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色目人

한부울 2009. 6. 9. 21:48

  

色目인가? 色目人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48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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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목인 (色目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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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원나라 시대에 몽골인·한인·남인 이외의 사람들을 가리켜 부른 이름.

중국 원(元)나라 시대에 몽골인·한인(漢人)·남인(南人;옛날 남송사람) 이외의 사람들을 가리켜 부른 이름. 피부·눈 빛깔이 다르기 때문에 이같이 불렀다. 탕구트·위구르·나이만 등 주로 서방계 사람들이 이에 속한다. 색목인은 몽골인이 중국을 지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지방 행정의 장관인 다루가치에는 몽골인 이외에 색목인만이 임용된다고 하는 원칙이 확립되어 많은 특권을 누렸다.

 

동양인들은 대부분 갈색이다.

그런 동양인들이 색목(色目)이라 했다면 갈색을 제외한 눈동자 색깔이다.


눈 색깔-Eye color http://blog.daum.net/han0114/17048402

  

헤이즐넛색 Hazel

호박색 눈 Amber

녹색 Green

회색 눈 Gray

파란색 Blue

보라색 Violet

빨간색 Red 등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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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 병자(1456) 1월 29일(기해) 올량합 낭구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올량합(兀良哈) 낭구난(浪九難)을 보을포 등처 도만호(甫乙浦等處都萬戶)로, 야극(也克)을 잉읍포 등처 도만호(仍邑包等處都萬戶)로, 김사은토(金斜隱土)를 무을계 등처 도만호(無乙界等處都萬戶)로, 낭아합(浪阿哈)·살로다양가모다오(撒魯多陽可毛多吾)·관독(管禿) 등을 동량북 등처 부만호(東良北等處副萬戶)로, 시을두(時乙豆)를 사지 등처 부만호(斜地等處副萬戶)로, 김구음파(金仇音波)를 상가하 등처 부만호(常可下等處副萬戶)로, 감복(監卜)을 남라이 등처 부만호(南羅耳等處副萬戶)로, 김자질동개(金者叱同介)를 벌인 등처 부만호(伐引等處副萬戶)로, 유요시로(柳要時老)를 수주 등처 부만호(愁州等處副萬戶)로, 타탑(朶塔)을 포주 등처 부만호(蒲州等處副萬戶)로, 여직(女直) 김모다오(金毛多吾)를 을아아모단 등처 만호(乙阿阿毛端等處萬戶)로, 박고리색목불화(朴高里色目不花)·박아당길(朴阿堂吉) 등을 회춘 등처 부만호(會春等處副萬戶)로, 박살탑목(朴撒塔木)을 훈춘 등처 부만호(薰春等處副萬戶)로, 김역류(金亦留)를 동량북 등처 부만호(東良北等處副萬戶)로, 김유리가(金留里加)·박살합탑(朴撒哈塔) 등을 아을가모단 등처 부만호(阿乙加毛端等處副萬戶)로, 김인을개(金引乙介)·김지하리(金之下里) 등을 건을가퇴 등처 부만호(件乙加退等處副萬戶)로, 박아실탑(朴牙失塔)을 우사리 등처 부만호(亐沙里等處副萬戶)로, 탕송가(湯宋可)·관독(管禿)·마교탑(馬咬塔) 등을 포주 등처 부만호(蒲州等處副萬戶)로, 알타리(斡朶里) 동삼파로(童三波老)를 보을하 등처 도만호(甫乙下等處都萬戶)로, 마금파로(馬金波老)를 오산 등처 도만호(鼇山等處都萬戶)로, 살양불고(撒羊弗古)·이창아(李昌阿)·고실탑(古失塔)·동부리(童夫里) 등을 동량북 등처 부만호(東良北等處副萬戶)로, 동약사(童約沙)·동나린가(童羅麟哥)·마구음파로(馬仇音波老) 등을 오음회 등처 부만호(吾音會等處副萬戶)로, 낭금세(浪金世)를 소을고 등처 부만호(所乙古等處副萬戶)로, 이온토(李溫土)를 무을계 등처 부만호(無乙界等處副萬戶)로, 야실합덕올(也失哈德兀)을 포주 등처 부만호(蒲州等處副萬戶)로, 골간 올적합(骨看兀狄哈) 유이항합(劉伊項哈)·김가상개(金哥尙介) 등을 하다산 등처 도만호(何多山等處都萬戶)로, 유소응합(劉所應哈)을 야라 등처 도만호(也剌等處都萬戶)로, 이아시아(李阿時阿)를 하다산 등처 만호(何多山等處萬戶)로, 이소통합(李小通哈)을 초곶이 등처 만호(草串等處萬戶)로, 김마신합(金馬申哈)·이파속라(李把速剌) 등을 초관 등처 부만호(草串等處副萬戶) 삼았다.

 

위의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세조가 관직에 임용한 기록인데 온통 색목인인 듯하다.

 

몽고와 원은 고려라 하였고 몽고주체가 고려연합국가 연방체제 안에서 존재 한 정권이라고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몽고가 색목인에게 다루가치란 직책까지 주면서 관리등용을 일반화 하였다는 것인데 색목인에게도 몽고인과 같은 지위와 특혜를 주었다고 하는 기록은 고려가 그랬다는 말이 되어야 한다.

분명 색목인은 西洋(유럽)인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고려를 승계한 조선에도 색목인이 있었는지 따져 볼 일이다.

물론 있었다고 해야 한다.

그것도 사회전반에 걸쳐 많은 색목인이 존재하였을 것이다.

고려말기 생성된 사회 개혁적 요구에 의하여 이성계가 쿠데타한 것이라고 우린 알고 있다. 하지만 사회개혁이란 내면에는 종족갈등이나 종교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 고려란 거대한 연합국가체제에서 말기에 사회적 혼란 속에서 종족갈등과 종교 갈등이 첨예화되어 마침내 혁명을 야기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성계가 마침내 정권을 장악 한 후 고려국가체제의 큰 틀을 손상하지 않았다는 것은 종족문제와 종교문제를 우선하여 배려하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거대한 국가가 종족도 다르고 종교도 다른 체제에서 어떻게 국가 운영을 할 것인가는 지금 미국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국가가 근본으로 삼아야 할 정치적 이념과 주요한 정책변화만 모색한 것이 아닌가 한다.

때문에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종족이 반목하지 않고 융합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 때와 마찬가지로 색목인은 변함없이 사회중심에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함은 한반도 고려나 한반도 조선일 수가 없는 것이다.

고려를 그대로 승계한 조선도 여러 국가를 연합(연방이란 성격으로 통치)한 정치체제였다.

그러한 다양한 사회, 정치, 경제 전반에서 색목인이 깊숙하게 뿌리내려 존재하였고 사회구성원으로서 별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모든 것에서 소통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더불어 조선정계에도 포진하여 정치적으로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일제가 많은 부분에서 삭제하고 수정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색목(色目)이란 단어는 수도 없이 많이 나온다.

대신 사람인(人)자는 아예 빼 버리고 색목(色目)이라고 구분이나 목록으로 고쳐 해석해버렸다.

지금 조선왕조실록에 해석도 그러하지만 目次, 稅目, 目錄라고 간단하게 표시하면 될 것을 구태여 색목이라 해놓고 목차, 세목, 목록이라고 병행하여 해석해야 하였는지 알 수 없다.

이것은 누가 뭐라 해도 다분히 고치려고 하는 의도이다.

목록이라든지 세목이란 뜻을 언제부터 색목이라고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무조건 색목(色目)이란 단어를 색목인이라하지 않고 목록 또는 세목이란 식으로 해석하고 번역 한 것에서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한 부분을 찾아 모두 색목인(西洋人)이라고 해석하면 우리가 모르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알 수 있는 단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는 단일민족이란 한정된 단어 속에서 어느듯 많은 이민족문화가 보편화 되고 일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러운 환경이 되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지금 보다 훨씬 더 이민족문화가 자연스럽고 보편화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단일민족으로 거대한 국가를 운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몽고와 같은 광대한 영역을 가진 체제에서 정복왕조 제국이라고 한다면 단일민족을 고집할 수 없는 것이고 분명코 다민족 문화가 성숙되어야 함이다.

일제가 우리의도와 전혀상관없이 강압적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하고 남기고 싶었던 것은 조선 관리의 부패성과 당파싸움이고 조공국 이란 속국개념의 나약한 민족성이었다.

나라가 사대주의에 빠져 왕은 허약하고 관리들은 맨 날 당파싸움만 하면서 날을 지세우며 골속까지 부패하니까 공물세목이나 장부세목이나 챙기거나 추려내야 하는 것처럼 巧作色目(교묘히 색목을 만들어...)처럼 일제가 교묘히 色目으로 둔갑시켜 아예 색목인이란 존재를 파기한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부분이다.

결론적으로 색목인은 고려 때나 조선시대나 중요한 사회구성원으로서 존재했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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色目人- 그들은 누구인가? 

[아시아문화사연구회]09.06.01 14:16


고전번역원의 설명에 보면


“원사(元史) 선거지(選擧志)에 의하면, 원나라 때에 과거 합격자의 방을 게시하면서 좌우로 두 개의 방을 붙였는데, 지배층인 몽고인(蒙古人)과 터키ㆍ이란ㆍ유럽 등의 색목인(色目人)을 우대하여 우방(右牓)에 게시하고 금(金)나라 유민인 화북(華北)의 한인(漢人)과 남송(南宋)의 유민인 강남(江南)의 남인(南人)은 좌방(左牓)에 게시하였다.”라는 설명을 붙인 곳이 있다. 이것은 실제 의역이면서 설명일 뿐이고 원사의 선거지<元史 七 志(四)-중화서국>에는 몽고(蒙古), 색목(色目)과 한인(漢人), 남인(南人)으로만 기록되어 있을 뿐 터키, 이란, 금나라, 화북, 남송의 유민이라는 말은 없다.


그런데 원사에 몽고(蒙古), 색목(色目), 한인(漢人), 남인(南人)을 구분하면서 이렇게 기록되었다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몽고인와 색목인은 친근하거나 유사하다는 사실이며 한인과 남인은 별개이면서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고려사에 보면 고려가 원의 지배를 받았으며 몽고의 공주를 왕후로 받아들임으로서 한 때는 부마국으로 왕실의 계통은 그 혼혈로 이루어진다.


그러면 몽고인은 어떤 사람들일까. 왜 그들은 색목인과 가까울까?


“몽고인은 청인과는 아주 다르게 생겼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푸르며 수염이 붉다. 그리고 모두 사납고 거칠며 집에서 살지 않는다. 아주 추운 때라도 단지 수레 위에 장막을 치고 길에서 자며 아침에는 눈을 털고 일어난다. 其爲人與淸人自別。兩顴高。眼碧髥紫。皆悍惡麤健。不思室居。雖極寒之時。只設帳於車上而宿於道路。朝乃拂雪而起。<문견잡기(聞見雜記) 하>”


이 기록을 보면 몽고인은 눈이 푸른 것으로 보아 색목인(色目人) 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元代에는 과거시나 관리를 선출함에도 색목인과 함께 우방(右牓)에 두어 우대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원대에는 우측을 중시하며 숭상하였다. 원사에 양증(梁曾)이 안남(安南)에 사신으로 가서 이른바 ‘우측을 숭상하는 새 조정의 예법〔新朝尙右之禮〕’을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元史 梁曾列傳> -우측은 바로 서쪽인 것이다


몽고가 중앙조정을 장악하여 색목인과 더불어 조정을 좌지우지 하였으며 관리의 채용에 있어서도 그들이 유리한 위치를 점령해 있었던 것이다.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신경(莘卿)은 일찍이 중이 되어 풍수(風水)노릇을 하였는데, 재(載)를 통하여 출세하여 함께 인사행정을 맡아보았다. 최노성(崔老星 본 이름은 당흑시(黨黑厮))은 색목인(色目人)의 부상(富商)인데 역시 재(載)를 통해서 봉군이 되었다. 재는 말썽이 있을 것을 꺼려하여 비목(批目)에 쓰기를,'1백 4세의 노인 최노성'이라 하였다. -<충숙왕 을해4년>”


당시에는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관직에 나아가서 관리가 되지 않으면 직위나 작위를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많은 돈이나 식량을 나라에 바치고 작위를 받고자 하였고 또한 나라가 어려울때나 기강이 문란할 때에는 이러한 경우가 허다하였다. 바로 이러한 경우이며 서역인으로 색목인인 그가 중앙에 살면서 작위를 하나 받기 위해 권력자인 재(載)를 통하여 성사되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몽고인과는 전혀 다른 설명이며 위치적으로 상이한 것이다. 따라서 몽고인이 황인이 아니라 백인에 가까운 색목인이라면 그 지역은 중앙아시아의 서쪽, 더 서쪽일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즉위년(1776, 건륭41) 9월 22일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庚寅/召見誕日問安卿宰 初命卿宰中少論色目人入侍。 左議政金尙喆等上疏曰.....


생일을 맞아 재상들의 문안인사를 받았는데 이대 재상들 중에서 소론색목인을 따로 좀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좌의정 김상철왈...“색목인이라는 용어는 좀 부당합니다. 듣는 사람입장에서 들으면 인종차별적인 용어 같아서.... 라는 의미로 대꾸를 하니 임금이 왈.. 그렇게 말하는 것은 꼭 지역적 당파를 조장하는 의미가 있기는 하나.. 꼭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누구인지를 못 알아 들을 것 같아서... 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모이는 것도 쉬운 것이 아닌데 이왕 만난 김에 한마디 나누어야겠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정조의 탕평책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러한 기록에서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색당파부분에서 노론 소론 중 소론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색목인이 아닐까하는 것이다. 바로 몽고 터키 서역지방의 사람인 중앙조정의 관리들일 것이다.


송시열로부터 시작되는 서인이 갈라져서 노론과 소론으로 된 것으로 보면 서인역시 색목인과 관련된 부분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서인이란 것도 사실은 인조반정이후 즉 청의 세력을 업고 일어선 것이니까. 청조 또한 몽고를 우대하는 인사정책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역사가 왜곡되었다 뿐이지 서인 이후 노론 소론은 서역 즉 색목인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청조과 몽고와의 관계가 다음의 내용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강희(康煕) 때로부터 점점 친근한 뜻을 보여 딸을 낳으면 반드시 시집보내며 또 종친왕(宗親王)의 딸도 시집보내어 이름을 양공주(養公主)라 하고, 은단(銀緞)ㆍ우마(牛馬)를 많이 보내주었다. 그런데 거처와 음식이 중국과 판이하기 때문에, 처음 시집가면 청인들이 모두 가서 집을 지어 주고 살게 해도 오히려 눈물을 흘리며 그곳에 살기를 싫어하다가도 오래되면 그 생활에 익숙해져서 오라고 청해도 자주 오지 않는다고 한다. 존귀한 황제(皇帝)로서 그들과 친호(親好)함이 이와 같고 또 고관대작으로 그들을 묶어 놓고 있으니, 어찌 속으로 두려워하며 밖으로 은의(恩意)를 보이는 것이 아닌가.”<문견잡기(聞見雜記) 하>


이렇듯 황제는 조정을 흔들고 있는 서인이 힘이 있을 때나 노론소론에서 당파가 나뉠 때도  황제자신은 사실 그 세력이 버거웠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역사에 사색당파요 탕평책이란 내용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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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목인.. 그들은 누구인가 2 

[아시아문화사연구회]09.06.03 16:53


색목인(色目人)은 元朝의 신분제도 용어이다. 몽골인에 버금가는 계급이다.


위구르, 탕구트, 사라센인 등 몽골인 이외의 비 중국 문화 민족으로 서방계제국인을 일괄하여 호칭했다. 그 지위는 몽골 제국 창업의 공로와 중국 민족 견제의 필요에서 부여되었다. 관리나 장교의 지위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상인의 활약은 중국사상 다른 예를 찾아볼 수 없다.<위키백과>


元朝政시에 색목인들의 위치는 상당히 높지만 그들이 하는 것은 돈과 관계된 징세, 영리를 목적으로 한 금융업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이를 斡脫이라 부르는 상인인데 기록에 알탈로 시작하는 이름 역시 색목인이 아닐까?


吏學指南에 보면 “斡脫”은 ‘官錢을 운용함에 있어 本意를 버리고 私利만을 구하는 행태’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징세업무에 있어서 엄청난 사리사욕을 가진 사람들이 아닐까. 그러면서도 상업에 수완이 있어 거부가 된 사람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색목인인 마르코 폴로가 원 조정에서 17여년이나 관직(?)에 있었다는 것은 원조정이 색목인을 우대했다는 증거이기도 하거니와 그렇게 머물러 있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명조에서도 환관 정화가 색목인이란 說이 있는데 정화가 색목인 이라면 정화의 大함대 경로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아야 할 필요도 있다.


세종실록에 “회회교도(回回敎徒)는 의관(衣冠)이 보통과 달라서, 사람들이 모두보고 우리 백성이 아니라하여 더불어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이미 우리나라 사람인 바에는 마땅히 우리나라 의관을 좇아 별다르게 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혼인하게 될 것입니다. 또 대조회(大朝會) 때 회회도(回回徒)의 기도(祈禱)하는 의식(儀式)도 폐지함이 마땅합니다.”라는 기록은 明朝에서도 서역인 색목인 모두가 하나의 조정 내에서 뒤섞여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회가 조선(청조)후기, 대한제국시기까지도 이어졌다면...


다만 시대에 따라서 누가 조정의 실세이냐에 따라 치우침 현상은 있었다고 보여 진다. 지금의 미국정치사에서 백인과 흑인이 공존한다고 생각하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元朝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서역의 색목인이 유달리 중요한 자리에 포진하였나 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몽골인도 색목인)....그래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이는 것이다.


익재난고 제8권 <색목인(色目人)과 대등하게 대우하여 줄 것을 비는 표 >


청표(請表)


하늘은 높으나 듣는 것은 낮게 하는지라, 백성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곡진하게 따르는 것이나 일이 예[古]와 같기를 고집하기는 어려우니 결단함은 제(帝)의 마음에 있습니다. 문득 어리석은 충정을 드러내어 감히 제의 조감(照鑑)을 더럽힙니다.


……명철하면서도 은혜스럽고 성실하면서도 밝아서 여러 선조(先祖)의 헌장(憲章)을 준행하여 간략함으로 임하고 너그러움으로 다스렸으며, 여러 지방을 품제(品制)함에 밝아서 가까운 데에는 엄숙히 하고 먼 데에는 편안하게 하였으며, 이미 신의를 표창하는 인(仁)으로 미루어 주었고 또 공로를 생각하는 의(義)를 돈독히 하였습니다.


돌아보건대 폐읍(弊邑)이 대방(大邦)에 복종하여 적개심으로 요동(遼東)을 쳐 동쪽을 정벌하는 성무(聖武)의 군사를 도왔고, 관광(觀光)하려고 변주(汴州)에 가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세황(世皇)의 군사를 맞았습니다. 드디어 이강(釐降)의 영광을 입고 번선(藩宣)의 기탁(寄托)을 받아, 자손에 이르기까지 구생(舅甥)의 지극한 즐거움을 이어 왔는데다 휴명(休明)한 때에 미쳐서 더욱 연행(緣幸)이 깊었습니다. 원량(元良)이 곧 탄생하였으니 진실로 사해(四海)의 정에 맞고, 과매(寡昧)한 몸이 스스로 자랑하여 사사로 삼한(三韓)의 복이라 일컬었습니다.


인하여 생각하니, 일찍이 옥엽(玉葉)의 인척(姻戚)이 되었고, 다시 선원(璿源)에는 육경(毓慶 황태자가 탄생한 것을 가리킨다)을 만났습니다. 이미 이렇게 본지(本支)의 관계가 이루어졌으니, 어찌 색목(色目)과 동등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속에 있는 간곡한 마음을 피력하여 외면하지 않는 은혜를 내려주시기 바라오니, 삼가 유음(兪音 황제의 윤허)을 내리시어 경모(景慕)하는 마음을 순하게 하여 주소서.


신은 삼가 성상(聖上)의 덕화를 부상(扶桑)에 펴서 노(魯) 나라가 한 번 변(變)하기를 기약하오며, 충성을 아름다운 궁전(宮殿)에 바쳐 길이 숭산(嵩山)에서 세 번 만세를 부르는 축하를 드립니다.


東文選卷之四十一[고전번역원] 

表箋

[請表]

天必聽卑。曲從人欲。事難泥古。斷在帝心。輒露愚衷。敢塵睿鑑。云云。能哲而惠。自誠而明。遵列祖之憲章。簡臨寬御。曉多方於品制。邇肅遠安。已推彰信之仁。又篤念功之義。顧惟弊邑。服我大邦。敵愾攻遼。助聖武東征之旅。觀光過汴。迎世皇北上之師。遂蒙釐降之榮。獲守藩宣之寄。洎子孫而相繼。講甥舅之至懽。及際休明。益深緣幸。元良載誕。允孚四海之情。寡昧自矜。私謂三韓之福。因念曾忝聯芳於玉葉。更逢毓慶於璿源。旣然得附於本支。何乃未同於色目。肆瀝由中之懇。佇霑無外之恩。伏望賜以兪音。順其景慕。臣謹當感盛化於桑域。庶臻魯一變之期。湊忠誠於蘂宸。永貢嵩三呼之祝。 


표전(表箋)

[청표(請表)] 이제현(李齊賢)


하늘은 반드시 비천한 곳까지 살펴서 사람의 하고자 하는 것은 낱낱이 들어주는지라, 일은 옛 제도에만 얽매일 수 없사오메, 결단은 황제의 마음에 있사 옵기로, 문득 우충(愚衷)을 발로하여, 감히 예감(睿鑑 임금님의 밝은 뜻)을 더럽히옵니다. 운운. 능히 어질어서 은혜롭고, 성실하고 밝으시사, 조상의 헌장(憲章)을 준수하여 간략으로 아랫사람을 다스리고 너그러움으로 대중을 어거하며, 여러 지방을 제도로써 깨우쳐 가까운 데는 숙연하고 먼 데는 편안하며, 이미 신(信)을 표창하는 인(仁)을 미루어 주셨고, 또 공을 생각하는 의(義)에 독실하셨습니다. 회고하옵건대, 오직 폐읍(弊邑)은 우리 대국을 섬기어 적개심(敵愾心)으로 요(遼)를 쳐서 성무(聖武)의 동으로 정벌하는 군사를 돕고, 관광(觀光) 차 변주(汴州)를 지나가서 세황(世皇)의 북으로 올라가는 군사를 맞았사오며, 드디어 이강(釐降)의 영광을 입어, 번방(蕃邦)을 지키게 되오며,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생구(甥舅)의 지극한 정을 강론하옵더니, 휴명(休明)한 현 조정에 미쳐서는 더욱 연행(緣幸)이 깊어져서, 원량(元良 세자)이 탄생하여 진실로 사방의 민심을 화하게 하니, 과매(寡昧)한 이 몸이 스스로 자랑하며 삼한(三韓)의 복이라 이르옵니다. 인하여 생각하오메 일찍이 옥엽(玉葉)에 꽃다움을 접붙이고 다시 선원(璿源)에 경사를 길러냈으니, 이미 본지(本支)에 부속되었사온데, 어찌하여 색목(色目 원대(元代) 서역(西域) 여러 나라 사람의 총칭)을 함께하지 못하옵니까. 드디어 마음속을 피력하여, 한없는 은혜에 젖고자 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유음(兪音)을 내리시와 이처럼 경모(景慕)하는 심정을 순히 하여주시오면, 신은 삼가 동녘지방으로 하여금 거룩한 덕화에 느껴 거의 노(魯)나라 일변(一變)의 기회에 이르게 될 것이오며, 대궐에 충성을 쏟아 길이 숭산(嵩山) 삼호(三呼)의 축수를 올리겠사옵니다.


이강(釐降) : 천자(天子)가 딸을 시집보내는데 쓰는 말이다. 《서경(書經)》〈요전(堯典)〉에, “두 따님을 위예(潙汭)로 시집보낸다[釐降二女于潙汭].” 하였다.


[아시아문화사연구회]서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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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개

   

최두환

몽고가 현재의 몽고와는 다르다! 색목인이 그렇군요! 소론=색목인? 우와~! 이제 더더욱 진실 위에 다가서는군요. 09.06.01 17:31


이태수

서인이 색목인이라니 놀랍습니다. 서인은 신강성에서 서쪽 사람들로 눈이 파란 소론이군요. 09.06.02 00:28


최두환

"양공주"는 통상 우리들이 알고 있는 "洋公主"가 아닌, 전혀 다른 "養公主"가 있군요. 이 "養公主"를 "洋公主"로 격하시켜버렸군요. 09.06.02 20:29


김재만

많은 진보가 보이십니다... 다음 글을 기대해 보고 싶습니다... 서인 서양인설에 귀를 기울이고 싶구요, 만약 그렇다면, 조선왕조 500년의 흥미진진함은 그 도를 더해 갈 것입니다... 여러 문헌을 참고해 보면, 원조 몽고인은 북방인 맞아 보입니다... 가장 위에 있습니다... 사서마다 내용이 달라서,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네델란드인들을 '황모인'이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구요.... 그래도, 하이튼, 찾아갈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09.06.02 21:39


김재만

서인 서양인설을 진실이라고 가정하면, 숙종->경종->영조 시대에 조선후기 역사진실의 열쇠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경종의 경우 기록이 거의 없지만, 제가 재미있는 우연성을 하나 찾아내었습니다... 천천히 정리되는 대로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09.06.02 2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