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현재 우리는 지도를 부정적으로 볼 수 없다.
지도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길을 알려주고 가게 만든다.
때문에 지도는 신뢰성이 강하다.
하지만 과거 서세동점시기인 17~18세기 땐 지도가 거짓의 산물이라는 점을 이기사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에서 의미가 상당하다.
유럽에선 과거 지도를 영토 정복욕을 구체화할 수단으로 이용했다 한다.
그것은 사실과 다르게 그렸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항해시대때 그리고 식민지쟁탈전을 벌리고 있을시기 15세기말에서 16세기초 유럽 제국왕들은 '해가 지지 않는 대국'을 건설한 후 정복지역을 차례차례 지도에 표시해 나갔다고 한다.
또한 17~18세기에는 지도가 땅문서를 대신했다고 한다. 미지의 땅을 탐사해 작성한 지도는 곧 해당 지역에 대한 권리를 의미하였고 미국과 프랑스 등 강대국들은 앞다퉈 지도탐사대를 파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문명화라는 미명 아래 토착원주민의 권리를 무시한 채 제멋대로 국경선을 그었다고 한다.
이기사를 보고 있으면 불연듯 대륙사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진 대륙조선의 실체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아틀란티스처럼 의혹이 넘쳐난다.
근대사에서 대륙조선이 전지전능하다 할 정도로 영향력을 발산한 이러한 지도 때문에 결정적으로 꼼짝 달싹할 수 없는 무력한 체념으로 발전하여 포기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고 여겨지는 점이다.
서세동점시기 최극점인 1800~1900년사이에 발생한 2차례 큰 동서전쟁인 조선과 영국전쟁(아편전쟁) 제1차전쟁(1840-1842), 제2차전쟁(1856-1860)과 조선과 프랑스전쟁(1883~1885년)에서 보면 분명코 동양세력의 중심인 대륙조선을 압살하기 위하여 수세기동안 벼루고 있다가 해상술이 발달함에 따라 그들에게 버거운 육로가 아닌 해상로를 통해 동으로 밀어닥쳐 식민지배통로를 확보한 것이었다면 결국 아시아전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대륙조선을 목표로 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모든 서양지도에는 조선이란 실체를 발견하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며 찾을 수 없도록 얽히게 만들어 놓았다.
수수께끼며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이와같음은 대륙조선을 대상으로한 모든 전쟁은 동서양 역사전쟁이었고 그들 입장에선 대륙조선은 세계사뿐만아니라 동양사에서도 존재하지 말아야 할 대상으로 보았던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너무 비약한 것이라고 말할 수 도 있다.
하지만 모든 개연성이 여기까지 미친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때문에 역사지도 특히 서양에서 만든 지도에는 대륙조선이란 실체를 숨기기에 바빴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제점에서 추리할 수 있는 상황은 탈아입구(脫亞入歐)란 기치를 내걸었던 간교한 일제의 무조건적인 개입이다. 그들에겐 대륙조선을 동양역사에서 지워버린다는 것은 그들의 역사가 어떤 식으로 든지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다는 희망스런 것이 된다.
왜구는 해적이고 해구이며 도적이란 신분을 무엇으로 숨길 수가 있었겠는가?
결코 숨길 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에겐 역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들어내지 않는 심대한 잠재적 열등의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문화적 열등의식을 바꾸고 싶었을 것이다.
오점을 일소하고 명실공히 번듯한 나라를 세우고 싶은 그들이 노림수는 누가 뭐라고 해도 강탈 할 수 있는 역사를 만드는 일과 조작이나 왜곡한 역사를 차지하는 것 말고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문제가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중차대한 선결과제임은 물론이고 절대절명이라고 할 정도로 신분탈출구를 찾아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음을 부인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동양사에서 언제까지라도 도적이어야 하고 해적이어야 하며 해구신세인 왜구가 갑자기 일본으로 변신하는 것은 그야말로 천지개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바로 지도가 주는 전지전능이다.
결국 서세의 지도인쇄술이 그와같은 부도덕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말이다.
신문기사에서 지적한 대로 그들 서세들이 그어버린 선이 곧 국경선이라고 할 때 이를 예상치 못한 대륙조선입장에선 그 어떠한 방법도 통할 수가 없었다고 보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어안이 막힐 지경에서 어거지로 밀어붙이니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서세가 조선보고 일방적으로 선을 그어놓고 이곳은 내땅이니 넘지말라?
막강한 화력을 가진 그들이 물리적 힘만 믿고 내놓을 수 있는 엉터리같은 협박인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상상 할 수 있는 것은 어리숙한 대륙조선의 나약한 대응이고 무기력한 의견분분이며 조선말기에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대립적 이민족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청(조선청조)관리들의 부패성이 겹쳐 결국 그들에게 손을 들고 말았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 바람에 신생국인 일본이란 나라가 왜구무사집단 정치주체에 의하여 탄생한 것이다.
지도에 한반도를 조선이라고 하고 그 남동쪽에 일본을 그려넣었던 것이다.
한바도 남동쪽 열도가 바로 지금의 일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반도는 1895년 서양지도 어디에도 부산이라는 지명이 없다. '
뿐만아니라 지금열도 지명도 구체화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지경에서 청일전쟁(조일전쟁:1894)이 한반도에서 발발되었다고 야단이다.
지명이 구체화된 것은 1910년이후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힘에서 밀리는 동양(조선)을 배반하고 힘이 있었던 서세와 합방한 일제가 서세 묵인아래 동양역사를 마음대로 재편하면서 만들어 붙인 것들이다.
그렇다면 실제 대륙조선이 만든 지도는 없었는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온데간데도 없다.
일제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폐기되었을 가능성이 거의 100% 다.
지금 그 당시에 만든 조선지도라고 하여 남아있는 것은 이러한 조작과정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일제통치시대때 친일사관들을 강제이용하여 그렸던 것들뿐이다.
그것이 대동여지도라고 하는 한반도지도가 대표적인 것이다.
조선역사가 500년이나 되는데 고작 그것만 지도라고 남겨져야 하는가?
아니 그것 말고 몇점 더 있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는가?
모든 것이 이런식이다.
이런식으로 모든 지도가 그들 음모꾼들에 의하여 조작되어 왜구무사집단은 버젓이 일본이란 나라를 만들어 차지하였고 조선인이 만든 대륙지도, 세계지도는 태워버리거나 폐기하였다.
일부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것은 복사, 빼껴 그들 명의로 도용하면서 마치 그들의 유물인냥 후세에 남겨 놓았다.
한반도조선지도는 실제 조선인들이 그린 것처럼 만들어 소량만 내놓았고 대륙조선이 존재 하였던 지역은 명, 청이라하여 마치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무수히 많은 분량의 지도를 인쇄하여 전세계에 마구 뿌렸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서양지도가 모두가 그런 것이고 실로 그 수량은 넘쳐나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것을 부정하고 나설 지도가 우리에겐 없다.
그들이 만든 지도는 이제 100년이 지나 고체화되고 사실화 되고 말았다.
어쩔 것인가?
승자의 역사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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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가 담고 있는건 `인간`이었네
[매일경제] 2009년 06월 05일(금) 오후 03:10
1944년 독일 브라운슈바이크 수용소. 영국 전쟁포로들은 독일 북부 지역 지도를 만들었다. 지도가 워낙 정교한 덕분에 이들은 무사히 영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포로들은 수용소 막사 타일을 뜯어내 인쇄용 원판으로 활용했다. 수작업으로 원판 위에 그려진 지도는 아스팔트 포장도로에서 긁어낸 타르를 잉크로, 막사 마룻바닥을 프레스로 활용해 인쇄했다.
이처럼 지도는 단순한 기호로 채워지는 게 아니다. 그 속에는 인간 욕망이 가득 숨어 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삶의 방향과 의미를 가르쳐준다.
지도에는 비밀도 가득하다. 정부가 만든 지도는 일반인들이 쉽게 읽을 수 없었다. 1926년 5월 영국에서 총파업이 일어났을 때 정부는 노동자 조직의 폭동을 두려워했다. 비상사태를 대비해 군대가 투입됐다. 정부는 시민들에게 공격당할 여지가 큰 '취약 지대'와 '점검이 필요한 군사시설'을 표시해 비밀 런던 지도를 작성했다. 사회적 충돌과 정치적 격변이 소용돌이치는 현장의 기록이기도 하다.
저명한 지리학자 존 레니 쇼트가 쓴 '지도, 살아 있는 세상의 발견'은 미처 깨닫지 못한 지도의 이면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지도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비춰 주는 거울이 아니다. 이웃 국가와 먼 나라를 향한 인류의 호기심과 야심을 충족시키는 수단이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 때 지도는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 그는 영토 정복욕을 구체화할 수단으로 지도를 선택했다. '해가 지지 않는 대국'을 건설한 후 정복 지역을 차례차례 지도에 표시해 나갔다. 지배하는 모든 땅을 일일이 방문할 수 없었던 그는 지도를 대신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권력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도를 만들기도 했다. 1745년 영국 스튜어트 왕가 출신 찰리 왕자의 반란이 실패한 후 만든 지도가 그 예다. 반란의 씨를 말리고 싶었던 영국 왕실은 대규모 군사 측량 작업을 시작해 스코틀랜드 전역 지도를 작성했다. 세밀한 축척을 사용해 전 영토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백성을 통제하기도 한결 수월해졌다.
아메리카 신대륙에 대한 식민화가 한창이던 17~18세기에는 지도가 땅문서를 대신했다. 미지의 땅을 탐사해 작성한 지도는 곧 해당 지역에 대한 권리를 의미했다. 미국과 프랑스 등 강대국들은 앞다퉈 지도 탐사대를 파견했다. 문명화라는 미명 아래 토착 원주민 권리를 무시한 채 제멋대로 국경선을 그었다. 지도는 사회계층 구분 수단이 되기도 한다. 대공황 시절 미국 정부는 주택융자를 지원하면서 신용에 따라 구획 지도를 제작했다. 신용도가 높은 순서에 따라 녹색 청색 황색 적색 등 네 단계로 지역을 구분해 표시했다.
19세기에는 질병을 주제로 만든 지도도 등장했다. 산업화로 도시 인구가 급증하면서 전염병이 돌았다. 공공 위생이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1842년 영국 빈민법 위원회는 '노동 계층의 위생 조건에 관한 보고서'를 발간하면서 질병 발생 빈도가 높은 주거지역을 지도에 표시했다. 1817년 인도에서 시작한 콜레라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자 미국 지도 제작자 태너는 '인도에서 시작된 콜레라 역병이 미국으로 입성하기까지 지리적 경로 및 통계자료'(1832년)라는 책을 발간했다. 작은 붉은 점으로 콜레라 발병 지역을 나타냈다.
이처럼 지도는 인류가 걸어온 발자취뿐만 아니라 세계관과 문화적 태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사회ㆍ정치적 권력, 침략과 정복 역사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오늘날에는 첨단 기계가 지도를 대체하고 있다. 지구 주위를 맴돌고 있는 인공위성과 인터넷으로 전 세계 어느 골목이든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김희상 옮김. 작가정신 펴냄.
[전지현 기자]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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