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릇 산자고(山茨菰:Scilla)로 본 신라(新羅)
글쓴이:한부울
서두
세계삼한역사에서 일본과 러시아는 무엇인가?
로마노프왕조는 러시아라고 할 수 없다.
신라(新羅)를 신성로마제국으로 보는 이유
오스트리아는 삼한역사의 땅이다.
산자고(山茨菰:Scilla) 즉 무릇이란?
신라는 또다른 이름으로 유럽대륙에 존재하였다.
결어
서두
삼한의 신라는 "실라(scilla)"라는 이름으로 지중해에 실존했다는 사실이다.
삼한(三韓)을 고대 세계인들이 실라"scilla", 코라이"Korai" 등으로 불렀다는 것은 서양사람들에 의해 밝혀진 내용으로서 로마나 그리스와 직결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아래 자료는 1884년 서울미국공사관으로 근무한 오하이오주(Ohio州) 델라웨어(Delaware)출신 알렌(Horace Newton Allen, 安連; 1858-1932)의 한국휘보[The Korean Repository]1892년 5월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As to the name of the country : It was in ancient times called Scilla, Korai, and for over five hundred years it was Chosen. Nov^ it is Tai Han. But to the world generally it will continue to be called Korea. Although the Royal Geographical Society has decided that Korea should be spelled with a K, the British and some other Governments still use C.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uses K, hence I have done the same, and I prefer it. I have intended to omit the hyphen from Korean compound words standing for names of places.
"이 나라의 이름은 고대에는 Scilla, Korai였고 500여년동안 ‘Chosen’이었다. 지금은 ‘Tai Han’이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Korea’로 계속 부르고 있다. 영국왕립지리학회(Royal Geographical Society, 英國王立地理學協會:1859)는 'Korea'가 철자 ‘K’로 시작되어야 한다고 결정했지만 앞에 영국과 다른 브리티시(The British)외 몇몇 다른 나라들은 여전히‘C’를 사용하고 있다. 미국정부는 ‘K’를 사용한다. 때문에 나도 그렇게 사용한다. 그리고 지명에서 복합적인 단어 코리아는 생략한다."["Preface to first edition : A Chronological Index" 1901, Korea: Fact and Fancy, 1904]는 내용이다.
알렌이 서울미국공사관에 근무한 시기가 1884년이면 대조선이 해체되고 난 후 3년이라는 시간밖에 흐르지 않는 시기이기 때문에 아마도 코리아"COREA"란 명칭에 신흥세력들이 이런 저런 궁리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꽤 많이도 신경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때부터 코리아 명칭도 신경쓰였겠지만 신흥세력들은 코리아를 어디에 묶을 둘 것인가가 더 중요하거나 그것을 위해 여러가지 극단적인 행동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되며 아마도 코리아인들은 이 때는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서부쪽으로 내몰렸을 가능성과 또 서부만을 "코리아"라고 지칭하여 불렀을 것이란 판단을 할 수가 있다.
이것에 대한 글은 곧 올릴 예정이다.
중요한 것은 코리아 국명에서 K, 혹은 C, 의 대문자를 앞에 붙이는데 1859년 설립된 영국왕립지리학회(Royal Geographical Society, 英國王立地理學協會)는 'K'라 해야 한다는 것을 고잡하였다는 사실이 있고 그 다음문장~ the British and some other Governments still use C.에는 정작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브리티시"와 그외 다른 정부에서는 끝까지 영국왕립지리학회를 따르지 않고 "C" 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영국왕립지리학회가 비록 왕립이라고 하였지만 왕립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고 잉글랜드왕가를 이었다고 알고 있는 "브리티시"의 체제가 달랐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왕립이라고 하였지만 "지리학회"는 신흥세력들의 자본력에 의해 조직된 단체라고 해야 하고 이런 단체와 회사들이 후일 본이 전혀 다른 세계사를 만들거나 좌지우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지만 시기적으로 보면 당시에는 한정된 영향력만을 행사한 것임도 알 수가 있다.
당시 "브리티시"라고 함은 미국독립전쟁의 미국상대 권력주체로서 바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1707-1801)에 이은 그레이트브리튼아일랜드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1800-1922)어야 하는데 빅토리아(Victoria:1837–1901)부터 변질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1890년에 영국인들이 “COREAN” 시대(Era)라고 한 의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88"에서 보면 우리가 상상도 못할 명칭들이 코리아 뒤에 따라 붙는데 얼마나 영향력이 컸으면 시대라고까지 하였겠는가?
그레이트브리튼아일랜드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1800-1922)은 부르몽왕가(House of Bourbon)가 가진 지배력을 그대로 인수하는 과정에 나타나 시기적으로 조선 순조(純祖1790-1834,재위:1800-1834)계보와 일치하고 있다.
이때부터 반도역사에는 왕권이 약해지면서 외척들의 권한이 커지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외척이라는 것은 신흥세력과 비교할 수 있는 것으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조선계보에서 안동김씨세도정치와 흡사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앵글로(Anglo)와 잉글리시(English)가 다르고 근세기에 앵그로와 잉글리시가 합친 것이 브리티시 잉글리쉬(Anglo+English=British English)라고 하였다면 앵글로는 브리티시라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앵글로 스코틀랜드(Anglo-Scot)와 앵글로 아일랜드(Anglo-irsh) 그리고 근세기에 나타나는 앵글로 메티스(Anglo-Metis)까지 이들은 대체로 안와상융기(眼窩上隆起, supraorbital torus)가 발달하였고 코가 좁고 높은 형질이 많이 보이는 백색인종, 유럽인종을 이르는 코카소이드(Caucasoid)적 특징이 있는 하플로그룹(Haplogroup)의 R1로 나타나지만 놀랍게도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에 있었던 인디어들에게 이 DNA 가 나타나는 특이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본래 유럽인들의 대명사로 알려진 앵글로(Anglo)는 라틴어 앵글리아(Anglia)에서 파생된 것으로 잉글랜드 동부(eastern part of England)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면 동쪽 "해 뜨는 땅"과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DNA "R1"은 캐나다 동북부의 오지브웨족(Ojibwe:79%), 캐나다 서북부 치페와이언족(Chipewyan:62%), 오클라호마(Oklahoma)의 세미놀족(Seminole:50%)와 체로키(Cherokee:47%), 북아메리카대륙 북서부 의 도그리브족(Dogrib people:40%)에 높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mixed-blood half-breed R1b-메티스인(metis or Anglo-Metis)
이에 관계되는 자료를 보면 놀라운 이야기가 있는데 정작 R1b가 높은 빈도인 현 유럽대륙의 피레네산맥(Pyrenees Mts)에 사는 종족 바스크인(Basques)은 언어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나 전혀 다른 계통의 언어인 고립어(孤立語, language isolate)에 속한다는 사실과 서유럽에는 "R1b"가 주류라고 하지만 언어는 인도유럽어라는 사실에서 언어와 하플로그룹이 불일치하는 상황을 두고 미국의 생물학박사 스펜서 웰스(Spencer Wells)는 인도유럽어가 다른 어족을 대체했을 가능성을 말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말은 인도유럽어가 근세기에 어떤 언어를 대체하기위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로 이해된다.
여기세 바로 비교언어학적 고립어로서 바스크어 이외 한반도어와 아이누어(Ainu)를 꼽고 있다는 사실이고 동아시아 신중국어도 포함된다는 주장에서 냉정하게 판단할 때 근세기때 갑자기 어디서인가 옮겨졌던가 아니면 인위적으로 조정된 언어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나는 솔직히 사멸되었다고 하는 언어 산스크리트어를 꼽고 있다.
본 블로그 글 "어멀리 켐프(Emily Georgiana Kemp)가 방문한 코리아. http://blog.daum.net/han0114/17050676 "에서 보면 스코틀랜드인 그녀(she)의 방문기가 1911년 발행된 것을 감안할 때 이미 그 이전시기에 그녀는 코리아를 방문한 것이 되는데 그곳의 코리아인들은 로마자이며 25자인 스페인어 즉 라틴어를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더불어 학문은 모두 한자를 사용하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알렌이 서울미국공사관에 근무한 때는 사회상황이 이러했음을 알 수 있고 거의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라틴어와 한자를 공용했다는 것도 알 수 있으며 라틴어 이름과 한문이름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특히 사서에 등장하는 지명은 한문으로 모두 명명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가 있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미국공사관에 근무한 알렌(Horace Newton Allen)역시 영어이름 이외 안련(安連)이라는 한문이름을 코리아정부로부터 내려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라틴어 이름이나 영어이름 이외 한문이름을 같이 사용하였다는 것은 당시 코리아의 생활관습에서 나온 것이라고 진단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알렌이 말한 것처럼 고대로부터 삼한을 'Korai'라 한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특별하게 'scilla'라 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던 사실이다.
정확하게 고려(高麗)는 korai 로 신라(新羅)는 scilla 로 지칭한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지만 고려와 신라가 삼한이라는 사실과 그것이 코리아라는 사실까지 세계인들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도 할 수가 있다.
시라(尸羅), 시라(斯羅), 신로(新盧), 설라(薛羅)까지의 음이 동일하다고 보기 때문에 신라(新羅)를 "scilla" 라 했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고려 북경(北京)에서 실라“xila”라고 발음한 것이라면 그것이 곧 희랍(希臘) 즉 그리스(Greece)를 말하는 것임도 우리는 간접적으로 알 수가 있는 이야기다.
희랍(希臘)은 근세기에 나온 명칭에서 실제로 실라(Xila)가 고대 명칭의 한문 발음이 북경발음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어디에 있었던 간에 그리스를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신라를 실라(Scilla) 지칭했다는 것은 그렇게 놀랄만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알렌이 이렇게 기록한 것은 그가 그동안 배웠던 상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Scilla"는 곧 "그리스"이고 "희랍"이라는 사실은 세계인들이 모두 상식처럼 알고 있었다고 판단되는 기록이다.
이 놀라운 사실은 이 글 끝 마무리 할 때 명확하게 밝혀지겠지만 지중해연안(地中海沿岸:Mediterranean Sea Coast)이 원산지이며 "무릇"이라고 하는 산자고(山茨菰)의 속명(屬名:genus)이 바로 "Scilla"란 사실은 이를 매우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시말해 무릇이란 산자고(山茨菰)가 생산되는 지중해연안에 신라(新羅:scilla)가 있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밝히고 있는 명칭이다.
세계삼한역사에서 일본과 러시아는 무엇인가?
이러하다면 이번 글을 통해 지금까지 유럽사의 주위만 멤 돌았던 것에서 벗어나 좀 더 유럽사 깊숙하게 삼한역사를 밀어 넣을 수가 있다.
유럽사에 깊숙하게 들어가려고 하면 먼저 장해로 등장하는 것은 동양사 열도의 일본(日本)이며 또한 아시아대륙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면서 유럽사에 속하는 아라사(俄羅斯)또는 로서아(露西亞)라고 하는 러시아가 있다.
두 나라는 근세기에 무엇때문인지 알 수없지만 패권다툼의 충돌(Russo-Japanese War:1904-1905)까지 있었던 상대이다.
먼저 세계삼한역사에서 일본역사를 보면 아무리 사실화라겨고 하여도 들어날 수밖에 없는 것은 생성부터시작하여 세계삼한역사에 들어붙은 기생 역사라는 특징이다.
일본은 삼한을 근거로 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명칭이다.
주로 삼한만을 대상으로 약탈과노략질을 하던 왜구와 해적들의 은밀한 은신처 역할을 하면서 그들을 이용하여 자본력을 증대시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자본력을 바탕으로 왜구와 해적들을 비호하는 것을 넘어 16세기말엽에는 마침내 용병까지 동원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키며 삼한의 대조선에게 정치적으로 반란까지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일본이란 국명이다.
하지만 일본역사가 근세기에 동양사와 더불어 만들어진 것이라면 실제로 일본이란 국명으로 하여금 발생한 실제 역사는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다고 본다.
물론 현재까지 실제로 존재한 것처럼 삼한역사의 발목을 잡고 꼼짝달싹할 수 없이 묶고 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본이지만 우리가 풀어할 수수께끼가 이 일본이란 명칭에 모두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임진왜란은 일본이란 이름 보단 왜(倭)가 그들을 표시하는 대명사이기 때문에 일단 역사속에 정식 나라가 아니었다.
때문에 대조선에서는 대조선 내에서 발생한 반란이라 한 것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당시까지 일본은 대조선으로부터 정식적인 국명을 부여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임진왜란이 종결 된 후 반란을 일으킨 괴수 포르투갈인 풍신수길(豊臣秀吉)은 타살되었다고 보는데 이 사건을 나름대로 잘 마무리한자가 바로 네덜란드인 덕천가강(德川家康)이라 할 수있으며 이러한 공적을 대조선에서 인정하여 그를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으로 용인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1617년에 비로서 정식으로 국호가 인정된 것임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일본내에는 포르투갈, 네덜란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더 나아가 본 블로그 글 "조선패모(朝鮮貝母)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3 "에서 일본구주(日本九州)는 영국남부 또는 유럽북부이라고 했듯이 초기 잉글랜드라고 하는 엘리자베스1세(Elizabeth I, 1533-1603,재위:1558-1603)때도 이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역사상황을 들여다 보면 포르투갈인 풍신수길은 간절하게 대조선으로부터 통교 허락이 떨어지길 한사코 원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더 나아가 그들의 나라가 조선에게 용인 또는 인정받도록 하고자 했거나 정식외교권을 강력하게 요구한 것에서 그들의 반란 원인과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그렇지만 포르투갈인이 일으킨 임진왜란과 다르게 네덜란드인 덕천가강은 이 반란 사건을 수습하려고 애를 쓰며 동시에 반란의 주모자를 정리하고 환경을 쇄신하면서 조선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하려 애를 썼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반도역사를 토대로 한 덕천가강이 취한 조치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덕천가강(德川家康)은 1598년 풍신수길(豐臣秀吉)이 무모하게 벌린 임진난의 패전으로 불만에 가득한 다이묘(大名:藩主)를 이용 풍신수길을 척살(묘를 파헤치거나 사라지게 한 상태)하게 하고 난을 일으킨 공조세력들을 처단하면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였으며 또한 풍신수길(豐臣秀吉)의 허수아비노릇을 하던 일본 왕을 내쫓아 심기가 불편하던 대조선을 무마하면서 정식인가를 얻어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어 에도(江戶)에서 막부정권(幕府政權)의 쇼군(將軍)이 되었으며 그렇듯 대조선의 통교를 허락받는데 시간이 걸렸다고 하였으나 1607년 가서 비로서 대조선에서 통신사가 파견되었고 막부정부를 대조선에서 정식으로 인정하게 됨에 따라 그것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덕천가강(德川家康)은 선교사, 평신도 등 26명을 나가사키에서 화형으로 처형함으로써 박해를 시작하였고 대조선에 적대행위를 한 가톨릭에 대해서도 1612년 가톨릭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려 강력한 박해정책으로 일관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
당시 에스파냐나 포르투갈에서 온 예수회의 선교사들은 모두 필리핀 등으로 추방되었다고 하고, 신도들은 청동으로 제작한 성화를 밟는 것을 강요당하였다고 한다.
이때 필리핀은 동남아시아가 아닌 필리핀은 1898년 미서전쟁(美西戰爭:Spanish-American War)이 동시에 일어난 푸에르토리코(富港, 富島:Puerto Rico)라는 사실을 이미 본 블로그에서 진단했다.
하지만 네덜란드인 덕천가강의 에도막부정권은 대조선이 쇠약해지면서 동시에 흔들렸고 1868년 신흥세력으로 등장한 서양세력들의 근대화된 무기체제를 공여받은 개혁파군벌들에 의해 막부정권이 무너지게 된다.
이 때부터 카톨릭과 기독교를 앞세운 서양세력 앞잡이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보는 요지이지만 이상한 것은 역사 이러하다면 적어도 서양종교의 분포지수가 멕시코 정도가 되어야 하지만 정작 열도일본인들은 카톨릭이나 기독교를 믿는 신자가 극히 드물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불교종주국이라고 하는 현재 아시아대륙의 인도처럼 극소수의 불교신자를 가지고 있는 현상과 똑같은 이상함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 실제 보이는 상황과 역사사실과 다른 경우이다.
러시아는 어떤지 살펴보자.
러시아는 북아메리카대륙 서북부에서 활동하던 모피장사꾼들을 주축으로 1799년 본격적으로 설립된 러시아아메리카회사(Russian-American Company)로 부터 시작된 명칭이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는 로서아(露西亞)가 아니라 아라사(俄羅斯)가 되어야 맞다.
문제는 오해받을 수 있는 것으로 당시 미국과 러시아회사가 알레스카 땅을 서로 헐값으로 주고 받고 하면서 발생한 또 다른 조건의 영토주고받기가 있었을 것이란 짐작이다.
분명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이러한 정황이 여기저기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당시 미국, 영국, 프랑스 서양세력들은 러시아가 북아메리카대륙 남하 또는 남진하는 것에 상당한 부담을 안고 있었다고 하는 정황이 있다.
그래서 서양세력들은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비판하던 글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본래 러시아의 남진정책은 아시아 열도에 있던 일본이 호들갑 떨며 러시아를 상대로 난리치면서 발생되었다고 하는 러일전쟁이 아시아대륙이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의 서부에서 벌어진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1881년 대조선이 허물어지면서 공지라고 하여도 무방하였을 아시아대륙 북부의 땅을 대신 러시아가 차지하는 식으로 일사천리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것은 결국 미국과 영국, 프랑스 서양세력들이 이것을 묵인하거나 용인하면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러시아가 빠져나가도록 묵인 한 것이라고 보인다는 것이다.
때문에 러시아 땅이라고 하고 있지만 동아시아대륙과 북부 세베리가 까지의 영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러 자료들을 보면 당시 러시아라고 판단되는 종족들이 북아메리카대륙 미주리강유역에 상당하게 집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이것은 러시아회사의 영역으로 추상할 수 있으며 점점 북아메리카대륙 서북부에서 활동범위를 넓혀지며 남하할 시점에서 다급해진 북아메리카대륙 캐나다 동부에서 활동하던 영국의 허드슨 베이 회사(Hudson 's Bay Company)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남쪽에 진을 치게 되면서부터 충돌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은 더 이상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비하였다는 심각한 자료들을 목격한 내용과 엇 비슷한 이야기가 된다.
때문에 비록 일본군이 열도인으로 바뀌었다지만 코리아 영토에서 허드슨베이회사와 러시아아메리카회사간 충돌이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러일전쟁도 이런 도식에서 허구일 가능성이 많으며 러일전쟁의 엽서사진들을 보면 결코 한반도의 황해에서 벌어진 충돌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과 그림 삽화에서는 러시아인과 열도 일본인으로 각색하였지만 결코 열도 일본인과 당시 러시아제국과의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비일비재하다.
러시아의 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의 저서 새로운 역사(New Chronology)는 우리나라에서 아직 번역조차 되지 않고 있는 책이지만 그가 이 책에서 말하길 "고대그리스, 고대로마, 고대이집트를 포함한 고대사 모두가, 중세에 일어난 사건의 반영에 지나지 않았고, 또 중국이나 아랍의 역사 모두가 17 세기부터 18 세기(1600-1700)에 걸친 전체 역사에서 보았을 때 미미한 것으로서 1534년 8월 15일에 군인출신 로마 가톨릭 수사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 Ignatius of Loyola:1491-1556)에 의하여 창설되었다고 하는 예수회(Society of Jesus)의 음모"라 주장했다는 사실과 "또 예수그리스도( Jesus Christ, BC약 7~2-AD 약 26~36)는 12 세기의 인물로, 콘스탄틴노플(Constantinople)에서 기둥에 묶어세우고 못이 아닌 창으로 찔러 죽이던 책형(磔刑)형벌(刑罰)로 죽었다고 하는 것이나, 트로이아 전쟁(Troia 戰爭)과 십자군(Crusades, 1096-1270)은 실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무엇보다고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야기로서 "몽고제국의 징기스칸은 실은 러시아사람이었다"라고 하는 것 등 기존 특히 서양사의 근본을 부정하는 사람으로서 물리학과 수학의 박사이며, 모스크바 대학 수학과의 미분 기하학 부문의 책임자이기도 하며 기하학(幾何學:geometry), 토폴러지(Topology), 변분법(變分法:calculus of variations), 심플레틱 기하학(斜交Symplectic geometry), 해밀턴 역학(Hamilton力學)등의 학술논문을 다수 집필하였고 이를 토대로 "경험적 통계법(Empirical-statistical methods)"을 창시하여, 그것의 역사학에의 응용하였다는 사실에서 매우 특이한 방법으로 기존 세계사를 검증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적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주장에는 그도 현재 세계사가 불합리하게 만들어진 역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으로서 본 블로그가 제기하고 있는 세계삼한역사관점과 근원적인 흐름이 같다 할 수 있고 그가 한 핵심적인 주장에서 모두 공감가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의 주장에서 강한 여운을 남기는 것은 서양사는 한마디로 예수회(Society of Jesus)의 농간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사람인 그의 주장이 좀 이외라고 느껴지는 것은 바로 "징기스칸은 러시아 사람"이라는 의혹제기이다.
본 블로그 글 "조선패모(朝鮮貝母)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3 "에서 보듯이 세계삼한 역사사실을 그대로 적용한다 한다면 북아메리카대륙 북서부지역이 전통적으로 거란족계로 ‘아라사(鄂羅斯)’ 불리던 대비달자(大鼻㺚子) 몽고의 종락( 種落)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였으니 즉 러시아인 부락 또는 종락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大鼻㺚子。卽鄂羅斯。蒙古之別種。國在於沙漠外絶遠之地。其人身長。軀殼壯健。狀貌極凶悍獰惡。眼碧顴高。鼻隆如拳。紫髥鬱密。
위 이갑(李押1737-1795)의 연행기사(燕行記事), 문견잡기(聞見雜記)기록에 "대비달자(大鼻韃子)는 곧 아라사[鄂羅斯]인데, 몽고(蒙古)의 별종(別種)으로 나라가 사막(沙漠) 바깥 지극히 먼 땅에 있다. 그들은 키가 크고 몸이 건장(健壯)하여 모양(狀貌)이 극히 사납고 흉하며(凶悍) 모질고 악(獰惡)하게 생겼다. 눈은 푸르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코가 주먹같이 높고 붉은 수염이 텁수룩하게 났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눈이 푸르고 광대뼈가 튀어나왔고 높은 코 붉은 수염"등의 묘사는 현재 러시아인과 비슷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며 이것을 몽고의 별종(別種)이라 하였다.
별종(別種)이라 함은 같은 종류에 끼이지 못하는 다른 종(種)이라는 뜻인데 변종(變種)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신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삼한 별종(別種)이라는 단어와 다르지 않다고 여겨지는 면이 있다. 그리고 이 대비달자들이 웅거하던 곳이 사막(沙漠)에서 먼곳이라고 한 것을 보면 현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에 있는 사막말고 현재 러시아 땅 어디에도 그러한 곳을 지목할 수가 없다.
其(蒙古)爲人與淸人自別。兩顴高。眼碧髥紫。皆悍惡麤健。不思室居。雖極寒之時。只設帳於車上而宿於道路。朝乃拂雪而起。飢則只噉駱肉。又與狗同器而食。其性之勁悍醜惡如此。故淸人上下。皆畏而賤之。罵辱之際。比以蒙古則必勃然而怒。以爲大辱。其不以人類相待可知也。
또 이어지는 위 글을 보면 "몽고인은 청인과는 아주 다르게 생겼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푸르며 수염이 붉다. 그리고 모두 사납고 거칠며 집에서 살지 않는다. 아주 추운 때라도 단지 수레 위에 장막을 치고 길에서 자며 아침에는 눈을 털고 일어난다. 배가 고프면 다만 낙타의 고기를 먹을 뿐이고 또 개와 한그릇에 먹는다. 억세고 사납고(强悍), 추악(醜惡)하기가 이와 같기 때문에 청인(淸人)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천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청인을 꾸짖고 욕할 때, 그를 몽고(蒙古)에게 비교하면 반드시 불끈 성을 내고 큰 욕이라고 하니, 몽고인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라 한 것에서 푸른 눈의 털이 붉은 몽고인과 대비달자는 같은 종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문견잡기(聞見雜記)에 蒙古卽元之遺種。而古韃靼也。몽고(蒙古)는 곧 원(元)이 남긴 유종(遺種)으로 예전의 달단(韃靼) 즉 타타르(Tatars)라고까지 하였다.
몽고, 대비달자, 타타르 같은 종임도 알 수가 있다.
Tatar women of the Russian Caucasus, 1890s
몽고(蒙古)는 고려연합(United Corea)내 부락 또는 종족이라고 보아야 하며 고려내에는 타타르나 러시아사람같이 생긴 사람들이 여러부족, 종족으로 속해 있었을 것이란 분석도 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고려가 여러부족들을 통일시켜 연합체제를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어 때문에 코리아연합(United Corea)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러시아의 옛 지배층이라고 할 수 있는 터키계 유목민과 유목화된 러시아인으로 구성된 코사크(Cossack)를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가 있는데 터키 역시 고려라 할 수 있다.
또한 인종적인 문제에서 고려연합의 각 여러부족들의 생김새가 어떻게 생겼을까 실제로 궁금하지만 좀 더 넓게 생각하고 감안해야 하는 것은 19세기 중엽 코리아를 방문한 유태인계 독일인 오페르트의 삽화에 갓을 쓰고 망건을 한 코카소이드(Caucasoid)의 정체 역시 무시할 수 없기때문이다.
바로 DNA 염색체 하플로그룹(Human Y-chromosome DNA haplogroup)에서 'Haplogroup R1'은 북아메리카대륙 북동부 고대조선출몰지에서 나타나는 인종이라는데 있으며 이것은 어쩌면 북아메리카대륙 북서부의 백산(白山:Himālaya)에서 환인께서 나타나시어 이후 따뜻한 동쪽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전제할 때 아주 자연스러운 형태가 될 수 있다.
때문에 고대조선출몰지가 북아메리카대륙 북동부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염색체 'R1'에서 파생한 'R1b'가 러시아의 마지막 활제 니콜라이 2세(Nicholas II, 1868-1918,재위:1894-1917)에게 나타나는 염색체라는 사실이며 이 사람은 대조선이 해체된 1881년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아래 자료에도 북아메리카대륙 북동부에 염색체 R1b 가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염색체는 유럽과 바슈키르(Bashkir), 투르크족(Turkic peoples)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염색체이다.
The DNA tests that assisted in the identification of Czar Nicholas II of Russia found that he had haplogroup R1b.
위 표를 보면 세계유명인의 DNA 자료인데 로마노프왕가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뿐만아니라 R1b DNA 를 가진 유명인으로 고대조선출몰지라고 판단되는 북아메리카대륙 북동부 출신으로 특히 미국대통령이 많고 또한 특이하게 미국생물학자도 많음을 알 수가 있다.
하나같이 동북부출신들임을 알 수 있고 메사추세츠(Massachusett)출신 존 애덤스, 버지니아주(Virginia)출신 재커리 테일러, 뉴햄프셔(New Hampshire)출신 프랭클린 피어스, 오하이오주(Ohio)출신 윌리엄 머킨리, 버지니아주(Virginia)출신 우드로 윌슨, 펜실베이니아 주 출신 미국의 제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까지 위 도표로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이집트 파라오 제18왕조 제12대 왕 투탕카멘(Tutankhamun,재위BC1361-BC1352)도 같은 DNA로 나타난다. 좀 앞서 가는 면도 없지 않지만 이 "R1"그룹중 "R1b"는 삼한 조선인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1881년까지 명목을 유지했을 것이란 판단도 가능하다.
어쨌거나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삼한내에 코카소이드의 존재를 전혀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본 블로그 글 "삼한역사 말살의 도구로 사용된 삽화(揷畵)와 사진(寫眞)의 진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8 '에서 유태계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1903)가 1866년 3월과 8월 두차례 코리아를 방문하고 그린 삽화에서 한 사람은 갓을 쓰고 한 사람은 망건을 쓴 그림을 볼 수 있고 삽화아래를 설명에서 분명하게 "Caucasian race(1880)" 즉 코카소이드(Caucasoid)임을 알 수가 있다.
갓과 망건을 쓰는 코리아사람도 코카소이드(Caucasoid) 백색인종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고려가 코리아라면 백인도 있었고 몽고계, 타타르계 러시아사람도 있었을 것이란 추측은 어렵지 않다.
코리아에 백인이라고 하니 상당히 의아해 하고 의심할 수 있겠지만 반도역사가 단일민족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역사흐름에 맞지 않는 황당함인가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가 주장하였듯이 러시아사람이 몽고인이라는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상당히 타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 근세사가 말하길 러시아(Russia)의 근원은 9세기에 등장한 동슬라브계(East Slavic)의 키예프 루시(Kievan Rus:882–1283)라 하였고 이 '루시'가 바로 1240년 징기스칸의 손자인 '바투(拔都, Batu:1207-1255)'가 통치하던 금장한국(金帳汗國:Golden Horde)이라는 킵차크한국(Kipchak Khanate:1243-1502)즉 "몽골계타타르인"들에게 완전히 멸망했다는 사실이 존재하기 때문에 러시아사람이 몽고인이라면 이와 같은 러시아의 "루시 근원설"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세사 주요한 근원을 부정하는 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는 이러한 민감함을 개의치 않는 것은 곧 삼한 고려라는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러시아역사학자들이 킵차크한국에게 멸망한 사실을 스스로 "타타르의 멍에"라고 할 정도로 치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볼 때 러시아인들이 몽고인이라는 사실은 기존 역사보수학계에 강한 반발을 일으킬 만한 이슈가 될 것이 틀림이 없고 또한 러시아의 뿌리가 정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노프왕조는 러시아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에는 "로마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로마노프왕조(House of Romanov:1613-1917)의 전통성은 과연 '러시아'로 이어졌겠는가에 대한 물음에 어떤 답을 하려는지가 궁금하다.
만약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도 근세시 끝에 신라와 고려가 반드시 구분이 되어야 했다고 할 때 근세기까지 형태적으로 크게 나누어질 수도 있을 것이란 판단도 가능하게 한다.
그만큼 삼한역사가 세계문화에 주는 뿌리는 크기 때문이다.
본 블로그의 앞전 글에서 분명코 러시아는 하나의 마을이름이나 종족, 부락이름에서 출발한 것이라 하였고 시대적 상황에서 결코 왕조로서 인정하기는 곤란하다고 이야기 한바가 있다.
1799년 러시아아메리카회사가 생성되면서 부터 러시아란 명칭이 사람들에게 알려졌겠지만 근세기에 그들이 분명하게 러시아란 이름을 달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러시아가 로마노프왕조와 연결되었을 것이란 착각도 할 수 있겠으나 실제로 여러각도에서 판단할 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고 러시아가 결코 로마노프왕조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란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는 중간에 어떤 거대한 발판의 역사를 소멸시켰거나 빼버렸기 때문에 발생하는 혼란스러움이라고 여겨진다.
어떤 거대한 발판의 역사는 과연 무엇이었을 까?
니콜라이2세(Nicholas II:1868-1918,재위:1894-1917)는 로마노프왕조의 마지막황제이다.
그가 재위 막바지에는 경제난으로 인하여 1917년까지 시민혁명이 끝이질 않는 상태에 있었고 황제가 믿고 있던 육군참모총장 코르닐로프(Kornilov:1870-1918)의 갑작스런 반란으로 왕조의 동력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결국 좌파 유대인(외할아버지가 유대인계 독일인)계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Il'Ich Lenin:1870-1924)이 주도하던 볼셰비키(Bolsheviki)혁명군에게 모든 것을 내주고 퇴위할 수밖에 없었다는 역사는 도저히 러시아가 로마노프왕조의 연결선상에 바라볼 수 없게 하는 것들이다.
또한 특이한 것은 삼한역사에서 굴곡적인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전부 유대인계 독일인이라는 사실이다.
오페르트 역시 유대인계 독일인이다.
물론 1917년 부터 유대인 정권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Soviet Russia)가 러시아로 굳어지게 된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로마노프왕조 마지막황제 니콜라이2세 뿐만아니라 왕족 전체를 과격유대인들에게 맡겨 남김없이 처형했다는 사실은 마치 조선 철종가족이 몰살한 것과 같은데 유대인 사회주의 정권은 기존 로마노프왕조와 이미 단절을 전제하고 벌렸던 행위라 할 수 있어 역사적으로 볼 때 역성혁명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도저히 승계적인 의미를 논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을 좀 더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풀이 하면 니콜라이2세때까지 삼한역사의 전통성을 이었다고 할 때 그것의 고리를 끊으려 했던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지금의 러시아는 근원적으로 유대인들의 극단적인 테러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주의공화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러시아는 로마노프왕조라 할 수가 없으며 동시에 로마노프왕조가 아시아대륙에 없었다는 이야기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본래 로마노프(Romanov)의 의미는 "Son of Roman" 즉 '로마의 아들'이란 뜻이 강하다.
그것의 이유는 모스크바 대공국(Grand Principality of Moscow:1283-1547)의 이반4세(Ivan the Terrible:1530-1584,재위:1547-1584)가 비잔틴제국(Byzantium:330-1453)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팔라이올로구스(Constantine XI Palaiologos:1405-1453,재위:1448-1453)의 질녀 소피아 팔라이올로기나(Sophia Palaiologina)와 이반3세(Ivan III Vasilyevich:1440-1505,재위:1462-1505)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차르’(tsar)라고 하였으며 이때부터 로마제국과 비잔틴제국에 이어 ‘제3의 로마제국’이라고 자칭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까지 신성로마제국(神聖羅馬帝國:Holy Roman Empire,962-1806)이 존재하여 이것에 반하는 것으로서 비잔틴제국에서 끝이 난 로마(羅馬)의 전통성을 이어받는다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게 있었을 것이다. 비록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의 질녀와 모스크바공국의 이반(Ivan)3세 사이에서 태어난 이반4세라 하지만 이반4세의 죽음이후 후계자를 선택함에 있어 동란시대(1598-1610)라는 공백기까지 거치면서 우여곡절 끝에 이반4세의 아내이자 로마의 귀족출신 자녀 아나스타시야(Anastasia Romanovna)의 오빠 니기타 로마노프(Nikitich Romanov:1553-1633)의 손자 미하일1세(Michael I:1596-1645,재위:1613-1645)가 로마노프왕조 개창자가 되었으며 초대 차르라 하였던 것이다.
나는 생각컨데 비잔티움의 로마 귀족출신으로부터 이어진 왕조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엄밀하게 보자면 이것은 고려(高麗:korai)를 이으려고 했던 것이라고 풀이 할 수 있다.
18세기 러시아제국 문장
The Romanov coat of arms:
a) Separate crest.
b) on the chest of the imperial eagle
This one shown is a true heraldic dragon: four feet, two wings
대한제국의 문장이 러시아제국문장과 비슷하다는 것은 본 블로그 글 "대한제국과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문장으로 본 동질성 http://blog.daum.net/han0114/17050384 "에서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러시아가 로마노프왕조가 아닐 수 있다는 것에서 결정적인 것은 위 문장(紋章:coat of arms)을 보면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제일 위 18세기 러시아제국의 문장을 보면 말 탄 신(神) 게오르기(Georgy)가 창을 들고 용(dragon)을 찌르는 모습이지만 전통적인 로마노프왕조의 두 문장(a,b)에는 분명히 용(dragon)을 중심에 놓고 주위 사자(Lion)들이 보호하거나 문장전체에서 독수리문장 중심에 용(dragon)문양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은 '18세기 러시아제국'은 적어도 로마노프의 전통 문양을 따를 생각이 없었던지 그렇더라도 로마노프왕조에서 중심에 두던 드라곤(Dragon)을 사탄(Satan)으로 취급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 변혁기에 종교적인 문제가 더하여 변형되었거나 18세기 러시아제국은 결코 로마노프왕조를 계승하지 않는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A China (Imperial Flag) is shown at position 1844
위 그림을 보면 1844년에 "china" 제국국기가 용문양임을 알 수가 있다.
이때 "china" 란 용어는 고려와 신라로 병용하였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이때 차이나는 흔히 알고 있는 청(淸)이 아니다.
청(淸)이란 국명은 실제로 가브먼트 즉 정부(government)이며 1840년 아편전쟁때 부터 서양사의해 나타나는 이름일 뿐이다.
본 블로그의 글 "방울뱀(Rattlesnake, 響尾蛇)으로 본 마지막 대조선(大朝鮮) http://blog.daum.net/han0114/17050522 "에서 1774년 발행된 신문 메사츄세츠 스파이 (Massachusetts Spy)에 뱀과 용의 배너가 실렸는데 드래곤(영국?)을 상대로 방울뱀을 나타낸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영국이 용(龍)"Dragon(England)" 되고 미국은 방울뱀의 문양으로 상징되었다는 사실은 이 당시의 역사흐름에서 동양과 서양이 구분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즉 동양의 용과 뱀은 모두 다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에서 혼란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는 형상이고 분명한 것은 당시 지배세력은 분명히 사자로 상징되던 영국이라고 생각 할 수 있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1707-1801)이라는 사실에서도 사자와 용이 병용되었거나 사자가 서양세력이 가지 못할 때 상황이 아닌가도 여겨지는 것이다.
사자는 고려와 상징되고 용은 조선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겠다.
이것은 또 본 블로그의 글 "박견(狛犬)으로 본 사자상(獅子像)은 고려(高麗)의 상징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12 " 에서는 알 수 있는데 고려견(高麗犬)을 당사자(唐獅子)라고 하였다는 사실에서 서양세력의 상징성이라고 알고 있던 상식의 "사자(Lion)" 역시도 삼한의 상징성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신라(新羅)를 신성로마제국으로 보는 이유
그렇다면 이제부터 로마(羅馬)와 신라(新羅)의 관계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미 신라(新羅)는 로마(Rome:羅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비잔틴제국의 생성이다.
비잔티움(Byzantium:330-1453)은 게르만족(Germanic peoples)이란 이민족의 대반란으로 서로마(The Roman Empire:BC27-AD476)가 붕괴되는 시점인 서기 324년 동쪽 도시로 천도(遷都)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인데 솔직히 서로마가 이탈리아 반도에 있었다는 사실은 좀처럼 동의할 수가 없다.
콘스탄티누스1세(Constantine the Great,272-337,재위:306-337)가 신도시를 점령한 후 324년부터 330년까지 대대적인 공사가 끝나면서 비로소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 명명한 후 부터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뜻은 바로 "새로운 로마(Nova Roma) "New Rome" 란 뜻으로서 바로 한문 명칭으로 신라마(新羅馬)가 되며 바로 콘스탄티노플을 '신라마'라 한 것은 "신라"의 동질성이 담고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게 하며 또한 삼국사기에 신라 비류왕(比流王,재위:304-344)과 콘스탄티누스1세의 년대가 거의 일치하는 것도 감안할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근거는 북경어로 "Xila"가 희랍(希臘)즉 그리스(Greece)를 말하는 것이며 이것이 곧 신라(新羅)의 지칭한다는 사실을 더 한다.
이것 말고도 신라가 유럽(아랍)에 있었다는 사실은 수도 없이 많이 밝혀진 이야기다.
앞에서 언급 한 것처럼 엄밀하게 따진다면 로마노프왕조(House of Romanov)는 로마의 전통성을 이어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것은 신라(新羅)의 전통성을 받을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로마노프왕조는 신라보다는 오히려 고려의 전통성을 이어 받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나는 생각컨데 대한제국(大韓帝國:1897-1910)의 본 모습은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그리고 대조선(大朝鮮)잔여세력들을 모두 합치는 대동(大同)이란 글로 합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로마노프왕조 말기의 긴박한 모습과 매우 긴밀하게 일치한다.
이것은 1918년 오스트리아왕조의 카를 1세(Charles I , 1887-1922,재위:1916-1918)가 스위스로 망명하고 러시아의 로마노프왕조의 니콜라이2세(Nicholas II:1894-1917)는 붉은 군대에 죽임을 당하였으며 독일제국 빌헬름 2세(Wilhelm II, 1859-1941,재위:1888-1918)는 네덜란드로 망명하면서 그들이 소속된 거대한 역사가 모두 해체되는듯 하지만 오스만제국(Ottoman Empire:1299-1922)의 메흐메트 6세(Mehmed VI, 1861-1926,재위:1918-1922)만이 1922년까지 건재하게 자릴 지켰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지금은 대영제국(大英帝國)이라고 하지만 "브리티시제국(British Empire)"은 1922년 이집트가 독립할 때까지 이집트 지배국가로 존재하였음도 알 수가 있어 이 모두가 대한제국으로 연결되는 것이라고 판단하게 하는 것이다.
이집트와의 조선관계는 본 블로그 글 "임오군란(壬午軍亂)과 우라비혁명(Urabi Revolt) http://blog.daum.net/han0114/17050559 "에서도 자세히 이야기 하였다.
본 블로그 글 "대한제국과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문장으로 본 동질성 http://blog.daum.net/han0114/17050384 "에서 말한 것처럼 비운의 황제 니콜라이2세(Nicholas II:1894-1917)와 대한제국이 시대적으로 상당히 겹쳐진다는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기억이 난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은 태생부터가 분명치 않고 소멸하는 것도 일제가 만든 이조조선(李氏朝鮮)과 억지로 연결되고 타의에 의한 비정상적인 문제들이 많다는 찜찜함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생각 해본다.
일제가 이씨조선이라고 하여 비좁은 곳 한반도에 삼한을 만들었다면 굳이 대한제국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이미 그들 손에 검어쥔 입장에서 마음대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조건들이 충분함에도 갑자기 아관파천을 만들고 1897년 13년정도만 생존할 수밖에 없는 대한제국을 기어코 등장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칼의 손잡이를 검어 쥔 일제가 조선과 대한제국 모두 한꺼번에 처리해야 할 난제가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밖에 없게 하고 있다.
이것은 나중에 아시아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각본에 따른 것이라고 할 때 더욱 러일전쟁이라는 것은 대한제국과 얽혀 있다는 것을 알 수있고 또한 로마노프왕조와 연결시킬 수밖에 없는 고리라고 생각되는 점이다.
그렇다면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s)역시 그러한 구조아래서 보아야 하며 이 전쟁을 한반도 근역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본다든지 또는 나라(러시아) 대 나라(일본)의 큰 전쟁처럼 확대해서 보려는 경향이 있지만 반대로 이것은 대조선이 해체된 상태에서 고려가 중국이라고 하는 틀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그 틀내에서 벌어진 종족간에 이권 충돌에 지나지 않는 단순한 이권다툼이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고 고려의 종족들이 여기저기 산집해 있던 곳에서 벌어진 충돌일 가능성과 북아메리카대륙 남쪽에서 진을 치고 있던 영국회사 허드슨 베이회사(Hudson 's Bay Company)가 러시아아메리카회사의 남진을 막기위한 방어선에서 벌어진 충돌일 수밖에 없다고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당시 서부북부의 러사아아메리카회사와 서부남부의 허스슨베이회사 사이에 아메리카정부가 끼여 절충지역을 형성한 것 같은 구도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이 다 러일전쟁을 각색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상하게 제물포와 러일전쟁의 군인과 군수물자들의 들락거리는 곳 항구의 풍경이 아열대지역이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사실의 글도 본 블로그에서 곧 올려 놓을 수 있도록 하겠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삼한역사 속의 사건들은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는 것으로 다만 일제가 만들어놓거나 그려놓은 러일전쟁의 그림삽화가 전부이고 마치 일본인처럼 그림공간을 채워져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나 일제가 핵폭탄을 맞고 전쟁에 패한 후 러시아가 열도 일본을 쳐 들어가 그러한 치욕을 씻을 수 있는 조건이 되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본을 보호하려고 하였다는 사실과 한반도에 남북 허리를 짜르는 선을 긋는데 동의하였다는 사실은 어딘가 모르게 근세사의 설명은 부족한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들이다. 아마도 러시아는 2차세계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동아시아대륙 북부의 넓은 지역과 시베리아의 넓은 땅, 유라시아 영역등 러시아가 확보할 수있는 모든 것에 대체로 만족하였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몽고은 고려연합(United Corea)를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로마노프왕조의 전통성은 제쳐두고 고려(高麗)의 전통성을 이어받으려 했던 것이 틀림이 없다.
즉 고려(高麗)가 타타르(Tatar)라 해야 한다.
신라(新羅)와 고려(高麗)가 실제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었는지 그에 대한 역사를 우리는 지금 10%도 모른다고 해야 맞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로마(羅馬:Rome)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신라(新羅:scilla)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
신성로마제국(神聖羅馬帝國:Imperium Romanum Sacrum:962-1806)의 시작은 놀랍게도 신라(新羅)가 고려와 통합하는 시대와 연결된다.
935년에 신라의 경순왕9년에 고려에게 나라전체를 헌납한다는 이야기는 허황된 것들이많다.
1000년의 역사를 전쟁 한번 치루지 않고 그대로 상납한다는 것은 믿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마치 근세기에 미국이 스페인이나 프랑스에게 그 많은 널은 땅을 할량을 받는다든지 돈으로 매입한다는 어처구니와 진배없다.
이것은 반도역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다.
매의 성(Hawk's Castle)이란 뜻과 Royal family, Royal house, Royal line, 왕권(Royalty)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The House of Habsburg)는 막스밀리안1세(Maximilian I,1459-1519,재위:1486-1519)로부터 시작되면서 유럽군주의 왕가로 자리잡는데 이 왕가는 오스트리아(Austria)땅을 가졌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오스트리아를 기원으로 따진다면 나라 국명이 아니라 땅의 의미였던 것이다.
이것은 동방을 뜻하는 명칭이다.
앞 전에 본 블로그 글 "조선패모(朝鮮貝母)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3 "에서 오스트리아(Austria)에 대해서 언급한 사실을 또 한번 이어 본다면 세계인구통계자료를 통해 오스트리아는 1780년에 11,723,000명, 1880년 22,144,000명, 1910년에는 28,572,000명이란 자료를 받아 볼 수 있었지만 오히려 위키(wiki)자료에는 이것보다 더 많은 인구가 나타나는데 오스트리아제국에서 이중제국으로 넘어가기 전 인구가 1867년 어림잡아 40,000,000명이라하여 통계숫자보다 한 배 가까이 증가한 수치로 나타나며 이중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말기 1914년에는 약 52,800,000명이란 거대한 인구를 가진 나라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거의 통계자료보다 한 배 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어쨌던 1차세계대전(1914-1918)당시 "오천만명"이란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구를 가진 국가가 오스트리아라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지금까지 미국, 영국, 프랑스에 가려져 명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이 덮여 버린 듯 하였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모르는 사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다.
인구대비로 보았을 때 당시 무기규모 역시 대단하였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이 오스트리아의 함선 즉 전투함의 자료를 잠시 보고 있는데 제일 큰 함선 규모가 거의 9,000t 급으로 나타나 당시 1차대전때 해상에서 군림하던 위엄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신성로마제국의 건국년도 AD962년은 통일신라시대말 년도와 거의 비슷한 것으로 나타나고 미국인 윌리엄·엘리엇·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1843-1928)의 기록에서 고려연합 또는 코라이(United corea, or korai, 960-1392 AD)라고 하여 시작년도 960년이라고 하였는데 반도사의 고려건국 년도 918년에서 42년 후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인 그리피스의 기록 년도는 오히려 오대십국(五代十國)을 통일한 송나라 건국년도와 일치한다.
그래서 본 블로그는 송고려(宋高麗)라 하였던 것이다.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 함은 화북(華北)의 중심지대를 지배하고 정통왕조(正統王朝), 양(梁) ·당(唐) ·진(晉) ·한(漢) ·주(周) 5대라 하고 10국으로는 오(吳) ·남당(南唐) ·오월(吳越) ·민(閩) ·형남(荊南) ·초(楚) ·남한(南漢) ·전촉(前蜀) ·후촉(後蜀) ·북한(北漢)등으로 중국대륙 전역을 통일했다고 하는 것이다.
즉 송고려라 하는 것은 고려가 신라와 합병을 했다는 년도와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며 하나의 역사가 동양과 서양으로 분리되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신성로마제국 건국년도와 딱 2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거의 같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물론 이런 대입에 불만이 있을 수가 있다.
하지만 본 블로그가 수많은 경우를 대입하고 판단할 때 신라가 현재 유럽과 아랍대륙에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바로 자연지질학적 분석에 따른 것으로서 본 블로그 글 "신라(新羅) 지진(地震)은 바로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지역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444 "에서 잘 따져보았기 때문에 망서릴 이유가 없다.
북경어 시라"Xila" 가 희랍(希臘)이라는 사실과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신라마(新羅馬)라 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때문에 신성로마제국은 신라와 관계를 가진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삼한역사의 땅이다.
앞에서 무릇이라고 하는 산자고(山茨菰:Scilla)의 근원지가 지중해임에도 불구하고 속명이 실라"Scilla"라 한 사실과 1884년 서울미국공사관으로 근무한 알렌(安連:Horace Newton Allen)이 삼한의 이름을 고대에는 "Scilla, korai" 라 했다는 사실은 고대삼한역사의 진실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합스부르크왕가의 전통성있는 땅 오스트리아[land (Kronland) of Austria]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유럽사가 고대삼한역사에서 잉태한 사실임을 가장 확실하게 진단케 하는 것이다.
[wiki사전]From Latin Austria; a Latinization of Germanic ostar (“eastern”), from Proto-Germanic *austra (“eastern”), from the Proto-Indo-European *aus- (“to shine”) (see aurora, dawn). The Latin is short for (Marchia) austriaca (“eastern borderland”). More at eastern.
위는 위키사전에서 발췌한 것인데 다 알다시피 오스트리아(Austria)는 동방 또는 동쪽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것은 이미 본 블로그에서 밝혀진 것이다. 또한 오스트리아는 라틴어로 마리키아 오리엔탈리스'Marchia Orientalis' 즉 동양으로 나아가다(March East)으로 인식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를 '서양에서 동양으로 가다'라는 식으로 잘못 받아들일 수 있는 우려가 있지만 이것은 결코 '서양에서 동양으로 나아가다'란 뜻이 아니라 태초의 인간이 밝은 새벽이 열리는 곳으로 나가고자 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를 뜻하는 것이라고 해야 맞다.
바로 인간이 태초에 갈망하는 것의 표현이며 이것은 인류역사의 시발을 뜻한 것이다.
오스aus- (“to shine”) (see aurora, dawn). "밝다, 여명을 보다, 새벽"의 뜻을 가지는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박용숙 교수가 말한 것처럼 삼한의 제천의식(祭天儀式)과 삼신(三神)에 관련된 것으로 "새벽은 샛별(morning star)로 태백성(太白星)이고 금성(金星:Venus)이라 하였으며 <삼성기>에서는 새벽녘을 사백력(斯白力)이라 하여 하늘을 빛내는 한 신령(神靈)이라고 표기한 것과 같다 하여 새밝-새밝음-새벽-斯白力-시베리아-서벌(徐伐)-서불-서라벌-경주(慶州)-금성(金星)이라 하였던 것을 이야기 할 수 있겠다.
中国古人称金星为“太白”或“太白金星”,也称“启明”或“长庚”(傍晚出現時稱「長庚」,清晨出現時稱「啟明」)。
또한 중국고대사람들은 금성을 칭하길 태백 혹은 태백금성이라고 하고 다르게는 새벽녘, 이른아침, 동틀 무렵을 청신(清晨)이라 하여 계명이라 하였고 저녁노을에는 방만(傍晚)이라 하여 장경이라고 하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새라, 사로(斯盧), 사라(斯羅), 서라(徐羅)와 이어져 '밝다'의 전통적으로 태양을 섬기는 민족의 발원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으로서 바로 시베리아-서벌-서불-서라벌-경주-금성-신라(新羅)와 연결되는 것을 모른체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오스트리아의 오스(aus)는 곧 신라(新羅)계 소속을 뜻하는 것과 같다.
삼한의 제천의식을 근원으로 할 때 삼신(환인, 환웅, 단군)을 나타내는 것으로 빛의 신 환인께서 처음 세상을 여실 때 세상이 밝아지는 곳에 나라를 세우는 뜻과 진배없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라틴어로 '동방을 향하여' 마리키아 오리엔탈리스'Marchia Orientalis' 라 했을 것이다.
즉 삼한의 혼과 정신이 숨어 있는 의미라는 것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산자고(山茨菰:Scilla) 즉 무릇이란?
그렇다면 이제부터 서울미국공사관 알렌(安連:Horace Newton Allen)이 이야기 한 "실라(Scilla)"가 실제로 무릇(山茨菰)의 속명으로서 원산지가 어디에 포진 하는것인지 살펴보아야 하고 무릇의 원산지라고 알려진 지중해라면 일단은 로마나 그리스위치와 맞아 떨어지는 것이라고 할 때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이것부터 면밀하게 살펴보도록 한다.
그렇지만 이 식물 역시 근세기에 어떤 이유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상당히 변질 또는 변형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데 아래 살펴보겠지만 특이한 점으로 이 식물은 북아메리카대륙에는 일체 원산지 표시가 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특히 유럽 지중해연안의 식물들은 북아메리카대륙과는 섞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아마도 나는 이것이 서양인들에게 존재하는 알 수 없는 컴플렉스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때문에 한쪽은 숨긴다는 여겨지는 것이다.
이식물 역시 본래부터 아메리카대륙에는 아예 생장을 하지 않았다고 단정지울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유럽대륙의 지중해 이외 또 다른 곳에 지중해가 있었다는 시실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자료에 나타나는 그대로를 가지고 이야기 하자면 신기하게도 실라(scilla)는 식물분류체계의 속명으로 알려져 있는 바로 지중해연안을 원산지로 하는 히야신스과(風信子科:Hyacinthaceae)의 무릇(scilla)의 속(屬)으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실로 이 사실만으로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신라(新羅)의 이름이 지중해연안을 원산지로 하는 식물 무릇의 속명으로 나타난다니 어디 반도역사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삼한역사가 예상한 바대로 이렇듯 세계 모든 것에 관계하는데 놀라울 다름이다.
이것을 또한 한반도에서는 면조아(綿棗兒)라고도 한다.
이것의 식물분류체계를 보면 본래 아스파라거스목(天门冬目:Asparagales), 히야신스과 혹은 아스파라거스과(风信子科:Hyacinthaceae), 무릇속(绵枣儿属 :Scilla)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현재는 1998년에 발표되었던 속씨식물 계통분류 그룹(APG:Angiosperm Phylogeny Group)에 의해 분류가 모호하게 바뀌어버렸는데 천문동과(Asparagasae)의 무릇아과(Scilloideae), 무릇속(Scilla)으로 분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새롭게 무릇아과(Scilloideae)가 만들어진 것이다.
일단은 근원종을 밝히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미리 짐작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서(史書)에서는 이 무릇을 어떻게 기록하였는지 살펴보자.
청장관전서 제61권
앙엽기 8(盎葉記八)
태을자금단(太乙紫金丹)
山茨菰去皮焙二兩。武備志。作山茨菇。○劉氏經驗方。南北處處有之。俗名金燈籠。葉似韭。花似燈籠。色白。上有黑點。結子三稷。二月開花。三月結子。四月初苗枯。卽穵地得之。遅則苗腐爛。難尋矣。與有毒老鴉蒜。極相類。但蒜無毛。山茨菰有毛。包裹宜辨去皮。洗極凈焙。○東医寶鑑山茨菰가무릇。○俗又名무릇。卽野茨菰무릇之類也
산자고(山茨菰)는 껍질을 버리고 불에 쬐어 말린 것 2냥(兩),《무비지(武備志)》에는 산자고(山茨菰)로 되어 있다. 《유씨경험방(劉氏經驗方)》에는 "남북 곳곳에 있다. 속명으로 금등롱(金燈籠)이라 하고, 잎은 부추 같고 꽃은 등롱과 같다. 색은 희고 그 위에 검은 점이 있다. 씨는 세모가 나는데, 2월에 꽃이 피고 3월에는 씨가 든다. 4월 초에 싹이 마르는데 그때 즉시 땅을 파서 뿌리를 캐야 한다. 더디면 싹이 썩어 캐내기 어렵다. 독이 있고 노아산(老鴉蒜)과 꼭 닮았으나, 다만 노아산은 털이 없고 산자고는 털이 있다. 겉과 속을 잘 식별하여 껍질을 벗겨 버리고 깨끗이 씻어 말린다." 하였다.《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산자고를 '까치무릇'이라 했다. 속명으로 '깨무릇'이라 하니, 즉 야자고(野茨菰)인데 '무릇'의 일종이다.
위는 조선후기학자 이덕무(李德懋:1741-1793)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내용이다.
무릇을 산자고(山茨菰)라 하였고 남북 곳곳에 있다하였으며 금등롱(金燈籠)이라 하여 잎은 부추와 같다 하였다.
특히 꽃의 색은 희고 그 위에 검은 점이 있다 하였으며 2월에 꽃이 핀다 하였으니 대체로 이른 시기에 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산자고를 '까치무릇'이라 했다 하여 속명으로 '깨무릇'이라 하거나 야자고(野茨菰)라하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것을 어문학적으로 해석하였는데 까치설날은 '이른 설'이라고 하였으니‘까치무릇’은 ‘일찍 피는 무릇’이라는 해석을 하고 있어 청장관전서가 말하는 2월에 꽃이 핀다는 것과 같은 해석이 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산림경제 제4권 치약(治藥) 신선태을자금단방(神仙太乙紫金丹方)에는 청장관전서의 산자고(山茨菰)에서 처럼 빛깔은 흰 바탕에 검은 점이 있다고 못을 박고 있고 세모꼴의 열매를 맺는다 하였으며 2월에 싹이 돋고 3월에 꽃이 피고 4월에 잎이 마른다 한 것은 청장관전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지만 관찰자의 의구심이 들어나는 것으로서 이 꽃에 있다는 흑점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였다는 것에서 많은 혼란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도 우선 물리(物理)에 넓은 학자의 변증이 있기를 기다린다고 한 것을 보면 무릇이라고 하는 산자고(山茨菰)는 흰색의 꽃에 검은 점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분류학적인 문제가 당시에도 매우 중요했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山茨菰(俗名金灯笼。花似灯笼,色白,上有黑点,结子三棱;二月开花,三月结子,四月初苗枯即挖,
또 위 한어자료를 보아도 알 수있는 것은 ‘등롱과 같은 꽃으로 백색’이며 위에는 흑색 점이 있다고 분명히 적고 있으며 청장관전서처럼 2월에 개화한다 하였으니 똑 같은 내용이다.
그래서 이 종(種)에 대해 근원종이라고 할 수 있는 린네(Carl von Linne:1707-1778)의 이름이 붙어 있는 5종(種)의 학명을 발췌해 보았으나 꽃의 색깔이 전부 흰색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나 근원종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Scilla amoena L.은 보라색이고, Scilla bifolia L.도 보라색이며, Scilla hyacinthoides L.역시 연보라색, Scilla lilio-hyacinthus L. 도 연보라색, Scilla peruviana L.도 진보라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 흰꽃이 아닌 이상 근원종이라 할 수 없다.
즉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말한 산자고(山茨菰)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분명코 모든 자료에서 근원지를 지중해연안이라 하였던 것을 보면 그리스와 연결되기 때문에 이 속명 중 그리스를 찾아보게 되는데 그 중에 “Greek Squill”라고 하여 1867년에 스위스 식물학자겸 수학자 보아시에(Pierre Edmond Boissier:1810-1885)가 명명한 학명 ‘Scilla messeniaca Boiss 를 찾을 수 있었으나 역시 이것도 꽃의 색깔이 보라색 계통으로 '산자고'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판단을 할 수가 있다.
하여 영어자료를 계속 찾다보니"scilla" 와 거의 같은 용어로 쓰이는 스킬“Squill”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스킬에 대한 용어를 찾아보니 1350-1400년 중세영어에서 라틴어 "squilla" 이 "scilla"로 변형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것을 다른이름으로 "그리스 스킬"이라고 하였는데 바로 해총(海蔥:sea onion)이라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지중해연안을 원산으로 하는 천문동과(Asparagasae)의 무릇아과(Scilloideae)가 아니라 나리과(lily family)의 다년생식물로 나타난다.
squill (skwɪl)
1. the bulb of the sea onion, Urginea maritima, of the lily family, cut into thin slices and dried: used esp. as an expectorant.
2. any related plant of the genus Scilla.
[1350–1400; Middle English < Latin squilla, variant of scilla < Greek skílla]
"squilla"의 라틴어의 뜻은 작은새우(shrimp), 참새우(prawn), 해총(海蔥:squill), 게 종류(kind of crab)등으로 나타나며 위 스킬(squill)의 설명1번을 보면 나리, 백합과(lily family)의 학명“Urginea maritima”라고 하였고 이것을 해총(海蔥:sea onion)의 알뿌리를 말하고 있으며 얇게 조각을 내어 말린 것을 약재로 사용하거나 거담제(去痰劑:expectorants)로 쓰인다는 설명까지 붙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편으로“Squill”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이 단어는 학명“scilla maritima Linne” 라 하였기 때문에 '린네'가 명명한 학명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이 학명은 무엇때문인지 확실하게 들어나질 않으며 또 다른 속명인 “드리미아속(屬)Drimia”과 연결되는가 하지만 최종 학명“Drimia maritima (L.)Stearn”로 정리가 되고 있기도 하다.
Drimia maritima (L.) Stearn
North Sinai, Isthmic Desert (Location: Maghara), Galala Desert.
그러나 이 학명 역시 위 분포지를 보면 북 시나이 마가라 사막협부(峽部), 갈라라사막으로 나타나 아시아지역을 주요근원지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서 또 다시 실망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저런 자료들을 살펴보면 거의 같은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최종 이 실라(scilla)속명의 식물을 약재화한 것이 스킬(squill)이라는 것을 알았다는데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다.
결국 종합적으로 살펴본 결과 백합과(百合科:Liliaceae)의 학명“Urginea maritima”는 해총(海蔥:sea onion)을 말하는 것임이 분명하지만 히야신스과 혹은 아스파라거스과(风信子科:Hyacinthaceae)는 결국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결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의 이명들이 필요이상으로 매우 다양함을 알 수 있는데 아래와 같다.
유럽스킬(European squill), 인디언 퀼스(Indian quills), 인디언 스킬(Indian squill), Jangli pyaj=Jungli Pyaz(Urginea Indica)=Sea onion, Jungli plyaz, 지중해 스킬(Mediterranean squill), 붉은 스킬(Red squill), 실라(Scilla), 해총=바다양파(Sea onion), 바다 구근식물(Sea squill bulb), 또 인디언 스킬이라고 하는 벤팔란두:Vanpalandu(Indian Squill), 흰스킬(White squill)등이 있는데 모두 해총(海蔥:sea onion)을 말하고 있다.
곧 '흰 스킬' 즉 '지중해연한 스킬' 등으로 정리가 된 셈이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것은 아스파라거스목(天门冬目:Asparagales)의 아스파라거스과(风信子科:Hyacinthaceae)를 결국 찾을 수 없다는 사실과 지중해를 나타내면서도 왜 아메리카대륙에서 쓰여야 할 인디언 퀼스(Indian quills), 인디언 스킬(Indian squill)등으로 표현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앞에서 조심스럽게 언급한 것처럼 북아메리카대륙에는 이 무릇 산자고가 아예 모든 자료에서 원산지 표시조차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 분류학적인 정확성을 고려할 때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서 인식되기에 충분하며 결국 인디언(Indian)이란 이명들이 결코 지중해연안을 근거로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음을 예단할 수가 있어진다.
그렇다면 결국 이것들은 중립적이며 양심있는 식물학자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지금까지 실제 무릇 산자고를 찾기위해 여러각도로 알아본 결과 그나마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래 세가지 종인데 이것이라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실라(Scilla)의 속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그 중에서도 가장 무릇이라고 할 수 있고 산자고라 판단 할 수 있는 꽃 색깔이 흰색인 "흰스킬(White squill)"이라고 하는 해총(海葱:Urginea maritima)종류와 그리고 일본 히아신스 또는 한반도에서도 무릇 면조아(绵枣儿)라고 하는 학명 "Scilla scilloides", 마지막으로 종소명과 실제 근원지가 다른 지중해면조아(地中海綿棗兒)라 하기도 하고 칠레면조아(葡萄牙綿棗兒)라 하는 학명 "Scilla peruviana"까지를 살펴볼 수밖에 없다.
[1]海葱(Urginea maritima)是风信子科植物,用鳞茎알뿌리(球根)繁殖。为药用植物。原产于地中海沿岸
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
門: 被子植物門 Magnoliophyta
綱: 雙子葉植物綱 Magnoliopsida
目: 天門冬目 Asparagales
科: 风信子科 Hyacinthaceae
屬: 海葱属 Drimia
種: 海葱 D. maritima
二名法
Drimia maritima(L.) Stearn
異名
Scilla maritima L.
Urginea maritima (L.) Baker
이 학명은 지중해연안 스킬이라고 하여 대체적으로 흰색꽃으로 통용되고 있어 이것을 산자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지중해를 강조하면서도 이상하게 딱 지중해가 아닐 것 같은 생각을 하게 하는 학명으로서 학명이"Urginea maritima (L.) Baker"으로 나타나는데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등장하는 산자고인지는 분명하게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이 학명 여러 종의 동질성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의심이 더 되게 하는 것으로서 'Urginea maritima'의 동종의 또 다른 이름 'Drimia maritima(L.) Stearn', 그리고 'Charybdis maritima (L.) Speta', 'Ornithogalum maritimum (L.) Lam', 'Scilla maritima L'. 등으로 열거할 수 있다.
이 학명은 영국의 식물학자 존 린들리(John Lindley:1799-1865)에 의해 1789년 아스파라거스과(科:Asparagaceae)에서 다시 아과(亞科)로 나뉘지고 무릇아과(Scilloideae)에서 “바르나르지아속(屬)Barnardia”, “드리미아속(屬)Drimia”, “실라속(屬)Scilla”으로 각각 나뉘어짐을 알 수가 있으며 이것을 전부 해총(海蔥:sea onion)이라 하였고 이 드리미아속(屬)Drimia의 학명‘Drimia maritima(L.)Stearn’는 바로 ‘Scilla maritima L.’라고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듯 많은 학명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이 종은 아무래도 우리가 찾으려 하는 산자고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의문점을 남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 이렇듯 엉키듯 알 수 없게 만들었을까?
특히 이약은 심장 배당체의 배뇨촉진 성질이 있는 수종이라고 하는 부종 기본치료제로 사용되었으며 바다 스킬과 식초의 용해액은 수세기에 동안 일반치료제 쓰이면서 또한 설사 및 거담제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꽃의 색깔이 흰색이기 때문에 흰스킬(White squill)로 알려져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을 무릇 산자고(山茨菰:Scilla)라 했던 것이 틀림이 없겠으나 이 학명에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무엇인가 분명하게 들어나는 것이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덕무(李德懋:1741-1793)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의 기록처럼 흰꽃에서 검은 점이 있다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것은 근세기 분류에서 일본을 근원지로 하는 학명 “Barnardia japonica (Thunb.) Schult. 1784”는 꽃빛 색깔이 연분홍색인데 이 식물역시 어떤 이유이던지 간에 변형, 변화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스페인 남부 지중해의 발레아레스 제도와 아프리카북서지역(north-west Africa)에서 발견된 근거의 종으로서 아스파라거스과(Asparagaceae), 무릇아과(Scilloideae), 백합과의 초본 바르나르지아(Barnardia)라고 하는 식물인데 이것을 모든 자료에서 동아시아대륙으로 옮겨놓았다.
물론 스웨덴식물학자 칼 페테르 툰베리(Carl Peter Thunberg:1743-1828)나 영국식물학자 존 린들리(John Lindley:1799-1865)는 동시대의 바로 앞뒤 사람인데 어쩜 이렇듯 한결같이 기존 식물의 근원지를 감추려고 애를 썼는지 알 수가 없다.
Carl Peter Thunberg:He has been called "the father of South African botany" and the "Japanese Linnaeus".
위 영어자료에 있듯이 툰베리를 보고 "남아프리카의 식물학의 아버지"라는 별칭에는 실제로 남아프리카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동시에 같이 붙어 있는'일본의 린네'라는 별칭은 당시 툰베리가 열도 일본에서 식물채집을 하였다는 것인데 이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다만 남아프리카 가까이에 일본이 있었다면 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당시 나무범선으로 이동하는 거리가 너무 멀고 한계를 넘어선다는 사실에 우려하는 것이다.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동아시아대륙 열도 일본으로 왔다갔다는 하는 경로는 근세기에 억지로 짜맞춘 것이라고 할 때 어디어디에서 아시아대륙에서 유럽으로 왔다갔다 하였다는 설명들은 다 뻥이라고 하여도 괜찮다.
근세기 허구의 자료들을 보면 지구한바뀌 도는 것은 식은 죽먹기 식으로 표현하고 설명하는 것은 한마디로 조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이야기로 치부해야 맞다.
이 툰베리 역시 그가 일본의 린네란 명칭이 사실이라면 일본을 동아시아대륙의 열도 일본을 지칭한것이라고 하는 것은 입에 침도 안바르고 하는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고집한다는 것은 날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대를 앞서니 뒤서니 한 것을 보면 마찬가지로 1789년에 영국의 식물학자에 의해 식물분류가 아스파라거스과(科:Asparagaceae)에서 다시 아과(亞科)로 나뉘지는 것도 정상적이라 할 수 없는 것으로 무엇인가 꺼꾸로 되돌린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왜냐하면 이 학명 "Barnardia japonica" 이 바로 한반도에서 면조아(绵枣儿:Scilla scilloides)라고 하는 그 무릇으로 간주되는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The genus Barnardia was created by John Lindley(1799-1865) in 1826 together with the single species B. scilloides. However, this species had already been described as Ornithogalum japonicum by Carl Peter Thunberg in 1784, so that it is now called B. japonica.
[2]绵枣儿(学名:Scilla scilloides)为百合科绵枣儿属的植物
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
門: 被子植物门 Magnoliophyta
綱: 单子叶植物纲 Liliopsida
目: 天门冬目 Asparagales
科: 风信子科 Hyacinthaceae
屬: 绵枣儿属 Scilla
種: 绵枣儿 S. scilloides
二名法
Scilla scilloides(Lindl.) Druce 1917
Barnardia japonica 1829, Japanese Jacinth
이 학명은 편의적으로 한반도에서는 '중국해총'이라고 하거나 '면조아'로 알려진 학명이다.
그리고 이 꽃 새깔이 분홍빛이다.
이덕무(李德懋:1741-1793)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말하는 무릇 산자고(山茨菰)가 분명히 아니다.
이것은 어떤 이유에선지 알 수 없지만 1826년 린들리에 의해 바르나르지아(Barnardia)속이 정해지고 단일종으로 학명‘Barnardia scilloides’이 명명 되었으며 이것이 하이신스과 풍신자석(風信子石:jacinth) ‘Barnardia japonica’가 되어 일본종으로 변했으나 이미 1784년에 '칼 페테르 툰베리(Carl Peter Thunberg:1743-1828)에 의해 백합과의 구근(球根)식물의 일종으로 오니소갈럼 자포니쿰(Ornithogalum japonicum)라고 학명이 정해지면서 혼란이 배가 되게 하는 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의 속명 오니소갈럼(Ornithogalum)은 새(bird)를 의미하는 그리스어'ornis'와 젖(milk)를 의미하는 'gala'가 합하여 “새의젖”이라는 뜻이 되지만 로마에서는“bird's milk”가 "something wonderful"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고 하며 몰타어로도 새젖(Ħalib it-Tajr)이라고 하였고 영어로는 이것을 베들레헴의 큰 별(Large Star of Betlehem)이라고 하였다는 사실도 적고 있어 기독교의 꽃으로 상징되고있다.
the scientific name Ornithogalum means “birds’ milk” (from the Greek words 'ornis' meaning bird, and 'gala' meaning milk); this is due to its white flowers and their beauty – indeed 'Bird's Milk' was frequently used by the Romans to indicate something wonderful.
이 속명 오니소칼럼(Ornithogalum)은 남아프리카에 분포지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앞에서 말한 칼 페테르 툰베리(Carl Peter Thunberg:1743-1828)의 활동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어쨌던 'Ornithogalum japonicum'가 'Barnardia japonica'로 변형되고 이것이 중국스킬"Chinese squill" 이라고 하는 것으로 면조아는 학명‘Scilla scilloides’로 굳어지는데 한반도에서도 학명 “Scilla scilloides”을 백합과(Liliaceae)에 속한다 하면서 다른이름으로 야자고(野茨菰), 물굿, 물구, 지란(地蘭), 면조아(綿棗兒), 천산(天蒜), 지조(地棗), 전도초근(剪刀草根), 흥거(興渠)라 하여 온통 짬뽕처럼 만들어버렸다.
너무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이것을 흥거(興渠)라고도까지 하였는데 산스크리트어로 “hiṅgu”의 음사 흥거(興渠)또는 흥구(興瞿·興舊·興宜)라고도 불리는 것으로 5신채(五辛菜)의 하나로 알려진 것이다.
佛家五葷為大蒜、小蒜、興渠、慈蔥、茖蔥
《本草備要》註解云:「慈蔥,冬蔥也;茖蔥,山蔥也;興渠,西域菜,云即中國之荽。」興渠另說為洋蔥。
위 한어자료를 보면 흥거(興渠)는 서역고수풀(西域菜) 또는 중국고수풀(中國之荽)이라고 하였다.
물론 위 학명‘Scilla scilloides’은 동북아시아 원산으로 굳어진 것이고 일본, 만주, 중국, 타이완, 우수리 지방등에 분포하는 것으로 만들었으나 역시 연보라색 빛 즉 담자색 꽃이기때문에 산자고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이것을 앞에서 말한 것처럼 스페인 남부 지중해의 발레아레스제도와 아프리카북서지역(north-west Africa)에서 발견된 근거의 종으로 나타나는데 아스파라거스과(Asparagaceae), 무릇아과(Scilloideae), 백합과의 초본 바르나르지아(Barnardia)의 학명 “Barnardia japonica (Thunb.) Schult. 1784”까지 포함 시켜버렸다.
이러한 분류를 보면 정말 가슴이 답답해 진다.
우리나라 백과사전은 현재 이것을 무릇이라고 하고 면조아(綿棗兒) 또는 야자고(野茨菰)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중국무릇’ 또는 ‘중국해총’이라고 하여 학명 “Scilla scilloides와 Chinese squill”를 같이 쓰며 때론 구분도 없이 일본해총“Barnardia(Scilla) japonica(Thunb.) Schult. & Schult.f”이라고도 하니 짬뽕이라는 것이다.
[3]地中海綿棗兒(学名:Scilla peruviana)又名地中海蓝钟花、地金球、野風信子、葡萄牙綿棗兒
species of Scilla native to the western Mediterranean region in Iberia, Italy, and northwest Africa.
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
門: 被子植物門 Magnoliophyta
綱: 單子葉植物綱 Liliopsida
目: 天門冬目 Asparagales
科: 風信子科 Hyacinthaceae
屬: 綿棗兒屬 Scilla
種: 地中海綿棗兒 S. peruviana
二名法
Scilla peruviana L. 페루秘魯綿棗兒
끝으로 지중해면조아(地中海綿棗兒)라고 하는 학명 'Scilla peruviana'을 살펴보면 보다시피 '페루면조아'라고 하였지만 분포지는 유럽 스페인지역에 집중적으로 산포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종소명과 실제 분포지가 차이가 나고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종소명과 실제 분포지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실례를 찾기가 힘든 경우이다.
위 한어자료에서도 '지중해면조아(地中海綿棗兒)'라고 하였고 종소명은 스페인어의 페루를 나타내는 페루비아노(peruviano)라 한 것이 틀림이 없는데 어떻게 '종소명'과 '근원지'가 다를 수 있는지 매우 희한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을 다르게 해석하자면 칠레가 유럽대륙에 있었다는 예측도 가능하다고 여길 수 있는 것으로서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매우 특별한 표본이라고 할 수가 있다.
결국 이렇게 식물분류학적 분석과 근원지파악을 한 결과 흰색 꽃의 검은 점이 있는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무릇이라고 하는 산자고 또는 야자고는 삼한 땅에서 생장되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고 이것을 평소에 비늘줄기(인경)와 어린 잎을 조려 먹곤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때론 약재로 때론 구황식물로도 사용하였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으며 또한 대나무 대신 복조리를 만들 정도로 힘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무릇의 속명인 'Scilla'는 유럽 지중해에서 약용하던 'Skilla'에서 나온 말이라는 사실도 확인 된 것이다. 그리고 서두에 언급한 서울미국공사관에 근무한 미국인 알렌(安連:Horace Newton Allen)이 이야기 한 삼한의 고대 국명"실라(Scilla)"는 무릇(山茨菰)의 속명으로 재탄생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무릇의 분포지 즉 원산지가 유럽지중해연안이라는 사실까지 확실하게 확인하게 된 사실을 말할 수가 있다.
다만 이 무릇이 신라의 터전이었다고 판단되는 북아메리카대륙 남부 지중해연안 같은 기후에 자생하였다고 판단되지만 모든 자료에서 이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게 하는데 이와 같은 것은 결국 삼한역사에 대한 서양인들의 특이한 콤플렉스로 인한 숨김이 아니겠는가 한다.
신라는 또다른 이름으로 유럽대륙에 존재하였다.
우리의 역사는 불투명하고 불확실성이 매우 많다.
그것 중에 하나가 신라를 지칭하는 이름으로서 위 생물학적 판단에 의거하더라도 서양사에서 실제와 다르게 명칭들을 갖다 붙인 경우가 비일비해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근세기 역사판짜기 하면서 자행된 것으로서 과학을 빌어 장난을 쳤다고 말 할 수 있다.
사실 신라의 위치는 세계전역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블로그 글 "커프라이트(赤銅石, cuprite)로 본 신라(新羅)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2 "글에서 북아메리카대륙 애리조나(Arizona)주가 적동광(red copper ore) 커프라이트(cuprite)의 주 생산지 근원지로 밝혀짐으로서 그곳에서 신라동(新羅銅) 또는 고려동(高麗銅)이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던 것과 또 본 블로그 글 "터키석(turquoise)과 청난석(靑蘭石)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0 "에서 청난석이라고 할 수 있는 녹송석은 미국 애리조나주(Arizona州)의 상징이며 네바다주(Nevada)와 뉴멕시코주(New Mexico)의 주석(州石)이라고 한 사실에서도 모두 북아메리카대륙 로키산맥 남쪽을 나타냄을 알 수 있었는데 이곳은 전통적으로 돌궐족이 발흥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 터키석은 돌궐옥(突厥玉)이었고 고려돌(高麗玉)이었던 것이며 그렇다면 신라돌(新羅玉)이라고 하여도 무방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
또한 본 블로그의 글 "칠면조(七面鳥, 火雞, turkey)로 본 터키(Turkey)는 북아메리카에 있었는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447" 에서 왜 칠면조를 미국인들은 터키 새(Turkey bird)라 하였을까 의문을 품고 국역승정원일기 고종 30년 계사(1893) 기록에 분명 오스트리아가 인도(印度:India)와 터키(Turkey)사이에 있었다고 한 사실을 놓고 보더라도 절대로 오스트리아가 유럽대륙에 있을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며 터키 역시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어야 한다는 결론까지 이른 상태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오스트리아도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신성로마제국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밖에 없게 한다. 또 하나는 이 글에서 아쉬웠던 것은 실라(scilla)의 속명인 무릇의 산자고에서 흰색의 검은 점이 있는 식물을 찾기가 힘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북아메리카대륙 아열대기후에 분명히 이 무릇이라는 산자고 분포지가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하였지만 현재 자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런 의혹들을 종합할 때 현재 유럽사 역시 유럽 지중해를 중심으로 발흥된 것이라고 단언 할 수 없게 한다. 유럽사가 근본적으로 재 검토 되어야 할 정황들이 지금 긴 줄로 길게 순서를 기다리며 늘어서고 있다는 것도 말 할 수가 있다.
문제는 신라가 유럽대륙에서 수천년 동안 통치를 한 것은 분명하지만 유럽대륙의 제국들이 유럽에 처음부터 존재하였다고 하기에 그러한 사실들이 뭍여 찾을 수 없다는 안타까움을 이글을 다 마치면서도 느끼게 하는 것들이다.
신라는 유럽대륙과 북아메리카대륙 그리고 남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여러각도에서 밝혀본 사실이지만 아마도 결국 언제인가는 유럽대륙이 아닌 곳에서 유럽제국들이 존재한 자취를 찾거나 실체를 밝혀볼 수 있는 것이 될 것을 기대할 수밖에 없게 한다.
우리는 헝가리민족을 훈족이라고 하거나 마자르족(Magyars)이라 하여 고구려유민이라고 하였다.
이 훈족을 흉노라고 하였는데 이 흉노가 신라조상이라고도 한다.
또 흉노는 돌궐족과 연결되고 거란족과도 연결된다.
바로 뿌리 근원은 하나 삼한이다.
그리고 본 블로그가 강조하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역사는 원래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삼한이 잉태한 태고적 영토에는 수많은 종족들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을 요즘들어 동양사로 만들어 전부 오랑캐(호)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유럽사에서는 오히려 왜구, 해적들이 주인되어 날개를 달고 있다.
서양자료를 보면 헝가리가 있었던 땅은 불가르투르크어(Bulgar-Turkic)로'온 오우르의 땅(Patria onoguria:On-Oğuz)라 하여 10개의 부족(People of 10 tribes)들이 모인 땅이라는 뜻을 가진 것이다.
이중제국이라고 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1867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와 헝가리의 헝가리인 귀족들 사이의 대타협으로 성립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을 엄밀하게 따진다면 고려와 신라의 합병같은 것이다.
오스트리아황제가 지배하는 제국의 서부,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동부의 헝가리가 가지고 있던 10개 부락을 합친 것이 된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이렇게 시작하여 1918년에 해체되는 운명을 맞게 되는데 이때 오스트리아 인구가 1914년 기준으로 약 52,800,000명이란 인구를 자랑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유럽사와 별도로 숨겨져 있는 역사가 더 많다는 것을 생각하기에 충분하다.
오스트리아가 만약 삼한의 고려나, 신라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처럼 거대한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해체되는 1918년은 세계사에서 엄청난 사건들이 줄줄이 이어지는 해로서 "로마의 아들"이라는 뜻의 로마노프왕조(House of Romanov:1613-1917)가 해체되면서 그 자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불쇼비키가 탄생하고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이전하는 천도(遷都)가 시작된 년도이며 일본이라고 하였지만 허드슨베이회사로 판명이 된 시베리아(북아메리카대륙)에 파병을 선언하는 것과 함께 북아메리카대륙은 신흥세력들에 의해 망신창이가 되는 세기말 증상과도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물론 서양사를 보면 이때 실제로 크지 않는 사건을 부풀리고 침소봉대한 결과로 엄청난 사건처럼 포장한 것도 다분히 많은데 현재 우리들은 그러한 사실들을 알 수도 없을 뿐더러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1918년은 세계삼한역사로는 감당하기 힘든 시대였음을 알게 한다.
만약 유럽대륙의 유적들이 실제로 존재한 것들이 맞다면 이 유적들은 삼한의 유물이어야 한다.
영국을 포함한 신생세력들이 기득권에 도전한 1차대전은 기득권세력들이 패배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지만 기득권의 자취고 숨결은 사라지거나 없어진 것이 절대 아니라고 판단한다.
또 하나의 이슬람계 신라 또는 고려 오스만 제국의 항복과 고려와 신라연합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항복에 이어 키타이족 독일제2제국의 빌헬름 2세가 혁명으로 퇴위하면서 붕괴되고 이어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결국 해체되는 것으로 삼한역사의 거대한 굴곡은 끝이 난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듬해인 1919년은 세계 대조선 영역에서는 불같이 일어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신흥세력들의 무자비한 파괴와 점령에 대한 반발로 복고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부흥운동이 전세계적으로 불같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반도역사는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이라고 한 것이다.
1919년 3.1운동에 이어 인도에서 벌어진 1919년 4.13운동과 동아시아대륙 신중국에서 벌어진 1919년 5.8운동까지가 그렇다.
이러한 운동이 일어난 장소가 결코 한반도이고 동아시아대륙이며 인도아대륙이라고는 절대 생각지 않는다.
결어
나는 이런 생각도 해본다.
왜 세계삼한역사가 감추어질 수밖에 없는 대상이 되었을까?
그것은 뛰어난 문화가 가져다 준 나쁜 결과라고 생각되는 점이다.
세계삼한역사에서 코리아 사람들이 라틴어 25자의 알파벳을 사용하였다는 사실과 학문적으로는 한문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빙산의 일각 이 보다 더 어마어마한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을 뿐이다.
산스크리트어가 사용되었을 개연성도 충분하게 있다.
아마도 이처럼 모든 역사사실을 여러개의 언어로 작성되고 보관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데 이것들이 하나의 주체가 사라지자 각자 다른 역사로 분리하게 되는 빌미가 되었고 이렇게 되자 돌이킬 수 없는 또 다른 역사 되어 버렸다고 보여진다.
한문이 동아시아에서 분리되고 라틴어가 유럽 각 나라별로 분리되고 또한 영어로 분리되면서 것잡을 수 없이 파열한 결과라고 보인다.
산스크리트어가 사라지고 고대어가 사라지며 서양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전부 각색되었을 것이란 사실은 충분학 인지할 수 있다.
세계삼한역사관은 그냥하는 찾아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풀어야할 수수께끼는 일제에 의한 피지배역사 수수께끼와 그것에 대한 사실여부및 조선총독부란 실체가 무엇이며, 나카사키란 위치뿐만아니라, 히로시마와 나카사키 동시에 떨어진 원폭의 진실성이 무엇인지 먼저 밝혀야 한다.
생각해보라.
제일 구린 곳을 없애버리려 한다면 핵폭탄만큼 깨끗한 것은 없을 것이다.
나카사키는 일본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엄밀히 따진다면 핵폭판을 투하할 일이 있었어도 미국이라는 초강대국 또는 세계경찰국의 입장에서 함부로 시행할 결정이 아니라는 말이다.
유네스코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고대로부터 역사성이 많은 도시는 폭격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선진문화국이라고 전쟁방지법에도 들어있다고 알고 있다.
전시 문화재 보호에 대한 1899년과 1907년 헤이그 협약의 원칙 특히, 1907년 4차 헤이그 협약의 규약 제 27, 56조와 기타 후속 조약들이 있으며 현재도 “어떤 민족이든 그 나름대로 세계 문화에 그 나름대로 공헌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민족에 속하는 문화재에 대한 손상은 곧 모든 인류의 문화유산에 대한 손상을 의미한다.”[문화유산의 고의적 파괴에 관한 유네스코 선언]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곳을 목표로 삼아 핵폭탄을 투하했다고 사진을 찍어놓고 지금 나카사키 도시의 원 도로, 산, 지형등을 맞추어놓고 있다는 것은 미국이란 국가 위신을 생각할 때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이야기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도덕적으로 앞서야 하는 미국은 당시 일본을 상대로 무차별 파괴행위에 대한 책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간단한 이치이다.
때문에 태평양전쟁은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이 아닐 수도 있다.
본 블로그의 글, 삼한역사 말살의 도구로 사용된 삽화(揷畵)와 사진(寫眞)의 진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8 에서 언급하였듯이 당시 상황을 촬영한 사진과 기록영화에 남겨져 있는 사실들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고 한다면 태평양전쟁당시 일제가 가지고 있었다고 하던 제항공기 및 괄목할 무기와 항공모함과 제 군함등 그들이 실제로 무기를 제작하거나 군함을 건조할 수 있었던 기술력과 군사결집력등은 어디서 나온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전달받고 20세기 미국과 대적할 정도의 강한 군사력을 가질 수 있었는가에 대한 것등은 우리가 반드시 파헤쳐야만할 숙제인 것이다.
실제로 일제가 무지막지하게 전쟁을 걸었다면 미국은 열도 본토점령을 위한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왜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오키나와만을 점령하는 것으로 끝내야 했을까?
앞에서 언뜻 이야기 했지만 오스트리아가 1914년 기준으로 약 52,800,000명이란 인구규모는 정말로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 때 오스트리아가 가지고 있던 전투함이 거의 9000톤급으로서 수십대가 있었으며 나머지 함선들도 그것에 못지 않는 대단한 것이었음도 알 수가 있었는데 어떻게 이런 나라가 유럽대륙 한폭판 오그라들 수 있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오스트리아의 처지가 한반도를 보는 듯하다.
우리가 100년간 몸서리가 치도록 반도역사로 인해 망신창이가 된 마당에 무엇을 마다하겠는가 만은 반드시 역사로 인한 치욕적인 멍에만은 벗어던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나의 작은 바람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민족은 엉터리같은 날조되고 존재하지도 않은 굴레에서 영원토록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란 암담함과 언제까지고 일제의 망령이란 굴레에서도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려한다는 암울한 미래만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본역사가 근세기 1868년 경에 생성되었다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로서 17세기초 그들이 한결같이 내세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후 그들이 살기위해 대조선에게 한 짖을 보면 현재 일본이라는 실체가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쉽게 알 수 없게 한다.
또한 1868년 명치유신 전까지의 대조선체제에 묶어 있었던 상황을 보더라도 짧은 시간에 서세의 지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태평양전쟁을 치룰 수 있을 정도로라고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1941년도 열도 일본의 군사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풀어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를 현재 반도역사 상식으로는 도저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이라면 가능하다.
그래서 이렇듯 노력하는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왕조 합스부르크의 땅 오스트리아는 일제의 변신과도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어 오스트리아가 가지고 있는 신비로운 열쇠를 찾아야 한다.
일본역사와 러시아역사 역시 마찬가지로 한반도 역사와 긴밀하게 연결됨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일본과 마찬가지로 현재 러시아의 태동도 그렇게 진실된 것이 아닐 것이다.
현재 한반도를 기준으로의 역사는 근세기 빨라도 1910년부터의 역사라고 유추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조선신사대동보(朝鮮紳士大同譜)에 등재된 1만여 명의 조선 유명 인사가 대동보에 수록된 1913년 편집된 시기임을 감안할 때 대한제국이 망한 시기(1910)와 청나라가 망한 시기(1912)를 맞추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은 한반도에 조선만들기가 시작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는 신라, 고려, 조선 난민들의 집합소였을 수도 있다.
1881년에 해체된 대조선은 땅 넓이가 기만리라 하여 1만리가 넘었으니 미국전체의 땅임을 알았다.
대조선이 1881년 해체되고 난 후 그 때 부터 중국인추방령이 시행되었다는 사실도 알았으며 그 후 변함없이 세계는 고려와 신라세력으로 나뉘어진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고려는 러시아를 포함한 아시아대륙과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제국으로 귀결되며 신라는 남아메리카대륙 및 유럽대륙 전 지역의 국가들이 파생하는 모체로 나타나고 역시 중앙아메리카 그리고 북아메리키대륙 서부쪽에도 짙은 색깔을 풍기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신라는 북아메리카대륙 동남부에서도 강한 세력들이 있었다고 보여지기도 한다.
어쩜 신라는 어마어마한 역사사실을 가진 주체라고 풀이 할 수도 있다.
결국 신라와 고려가 우리에겐 분명하게 하나라고 생각되는 것이지만 현재 세계사는 수도 없이 분리되었다는 사실은 [고인돌과 거석문화]를 쓴 변광현 교수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특히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때 일본이라고 판단되는 영국이 주도한 근세기에 들어 유럽역사 조작행위가 공공연하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가 있다.
동양사로 볼 때 일본이고 서양사로 볼 때 영국이어야 맞다.
여기서 다시 한번 정리를 하면 일본은 때로는 포르투갈로 네덜란드로 그리고 영국회사로 나타나는 것은 속일 수가 없다.
북유럽과 잉글랜드 섬을 포함한 지역이 일본 구주라는 것도 알았다.
북유럽에는 유대계 게르만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특히 유대인계 독일인들이 극단적인 테러를 감행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주로 삼한역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아마도 히틀러는 이러한 세력들이 두려웠을지도 알 수가 없다.
영국은 브리티시를 손아귀에 넣고 비로소 영국이 된다.
나는 여기서 감히 유추하길 북아메리카대륙 서북부에 있었던 신흥세력들이 신라와 고려의 유물이 산재되어 있는 동유럽대륙을 차지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2차세계대전 이후이다.
물론 서유럽은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출신들임이 틀림 없다.
현재 유럽대륙은 절대적으로 오랜 시간을 두고 변형된 나라들의 위치나 경계가 아니라는 사실은 동유럽을 보면 매우 간단하게 알 수 있고 오스트리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아마도 세계1차, 2차대전을 거치면서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국가 경계선일 것이다.
최종 이것들을 정리하면 고려와 신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유럽사에 근원적으로 영향을 끼치면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근세사는 이러한 고려와 신라를 완전히 배제시켜 버리고 유럽사를 새로 창조했다는 사실을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렇다, 이 글을 마치면서 얻은 소득이라면 이제 어느정도 명확하게 삼한역사의 거대한 레이아웃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는 자신감일 것이다.
[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세계삼한역사 > 식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사리(天賜梨)는 페피노(pepino) (0) | 2014.06.23 |
---|---|
흰자작나무(白樺:Betula populifolia)는 박달나무(Korean birch) (0) | 2014.04.01 |
조선패모(朝鮮貝母)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0) | 2014.03.04 |
민들레(蒲公英:Taraxacum)와 코리아눔(coreanum) (0) | 2014.02.09 |
불란서만수국(法国萬壽菊)은 황국화(Tagetes patula)란 조선의 꽃이다. (0) | 2014.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