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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생존 외교문서 발견
[경향신문 2013.07.01 오전 6:33]
원본주소링크 http://m.news.naver.com/read.nhn?sid1=103&oid=032&aid=0002354799
1896년 2월6일 러시아 주재 독일대사 후고 라돌린이 독일제국 총리 호엔로헤 실링스퓌르스트(Hohenlohe Schillingsfürst:1819-1901)앞으로 보낸 비밀문서. “러시아 외교부 장관 알렉세이 노마노프 로스토브스키(Aleksey Lobanov-Rostovsky1824-1896)가 자신의 정보에 따르면 죽었다고 이야기되는 한국의 왕비가 아직 살아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고 적혀 있다.
참조:독일 주 러시아대사 후고 라돌린(Hugo Fürst von Radolin:1841-1917) 후작은 1884년부터 1888년에 걸쳐 독일 프로이센(Pruisen) 황제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 1831-1888, 재위:1888)의 시종, 시종장을 맡았던 사람으로서 1892년부터는 기울어져 가는 오스만제국 압뒬하미트 2세(Abdul Hamid II, 1842-1918,재위:1876-1909)집권시 오스만제국 주재 대사가 되어 근무했고 이어 1895-1901년까지 러시아제국 주재대사로 재임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1901년 러시아주재대사에서 물러난 것은 영국의 빅토리아의 외손녀이며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2세(Aleksandrovich Nikolai II,1868-1918,재위:1894-1918)황후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Alexandra Feodorovna:1872-1918.7.17)의 기분을 상하게 하여 노여움을 샀기 때문에라고 전해진다.
그리고 노마노프 러시아외교부장관은 1896년 심장마비로 사망하는데 공교롭게도 명성황후 시해사건(明星皇后 弑害事件)이 있었다고 하는 바로 다음해라 이 사건에 대한 입막음의 의혹도 없지 않다.
독일·영국 보관소서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지 않고 피신해 생존했다는 내용을 담은 독일과 영국의 외교문서가 발견됐다.
명성황후는 1895년 10월8일 새벽 경복궁 건청궁에서 살해당했다는 게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정상수 한국방송통신대 통합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4개월 뒤 명성황후가 살아 있다는 내용을 담은 독일 외교비밀문서와 을미사변 때 탈출했다고 기록한 영국 문서를 각각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와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았다”고 30일 밝혔다.
독일에서 발견된 문서는 1896년 2월6일 러시아 주재 독일 대사 후고 라돌린이 독일제국 총리 쉴링스퓌르스트 호엔로에 앞으로 보낸 비밀문서 해독문이다. 이 해독문은 “러시아 외교부 장관 로바노프가 자신의 정보에 따르면 죽었다고 이야기되는 한국의 왕비가 아직 살아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베베르)는 왕비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는지를 한 명의 한국인으로부터 매우 비밀리에 요청받았다고 한다”고 적었다.
영국 문서는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월터 힐리어가 아관파천 나흘 뒤인 1896년 2월15일 명성황후의 생존 가능성에 대한 고종의 입장을 보고한 내용이다. 힐리어는 베이징 주재 영국 대리공사 뷰클럭에게 “지난 10월8일 사건(을미사변)과 관련, 왕세자(순종)는 가까스로 살해를 모면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왕은 여전히 왕비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말하지 않고 있다”고 보고했다.
정 교수는 을미사변 직후 작성한 문서도 찾았다. 힐리어는 1895년 10월9일 베이징 주재 영국 공사 니콜라스 오커너에게 “일본인들이 서너 명의 궁녀를 죽였다. 그리고 왕비는 사라졌는데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이어 10월22일에는 오커너에게 베베르가 자신을 방문해 왕비의 생존 가능성을 이야기했다는 보고서를 보냈다.
정 교수는 “독일·영국 등 당시 조선과 관계를 맺던 나라들의 외교문서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다”면서 “명성황후의 시해를 당연시할 게 아니라 새로운 사료 발굴로 진실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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