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사건

신미양요(辛未洋擾) 두 장의 사진이 주는 의문

한부울 2012. 7. 29.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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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辛未洋擾) 두 장의 사진이 던지는 의문

 

글쓴이:한부울

 

이 사건은 삼한역사찾기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섣불은 판단은 매우 위험하여 가능하면 원칙적인 이야기가 아니면 하지 않으려 한다.

때문에 명확한 자료로 그것을 타개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여기세 그러한 자료가 있어 올려본다.

 

지금까지의 역사가 잘못된 것이라면 최소한 바로 잡을 줄도 알아야 살아있는 국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애족하는 것을 떠나 역사가 바로 서지 않을 때 민중이 가져야 할 정신적인 지주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세상이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있다.

역사가 바로 잡혔을 때 자랑스런 대한민국 땅에 상식에도 없는 짖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섞어 없어질 자신의 더러운 욕망 따위를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못된 무리들이 다시는 생겨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역사가 거꾸로 갈 때 정의가 바로서지 않기 때문에 모든 구성원들이 마음을 정립할 수 없고 믿음이 없으며 또한 정의가 무엇인지 모를 수밖에 없고 진실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어 나라가 혼란해 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나라가 바로 설려면 역사가 온전해야 하고 그에 따라 국민들 마음가짐 역시 올 바르게 갖출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아이들에게 또는 청소년들에게 가르쳐 놓고 너희들은 바른 길로 가거라 하면 그들이 바른 길로 갈 것인가를 책임있는 어른들은 스스로 물어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으면 청소년들은 어른들이 하는 못된 것만 배워 나중에 나라꼴은 불 보듯 뻔하게 잡스러워 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가 현재처럼 정립하지 못한 것은 모두 거짓투성이 추악한 일제가 만든 반도사에 영향을 받아 민족의 바른 정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올바른 역사의 이치를 지금 당장이라도 바로 잡지 않으면 더 큰일 벌어질 것이란 사실을 우리 모두가 지금이라도 바로 자각해야 마땅할 것이다.

 

제하고

오늘 여기에 공개하는 두 장의 사진은 공교롭게 모두 1871년에 발생한 신미양요에 관계되는 사진들이다.

신미양요(辛未洋擾)는 1871년 6월 10일(고종 8년 음력 4월 23일)에 발생한 사건으로 조선과 미국 간 전쟁이라고 하지만 미국은 사소한 충돌로 표현하고 있으며 United States expedition to Korea 미국이 한국을 원정한 것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다.

 

물론 이 사건을 볼 때 통상을 요구하는 미국입장에서 전술적으로는 미국이 전투가 아닌 충돌에서 승리한 것 같으나, 전략적으로는 결국 목적한 통상조약체결은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고 조선은 이를 계기로 더욱 더 쇄국정책을 고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 사건을 1871년 6월 10일 기록하고 있지만 미국은 (June 1, 1871–July 3, 1871) 6월1일부터 7월3일까지라로 표시하고 있는 것도 다르다.

 

명미당집(明美堂集:1917)

애사는 辛未洋擾 때 강화도의 廣城堡에서 순절한 鎭撫中軍 魚在淵에 대한 것이 있는데, ‘忠壯’의 시호를 내려 충절을 기린 내용이 後書로 첨부되어 있다. 가전의 〈謙山篋藁敍傳〉은 季弟 李建冕이 죽고 나서 그의 文藁인 「正一錄」을 처음으로 본 뒤에 평소의 事行에 대해서 기록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한 글로서 1894년에 지은 것이다. 傳은 李春日, 李象秀, 安州의 妓生 百祥月, 韓成履, 靜菴 趙光祖에 대한 것이다.

위는 고서로 취급 받고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의 시문집인데 이것 역시 이상하게 1917년 김택영(金澤榮) 등이 중국에서 간행하였다고 하는 책이다.

중국이라고 하였지만 이것은 미국일 가능성이 많다.

이 기록에 비로서 신미양요의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신미양요에 대한 기록조차 없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것이다.

다만 승정원일기에 양요(洋擾)로만 되어 있고 위와 같은 진서인지 가서인지도 알 수 없는 것에서 신미양요 사건이 벌어진 한참 후 46년후 1917년에 기록했다는 이런 잡서에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많은 의문점을 낳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양요라고 하는 요(擾)는 소요, 소란따위를 나타내는 문자인데 이것은 소위 양키(yankee)라고 하는 양인들이 벌린 소란정도라는 것이다.

큰 나라에서 어디 한 쪽에서 조그마한 소란이나 소요등은 무시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것이 마치 조선전체가 붕괴되는 것 마냥 난리를 친 것은 후세에 꾸며 만들어지고 조작되어진 기록에서만 그렇다는 사실이다.

 

바다 양(洋)을 써 양이(洋夷)라고 보통기록에 쓰는데 이것은 조선에서 고대부터 바다를 이용하여 침략하거나 무례하게 범접하는 무리들을 일컬어 하는 말로서 당시까지 1887년 최초로 발표한 세계 공용어 에스페란토(Esperanto)의 예처럼 조선어가 공용어로 쓰였다고도 볼 수 있어 전 세계적으로 공통적으로 쓰였던 음절의 단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양이(洋夷)가 음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처럼 양키(Yankee)라고 보통어가 되지 않았을 것이란 추측이다.

물론 이 양키에 대한 설은 많다.

원래 뉴잉글랜드 지방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남북전쟁 당시에는 남부인이 북군병사에 대한 모멸적 칭호로 썼다 했으며 아메리카인디언의 체로키어 enakee(겁쟁이라는 뜻)에서 나왔다는 설, 뉴욕의 맨하턴 지역에 네덜란드계 이민자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들의 이름 중에 가장 많은 것이 "Yan"이었고 그것을 Yan-Kid 라고 부르던 것이 나중에 “Yankee” 가 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어쨌든 양키라는 대상은 대양을 누비고 다니던 분별없는 족속들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니 아시아 즉 동양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에서 서양 사람들을 무조건 양이라고 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제 첫째사진을 한번보자.

 

 

다 알다시피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에게 빼앗긴 어재연(魚在淵) 장군기라고하는 수자기(帥字旗)가 배 중앙 메인 톱 마스트(main top mast stay)에 걸려있는 것이 보인다.

 

이것은 조선을 반도사로만 배운 덕에 초라하게 생각되게 하는 사진 중에 하나다.

이것 이외 한복을 초라하게 차려 입은 당시 조선군인의 모습에서도 똑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워낙 일제가 장난 질을 잘 친 탓에 이렇듯 안좋은 기억만 솔솔피어나는 것은 슬픈일이지만 지나간 일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교육이던지 교육이 주는 영향은 무서운 것임에 틀림이 없다.

 

 [사진에 상처가 있는 깃발은 어디가고? 당시에 노획했다는 깃발치고 너무 깨끗하게 보존되었다?]

당시 동아일보를 보면 1936.1.15 일자에 65년만에 이 사건이 처음 대중에게 보도 되었다. 이 기간이라면 무엇이든 섞어치기 할 수 있는 기간이다. 미국영사관이 처음 개설되는 시점에 보도인 것 같은데 각국영사관 방문기란 타이틀로"鎖國江山에 슈어맨 米艦 洋夷侵犯이라 포격 建國百年 만에 별나라 깃발이 漢陽城 정늬꼴 에 펄넉펄넉"제목이다.

 

이 깃발은 모든 기록에서 신미양요 때 조선 어재연 장군으로부터 미국해군이 빼앗은 것이라고 하던 깃발이다.

이 깃발은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장수를 나타내는 '수(帥)'자가 쓰인 가로 세로 4.5, 또는 5m의 대형 깃발이라는데 현재 미국으로부터 126년 만에 국내로 환수되었다 하고 환수되기 전에는 미국 메릴랜드주(Maryland), 애나폴리스(Annapolis) 해군사관학교(United States Naval Academy)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논제 외적인 생각을 잠시 해본다.

신미양요에서 획득한 노획물인 이 깃발과 아래 설명될 또 다른 노획물이 각각 다른 곳에 보관되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와 이 깃발과 아래 노획물은 같은 사건에서 발생된 것이 아닌 사건내용이 다를 수 있다는 가정도 없지 않다.

이 깃발을 미국입장에서 우방이라는 이유로 한국으로 내 줄 때 당시 중요회의를 하였을 것인데 이 과정에서 역사적인 문제에서 어떠한 이야기가 나왔을 것인지 그 내용이 매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돌아가 그러면 먼저 의문시 하는 것은 왜 범선인 미군함선 배 중앙 메인 톱 마스트(main top mast stay)에 이 노획물인 조선군의 수자기가 비스듬히 걸려 있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이 깃발은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진중(陣中)이나 영문(營門)의 뜰에 세워진 대장의 군기라고 하는데 이것을 어재연이 쓰던 깃발로서 강화섬 전투때 미해군이 빼앗은 것이라면 그대로 보관하는 순서를 거치거나 배에 가져가도 그냥 던져 놓아 방치할 법한데 무엇때문에 그것도 배 주인을 상징하는 메인 톱 마스트에 비스듬히 걸려 있어야 하는 것인지가를 묻는 것이다.

전략상 상대방의 사기를 꺾기 위해서 였더라면 이해가 되지만 당시 망원경(望遠鏡)도 없었을 시기인데 배에 걸려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이 분명한데 무엇을 노려 그것도 미군 범선 메인 톱 마스트에 걸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빼앗은 미해군병사들이 스스로에게 잘 보이도록 그냥 걸었다?

그것은 군의 기강이 없는 잡졸들만 모인 곳에서 하는 이야기다.

1871년도의 해안포 사격거리가 적어도 10km 는 넘었다고 하면 그곳 바깥에 있어야  할 모함까지 눈으로 식별하기에는 매우어렵고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정도 상황을 추측할 수 있다.

 

하나는 이 범선이 조선의 함선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미군 해군이 기습하여 조선함선 전체를 빼앗고 그 메인 마스트에 있는 군기를 반쯤 내려 미군 두 명이 보호하고 있었다고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 함선 위에서 기념촬영한 것이 많은데 함선을 노획하고 그 함선에서 미해군들이 모여 기념촬영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매우 힘든 추측이지만 당시 촬영하였던 사진에 합성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인데 당시에는 합성기술이 모자라 하지 못한 상태에서 근세사가 마무리되고 2차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에서 발달한 사진 합성 기술을 이용 합성한 사진이라고 볼 수 있다.

 

첫번째 추측이 맞다면 당시상황은 물론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이 수자기가 육상에서 사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해상에서 사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육해상 전투에 모두 상징성으로 사용하는 깃발인지 실체를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고 단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만약 이 수자기가 육상이나 해상이나 할 것 없이 주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곳, 즉 모함에 개양하도록한 깃발이라면 당연히 모함 메인 마스트에 걸어야 했으며 관리 또한 잘 해야 하는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물론 두 번째 비유는 상당히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사진을 보면 왠지 모르게 합성한 자국이 군데군데 발견됨을 무시할 수 없어 하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수자기에서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이 깃발이 매우 희귀한 것이라고 말들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깃발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과연 한반도 조선 그것도 강화도에 미국 함대가 실제로 들어왔는가 하는 의문은 더욱 더 증폭되는 형태를 낳고 있는 것이다.

 

실제 우리는 조선의 고유언어(한문)가 세계어가 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는 면도 없지 않다.

다만 지금 미국과 영국의 영어가 온 머릿속을 가득채워져 한문 글씨의 사(帥)자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사실 미국내에 1881년  이후 기록들을 볼 때 이 한문어 기록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을 영어, 라틴어, 히브리어 등으로 번역하기 바빴고 이러한 번역일을 하던 직종은 매우 인기있는 직종이었다는 사실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더 밝혀야 할 문제이고 당시 한문 글씨 사(帥)를 배경으로 미 해군들이 전쟁에 나설 수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도 감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미해군 함선이라고 하는 모함 메인 톱 마스트에 노획한 적군의 깃발을 건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비스듬이라고 걸려 있는 수자기에는 미처 우리가 알 수 없었던 상황이 전개되는 과정에 있었다면 이러한 중요성은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두 번째 사진을 보자.

 

 

이 사진은 신미양요에 획득한 전리품을 전시함에 있어 트랜스실바니아 학생 도로시 폴크스가 장총을 들고 앉아 있는 주위에 여러가지 전리품들이 나열되 있는 사진인데 키 포인트는 맨 아래쪽 영문내용이다.

 

Equipment captured when americans first fought on korean soil. in june 1871, is on display at the Lexington public library. The display includes a korean musket, held here by Transylvania student Dorothy Foulkes: a breech-loading cannon of solid brass, a helmet and a korean banner. The souvenirs were placed on exhibition at the library by Transylvania college, which keeps them permanently in its museum. they were given to the college by Mrs. William Mckee. her son, naval Lt. Hugh mckee, was killed ? in a skirmish of US and korean forces 79 years ago.

1871년 6월 미국인이 한국 땅에서 처음 싸울 때 포착된 장비가 렉싱턴 공공도서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 전시회에는 한국의 머스켓(Korean musket)이 포함되어 있는데, 트랜스실바니아 학생 도로시 폴크스: 단단한 황동(총알 구멍이 뚫린)헬멧, 한국 현수막 등이 있다. 기념품들은 트랜스실바니아 대학 도서관에서 전시되었다. 그들은 부인에 의해 대학에 보내졌다. 윌리엄 메키 그녀의 아들, 해군 중위. 휴 메케는 79년 전 미국과 한국군의 ?(무슨장소)교전으로 사망했다. 

 

이 사진이 주는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전시물에서 보면 여자가 들고 있는 대조선(한국)소총과 대포후미장치, 전투모, 배너라고 하는 북 인지 알 수 없만 일단 금고(金鼓)라 했으니 옛날 군인이 전장에서 전진할 때는 북을 치며 후퇴할 때는 징을 치는 군대의 징과 북을 총칭한 말인데 장수가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있는 북에 걸린 깃발이나 휘장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들을 보면 분명 이것들은 노획한 물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전투에서 조선군이 착용한 모자를 유심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지금까지의 상식을 깨는 새삼스러운 사실인데 검은 둥근 모자를 잘 보면 철을 사용하여 만든 투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총알구멍이 보이는데 총알이 구멍을 파고 들 때 철이 총알의 스피드가 주는 압력에 견디지 못해 파열된 모습을 생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역사학자들도 알지 못하는 놀라운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털, 헝겊이나 종이를 겹세운 모자가 아닌 철을 가지고 만든 납작하고 둥근 전투모인 것이다.

첨주이다.

1차대전 프랑스 전투모가 생각이 난다.

 

 

 

조선시대 피갑을 입은 무관의 청동첨주 
첨주는 투구의 일종으로 철제이며 주물로 만든 것으로서, 첨이 있는 형태를 말한다
연세대학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첨주는 발립형(鉢笠形)으로 전후좌우 4편으로 되어 있다. 정개부는 아무 장식이 없이 사각형 철판을 대고 꼭대기 정중에서 큰 두정으로 시정하였고, 발부는 전후좌우에 화염형 근철을 댔는데 근철 중앙은 융기시켰으며, 챙의 넓이는 5.3cm이고 투구높이는 16.7cm이다.

육군사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첨주는 청동 재질로서 그 형태는 전립형이다. 정개부는 1.3cm의 구멍이 뚫려있어 등자를 장식했던 것 같고, 발부는 폭이 넓고 높이가 낮은 모양이며 통으로 되어 있어 두드려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첨부는 가장자리가 약간 위로 올라와 있고 안쪽에 서로 대칭되게 두 개씩 구멍이 있어 끈을 달아 턱 밑에 매어 착용한 것 같다. 투구 높이는 9cm이다 

 

                                                           [Whittlesey-1871]

                                                [Self-Portrait in Uniform 1917]

 

놀라운 이야기다.

전립(戰笠, 氈笠 戰笠套)인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cap 이라고 하지 않고 헬멧(a helmet)이라 했다. 헬멧이란 단어를 썼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철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조선시대 첨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사진과 비슷하게 미국측이 바꾸지 않았다면 그래서 실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면 철인지 아닌지는 직접 가서 확인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대조선이었다면 분명 철로 만든 전투모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든다.

흔히들 전립(戰笠, a soldier's felt hat)은 호족(胡族:고려)들이 쓴 벙거지모자라고 알고 있고 조선후기의 병사들이 쓰던 모자인데  짐승의 보통 털을 다져서 담을 만들고 그것을 골에 넣어 모자집은 높고 둥글게, 전은 넓고 평평하게 만들었다고 하고 하졸배의 것은 벙거지 또는 벙테기라고 하였으며, 조잡한 돈모(豚毛)로 만들었고 별다른 장식은 없었다고 알려진 군모인 것이다.

그런데 철로 만든 벙거지 또는 전립은 처음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사진, 제일 하단 부에 있는 작은 붉은 사각 선 안에 빈 공백을 말한다.

본 블로그가 일부러 알기쉽게 하기 위해서 원본사진에 나타나는 공백에 추가 선만 그린 것이다.

그곳에 문맥을 보면 이 충돌이 어디에서 벌어진 것인가에 대한 장소와 위치를 알 수 있는 단어 문맥인데 일부러 지워버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놀라운 일이다.

이사진은 공립(Public) BBS 에 보도된 기사이다.

그래서 이 사진을 찍어 신문에 낼 때 인쇄가 잘 못 될 수도 있어 문맥전체를 따져보아도 우리가 철떡같이 알고 있는 강화도 강성진이라 표시가 당연히 있어야 함에도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강화도 강성진은 신미양요가 벌어진 곳으로서 우리가 보고 들어온 기록에 대한 내용의 장소이다.

신미양요(辛未洋擾)조선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미군은 6월 10일 군함 2척을 앞세우고 육상 전투대원 644명을 강화도의 초지진에 상륙시켜 무력으로 점령하고, 이어 덕진진·광성진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그러나 6월 11일의 광성진전투에서 미군 역시 피해가 많아 이튿날 물치도로 철수하였다.[네이버 백과사전]

 

 

 

[클릭원본:세계삼한역사연구] 

[강화도 강선지라는 곳도 지금 위성으로 본 강화도 모습과 너무 동 떨어진 느낌]

 

위 사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자료에 신미양요 전투가 벌어진 곳은 강화 광성보(江華 廣城堡)라 정확하게 표시하고 있는데 한반도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광성나루(광성진)에 있던 성보(城堡)라고 정확하게 나오며 사적 제227호로 지정(1971.12.28) 된 곳으로서 정확한 소재지는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번지이라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또 다시 미국자료를 찾아보니 월리엄 미키 여사의 아들 해군 중위 후그 맥키가 죽은 것은 June 11, 1871(1871-06-11) (aged 27) 일로 At sea off the coast of Korea 라고 하여 그냥 한국 해안이라고만 적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또 자료를 찾았는데 서양 자료라고 할 수 있는 위 기사의 웹문서 BBS Public 신문자료에서다시 기사를 반복하여 쓴 곳에서도 역시 그 공백은 메워지지 않고 아예 공백을 없애 버리고 killed ? in 두 단어를 아예 붙여 놓고 있었다.

이 빈공간에 들어갈 ?(place)장소가 역사 미스테리라는 것이다.

 

 

무엇때문일까?

 

분명히 그곳에는 her son, naval Lt. Hugh mckee, was killed ? in a skirmish of US and korean forces 79 years ago.

단어 "in" 앞에 위치나 장소가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합리적이라고 하는 언론에서 조차 이렇게 얼버무리고 있다는 것은 보통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in 단어 앞에 ?(place) 들어갈 장소인 것 같으나 삭제된 단어는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었다.

 

실제 1871년 대조선에서는 양키의 소요(騷擾)라고 하고 양요(洋擾)라고 하여 구체적인 상황을 기록한 문서가 없어 대수롭지 않게 처리한 사실들이나 미국 측에서도 기어코 소요가 일어난 장소를 비밀로 하고 싶어하는 것을 보면 이 신미양요(辛未洋擾)는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본 블로그가 추리(?)하는 상황이 그대로 적용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말이다.

이 신미양요(辛未洋擾)와 결부되는 사건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1866년도에 일어난 평양군민을 학살한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사건이다.

만약 이 신미양요가 어떤 성질의 사건인가 밝혀진다면 이 제너럴셔먼호 사건도 동시에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사건은 동시에 사건임과 동시에 한반도 역사를 굳히게 한 역할을 한 중요한 사건으로서 역사성이 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두 사진을 살펴보건데 확신을 하게 만드는 것들이 매우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을 감추고 싶은 욕망.

서세가 근대사를 뒤틀고 새판짜기하는 과정에서 들어날 수 있는 엄청난 것을 덮어 보호하려는 것들임에 틀림없어 보인다는 사실이다.

 

사라진 대조선은 말이 있을 수가 없고 근세기에 만들어진 한반도 조선에서는 한반도에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을 구태여 세세하게 나타내어 불란과 말썽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없었다고 보이고 미국은 미국 나름대로 1871년에서 79년을 보태면 1950년도이니 그 때 한국전쟁이 있을 때이니 전쟁이란 당시 상황에 맞게 정치성을 띄었을 수 있으며 신미양요가 있어 국제적 관계가 성립된 마당에 애써 한반도를 지정해야 하지만 역사적으로 마땅하게 그러한 증거를 찾기 어려웠거나 더 붙일 수 없다고 보았을 때 양심상 그것을 구체화하지 못하고 충돌이 발생한 장소 또는 위치는 빈 공백으로 남겨 두고 싶었거나 지금까지 일제에 의해 잘 감추어진 사실을 한국민들이 그냥 눈치 채지 못하면 언제까지고 묻어놓고 얼버무리려고 했다는 것이 들어난 것이다.

 

이상 두 장의 사진으로 본 역사 찾기는 본 블로그가 가고자 하는 길이 허황된 것이 분명히 아니라는 사실과 이치적으로도 정당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볼 수 있으며 그리고 언제까지고 본 블로그가 목표하고 목적한 그 길을 가야하는 소임과 함께 큰 추진력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인정되며 그 길은 정의롭고 올바른 길임을 분명히 알게 하는 분석으로 충분했다고 생각한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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