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장 설화 또는 고려장의 개념이 일제 때에 만들어지고 유포되었다고 알려진 부분은 명백한 잘못이다”라고 진단하는 것은 스스로 자료에 만족하여 왜곡 될 수 있는 역사성을 너무 간과한 나머지 성급한 판단으로 인한 오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알다시피 그 당시 일제라는 강압정치세력이 존재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국민이 자국이라 할지라도 국가권력에 느끼는 심리적 압박감은 결코 무시 할 수없는 것인데 하물며 남의 나라 즉 일제의 통치를 받는 피 식민지인 입장이 되어버린 조선인들이 당시 받을 수 있는 심리적 압박감을 고통이라 하지 않으면 무엇이라 표현 할 수 있겠는가?
일제가 폭압적이고 강압적인 정권이란 사실은 세계인들이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체이다. 그러한 조직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 조선인들에게 강제하여 심어주는 심리적 압박감이라고 할 때 자괴감이 없을 수가 없다.
일제는 그러함을 노린 것이다.
세계를 통 털어 가장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면이 조선인 핏속에 원초적으로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려 조선인 스스로가 자학하게 만들고 정신적으로 망실케하고자 한 것이고 심리적으로 조선인을 학대코자한 의도된 것이었다고 먼저 분석하고 판단했어야 옳았다.
적어도 고려장이란 사실을 부풀리고 확대 재생산 했을 가능성이 더 많았다고 보았음이 더 옳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피스가 기록했듯이 일본에서도 오래전부터 유행되어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 것에서 보면 오히려 일본에서 자생된 풍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데서 고려가 그냥 반도고려라고 알고 있으면 큰 낭패일 수밖에 없다.
대륙고려 아시아고려가 얼마나 광범위하였는가는 고려연합, 고려연방체제였다는 사실을 바르게 알면 오류 속에 빠질 턱이 없다.
수많은 나라가 고려란 제국 내에 존재하였다고 할 때 일본도 그 범주에 벗어 날 수 없는 것이고 인도에 있었다는 잡보장경(雜寶藏經)의 기로국(棄老國)이란 나라도 마찬가지라고 보아야 한다.
다 같은 고려영역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고려연방국 이었던 당시 일본이나 기로국에 존재 한 풍습을 들춰내어 일제가 식민지정책에서 심리적으로 이용했을 가능성과 대륙고려, 아시아고려관점에서 보면 인도 기로국지역적인문제와 일본인들의 풍습이 서로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을 가능성도 추리 할 수 있는 일이다.
자료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치적으로 따져 그리피스가 일제를 상당히 의식한 주장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단순하게 자료만 보고 진단하고 판단할 일은 아님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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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장 개념, 일제가 처음 퍼뜨렸다?
[오마이뉴스]04.12.21 14:52
<은자의 나라 한국> 등 일제시대 이전 자료에도 등장
사람의 심사가 원래 그렇게 삐뚤어져 있는 것인지 아니면 먹고 사는 일이 정말로 벅차서 그런 것인지 어느 샌가 제 부모조차 나 몰라라 하고 버리는 못된 인간들이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다. 언론매체를 통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등장하는 이른바 '현대판 고려장' 사건들이 이러한 현실을 잘 말해준다.
고려장(高麗葬)이 어떤 건지는 굳이 설명을 달지 않아도 될 만큼 세상 사람들에게 이미 익숙한 내용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 '현대판 고려장'이라는 표현이 난데없이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이다. 어떤 이들이 말하길, "고려장은 원래 그 존재가 확인된 바 없는데 어찌하여 자꾸 기정사실인 양 들먹이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현대판 고려장'이니 뭐니 하는 것은 애당초 성립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익히 아는 '고려장' 얘기는 실상 어떠한 문헌에서도 그 존재를 전혀 확인할 수 없는 허구라는 지적은 종종 있어 왔다. 더구나 수년 전부터는 '고려장' 얘기가 사실은 불교경전 <잡보장경(雜寶藏經)> 기로국(棄老國) 설화와 중국 <효자전(孝子傳)> 원곡(原穀)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젊은 학자들의 연구논문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 조선중앙일보 1934년 6월 9일자에는 '병든 장인을 고려장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의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고려장'이라는 단어자체를 말끔히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내기는 아주 어려울 것 같다. 고려장이 실제로 있었는지 없었는지의 검증은 미뤄두더라도 이미 고려장이라는 관념의 뿌리는 생각보다 무척 깊다고 여겨지는 탓이다.
말하자면 애당초 '고려장은 없었다'는 논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수긍할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사실 유무에 상관없이 고려장의 관념은 비교적 오랜 세월 구체적인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최근에 듣자하니 고려장에 관한 얘기가 널리 퍼진 것이 일제 때의 일이고, 고려장이란 말도 그때에 만들어진 것이란 식의 주장이 간혹 있는 모양이다. 더구나 그 계기가 우리나라의 고분을 도굴하려는 일본인들의 못된 소행과 관련된 것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부분은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일제시대의 자료를 통해 확인해 보면 고려장 설화와 관련된 것으로 1919년에 발행된 <전설의 조선>이라는 책이 먼저 눈에 띈다. 이것이 고려장 설화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현재까지 드러난 것으로는 그 시기가 제일 빠르다.
이 책의 지은이는 평양고등보통학교 교유인 미와 타마키(三輪環)로 표시되어 있다. 여기에는 그가 채집한 조선의 구비전설(口碑傳說)이 수록된 가운데 말미에 동화부분이 들어있고, 그 가운데 '불효식자(不孝息子)'라는 대목이 보인다.
▲ 평양고등보통학교 교유 미와 타마키(三輪環)가 채록한 <전설의 조선> (박문관, 1919)에는 고려장 설화와 동일한 '불효식자'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 이순우
그리고 이 얘기는 1924년에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동화집>에도 '부모를 버린사내'라는 제목으로 등장하며, 곧이어 1926년에는 나카무라 료헤이(中村亮平)가 정리한 <조선동화집>에도 약간 내용을 달리하여 '부모를 버린사내'라는 제목으로 거듭 수록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식민통치자들이 고려장 설화를 널리 퍼뜨린 주범인 듯도 하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그네들이 없던 얘기를 만들어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자료에 수록된 내용은 어쨌거나 실제로 조선 땅에서 통용되던 설화나 전설을 채집한 결과였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고려장'이라는 용어 자체도 정말 일제가 만들어낸 것일까? 일제시대 이전에는 '고려장'이라는 표현이 정말 없었던 것일까?
이 부분에 관해서도 반드시 그렇다는 대답을 얻어내기는 무척 어렵다.
아주 오래된 시절인 <대한매일신보> 1908년 11월 11일자에는 '고려장 굴총'이라는 제목의 짤막한 기사하나가 들어 있다.
"서도에서 온 사람의 말을 들은즉 근일에 일인들이 고려장을 파고 사기를 내어가는 고로 온전한 고총이 없다더라."
▲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정읍군' 항목에 '고려장(高麗葬)'이라는 표기가 거듭 나온다. ⓒ 이순우
하지만 이것 말고도 '고려장'이라는 용어가 일제의 침략과는 상관없이 그 이전에 이미 우리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는 여럿 있다. 가령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그 흔적들이 역력하다.
이 자료는 일제 말기인 1942년에 조선총독부가 정리하여 발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1916, 17년경 식산국 산림과에서 조사한 '고적대장(古蹟臺帳)'을 그대로 축약한 것"이었다. 따라서 여기에 수록된 내용은 1916년, 17년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자료의 곳곳에 "마을사람들이 '고려장'이라 부른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지역적으로 볼 때 전국 곳곳에 두루 흩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어떤 곳에서는 '고려장(高麗葬)'이라 하지 않고 '고려총(高麗塚)'이라고 하였고, 심지어 '고려산(高麗山)'이나 '고려곡(高麗谷)', 또는 '고려분(高麗墳)'이라고 표기한 곳도 있지만, 그건 모두가 '고려장'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이 자료에 등장하는 고려장의 사례들을 모두 헤아려 보았더니, 모두 90여곳이 넘었다.
사실 '고려장'이라는 명칭은 그것의 실체가 무엇이었던지 간에 전국 곳곳에 흩어진 '이름 모를' 고분들을 대체하는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라 짐작할 수 있겠다. 흔히 주인 모를 무덤을 일컬어 '당장(唐葬)'이나 '호총(胡塚, 되무덤)'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던 평안북도 지역정도를 제외한다면, 고려장은 전국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정말 '흔한' 용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관계는 결정적으로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의 <은자의 나라 한국(Corea : The Hermit Nation)>에서도 그대로 입증된다. 여기에는 '고려장(Ko-rai-chang)'이라는 용어가 1882년 초판부터 직접 등장한다.
▲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 초판(1882년)에는 '고려장(Ko-rai-chang)'이라는 표현이 분명히 등장한다.ⓒ 이순우
"조선 왕조는 한국인의 미신 속에 뿌리박고 있는 적어도 두 가지의 잔인한 악습을 철폐했다는 찬사를 듣고 있다. 그 이전까지는 이와 같은 풍속이 한국에서는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고 성행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풍속은 일본에서도 오래전부터 유행되어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장(高麗葬)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세한 내용은 충분히 알려지지는 않고 있지만, 노인을 산채로 묻어버리는 풍습이었다. 인제(人祭)라 함은 아마 산신(山神)이나 해신(海神)에게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풍습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부류의 미신적이고도 끔찍스러운 풍속들은 고대사회에서 매우 성행되었으며 자비를 표방하는 불교의식으로서도 이들을 폐하지 못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인제의 경우 부락민들은 희생물이 될 그 사람을 목졸라 죽인다음 바다에 던졌다. 특히 장산곶(長山串)은 해신제의 장소로 유명했다."
보아하니 여기에 나오는 고려장에 대한 설명이 우리가 익히 아는 고려장의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요컨대 '고려장'은 일제강점기로 들어서기에 앞서 이미 1882년의 시점에서 그 흔적이 분명히 채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조선시대에 이미 그 용어와 관념만은 엄연하게 존재했던 것이라고 봐도 틀림이 없을 것 같다.
물론 여기에서 주의할 부분은 이러한 이름이 통용되고 있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고려장의 실체까지 확인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늙고 병든 부모를 내다버리는 그러한 악습이 실제로 있었는지를 검증하는 것과 고려장이라는 이름이 예전에도 존재하고 있었는지를 입증하는 것은 반드시 동일한 결론에 이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국에 흩어진 숱한 고분들이 '고려장'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로 '고려장' 풍습에 의한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는 노릇이며, 그것이 단지 '옛무덤'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기에 하는 얘기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고려장 설화 또는 고려장의 개념이 일제 때에 만들어지고 유포되었다고 알려진 부분은 명백한 잘못이라는 사실 정도는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요컨대 '고려장은 없었다'는 생각이 총론에서는 맞을지언정 각론에서는 여러모로 논증이 잘못 이뤄진 듯싶다.
그렇다면 '고려장'의 실체는 정말이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오마이뉴스 이순우 (take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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寓言故事: 棄老國
文/靜濤
[明慧學校]很久以前,有一個國家叫做“棄老國”,人們認為老年人活在世上是多餘的,是一種負擔,省下老人的食糧來養活幼兒不是更值的嗎?
於是該國國法規定,家裡不准養有老人,凡是老人,不論男女,一律驅趕至荒山僻壤中讓其自生自滅。百姓雖不忍看見年邁的父母棄於深山給野獸充飢,但畏於國法,不得不服從。
當時,國內有一位長者與兒子相依為命,父慈子孝,家庭和樂。直到父親年老之時,長者的兒子實不忍心讓父親流落野外,慘遭不幸,於是他想出一個辦法,在屋後挖了一個地洞,愉偷把老父藏在裡面,日夜奉養,所幸未被發現。
不久,“棄老國”遭受鄰邦的侵犯,因為鄰國也看不慣該國不近人情的國法,於是下了一道戰書,裡面提出四個問題,限三天答覆;如不能回答,立即起兵攻戰。
國王趕快召集文武百官,可是誰也不能回答。國王焦急萬分,只好四處張貼布告,徵問國中智者,如能解答者當給重賞。這四個問題是:
一、世上什麼東西最寶貴?
二、世上什麼事情最快樂?
三、世上什麼味道最美好?
四、世上誰的生命最長久?
榜文貼出去,兩天過去了,還未見有人解答。直到第三天,忽然有位年輕人,當眾提筆寫出了以下答案:
一、信為第一財;
二、正法最快樂;
三、實話第一味;
四、智慧命第一。
國王得到答案非常高興,馬上傳召他進宮。可是鄰國的使臣又提出一個問題來,他手拿一塊真正的檀木,兩頭一般方正大小,他問大家:“這檀木,哪是頭,哪是尾?”國王和眾臣面面相覷,都不能回答。
青年人立即去問他的父親,老人說:“你去把檀木放在水裡,那沉下去的是頭,浮在水面的是尾。”
使臣很滿意;但他還有最後一個問題,他牽來兩匹白馬,完全一模一樣,他問眾人道:“這兩匹馬之中,誰是母親?誰是兒子?”
國王和群臣都不能區別。正在著急之時,青年人已從父親那裡趕來了,他立即回答道:“這很簡單,只要拿一些草來給這兩匹馬吃,那自己不吃、卻把草推向另一匹身邊去的,便是母馬。”
當使臣離去時,國王很高興的對那位青年人說:“你的智慧使國家得到平安,請問這是你自己的聰明,還是有人教給你的?”
青年猶豫了一下,回答說:“是我父親教我的。”
國王很奇怪的問道:“他現在在哪裡?”
“請大王恕罪!我與老父相依為命,我不忍心遺棄他,於是將他藏在家中的地洞裡,這所有的答案都是他老人家告訴我的。”
國王感到非常慚愧,他後悔的說道:“都是我錯了!難得你有這樣一片孝心,奉養老父,幸虧他救了我們的國家。我要趕快傳旨全國,恢復敬老養老的制度。”
從此該國敬老尊長,成為最有孝道的國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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