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인물

김홍집(金弘集)과 로버트 케스코인 세실(Robert Gascoyne-Cecil)

한부울 2012. 10. 13.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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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金弘集)과 로버트 케스코인 세실(Robert Gascoyne-Cecil)

 

글쓴이:한부울

 

두 인물을 비교하면서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그 당시 시간과 공간적으로 태어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홍집과 로버트 케스코인 세실이 실제인물인가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그들이 동양인인지 서양인인지 아니면 동일인물인지 알 길이 없다.

물론 역사기록에서 김홍집은 동양인으로 로버트 케스코인 세실은 영국인으로 기록되어있다.

여기서는 인종적인 면을 초월해 세계 삼한 역사를 밝히고 있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인종적인 문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과거 지난 역사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추론이 가능한 일이다.

먼저 김홍집(金弘集, 1842-1896)과 로버트 게스코인 세실(Robert Gascoyne-Cecil, 1830-1903)은 거의 동시대에 산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조선에서 총리대신으로 재임한 시기와 영국에서 총리로 재임한 시기가 거의 같다는 사실이다.

김홍집은 1894년부터 제1차 내각이 시작되었고 1896년 분명찮지만 제3차 혹은 제4차 내각시기말에 분노한 군중들에게 타살되었다는 기록이다.

동시에 솔즈베리후작3세(3rd Marquess of Salisbury)인 버트 게스코인 세실(Robert Gascoyne-Cecil)은 1895년부터 1902년까지 3차례나 내각총리로 재임했다는 것에서 같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는 1차 솔즈베리(Salisbury)내각총리:1885-1886, 2차 솔즈베리(Salisbury)내각총리:1886-1892, 3차 솔즈베리(Salisbury)내각총리:1895-1902 로 재임사실이 존재한다.

그래서 같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같다고 여길 수가 있는가?

이질적일 수 있는 인종적인 면이 분명하게 있지만 그것을 배제하고 역사기록만 가지고 따진다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왜 김홍집과 로버트 게스코인 세실이 같다고 여기에 되었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단향산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호놀룰루의 위치문제에서 현재 하와이 위치가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확신을 가지게 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단향산(檀香山)은 호놀룰루(Honolulu)가 아니라 버뮤다(Bermuda)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47

 

위는 본 블로그가 작성한 글이다.

이 글을 보면 확연하게 알 수 있는데 호놀룰루에 있다고 하는 단양산(檀香山)은 하와이가 아니라 미 대륙 반대 방향인 버뮤다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향(檀香)이란 식물을 따져 본 것이기 때문에 생물학적, 과학적으로도 틀림없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승정원일기

고종 26년 기축(1889, 광서15) 7월 24일(무진)맑음

좌목 : 흥복전에서 미국 주재 전권대신 박정양을 소견할 때 우부승지 김춘희 등이 입시하였다

○ 사경(四更).

상이 이르기를,

“연로(沿路)에 단향산(檀香山)이 있다고 하던데, 이는 어떤 곳인가?”

하니, 박정양이 아뢰기를,

“이는 하와이에 딸린 섬입니다.

 

그리고 위 승정원일기에서 고종과 박정양의 대화인데 이것을 보더라도 하와이에 단향산이 있으며 조선에서 미국으로 가는 중간지점에 큰 섬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단향(檀香)이 나는 곳으로 현재 태평양 중앙에 있는 하와이가 아니라 버뮤다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다시말해 박정양이 조선에서 미국으로 가는데 바로 연로(沿路) 중간에 단향산(檀香山)이 있다고 하였고 그렇다면 조선이 한반도라면 지금까지 반도사가 말한데로 한반도에서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실제 단향산(檀香山)은 태평양 중앙에 있는 하와이가 아니라 대서양 중앙에 있는 버뮤다에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므로서 당시 조선이 한반도가 아니라 다른 방향인 영국이나 유럽이 되어야 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힌 것이다.

즉 위치적으로 볼 때 1889년 당시 고종이 있었던 조선은 한반도가 될 수 없고 영국이나 유럽이 되어야 이치적으로 맞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만약 박정양이 조선에서 미국으로 간 것이 맞다면 영국이나 유럽에서 버뮤다를 거쳐 미국으로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는 상황인 것이다.

여기서 근거해야 할 것은 근대사를 바탕으로 한 근세기 특히 이 시대에 전 세계의 정치적 질서를 좌지우지 할 수 있었던 강력한 세력이 있었다면 그것은 국가일 것인데 그런 국가가 과연 어딘가를 따져 보았을 때 대체적으로 영국임을 알 수 있었고 그 영국은 분명한 제정(帝政)국가로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전권(全權)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볼 때 시기적으로 그레이트브리튼아일랜드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1800-1922)시대이고, 빅토리아여왕(Queen Victoria, 1819-1901:재임1837-1901)시대이며 또한 인도여제(Empress of India1876-1901)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근대사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전제한다.

 

나는 여기서 갈등한다.

이 거대한 제국 안에 조선이 실제로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그래서 김홍집의 기록을 참고로 하여 영국총리 로버트 게스코인 세실(Robert Gascoyne-Cecil)과의 일치하는 점을 병기하고자 한다.

 

먼저 김홍집(金弘集, 1842-1896)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생각하게 하는 조선정치가이며 관리이다.

1896년에 있었던 아관파천(俄館播遷)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1895) 이후 일본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건양 1)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조선의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에 이어(移御)한 사건을 말한다.

이것을 다르게는 천궁(遷宮)이라고도 한다.

이어(移御)로 인한 천궁(遷宮)은 천도(遷都)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이것은 거의 망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다시말해 왕이 궁에서 떠나 이사한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보았을 때 변란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러시아공사로 옮긴 것이라고 하는데 공사가 아니라 러시아 궁정 역시 조선내에 있었던 위치적인 문제에서 보아야 하며 공사가 있었던 곳도 역시 조선의 세력권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때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누구라도 정권을 잡으려 군사쿠데타등이 일어나 조선은 갈기갈기 찢어졌거나 망했을 것이라고 추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은 당시 분명한 역사기록이 그다지 없다는 사실 그래사 나중에 어영부영 다시 대한제국으로 연명하는 모양새를 취 한다.

이때 종합적인 상황을 미루어 보았을 때 거대한 역사를 오그려뜨려 반도사로 집약시키는 과정에서 크게 들어내고 싶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고 보이고 이 과정에서 김홍집은 반도역사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모든 책임을 안고 제물 또는 희생(?)될 수밖에 없는 인물로 처리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김홍집(金弘集, 1842-1896)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초명은 굉집(宏集)이며 자는 경능(景能), 호는 도원(道園), 이정학재(以政學齋),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주신(柱臣)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개성부유수 영작(永爵)이며,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혼(渾)의 후손이다.

영작(永爵)이라고 하는 것도 영국의 젠터(影爵, Gentor)와 같게 볼 수 있고 모든 귀족 혈통의 자제에게 내려지는 작위로 자작(子爵)과 마찬가지로 상속에 의해서만 성립된다 했다.

때문에 로버트 게스코인 세실(Robert Gascoyne-Cecil)의 바이카운트 크랜본 자작(Viscount Cranborne)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김홍집은 1867년(고종4) 경과정시(慶科庭試)문과에 급제한 다음, 이듬해 승정원사변가주서(承政院事變假注書)에 임명되었으나 몇 달 뒤 아버지의 상을 당하고, 이어 1870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약관 28세 나이 때 양부모를 모두 잃는 아픔이 있어 관직을 사직하고 약 5년간 거상(居喪)하였다.

여기서도 로버트 게스코인 세실(Robert Gascoyne-Cecil)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1866년, 맏형의 죽음에 의해 바이카운트 크랜본 자작(Viscount Cranborne)를 계승하고 더비 백작(Earl of Derby: Edward Smith-Stanley, 재임1866-1868)의 제3차 내각으로 인도 담당 대신으로서 입각하였으며 김홍집과 비슷하게 1868년, 아버지의 죽음에 의해 솔즈베리 후작을 이어 귀족원 의원이 된다는 기록이 있다.

 

김홍집은 1873년 복직하여 권지승문원부정(權知承文院副正)에 임명되고, 승문박사(承文博士)를 겸직하였으며 1875년 부사과(副司果), 훈련도감, 종사관(從事官)을 지낸 뒤, 약 3년간 흥양현감(興陽縣監)을 지냈는데 백성과 정부의 신망을 받았다 한다.

그 결과 내직으로 승진, 1877년 사과(司果), 1878년 남학교수(南學敎授), 이어 호조, 공조, 병조, 예조 참의를 차례로 역임하였고, 1879년 돈녕도정(敦寧都正)을 지냈으며

1880년 일본이 요구한 인천개항, 공사주차(公使駐箚)와 해관세칙(海關稅則) 등의 현안문제를 타결짓기 위한 제2차 수신사(修信使)로 임명되어 58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일본에 다녀오기도 한다.

1880년 말 우리나라에 온 일본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인천개항 문제를 협의, 20개월 뒤에 인천을 개항하기로 합의하였고. 아울러 정부가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중추기구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자, 12월 통상관계를 전담하는 당상경리사(堂上經理事)에 발탁되었다.

 

1881년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이 격화되면서 보수유생들로부터 집중적인 비난을 받았기 때문에 여러차례 사직소를 올린 끝에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얼마 뒤 통리기무아문이 개편되면서 통상사당상(通商司堂上)에 임명되었다.

1882년 3월과 5월 사이 구미열강의 통상요구와 함께 미국, 영국, 독일과 차례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조약체결을 담당한 전권대신들의 부관으로 다시 임명되어 협상의 실무책임을 맡았으며 4월 부제학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호조참판, 공조참판, 경기감사를 역임하였다.

특히, 임오군란의 사후수습책으로 정부에서 일본 및 청나라와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 및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할 때에도 전권대신 이유원(李裕元)의 부관으로서 유효적절한 수완을 발휘하여 ‘비오는 날의 나막신’에 비유되곤 하였다 한다.

 

그 뒤 1883년 8월 규장각 직제학을 거쳐 1884년 초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역임한 다음 9월에 예조판서와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를 겸임함으로써 대외교섭의 최고책임자가 되었다.

온건개화파로서 중도 개혁노선을 견지했는데,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甲申政變;1884)이 실패로 끝난 직후 조정에서 뒷수습을 담당할 적임자로 선택되었다.

그래서 좌의정 겸 외무독판(外務督辦)의 중직을 맡아 1885년 초 일본과 한성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해 판중추부사라는 한직에 물러나 있다가, 1887년 재차 좌의정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였고 그 뒤 1889년 수원부 유수로 밀려나 있었는데, 그곳에서 일어난 민요(民擾)로 인해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때 위 승정원일기에 등장하는 고종(26년:1889)과 박정양의 대화가 있었던 시기이다.

이 때 박정양은 1887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를 거쳐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에 임명되었으나 원세개(袁世凱)의 압력으로 출발을 연기하였다가 그 해 말에 청나라의 방해를 무릅쓰고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Cleveland, S. G.)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으며 계속된 청나라의 압력으로 1889년에 귀국하여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귀국한 박정양은 결국 미국을 가고 오는 동안 단향산이 있는 호놀룰루를 거쳤다는 이야기를 고종에게 한 것이다. 

 

다시 김홍집은 1894년 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청일양국의 군이 우리나라에 진주하자 총리교섭통상사무(總理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어, 고종에게 민심 수습과 내정개혁의 필요성을 상주하였다.

분명 동학혁명은 중일전쟁(신중국과의 충돌)이라고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1894년 동학혁명(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에의 침투를 바란 일본군은 청일전쟁(신중국과의 충돌)을 일으키기 며칠 전인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23일)에 경복궁을 습격하고 무기고를 탈취하는 등 김홍집 일파를 지원하였다.

이에 따라 김홍집은 음력 6월 말부터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고 총리대신이 되어 갑오개혁을 단행하였으며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득세하자 강력한 친일파가 입각한 제2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고 이때 홍범 14조를 발표하는 등 개혁을 재개하였다 한다. 그러나 재정난과 박영효·서광범 등 극단적 친일파와의 대립으로 내각은 와해되었으며 박정양 내각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1895년 5월 재정궁핍으로 개혁이 중단된 상태에서 박영효와의 갈등, 수구파와 급진파간의 갈등심화 등으로 인해 총재직을 사임하자, 박정양(朴定陽), 박영효의 연립내각이 수립되었으며 그 뒤 박영효의 주도로 일어난 역모사건이 탄로나 일본으로 망명하자, 같은 해 7월 재차 입각하여 친미(親美), 친로파(親露派)와 제휴로 이뤄진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제3차 갑오경장을 추진하였다.

 

이때 민비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자, 열세에 몰린 일본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킨다.

실제 빅토리아 여왕을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끝인 사건과 비슷하다고 여기는 사건이다.

그런데 김홍집 내각은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철처하지 못해, 시종반일, 반외세의 처지에 있던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상실하고 말았으며 일본의 영향 아래에서 조직된 제4차 김홍집(金弘集)내각은 일세일원연호(一世一元年號), 태양력사용, 군제개혁, 단발령의 실시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의 실시는 친일내각과 그 배후세력인 일본에 대한 국민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자극하여 전국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김홍집(總理大臣:金弘集)내각이 붕괴되고 친로(親露)정권이 수립되자 왜대신(倭大臣)으로 매국 친일당의 두목으로 지목되어 광화문 앞에서 군중들에 의하여 타살되었다 한다. 일설에는 김홍집은 자신이 군국기무처의 총재,

로버트 게스코인 세실(Robert Gascoyne-Cecil)은 대동양철도(Great Eastern Railway)총재로 재직?

를 겸임하면서 총재보좌 명목으로 일본공사관 직원 4~5명을 끌어들여 이들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등 친일매국행위에 앞장섰다는 주장도 있다.

여하튼 이것은 반도역사로서 이러한 상황을 그리고 있지만 전적으로 펙트라고 인식할 수 없는 문제가 너무나도 많다.

이상에서 보면 조선의 김홍집 역시 1차에서 4차까지 내각이 성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로버트 게스코인 세실(Robert Gascoyne-Cecil) 역시 아래와 같이 3차에 걸쳐 내각총리를 재임한 사실이 있다.

 

로버트 게스코인 세실(Robert Gascoyne-Cecil) 내각재임상황

1차 솔즈베리(Salisbury)내각총리:1885-1886, 보수당외무장관, 상원의장

2차 솔즈베리(Salisbury)내각총리:1886-1892 보수당 상원의장, 국가재정위원장, 외무장관

3차 솔즈베리(Salisbury)내각총리:1895-1902 보수당 상원의장, 외무장관, 옥새상서

 

그리고 김홍집 역시 고종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사실과 함께 로버트 게스코인 세실(Robert Gascoyne-Cecil)역시 옥새상서, 국새상서(國璽尙書, Lord Keeper of the Great(Privy)Seal)로 있었다는 사실 또한 같은 직위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간단하게 비교 해 보았지만 김홍집과 로버트 게스코인 세실은 분명 다르다고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결코 인종적인 문제를 뛰어 넘는 어떤 거대한 줄기에서 서로 얽혀 있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않고 역사사실에서도 거의 같은 길을 간 것이라고 볼 수 있어 결국 두 인물은 동일하다고 여길 수 있는 문제가 분명이 존재한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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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이후 대조선이 무너지기 시작 할 때 영국의 내각 총리 3인의 상황이다.

 

(1)벤저민 디즈레일리 백작(Benjamin Disraeli, 1st Earl of Beaconsfield, 1804-1881재임:1868-1880)

런던에서 유다(猶太人)계 문학자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후에 성공회(聖公會, The Anglican Domain:1534년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해나간 영국교회의 전통)신자가 되었다. 법률과 문학을 공부하였으며, 17세에 변호사 사무소에 제자로 들어갔으나, 문학에 흥미를 가진 뒤 1826년에 첫 작품 《비비안 그레이》를 발표하여 문인으로의 이름을 얻었다. 1832년 정계에 들어가 몇 차례의 낙선을 거듭한 후 1837년에 토리 당원으로의 하원 의원이 되었다

1841년 토리당 내에 청년 영국단을 조직하였고, 1846년 산업 자본가의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로버트 필의 곡물법 폐지에 반대하고 보호 무역주의의 지도자가 되었다. 1867년 영국의 제2차 선거법 개정을 하여 농민과 노동자에게도 고루 선거권을 주는 데 성공하였다. 1868년 총리가 되자 이집트로부터 수에즈 운하 주식을 사들여 동방 항로를 확보하고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 여황제의 칭호를 갖게 하였다. 1876년에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1877년 러시아, 터키 전쟁에서는 러시아가 남하하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영국 해군을 파견하는 등 영국의 세력을 뻗는 데 힘썼다. 내정에 있어서 공중위생과 노동 조건의 개선 등에 진력했으나, 1880년 선거에 패배하여 사직하였다.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정치가로 알려져 있다.

 

그 후임으로 (2)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William Ewart Gladstone, 1809-1898:재임1880-1885)은 영국의 전 총리이다. 종교는 성공회이며, 신학적으로는 고교회파(High Church)즉, 전례, 성사 등의 교회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주의 노선을 걸었다.

그는 리버풀에서 출생하여 이튼을 거쳐 옥스퍼드 대학의 크라이스트처치(Christ Church, Oxford)를 졸업하였는데, 재학 시절에 이미 두각을 나타냈다. 1833년 보수당 하원의원이 되었다. 필 내각 때에 관세개혁을 하여 자유무역의 길을 열었다. 또한 1852년 애버딘 연립 내각의 재무상이 된 후, 1853년에 획기적인 예산안을 성립하여 재정가로서의 명성을 확립하였다.

1867년 자유당의 당수가 되고 보수당의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와 상대하여 전형적인 정당정치를 전개하였다. 여러 번 재무장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868-1894년까지 4번이나 자유당내각을 만들어 교육제도를 고쳐 국민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1894년 정계에서 은퇴하여 하워든(Hawarden)에서 연구와 연설로 여생을 보내고, 백작 작위를 수여하려고 할 때 이를 사양하여 대평민(The Great commoner)으로서 일생을 마쳤다. 그는 내정면에 있어서는 자유주의 입장에서 하층계급의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해 많은 개혁을 단행하였다는 인물이다.

 

이후 바로 영국정치가 솔즈베리 후작 3세(3rd Marquess of Salisbury)인 (3)로버트 게스코인 세실(Robert Arthur Talbot Gascoyne-Cecil, 1830-1903)가 재임한다.

3번에 걸쳐 수상에 재임 기간은 합계 13년이었다.

후의 영국보수당 정치인 아서 제임스 밸푸어(Arthur Balfour,1848-1930:재임1902-1905)의 숙부에 해당한다.

솔즈베리 후작 2세(2nd Marquess of Salisbury)인 제임스 게스코인 세실(James Brownlow William Gascoyne-Cecil,1791-1868)의 차남으로서 하트퍼드셔 주(Hertfordshire) 탄생하고. 이톤칼리지(Eton College)와 옥스퍼드대학(University of Oxford) 그리고 크리스트처치(Christ Church, Oxford) 올 소울스 칼리지(All Souls College)에서 수학했다. 1853년 보수당에 속해 의원이 된다.

1866년, 맏형의 죽음에 의해 바이카운트 크랜본 자작(Viscount Cranborne)를 계승하고 더비백작(Earl of Derby: Edward Smith-Stanley, 재임1866-1868)의 제3차 내각으로 인도 담당 대신으로서 입각하였으며

1868년, 아버지의 죽음에 의해 솔즈베리 후작을 이어 귀족원 의원이 된다.

1868년부터 1871년에는 대동양철도(Great Eastern Railway)총재를 맡았고

1874년에는 벤저민 디즈레일리 백작(Benjamin Disraeli, 1st Earl of Beaconsfield, 1804-1881)내각의 인도담당 대신에 재차 취임하였으며 이전에는 싫어하여 피하고 있던 벤저민 디즈레일리 백작과 점차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어 갔다. 1878년, 에드워드·스탠리(Earl of Derby:Edward Smith-Stanley)의 후임으로서 외무대신 취임하였고 베를린 회의(Congress of Berlin, 1878)에서 명예스러운 평화의 주역자가 되면서 칭송되어 잉글랜드의 최고훈장 가터훈장(The Order of the Garter) 을 하사받는다.

 

1차 솔즈베리(Salisbury)내각총리:1885-1886, 보수당외무장관, 상원의장

2차 솔즈베리(Salisbury)내각총리:1886-1892 보수당 상원의장, 국가재정위원장, 외무장관

3차 솔즈베리(Salisbury)내각총리:1895-1902 보수당 상원의장, 외무장관, 옥새상서

 

옥새상서, 국새상서(國璽尙書)는 Lord Keeper of the Great(Privy)Seal 라고하는데

영국의 궁정 고위 관직인 옥새상서(玉璽尙書. 또는 국새상서)는 국왕의 인장을 보관, 관리하면서 국왕의 명령을 공식화하는 책임을 맡았다. 국왕의 명이 공식화되려면 옥새상서의 승인을 거쳐 옥새를 공문서에 찍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책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옥새상서는 국왕의 최측근 관직으로 국왕의 뜻과 명령을 하늘처럼 받들며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고 명령을 수행하는 자리이다.

 

고문관-대법관-재무장관-추밀원의장-옥새상서(수석재판관-최고재판관-주장)-시종장관-보안무장관-원수(중장-주지사)-해군장관(북부제독, 동부제독)-수석집사-의전장관(의상부장- 왕령행정관)순이다.

왼쪽으로 갈수록 높은 직위이고, 괄호안의 직위는 그 관직 아래에 있는 관직을 뜻하는데 예를 들어 옥새상서는 수석재판관, 최고재판관, 주장을 수하로 거느린다.

 

조선독판교섭통상사무(署理督辦交涉通商事務)·

1883 민영목(閔泳穆,1826-1884)

1884 김홍집(金宏集, 金弘集,1842-1896)년 8월 서리독판교섭사무

1884 김병시(金炳始,1832-1898)6월

1884 김윤식(金允植,1835-1922)1885.12

1884 조병호(趙秉鎬,1847-1910)

1887 서상우(徐相雨,1831-1903)

1889 민종묵(閔鍾默,1835-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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