통로이거나 아니면 조선인들이 이 선박을 보고 별로 적개심을 느끼지 않는 것이어야 가능하다.

후자의 것들은 지형적으로 북아메리키 대륙과 너무멀어 한반도와는 맞지 않는 이야기다.

미국과 관계개선을 한 것은 비로소 1882년이고 거리상 늘 다닐 수 있는 곳도 못된다.

그렇다면 무엇인가의 유혹이 있었다는 것인데 일부 자료에 나오는 것을 보면 금(gold)을 목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골드러시에 편승한 것이다.

그들에게 엄청난 이득이 생긴다는 전제가 있어야만이 위험도 물릅쓸 수 있고 모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한반도 조선에 널부려져 있다는 수많은 금(gold)을 소유하려는 욕심이었다면 가능한 이야기다.

문제는 그곳이 과연 한반도인가 하는 점이다.

 

지금부터 골드러시와 제너럴셔먼호사건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한번 따져보자.

우리는 그 당시 시대상황이 주는 페러다임을 읽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근세기에 태동한 신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기존세력과 분리하는 것이고 그들만의 것을 고집하는 이기적이며 물질, 부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탐욕(貪慾)과 깊숙하게 관계된다는 점이다.

하나를 갖게 되면 둘을 갖고 싶고 둘을 갖게 되면 넷을 갖고 싶은 충동이 시대적으로의 방향이라 자제할 수 없었다는 시대이다.

요는 사회적으로 지나친 욕심이 팽배하던 시대라는 것이다.

이러한 탐욕은 개인과 개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방정부간, 나아가 국가간에서도 이런 페러다임이 팽배하였기 때문에 도덕과 정의는 사라지고 오직 물리력에 의한 강압적인 힘이 동원됨으로서 파괴를 낳고 침탈과 약탈이 자행되던 시절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지금도 그렇지만 근원적으로 잘나고 잘살고 싶어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가지는 원초적인 욕망이다.

그래서 누구나 잘나고 싶고 잘살고 싶은 것이다.

제너럴셔먼호의 승원들은 그렇지 않았겠는가?

때문에 언제나 인간은 부를 추구함에 있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들역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골드러시에 편승하는 것이다.

 

         시에라 네바다(Sierra Nevada)와 캘리포니아 북부에 있었던 캘리포니아 금맥(노란색)

 

골드러시(Gold rush1848-1849)는 캘리포니아 콜로마(Coloma)에 가까운 서터스 밀(Sutter"s Mill)에서 시작되었다. 1848년 1월 24일, 캘리포니아 센트럴 밸리(California Central Valley) 새크라멘토(Sacramento)의 개척자 존 서터(John Sutter)가 고용한 현장 감독이었던 제임스 마셜(James Marshall)은 시에라네바다산맥(Sierra Nevada Range)에서 발원하여 샌프란시스코만(灣)으로 흘러 들어가는 아메리칸 강(American River)가에 건설하고 있었던 제재소의 방수로에서 빛나는 사금을 발견했다. 그러자 마셜은 자신이 발견한 것을 조용히 셔터에게 가져갔고 두 명은 은밀하게 발견물을 조사했다. 이 조사로 마셜이 가져온 조각이 금인 것을 알게 되었으며 셔터는 금의 대대적인 탐사가 시작되면 대규모 농경을 하려했던 자신의 계획에 차질을 빚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에 당황했고,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달리 서서히 소문은 퍼지기 시작했고, 1848년 3월 샌프란시스코의 신문사 사주로 있었던 상인 새뮤얼 브래넌(Samuel Brannan)에 의해서 확인되기 까지 하였다. 그는 금탐 사용 물자를 파는 상점을 서둘러 차린 이후에 금을 넣은 작은 병을 들고서, 샌프란시스코 대로를 활보하면서, “금이다! 금이다! 아메리칸 강에서 금이 발견되었다!”라고 외치고 다녔다 한다. 이것은 이후의 그의 가장 유명한 인용구가 되었다.

금이 발견되던 당시 캘리포니아는 멕시코의 영토인 알타 캘리포니아(Alta California,1777)의 일부였고, 금 발견의 직후 1848년 2월 2일 미국-멕시코 전쟁을 끝내면서 맺은 과달루페-이달고 조약(Treaty of Guadalupe Hidalgo, 1848) 에 의해 이 지역과 알타 캘리포니아(Alta California)의 나머지 부분이 미합중국에 할양 되었다.

 

                                                 [서터스 밀(Sutter"s Mill)]

 

1848년 8월 19일,<뉴욕해럴드>지는 캘리포니아에 골드러시가 시작된 것을 미국 동부에 보도한 최초의 신문이 되었다. 12월 5일에는 제임스 포크 대통령(James Knox Polk, 1795-1849, 11대통령1845-1849)의 의회 연설로 금의 발견을 긍정하였다. 이내 포티나이너스(49ers, Forty-niners)라고 불리는 전 세계로부터 이민의 물결이 캘리포니아의 황금의 땅 즉 마더 로드(Mother Lode)로 쇄도했다. 셔터가 두려워했던 것처럼 농경 사업은 파산했고 그가 고용하고 있던 노동자들은 금을 찾기 위해 떠났고, 불법 침입자가 셔터의 토지에 침입해 곡물이나 소를 훔쳤다.

 

샌프란시스코는 골드러시가 시작되기 전까지 작은 개척지였다.

주민들은 금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선주나 사업가까지 골드러시에 가세해 당초는 고스트 타운(ghost town)이 되어 있던 이 마을이 그 후에 상인이나 새로운 사람들이 밀려들면서 급작스럽게 인구가 늘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인구는 1848년 약 1,000명에서 1850년에는 25,000명까지 늘어났다. 많은 신흥 도시가 그랬던 것처럼, 갑작스런 인구 유입으로 인해 샌프란시스코나 금광 가까운 마을의 기반시설이 체증되기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텐트, 목재의 가건물 오두막, 혹은 버려진 선박에서 뜯어낸 선실에서 살기도 하였다. 금이 발견된 곳은 어디에서라도, 수백 명의 광부가 공동으로 캠프를 만들고 그 권리를 주장했다. 각각의 캠프에는 러프 앤드 레디(Rough & Ready), 행 타운(Hang Town) 따위의 이름을 짓고, 캠프에는 술집이나 도박장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곳은 최초의 세계적 골드러시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캘리포니아로 가는 여정이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포티나이너스(49ers, Forty-niners)는 힘겨운 여정으로 중도에 죽는 사람도 많았다. 처음으로 아르고선(Argonauts)의 승무원이라고도 불린 사람들 대부분은 해로를 여행해 왔다. 미합중국의 동부 해안으로부터 남미의 최남단을 돌아 5~6개월 동안 총 거리는 18,000 해리 (33,000 km)를 여행한 사람들도 있었다. 또 다른 해로로는 파나마 지협의 대서양 측에 도달해, 정글을 카누나 로바를 사용해 1주간 걸려 빠져 나가서 태평양 측으로 와서 샌프란시스코에 가는 배를 탄 사람도 있었다.

 

 

또한 제너얼셔먼호 사건이 발생한 년도(1860년대)에 존재한 골드러시(Gold rush)사례를 보면 아래와 같다.

1860년대 골드러시

1.Idaho Gold Rush, also known as the Fort Colville Gold Rush, near Colville, Washington state (1860)

2.Holcomb Valley Gold Rush, California (1860)

3.Clearwater Gold Rush, Idaho (1860)

4.Central Otago Gold Rush, New Zealand (1861)

5.Boise Basin Gold Rush, Idaho (1862)

6.Cariboo Gold Rush, British Columbia (1862–65)

7.Stikine Gold Rush, British Columbia (1863)

8.Owyhee Gold Rush, Idaho (1863)

9.West Coast Gold Rush, South Island, New Zealand (1864–67)

10.Big Bend Gold Rush, British Columbia (1865-66)

11.Omineca Gold Rush, British Columbia (1869)

12.Wild Horse Creek Gold Rush, British Columbia (1860s),[clarification needed]

13.Eastern Oregon Gold Rush (1860s–1870s)

14.Kildonnan Gold Rush, Sutherland, Scotland (1869)

 

1858년에는 콜로라도의 로키산맥에서도 금광이 발견되었다.

그러자 백인의 침범으로 분쟁이 잦아져 경계를 새로 정할 필요가 생겼다.

1861년 다시 맺어진 조약에서 인디언의 영역이 전보다 13분의 1로 줄어들었다.

다시 말해 골드러시가 가져다 준 것은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영역이 엄청나게 줄어들었다는 결과만 낳았을 뿐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이런 처지에 조선이라면 그리고 일제가 만든 반도사가 말하였듯이 나약하고 허접한 조선이었다면 아마도 그 당시 벌써 서세에 의해서 망했을 것이라고 예측이 가능하다.

 

금광이 1858년에 발견되었다는 로키산맥(Rocky Mts)은 북아메리카 서부에 세로놓여 있는 산맥으로서 총 길이가 4500km나 되고 최고봉은 남부에 있는 앨버트산(4401m)과 캐나다 지역에 있는 로브슨산(3954m)이 남북으로 있는 산맥을 따라 금광 즉 골드러시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고 그 대표적인 것이 켈리포니아는 데스벨리(Death valley)와 그렇게 멀지 않는 홀콤계곡(Holcomb valley)이고 그 외 워싱톤주 콜빌(Colville)과 이다아호주(Idaho)에 골드러시 중심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던 미국 캘리포니아주 엘도라도 카운티(El Dorado County)에 있는 자치구 콜로마(Coloma)는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의 현장이 되었지만 골드 러쉬의 영향은 상당한 결과를 낳았다.

작은 개척지였던 샌프란시스코는 신흥 도시로 성장하였고, 새로운 교통 체계가 발전하고, 증기선이 정기 운항되고, 철도가 깔리자 캘리포니아의 다음의 성장 분야가 된 농업이 주 내에서 광범위하게 시작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골드 러쉬는 부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인디언들은 공격을 받아 조상대대로 살아왔던 땅으로부터 내쫒겼고, 또한 금의 채굴로 환경이 더렵혀졌다는 결과이다.

인간의 탐욕이 부른 결과이다.

 

 

 

콜로마(Coloma)는 1848년 제임스 마샬(James W. Marshall)에 의해 서터스밀(Sutter's Mill) 주변에서 황금이 발견되면서 광산캠프가 형성되었다. 지명은 '아름답다(beautiful)'는 뜻을 가진 인디언 언어에서 유래되었다. 현재 거주하는 주민은 거의 없으며, 마샬 골드디스커버리 주립역사공원(Marshall Gold Discovery State Historic Park)으로 지정된 관광 명소이다.

아메리칸강(American River)은 멕시코 영토 당시에는 리오데로스아메리카노스(Rio de los Americanos)라고 불렀다. 1848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California Gold Rush)를 일으킨 서터스밀(Sutter's Mill)의 장소로서 미국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며 시에라네바다산맥(Sierra Nevada Range)에서 발원하여 새크라멘토(Sacramento)를 통과하고 새크라멘토강(江)으로 흘러 들어가 계속해서 샌프란시스코만(灣)으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다.

 

이것과 한반도 조선에서 일어난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 號)사건과 무슨관계가 있는가 의아해 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 골드러시와 연관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골드러시와 관계되는 기록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탑승자

선장 페이지(Page, 미국인)

일등 항해사 윌슨(Wilson, 미국인)

선박 소유주 프레스턴(Preston, 미국인)

조지 호가스(George Hogarth, 영국인)

13명의 중국인

3명의 말레이인

영국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 통역으로 탑승하였다.)

 

제너럴셔먼호에 탑승한 사람 중에 영국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스스로 한국이름을 작명했는데 최난헌崔蘭軒이라고 했다)목사가 있었다.

토마스 목사는 1863년 12월 런던 선교회 소속의 목사로 선교를 위해 부인과 함께 상해에 도착했으나 1864년 3월 부인이 출산도중 숨지자 실의에 빠져 런던 선교회와 결별하고 선교활동도 그만두었다. 1865년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회 소속 월리엄슨(Alexander Williamson)을 만나 친분을 맺었는데, 당시 월리엄슨 목사의 집에는 조선인 신자와 상인이 수시로 드나들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조선어를 읽힐 수 있었다. 1865년 10월 우문태(于文泰)의 안내를 받아 황해도를 거쳐 조선내륙에 들어가는 등 4개월 동안 조선연안과 해로를 탐사(?)하기도 했다 한다.

1866년 초 토마스는 런던 선교회의 목사로 재임명되었다.

 

병인사옥(丙寅邪獄)의 보복을 위해 프랑스 함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 1812-1882)제독은 조선 원정을 준비하고 향도 및 통역관으로 토마스 목사를 채용했다. 하지만 인도차이나 반도의 소요사태로 무산되자 그들은 이와 상관없이 셔먼호를 타고 조선으로 향했다.

목적이 달랐던 것이다.

 

토마스 목사는 조선에 집착을 갖고 있었는데 그 이유를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종교인으로서의 입장인데 선교목적이다.

1866년 1월 조선에서 청나라로 간 사신 일행이 토마스 목사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토마스 목사는 사신들에게 성서와 선교지를 전하면서 조선의 선교활동에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다고 한다.

토마스 목사가 죽은 2년 후인 1868년 발행된 '조합교회연감(The Mission Year Book of the Church for 1868)에 따르면 “선교 사업이 일생 일대의 최대 목표”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왕릉을 도굴하기 위함이었다는 설도 있다 하였다.

상해(?) 등지를 중심으로 외국인들에게는 조선은 황금의 나라(?)였다고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도 생각을 해볼 문제이다.

평양 부근에 있는 역대 왕릉은 황금관으로 되어 있으며 산에는 진귀한 광물이 흔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황해도 황해목 상전면 송산리 급수문(急水門)으로 추정되는 문우구(?)에 도착해서 관헌의 문정(問情)을 받았는데 토마스 목사가 자신은 꼭 평양에 들어가겠다고 하면서 “평양 산천은 어떠하며 그곳에 보물이 많은가”하고 묻자 관헌은 “튼튼한 성곽은 있지만 보물은 없다”라고 했다. (일성록-日省綠 고종 3년 7월 15일)

또한 관헌에게 조선의 일통지도(一統地圖)와 각읍산천지도(各邑山川地圖)를 보여줬다고도 한다.

고종순종실록상권 고종 3년 을유 7월 15일 자에는 토마스 목사의 모습이 적혀 있는데 '나이가 36세(실제로는 27세), 키 7척 5촌이며 얄상한 얼굴에 회색 머리털과 검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회색옷과 검은 구두를 착용했으며, 허리에는 가죽혁대를 하고 소양총(권총)과 칼을 차고 있었다고 했다.

 

셔먼호는 선주인 프레스톤(Preston,W.B)이 영국의 메도우 상사(Meadow and company)에게 위탁 관리를 맡긴 상태였다. 그 이유가 선주의 건강 건강악화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주는 조선 행에 동참 했다.

무엇때문에?

승무원 중 선주와 선장, 항해사가 미국인이고 화물관리인과 통역사(토마스 목사)는 영국인이었으며 일반 선원은 중국과 말레이시아인이었다. 특이한 점은 화물관리인의 요청으로 중국인 보석 감정사를 동승시킨 일이다.

이것은 금(gold)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보인다.

이상에서 볼 때 이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의 목적은 일반 상행위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가져온 비단·자명종 등과 쌀·사금(?)·홍삼·호표피 등과의 교역을 제의하였다 한다.

 

문제는 금(gold)이고 즉 골드러시에 뇌동(雷同)하던 부류였던 것이다.

조선에 금이 많다는 것은 상해 외교관사이에 공론화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평양가까이에 이 금광이 있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아래는 나중에 미국 군함 셰난도(USS Shenandoah)의 함장 존 페비거(John C.Febiger)에게 셔먼호 사건의 조사차원에서 조선정부가 나서 설명을 한 기록인데 셋째번 글에서 그들의 평양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이 이 사건 전체를 요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토마스 목사(R.J Thomas, 崔蘭軒)는 스스로 프랑스인이라고 했는데 다른 선원들이 그를 영국인이라고 말했으므로 귀하의 편지를 받고 나서야 그 배가 귀국의 배인지 알았다.

둘째, 중군을 억류하고 물건을 약탈했으며 사람을 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러서 군민들이 저항한 것으로 중군 납치가 원인이었다.

셋째, 그들의 평양 목적이 무엇인지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알 수 없었다.

넷째, 본인 생각으로 이 사건은 '가을철 티끌(autumn dust)'에 불과한 사소한 사건이라서 서로가 상해하는 불상사 없이 계속 우호관계를 유지하자고 했다.

 

그러자 페비거 함장은 조선의 회신을 읽고 난 후 평양에 억류된 선원을 인도해 줄 때까지 머무르겠다고 밝혔다.

억류된 선원은 없었다. 

그럼에도 어거지를 피었던 것이고 유도하여 전쟁을 하기 위한 단서를 찾아내려고 했다는 것이다.

위에 글에서도 보듯이 그들이 노렸던 것은 금이고 금광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평양에 이 사람들이 탐을 낼 수 있을 정도에 금이 생산되었거나 광산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한반도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대량의 금은 없었다.

그러면 어딜 말한 것일까?

대체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1860년대에 있었다는 골드러시의 지역을 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곳 가까이에 평양이 있었고 대동강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본 블로그가 말하려는 요지이다.

그렇게 볼 때 켈리포니아는 데스벨리(Death valley), 홀콤계곡(Holcomb valley), 워싱톤주 콜빌(Colville)과 이다아호주(Idaho) 모두 북아메리카임을 알 수가 있다.

 

이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미국조사원들이 최종적으로 결론내린 것은 상선(merchant ship, 商船)이 아니라는 것이고 해적수준의 항해였다는 사실만 밝혀내고 이를 미국정부가 그대로 적용하지 않았으며 이 사건을 핑계로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를 일으킨다는 모순된 근대사의 기록이다.

 

금은 필연적으로 탐욕적으로 변한 토마스에게 필요했을 것이다.

영국 선교사 토마스는 어쩌면 자기 아내가 갑자기 사망한 이후부터 심적으로 충격을 받고 부자가 되는 길을 택했다고 보이고 그의 생각이 선교라는 임무와는 다르게 갑자기 탐욕에 빠졌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 허영과 탐욕에 사로잡히면 이기주의자가 되고 마는 것이고 이기주의자는 사회생활에서 때로는 성공을 할 수도 있지만, 인간이 지녀야 할 바른 가치를 상실하고 결국 자기의 뜻이 제대로 관철되지 않을 때 과격해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를 많이 생각할 수 있다.

 

토마스 역시 종교인이었지만 물질에 집착한 나머지 상황은 평범한 사람보다 사리판단이 오히려 못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사건의 중대성으로 볼 때 그가 나서 직접 조선인을 살해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통역관이라는 중요 직책을 가지고 있었던 점이다.

그가 통역하는 대로 나머지가 움직였을 것이라고 판단 할 때 이모든 극단적인 행위는 그로 부터 나왔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그들의 최후를 보면 1866년 8월 28일 황강정에 정박한 셔먼호의 종선에서 이현익의 석방을 요구하는 군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대포와 소총을 사격을 가했다. 이때부터 군민들은 대포와 소총에 맞상대하여 돌팔매(투석전)와 활·조총 등으로 공격을 응했다.

종선이 도망가는 틈을 타서 박춘권이 잡혀있던 이현익을 구출했다.

8월 31일 셔먼호는 대포와 총을 앞세워 본격적으로 인근 마을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일성록>에는 이때 군민 7명이 죽고 5명이 다쳤다고 했다.

당초 셔먼호가 대동강 어귀에 도달했을 때 조정은 이들에게 식량과 고기·땔감을 제공하는 등 비교적 관대하였다는 것은 미국상선은 늘 그렇게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아니면 조선의 한 연방국의 상선이므로 관대했을 수가 있다.

하지만 이현익의 납치와 약탈행위, 총격전으로 주민이 사상자가 발생하자 방침을 바꾸어 몰살을 명령을 내려 전부 처형하였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감히 주장한다.

토마스 일당이 조선을 무단으로 들어간 곳은 금광이 있었다는 곳이 틀림이 없다.

그곳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평양 즉 대동강을 통해가야 한다고 여겼던 것인데 그 길을 인도한 사람은 청나라사람이라고 하는 유화태였다.

이 사람은 정크선의 선장으로서 토마스와 사전에 조선에 있는 금광 길을 탐색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북아메리카에서 골드러시가 성행한 곳은 크게 나누어 볼 때 미서북부 워싱톤주 콜빌(colville)과 이다아호주(idaho)를 꼽지 않을 수 없고 서남부 켈리포니아주의 데스벨리(death vally)와 그렇게 멀지 않는 홀콤계곡(Holcomb valley)을 꼽을 수 있다.

미서북부로 관통하는 강은 미주리강(Missouri River)이며 서남부 켈리포니아주와 관통하는 강은 콜로라도강(Colorado River)이다.

이 두강이 대동강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 콜로라도 강 상류로 들어가면 지금도 아리조나주 피닉스 즉 봉황성(鳳凰城)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봉황성 즉 피닉스(phoenix)도 근세기에 지명을 옮겼다고 보지 않을 수 없어 서북부 미주리강도 대동강 대입에 제외 될 수 없다.

 

 

                                                              [콜로라도강]

                                                             [미주리강]

 

이 부분에서 너무 비약한 것일 수 있어도 개략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후 세밀하게 관찰하고 따져보아야 비로소 실제 평양과 대동강이 어딘가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특히 북아메리카 지역에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인디언 이외 분명 다른 문명국가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적어도 삼한역사를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놓쳐서는 안되는 주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서세 그들은 근세기에 이러한 사실을 자취조차 남지 않게 서서히 지워버렸거나 없애버리거나 묻어버렸을 수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동화시켜 지금에 이르게 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금(Gold)은 19세기초에 중요했다고 본다.

물론 오래전부터 화폐단위의 가치와 은의 일정량의 가치가 등가관계(等價關係)를 유지하는 은본위제도를 사용했었고 16세기에 이르러 신대륙에서 다량의 은이 산출되면서 은의 시장가격이 하락하여 금은비가(金銀比價)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금광이 발견되면서 19세기부터 금이 중요하게 부상한 것이고 은본위에서 점차 화폐교환이 금으로 대체되어감에 따라 금을 많이 소유한 나라가 강대국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1819년 영국이 세계제일먼저 금본위제도를 취했다는 사실이다. 

그 때부터 너도나도 당시 패권을 두고 경쟁하던 제국들이 금본위제도라(金本位制, Gold standard)는 틀에 들어가게 되는 중대한 깃점이 되었던 것이다.

금본위 제도는 제1차 세계대전 후 금본위제(金地金本位制)의 형태로 많은 나라에서 채용되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1873년에는 독일이, 1874년에는 네덜란드가 미국 또한 1874년에 금본위제도를 채용했고 1878년에는 프랑스가, 일본도 1897년에 금본위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제국의 대열에 끼일 수 있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각국은 전비조달을 위해서 통화를 증발하였으며 그러한 유동성 때문에 금태환(金兌換)을 중지하고, 금본위제에서 이탈하게 되면서 전간기(戰間期1919-1939)에는 변동환율제도로 운영되게 된다. 그러나 통화 증발에 따라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게 되면서 1919년 미국, 1925년 영국이 다시 금본위제로 복귀하게 된다.[네이버사전]

 

그만큼 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지대한지 알았다.

제너럴셔먼호의 사건이 발생하는 시기가 금광이 여기저기 발견되기 시작한 바로 그러한 시기였던 것이다. 때문에 제너럴셔먼호가 조선에 들어간 이유는 바로 골드러시를 찾아 간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가 있다.

 

 

이제부터는 바로 불 분명한 제너럴셔먼호의 정체를 밝혀보는 일이다.

제너럴셔먼호(SS General Sherman)

포획: 1863년 1월 29일

미국 정부의 구매: 1863년 3월 18일

취역일: 1863년 2월 4일

민간에 판매: 1865년 8월 17일

배수량: 614톤

길이: 388.1미터 (127피트 4인치)

선폭: 10.5미터 (34피트 6인치)

흘수: 503센티미터 (16피트 6인치)

추진방식: 요트(Sail)

승무원: 150 명

무장:

4 X 8" Sg.

16 X 32 pdrs

 

제너럴셔먼호가 전투함으로서의 USS Princess Royal (1863)는 원래 스코들랜드 글래스고(Ted & McGregor, Glasgow)에서 건조된 선박으로서 영국 군함이었는데 1863년에 미국에게 포획되었다. 남북전쟁에 북부군 군함 USS Princess Royal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공경매로 민간에 팔려서 제너럴셔먼호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미 해군이 보유한 기록과 다른 사실이라는 것이고 미국 해군의 공식문서에 따르면 프린세스 로열호(USS Princess Royal)의 민간 판매 시점이 한반도 평양에서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난지 2년 뒤인 1868년에 매각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이 있는 한반도 대동강이 아닌, 1874년 1월 10일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피어곶(Cape Fear)에서 침몰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피어곶(Cape Fear)은 볼드헤드섬에서 대서양쪽으로 돌출해 있는 북아메리카 동남부 끝에 있는 곶이다.

대부분이 연안의 사주(砂洲)와 윌밍턴 남부의 삼각주를 지나 노스캐롤라이나 남동부 해안으로 흘러나가는 케이프피어강(Cape Fear River, 325km)의 퇴적물에 의하여 형성된 곶으로서 노스캐롤라이나주(North Carolina州)의 최남단으로서 바다귀리로 뒤덮인 언덕은 해변 상류까지 이어져 있고, 미역취류 등 다른 풀들과 함께 초원을 이룬다.

서쪽에 흐르는 케이프피어강은 이 곶의 명칭에서 유래되었다.

1524년 또는 1525년 봄에 프랑스를 위하여(?그들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국적상식과 관계없었다는 것은 조선 즉 삼한이 지배한 포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음) 활동한 이탈리아 탐험가 조반니 베라차노(Giovanni da Verrazzano, 1485-1528)가 이 곶에 상륙하였고 피어곶이라는 명칭은 1585년 영국 해군제독 리처드 그렌빌(Richard Grenville, 1542-1591)이 지휘하던 함선이 로어노크섬(Roanoke Island)으로 항해하던 중 이 곶의 만에 들어서게 되어 선원들이 난파의 '공포(fear)'에 사로잡힌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다른 자료에는 The 187-ton side-wheel steamer reportedly carried a cargo of cotton, tin, and glass, and was heavily armed. 라고 하여 배의 규모를 현격하게 작은 187톤이라고 하였고 사이트 윌 스팀선으로 소문에 의하면 목화, 주석 및 유리 화물을 싣고 크게 무장하였던 운반선이라 하였다

 

이 피어곶에서 침몰한 제너널 셔먼호와 한반도 대동강에서 침몰한 제너널 셔먼호는 다른 것일까?

같다면 역사는 달라져야 한다.

조선과 대동강 평양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이야기고 북아메리카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1861년부터 1865년에 끝을 맺은 북아메리카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南北戰爭)에서 결국 남부가 패하는데 연방(聯邦)정부로 복귀하는데 걸리는 시기가 근 10년이라 하였으나 아마도 10년 이상 기간이 소요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65년에서 10년내지 15년을 더하면 1880년으로 이어진다.

조선이 해체되던 시기가 정확하게 1881년이다.

그리고 1881년에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Aleksandr II , 1818-1881, 재위1855-1881)가 암살당한다.

또 한가지는 러시아가 알레스카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이상하지만 이 알레스카를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1년후 1867년에 러시아가 미국에 720만 달러에 매각했다.

당시 알렉산드르2세는 100년후 반환조건으로 매각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발발될 때 골드러시도 있었지만 국내외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81년 공교롭게도 러시아 알렉산드르2세가 죽음으로서 조선도 해체된다는 시기적 문제와 러시아가 마치 조선을 대신하는 것처럼 이루어진 역사사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좀 더 정확한 자료를 찾아 검토해야 할 일이지만 제너럴셔먼호의 정체는 사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사실이라고 본다.

때문에 원래 영국군함이었다가 포획되어 남북전쟁에서 북부군 군함(USS Princess Royal)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공경매로 민간에 팔려서 제너럴셔먼호가 되었다는 설과 미국 해군의 공식문서에는 분명 이 배의 민간 판매 시점이 평양에서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난지 2년 뒤인 1868년이라는 사실에서 현격하게 차이나는 점을 문제시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해군의 공식문서를 믿는다면 분명 한반도의 대동강에서 침몰한 것이 아니라 미국으로 돌아간 후 침몰했다는 것이기 때문에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허구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잘 사용하다가 2년후 비로소 피어곶에서 침몰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적어도 조선은 한반도가 아니라 북아메리카에 이 제너럴셔먼호가 침몰해 있어서야 맞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피어곶에 이 배를 찾을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미국이 어떤 나라인가?

어설피 그렇게 놔 두었을리 만무하다.

세계삼한역사를 연구함에 있어 이런식의 혼란스러움이 어찌 이 뿐이겠는가?

제너럴 셔먼호사건은 한반도 대동강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아메리카대륙 어떤 강에서 일어난 사건을 픽션화하였을 가능성이 많고 결국 조선이 해체되는 시점 1881년까지 한반도는 조선주체세력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

금의 대한 50가지 진실

1. gold 라는 단어의 어원은 옛날식 영어 gelou 에서 비롯 되었다. 노란색 이라는 뜻.

2. 시간당 생산되는 강철의 양이 인류 역사상 생산된 금의 총량보다 많다.

3. 인류는 약 161000톤의 금을 채굴 하였다.

4. 금은 7개 모든 대륙에 묻혀있다.

5. 지구에 있는 모든 금중 대략 80%가량이 아직 땅속에 있다고 추정된다.

6. 10 빌리언 톤의 금이 바다에 있다. 평균 1큐빅마일 당 25톤의 금이다.

7. 세계 최초의 금 자판기는 2010년 5월 아부다비의 울트라 럭셔리 호텔에 설치되었다. 그 자판기는 24캐럿 금으로 둘러싸여 있다.

8. 대부분의 서구 경제권 화폐는 1961년까지 금본위제를 따랐다.

9. 스위스는 마지막으로 금본위제에서 탈피한 국가이다. 1999년 IMF에 합류하기 전까지, 스위스 화폐의 40%가 금으로 뒷받침 되었었다.

10. 미국은 금값이 온스당 $44.22 일 때 포트녹스의 금을 미국의 자산으로 규정했다.

11. 1941년 12월 31일 포트녹스는 649.6 밀리언 온스의 금을 보유했다.

12. 오늘날, 포트녹스는 147.3 밀리언 온스를 보유하고 있다.

13. 표준 골드바의 크기는 17.78cm * 9.21cm * 4.445 cm 이다.

14. 연금술사들은 납을 금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15. 1캐럿은 고대 상인들이 콩의 무게를 재는 단위였다.

16. 가장 비싼 금화는 1933년 더글라스 이글코인이다. 2002년 뉴욕에서 $7.59 밀리언에 팔렸다.

17. 엘비스 프레슬리는 크롬이 있어야 할 부분에 금으로 된 차를 3개 가졌었다.

18. 타이코 인터내셔널의 전 CEO 데니스 코즈로스키는 $6000 가치의 금 고리가 달린 샤워커튼을 샀다.

19. 귀한 금속인 금은 녹슬지도, 더럽혀지지도, 알루미늄과 접촉했을 때 산화막을 형성하지도 않는다.

20. 지구의 지각에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92가지 원소가 있다. 금은 그중 58번째로 드물다.

21. 금의 원소기호는 Au, 라틴어 aurum에서 파생된 것으로 빛나는 새벽이라는 뜻이다.

22. 절대적으로 순수한 금은 너무 부드러워서 사람의 손으로 주물러서 변형시킬 수도 있다.

23. 금의 녹는점은 화씨 2063도 (섭씨 1064.58도) 이다.

24. 금은 전기가 매우 잘 통한다.

25. 금은 가장 전성/연성이 높은 물질이다.

26. 1온스의 금을 잘 누르면 100 스퀘어피트의 넓이로 늘릴 수 있다.

27. 1869년에, 호주사람 두명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골드 너겟을 발견했다. "Welcome Stranger" 라는 이름의 이 너겟은 10인치 * 25인치 크기였고 그 후 녹여졌다.

28. 현존하는 가장 큰 너겟은 "Hand of Faith" 라는 이름의, 1980년 호주에서 발견 된 것이다. 라스베가스의 골든 너겟 카지노에 전시되어 있다.

29. 지구에서 발견되는 골드 너겟은 희소성 때문에 함유된 금의 양의 값보다 3~4배 더 가치를 지닌다.

30. 기네스 레코드에 오른 가장 무거운 금화는 2004년 제작된 오스트리아 필하모닉 주화로, 31.1 킬로그램, 직경 15인치이다.

31. 2007년에 캐나다에서 100킬로그램 99.999% 금화를 제작했다. 액면가는 백만달러이다.

32. 순금은 피부 트러블을 유발하지 않는다.

33. 어떤 류머토이드 관절염 환자는 액체상태의 금을 주사맞아서 고통을 줄인다.

34. 올림픽 금메달은 1912년까지만 순금이었다.

35. 금 1온스는 60마일까지 길게 늘일 수 있다.

36. 세상 모든 금의 2/3가 남아프리카에서 나왔다.

37. 인도는 세계 제일의 금 소비국이다.

38. 남아시아의 보석은 대체로 서양의 보석보다 순도가 높아서 14캐럿이 아닌 22캐럿의 금을 사용한다.

39. 금은 캘리포니아 주와 알래스카 주의 대표 광물이다.

40. 세상 모든 금의 90%는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Sutter's Mill" 이 발견된 이후에 채굴되었다.

41.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기간중에 어떤 투자자는 1온스의 금보다 1온스의 물에 더 큰 돈을 지불했다.

42. 사우스 다코다와 네바다 주는 다른 모든 주의 금 생산량을 합친 것보다 많은 금을 생산한다.

43. 과학자들은 금이 화성, 금성, 수성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 한다.

44. 우주인 헬멧은 아주 얇은 금박(0.000002 인치)이 입혀져 있어서 태양의 눈부심과 빛을 줄여준다.

45. 금은 아즈텍어로 "teocuitatl" 이며, 신의 배설물 이라는 뜻이다.

46. 엘도라도 전설에 따르면 금으로 뒤덮인 안데스인 리더가 산속 호수에 있는 금을 제시한다고 한다.

47. 기원전 5000년에 금과 구리가 인간에게 최초로 발견된 금속이었다는 증거가 있다.

48. 리디아의 크로서스 왕은 기원전 540년 최초의 순금을 제작하였다.

49. 1934년에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금값을 $20.67에서 $35로 올렸을 때, 달러는 즉시 그 가치가 40% 하락했다.

50. 헨리8세, 디오클레티안, 네로는 금 순도에 장난치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들은 금화에 불순물을 섞어서 가치를 떨어트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