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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왕조의 두여제와 신라의 두여왕?
글쓴이:한부울 (원본 개시:2011.07.19 18:54)
사산왕조 (Sassanid Empire, 224–651)
신라왕조 (新羅, Silla Empire, BC 57-AD 935)
상고(上古: 시조~22대 지증왕, BC 57~514)
박씨 왕조(BC57-57)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이사금(泥師今)
석씨 왕조(57-80)이사금(泥師今)
박씨 왕조(80-184)이사금(泥師今)
석씨 왕조(184-261)이사금(泥師今)
김씨 왕조(261-284)이사금(泥師今)
석씨 왕조(284-356)이사금(泥師今)
김씨 왕조(356-514)마립간(麻立干)
김씨 왕조(514-654)
중고(中古: 29대 무열왕~36대 혜공왕, 654-780)
하고(下古: 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780-935)
김씨 왕조(780-912)
박씨 왕조(912-927)
김씨 왕조(927-935)
서산왕조와 신라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두고 나름대로 자료를 찾아 분석한 결과를 7단계로 구분하여 본 블로그에 올리고자 한다.
그 첫 단계로
(1) 사산왕조의 여제 즉 여왕이 두 명, 푸란도흐트 (여제), 아자르미도흐트(여제)가 있었는데
이 여왕들이 신라의 선덕여왕(善德女王)과 진덕여왕(眞德女王)인가 하는 점이다.
이 사실을 밝히기 전에 최근 학계에서 주장되고 있는 페르시아 사산왕조와 신라의 관계설정하는 부분을 한 번 볼 필요성이 있어진다.
최근 대영박물관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쿠쉬나메(Kush-nameh·쿠쉬 이야기)의 실체는 과연 신라와 사산왕조가 같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별개의 나라로 만들어 영구히 분리하기 위한 수단인가에 대한 의심이 없지 않다. 이 쿠쉬나메 역시 이미 세계사를 선점하고 기득권을 확보한 서세의 대표주자 영국의 대영박물관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신뢰를 주기보단 현 세계사의 기조를 흔들지 않는 범위내에서 그러나 새롭게 발견된 사실정도의 가치일뿐이다.
다시말해 어찌되었던 한반도의 신라와 이란의 사산왕조가 같다는 등식은 있을 수 없으며 오히려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래서 그러한 등식을 도저히 벗어날 수 없게 하는 자료라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나마 '신라[Shilla]'를 실증하는 사실이기 때문에 아래 보도자료의 기사를 그대로 옮겨본다.
최근 대영박물관에서 필사본 원본이 발견되었다고 하고 아랍권에서 '서사시의 전성시대'로 불리는 11세기 무렵에 만들어져 전해지다(口傳)가 14세기에 필사된 것으로 보이는 쿠쉬 이야기, 쿠쉬나메(Kush-nameh)가 이란에서 1998년 인쇄본이 출간됐었으며 그 인쇄본에서 상당히 많은 '신라[Shilla]' 또는 '바실라[Bashilla]'에 관한 내용"이 있다 하였다.
아랍 문헌에선 신라를 알신라(Alshilla), 페르시아 문헌에선 '베실라(Beshilla)등으로 표기하는데 내용에서 사산왕조 페르시아(226~651)가 아랍의 공격으로 멸망한 이후 쿠쉬라는 무서운 영웅의 전설을 노래한 서사시로서 사산왕조 유민들을 이끌고 중국으로 피신한 쿠쉬가 주인공이며 신라 관련 부분은 쿠쉬의 어린 시절 후견인인 아비틴(Abtin)에 집중되었고 산중에 버려진 쿠쉬를 거둬 키워준 페르시아 유민 지도자 아비틴은 위기에 몰리자 중국의 변방국가인 마친(Machin)왕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그는 직접 도움을 주는 대신 이웃의 신라왕인 타이후르(Tayhur)를 추천해준다. 그러면서 신라는 낙원처럼 살기 좋은 곳으로 침략을 받지 않은 나라라고 알려주며 추천 편지를 써준다. 배를 타고 신라에 도착한 페르시아 사람들은 마친 왕의 편지를 신라왕에게 전달하고 극진한 환대를 받는다.
신라에 정착한 아비틴은 신라왕과 함께 사냥을 다니고 국정의 조언자로 활동한다. 아비틴은 신라 공주인 프라랑(Frarang)과의 결혼을 요청한다. 신라왕은 프라랑을 직접 본 적이 없는 아비틴 앞에 비슷한 모습의 처녀 10명을 놓고 찾아내라고 말한다. 아비틴이 정확히 공주를 지목하자 왕은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한다. 공주가 임신한 상태에서 페르시아 사람들은 조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항해에 능숙한 신라인의 안내로 페르시아로 향하던 중 프라랑 공주는 왕자를 출산한다. 이 왕자는 훗날 아랍군을 물리치고 조상의 원수를 갚는다는 줄거리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기적으로 보면 14세기에 필사된 것이라고 하였으니 서세가 개입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산왕조와 신라가 같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는 없다고 본다.
신라를 멀리 떼어 버려 한반도에 있을 법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신라왕을 한문으로 지칭할 때 태호라고 발음하였을 가능성을 볼 수있다.
또 하나는 배를 타고 신라에 갔다고 배를 타고 나왔음을 알 수 있는데 바다 해를 강조한 측명이 많다.
또한 신라로부터 나올 때 항해에 능숙한 신라인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바다를 지배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라공주에게 장가간 페르시아인의 아들이 나중에 아랍세력들을 물리치고 조상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야기가 마치 신라가 아랍인들을 물리치는 역할을 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적어도 신라와 페르시아가 같은 역사를 가진 것이라고 암시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아랍에서 나왔다고 하는 자료는 근세기 이미 서세의 손을 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자료는 서세가 차지하지 못한 아랍 또는 페르시아 토속적인 자료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보여 진다.
때문에 위 자료 쿠쉬나메(Kush-nameh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서의 역사들은 솔직히 무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러한 부분에서도 비판능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좀 다르게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벼락같이 찾아 이 자료를 보고 연구해야 마땅하다.
어느집에 불이 났나 하며 태무심한 것은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기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절대로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반도역사 틀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벗어나려고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문신처럼 명확한 사실이다.
명성께나 있고 자칭, 타칭 유명세에 있는 역사학자들 소신있는 바른 소리 할 사람 절대 없다.
그저 꼭두각시처럼 기존 틀에서 벗어 날 수 없는 한정된 생각과 언동만 있을 뿐 누구도 그 틀을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사하계의 행태이다.
그러니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답은 얻을 수가 없고 더 이상 기대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어렵더라도 직접 찾아 나서야 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진보된 정보통신문화 덕분에 아래 인터넷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자료들이속속들이 발견되고 때문에 그들이 정한 선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하여 유명학자, 명망있는 사학자들에게 무시될 수 있는 것이지만 이러한 자료들이나 주장들이 모두 신선하고 오히려 신뢰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아래 자료들을 먼저 제시하면서 들어가고자 한다.
문제는 이 자료들을 한반도에 신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배제하고 읽어야 하는 것이다.
기존 반도역사에 끌여다니지 말고 늘 상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하고 비판하고 찾아야 한다.
(예2) 4~5세기대 제작된 황남대총(皇南大塚) 남분(南墳)에서 출토된 봉수형유리병(鳳首形琉璃甁)<국보193>은 시리아 등지에서 생산되어 동부 지중해연안과 터키를 비롯하여 에게해(愛琴海, Aegean Sea)연안과 흑해(黑海)주변에서 사용되던 물품이었다.
(예3) 황남대총(皇南大塚) 북분(北墳)에 출토된 은제 잔에 부조된 인물상은 고대이란의 여신인 아나히타상(Anâhita)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예4)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유리잔은 당시 한반도에서는 원료가 생산되지 않는 코발트색이 들어있다. 이란에서 발달한 컷글라스가 황남대총(皇南大塚) 북분(北墳)에서 독일 쾰른(Köln)지방에서 유행한 반점문 유리잔이 금령총(金鈴塚)에서 각각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리잔은 지중해 연안과 남러시아 혹은 흑해연안 카브카즈(캅카스, Caucasus)를 지나 스텝루트와 북중국을 통해 전래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예5) 천마총(天馬塚)에서 출토된 남색 귀갑문(龜甲文)유리잔은 동부 지중해연안이 그 산지로 추정된다.
(예6) 미추왕릉 지구에 출토된 인물이 상감된 유리구슬은 경주 외에는 동북아시아에서 출토된 사례가 없다 했으며 신라 고분에 출토된 정교한 귀고리와 가락지는 흑해 연안의 4~5세기 대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들이라고 했다.
마두식각배(馬頭飾角杯)
(예7) 북방 오르도스(Ordos)지역에서 주로 만들어진 청동 대구(帶鉤)가 신라영역에 집중적으로 출토될 뿐 아니라 신라·가야 고분에서는 토제각배(土製角杯)가 많이 출토되고 있으며 대부분 배(杯)를 세우기 위한 받침대와 같이 출토 되거나 대각(臺脚)과 함께 붙은 경우도 있다. 마두식각배(馬頭飾角杯)는 고대 그리스·페르시아 등지의 리톤(rhyton : 장식이 붙은 뿔잔 형태)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으며, 특히 사산조(Sassanid Empire, 224–651) 이란의 각배와의 유사 성이 있다.
(예8) 경주 괘릉(掛陵)에는 무인상(武人像)이 있다. 무인상의 이마에 두르고 있는 띠는 고대 사산왕조 이란 귀족들의 징표이며, 매부리코와 곱슬곱슬한 턱수염, 부라리는 큰 눈은 무인상의 모델이 이슬람인이었음을 말해준다. 처용가의 처용이 원래 이슬람인이었다는 학계의 견해도 있다.
이란에서 발굴된 대서사시 <쿠쉬나메>에서 페르시아와 신라가 밀접한 관계를 나타낸 사실을 밝힌 것처럼 위 게시한 사진자료는 여러가지 합치점을 읽어 내려가게 하고 있다.
이것들을 바탕으로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페르시아의 사산왕조와 신라의 관계를 좀 더 세밀하게 알아보기로 하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사산왕조 페르시아제국 지배자(Sassanid Empire, 224–651)
지배자 |
영명 |
연도 |
아르다시르 1세 |
Ardashir I |
224-241 |
샤푸르 1세 |
Shāpūr I |
241-272 |
호르미즈드 1세 |
Hormizd I |
272-273 |
바흐람 1세 |
Bahram I |
273-276 |
바흐람 2세 |
Bahram II |
276-293 |
바흐람 3세 |
Bahram III |
293 |
나르세스 1세 |
Narses / Narseh |
293-302 |
호르미즈드 2세 |
Hormizd II |
302-310 |
샤푸르 2세 |
Shapur II |
310-379 |
아르다시르 2세 |
Ardashir II |
379-383 |
샤푸르 3세 |
Shapur III |
383-388 |
바흐람 4세 |
Bahram IV |
388-399 |
야즈데게르드 1세 |
Yazdegerd I |
399-420 |
바흐람 5세 |
Bahram V / Bahramgur |
420-438 |
야즈데게르드 2세 |
Yazdegerd II |
438-457 |
호르미즈드 3세 |
Hormizd III |
457-459 |
페로즈 1세 |
Peroz I |
457-484 |
발라시 |
Balash |
484-488 |
카바드 1세 |
Kavadh I |
488-531 |
쟈마습 |
Djamasp, Jamasp |
496-498 |
호스로 1세 |
Khosrau I |
531-579 |
호르미즈드 4세 |
Hormizd IV |
579-590 |
바흐람 코빈 |
Bahram VI |
590-591 |
사만왕조 연결 |
비스탐 |
Bistam |
591-595 |
|
호스로 2세 |
Khosrau II, Khosrow II |
591-628 |
진평왕 |
카바드 2세 |
Kavadh II |
628 |
|
아르다시르 3세 |
Ardashir III |
628-630 |
|
샤흐르바라즈 |
Shahrwaraz |
630 |
|
푸란도흐트 (여제) |
Purandokht |
630-631 |
선덕여왕 |
페로즈 2세 |
Peroz II |
631 |
|
아자르미도흐트(여제) |
Azarmidokht |
631 |
진덕여왕 |
호르미즈드 6세 |
Hormizd VI |
631-632 |
|
야즈데게르드 3세 |
Yazdegerd or Yazdiger |
632-651 |
|
신라왕조 (新羅, Silla Empire, BC 57-AD 935)
김씨왕조 | |||
17 |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
356-402 |
각간 말구(末仇) 아들. |
18 |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 |
402-417 |
이찬 대서지(大西知) 아들. |
19 |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
417-458 |
내물 마립간 장자. |
20 |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
458-479 |
눌지 마립간 장자. |
21 |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
479-500 |
자비 마립간 장자. |
22 |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지증왕(智證王) |
500-514 |
습보갈문왕(習寶) 아들. |
23 |
법흥왕(法興王)-원종(原宗) |
514-540 |
지증왕 아들. |
24 |
진흥왕(眞興王)-삼맥종(彡麥宗) |
540-576 |
법흥왕 조카. |
25 |
진지왕(眞智王)-사륜(舍輪), 금륜(金輪) |
576-579 |
진흥왕 차남. |
26 |
진평왕(眞平王)-백정(伯淨, 白淨, 白丁) |
579-632 |
진흥왕의 장손이자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 |
27 |
선덕여왕(善德女王)-덕만(德曼) |
632-647 |
진평왕 장녀. |
28 |
진덕여왕(眞德女王)-승만(勝曼) |
647-654 |
진평왕 동생 국반(國飯) 딸. |
이제부터 실제로 사산왕조의 푸란도흐트, 아자르미도흐트 여왕과 신라 선덕, 진덕여왕이 같은 것인가에 대해 알아봄에 있어 사산왕조와 신라의 관계 역사를 하나씩 풀어가도록 하자.
사산왕조(Sassanid Empire, 224–651)말기 푸란도흐트(Purandokht, 630-631)여왕과 아자르미도흐트(Azarmidokht, 631)여왕이 시기적으로나 여러 가지 상황적인 면에서도 신라말기 선덕여왕(善德女王, 632-647)과 진덕여왕(眞德女王, 647-654)을 닮아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이렇게 똑같이 여제, 여왕이 그것도 다같은 계보 말기에 있을 수가 있는가 하는 말이다.
그것도 여자 왕을 금기시 하던 페르시아에서 두 명의 여왕이 있었다는 것도 생소한 사실이지만 한반도 신라에서도 똑 같이 그것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두 명의 여왕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아니라고 하더라도 훤히 들여다 보이는 그래서 누가 어떤 변명을 내놓더라도 동일한 나라임을 부정할 수 없게 하는 결정적인 명백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설명한 반도사 이야기를 가지고 무엇과 비교하기는 싶지 않다.
반도사 이야기 스토리 자체가 어떤 도서 지방을 다스리는 소국의 묘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또한 한반도를 한정하고 있으니 부딪치는 대상도 고구려, 백제와 왜구란 영역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함은 물론이고 사대하는 수, 당의 그늘 또한 벗어나지 못하는 식민지역사 그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대를 한반도가 아닌 지중해를 바탕으로 한 코카서스, 중앙아시아, 아랍을 기준으로 놓고 전체적인 상황을 들여다 볼 때 이야기는 신라가 가지는 한계가 무너지고 역사해석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아래 업적을 구분하여 비교 해 보았는데
이야기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산왕조 첫 번째 여왕 푸란도흐트 집권업적상황을 요약하면
(1)세금을 낮추고,
(2)도시 시설물들을 재건하고,
(3)정의를 실천하며,
(4)비잔틴제국(Byzantine Empire 330-1453)과 평화를 맺는 등의 시도
(5)수많은 반란이 있었고 그것을 평정하려고 애를 썼지만 실패했다는 내용이며
(6)종국에 푸란도흐트 자신은 집권한지 얼마 되지않아 살해당한다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집권시기가 자료에서도 불분명함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꼭 1년이란 등식은 맞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라 선덕여왕의 집권업적상황을 요약하면
(1) 그녀가 즉위하기 1년 전인 631년, 칠숙과 석품이 반란을 일으켜 위기에 몰렸으나 이 난은 곧 진압되었다.
난이 있었다는 것은 사산왕조 여제와 같다.
(2) 즉위년인 632년에 각지에 관리를 파견하여 홀아비, 홀어미, 고아, 독거노인 등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게 하였다.
(3) 633년 여러 주 · 군의 조세를 1년간 감해 주었다.
조세부분도 같다.
(4) 634년 분황사를 완성하였다.
645년 자장법사의 건의로 여왕은 3월에 황룡사탑을 세웠다.
도시시설물 재건하는 것도 같다.
(5) 635년 겨울에는 이찬 수품(水品)과 용수(龍樹)를 보내어 각지의 민심을 위로하였다.
(6) 당나라와의 관계도 강화하였다. 즉위년 12월에 사신을 보낸 이래, 여러차례 사신이 오갔다.
640년에는 귀족 자제들을 당나라에 유학을 보냈으며,
642년 정월에는 당나라에 토산품을 바쳐 양국 관계를 돈독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선덕여왕 재위 내내 당나라와의 조공 관계가 성립되었다.
643년 정월에도 당에 토산품을 바쳤다. 백제침공으로 9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당 태종이 “그대들은 여인을 임금으로 삼고 있으니 백제, 고구려의 업신여김을 받고 임금의 도리를 잃고 있다. 이에 내 왕족을 보내 신라왕으로 삼으려 한다.”고 대답하여 사신은 빈손으로 귀국하였다.
644년 정월에도 당에 조공을 바쳤다.
645년 정월에도 당에 조공을 바쳤다.
나중에 또 이야기 하겠지만 로마는 분명 백제와 계보가 동일선상에서 이루어짐을 알 수 있어 백제가 로마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지중해를 차지한 세력을 중국이라고 했으니 아마 수, 당에 비교 한 것 같아 비잔틴제국(Byzantine Empire 330-1453)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그리스 조각상에서 core 하는 단어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도 참고 할만하다.
Kore / Korai 니케신전의 코레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유적지에서 발굴된 조각상으로 파르테논 신전 뒤에 있는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코레(Kore)는 그리스어로 처녀라는 뜻이다.
(7) 재위 초부터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여
633년 신궁에 제사를 드린 바로 다음 달 서라벌에 지진이 나고, 그 해 8월에는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분황사를 완성한 634년 3월에는 알밤만한 우박이 내렸다.
636년 그 해 3월에는 여왕이 병이 들었는데, 이를 낫게 하기 위해 황룡사에서 큰 법회를 열었다. 같은 해 자장법사가 불법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들어갔다.
김부식은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라며 왕의 치세를 혹평하였다. 이덕일은 이를 유교적 가치를 갖고 있던 김부식의 차별적 선입견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여왕이란 부분을 의도적으로 비하하는 해설이 첨부되고 김부식까지 폄하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이것은 일제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의도적으로 유교적 사상을 첨가하는 억지스러움으로 비쳐진다.
(8)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재위 5년인 636년부터는 백제와의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642년 7월 백제 의자왕의 대군이 쳐들어와 서쪽 40여 개 성을 빼앗겼다.
645년 백제와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5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자 군사 3만을 파견하여 이를 도왔다. 그러나 그 사이에 백제에게 일곱 성을 빼앗겼다.
(9) 재위 마지막 해인 647년 정월, 상대등 비담이 염종(廉宗)과 함께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유신을 파견하여 비담을 상대하게 하였다. 그러나 반란 와중인 정월 8일에 여왕은 승하하였다.
이것도 사산왕조 여제처럼 암살 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산왕조 여제도 이란 귀족에게 살해된다고 했다.
비담(毗曇, ?-647)역시 진골로 추정되는 귀족이며, 상대등(上大等)을 역임했고 반란을 일으킨 역신(逆臣)이다
이 모든 것을 일제가 숨기고 바꿔치기 한 것이다.
무엇을 더 말하랴....
그러나 사산왕조의 두 번 째 여왕 아자르미도흐트(Azarmidokht, ? - 631/632년)의 자료가 부족하여 나중에 다시 한 번 논의하기 로 한다.
그렇지만 꼭 집고 넘어 가야 할 내용은 바로 집권 시기에 관한 것이다.
위키 설명에도 나오지만 호스로 2세의 뒤를 이은 여러 황제들은 상대적으로 오래 집권하지 못하고 교체되었으며, 이들에 대해 아직도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하였고 게다가 이미 알려져 있는 내용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모순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아자르미도흐트가 정확히 언제 집권하였는가에 대한 것은 확실치 않다고 했으며 사산 왕조에선 여성이 황제로서 집권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 덧붙이고 있다.
또 하나 여자가 집권을 한다는 것은 당시 사산왕조 뿐만 아니라 신라에서도 반감이 많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신라 김부식이가 첨가한 것과 괘를 같이 하고 있다.
이같은 엄청난 사실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자세는 가부간 가슴을 열고 진실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의 역사이니까 우리가 먼저 긍정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요구되는 것이고 이것을 토대로 역사관을 좀 더 넓혀가야하지 않겠는가 한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2011년 07월에 작성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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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왕조와 신라의 두 여왕 위키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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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란도흐트(Buran or Poran, or more correctly Burandokht or Purandokht, ?-631)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샤이다.
부란(Buran) 또는 포란(Poran) 혹은 보란두흐트(Borandukht)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호스로 2세(Khosrau II, Khosrow II, Chosroes II, or Xosrov II, 590–628)의 딸이며, 사산 왕조 최초의 여왕이다.
푸란도흐트는 아르다시르 3세(Ardashir III, 621-630)를 살해한 샤흐르바라즈(Shahrbaraz 또는 Shahrwaraz, ?-630)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푸란도흐트는 제국의 안정을 위해 새로운 동전을 주조하거나, 세금을 낮추고, 도시 시설물들을 재건하고, 정의를 실천하며, 비잔틴제국(Byzantine Empire 330-1453)과 평화를 맺는 등의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수많은 반란 등으로 약해진 사산 왕조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푸란도흐트의 시도는 실패적이었다.
푸란도흐트는 집권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살해당한다.
피르다우시는 《샤나메》에서, 푸란도흐트는 사산 왕조의 최대 영토를 보유하였던 호스로 2세의 업적과 권위를 되찾기 위해 헌신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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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善德女王, ?-647:재위632-647)
또는 선덕왕(善德王)은 신라의 제27대 여왕이며, 한국사에서의 최초의 여왕으로 알려져 있다. 성은 김(金), 휘는 덕만(德曼)이다. 진평왕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이며 태종무열왕의 큰이모이다.
그녀가 즉위하기 1년 전인 631년, 칠숙과 석품이 반란을 일으켜 위기에 몰렸으나 이 난은 곧 진압되었다. 이때 상황은 ‘흰 개가 궁궐 담장에 올라갔다’고 표현되어 있다.
즉위년인 632년에 을제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케 하고, 각지에 관리를 파견하여 홀아비, 홀어미, 고아, 독거노인 등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게 하였다.
633년 정월에는 스스로 신궁에 제사를 올렸으며, 여러 주 · 군의 조세를 1년간 감해 주었다.
634년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를 완성하였다.
635년 겨울에는 이찬 수품(水品)과 용수(龍樹)를 보내어 각지의 민심을 위로하였다. 당나라와의 관계도 강화하였다. 즉위년 12월에 사신을 보낸 이래, 여러 차례 사신이 오갔으며,
재위 3년인 635년에는 당나라로부터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재위 초부터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633년 신궁에 제사를 드린 바로 다음 달 서라벌에 지진이 나고, 그 해 8월에는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분황사를 완성한 634년 3월에는 알밤만한 우박이 내렸다.
636년 정월에는 수품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그 해 3월에는 여왕이 병이 들었는데, 이를 낫게 하기 위해 황룡사에서 큰 법회를 열었다. 같은 해, 자장법사가 불법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들어갔다.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재위 5년인 636년부터는 백제와의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640년에는 귀족 자제들을 당나라에 유학을 보냈으며,
642년 정월에는 당나라에 토산품을 바쳐 양국 관계를 돈독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선덕여왕 재위 내내 당나라와의 조공 관계가 성립되었다.
같은 해 7월 백제 의자왕의 대군이 쳐들어와 서쪽 40여 개 성을 빼앗겼다.
643년 정월에도 당에 토산품을 바쳤다. 9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당 태종이 “그대들은 여인을 임금으로 삼고 있으니 백제, 고구려의 업신여김을 받고 임금의 도리를 잃고 있다. 이에 내 왕족을 보내 신라왕으로 삼으려 한다.”고 대답하여 사신은 빈 손으로 귀국하였다.
644년 정월에도 당에 조공을 바쳤다. 이에 당 태종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공격을 멈추라고 종용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신라는 일전에 고구려와 수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 그 틈을 타 우리의 영토를 500리나 빼앗았다.”며 거절하였다. 9월에 왕은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고 백제를 공격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
645년 정월에도 당에 조공을 바쳤다. 백제와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자장법사의 건의로 여왕은 3월에 황룡사탑을 세웠다. 5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자 군사 3만을 파견하여 이를 도왔다. 그러나 그 사이에 백제에게 일곱 성을 빼앗겼다. 11월에는 비담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재위 마지막 해인 647년 정월, 상대등 비담이 염종(廉宗)과 함께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유신을 파견하여 비담을 상대하게 하였다. 그러나 반란 와중인 정월 8일에 여왕은 승하하였다. 시호를 ‘선덕’이라 하였고, 일전에 예언한 것처럼 낭산에 장사지냈다.
선덕여왕은 재위 초반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구휼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으며, 첨성대를 건립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그녀가 백성들을 얼마나 인자하게 아끼고 사랑했는지는 지귀(志鬼)의 설화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선덕여왕을 흠모하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지귀는 그 중에서도 특히 흠모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행차할 때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선덕여왕이 이를 보고 그의 가슴 위에 자신의 팔찌를 놓고 떠났다. 지귀가 잠이 깨어 이를 알고는 마음에서 불이 나 영묘사(靈廟寺)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또한 불교 또한 널리 장려하여 분황사, 영묘사 등 절을 많이 건립하고 불경을 연구시켜 불교의 일대 부흥을 가져왔다. 특히 선덕여왕은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 80m의 거대한 탑으로 이를 모두 9층으로 한 뜻은 이웃의 9적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기 위해 나라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
그러나 김부식의 사론은 이와 사뭇 다르다. 그는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라며 왕의 치세를 혹평하였다. 이덕일은 이를 유교적 가치를 갖고 있던 김부식의 차별적 선입견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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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르미도흐트(Azarmidokht, ? - 631/632년)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샤이다.
호스로 2세(Khosrau II, Khosrow II, Chosroes II, or Xosrov II, 590–628)의 딸이며 푸란도흐트의 뒤를 이은 두 번째 여왕이다.
호스로 2세의 죽음은 제국에 커다란 혼란을 불러들였다. 호스로 2세의 뒤를 이은 여러 황제들은 상대적으로 오래 집권하지 못하고 교체되었으며, 이들에 대해 아직도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게다가 이미 알려져 있는 내용도 믿을 수 없고 모순되는 부분이 있기에, 아자르미도흐트가 정확히 언제 집권하였는가에 대한 것은 확실치 않다. 또한 사산 왕조에선 여성이 황제로서 집권하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섭정으로 통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있다.
타바리(Muhammad ibn Jarir al-Tabari 838-923)에 의하면 아자르미도흐트는 630년에 몇 달 동안 재임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것은 631년에 아직 푸란도흐트가 죽지 않고 재임하고 있던 것과 모순되는 내용으로, 결국 이들은 631년(혹은 632년)까지 몇 달 씩 재임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아자르미도흐트는 장군 파루크(Farrukh)와 결혼하였지만 머지않아 그를 살해하였고, 파루크의 아들인 로스탐 파로크흐자드(Rostam Farrokhzād)는 수도인 크테시폰(Tusbun, Taysafun)을 점령하고 아자르미도흐트를 살해했다고 한다.
그 후엔 호르미즈드 5세(Hormizd VI 631-632)나 호스로 4세 등이 아자르미도흐트의 뒤를 이었다. 하지만 오직 야즈데게르드 3세(Yazdegerd or Yazdiger 632-651)만이 636년에 아랍 제국이 공격해 오기 전까지 제국에 최후의 안정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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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여왕(眞德女王, ?-654:재위647-654)
은 신라의 제28대 여왕이다.
성은 김(金), 휘는 승만(勝曼)이다.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과 월명부인(月明夫人)의 딸이다.
자태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는 7척이었고 팔이 무척 길어 쭉 뻗으면 무릎까지 닿았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신체적 특징은 부처의 모습을 갖춘 보살에 비유되었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647년 사촌언니(?)인 선덕여왕이 비담의 난을 토벌하던 도중에 서거하자 왕위를 계승하여 즉위하였다.
연호를 태화(太和)라 하였다.
진덕여왕은 왕위 계승자로 내정된 김춘추의 양보로 즉위하였으며, 김춘추와 김유신의 보좌에 힘입어 즉위한지 9일 만에 비담의 난을 종식시켰다.
비담을 비롯한 반란군은 김유신의 뛰어난 전술에 밀려 결국 궤멸되었다.
반란군을 토벌한 진덕여왕은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牛頭州)의 영주로 임명하는 등 왕권 강화를 통한 정치적 개혁을 실시함과 동시에 국내 안정을 꾀하여 비교적 안정된 위치에서 정무를 집행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신라의 내정이 내분으로 불안해진 틈을 타 그해 음력 10월 신라를 침공하였다. 이에 진덕여왕은 김유신을 출전시켜 백제군에 대적하도록 하였다. 이렇듯 백제의 지속적인 공략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던 신라는 설상가상으로 고구려까지 신라 공격에 가세하자 진퇴양난의 신세가 되었다.
648년에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필요한 군사 지원을 얻기 위해 김춘추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당나라 역시 고구려 정벌을 위해서는 신라의 협조가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이를 환영하였다. 진덕여왕과 당 태종은 서로 간에 친교를 돈독히 한 다음, 나당 연합을 체결하였다.
진덕여왕은 그 후 김유신으로 하여금 국방력을 증강시켜서 훗날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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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왕조계보]
[신라왕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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