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인물

다시보는 영조와 루이15세

한부울 2014. 4. 10. 17:56

***********************************

조선과 프랑스의 숙명적 만남(2)

 

글쓴이:한부울

 

경종과 도팽 루이
영조와 루이15세
붕당이란 무엇인가?
조선사회 보편화 된 백인

 

경종과 도팽 루이

 

경종(景宗, 1688-1724 재위:1720-1724)

도팽 루이(le Grand Dauphin, 1661-1711)

 

본 블로그 글 숙종과 루이14세편에서 두 제왕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세밀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근원적으로 조선과 프랑스가 현저하게 역사적으로 얽히고 설키는 것은 외규장각도서에 따른 역사음모가 존재한다는 사실까지 풀었다.

그렇다면 숙종과 루이14세를 이은 경종과 도팽 루이에 대해서 알아 보지 않으면 안된다.

태자 경종(景宗 昀:1688-1724)은 말 많은 장희빈 옥산부대빈 장씨(玉山府大嬪 張氏)의 장남이지만 인현왕후(仁顯王后:1667-1701)의 양자로 입적이 된 왕이다.

장희빈(1659-1701,왕후 1689-1694)이 왕후에서 빈으로 격하되었는데 인현왕후 저주에 의한 사망혐의로 인해 자진명령을 받아 사망, 아들즉위 후 옥산부대빈으로 추존된다.

결국 그도 생모로 인한 충격과 갈등에서 짧은 집권을 거쳐 37살 때 죽는데 모두 의혹을 가질만하게 이야기가 전개된다. 왜냐하면 영조 재위시 바로 1728년의 이인좌 난(李麟佐의 亂)이 경종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란 사실만을 보아도 그렇다.

프랑스의 도팽(왕세자) 루이 역시 나이 49세에 죽지만 아버지 루이14세보다 먼저 죽기때문에 집권하지 못한 왕세자이다.

경종은 재위 4년 2개월 만에 자식을 두지 못하고 갑자기 죽는다.

이것도 비록 숫자적으로 차이가 나겠지만 제왕 하나를 일찍 거두게 하는 것은 같다 할 수 있다.

당시 세제인 연잉군(英祖, 延礽君)이 보낸 게장과 생감을 먹었다가 고통을 호소하면서 죽었다 하는데 지금에 와서 그것이 사실인가 아닌가에 메달릴 수도 없고 딱히 증명할 길도 없는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도팽 루이 역시 1711년 천연두로 죽는다.

경종은 이상하게 게장과 생감을 먹고 죽었다고 하여 의혹이 불거지고 흥미위주의 이야기가 재생산되게 하는 것도 있지만 역시 반도역사는 의도적으로 장희빈이란 흥미거리를 내 세워 조선왕조 내부에 치부를 들어내고 마치 갈등이 만연한 것처럼 만들어 조선제왕들의 치세에서 어지러운 부분만을 조명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결코 바른 역사라고 할 수가 없는 이유가 된다.

경종이 이복동생 연잉군인 영조와 대립되었다는 것을 과대하게 부풀리고 조선왕실의 근본적인 어두운 부분을 강하게 표출하여 부정적으로 받아 들이도록 유도한 측면이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의도된 일제의 장난이 가미된 것이라고 보여지는 것이다.

일제가 반도역사를 만들기 위한 목적은 누누히 이야기 했지만 그들의 식민지강탈역사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주 목적이다.

경종은 1701년 14살 때 희빈이 죽어 생모의 사별을 맛보았다.

물론 인간적인 면에서 충격이 컸을 것이다.

그리고 1716년 숙종의 병환으로 대리 청정하다가 4년 뒤 숙종이 죽자 1720년 33살 때 즉위했다.

그런 후 4년 재위하고 의문의 죽음을 하고 만다.

때문에 독살처럼 몰아가는 역사가 있어 흥미위주의 이야기 소재로 충분하겠지만 사실적 판단은 유보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역사소설이나 TV 사극용으로 알맞게 맞추어놓은 듯한 반도역사는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사실적이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1718년 왕세자에게 대리청정케 했지만 늘 불안한 세자 대리청정이 유지되는 가운데 1720년 숙종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이이명을 불러 사관의 입회 없이 연잉군(英祖,延礽君) 금(衿)을 경종의 후계자로 삼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긴 뒤 사망했다.

이것도 소설이나 극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갈등의 씨앗이다.

이 유언을 근거로 노론은 경종을 폐출하고 연잉군(英祖, 延礽君)을 추대하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들어 낸 것이 바로 신임사화(辛壬士禍,1721-1722)라 하였다.

즉 소론측은 노론의 대리청정 주장을 경종에 대한 불충(不忠)으로 탄핵하여 정국을 주도하였고, 결국에는 소론정권을 구성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신임사화는 이러한 와중에서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사건(告變事件), 즉 노론이 숙종 말년부터 경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왔다는 고변을 계기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유럽의 18세기에 고조된 왕위계승전쟁을 보는 듯하다.

루이14세 장남인 루이 드 프랑스(Louis de France, 1661-1711)는 왕세자(Dauphin)였으나 부왕 루이 14세보다 먼저 천연두로 사망하였기 때문에 집권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도팽 루이(le Grand Dauphin, 1661-1711)의 자식은 루이 15세의 부친 루이(Duke of Burgundy, 1682-1712) 부르고뉴 공작(루이 15세의 부친)과 펠리페 5세 또는 앙주의 필리프(Philip V or Felipe V, Philippe:1683-1746) 훗날 스페인 국왕를 두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천연두로 사망을 하고 만다.

대신 경종은 아예 자식이 없었다.

경종과 도팽 루이를 억지로 비교하자면 둘 다 태자 출신이고 왕세자였다는 것이며 재위를 짧게 하거나 아예 하지 못한 경우라고 보며 경종은 독살에 의한 죽음이지만 도팽 루이는 천연두 때문에 사망하였다는 것으로 비교될 수 있는데 역사적으로 기록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조선과 프랑스를 비교 해 볼 때 조선은 사건이 추상적이거나 극적인 요소를 통하여 사건이후의 일을 예상할 수 있을 만치 단순하게 연결되고 있고 가공적인 냄새가 나는 반면에 프랑스의 도팽 루이 기록은 좀 더 세세하고 사실적인 것이 더 많다고 판단되어 실존 인물로 부각되게 한다.

그것은 양쪽 제왕의 사인을 프랑스는 객관성이 있는 천연두로 하는 것과 달리 반도조선은 객관성이 떨어지는 독살이라는 함정에 이야기를 몰아넣었다는 오해를 받기에 충분한 것이다.

 

영조와 루이15세

 

영조(英祖, 1694-1776 재위:1724-1776)

루이15세(Louis XIV, 1710-1774 재위:1715-1774)

 

영조와 루이15세는 하나의 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집권 년 수가 똑 같다.

다섯 살에 왕위에 오른 루이15세는 자신의 열세 번째 생일 날짜인 1723년 2월 15일까지 그의 재종조부이자 이복 왕고모부 오를레앙 공 필리프(Philippe II,1674-1723)의 섭정과 함께 통치하게 된다.

그 후 자신이 정식으로 집권한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결국 루이15세가 집권한 것은 그의 나이 13세때이고 1723년이다.

그런데 조선 영조는 물론 나이가 30세에 집권하지만 즉위 년도가 1724년이다.

때문에 루이15세 집권년도(1723년)과 영조의 즉위년도(1724년)가 1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것은 같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영조가 죽는 년도가 (1776년) 이고 루이15세가 사망하는 년도 역시(1774년)이니 결국 따져 볼 때 조선 영조의 집권 년 수 52년이고 프랑스 루이 15세의 집권 년 수 51년이니 차이가 1년 밖에 나질 않는다.

이러한 수치를 놓고서 다르다고 하기가 무척 애매한 것이다.

이것은 역사기록이란 특수성을 감안할 때 같은 왕이라 하여도 무방한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같은 수치가 조선과 프랑스에서 공히 볼 수 있다는 것일까?

그것도 하나는 한반도에 왕이고 하나는 직선거리 23,500리가 넘게 떨어진 프랑스의 왕이라는데 쉽게 납득이 가질 않는다.

신이 일부러 꿰맞추려고 하여도 힘이 들 것 같은 거의 동일한 인물이라고 단정을 지워도 부족하지 않을 것 같은 그것이 역사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어진다.

이것은 틀림없이 실체는 하나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역사기록이며 때문에 조선과 프랑스는 숙명의 만남이라고 하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루이15세 때 일어난 모든 일은 조선 영조 때 일어난 일이라고 해도 별로 이상할 수가 없다.

 

루이15세는 갑작스럽게 죽은 대부분의 왕족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는 것은 영조와 같고 그가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인자한 행동으로 명성을 얻어 “친애왕” (le Bien-Aimé)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는 점과 세월이 흐르면서 백성이 그의 결핍된 도덕성과 프랑스와 군주 정치를 효과적으로 개선하지 못한 점 그리고 외교 정책의 실패를 인식하면서 그에 대한 애정이 식어지자, 결국 그는 프랑스의 인기 없는 왕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는 것이고 그는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에서 가장 큰 영토를 통치하는 과업에 일신을 바쳤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루이14세는 수많은 전쟁을 치루었고 침략을 밥먹듯이 하였다는 것을 볼 때 그가 차지한 영토가 어마어마할 것이란 생각을 할 수 있고 그 영토가 루이15세로 승계되었다면 당시 러시아 운운했지만 삼한역사의 땅은 실로 대단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는 동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루리15세가 어린 나이(2세)에 일찍 어머니마리 아델라이드(Marie Adélaïde de Savoie,1685-1712)를 잃고 위안을 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를 갈망했던 그는 자신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믿음직한 여자를 찾고자 1745년 이후 많은 여인을 가까이하여 나라 살림을 소홀히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때문에 나라 재정에 큰 손실을 내었으며, 이로 인해 국민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는 것은 함축된 루이15세의 인간적인 내면이다.

 

위 글에서 보면 마치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을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영조 역시 무수리 출신인 생모 숙빈최씨(淑嬪 崔氏,1670-1718)의 비천한 신분에 대하여 그가 일생동안 열등의식을 가졌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어머니에 대한 느낌정도가 루이15세가 느꼈던 심적인 갈등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 점이다.

 

영조는 숙종의 서장자이지만 루이15세는 루이14세의 손자이다.

어쨌던 루이14세는 자신의 재위기간동안 장남 왕세자 아들인 루이(1661-1711)를 천연두로 잃었고 손자며느리 마리 아델라이드(Marie Adélaïde de Savoie, 1685-1712)도 천연두로 잃었으며 손자 부르고뉴 공작 도팽 루이(Louis, duc de Bourgogne, 1682-1712)까지 천연두로 잃고 만다.

그 후 2년후 루이14세 손자 베리공작 샤를Charles, duc de Berry, 1686-1714)역시 사냥하는 도중에 사망하는 불운이 겹쳐진다.

루이14세의 연속된 불운이었던 것이다.

3년 후 루이14세 자신이 죽음을 앞둔 시기에 남아 있는 적장자는 바로 증손자 루이15세(Louis XIV, 1710-1774 재위:1715-1774)만이 남았던 것이다.

1774년 루이15세 역시 천연두에 걸려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64살에 사망한다.

 

본 글로그 글 "천연두(天然痘, Smallpox)로 본 박제가(朴齊家)는 에드워드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435 전염병 도표를 보면 영조(英祖)대의 전염병이 얼마다 심했는지 한 눈에 알 수가 있다.

루이15세와 영조(英祖)가 이렇게 똑 같은 상황임에도 반도역사에는 영조가 83살의 나이로 죽어 자연사 한 것처럼 만들었다. 물론 루이15세는 갑작스럽게 죽은 대부분의 왕족보다 오래 살아남았다는 사실도 있다.

 

영조 때를 보면 천연두와 홍역이 조선 전역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역사적으로 북아메리카대륙 미국 원주민에게 천연두와 홍역이 근원적으로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영조 5년(1729)까지 홍역기록이 남아 있다는 사실과 영조 18년(1742)7월에 천연두로 인한 군인(軍人)과 민간인 사망자가 수십만 명에 이르고 각 군사들도 감염이 되어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는 기록을 보면 이 무서운 전염병이 조선 전역에 퍼졌음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천연두로 인한 것들은 단언컨데 북아메리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프랑스는 곧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조선도 마찬가지다.

영조1년 (1725) 10월5일 전주(全州)·순창(淳昌)등 읍(邑)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하여 자연재해도 많았음도 알 수 있다. 상황이 이러하였으니 재정이 궁핍해지면서 루이15세도 백성들에게 원성만 많고 인기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영조 역시 그러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프랑스(Franch)

폴란드 왕위계승전쟁(1733-1738)

1733년 폴란드의 왕이 사망하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작센 선제후를, 프랑스는 왕비의 아버지인 스타니슬라스 레친스키를 새 왕의 후보로 지원하였다. 이러한 분쟁은 1738년 빈 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조약에 의해 마리아 테레지아와 로렌 공 프랑수아의 결혼이 성립되었고 로렌 지방이 프랑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

1740년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6세가 사망하면서 제위 계승 문제가 부각되었다.

프로이센은 칙령을 무시하고 실레지아를 점령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영국의 지원을 받아 프로이센에 저항하였고 이에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프로이센을 지지하면서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은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1748년 엑스 라 샤펠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로이센은 패전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레지아 지방을 그대로 보유하였다.

정작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은 프랑스였다.

이것이 해외 식민지에까지 확대되어 프랑스의 식민 정책에 치명적인 결과를 안겨주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 경쟁은 17세기 이래 계속되어온 것이었다. 서인도 제도에서는 영국령의 자메이카와 프랑스령의 산토도밍고, 북아메리카에서는 대서양 연안에 자리 잡은 영국과 루이지애나에 자리 잡은 프랑스가 대립하고 있었으며, 인도에서는 프랑스의 동인도회사와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각각 경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과 이후 7년 전쟁을 계기로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 경쟁에서 영국에 대한 우위권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1743년에 추기경 플뢰리(André-Hercule de Fleury, 1653 -1743)가 사망하자 루이 15세가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7년전쟁(1756-1763)

프로이센의 세력 확대는 프랑스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프랑스는 200년간 외교적 숙적이었던 오스트리아와 화해하여 프로이센을 견제하려 하였다. 오스트리아 역시 실레지아 지방을 회복하기 위해 프로이센을 침략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터라 화해는 쉽게 이루어졌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 외에도 러시아를 끌어들여 프로이센에 대항하였고 이에 프로이센은 영국의 지지를 얻어 맞섰다. 전쟁은 7년 동안 계속되었기 때문에 흔히 7년 전쟁으로 불린다.

이번 전쟁에서도 프랑스는 패배하였다. 프랑스는 1763년 파리 조약에 의해 캐나다의 왼쪽은 영국에게, 오른쪽은 에스파냐에게 양도하였다. 이로 인해 영국은 북아메리카와 인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장악하였다. 프랑스에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설탕산지인 서인도 제도를 계속 보유한 점인데 국내의 여론이 어느 정도 진정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무튼 7년 전쟁에 의해 프로이센은 유럽의 강국으로 급격히 부상했고 영국은 세계 제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한 반면 프랑스는 루이 14세 시대의 영광을 상실하였다.

1774년 백성들은 루이15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朝鮮)
정미환국(丁未換局, 1727)

1727년(영조 3년)에는 정미환국이 발생한다.
영조(英祖)는 당파심이 매우 강한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탕평책(蕩平策)을 추진한다. 이를 계기로, 서인에서 분파한 소론(少論)은 실각하지만, 또 다른 서인인 노론(老論)은 계속 집권한다.

 

이인좌난(李麟佐亂, 1728)

1728년(영조 4년)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하여 일으킨 반란이다.

신임사화 이후 실각 당하였던 노론이 영조의 즉위와 동시에 다시 집권하고, 앞서 노론 4대신을 무고한 바 있는 소론파 김일경·목호룡이 죽음을 당하자, 그 당의 나머지는 불만을 품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차, 1727년(영조 3년) 음력 7월 1일 노론의 일부가 실각함을 보고, 이듬해 음력 3월에 이인좌·김영해·정희량 등이 주동이 되어 밀풍군 탄(坦)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먼저 이인좌는 청주를 습격하고 이순신의 손자인 병사(兵使) 이봉상을 죽이고 병졸을 모아 스스로 대원수가 되어 사방으로 격문을 돌렸다.

“경종이 억울하게 죽었다. 영조가 숙종의 왕자가 아니므로 왕대비의 밀조(密調)를 받아 경종의 원수를 갚고 소현세자의 적파손(嫡派孫)인 밀풍군 이탄 (李坦)을 왕으로 세워 왕통을 바르게 한다.”이인좌의 격문

그리고 모든 군사가 흰 색의 옷을 입고 경종을 애도하는 것처럼 꾸미는 한편, 평안병사(平安兵使) 이사성·총융사 김중기·금군별장(禁軍別將) 남태징 등과 통모(通謀)하여 내외상응(內外相應)하려 하였으나, 용인에 퇴거하고 있던 소론의 원로 최규서가 이를 알고 크게놀라 조정에 고변(告變)하니 반군의 계획은 무너지고, 새로 도순무사(都巡撫使)에 임명된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의 관군에 의하여 반란은 진압되었다.

비록 단시일의 내란이긴 하였으나, 청주성을 중심으로 진천(鎭川)·죽산(竹山)·안성(安城) 등지는 그 형세가 몹시 위태로웠으며, 이인좌를 비롯한 반란의 주모자들은 서울로 압송(押送)되어 처형되었고, 밀풍군 탄도 사사된다 (자결했다는 설도 있다).

소론이 이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우긴 했다. 그러나 이 난의 주동자의 대부분도 소론의 급진세력이기에, 이 난으로 소론의 세력은 크게 타격을 받았으며, 이후 정권은 대개 노론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루이15세는 폴란드 왕위계승전쟁(1733-1738),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 7년전쟁(1756-1763)까지 전쟁에 휩쌓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반면에 조선 영조는 정미환국(丁未換局,1727), 이인좌난(李麟佐亂,1728)이 있어 이 역시도 평탄치 못했음도 알 수가 있다.

 

한반도 역사는 넓지도 않는 영토안에서 마치 한 대륙 전체를 지배한 것처럼 무슨 갈등이 그렇게도 많았는지 아예 붕당시리즈가 정치사에 넘쳐 날 정도라는 것을 반도역사를 공부한 우리들은 눈이 아프도록 보고 들은 기억이 있다.

오죽했으면 나라꼬라지가 이놈의 당파싸움때문에 거들난 것이라고 분노했던 기억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붕당의 사실성에 대해 우리가 낱낱이 알지 않으면 안된다.

붕당이 생성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일제가 반도역사에서 장기적으로 노렸던 무서운 틀이고 함정이라는 사실을 지적해야 하고 또 한가지는 좁한 땅에서 벌어지는 붕당은 격에 맞지 않는 정치성이라고 보았을 때 집안싸움이고 아귀다툼으로 비쳐진 것이다. 때문에 일제는 일제침략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고 매우 중요한 이야긴데 언제까지고 반도역사를 통하며 조선인들에게 노예근성을 심으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붕당이 환멸을 느껴야 했던 것과 달리 붕당이란 큰 의미는 거대한 세계 정치구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넓은 세계 다양한 종교, 인종, 문화, 각양각색의 왕족과 귀족을 아우르는 것이라면 근원적으로 정치 갈등이 없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면을 풀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붕당이란 틀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계삼한이란 거대한 틀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는 정치적인 갈등이라고 풀이할 수가 있다.

풀어보면 한반도에 서인(西人), 동인(東人), 남인(南人), 북인(北人)이라고 하여 사색당파(四色黨派)라 하지만 한반도에 그렇게 다양한 민족 구성도 없을 뿐만아니라 종교도 단순하며 인종도 단일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맞지 않는 옷이라는 것이다.

한반도가 아니라 세계 전역을 가름한 지역구역에서 적용되어야 할 정치구도임을 알 수가 있다.

실제는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아메리카대륙이 중심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메리카대륙을 중심으로 할 때 서인은 서양 즉 서구가 되고 남인은 중앙아메리카대륙과 남미가 되어야 하며 북인은 현재 북유럽이라고 알려지지만 러시아를 근거로 하는 몽고인들이거나 게르만 등 타타르족으로 판단할 수 있고 동인은 그야말로 아메리카의 동부지역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반도 붕당은 당시 일제가 동아시아대륙사를 만들기 위한 틀을 잡기위해 짠 구도이다.

그렇게 볼 때 붕당(朋黨)이란 용어는 반도역사의 한계라고 보아야 맞다.

나중에 한번 더 자세하게 이야기 하겠지만 실제 붕당(朋黨)일 수밖에 없는 것은 넓은 정치영토를 좁혀놓고 한반도역사로 만들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만든 정치형태의 용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서인은 현재 구라파 즉 구주, 유럽영역에서 일어난 모든 정치세력들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는 아메리카대륙 서부지역이어야 한다.

특히 숙종 부터 서인에서 갈라진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에서 볼 때 재미있는 것은 소론(少論)은 프랑스가 되고 노론(老論)은 프랑스와 반대세력이 된다.

그래서 숙종이후 소론은 늘 노론에게 밀린다.

루이15세 때만 하더라도 폴란드 왕위계승전쟁(1733-1738),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 7년전쟁(1756-1763)등에서 상대국들에게 물리적으로 정치적으로 밀리는 형국을 맞는다.

 

붕당이란 무엇인가?

 

또 하나는 서인으로서 출발하여 나중에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되는데 이 세도정치가 순조제위년도, 1801년부터 시작되는 것을 비교하면 영국 그레이트브리튼아일랜드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1801-1922)과 대비된다.

순조(純祖, 1790-1834, 재위:1800-1834)
헌종(憲宗, 1827-1849, 재위:1834-1849)
철종(哲宗, 1831-1863, 재위:1849-1863)

(1)1801-1820 조지 3세(George III, 1738-1820, 재위:1760-1820) 하노버왕가 3째
(2)1820-1830 조지 4세(George IV, 1762-1830,재위:1820-1830) 하노버왕가 4째
(3)1830-1837 윌리엄 4세(William IV, 1765-1837,재위:1830-1837) 하노버왕가 5째
(4)1837-1901 빅토리아(Victoria, 1819-1901,재위1837-1901)이자 인도의 여제(1877
-1901)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대영 제국의 최전성기는 ‘빅토리아 시대(The Victorian)이다.

여기서 여제(1877년)로서의 시작은 안동김씨와 상관없는 것이라고 보아야 옳다.

이것을 서양세력들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알 수 없게도 이것은 동양 열도 일본으로 변형된다.

동양 열도 일본으로 변형되는 것은 그 보다 앞선 16세기 “해적왕”으로 더 유명한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1540-1596)를 지원한 튜더 왕가(House of Tudor:1485.1541-1603)의 마지막군주 엘리자베스1세(Elizabeth I:1533-1603,재위:1558-1603)인데 그전까지 유럽의 바다 건너 약소국이었던 잉글랜드는 훗날 세계를 석권하게 되는 대영제국으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는데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일본 구주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도 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4월 21일 한국을 방문하여 나흘간 체류하면서 방한 일정은 영국 왕실의 계획에 맞춰 의전 행사를 최대한 배제하고 안동하회마을만 방문하고 돌아갔다.

이것은 지극히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어떻게 봐야 할까?

나중에 소론(少論) 프랑스세력이 주춤한 틈을 타 노론(老論)이 세력을 키우는데 이것을 하노버왕가(House of Hanover)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노버왕가(House of Hanover)는 빅토리아(Queen Victoria:1819-1901,재위:1837-1901)가 여왕이기 때문에 여자가 왕권을 승계할 수 없다는 조항에 막혀 부군을 따라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House of Saxe-Coburg and Gotha)로 변형된다.

때문에 노론은 시파(時派)와 벽파(僻派)로 나뉘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1707-1801)의 초대영왕 스튜어트왕가(House of Stuart)의 앤여왕(Anne:1665-1714,재위 1702-1714)부터 재차 1837년 승계하는 빅토리아(Queen Victoria)시대는 분명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종전 왕가와 틀이 다르고 이것을 안동김씨라 하여 벽파(僻派)라 해야 한다면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라 할 수 있다.

빅토리아여왕이 승계 받은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은 결국 하노버왕가(House of Hanover) 윌리엄 4세(William IV:1765-1837,재위:1830-1837)가 하노버왕가의 마지막 왕이 되는 셈이다.

 

어쨌던 나의 주장대도 이렇게 구도가 붕당이라는 구도와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붕당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제에 의해 의도된 것이라고 보이지만 조선사회에 늘 있어 비판에 대상이 되었던 붕당이 탕평책에 의해 사라짐과 동시에 세도정치가 시작되는 정치적 구도가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위에 예를 들었듯이 아주 자연스럽게 들어나는 것을 보면 사색당파라고 폄하해버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붕당과 세도정치와 함께 또 하나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조선사회에 등장하는 인종 구분이다.

황인종이 아닌 백인종으로서 보편화된 당시 조선사회의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조선사회 보편화 된 백인

 

영조9년(1733년) 9월 22일 기록에 그에 신상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된 것이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面靑而白, 鼻高而長, 鬚些而黑, 身材大小之中, 常居不脫裏着小衣, 有時脚戲, 超距驍勇過人, 常佩劍自言善舞。

눈이 푸르고 흰 얼굴에 코는 높고 길며, 수염은 적지만 검고 체격은 중간이었는데, 평소에도 소의를 벋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씨름이나 뛰어넘기를 했는데 날래고 용맹하기가 남보다 월등했으며, 늘 칼을 차고 스스로 춤을 잘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황진기의 모습이라 한 것이다. 

[샴발라고구려:2012.04.16]님이 찾은 자료를 보면 "영조가 살아있는 동안 수많은 군사가 황진기 체포에 동원되었으나 끝내 잡지 못했다. 황진기가 죽었을지도 모르는 순조때에도 황진기 수배령이 내려졌음을 볼 때 그는 사대부에겐 두려움을, 반란을 꿈꾸던 자에겐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란 글이다.

우리는 여기서 반도역사에 등장하는 서인이라든가 색목인 그리고 노론 등 특별하게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에 인종과 관계되는 사실을 여태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색목인은 바로 백인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인좌 난의 등장하는 황진기(黃鎭紀)를 기술한 위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서양인이고 백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인좌의 난(李麟佐의 亂, 1728)은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하여 일으킨 반란이다.

바꾸어 말하면 루이15세가 벌렸던 모든 왕위계승 전쟁에서 반발을 하였다는 이야기다.

경종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하면서 영조가 숙종의 왕자가 아니므로 왕대비의 밀조(密調)를 받아 경종의 원수를 갚고 소현세자의 적파손(嫡派孫)인 밀풍군 이탄(密豊君 李坦:1698-1729)을 왕으로 세워 왕통을 바르게 한다고 하면서 탄(坦)을 추대하고 나선 반란이라고 한 것인데 실제 반란인지 왕위계승의 문제인지는 세계삼한역사관점에 파악할 이야기다.

 

여기서 조선왕조실록에 황진기(黃鎭紀)란 인물을 자세하게 묘사한 것인데 황진기는 영조시대 선전관을 지낸 인물이었다 하였고 왕의 시위(侍衛)·전령(傳令)·부신(符信)의 출납과 사졸(士卒)의 진퇴를 호령하는 형명(形名) 등을 맡아본 일종의 무직승지(武職承旨)의 구실을 한 무관(武官)이라는 사실이다.

1728년 이인좌의 난 혹은 무신란이란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령이 떨어지자 모습을 감추었으며 그를 역적으로 기록한 영조실록에도 "지략과 검술이 뛰어난 인물"이라 극찬 하였으며 후에 황진기(黃鎭紀)는 민중들 사이에서 뛰어난 검객으로 구전되어 많은 반란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계속된 수배를 받았던 인물인데 이 사람이 황인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 글에서 보면 만약 조선사회에는 구성원이 당시 황인종이었다면 그래서 그 중에 백인 즉 서양인이 소수가 있어 신상 검문, 검색이 있었다 치면 백인(白人)이니 금방 들어날 이야기다.

그러나 구태어 눈 색깔이니 피부색깔이니 수염 모양 등으로 세세하게 따져 검색 또는 수색을 하였다고 볼 때 조선사회는 이러한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매독(梅毒, syphilis)이 발병된 조선이 한반도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434" 을
보면 당시 사회 풍기문란이란 사건을 다룬 것으로 비방글에 대한 사관이 논평하는 대목이 있는데 성종 13년 임인(1482)윤 8월20일(병술)기사에 성균관을 비방하는 배율시가 벽에 붙자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충여(蟲餘)는 직강(直講) 김석원(金錫元)을 가리킨 것이니, 김석원은 이때 감창(疳瘡)을 앓고 있었으며에서 홍경손과 임수겸은 ‘백발(白髮)을 이고 백마(白馬)를 타는 자’라고 기롱(譏弄)함이 있어, 성균관의 벽상(壁上)에 쓰기를, ‘나그네여, 나그네여, 그 말도 또한 희구나. 하얀 사람의 흰 것이 백마의 흰 것과 다름이 없구나.’[有客有客 亦白其馬 白人之白 無異於白馬之白] 하였는데...이것을 풀어보면 직강 김석원은 매독, 감창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당시 대신들이 백인 매춘부와 함께 자주 노는 것을 빗대어 쓴 벽보임을 알 수 있으며 백발(白髮)을 이고 있다는 것에서 대신이나 김석원 역시 백인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시 서구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유럽인들이 하얀 가발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백발을 이고 있다는 것은 당시 서양 관리들이 권위의 상징으로 가발을 쓴 것을 가르킨 것이라고 보여진다.

"백발(白髮)을 이고..." 통속적인(popular)권위와 위엄의 상징인 풀 보텀드 위그(full-bottomed wig)로서 아래쪽에서 넓어진 장발 전두가발인데 프랑스 루이14세부터 귀족들에게 널리 사용된 것이다.

 

 

面靑而白, 鼻高而長, 鬚些而黑,

즉 눈이 푸르고 얼굴이 희며 코가 높고 길며 수염은 적지만 검고...

 

위 간단한 문장은 황진기(黃鎭紀)의 모습을 나타낸 수배 글인데 "얼굴은 푸르고 희다"라고 읽는 것이 아니라 해석은 눈이 푸르고 얼굴이 희다라고 해석한다면 통속적으로 이 표현으로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로서 즉 얼굴과 눈을 같이 볼 때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에 자세한 내용의 설명이라면 조선에는 황인종만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인을 서양인 스스로가 구분할 때는 주로 눈 색깔과 머리 색깔을 가지고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알고 있다. 때문에 우리 사서에 등장하는 색목인은 동양인 중심에서가 결코 아닌 대다수 구성되어 있는 서양인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백인은 조선사회에서 보편적인 인구 구성으로 나타날 것이 틀림이 없다.

종전에 생각하던 것처럼 조선사회에서 대다수가 황인종으로 구성된 사회가 아닌 것이고 때문에 우리 사서에 등장하는 색목인이란 칭호는 서양인 입장에서 볼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점이다.

사실상 여태까지 왜 색목인(色目人)이라 했는지 궁금하였는데 사실상 이 색목인(色目人)이란 명칭은 한마디로 서양인 즉 백인들을 눈 색깔로 자세하게 구분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그것을 한어로 풀어 논 것이라 해야 맞다.

색목인이라고 하면 거의가 백인이고 역사적으로 깊게 들어 가 보면 몽골인도 서양인에 근접한다는 사실이 들어나 있으며 십자군전쟁의 구성원이 몽골이라는데 우리는 한번 놀랐다.

또한 러시아 수학학자가 몽고인을 러시아사람이라고 한 사실만 보아도 우리가 얼마나 편협적으로 역사를 알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문제이다.

때문에 조선 사회의 인종구성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치 다양하다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색목인(色目人)그리고 서인(西人), 소론(少論)이란 명칭이 들어나 관찰해 보니 모두가 서양인 또는 백인의 모습을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색목인은 즉 눈색깔로 구분할 수밖에 없는 백색인종을 가르키는 것이라는 사실 그러한 실태상황에는 백인들을 눈 색깔로 구분할 수 없을 만치 많은 구성율을 보였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물론 자료에는 아랍인종도 이 색목인에 포함 된다 했다.

 

눈 색깔-Eye color http://blog.daum.net/han0114/17048402

色目人 http://blog.daum.net/han0114/17048401

 

 

 

위 블로그 글에서도 특히 서양인 눈에는 색깔로 구분하면 갈색눈(Brown), 헤이즐넛색(Hazel), 호박색눈(Amber), 녹색(Green), 회색 눈(Gray), 파란색(Blue),보라색(Violet), 빨간색(Red) 이렇게 다양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복잡한 것이고 서양인 전체를 색목인(色目人) 또는 면(얼굴)색깔과 동일하게 번역했음을 알 수가 있다.

첨가 할 것은 서양인을 또한 호인(胡人)이라고 했는데 호인(胡人)은 고려인을 지칭한 경우이다.

호인(胡人)도 서인이 되며 서양인이고 백인이라 할 수 있다.

 

경복궁(창경궁)과 베르사유 궁전

 

또한 영조대에서 중요하게 볼 것은 바로 경복궁(景福宮)에 대한 증축 설인데 1772년 영조48년에 문소전 터에 비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으나 끝내 경복궁의 중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프랑스와 역사 관계를 따져 볼 때 아마도 베르사유 궁전(Palace of Versailles)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전은

1624년 루이 13세가 지은 사냥용 별장이었으나, 1662년 무렵 루이 14세의 명령으로 대정원을 착공하고 그로 부터 20년 후인 1680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1668년 건물 전체를 증축하여 외관을 가로축 부분이 앞으로 튀어나온 U자형 궁전으로 개축하였으며

1680년대 다시 커다란 건물 2동을 증축하고 남쪽과 북쪽에 별관과 안뜰을 추가하여 전체길이가 680m에 이르는 대궁전을 이루었으며 이때 정원 쪽에 있던 주랑을 '거울의 방'이라는 호화로운 회랑으로 만들고, 궁전 중앙에 있던 방을 '루이 14세의 방'으로 꾸몄다 하였다.

 

 

그렇다면 이때 조선에서는 경복궁에 대해서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 볼 필요성이 있다.

 

현종 8년 정미(1667) 윤 4월 18일에 자전(慈殿)을 위해 경복궁 터에 궁을 새로 짓는 것을 논의하다

숙종 6년 경신(1680) 8월29일에 경복궁의 중건에 관해 김수항·민정중 등과 논의하다

숙종 7년 신유(1681) 1월 22일에 경복궁의 재건을 청한 울산 생원 김방한의 상소 등이 있다.

 

물론 놀랄 이야기지만 역사관계를 따져 보았을 때 전혀 불가능한 비교전제는 아니다.

결국 베르사유 궁전은 경복궁(景福宮)이라고 감히 주장 할 수 있다.

 

숙종 6년 경신(1680)10월19일
○時, 中宮患痘疹, 證候分明。 上遂奉慈殿, 移御于昌慶宮。
그때 중궁(中宮)이 두진(痘疹)을 앓았는데, 증후(證候)가 분명해지자, 임금이 드디어 자전(慈殿)을 받들고 창경궁(昌慶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위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중궁이 병세가 천연두(痘疹)라는 것이 확실하다는 병증이 밝혀지자 숙종임금은 모후 자전(慈殿), 자성(慈聖)을 받들고 창경궁(昌慶宮)으로 이어(移御)하다는 것은 천연두가 한성 본궁까지 퍼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궁을 옮긴 것인데 아마도 창경궁은 전염병이 퍼지더라도 안전한 외곽지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래 현종 8년 정미(1667) 윤4월 18일에 현종의 모후, 자전(慈殿)을 위해 경복궁 터에 궁을 새로 짓는 것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에서 경복궁 터 라고 하였으니 경복궁이라고 할 수 있거나 창경궁이라고 할 수 있다.

1651년 루이14세가 모후 안느 도트리슈(Anne d'Autriche:1601-1666)섭정에서 벗어나게 되는데1662년 무렵 루이14세의 명령으로 이 별궁에 대정원을 착공하고 1668년 건물 전체를 증축하여 외관을 가로축 부분이 앞으로 튀어나온 U자형 궁전으로 개축하였다 하였으며 1680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숙종이 천연두를 피해 이궁한 1680년 거의 같은 시기에 프랑스 1682년에 루이 14세 역시  파리에서 베르사유궁전으로 옮겨서 1789년 왕가가 수도로 돌아 갈 것을 강제될 때까지 그곳에서 있었는데 때문에 베르사유궁전은 프랑스 옛제도의 권력 중심지라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분명코 경복궁 궁터 내라고 하였으나 숙종이 옮겨간 곳은 창경궁이라고 하였으니 나중에 창경궁(昌慶宮)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창경(昌慶)이란 뜻은 모든 것이 번영, 흥성, 번창하여 축하하거나 경하할 일만 벌어지라는 뜻이다.

Versailles is a French place-name deriving from the Latin verb versare, meaning " to keep turning over", as in ploughing, so it means "The place which is regularly ploughed".

그러나 위 영어자료를 보면 베르사유는 라틴어 "versare"의 동사로 "뒤집힐 것을 막는다"는 의미가 있고 "일정하게 뒤집어 질 수 있는 장소"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서양에서 베르사유의 의미가 대체로 어둡다고 볼 수있다.

 

이에 한가지더 첨언 할 것은 영조시대 성리학자인 한원진(韓元震:1682-1751)은 “북벌(北伐)의 기회를 이용해 조선이 천하를 통제해야 한다” 주장했다는 사실이 있다는데 영조 대에 조선 북방에 어떤 세력이 있어 이 세력이 천하를 조선이 통제하는 것을 막고 있는 세력이기 때문에 북벌이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이 세력만 제거하면 조선이 천하를 통제한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인데 이것을 반도역사에서는 청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한반도에서는 북방이라는 말은 애매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유럽대륙을 비추어 보아도 프랑스에서 북벌이라 할 만한 곳이 없다.

북벌이라면 바다를 건너 영국을 치는 것을 말하는데 바다만 가로 놓여 있지 않다면 지형적으로 북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유럽대륙 북쪽은 대체로 일본 구주와도 연결되는 곳이다.

천하는 세계를 뜻한 것이니 조선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과 같은 비유라고 볼 수 있어 조선과 프랑스의 관계를 풀어 대비한다면 결국 프랑스가 주위의 나라를 침범하고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던 부분에서 는 부정할 수 없다고 할 때 결코 유럽대륙을 근거로 한 사실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지형적인 문제가 많다.

 

결론적으로 영조와 루이15세는 하나의 왕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루이15세 집권년도(1723년)과 영조의 즉위년도(1724년)가 1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과

영조가 죽는 년도가 (1776년)이고 루이15세가 사망하는 년도 역시(1774년)이니 결국 따져 볼 때 조선 영조의 집권 년 수 52년이고 프랑스 루이 15세의 집권 년 수 51년이라 1년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인 문제나 정치적인 갈등도 거의 일치한다.

이것은 여러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으나 최종적인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기에는 조선과 프랑스는 역사근원적으로 숙명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거의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때문에 루이15세 때 일어난 모든 일은 조선 영조때 일어난 일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더불어 경복궁도 베르사유궁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계속:정조와 루이16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7

**********************

갈색 눈(Brown)은 한국인은 대부분이 갈색 눈을 갖고 있고 핀란드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 발트해 연안의 나라들에서는 가장 적게 나타나는 색이다.

헤이즐넛색(Hazel)눈은 중동의 몇몇 지역, 유럽, 북아메리카, 중앙아시아의 일부지방, 인도북부의 일부지방, 파키스탄 북부, 이란,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주로 나타난다.

녹색(Green)눈은 남유럽이나 중동, 중앙아시아에서도 다소 볼 수 있지만 대부분은 북유럽에 집중되어 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인구의 88%가 녹색이나 파란색의 눈을 가지고 있고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에도 녹색 눈을 가진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다.

회색 눈(Gray)은 러시아, 핀란드, 발트해 연안의 나라들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파란색(Blue)눈은 아일랜드, 독일,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폴란드,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러시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에서 가장 흔하게 나타난다. 또 남유럽이나 발칸 반도, 중동에도 있으며 아프가니스탄, 이란, 인도에서도 볼 수 있다.

2002년의 발표에 의하면 미국에서 1936년부터 1951년 사이에 태어난 백인의 33.8%만이 파란 눈을 가진 것으로 나왔는데, 이 수치는 1899년부터 1905년에 태어난 백인의 파란 눈의 비율 57.4%에 비하면 크게 줄어든 것이다.

보라색(Violet)눈은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바로 이 보라색 눈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빨간색(Red)눈을 가진 사람은 전 세계 인구의 0.001%에 불과하다.

********************************************

영조 35권, 9년(1733) 9월 22일(경자)

이수웅·이사천금·김상중 등 국경을 범월한 죄에 대한 처벌을 논의하다

○庚子/藥房入診。 都提調徐命均以平安監司權以鎭狀啓中, 有亡命賊黃鎭紀事, 而私書中, 犯越罪人金尙重爲紀賊之主人, 誘使之捕得紀賊, 許以貸死之語仰奏。 上命以依施之意, 回報焉。 時, 李守雄、李四千金、金尙重等三人, 以犯越罪, 當梟示, 自江界府押來營獄, 究問彼中事情, 守雄以爲: “我境人之去來彼中者多矣, 而京居者三人, 亦在其中。 一則李會計, 一則黃會計, 容貌有猛氣, 年可四十餘。 秋間聞甲軍搜捕之奇, 與京人兩總角者, 避匿於我境理山申義昌家, 留接於胡幕已久。 我境事, 輒皆傳說於胡人, 胡人最信之。 趙永三兄弟, 自謂安州人, 長在胡幕, 頻頻往來, 胡人都聚之所在於高山里之彼邊細洞, 而謂之都幕, 所庤之穀, 皆我國小米。 細洞卽夏節留幕也, 長洞、也屯洞卽冬節留幕也。

”李四千金、金尙重以爲: “去年冬越去彼地留住胡幕, 甲軍搜討之時, 自知弄怪越來, 爲上土僉使所捕捉, 而甲軍所砲殺, 凡三十餘, 我人爲五人。 細洞中有我國人八人, 而一則稱以黃哨官者, 年可四十餘, 面靑而白, 鼻高而長, 鬚些而黑, 身材大小之中, 常居不脫裏着小衣, 有時脚戲, 超距驍勇過人, 常佩劍自言善舞。 問其居, 答云在於下三道。 去年王哥起達見其狀貌, 怪而問之, 答曰 ‘曾經萬戶職。’ 又問何故避匿於他國, 答曰: ‘犯死罪, 自闕內直所, 踰墻亡命。’ 云, 常自許以當世無如我才者。 淸人輩以爲非常之人, 待之頗敬, 胡人問其名則曰金書房, 我人問則曰黃哨官。 又有趙永三兄弟, 崔成業、千都令輩, 往來潛商, 今爲七八年, 永三驍勇好身手, 其弟有膂力。” 以鎭馳啓以聞曰:

“紀賊之往在彼中, 明白無疑, 而禹夏亨以爲: ‘嘗與鎭紀相知, 同居數年, 未見其脫小衣之時。’ 以此觀之, 此爲可信。 蓋彼胡之所在, 距我境不過五里十里, 我國之無賴被罪者, 無不往投, 邊人盡爲其腹心耳目, 明末奸細之患, 不無其慮。 所謂蔘稅官, 乃彼中所差遣, 而在於婆猪江, 專以收稅捧賂爲事, 瀋陽、鳳城無不受賂。 彼胡自誇曰: ‘我有人蔘, 何畏官軍?’ 顧今邊備蕩然, 憂虞實深。 冬至使行, 別具一咨, 以爲嚴其邊禁, 搜還我人。 且禁其乘船入江, 可爲一分外攘之政。 至於內修之方, 移聚民居, 修城池嚴軍制, 當有別本啓聞。” 上命備局相議回啓, 咨文事, 姑置之。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 서명균(徐命均)이 아뢰기를,

“평안 감사 권이진(權以鎭)의 장계(狀啓) 가운데 망명(亡命)한 적(賊) 황진기(黃鎭紀)의 일이 있고, 사서(私書) 가운데는 ‘국경을 범월(犯越)한 죄인 김상중(金尙重)은 황진기의 주인(主人)이 되었으니, 달래어 황진기를 체포(逮捕)하고 사죄(死罪)를 용서하도록 허락하자.’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장계에 의하여 시행하라는 뜻으로 회보(回報)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이수웅(李守雄)·이사천금(李四千金)·김상중 등 세 사람이 국경을 범월한 죄가 효시(梟示)에 해당되었으므로 강계(江界)에서 영옥(營獄)으로 압령해 왔는데 피중(彼中)의 사정(事情)을 캐물으니, 이수웅은 말하기를,

“우리 경내(境內) 사람으로 피중에 왕래하는 자가 많은데 서울에 사는 자 세 사람도 또한 그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이회계(李會計)요 한 사람은 황회계(黃會計)인데 생김새에 사나운 기운이 있고 나이는 마흔 남짓하였습니다. 가을 무렵에 갑군(甲軍)이 수색하여 체포한다는 기별을 듣자 서울 사람 두 총각(總角)과 더불어 우리 경내인 이산(理山) 신의창(申義昌) 집에 피하여 숨어 있으면서 호막(胡幕)에 머물러 있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 우리 경내의 일을 번번이 죄다 호인(胡人)에게 전하여 말하였으므로, 호인이 그를 가장 신임하였습니다. 조영삼(趙永三) 형제는 스스로 안주(安州) 사람이라 이르고 오랫동안 호막에 있으면서 호인들이 둔취(屯聚)해 사는 고산리(高山里) 건너편 세동(細洞)에 자주 왕래하였는데 그곳을 도막(都幕)이라 하였고 쌓아놓은 곡식은 다 우리나라의 좁쌀이었습니다. 세동은 곧 여름에 머무는 막(幕)이고, 장동(長洞)·야둔동(也屯洞)은 곧 겨울에 머무는 막입니다.”

하고, 이사천금과 김상중은 말하기를,

“지난해 겨울에 피지(彼地)로 넘어가 호막에 머물러 있었는데 갑군이 수색하여 토죄(討罪)할 때 지롱괴(知弄怪)로부터 넘어오다가 상토 첨사(上土僉使)에게 붙잡혔는데, 갑군이 포(砲)를 쏘아 죽인 것이 무릇 30여 명이었고 우리나라 사람은 5명이었습니다. 세동 안에 우리나라 사람 8명이 있었는데 하나는 황초관(黃哨官)이라고 일컫는 자로 나이가 마흔 남짓하였습니다.

얼굴은 푸르면서 희고 코는 높으면서 길며, 수염은 적으나 검고 체신(體身)은 대소(大小)의 중간이었는데, 평상시에도 속에 입은 소의(小衣)를 벗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씨름이나 뛰어넘기를 했는데, 날래고 용맹하기가 남보다 월등했으며 늘 칼을 차고 스스로 춤을 잘 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살던 곳을 물으면, 하삼도(下三道)에 있었다고 답하였으며, 지난해에 왕가(王哥) 기달(起達)이 그의 생김새를 보고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전에 만호직(萬戶職)을 지냈다고 답하였습니다. 또 무슨 까닭으로 다른 나라로 피해 숨어지내느냐고 묻자, ‘사죄(死罪)를 범하여 궐내(闕內) 직소(直所)에서 담을 넘어 망명(亡命)하였다.’고 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 당세(當世)에는 자신의 재주만한 자가 없다고 장담하였으므로, 청인(淸人)들이 예삿사람이 아니라고 여겨 대우하는 것이 아주 공손하였습니다. 호인(胡人)이 그 이름을 물어보면 김서방(金書房)이라 하고 우리나라 사람이 물어보면 황초관(黃哨官)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조영삼(趙永三) 형제와 최성업(崔成業)·천도령(千都令)의 무리가 있어 잠상(潛商)으로 왕래한 지가 이제 7, 8년이 되었는데, 조영삼은 날랜 용맹에 좋은 신수였고 그 아우는 힘이 장사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권이진이 치계(馳啓)하기를,

“역적 황진기가 피중(彼中)에 가 있는 것이 의심할 바 없이 명백합니다. 우하형(禹夏亨)이 ‘일찍이 황진기와 서로 알고 지냈는데 몇 해 동안 같이 살았지만 그가 소의(小衣)를 벗은 때를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본다면 이 사람인 것을 믿을 만합니다. 대개 저 호인(胡人)이 있는 곳은 우리국경과 거리가 5리나 10리에 지나지 않으므로 우리 나라에서 죄를 지은 무뢰한(無賴漢)들이 모두 찾아가서 변경(邊境)사람이 죄다 그의 심복과 이목이 되니, 명(明)나라 말기의 간세배(奸細輩)들의 작폐(作弊)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른바 삼세관(蔘稅官)이란 곧 피중(彼中)에서 차출한 자인데 파저강(婆猪江)에 있으면서 오로지 세금을 거두고 뇌물을 받는 것을 일삼고 심양(瀋陽)과 봉성(鳳城)에서도 모두 뇌물을 받으니, 저 호인(胡人)들이 스스로 과시하기를, ‘우리에게 인삼(人蔘)이 있는 한 어찌 관군(官軍)을 두려워하겠는가?’라고 합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변지의 방비가 허술하니 근심과 걱정이 진실로 깊기만 합니다. 동지사(冬至使)를 보낼 때 따로 자문(咨文) 한 통을 갖추어 변금(邊禁)을 엄격히 하고 우리 나라 사람을 찾아 돌려보내게 하며, 또 배를 타고 강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게 한다면 일분이나마 외부의 침략을 물리치는 정책이 될 것입니다. 안으로 수비하는 방도에 대해서는 백성의 거처를 옮겨 모여서 살게 하여야 하며, 성지(城池)를 수축(修築)하고 군제(軍制)를 엄격히 하는 데 대해서는 의당 별본(別本)으로 계문(啓聞)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비국(備局)에 명하여 상의해서 회계(回啓)하게 하고, 자문(咨文)에 대한 일은 우선 그대로 두게 하였다.[한국고전번역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