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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프랑스의 숙명적 만남(1)
글쓴이:한부울
기득권세력과 신생세력
서구역사와 삼한역사
외규장각도서가 주는 비밀
숙종과 루이14세
기득권세력과 신생세력
누가 말했던가 세상사는 아무도 모른다고?
프랑스왕조와 조선왕조가 하나인 것처럼 겹쳐지는 상황을 보고 어찌 이런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우리의 역사는 일제에 의해 난도질 당한 역사이다.
추악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이것을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다.
1914년 발발하여 1918년 종결되고 1922년 모든 것을 마무리한 제1차 세계 대전은 분명 기존 기득권세력과 그것을 차지하려는 신생세력 간에 대결이었다고 본다.
자료에 보면 제1차세계대전 발발시 기득권세력(Central Powers)은 독일제국(German Empire),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Austria-Hungary), 오스만제국(Ottoman Empire), 불가리아왕국(Kingdom of Bulgaria)이다.
이 제국들이 기득권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센터랄 파워(Central Powers)라 하였다.
이 오스만, 불가리아, 헝가리 모두 전통적으로 삼한역사와 연결되는 국가군이다.
그리고 독일제국(게르만) 역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키타이(kitai)거란(契丹)이므로 고구려와 함께하는 삼한세력이란 것이 들어나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 神聖羅馬帝國, 962-1806)황제의 선출에도 개입한 유럽 최대의 왕실가문 합스부르크 왕가(House of Habsburg)를 근원으로 하는 오스트리아(Austria)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밖에 없다.
본 블로그 글에서 오스트리아는 라틴어로 마리키아 오리엔탈리스'Marchia Orientalis' 즉 동양으로 나아가다(March East)로 인식된다 하였고 또 본 블로그의 글 "무릇 산자고(山茨菰:Scilla)로 본 신라(新羅) http://blog.daum.net/han0114/17049746 "란 글에서 "신라(新羅)를 신성로마제국으로 보는 이유"로 합스부르크왕가와 연결된다는 것을 설명하였으며 합스부르크 왕가(The House of Habsburg)는 오스트리아제국과 연결되면서 aus- (“to shine”) (see aurora, dawn). 오스는 밝다, 여명을 보다, 새벽이라는 뜻을 가져 태백신(太白神)이 새벽 사백력(斯白力)으로 지칭되고 이것이 시베리아-서벌-서불-서라벌-사로(斯盧)-사라(斯羅)-서라(徐羅)-경주-금성-신라(新羅) 등으로 풀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 한바가 있다.
삼한역사의 년대표를 보면
Era of the three kingdoms, 9-962 AD
United corea, or korai, 960-1392 AD
로 나타나는데 위자료는 미국역사학자 아시아역사(Asiatic history)의 저자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 1843-1928)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들은 이미 고려를 연방국가로 보았다는 사실이 특별하고 그것을 역사학적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이다.
고려 연방제국이라 함은 이 모든 국가군을 포괄하고 수용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이 설립되는 시기는 공교롭게도 삼한역사가 끝나는 시기 AD 962년이다.
그렇다면 이 신성로마제국 역시 고려 연방국가에 들어 갈 수밖에 없다.
현 세계사 북 유럽군에 속하는 켈트(Celt) 역시 키타이(kitai), 케타이(cathay) 범위를 벗어날 수가 없다.
유럽의 기득권세력은 삼한제국이라는 것알 수가 있다.
그러나 결국 안타깝게도 이 전쟁(제1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것은 기득권세력이 아니라 서양세력이라고도 하는 신생세력이다.
전리품으로 얻은 것은 그들이 세계사를 만들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이다.
때문에 역사는 이긴자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것이 현재 우리가 보기에 너무나도 애매하고 모호하다고 여겨지는 역사 구도가 된 것이다.
패자가 되어버린 기득권세력들은 그들이 이루어놓은 치적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안타까움이 있었다는 것이 있고 나쁜 것만 부각시키는 대상이 되었으며 인류의 발전적 문화적인 면도, 바람직한 역사 정의로운 면도, 당시까지 구축한 어떠한 지위도 찬란했던 권역까지도 신생세력에 의해 탈취되거나 폄하되고 퇴치되는 아픔과 함께 결국 산산이 공중 분해되고 말았다는 결론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찾고자 하는 삼한의 역사는 꿈에도 볼 수 없도록 실체가 죄다 사라진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제가 먹다 남은 뼈다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시에 어느날부터 일본이라는 변변찮은 나라를 세우기위해 얼렁뚱당 설 만든 차마 역사라고 할 수도 할 수도 없는 온통 거짓사실에 의한 가짜 역사가 만들어지면서 더불어 삼한역사가 난도질, 장난질에 의해 근원도 알 수 없는 사생아 역사가 생성되면서 그기에 반도역사란 딱지를 달게 하였던 것이다.
그렇듯 역사전쟁에서 패한 결과는 참혹하고 비참한 것을 넘어 이제 우리 기억에서 조차 찾을 수 없는 소멸한 역사가 되어버렸다.
단언코 말하지만 그렇지 않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기득권 세력이 승리를 했다면 삼한의 역사는 한반도에 국한된 초라하고 볼품없는 역사로 남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1918년 세계전쟁에 의해 해체된 기득권의 역사를 밝히면 분명 삼한의 역사가 들어날 것이 틀림이 없다고 믿어 지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이와 덧붙여 이야기 한다면 제3국이란 간판을 내걸고 패한 독일제국은 2차 대전을 끝으로 허망하게 사라지는데 세기의 예언자인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1503-1566)의 글을 후세 해석자들이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1769-1821)의 출현을 예견했다면서 그를 제1의 반 기독교적 인물이라고 해석하였고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를 제2의 반 기독교적 인물이라고 해석 했을 정도로 모든 악행의 대명사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유태인 집단학살에 따른 철저하고도 악의 찬 비난은 현재까지도 끝이 없는 진행형에 있다.
학살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나쁜 것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가 진실로 전해지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것은 논란이 없지 않다.
나는 이렇게도 생각한다.
19세말엽 유대인들은 기득권세력들에게 조직적으로 테러를 감행하여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다.
지금 극단주의 테러집단조직인 알카에다(Al-Qaeda)의 무자헤딘(Mujahideen)들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프랑스의 점술가, 예언가라는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1503-1566)도 조선의 문신이며 예언가인 이이(李珥, 이율곡 1536-1584)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승리한 신생세력들은 패자 기득권세력에게 모든 악행에 대한 책임을 물었을 것이고 인류사를 망친 주류세력으로 호도하고 폄하했을 것이며 마지막세력인 제3국은 유대인학살로 천하에 없는 악행을 저지른 반인류적인 역사세력이란 추한 꼬리표를 달게 하고 특별한 반대변론 허락하지 않은체 철저하게 사라지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기득권세력들은 역사적으로 볼 때 지극히 억울한 것이다.
하지만 히브리어에서 "십자가"라는 단어는 나치의 만자(어금꺽쇠 십자가, 逆卍字)를 묘사한 것의 단어인데 십자가는 반유대주의, 핍박, 이교도의 상징이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십자가 상징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반유대적인 사상적 종교의 상징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지극히 역설(逆說:Paradox)적인 이야기가 된다.
결국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의 제3제국의 상징 어금꺽쇠 십자가, 스와스티카(swastika)는 반유대주의 상징으로서의 십자가라는 것이고 그러한 논리에서 생성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 이야기와 다를 의미가 분명하게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게 하고 있다.
근대사는 이렇게 모든 것이 세양세력들의 위주가 되어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것이다.
인류역사에서 기득권세력의 횡포가 인류사 전체에 지대한 나쁜 영향을 주고 인류사가 발전하는데 저해하는 크나큰 장해 요인이 되었다면 승리한 신성세력들은 전쟁이란 잔혹한 수단 후에도 그와 같은 사실에서 기득권세력의 참역사와 그 주체에 대한 진실된 역사정체성을 분명히 밝혀 후세에서 그것을 판단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세계사를 만들어야 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무엇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기득권세력이 남겨놓은 치적들은 무조건 지워버렸으며 비난받고 비평받을 것만 남겨두고 모두 뒤집어 씌웠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철저하게 그들만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는 결론이다.
어느 전쟁이든지 전쟁은 잔혹하고 비참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대신 대변혁이란 전제가 들어간 이해타산적 결과를 승리자만 차지할 수 있다는 불공평함도 있다.
그렇지만 인류사는 전쟁에 의해 발달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불합리가 있다.
어쩜 세계적인 대변혁이 또 다시 필요하다면 이러한 전쟁의 참혹성과 비참함을 감수해야 할 수밖에 없는 소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전쟁은 인류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촉진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앞으로 인류의 미래를 이야기 할 때 어느 시대이더라도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는 신생세력이 발생하고 이러한 신생세력을 무조건 제거하려고 할 때 그것에 의한 끝없는 갈등만을 고집하게 되면 또 다시 그러한 파멸의 큰 전쟁을 시시각각 맞이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인류가지고 있는 난제라고 할 수가 있다.
1차세계대전, 2차세계대전을 역사전쟁이었다.
서세가 만든 역사가 최악의 경우 지탄을 받고 그것이 바른 인류사라고 할 수 없을 때 또 다시 크나큰 역사전쟁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고 본다.
어쨌던 근세기 역사는 기존기득권과 신생세력 간의 충돌에 의한 승리한 신생세력들의 전리품이라고 볼 수밖에 없게 한다.
그 규모를 보면 참혹성에서 더 확연히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고 시대가 발달함에 따라 더 끔찍하게 변한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기득권세력이 군사를 총 25,248,321명 동원하고 결과 군인 사망자:4,386,000명과 부상자:8,388,000명 그리고 실종자:3,629,000명을 합하여 16,043,000명을 희생시켰고 상대가 된 신생세력은 군사를 총 42,959,850명 동원하고 군인 사망자:5,525,000명 부상자:12,831,500명 실종자:4,121,000명을 합한 22,477,500명을 희생시킨 참혹한 전쟁이다.
결국 다 합산한다면 희생자가 상방 간에 38,520,500명이나 된다.
당시 세계인구가 18억이었다면 2%가 전쟁피해를 직접적으로 겪었다는 결론이다.
50명에 한 명꼴로 죽었고 100명이면 두 명이 죽었다는 결론이다.
5-6세기 훈족 아틸라시대를 고구려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때 대표적인 전쟁으로서 고구려와 수나라, 당나라 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에서 612년 수나라 양제는 113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출병하였다는 기록과 추가적으로 보급과 식량을 운반하는 병력행렬길이가 960리(里)정도라 했으니 377km의 길이로 200만명을 넘었다고 하니 고구려와 전쟁을 하기 위해 수나라는 동원한 병력수는 300만 명이상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일제가 조작질 한 삼국사기는 수나라 상대가 되는 고려 군사를 형편없이 만들었지만 수나라의 동원한 군사를 비교하면 이에 대치한 고구려 역시 숫자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후 벌어진 당나라 전쟁 第一次(644-645:고구려승리), 第二次(660-662:고구려승리), 第三次(666-668:라당승리) 역시 인구대비 그런 규모라면 이것은 아시아지역을 한정하지 않았던 세계전쟁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세계전쟁이라고 보는 이유는 당시 인구로 보았을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려수전쟁(麗隨戰爭)이니 려당전쟁(麗唐戰爭)이니 하는 것은 다 근세기에 동양사가 만들어지면서 창조된 픽션이라고 보지만 어느정도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라면 수나라는 인구의 거의 10%를 고구려 전쟁에 동원한 것이 된다.
이러고 패했으니 수나라가 망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하지만 수나라니 당나라니 하는 것들은 삼한제국의 중앙정부로서 정치적 성격이 짙어 언제든지 바뀔 수 있었던 정권인 것이다.
물론 군사동원이라는 권한의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군사동원령 권한을 가진 중앙정부였다고 하지만 삼한제국 신라, 백제, 고구려가 다 합쳐질 때는 감히 이길 수가 없었다는 것이며 대신 나중에 신라가 중앙정부가 되자 고구려가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상황을 그릴 수가 있는 것이다.
수나라 때 인구가 4천 만 명, 당나라 때 5천 만 명이라 하니 비율적으로 따져 당시 세계 인구는 약 2억-3억 정도라고 한다면 전쟁피해 사람 수가 200~300만 명이니 약 1%를 상회는 하는 숫자가 된다.
이렇게 숫자로 보면 놀랍게도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은 실체가 없는 역사라 할지라도 어쨌든 규모로 면으로는 당시 세계전쟁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약1300년 후 전쟁에선 거의 10배가 늘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잔혹성이고 참혹성이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보면 부상자나 실종자는 제외하고 사망자만 보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에서 군인사망 1400만 명 이상, 민간인 사망 3600만 명 이상 총 5000만 명 이상 사망했으며 독일을 정점으로 한 추축국(樞軸國, Axis Powers) 중심축세력은 군인 사망 800만 명 이상, 민간인 사망 400만 명 이상 총 1200만 명 이상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쌍방 간 합친 사망자 숫자만 약 6,200만 명이다.
결국 1939년 22억, 1945년 23억이라 하였으니 23억에서 사망자 율만 따지면 2.6%인데 굉장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1차 세계대전 전쟁비용
1914-18 독일, 1차대전비: 6421억7500만 달러, 577조 9600억 원
1914-18 영국, 1차대전비: 6006억7800만 달러, 540조 6100억 원
1914-18 프랑스, 1차대전비: 4125억2200만 달러, 371조 2700억 원
1914-18 러시아, 1차대전비: 3789억9800만 달러, 341조 1천억 원.
1914-18 이탈리아, 1차대전비: 2110억 3800만 달러, 189조 9300억 원
1914-18 캐나다: 283억2200만 달러, 25조 4900억 원
1914-18 일본, 1차대전: 6억8천만 달러, 6100억 원
1917-18 미국, 1차대전: 3846억 5천만 달러, 346조 2천억 원
1차 세계대전 전쟁 비용을 풀어놓은 것인데 가장 주요하고 핵심적인 국가 오스트리아는 들어가질 않고 1차대전에서 주축국이라고 하지만 동아시아의 열도 일본이라면 1차세계대전과 전혀 상관이 없고 또한 역할이 없는 일본이 들어가 있다는 것도 이상하다.
이때 일본은 동아시아 열도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며 어쩌면 영국 허드슨 베이 회사(Hudson 's Bay Company)의 고용관계일 가능성이 많다.
여기서 빠진 부상자 숫자 그리고 실종자까지 합하면 거의 5%선에 육박할 것이란 예측이다.
산업발달, 과학의 발달로 인한 화력이 실로 어마어마하게 증대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들만의 역사이고 전쟁이라고 하지만 인류사로 보았을 때 분명 잔혹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것들이 모두 삼한역사를 형체 없이 파괴하고 괴멸시킨 것이라고도 본다.
현대에서 이러한 전쟁이 다시 발생된다면 어느 정도의 피해가 예상될까?
지금의 인구가 70억이라고 하니 화력규모에서 날로 발전하는 것에서 보면 정비례적으로 따진다 하더라도 상대성 파괴력은 거의 10배를 넘는다고 볼 수 있다.
1918년과 똑같이 2.6%를 70억에 적용하면 사망자 숫자가 1억8천2백만(182,000,000)명이 사망할 것으로 나온다.
5%를 적용하면 3억5천 만 명이나 된다.
여기에 원자탄, 수소탄, 기타 가공할 파괴력을 더하면 어떻게 될까?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이며 지구가 괴멸상태에 빠진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민간인 피해는 계산하지 안한 숫자이다.
이제 과거 1차 세계 대전처럼 기득권을 차지하려는 세력에 의한 전쟁이 재발된다면 새 역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가 파멸되고 종말의 역사만 남을 것이 뻔한 이론이다.
하지만 역사는 늘 반복한다고 했다.
끔직한 일이 언제든지 별거 아닌 것에서 출발하여 벌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지금까지 기득권세력과 신생세력이 충돌한 상황만을 보았다.
이제 서구역사가 주는 사실에서 우리 삼한역사와의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를 따져 정확한 역사흐름을 알 필요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순간이 되었다.
서구역사와 삼한역사
얼마나 근대사가 헝크러져 있는지 들여다 볼 차례이다.
먼저 대표적으로 조선과 프랑스와의 역사관계를 한 번 보자.
근세기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사건이 있었는데 1866년 10월에 있었던 바로 병인양요이다.
최근 병인양요(丙寅洋擾,1866)때 조선을 침범하고 강탈해간 역사유물인 외규장각 도서 의궤(外奎章閣圖書, les manuscrits coréens)를 제한된 기간만 갱신 대여하는 조건으로 프랑스가 2011년에 우리에게 반환하였는데 이것을 추진한 사람이 바로 역사학자 겸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한 박병선(朴炳善:1929-2011)박사에 의해 발견되고 끝내 우리가 실물을 볼 수 있도록 한 사실을 떠 올릴 수가 있다.
외규장각 도서(外奎章閣圖書)는 1782년 2월 정조(正祖, 1752-1800, 재위:1776-1800)가 왕실 관련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규장각에 둔 것인데 이것을 1866년에 당시 프랑스와 직접적인 관계가 전혀 없을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소각 사건을 구실로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 극동함대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1812-1882)제독이 규장각을 불태워 전각이 소실되고 이 결과로, 5,000여권 이상의 책이 불타 없어졌고 의궤(儀軌)를 비롯한 340여책의 문서 및 은궤 수천량을 약탈해 간 사건을 생각 할 수가 있다.
그것은 일제가 만든 반도역사가 그러한 사실을 상세하게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이 중 약탈된 도서 의궤를 이제사 반환받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소각되었다고 하는 사실관계와 소각된 도서들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소각되지 않고 강탈당한 의궤는 과연 실제의 역사의궤가 맞는지 등 당장 생각해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의문점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보았을 때 삼한역사 실제 장소가 한반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과연 병인양요가 발생한 장소 즉 의궤를 보관하고 있던 규장각의 장소위치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과연 숨어 있는 것인지가 제일 궁금하다.
역사를 엉뚱하게 다르게 고친다는 것은 실제 쉬운 일은 아니다.
기존 역사가 있는데 조작하거나 왜곡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얼렁뚱당 단순하게 처리 될 것은 분명 아니라는 말이다.
무수한 시간, 인력동원, 치밀한 계획하에 이루어진 것이란 걸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시도하였고 성공하였다.
하지만 다 아는 역사로서 진(秦)시황제(始皇帝, BC246-210)가 사상의 통일을 목적으로 분서갱유(焚書坑儒)하였다는 역사사건은 조작된 역사, 거짓의 역사를 만드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꼽을 수가 있다.
어쩌면 이러한 역사 사실을 본 보기로 삼아 그대로 답습하였을 것이란 예상은 어렵지 않다.
서세의 역사학자 랑케(Leopold von Ranke,1795-1886)가 힘주어 주장하는 실증주의 차원에서 이 분서갱유조차도 조작한 것일 수 있다는 추측을 낳게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본보기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분서갱유는 역사 뜯어고치기에 수단으로 이용될 수밖에 없는 본보기였다면 방법은 바로 화재로 인한 소각, 소실, 소멸했다고 둘러대는 것만큼 완벽한 것은 없다.
그렇게 없애버린 뒤 무(無)에서 역사를 거짓으로 사실을 조작하여 창조할 수 있는 충분한 여지를 남겨두는 것은 언제든지 나쁜 의도의 음모(陰謀)가 그곳에 들어 갈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소각되어버렸으니 없다고 하면 그만이다.
없으니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대신 그것에 대한 반복적인 교육을 통하여 강압적 주입식 강제성을 가미할 때 인간 뇌에 새뇌가 되기에 충분하며 얼마든지 이러한 근원적인 의심을 상쇄하거나 없애버릴 수 있다는 전제가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소각과 소실이란 등식이 인간들에게 기억이란 명제와 함께 하는 것도 속편한 이야기기 때문이다.
없으니 확인 할 길이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다.
서양역사가 주장하는 실증주의 역시 이러한 문제에서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 실증주의란 그들이 파놓은 함정일 수도 있는데 근대사가 실증주의를 먼저 철저하게 지켰는가 묻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도 다분히 있다.
하기사 반도사관에 주역 친일사학자 이병도(李丙燾)의 어이없는 실증주의나 서양학자들이 말하는 수구적인 실증주의나 그들이 임의적으로 만들어놓고 조작한 역사를 지키려는 수단에 불과 할 뿐이다.
그들이 이미 다 만들어 놓은 뒤 실증주의 운운하는 것은 그들의 쳐 놓은 기득권을 확보하고 미래 무한의 비판과 그들에게 불리한 평가를 막고 지키려는 수단으로 이용되기 위한 것일 뿐 정당성이 없는 것이다.
반도역사에 등장하는 소실 또는 소각 등의 단어와 문장 연결은 이러한 의구심을 증폭시키고 역사 자체를 믿을 수 없도록 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할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환경이라면 새로운 역사를 찾는 입장에 있는 우리는 한계가 분명하게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이 부르짖는 실증주의(實證主義史學)는 이미 신생세력들이 기득권을 가지고 잘못된역사, 조작된 역사, 근세기 판짜기과정에서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만들어버린 엉터리같은 역사를 고착화하려는 것이 틀림이 없다.
이렇게 따져본다, 유물사관에서 실증사관으로 들어가는 것에서 유물사관을 무시하고 실증사관을 고집할 수는 없기 때문이고 유물사관이 변질되기라도 하였다면 유물사관은 실증사관의 방패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기막힌 고리가 되기 때문이다.
엄격하게 이야기 한다면 모든 것이 불리한 역사찾기하는 우리들 입장에서는 실증주의를 기어코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만약 삼한 역사가 서구역사의 근본으로 존재하여 그것을 토대로 서양역사가 꾸며진 것이라면 삼한역사의 근원을 없애버리고 재창조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을 찾는 일이란 상당한 희생을 강요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마도 수세기에 걸쳐 해도 다 못할 일이다.
때문에 어렵다는 것은 각오를 할 수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해야만 하는 당위성이 있으니 해야만 한다.
근대사가 그러한 이유로 삼한역사를 변질시켰다면 그 빈자리를 메우려 근원을 서구역사로 만들고 이것과 전혀 다른 파편이나 조각처럼 떼 내어 동양역사를 만들고 일부는 라틴역사를 만들며 앵글역사를 만들고 몽골역사를 만들고 그들이 필요하다고 싶은 역사를 이리저리 나누어 만들어 버렸다면 그것을 다시 조각을 맞추어 원상복귀 시킬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전자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변역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근원이라도 알자는 뜻이다.
큰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아니다.
과거 그것으로 인하여 바로 제1차 세계 대전이 촉발된 것처럼 대변역이 일어나기 전 기득권역사가 사라지는 충분한 이유가 분명히 존재하였다는 확신이 있기에 이러한 힘든 작업도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노력이 있어 설혹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대를 이어가며 언제까지라도 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서세에 의해 사라진 우리의 삼한역사는 북아메리카를 근원으로 하는 것으로 밝혀진 마당에 포기할 수 없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기틀은 마련되었기 때문에 연이어 노려과 분투가 요구될 뿐이며 결론은 인내가 필요하다.
이상에서 보더라도 역사적으로 서양사에 대해 의문점은 많고도 많다.
또 다시 규장각도서문제로 돌아가서 프랑스의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1812-1882)제독은 프랑스-멕시코 전쟁(1862-1867)이 일어나는 동안 멕시코에서 복무를 했다는데 3년후 1865년에 프랑스극동기지사령관(Station des mers de Chine)으로 임명되어 본부가 있는 요코하마에서 사령관 업무를 수행했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때 프랑스라고 하는 실체는 무엇일까?
바로 1684년 설립한 미시시피회사(Mississippi Company)이고 이것은 다시 1717년에 서방회사(Company of the West)로 이름이 변경되었으며, 1719년에는 동인도회사(Compagnie des Indes Orientales)와 중국회사(Compagnie de Chine)를 합한 인도회사(Company of the Indies)를 칭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회사들이 모두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을 주무대로 삼았기 때문이다.
비록 이 회사가 18세기 초반에 북미에 식민지를 건설한 프랑스가 세운 미시시피 강 주변의 개발 무역 계획인 미시시피계획(Compagnie du Mississippi)실패에 의한 버블파동(bubble economy)으로 1770년 해체되었다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잔여세력들은 프랑스이름으로 근세사에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고 근세사 기록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란 진단을 할 수가 있다.
주로 이 때 프랑스라는 세력들은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때임을 알 수가 있고 특히 미시시피강 하구 루이지애나주(State of Louisiana)를 점령하고 있었던 때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을 해보라.
아무리 해적질을 하여 장사를 하고 이문을 남기며 자본을 축한 조직이라고 할지라도 그래서 진보된 함대를 소유하였다 하더라도 당시 중앙아메리카대륙 파나마에는 운화가 개설되지 않았던 환경이라고 할 때 남아메리카대륙 혼곶을 돌아 태평양을 횡단하여 동아시아대륙으로 현재 수송장비가 발달된 것처럼 들락거렸다고 설정하는것은 어찌보면 서양세력들의 사고가 당시 제어할 수 없도록 하는 위험적인 발상이 난무했음을 알 수 있고 그들 세상에서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다는 독불심리에 의한 자만이고 넘쳐나는 과욕에서 꾸민 이야기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시 카리브해나 동아시아해에서 활동했다고 한다면 어디든지 한곳에서 종결되어야 하는 순리이고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자연스러운 광경인 것이다.
때문에 프랑스가 카리브 멕시코만에서 태평양을 가로질러 동아시아 열도 일본 "요코하마"에 갔다는 것도 이상한 것이고 베트남을 선교사를 학살한다는 명목으로 집적거려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도 너무 도가 넘는 허황된 이야기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이 활동한 지역은 동아시아 해양이나 아니면 카리브해이거나 한 지역일 수밖에 없고 프랑스란 세력들이 활동한 곳은 분명코 미시시피강 특히 하구에서 활동했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멕시코(카리브해), 베트남(동남아시아)을 상대로 동시간에 동시다발 전쟁을 벌렸다고 설정하는 것과 똑 같은 이야기가 미서전쟁(美西戰爭:Spanish-American War)으로서 1898년 4월부터 8월까지 쿠바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스페인 간에 쿠바(카리브)와 필리핀(동아시아)에서 동시에 벌어진 전쟁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현대전에서도 섣불리 도모할 수 없는 동시다발 전쟁으로 카리브해 섬(쿠바)과 동아시아의 필리핀에서 같은 시간대에 한 전쟁을 치루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이것이 역사라면 솔직히 삼국지, 또는 수호지 같은 역사소설이며 만화같은 설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멕시코전쟁이 있었다는 같은 시대의 세종지리지를 보면 1862년(AD)에 당시 조선(朝鮮)에도 하삼도(下三道)충청˙전라˙경상도 곳곳에서 잇단 민란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만 1866년 강화도를 침범한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1812-1882)는 프랑스 국가명이 없었을 때이니 해적신분이나 아니면 프랑스회사직원신분이었을 것이고 1862년 멕시코 만을 침략하고 약탈하다가 다시 3년후 미시시피강을 따라 북쪽으로 함대를 이끌고 올랐던 것이 틀림이 없다.
이러하였으니 조선에서는 민란이 곳곳에 일어났다고 기록한 것이다.
즉 한반도에는 갈 수도 없고 갈 필요도 없는 상황임을 잘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프랑스극동기지사령관이라고 길어 늘어 뜨려 놓았지만 간단하게 그들 용어에서 보면 "Station des mers de Chine" 즉 "중국해 기지" 정도인 것이다.
중국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chine"는 중앙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고 중앙아메리카대륙 만주라고 판단되는 목구멍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멕시코만 또는 카리브해를 중국해(mers de Chine)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본론으로 들어가 좀 더 상세하게 풀어보겠다.
이것을 "극동(Far East)" 운운하는 것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따진다면 북아메리카대륙이어야 맞다. 아(亞)가 아세아(亞細亞)로 굳어지기 전에는 아메리카대륙에서 사용된 지명으로서 아(亞細亞)가 "a" 로 영토, 땅 land 를 말하는 것이다.
로즈가 멕시코에 1862년에 근무하였다면 내 생각으로는 1865년에도 아메리카 대륙을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멕시코와 프랑스의 충돌이 1867년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근무하였다고 하는 "요코하마" 역시 중앙아메리카 대륙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또 하나 여기서 반드시 전제 할 것은 그들의 운송수단이라고 하는 함대를 구성하는 함선은 날고 뛰어봐자 모두 목조 범선이라는 한계가 있다.
이 이야기는 주제때 마다 꺼내는 것으로서 많이 했다.
적어도 철제범선(iron-hulled ship)이 본격화되고 함선 크기도 점차 1000톤 범위에서 벗어나게 되는 1870년 이후부터 대양을 가로지르는 항해가 가능했다고 해야하며 영국선 서모필리(Thermopylae)가 13.8kt(시속 16km)정도의 빠른 속도로 넘나 들 수 있었다는 시점과 증기선의 앤진이 1884년 영국의 파슨스(Parsons' turbine)와 스웨덴의 라발(De Laval turbine)이 각기 터빈 기관의 원리가 개발되면서 부터 안전항해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이전 온 천지를 마구 돌아다녔다는 식으로 기록된 것은 전부조작 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실제로 19세기후반 뉴욕에서 지금 홍콩까지 항해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편도 약 7-8개월 정도 소요된다는 사실을 감한할 때 왕복이라 한다면 1년이 넘는 시간이다.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이기 때문에 어쨌던 카리브해에서 태평양으로 들어가기 위해 남아메리카대륙 남단 혼곶을 돌아 가야 하는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실제 조선이 붕괴되는 시점 1881년까지 주 무대는 아메리카라고 이해되어야 하고 지금의 동아시아대륙은 제로게임(zero game)으로 인한 무주공간,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서세들이 이중플레이로 그들의 권역을 아무렇게나 심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것에 선교사를 앞세워 카톨릭과 기독교가 더 심어지면서 종교와 함께 역사가 통째로 변질 되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맞다.
실제 동아시아에 서구세력들의 각축장으로 변한 것은 일제가 열도에 들어앉는 시점인 1872년 경 이후부터이고 본격적으로 각축장으로 변한 것은 1차 시노-일본전쟁(First Sino-Japanese War, 淸日戰爭)이 발발한 1894년-1895년이라 보이고 서구세력까지 등장한 시기는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s, 露日戰爭)이 깃 점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때까지 구체화 되지 못했다는 것도 알 수 있으니 정확하게 결론을 내린다면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세계 빈 무주공산에 있었던 지역들이 독립이라는 명칭과 함께 나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사할린과 오호츠크해가 일반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부터라는 자료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제너럴셔먼호사건(General Sherman號,1866), 병인양요(丙寅洋擾,1866), 신미양요(辛未洋擾,1871)는 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사건들임을 추측할 수 있고 확실하게 예단 할 수 있다.
때문에 단순하게 한반도에서 벌러진 사건에서 외규장각 도서(外奎章閣圖書, les manuscrits coréens)를 반환받았다가 아니라 근원적인 이 사건의 장소와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라는 사실을 가슴에 우리는 새겨 이 글을 읽어야 할 것이다.
지금은 고인되었지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하면서 이 외규장각도서를 반환하게 만든 박병선(朴炳善:1929-2011)박사께서 이러한 사실을 알았을지 알았다면 이 같은 사실에서 어느정도 고민하였을까 궁금해진다.
외규장각도서가 주는 비밀
다시 돌아가 과연 외규장각을 반환한 프랑스와 삼한역사관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여태까지 반도역사의 잘못된 지식으로 이러한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외규장각도서를 강탈한 역사는 하나의 역사를 나누고 별도의 역사를 만들면서 벌어지는 혼란에서 어쩌면 허구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본다는 사실이다.
서구역사와 삼한역사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은 이 글 전체를 지배하는 주제이다.
특히 조선과 프랑스가 그렇다.
그러한 구도에서 심층적으로 살펴본 결과 외규장각도서 강탈사건은 실제와 다른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잘못된 역사로 인한 폐해에 따른 비판력 약화가 사실관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둔감해진 역사가 비집고 들어 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고 그 공간에서 실체가 아닌 역사가 마치 춤을 추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기에 하는 말이다.
이미 본 블로그에서는 고구려, 신라, 백제 그리고 고려, 조선까지의 옛 지진기록으로 지중해연안의 지진기록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명확한 자료를 바탕으로 과학적으로 밝힌바가 있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과학적인 검증을 마쳤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유럽과 삼한역사가 관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먼저 발견한 것이다.
놀라지 말자
조선왕조와 프랑스왕조가 밀접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으면 안된다.
프랑스 역사의 시작은 대체로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 1세(Clovis Ier)가 갈리아지방의 가장 큰 부분을 정복했던 486년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 프랑크족이라고 하는데 이 프랑크족은 단일 부족명이 아니라 살리족(Salier), 리부아리족(Ribuaria), 카티족(Chatti) 등 라인강(Rhine)중, 하류의 동안(東岸)에 거주하는 여러 소부족의 부족집단에 대한 호칭이다.
살리족이 지도적 지위에 있었으며 민족 이동기에 라인강(Rhine)을 넘어 갈리아 지방으로 퍼져 로마인들이 갈리아인으로 불렀던 종족이다.
스칸디나비아로부터 영국 및 스페인을 위시한 대서양 연안 지방과 함께 프랑스 각지에서는 고인돌(dolmen)·선돌(menhir)·화석(cromlech)·스톤헨지(stonehenge)등 세련된 거석 기념물이 만들어졌고 기원전 10세기 이래 켈트인(celt)이 거주한 서구지역을 로마인들은 갈리아(Gallia)라 불렀으니 그곳에서 생성한 제국을 프랑스라 한 것이다.
본 블로그 글 "충격적인 동방역사(東方歷史)에 들어가면서
http://blog.daum.net/han0114/17050378 "를 참고 할 때 이지역을 전체적으로 고구려의 땅이라고 본다.
高盧(고노, 고로)는 프랑스 북부지방의 갈리아(Gallia)를 말하는데 이 갈리아를 골(Gaul)이라 했고 이 갈리아의 원 거주민은 인도유럽어족인 켈트족(Celts)으로, 갈리아라는 이름 자체가 '켈타이(Celtae)'를 라틴어식으로 옮긴 것이라 하였으며 이 켈타이는 키타이(kitai)로도 발음이 된다.
갈리아, 골 지역에 근거한 켈트족은 정통적으로 다신교(多神敎)를 믿는 민족이며 이를 영어자료에 켈틱 폴리티이즘(Celtic polytheism)이라 하고 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그들을 그냥 이교도라 불렀다고 하는 것이다.
고구려 역시 다신교를 믿는다.
<후한서>에 이르기를 “고구려에서는 귀신(鬼神), 사직(社稷), 영성(靈星)에 제사 드리기를 좋아한다"라는 기록을 보면 분명 고구려도 다신교를 믿었다고 보인다.
로마(Rome, 羅馬)는 신라와 백제라는 사실을 본 블로그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백제는 신라에 통합된 세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유럽남쪽은 신라백제가 있었고 유럽북쪽은 켈트 즉 고구려 유민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실의 역사구도이고 유럽사와 삼한역사가 만날 수밖에 없는 실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과 별도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근세기에 유럽대륙으로 들어간 서양세력들 즉 신흥세력들은 이와 별개로 취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오늘날 역사 혼란이라고 보아진다.
우리는 조선과 프랑스의 숙명적인 관계를 풀려면 반환을 받았던 외규장각 도서(外奎章閣圖書: les manuscrits coréens)에 얽힌 내용들을 밝혀보면 우선 프랑스어 "les manuscrits coréens"가 "코리아 수사본(手寫本)"이라고 번역되는데 이 수사본이란 "손으로 그린 사본"이라 할 수 있어 진본이 아닌 사본이라는 것이 이상하기 짝이 없다.
실제로 조선(朝鮮)은 세계삼한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한반도에 국한 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이 이 외규장각 도서로 인해 밝혀지고 있다.
그렇다면 본래의 강화도 외규장각이 있었던 곳에 이 외규장각도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때 진본과 같지 않다는 이야기로 풀이 할 수 있다.
반환문제에서 상황을 잠시 이야기 하면 과연 이 반환문제가 원만하게 주위 근세기 역사에 깊이 관련된 여러나라 들의 반응이 과연 어떨 것인가에 대한 솔직히 나는 염려가 많아었다. 이 반환조치가 프랑스의 일방적인 것이라고 할 때 우리나라입장에서는 대환영이겠지만 미국과 일본 뿐만 아니라 당시 서구제국들이 과연 그대로 묵묵히 반환절차를 바라보고만 있겠는가 하는 걱정이 있었다.
더군다나 세계삼한역사를 알고 있는 나의 입장에서는 크게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내 놓을 것이란 추측과 이러한 반환절차에 제동을 걸거나 반환하려는 프랑스에게 압력을 가해 반환절차를 진행할 수 없도록 할 것이란 추측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가 스스로 지연을 하였을 뿐이지 다른 근세기 조선과 연관된 나라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반응조차 하질 않았고 아예 관심조차 없는 것처럼 대응한 사실이 참으로 이외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는 일본이 이러한 문제를 두고 어떻게 행동을 나타낼 것인가 사뭇 궁금했지만 이에 대한 염려도 괜한 것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관심조차 보이질 않았다.
이 반환으로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그들의 틀이 망가지기 때문에 가만이 있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찬물을 끼얹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왜 이럴까? 이것이 아닌데, 분명 어떤 격한 반응이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프랑스가 한반도 조선 강화도에서 강탈한 이 외규장각 도서(外奎章閣圖書, les manuscrits coréens)가 한국필사본이라 말처럼 진본이 아니라는 말인가?
실체가 어떠한 형태로든지 아니라는 사실을 감지 할 수 있고 아니면 한반도 사학계가 일본사학계에 의해 영향을 받도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 그들을 안심시킨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해보았다.
실제로 우리 대다수 국민들에겐 외규강각에 있었다던 의궤를 2011년도에 프랑스에서 우여곡절 끝에 반환받았지만 그냥 유물을 반환받았다는 상징성 이외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러니 일본이나 서구에서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역사유물이라는 것은 그것을 토대로 진본여부를 가리고 또는 세부적으로 내용을 따질 때 양심적인 역사가들에게 밝혀 들어나지 말아야 중요한 근거들이 밝혀질 수 있다는 염려가 그들에게 없었다는 사실이 더 이외라는 사실이다.
근원적인 문제는 이렇게 140년만에 반환 받은 것이라면 우리나라 사학자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이 잡듯이 잡아 무엇인가 역사사실에서 밝힐 것을 밝혀 궁금해 하던 국민들에게 알려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보는데 지금 시간이 근 3년이란 시간이 흘러갔어도 이에 대한 대국민 설명은 아예 없다.
이것은 역사학자들이 책임을 떠나 국민들에게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국민 입장에서 140년 전에 강탈되었던 유물이라고 하여 귀중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일부 특정한 역사학자들만의 것이라면 반환을 받든지 애초부터 반환 받지 않든지 간에 별 효용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반도역사이 지배하는 사학계와 국민간에 얼마나 큰 괴리가 있는지 알게 하는 것이다.
당장에 옛 강화도 외규장각에 소장된 유물이기 때문에 실제로 강화도에 소장된 것이 맞는지 삼한역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이 유물이 진본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지 내용에서 숙종의 특별한 어필이나 후세에 남길 특별한 담화가 있는지 없는지 등 세밀하게 분석하고 그것을 속히 국민들에게 알려 반환 받았다는 유물의 가치성을 알려줘야 함이 마당하지만 그렇지 않는다는 것은 유물에 의한 무엇인가 별도로 숨길 것이 많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어진다.
그러나 나는 이 외규장각 도서는 진본도 아닐 뿐더러 1866년 프랑스가 침략하여 강탈해간 그 유물이 아니라는데 힘을 실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외규장각 도서 중 의궤가 2011년 반환전까지 근세기에 누군가에 의해 새롭게 한반도에 맞게 제작된 것이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주위에 관계국들의 관심이 아예 없었다는 사실을 적용하면 그렇게 까지 추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과 프랑스는 최소한 숙종부터 영조, 정조까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게 된다면 곧 조선이 프랑스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떻게 강탈이라는 표현이 가능한지가 문제이며 프랑스가 과연 유럽대륙에 있엇던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없지 않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조선과 프랑스는 북아메리카대륙에 같이 존재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럽의 프랑스가 동아시아의 한반도 한국의 도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럽의 프랑스가 한반도의 조선에게 반환한다는 간단한 논리가 아니라 유럽과 한반도가 아닌 곳에서 같은 역사를 가졌던 나라로서 근세기 역사가 프랑스어와 한반도어로 분리되면서 두개의 역사가 되었고 하나는 조선역사이고 하나는 프랑스역사라면 조선에 쳐들어온 것은 프랑스가 아니라 미시시피강을 무대로 활동하던 해적이고 그 해적이 프랑스인이라면 그 해적이 강탈해간 의궤 및 나머지 도서들이 근세기에 유럽 프랑스로 들어가 역사가 분리 된 상태에서 프랑스출신해적은 유럽대륙의 프랑스가 되고 조선은 한반도에 서세와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넣어져 반도조선이 되니 1866년 그렇게 짧았던 거리가 장장 23,500리(里)가 되어버렸고 이제 나라가 다르다고 하니 반환이라는 절차가 필요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가 있다.
문제는 반환한 의궤가 당시 해적들이 강탈해간 그 의궤이며 나머지 1,007종 5,067책이 소장돼 있었다고 하였는데 그 책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하는 말이다.
앞에서 당시 프랑스라고 할 수 있는 세력들의 활동근거지가 북아메리카대륙 루이지애나주를 중심으로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 범위라고 하였고 하구(河口)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1866년 당시 코리아 강화도에 쳐 들어온 곳도 그곳에서 멀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근세사가 말하는 것처럼 미시시피강 하구에서 남아메리카대륙 남단을 휘돌아 태평양을 횡단하여 열도 일본 요코하마 프랑스극동함대가 있었던곳에 도착하여 재충전하고 다시 한반도 강화도로 들어갔다는 식의 엉터리같은 구도는 이제는 더 이상 통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과 함께 더욱 의문스럽게 하는 것은 거창하게 프랑스극동함대사령관 또는 제독이라고 하였는데 이 명칭도 따지고 보면 프랑스어로 그냥 "Station des mers de Chine" 즉 "중국해 기지"라는 정도의 문구뿐인데 이렇듯 거창하게 살을 붙여 표기한 것은 바로 반도역사이다.
프랑스어로 "chine"를 중국이라고 해석하는데 이것은 신(新)"청"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청
淸:신중국어"칭(qing)"
Qing:영어: "깅", 프랑스어:긴즈, 한국어:킨
chine 영어:"차인", 프랑스: "신(新)"
Chine
Origin: from Old French eschine, of Germanic origin; compare Old High German scina needle, shinbone; see shin1
eschine Chine (cut of meat) (Montagne).
The word is in still use in central Southern
chines [French]좁다,
a deep narrow ravine
강이 부드러운 사암 또는 점토의 해안 절벽을 침식하면서 바다로 흘러가파른 강 계곡 .
즉 당시 프랑스가 "chine" 라고 하는 곳은 멕시코일 확률이 높은 것은 바로 후금(喉衿:後金)이라는 목구멍을 말하는 것으로 만주(滿洲)이고 청(淸)이며 북남아메리카대륙 중앙이니 가운데 중(中)을 사용하여 중국(chinese)이라고 칭한 것이 틀림이 없다.
위 chine 를 풀이한 영어자료를 보아도 chine 은 중국이라고 할 수 없는 풀이임을 알 수 있고 여전히 "중앙남부(central Southern)"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음을 알게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그러니 프랑스극동함대가 있었던 곳은 멕시코만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가 제독이었는지 사령관이었는지 아니면 해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들에 의해 강탈되었다고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고 왜 하필 정조가 만든 외규장각 도서가 보관된 강화도인가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외규장도서를 목적으로 해적들은 침략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해석을 하겠금 유도한 것이라면 당시 서세가 노렸을 또 다른 목적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때문에 지금부터 루이14세와 숙종, 루이15세와 영조, 루이16세와 정조관계를 풀어봄에 있어 매우 적절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놀랍게도 하나같이 똑 같은 인물들에서 똑같은 역사를 발견한다는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할 수 있다.
조선은 1674부터 1800년도까지 126년간이고 프랑스는 1643년부터 1793년까지 150년간의 이야기다.
이것은 아마도 세계삼한역사 관점에서도 키 포인트(key point)적인 사실이다.
일본이나 미국이나 서구제국들이 한국에 외규장각 도서 한국필사본(外奎章閣圖書, les manuscrits coréens)를 반환한다 하여도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기에 반응을 하지 않했던 것이고 당사자 프랑스 역시 이것을 돌려주어도 그들의 역사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장하고 돌려 준 것이라고 할 때 이미 반환된 의궤는 당시의 역사를 연결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국에 반환한 것은 한국판이다.
한국판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실본 외규장각 도서는 한국에 반환 한 것이 아니라 다른 그 무엇인가가 미국이나 프랑스에 보관 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외규장각 도서 중 의궤(儀軌)말고 또다른 무엇이 있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고 어떤 형태인지 우리는 도무지 알 수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바로 정조대의 실체의 기록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동시에 불태워 없애 버렸다는 기록을 남겨야 했고 한반도에 가짜 규장각과 가공 서적 5,000여권 이상의 책이 존재한 것처럼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며 강탈해 갔다고 하는 의궤(儀軌) 340여책 또한 기록으로 필요하였을 것이고 그와 함께 강탈이란 표현에 걸 맞게 은궤 수천량을 있었던 것처럼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강화도가 있었다고 판단되는 곳에 금과 은이 엄청나게 많이 산출지역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프랑스 그때 세력들은 모두 회사요원을 가장한 약탈자 해적들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루이14세의 아들 루이15세는 미시시피강에 미시시피계획을 세워 거품경제를 야기시킨 역사가 있다.
바로 미시시피회사 요원일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근세기에 벌어졌던 세기의 역사음모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외규장각이란 실체도 은궤도 5,000여권되는 서책도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중요한 것은 바로 1782년 2월 정조(正祖,1752-1800, 재위:1776-1800)가 만들었다는 왕실 관련서적이라는 사실이다.
나머지는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없지만 고스란히 빼버리고 의궤만 강조한 것이다.
강화도는 놀랍게도 블랙힐스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렇게 된다면 프랑스가 있었던 곳도 아메리카일 가능성이 많고 프랑스 극동함대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1812-1882)제독의 행방 역시 극동지역이 아닌 멕시코만 일대에서 활동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이미 밝혀진 것과 다름이 없다.
이렇게 볼 때 캄캄하고 막연했던 실제 지리적으로도 세계삼한역사가 완성되는 것이며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극비의 왕실 관련서적을 추적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실제 조선의궤(儀軌) 340 여 책은 적어도 우리가 반환 받은 것과 또 다른 근세기 조선을 밝힐 수 있는 사서가 있었겠지만 그것을 우리가 반환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정조가 만든 왕실서적은 어찌보면 프랑스 대혁명에서 단두대 이슬로 사라진 루이16세와 연결될 수 있는 사료일 수도 있다.
그것이 지금의 프랑스 왕궁에서 나온 서적이든, 스페인왕궁서적이든, 오스트리아왕궁서적이든, 이 모든 것을 포함한 그래서 그들이 밝힐 수조차 없는 엄청난 것임을 알게 하지만 현재로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만약 이런 것들이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만 있다면 또 한번 대변혁이 일어나야 하고 결국 세상이 뒤집어 지지 않으면 안된다.
삼한역사가 유럽역사를 대신하였다는 사실은 곧 밝혀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조(正祖, 1752-1800, 재위:1776-1800)가 강화도란 곳에 규장각을 세우고 이 의궤를 보관했다는 기록은 옛 프랑스의 기록을 감추고 한반도 조선의 기록으로 대체하기 위한 술책이라고 보면 맞다.
조선과 프랑스의 밀접한 역사관계를 떼어 놓기 위해 벌린 가공 역사 사건이라고 추측할 수 있으며 거의 이 추측이 99% 확실하다고 단언 할 수 있는 문제이다.
만약 한반도에 이러한 가공기록이 없으면 유럽사가 아마도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역사전쟁에서 승리한 서구세력들의 말할 수 없는 고민이 묻어 있었다는 것이고 만약 실제 이런 식으로 역사음모가 있었다면 그들이 숨긴 것은 그들의 역사 뿌리조차 흔들 수밖에 없는 판도라 상자란 사실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실제 정조가 만든 외규장각 속에는 실체를 알 수 없겠으나 이와같이 중대한 역사유물들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게 한다.
풀어놓고 보니 실로 놀라운 사실이다.
조선왕조 |
프랑스왕조 | ||||
제왕 |
생몰년도 |
재위년도 |
제왕 |
생몰년도 |
재위년도 |
숙종(肅宗) |
1661-1720 |
1674-1720 |
루이14세 (Louis XIV) |
1638-1715 |
1643-1715 |
경종(景宗) |
1688-1724 |
1720-1724 |
도팽 루이 (Dauphin) |
1661-1711 |
|
영조(英祖) |
1694-1776 |
1724-1776 |
루이15세 (Louis XIV) |
1710-1774 |
1715-1774 |
사도세자 (莊祖) |
1735-1762 |
|
페르디낭 (Dauphin) |
1729-1765 |
|
정조(正祖) |
1752-1800 |
1776-1800 |
루이16세 (Louis XIV) |
1754-1793 |
1774-1793 |
숙종과 루이14세
숙종(肅宗, 1661-1720 재위:1674-1720)
루이14세(Louis XIV, 1638-1715 재위:1643-1715)
프랑스제국에서 강력한 왕조를 건설한 "짐이 곧 국가니라" 라 하던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재위:1654-1715)는 태양왕(Louis the Great or the Sun King)이라 하였는데 여기서부터 삼한의 정체성이 갑자기 프랑스로 넘어갔다는 의심을 하게 하는 이야기다.
그가 제천사상(天地神明)을 가지고 태양신을 섬기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그를 태양왕이라 했을 것이다.
하늘을 섬기는 것은 천신(天神), 태양신(太陽神 Solar deity, Sun god)을 섬긴다는 것인데 켈트(Cath)족 광명(光明)의 신(神), 루 라바다(Lug or Lugh, Lugh Lámhfhada)가 있고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의 미트라(Mithra)가 있으며 이집트의 태양신-라(RA)가 있고, 그리스의 태양신-헬리오스(Helios), 잉카의 태양신-인티(inti), 인도의 태양신-비슈누(Visnu)가 있다.
이것은 어느 나라나 꼭 지점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꼭지점을 나는 감히 말하길 삼한의 제천사상(祭天思想:天地神明)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고조선의 태양신(太陽神)인 환인(桓因)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이다.
또한 고구려는 태양신 복희(伏羲), 태양의 흑점을 자오지(子烏地)라고 하여 삼족오(三足烏)가 벽화에 새겨져 있음을 확인 할 수가 있다.
몸은 뱀과 같고 머리는 사람의 머리를 하고 있어서 해, 달과 같은 큰 성덕을 베풀며 끝이 없이 넓고 큰 하늘과 같다는 뜻 대호(大昊), 대공(大空)이라고도 하는 복희(伏犧)는 이러한 상징성으로 알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삼한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기타 삼한의 나라 전부가 이러한 사상에 몰입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특히 제왕은 제천사상(祭天思想)으로 백성을 다스렸음을 알 수 있다.
본 블로그에서 밝힌 글로서 고구려는 이미 고국양왕(재위:384-392)때 불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네스토리우스교 등 다양한 종교를 널리 인정하고 양성하여 문화를 발전시켰다 한 것을 보면 북유럽을 근거로 하는 켈트족(Celts)이 지향하던 다종교, 다신교(多神敎)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근거라고 할 수가 있다.
부여(夫餘, 부리아트, Buryats)는 횃불처럼 밝다고 해서 "불이"였는데 불->불이->부리(부여)->부리야그->부리야트->불가(bulga)로 변한 것이라 하고 또 부여의 해모수를 프로메테우수(Prometheus) 즉 그리스 종교에서 그리스신화의 신족(神族) 티탄족(titan)출신의 최고 책략가이며 불의 신이라고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은 불이 고구려와 연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고구려는 불을 숭상하는 민족으로서 부여로 부터 출발하는데 불을 숭상하는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가 종교의 시원이라고 하고 불의 신앙과 어울리는 태양신 미트라(Mithra)을 숭상한 것이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불의 시원과도 연결된다.
안함로(安含老:579-640)가 쓴(撰) 삼성기(三聖紀全) 상편 원문에서 우리 삼한역사가 태동한 장면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매우 중요한 문맥이라고 할 수 있다.
日降童女童男八百於黑水白山之地於是桓因亦以監群居于天界부石發火始敎熱食謂之桓國是謂天帝桓因氏亦稱安巴堅也傳七世年代不可考也
내용을 보면 "어느 날인가 동남동녀 800이 흑수(黑水)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왔는데 이에 환인(桓因)은 또한 감군(監郡)으로서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고 이를 환국(桓國)이라 하며 그를 가리켜 천제환인(天帝桓因) 씨(氏:세습관명)라고 하면서 또한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하였으니 환인은 일곱 대를 전하였지만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란 내용이다.
불의 시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삼한의 천제사상은 프랑스의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divine right of kings)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즉 프랑스 루이 14세는 왕권신수설을 믿었기에 국왕의 권력은 신(神)으로부터 받는 것이라는 학설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태양왕이라고 하는 것은 제천사상을 통한 삼한의 왕임을 알게 하는 것들이다.
루이 14세는 호전적이고 침략을 많이 했다는 제왕이다.
그가 재위시 벌렸던 전쟁을 보면 주요전쟁 3차례나 있었는데 프랑스-네덜란드 전쟁(Franco-Dutch War:1672-1678),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War of the League of Augsburg,1688-1697)과 스페인 왕위계승전쟁(The War of the Spanish Succession, 1701–1714)이 있었다.
그리고 2번의 작은 분쟁으로서 상속 전쟁(相續戰爭:War of Devolution:1667-1668), 재결합 전쟁(War of the Reunions;1683-1684)을 치렀다.
1638년 태어나 13세 때 루이13세가 사망하여 겨우 5살 때 왕위에 오르고 나이가 어린 탓에 섭정이 불가피하여 모후 안 도트리슈(Anne of Austria,1601-1666)는 국사 운영을 로마 가톨릭 추기경인 쥘 마자랭(Jules Mazarin,1602-1661)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 후 마자랭이 죽은 1661년에 루이14세가 22살 되던 해부터 친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65-1667)의 틈을 타서, 1667년과 그 다음해에 걸쳐 베스트팔렌조약(Peace of Westfalen, 1648)으로 독립한 네덜란드에 침입했다. 또한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72-1674)때에도 네덜란드에 침입하여(1672-1678)많은 영토를 빼앗았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네덜란드를 지원한 독일로부터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지방도 획득하였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당시 네덜란드를 포르투갈 후신으로 보아 일본의 덕천가강과 연결된다고 한 적이 있다.
조선 숙종은 아마도 일본영토를 계속적을 침략하거나 침공하여 괴롭혔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루이 14세에 의한 침략전쟁은 멈추지 않았던 모양이다.
독일남서부 팔츠(Pfalz)지방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하며 침입했기 때문에 독일은 영국, 네덜란드,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어 대항하였기 때문에 이른바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War of the League of Augsburg, 1688-1697)이라고도 불리는 팔츠계승전쟁(Nine Years' War, 1688-1697)이 10년 동안 계속되었다.
식민지 문제로 영국과 세력다툼을 벌여 싸우게 되는 제2차 백년전쟁(Second Hundred Years War, 1689-1815)이 발발된 것도 루이 14세 때였다.
또한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The War of the Spanish Succession,1701–1714)에 뛰어드는 등 루이14세는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에서 초반 전세는 프랑스에 유리했으나 점차 밀리게 되었고, 결국 루이14세의 손자 스페인의 펠리페 5세(Felipe V, 1683-1746)의 스페인 왕위만이 인정되어 프랑스가 얻은 이득은 없었던 전쟁이라 한다.
그러자 모든 도시에 거지가 들끓고 굶어 죽거나 전염병에 걸려 죽은 민중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하고 당시 프랑스인의 평균 수명은 25살 이하였으며, 파리를 비롯한 모든 도시에는 거지들이 들끓었다고 하니 피폐한 상황이 대단한 것 같다. 더구나 전쟁수행에 필요한 세금 때문에 민중들은 경제적으로 수탈당했고 이 같은 상황에서도 계속적으로 전쟁을 치루었으니 나라가 평안할 수 없을 것은 당연했다.
실제로 이러했다면 영토확장은 대단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유럽대륙에는 그러한 낌새가 없다.
당시 조선 숙종시 천연두가 돌았던 상황에서 [한국일보, 2007년 11월 04일]보도를 보면 조선 숙종 때 군인 3,800여명의 자세한 신상정보를 담은 병적기록부가 발견된 사실에서 수염은 적고 얼굴엔 마마자국있는 군인이 18%나 된다는 기록을 보면 프랑스가 겪었던 천연두와 같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루이 14세는 이 천연두 때문에 루이14세 장남 루이 드 프랑스(Louis de France, 1661-1711)
와 그의 아들 루이(1682-1712), 루이 15세의 생모 사보이의 마리 아델라이드(Marie Adélaïde de Savoie, 1685-1712), 루이 15세 형 브르타뉴 공작 루이(1704.1.25-1705.4.13)등이 죽었다.
때문에 루이14세는 이러한 충격때문에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너는 이웃 나라와 싸우지 말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써라. 이 점에서 내가 밟은 길을 따르지 말라. 국민들의 고통을 덜어 주는 정치를 하여라. 불행하게도 내가 행하지 못한 모든 일을 해주기 바란다”라는 간곡한 유언과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가 죽으면서 루이15세에게 물려준 영토가 어느정도가 되었을까?
루이 14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스 국민들은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려온 해방을 주신 하느님 앞에 감사하며 크게 기뻐했다’고 근세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때부터 프랑스에는 혁명의 싹이 움터서 100년 뒤에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조선 숙종(肅宗)은 어땠을까
왕권은 강화되었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사대부들의 착취에 시달렸다.
숙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한 당파에게 권력을 주었으나 그것을 이용한 상대당파를 누르는 변칙적인 정치 전략을 펴기도 했다 한다.
사대부 착취라면 루이14세가 전쟁으로 인한 세금으로 귀족들을 수탈했다는 사실과 일맥 한다.
1694년(숙종 20년)부터 1720년(숙종 46년)에 이르는 기간은 전 세계적으로도 소빙기(小氷期)로 불리는 냉해가 계속되었는데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잇단 흉년과 홍수·질병으로 인구는 오히려 감소되어 1693년에서 1699년 사이에 약 142만 명의 인구 감소 현상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다.
6년동안 감소된 인구가 142만이니 총인구는 얼마겠는가?
백과사전을 보면 당시 숙종43년기준 1,560,561(호), 6,846,568(구)16,347,000명으로 잡고 있다.
그러니 거의 10%인구가 홍수와 질병으로 사라진 것이다.
프랑스 루이14세 때 백성들이 힘들었다는 사실을 볼 때 연결될 수 있는 이야기다.
숙종(재위:1674-1720)대 특히 지진이 집중적으로 빈번하게 발생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숙종1년(1675) 5월 21일(기묘)에 보면 평안도에 한재와 황충의 재변이 있었다 하여 황충피해도 대단했던 것으로 나온다.
이와같은 천재지변에 왕권 강화와 백성들이 따로 노는 괴리현상이 심해졌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루이14세기 죽었다는 소식을 백성들이 듣고 오히려 기뻐했다는 내용과 흡사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조선 숙종과 프랑스의 루이14세에서 총체적으로 볼 때 정치적으로 조선에서는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이 있었던 것과 대비되는 것은 프랑스의 루이 14세 3차례 큰 전쟁과 같고 조선에서 두 차례 예송사건은 프랑스의 2번의 작은 분쟁으로서 상속전쟁과 재결합전쟁이 있어 같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숙종때도 천연두가 엄청나게 성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루이14세때 그의 대를 이를 왕족 4명 모두를 천연두로 잃어버린 사실에서 같음을 알 수가 있다.
천연두(天然痘, Smallpox)로 본 박제가(朴齊家)는 에드워드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435
1680 숙종 6년 9월 도하에 두진(마마)이 크게 치열하다.
1680 숙종 6년 10월 중궁이 편찮은 징후가 있었는데 증세가 두창(痘瘡)이다.
1680 숙종 6년 10월 중궁이 두진을 앓았는데 증후가 분명해지자 임금은 창경궁으로 이어하다.
1693 숙종 19년 8월 제주도에 대소두(대소두) 괴질 환자가 1,950명이나 되어 기도를 행하게 하다.
1699 숙종 25년 12월 이때 전염병이 오히려 더욱 치열하다. 서울에 죽은 자 3,900명, 각 도에는 250,700여명이 되다
1710 숙종 36년 2월 임금이 두창(痘瘡)을 앓다.
위 숙종대 천연두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유럽대륙에 전염병이 있다면 아시아 동쪽 끝 한반도에도 전염병이 있어야 하는가?
당치않다.
요사이처럼 배나 비행기로 왔다갔다 하지 않는 이상 그런식으로 도식을 그리는 것은 옳지 않다.
전혀 달라야 하지만 거의 똑 같은 내용을 두 왕조에게 볼 수 있다는 점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반도역사가 사건을 만들면서 픽션을 가미한 한것이라 볼 때 똑같이 내용을 만들리가 만무하다.
근세기에 역사를 만든 주체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거의 직선거리 9250km(23,500리)거리가 떨어져 있는 조선과 프랑스 역사 주요 내용들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맞추듯이 똑같게 만들리가 없다.
이것은 다르지 않는 역사의 원본을 놓고 한쪽은 한문으로 새롭게 번역하고 한쪽은 프랑스어로 새롭게 번역한 이유 말고는 다르게 생각할 수 없으며 이것은 단언하지만 결코 같은 역사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계속]조선과 프랑스의 숙명적 만남(2)영조와 루이15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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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환국(庚申換局, 1680)경신출척(庚申黜陟)
경신년인 1680년 3월 당시 남인의 영수이며 영의정인 허적(許積)의 집에 그의 조부 허잠(許潛)을 위한 연시연(延諡宴:시호를 받은 데 대한 잔치)이 있었다.
그날 비가 오자 숙종은 궁중에서 쓰는 용봉차일(龍鳳遮日:기름을 칠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든 천막)을 보내려고 하였으나 벌써 허적이 가져간 뒤였다. 숙종은 노하여 허적의 집을 염탐하게 하였는데 남인은 다 모였으나 서인은 김만기, 신여철(申汝哲)등 몇 사람뿐이었다. 이에 노한 숙종은 철원(鐵原)에 귀양 갔던 김수항(金壽恒)을 불러 영의정으로 삼고, 조정(朝廷)의 요직을 모두 서인으로 바꾸는 한편, 이조판서 이원정(李元禎)의 관작(官爵)을 삭탈하여 문 밖으로 내쫓으라고 하였다.
다음 달인 4월 정원로(鄭元老)의 고변(告變)으로 허견(許堅)의 역모가 적발되었다.
이른바 ‘삼복의 변(三福之變)’으로, 인조의 손자이며 숙종의 5촌인 복창군(福昌君),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 3형제가 허견과 결탁하여 역모하였다는 것이다.
기사환국(己巳換局, 1689)
1680년(숙종6)의 경신출척(庚申黜陟)으로 실세하였던 남인(南人)이 1689년 원자정호(元子定號) 문제로 숙종의 환심을 사서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일이다.
갑술환국(甲戌換局, 1694)
1694년(숙종 20) 폐비 민씨(廢妃閔氏)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南人)이 화를 입어 실권(失權)하고 소론과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 사건이다.
1차 예송
1659년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 대비는 상복을 입어야만 했다. 그런데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은 효종이 둘째아들이라며 자의 대비가 1년 동안 상복을 입을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서인과 대립하던 남인은 효종이 왕이었다며 3년을 주장했다.
2차 예송
1674년 현종의 어머니, 즉 효종의 부인이 죽자 서인은 둘째 며느리의 사망이라며 자의 대비의 상복 착용 기간으로 9개월을, 남인은 왕비의 사망이라며 1년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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