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인물

세조와 영락제, 메흐메트2세는 같은 인물인가?

한부울 2012. 1. 19.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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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와 영락제, 메흐메트2세는 같은 역사이고 인물인가?

 

종전에 본 블로그에서 대한제국과 오스만제국을 살펴보았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389

 

그러나 고려가 망하였다는 사실은 어디까지나 반도사가 말하는 것일 뿐 실제로 고려가 망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고려는 대 고려연합제국으로 1450년 전에는 틀림없이 korai 란 이름으로 터어키와 그리스영역에서 포괄적으로 존재했다고 보인다는 것이다.

때문에 오스만제국이 비록 티무르(이성계)에 의해 심한타격을 받아 1402년부터 1414년까지 공백기가 있었지만 이것을 극복하였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에 최소한 1450년까지는 존재했었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 바예지드 1세(Bayezid I.1360-1403, 재위:1389-1402)의 아들 메흐메트 1세(Mehmed I Çelebi,1382-1421, 재위:1413-1421)는 공백기를 지나 1421년에 제국 재통합을 이루면서 국력을 회복하게 되었고 마침내 7대 술탄 메흐메트 2세(Mehmed II, 1432-1481:재위1444-1446, 1451-1481)가 서세의 자존심이라고 하는 동로마 비잔틴제국(Byzantine Empire 395–1453)을 멸망시켜 버리고 말았다.

어쨌던 결국 korai는 서세의 역사 보루를 요절내 들어내고 만 것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세의 복수가 시작되는 것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부터이다.

마침내 기존 세력을 지키려하는 korai의 대칭 오스만제국,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주요동맹국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 연합국과의 극단적인 대결로 구세력과 신세력간의 세계질서의 지배를 담보로 하는 최후결전이었다.

 

이를 연계하여 아래 너와나님의 글을 참조해보자.

본 블로그를 찾아 좋은 글을 주시던 너와나 님의 글이다.

 

너와나[2012.01.05 12:14]

최근에 건축기행 다큐에 터키에 대해 보았는데요.

오스만제국의 톱카프 궁전의 하렘편 이었습니다.

흑인환관 시스템에 거기에 기거하던 궁녀를 노예로 표현을 하더군요.

노예에서 나온 자식을 왕으로 추대하는게 말이되는지 ㅋㅋ

궁의 시스템이 조선과 비슷하여 오스만제국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왠걸요 ~왕조의 계보가 조선과 매우 겹치더군요.

무라드2세: 오스만 제국의 술탄(1421~51 재위)

(생략)

외부의 위협에 궁정 귀족들의 압력까지 받자 무라드(1421~51 재위)는 1446년 다시 오스만 제국의 통치권을 쥐게 되었다.

1448년 10월 17일 제2차 코소보 전투에서 헝가리인들을 물리쳤다(바르나 전투).

세종: 재위 1418년 ~ 1450년

1433년에는 압록강을 넘어 파저강 전투에서 여진족을 무찔렀으며,

1452년 단종은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메메드2세: 오스만 제국의 술탄(1444~46, 1451~81 재위).

뛰어난 군사지도자로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고 이후 4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의 중심지가 된 아나톨리아와 발칸을 정복했다.

무라드 2세의 넷째 아들로 여자노예에게서 태어났다.

12세가 되자 관습에 따라 선생 2명과 함께 마니사(마그네시아)로 보내졌다.(생략)

와지르(wazir ,vizier)들은 각기 어린 황제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있었다.

1444년 9월 십자군이 도나우 강을 건넜다.

1451년 2번째 즉위

부왕이 죽자 메메드는 에디르네에서 다시 권좌에 올랐다(1451.2.18)

 

세조:재위 1455년~1468년)는 조선의 제7대 임금

세조 이유는 1417년 9월 29일 당시 본궁(本宮)에서 충녕대군이던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차남이자 네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오스만제국의 메메드2세는 단종과 세조의 일대기로 한 왕이었네요?

파저강전투가 바르나전투이지 않을까 합니다만..

조선에서는 계유정난

 

오스만제국에선 헝가리인 총포제조기술자 우르본에게 유럽에조차 아직 알려지지 않은 크기의 대포를 만들게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대(大)와지르 찬다를리는 이런 계획들을 계속해서 반대했으며 콘스탄티노플의 포위기간(1453. 4. 6~5. 29) 동안 결정적인 순간에 소집된 2번의 전시회의에서 반대소리가 높아졌다. 자가노스는 포위를 풀자는 제안에 격렬히 반대했다. 그는 마지막 총공격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총사령관 메메드 2세 자신은 총공격을 개시한 날, 신형 대포로 파괴한 성벽의 돌파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도시가 함락된 날 찬다를리는 체포되어 곧 바로 에디르네에서 처형되었다. 그리고 이미 메메드의 장인이 되어 있었던 자가노스가 찬다를리의 자리에 올랐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세조를 아주 악한 군주로 평가하고 있죠?

메메드2세는 자신의 포고령이나 법령을 어긴 사람들에 대해 극히 잔인하게 처벌해 당시 사람들조차 지나치다고 할 정도라고 평가하네요.

콘스탄티노플 정복자.

어쩜 양이들에게 세조는 아주 단종의 왕위를 뺏은 파렴치한 인으로 기록해야만 했던 것이 아닐까...너와나[2012.01.05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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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 글에서 중요한 부분만을 이야기 해보자.

위 글을 써주신 너와나님도 세종, 문종, 단종, 세조까지의 조선제왕과 오스만제국의 무라트2세와 메흐메트2세의 연대가 일치하는 것이어서 겹쳐지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실제 그렇게 보인다.

 

세종이 살아 있을 때 문종(文宗, 1414-1452, 재위1450-1452)은 섭정을 하였고 미래 양위를 위해 고명대신들을 세웠다. 그리고 문종은 고명대신에게 부탁하고 죽으나 장자 왕세손 홍위(王世孫 弘暐) 단종을 무사히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반면 메흐메트2세는 무라드 2세의 넷째 아들로 여자노예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이 크게 다른데 술탄승계에 상당한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했을 것이란 짐작이다.

1452년 단종은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했다.

역시 출생에서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제국의 무라트 2세의 아들 메흐메트 2세도 12살 때 아버지에게 술탄제위를 양위 받았다고 하고 있다.

메흐메트 2세는 술탄지위에 3년 정도 있었지만 단종은 2년 왕위에 있었던 것도 거의 같다.

그리고 오스만 무라트 2세는 아나톨리아로 남부로 돌아가 은둔생활을 하였으나 단종의 아버지 문종은 단종에게 양위하고 죽는 것이 다른데 년대로 따진다면 문종이 죽는 시기와 무라트 2세가 죽는 시기 또한 같다.

어쨌던 세조와 메흐메트2세는 똑 같은 상황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은둔하던 무라트 2세가 다시 복위하는 수순을 밟았지만 2년 남짓 더 재위하다가 무라트2세는 죽지만 1차 술탄경험이 있었던 메흐메트 2세에게 정식으로 술탄양위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마우리된다.

세조역시 계유정란이란 참회는 없을 수 없지만 순조롭게 권좌에 앉는다.

 

여기서 저 유명한 계유정란(癸酉靖難, 1453)과 정란의 난(靖難之變, 1402)이 발생한다.

물론 오스만은 잠시 잊고 조선과 명나라로 간다.

먼저 명나라에서 영락제(3대 永樂帝, 1360-1424, 재위1402-1424)가 번왕인 연왕(燕王)신분이었을 때 조카 건문제(2대 明惠宗 建文帝, 1377-1402, 재위1398-1402)가 역모를 먼저 두려워하여 번왕들인 주왕(周王)·상왕(湘王)·제왕(齊王)·대왕(代王)·민왕(岷王)등을 제거하고 삼촌인 연왕(영락제)까지 제거하려고 하자 삼촌 연왕은 1399년 7월 북평에서 거병하여 조카 건문제와 그의 신하들을 제거하는 황실의 난을 정란의 난(靖難之變)이라고 하였는데 실제 따지고 보면 삼촌이 조카를 상대로 한 쿠데타 역모사건이다. 똑같은 내용으로 50년 뒤 한반도 조선에서 일어난 계유정란(癸酉靖難, 1453)역시 삼촌인 수양대군(首陽大君:世祖1417-1468, 재위 1455-1468)이 조카인 단종(端宗, 1441-1457, 재위 1452-1455)를 군사력을 동원하여 폐위시킨 역모사건이 일어난다.

 

결과 조선에서는 단종이 살해되면서 대신 잔인하다는 평과 함께 삼촌 세조가 남고 명나라 역시 건문제(2대 明惠宗)를 죽이고 영락제(3대 永樂帝)가 남는다.

 

오스만제국은 주인공인 메흐메트 2세가 남아 결국 아버지가 못 다 이룬 꿈을 실현하는 것이 다르다.

메흐메트 2세는 서양문화의 보루인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키고 말았다.

이것은 훈족 활약 이래 동양사가 서양사를 파괴하는 마지막 기록으로 남는다.

오늘날 터키인들의 위대한 역사로 각인되어 있다.

이 사건은 훈족이란 실체 파고와 함께 근세기 서양사학자들에게 상당히 곤혹스럽게 다가 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훈족 아틸라의 정복과 메흐메트2세의 정복이 서양사를 재편하게 하는 모티브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십자군과 징기스칸 등장은 이러한 것을 희석하려고 한 내세우기가 아닌가 한다.

십자군은 종교를 앞세운 것 이외 뚜렷한 것이 없어보이는 체제 불만세력 즉 반란군 성질이 강하고

징기스칸 역시 대고려 내에 자연 발생적 군사적 반란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이다.

 

 

(오)무라트 2세(II. Murat, 1404-1451, 1차 재위1421-1444, 2차 재위:1446-1451)

(조)문종(文宗, 1414-1452, 재위1450-1452)

(조)단종(端宗, 1441-1457, 재위1452-1455)

(조)세조(世祖, 1417-1468, 재위1455-1468)

(오)메흐메드 2세(II. Mehmet, 1432-1481,1차 재위1444-1446, 2차 재위1451-1481)오스만 제국의 술탄

 

다시 삼한역사적 관점으로 들여다 볼 때 결국 비잔틴제국이라는 것은 서양역사학자들이 근세기에 만든 명칭일 뿐 삼한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이름이 신라와 마한이라고 여겨지는 새로운 라마(新羅馬)라고 하였다지만 어쨌던 코라아(korai)란 이름의 제국에게 망하는 것이어서 결과적으로 고려(korai=united corea)가 삼한을 통일하고 연합제국을 세우는 것이라고 우리는 광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본 블로그에

콘스탄티노플이 왜 신라마(新羅馬)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430

 

하는 글을 보면 결국 330년5월11일 로마노바(새로운 로마, 비잔티움)로 천도한 후 약1160년 동안 존속하다가 1453년5월29일 로마노바, 신라마(新羅馬)가 메흐메트 2세에게 참혹하게 함락되면서 비잔티움은 멸망당하고 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백년전쟁(百年戰爭:1337-1453)이라는 영국왕국(Kingdom of England;927–1649)과 프랑스왕국(Kingdom of France, Royaume de France et Navarre:843-1792)간의 전쟁이 끝나는 해 1453년도와 맞 물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백년전쟁의 명분은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였다고 하는데 어쩌면 비잔티제국이 사라지면서 모든 것이 종결날 수 있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비잔틴제국이 원래 삼한의 총수이었다면 그래서 결국 메흐메트2세가 마무리 한 것이라면 그것은 고려가 삼한을 통합한 전쟁이었을 것인데 공교롭게도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 동시에 끝났다 하는 것은 명분이 사라진 것이고 삼한의 구성원인 신라와 백제, 고구려 세력들의 충돌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양의 보루라고 하던 비잔틴제국 멸망의 상징인 콘스탄티노플의 대화재란 그림이 남아 있다.

결과적으로 삼한의 역사를 서양인의 역사로 둔갑한 것이 된다.

오스만제국은 바로 서양인들이 기록하고 있는 고려연합제국(United corea)이었던 것이다.

 

이후 한반도 세조는 비잔틴제국이 망하는 똑같은 년도에 함경도에서 이징옥(李澄玉,1399-1453)이 일으킨 반란을 막고 강순(康純)을 파견하여 건주위(建州衛)여진족을 토벌하였다는 사실과 1467년(세조 13년)에 길주의 호족 이시애(李施愛, ?~1467년)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했다는 기록이 전부이다.

여기서 볼 때 이징옥의 난은 바로 삼한의 신라마(新羅馬:신라와 마한)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것에 대한 대역(代役)으로 내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고 이시애(李施愛, ?~1467년)는 1450년 알바니아 출신 오스만 장군 스칸데르베그(Skanderbeg)의 반란이 아닌가 한다.

 

또 세조는 단종을 죽인 죄책감으로 평생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데 특이한 것은 억불정책(抑佛政策) 또는 배불정책(排佛政策)을 기본정책으로 하였다는 조선에서 만년에는 왕위의 찬탈로 인한 인간적인 고뇌에 싸여 세종과 마찬가지로 불교에 귀의했다고도 한다.

국권찬탈에 대한 죄를 경감 받고자 한 것이라고 하지만 모순적인 상황인 것이다.

세종이나 세조가 어찌하여 숭유 유교사상을 버리고 불교를 택하였을까?

불교의 원 성질이 어떻길래 이런 현상이 이어 벌어졌을까?

이 불교라 함은 분명 고려가 취하던 종교인데 실제 고려가 취한 불교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인지 확실하지 않다.

조선시대의 불교라 한 실체를 따져 보아야 할 문제이기도하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서세의 보루 비잔티제국을 멸망시켰을 뿐만 아니라 영토를 적극적으로 넓혀 정복자(Fātiḥ, Conqueror)라는 닉네임까지 받았던 인물이다.

그리고 수도를 종래의 에디르네-아드리아노플(Adrianople:modern Edirne)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로 옮기고 그곳에 무슬림을 대거 불러모아 살게하면서 동방정교회 교도(Eastern Orthodoxy, 東方正敎會)와 서방으로부터 온 가톨릭교도(Catholic Church), 아르메니아 정교도(Armenian Apostolic Church)나 유대인(Jews, 猶太人)도 함께 살게 했으며 관습법이나 법령을 집대성한《카눈나메(Kanunname)》라 불리는 법전까지 편찬하였고 나아가 전적으로 이슬람 국가의 이미지에 머물지 않고 우주시민정책이라고 하는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우주시민)적인 제국의 군주로써 군림했다 한다.

배타종교 뿐만 아니라 이민족도 제국의 시민으로 인정하여 포용하였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세조가 말년에 억불로 반대하던 불교에 귀의 하였다는 사실과 많은 불교사찰을 건립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명나라 영락제는 오스만 메흐메트 2세와 비슷하게 천도를 하는데 북경으로 옮겨 홍무제의 신중책을 바꿔, 왕성하게 세력을 넓혔다 하였고 북쪽으로 후퇴한 원나라의 잔당(북원-타타르)들을 원정하여 제압했다 하여 이것도 메흐메트 2세가 티무르의 아들 샤 루흐(Shah Rokh, 1377-1447, 재위1409-1447)를 정벌한 것과 똑 같다은 느낌을 주고 있다.

이어 영락제는 만주에 있는 여진족을 복속시켜 위소제에 조직해 넣는데 성공하였고 남쪽은 베트남의 진조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이를 틈타 정복하였다 하는 것도 오스만이 아나톨리아 남부를 공격한 것이나 몽골제국의 후예국가인 크리미아 칸국(1430-1783)을 복속시키고 흑해를 오스만 제국의 바다로 만들었으며 30년에 걸친 두 번의 치세에 이르러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발칸 반도의 여러 왕국, 아나톨리아의 튀르크계 여러 세력을 정복해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급속도로 확대시켰던 행보와 같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오스만의 정복자 마흐메트2세의 죽음에서도 유대인이 가담한 독살설이 제기되고 있다 것과 조선의 세조역시 사사로운 탐욕으로 어린 조카를 폐출한 폭군, 비정통 군주로 평가되었던 세조는 말년에 피부에 고름이 생기다가 문둥병으로 이어졌다 하고 있으며 흉한 종기가 많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었다고 하는 기록이다.

이렇게 서로 얽혀있는 기록이 난무한다.

 

또 세조와 명나라 영락제가 적신들을 죽이는 것을 보면 똑 같다.

메흐메트2세역시 출신성분에 이의를 거는 반대자들을 잔인하게 숙청한 사실과도 같다.

영락제는 당대의 대문장가인 방효유에게 자신을 찬양하는 글을 쓰라고 요구했는데 그가 오히려 비난하는 글을 쓰자 투옥, 고문한 뒤 회유하였으나 끝내 영락제의 찬양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그의 십족(十族)을 차례로 처형하고, 집안 여성들은 노비로 분배했으며 제일 마지막에 방효유를 처형하였다 하였으며 방효유 일족을 10만여명을 처형하면서 십족(十族)을 멸한다는 고사가 생겨나기도 했다.

조선 세조 역시 사육신 중 성삼문, 유응부, 박팽년, 하위지 등을 회유하려 하였으나 이들은 거절하고 죽음을 택하자 세조는 사육신과 그 가족 6백여 명을 처형하고, 유배 보냈으며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공신의 노비와 관비로 충군하였으며, 영락제는 10족을 멸하였다 하였는데 조선의 세조는 4촌(四寸)이상의 친척들은 노비로 삼거나 외지로 유배를 보내는 등의 대숙청을 감행하였다는 내용이 어쩌면 그렇게도 같을 수가 없다.

 

이징옥(李澄玉, 1399-1453.10.20)은 조선전기의 무신, 군인, 정치인이다.

세종 때에 김종서를 따라 출정하여 여진족 토벌과 북방지역의 6진을 개척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절제사와 변방의 외직에 있으면서 여진족 토벌과 변방을 수비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으나 1453년(단종 1년)에 황숙 수양대군(뒷날의 세조)이 정권을 잡자 일찍이 김종서의 천거로 함길도 도절제사가 된 이징옥을 파면시키고 박호문(朴浩文)을 임명하였던 일로 분개한 이징옥은 박호문을 죽인 후, 병마를 이끌고 종성(鍾城)으로 가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자칭하고 여진족의 후원을 얻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고 이징옥은 정종(鄭種) 등의 술책에 빠져 아들과 함께 사로잡혀 죽고 말았다. 이 반란사건은 후일 이시애의 난을 유발케 하는 선구가 되었다.

 

이시애(李施愛, ?~1467)는 조선 초기의 무신이지만 이미 기록에서 반역자라고 못을 박고 있다.

길주 출생인 그는 경흥진 병마절제사를 거쳐 첨지중추부사, 판회령부사를 역임했다.

이징옥(李澄玉)의 난 이후 세조가 함경도 출신을 관직을 부여하는 것을 억제하고 중앙에서 직접 지방관을 파견하여 중앙집권 및 왕권강화를 꾀하자 함길도(咸吉道)에도 수령이 중앙에서 파견되어 본도인(本道人)의 반발이 있었는데, 때마침 조정에서 호패법을 실시하여 농민들의 자유로운 이주가 불가능해졌고 자신의 지위에 큰 위협을 느꼈다.

얼마 후에 모친상으로 잠시 휴직 중인 기회를 활용, 세조13년(1467) 5월 회령부사 이시애(李施愛)는 그의 본거지 길주(吉州)에서 아우 이시합, 매부 이명효 등과 군사를 일으켜 절도사이던 강효문을 죽이고 난을 일으켜 함길도의 수령을 함길도인으로 삼을 것을 요구했다. 함흥 이북의 주군(州郡)이 이에 호응하였으며, 각지 유향소(留鄕所)가 지도 세력을 이루었다.

민심을 선동, 세력을 크게 과시하여 함흥까지 함락하였다. 한편으로는 세조에게 거짓 장계를 올려 이간책을 활용, 조정의 내부를 크게 분열시켰다. 그의 군세가 강성하여 도통사 신면이 전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구성군 준(浚:혹은 귀성군이라고도 부른다.)과 장군 남이 등의 대대적인 토벌 공격에 의해 북청에서 두 차례에 걸쳐 크게 대패, 여진 부락으로 도주하던 중 조정에서 비밀리에 급파한 허유례의 계교로 부하 장수인 이주, 이운로 등에게 체포되었으며 토벌군의 진지 앞에서 아우 이시합 등과 함께 참수당하고 머리는 각 도(道)를 돌며 효시되었다.

 

이렇게 볼 때 조선의 세조와 명나라의 영락제와 오스만의 메흐메트2세가 동시에 역사적으로 엮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를 표본으로 나눠 기술 또는 기록했는지 알 수 없다.

더 나아가 오스만의 메흐메트2세(Mehmed II, 1432-1481:재위1444-1446, 1451-1481)는 1448년에 티무르의 아들 샤 루흐(Shah Rokh, 1377-1447, 재위1409-1447)를 정벌하였다는데 이것을 한반도 조선 세조와 엮으면 결국 티무르라고 하는 이성계의 아들 방원을 방원의 손자 세조가 공격하는 것과 같아진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로서 년대적으로 동시에 풀어보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인률파괴 현상이 발생한다는 이야기다.

얼마나 한반도 반도역사가 엉터리인지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도 재야학자들 중에서는 티무르제국 제3대 군주 샤 루흐(Shah Rokh, 1377-1447, 재위1409-1447)와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 1360-1424, 재위1402-1424), 그리고 조선 제3대 임금인 태종(太宗, 1367-1422, 재위1400-1418)방원(芳遠)을 같이 보고 있는 사람도 있다.

 

또 이런 기록이 있다.

세종(世宗, 1397-1450, 재위1418-1450)1433년에는 압록강을 넘어 파저강 전투에서 여진족을 무찔렀으며, 1443년에는 북방 이민족인 여진족에 대한 강경책과 영토 확장에 대한 일환으로 최윤덕 장군과 김종서 장군으로 하여금 여진족을 토벌하여 평안도의 4군(四郡)과 함길도의 6진(六鎭)을 개척하게 하였다. 이로써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급속히 축소되었던 영토가 두만강 및 압록강 유역으로 확대되었다.

 

위 기록에서 실제 1433년(세종)에 압록강을 넘어 파저강에서 전투를 하였고 그 전투에서 여진족을 무찔렀다는 내용의 압록강은 어디에 있는 압록강인지 우린 분명하게 알 필요성이 있다.

 

압록강(鴨綠江)

類簒云 : 天下大水有三, 一曰黃河, 一曰長江, 一曰鴨綠, 又曰黃河與鴨綠, 夾北幹龍, 流於遼海, 以此觀之, ( )謂鴨綠, 似是發源於中國之西北, 以東流. 入於遼海, 黃河( )也, 昔我國鴨綠, 其大不可, 比幷於黃河長江, (中略), 女眞起( ), 有鴨綠, 此卽我國鴨綠江也.:

《유찬(類纂)》에 이르기를, “천하의 대수(大水)가 셋이니, 하나는 황하(黃河)이고 하나는 장강(長江)이고 하나는 압록(鴨綠)이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황하와 압록은 북쪽으로 계속 이어진 산을 끼고 요해(遼海)로 흘러든다.” 하였다. 이것을 본다면 이른바 압록이라는 것은 중국의 서북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서 요해로 흘러드는 강일 듯하니, 이는 곧 황하와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우리나라의 압록강으로 말하면 그 크기는 황하나 장강과는 비교할 수가 없으니, 《유찬》에서 말한 압록강이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런데 주자(朱子)가 일찍이 세개의 큰 강물에 대하여 논한 것이 있는데, “여진(女眞)이 일어난 곳에 압록강이 있다.” 하였으니, 이것이 우리나라 압록강이다.

 

似是發源於中國之西北, 以東流

"압록의 발원은 중국의 서북이며 동쪽으로 흐른다."

 

“在國城 西北一千四百五十里 一名馬訾水 原出鞨靺 之長白山 水色如鴨頭故名西南流與鹽難水 合南入於海 闊三百步, 朝鮮特爲天塹.”

[1]당시의(15세기) 조선왕조 황도(皇都)로써 반도(半島) 한양(漢陽=漢城)이 맞는가?

[2]압록강은 황성(皇城)에서 서북쪽 방향이 올바른 것인가?

[3]압록강을 일명 마자수(馬訾水)라고 한다. 왜 압록강을 馬訾水(마자수)라 한 것일까?

[4]말갈(靺鞨)이 장백산 주위에서 세거(世居)했는가? 그들의 본거지가 “장백산(長白山)이 맞다”면 그 장백산이 “반도(半島)의 북방에 있는 산이다”라는 옛 기록과의 고증은?

[5]산해 경에는 『북방에서 서방』 또는 『서북방에서 서남방』으로 이들(말갈=숙신)의 영토를 지리적 방향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종족들이 살고 있었던 땅과 기본적인 방향설정도 잘못된 것이 아닌가?

[6]대륙의 몇 종류 사서(자치통감. 통전. 구당서 등) 기록을 보면 “말갈(靺鞨)”중에서도 가장 강력했다는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본거지를 대륙 서북방지역으로 기록해 놓고 있다. 이러한 기록이 잘못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현재 님의 해설은 원전과 전혀 다른 방향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에 대한 합당한 설명은?

[7]15 세기경의 장백산(長白山)이 현 반도(半島) 북방의 백두산이란 고증은 무엇인가? 당시의 백두산(白頭山)이 장백산(長白山)이라는 이칭(異稱)으로 불린 것은 맞을 지라도 그 산이 왜 반도(半島) 북방에 있어야 하는가?

[8]염난수(鹽難水)라는 하천이 압록강의 지류(支流)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염난수가 반도 북방의 압록강 지류란 것을 어떻게 고증한 것인가? [문무:글]

 

먼저 우리나라 한반도의 압록강은 어디로 흐르는가? 정확하게 말한다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그런데 위 글을 보면 우리나라 역사서의 압록강은 분명 흐르는 방향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似是發源於中國之西北, 以東流

"압록의 발원은 중국의 서북이며 동쪽으로 흐른다."

압록의 발원지는 중국 서북이라고 하였으며 분명히 동쪽으로 흐른다고 하였다.

又曰黃河與鴨綠, 夾北幹龍, 流於遼海,

“황하와 압록은 북쪽으로 계속 이어진 산을 끼고 요해(遼海)로 흘러든다.” 하였다.

또 위 글에서 보면 압록강이 흘러드는 곳이 분명 요해라 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압록강이 서쪽으로 흐르고 흘러드는 곳은 지금의 발해(渤海)라는 곳이다.

지금의 발해를 보면 큰 바다를 통칭해야 하지만 발해는 요동반도가 안고 있는 만(灣)일 뿐이다.

이런 곳을 조상님들이 발해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발해가 진짜 발해(渤海)가 아니라는 말이다.

발해는 지금의 흑해(黑海)라고 보지 않을 수 없고 요해(遼海)역시 흑해(黑海)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압록강도 시대에 따라 변천하고 변경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詳細解釋]:渤

(1)水湧的樣子[surging]

(2)又如:渤溢(水湧起的樣子);渤蕩(漲潮)

荡 움직일 탕

溢 찰 일-넘치다. 넘쳐흐르다.

 

최소한 세종 때 압록강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일단 발해의 발(渤)은 위의 풀이 뜻에서 알 수 있지만 넘쳐흐를 수 있는 그릇개념과 큰 그릇 내에서 상당한 파동, 움직임이 있는 파도가 존재하는 곳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해라 하였으니 바다인데 갇혀 있는 바다이고 파도가 출렁거려 넘쳐흐를 수 있는 형상이 강하게 들어나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요(遼)도 마찬가지이다.

음도 같고 글이 달라졌을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본래의 요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번뜻 요강이라는 물건이 생각난다.

오줌을 담는 기구 요강은 한자를 빌려 ‘溺罁, 溺釭, 溺江’으로 적었다 한다.

요는 담는다는 뜻이 강한 단어라고 보인다.

 

중국을 어디로 보아야 하나?

로마(羅馬)를 동진(東秦), 서진(西秦)이라고 하여 동양사에서 말하는 진(秦)나라와 같은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로마가 존재하였다는 지금의 지중해를 "땅 한가운데에" 어원은 라틴어 낱말 medius, "한가운데" + terra, "땅, 지구"의 합성어 "메디테라네우스"(mediterraneus)로, "지구의 한가운데"를 뜻하고 있다. 로마인들은 흔히 "우리바다"(Mare Nostrum)으로 불렀다한다.

여기서도 주지해야 할 것은 보통영어권 사람들은 자신이 다니는 학교를 ‘my school’, 자신이 속해 있는 나라를 ‘my country’라고 분명하게 못을 박는다. 이에 반해 우리는 자신이 어떤 대상에 대해 소유권을 아주 명확하게 지닌 것 말고는 보편적으로 우리라고 한다.

우리라는 단어는 집단주의적 경향이 정말 강하다

두레정신 바로 공동체의식이다.

그런데 서양인의 심리적 관점에서 "우리바다"(Mare Nostrum)라 하였다는 것을 보면 이상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로마가 두레정신의 언어인 “우리”라는 단어를 지중해에다 사용하였다는 것은 지금의 근대사가 확실하게 뒤틀려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클릭원본]

 

지중해를 때로는 "내해(內海)"(Mare Internum)으로 부른 경우도 있고 그리스어로 "내륙, 안쪽"이라는 뜻의 "메소게이오스"(Μεσόγειος)로 불리기도 하였다.(μεσο,"가운데" + γαιος, "땅, 지구")이다.

현대 히브리어에서는 지중해를 독일어의 "미텔메어"(Mittelmeer)에서 그대로 차용하여 "가운데 바다"(Hayam Hatikhon, הַיָּם הַתִּיכוֹן)로 칭했으며 터키어에서는 "하얀바다"(Akdeniz)로 불렀다. 현대 아랍어에서는 "하얀가운데 바다"(al-Baḥr al-Abyaḍ al-Mutawassiṭ, البحر الأبيض المتوسط)라고 부른다.[위키]

 

그렇게 본다면 지중해에 있었던 로마를 지구의 중심으로 보았다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이라고 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로마를 대진(大秦)이라 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발해(渤海, 698-926) 역시 대진국(大震國)이라고 했다.

로마를 동진(東秦), 진(秦)·서진(西秦) 등으로 불렸다는 사실과 진(秦), 진(震), 진(晉)등이 같이 쓰였음도 생각해야 할 것들이다.

그렇다면 모든 삼한역사가 지금의 지중해연안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삼한 역사서에 나오는 압록강은 유럽 다뉴브(Danube)강 즉 도나우(Donau)강이라고 보는데 별로 이상하지 않다.

지중해연안을 삼한이 영역으로 하였다면 다뉴브(Danube)강이 압록강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

아무도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생소할 뿐이다.

다뉴브강이 압록강이 된다면 게르만은 거란족이 되어야 마땅하다.

본 블로그에서 게르만을 거란이라고 했다.

첫째 이 강은 서에서 동으로 흐르니 흐른 방향에서 조건에 합당하다.

이 조건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요해(遼海), 요(溺?:담다)가 어딘가 인데 요해가 발해(渤海)라고 한다면 그곳은 모든 강이 담기는 담수역할을 하는 분명 지금의 흑해라고 할 수 있다.

넘쳐흐를 수 있는 조건인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흑해(黑海)라고 하는 명칭이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오스만 제국 초기라 하는데 왜 흑(黑)이라고 형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고 가설만 있다고 한다.

 

                                            Crimean War(1853.10 – 1856.2)

 

다뉴브강, 도나우강(Donau river)

 

[클릭원본] 

 

 

볼가강 다음가는 유럽 제2의 강. 영어로는 다뉴브, 독일어로는 도나우(Donau), 헝가리어로는 두나(Duna), 루마니아어로는 두나리아(Dunărea), 불가리아어로는 두나브(Dunav)이다.

브리가흐(Brigach)와 브레크(Breg) 두 지류가 도나우에싱겐(Donaueschingen)에서 합쳐진 다음부터는 도나우 강으로 불리며 독일 남서부에서 발원하여 중·동유럽을 동서로 흘러 흑해로 들어가는 국제하천이다. 전체길이 약 2860㎞. 유역면적 81만 7000㎢. 유역폭은 평균 280㎞. 수원은 독일 바덴지방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검은숲)산지이다. 유로는 남독일, 오스트리아 북부, 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 국경을 동진하고, 부다페스트 북방 약 35㎞에서 남으로 굽어 유고슬라비아로 들어가고, 베오그라드 근처에서 다시 동류하여 불가리아·루마니아 국경을 흐른다. 하류부에서는 왈라키아평야를 북상해서 루마니아·몰도바 국경을 남류하는 프루트강과 합류, 양국 국경을 동진하며 흑해로 들어간다. 지류수는 3000에 가깝고, 빈·부다페스트·베오그라드 등을 관류한다.

 

그리스의 헤시오도스와 헤로도토스의 책에는 이미 다뉴브강 유역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로마시대 아우구스투스황제(재위 BC 27∼AD 14)는 제국판도의 북쪽 한계를 다뉴브강 기슭까지 확장하였다. 그 뒤 수세기 동안 다뉴브강은 로마제국과 이민족과의 경계선이 되었다. 그 결과 연안에 요새가 만들어져서 현재의 연안도시 기반이 되었다. 4세기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자 게르만족을 비롯하여 슬라브족·마자르인이 이 강 유역으로 이동·침입하였다. 14세기 이후 오스만제국이 발칸반도로 진출하여 강의 중·하류를 지배하에 넣었다. 18세기 베오그라드 주변지역은 합스부르크제국과 오스만제국의 경계선을 이루었다. 이 무렵부터 군사·상업상 교통로로서 중요성이 증대하였고, 연안 여러 민족은 항행의 자유가 큰 관심사였다.

중세시대에 도나우강은 동서 상업로가 되어 연안에 발전한 울름(Ulm)·레겐스부르크(Regensburg)·빈(Wien/Vienna)등의 중세 도시는 이 강을 이용해서 동방무역을 하여, 동방의 향료·비단, 서방의 모직물·소금·보석 등을 거래하였다.

1856년 크림전쟁을 종결시킨 파리조약으로 드디어 다뉴브강 항행의 자유가 보장되고, 영국 ·프랑스 등 5개국의 도나우 항행위원회(Danube Navigation Commission)가 이 강의 관리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였다. 제1차세계대전 후에도 연안 여러 민족의 다뉴브강 관리 주장은 베르사유조약으로 기각되었다. 1930년대 나치 독일의 진출로 다뉴브항행위원회는 해산되었다. 1948년, 사회주의정권하의 연안제국(동유럽)은 베오그라드에 모여 다뉴브강 항행의 자유, 무장의 자유, 관리위원회를 연안제국에 한정시킨다는 취지의 협정을 체결하고, 다뉴브강 관리위원회를 창설했는데, 하천공동개발이 활발하며, 유고슬라비아와 루마니아가 협력하여 완성한 철문댐은 양국에 많은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파란]

 

잘츠카머구트(Salzkammergut)에는 할슈타트(Hallstatt)호수 

염수(鹽水)가 할슈타트(Hallstatt) 호수?http://blog.daum.net/han0114/17050403

   

                                                            인강[Inn river]

 

 

[할레인 소금광산]

 

또 염난수와 염수이다.

서북으로 흘러들어가는 염난수가 있다고 보이는 것은 다뉴브강(Danube river)으로 들어가는 지류 엔스(Enns river)상류에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Salzburg)라는 도시 남동쪽에 작은 도시 잘츠카머구트(Salzkammergut)에는 할슈타트(Hallstatt)호수가 있고 이것은 곧 염수(鹽水)라 할 수 있으며

다뉴브강(Danube river)으로 들어가는 지류 인(Inn river)중류에 할레인 소금광산(Hallein Salt Mines)이 있으니 염난수다.

 

인강(Inn river)

인강(독일어: Inn)은 유럽 중부의 스위스·독일·오스트리아를 흐르는 강이다.
도나우 강의 지류이다. 길이 517km, 유역면적 25,700km².
스위스 동남부 알프스 산맥 기슭의 그라우뷘덴 주(Graubünden)에서 발원한다.
엥가딘(Engadin)으로 불리는 지역을 흐르며, 스위스 동계 올림픽이 열린 생모리츠(St. Moritz)를 통과한다.
오스트리아 서부로 들어와 티롤 주(Tirol)를 횡단하며, 이 강의 이름을 딴 도시인 인스브루크 (Innsbruck)를 지난다. 독일의 바이에른 자유주(Free State of Bavaria)로 들어와 바이에른 주의 동남부를 흐르며,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출생지로 유명한 마르크틀암인(Marktl am Inn)을 지나 잘츠부르크(Salzburg)에서 흘러오는 지류 잘차흐 강(Salzach river)의 물을 모으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형성한다. 이 부근에 히틀러의 출생지 브라우나우암인(Braunau am Inn)이 있으며, 계속 국경을 이루다 파사우(Passau)에서 도나우 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잘츠부르크(Salzburg)에서 흘러오는 지류 잘차흐 강


잘차흐 강(Salzach river)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하천이다. 그것은 인강(Inn)오른쪽 지류이며, 길이는 225km (140 마일)이다.
강물의 이름은 "소금(鹽)"을 의미 독일 단어 Salz(鹽)에서 파생되었다.
이 강은 19 세기 까지 소금운송으로 지역 경제의 중요한 부분이되었다.
철도가 기존의 교통 시스템을 교체하면서 강 운송이 종료되었다.

                                                          [바르나(Varna)]

 

그렇다면 최종적으로 불가리아 동부, 흑해와 바르나 호 연안에 위치한 다뉴브강(Danube river)하구 바르나(Varna)에서 벌어진 전투가 세종때 일어난 파저강 전투인가 하는 점이다.

반도사는 파저강(婆猪江)전투에서 오랫동안 조선을 괴롭히던 여진족들을 정벌하기 위해 여진족들의 근거지 파저강 유역을 소탕한 전투라 하였지만 위치를 현 중국 봉천(奉天)에 있는 동가강(佟家江)일대라고 하는데 대해 분명치 않고 자신이 없다.

 

이 바르나(Varna)는 흑해의 교역 중심지로 발달했으며 14세기에 벌어진 바르나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차지하여 전략적 요충지로 삼았다고 하는 곳이다. 1444년11월10일에 이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는 오스만 술탄 무라드 2세(Sultan Murad II)휘하의 오스만 제국군과 바르나 십자군(Crusade of Varna)간의 대전으로서 오스만제국이 승리를 하는 마지막 전투인 것이다.

이후 바르나는 19세기까지 계속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렇게 종합적으로 볼 때 다뉴브강(Danube river)이 압록강으로 손색이 없다 할 것이다.

또 한가지 조선이 어떻게 지중해연안에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본 블로그에 올린 조선지진이 일어난 위치와 상황을 보면 명확하게 확인 할 수 있고 믿음이 갈 것이라고 본다.

 

최종적으로 이와같은 기록들을 가지고 총체적인 결론을 내린다면 바로 앵글라이스(Anglais) vs와 코리안(Coréen)간의 유일무일한 문화충돌, 역사충돌에 의한 세계대전(世界大戰, World War)의 발생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앵글라이스(Anglais)는 5-6세기 브리타니아(Britannia)로 이주한 게르만족(거란)의 한 갈래라고 생각되고 영국이라고 총체적으로 풀이되는 영국사람(Anglais)과 기존 세계를 지배하던 코리언(Coréen)대조선 간에 대결 끝에 영국세력(Anglais)이 승리하였고 그 결과 승전물(prize), 전리품으로 대조선을 없애버리야 했고 주요 연합국과 대조선 강역을 나누면서 대조선의 역사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사를 근세기에 만들 필요성이 있어 대조선에서 일어난 하나의 역사사건을 이렇듯 유럽역사에 하나, 중국역사 하나, 한반도역사로 하나 이렇게 따로 나누고 떼어 이중 삼중으로 쪼개 만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여기저기서 들어나고 있다 하겠다.[천명인:한부울]

 

거란(契丹 Khitan 388–1211)은 게르만(Germanic peoples)이다.

염수(鹽水)가 할슈타트(Hallstatt) 호수? http://blog.daum.net/han0114/1705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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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무라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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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트 2세(II. Murat, 1404-1451, 1차 재위1421-1444, 2차 재위:1446-1451)는 오스만 제국의 제6대 술탄이다

중간에 2년(1444-1446)은 그의 아들 메흐메드 2세에게 권좌를 내주고 은퇴생활을 했었다. 무라트 2세의 통치기간은 발칸반도의 기독교세력아나톨리아의 오랜전쟁튀르크 연합국과의 25년에 걸친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1421년 아버지 메흐메트 1세(Mehmed I, 1382-1421, 재위:1413-1421)가 사망하자 술탄에 즉위했다. 그의 아버지는 생전에 술탄의 지위를 놓고 다른 형제들과 다툼을 벌이고 있었을 때에 동로마 제국의 원조를 얻었다. 이때 동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동맹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무라트 2세(II. Murat, 1404-1451, 재위1421-1451)의 통치 초기에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2세 팔라이올로고스(Manuel II Palaiologos, 1350-1425, 재위1391-1425)의 아들 요한네스 8세 팔라이올로고스(John VIII Palaiologos or Palaeologus, 1392-1448, 재위 : 1425-1448)가 앙카라 전투(Battle of Ankara,1402.7.20-티무르와의 전쟁)에서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형제 무스타파(Küçük Mustafa, 1409-1422, 이 인물이 진짜인지는 지금까지 불명이다. 오스만 측에서는 꾸며진 인물이라고 판단했다.)를 대립 술탄으로 옹립해 내정간섭을 해왔다.

이에 분노한 무라트 2세(II. Murat, 1404-1451, 재위142-1451)는 무스타파(Küçük Mustafa, 1409-1422)를 격파하고 그를 처형한 뒤 비잔티움 제국과의 동맹을 파기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오스만군에게 이미 약해진 비잔티움군은 적수가 되지 못하였으며, 수도는 함락 위기에 빠졌다. 하지만 마누엘 2세 팔라이올로고스(Manuel II Palaiologos, 1350-1425, 재위:1391-1425)가 아버지 메흐메트 1세(Mehmed I)의 은인이란 점과 매우 뛰어난 문화인으로써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오스만 제국에게 유리한 화평조약을 맺고 군을 돌려보냈다. 이 조약으로 이후 동로마 제국은 다시 오스만 제국에게 복종하고, 공물을 보내야만 했다. 일설에는 ‘본국에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물러났다’라는 얘기도 있다.

 

1425년까지 정적들을 거의 제거하고 아나톨리아 서부의 투르크멘 공국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지배권을 재확립했으며 1430년에는 발칸 반도로 관심을 돌려 5년간의 싸움 끝에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양도되어있던 북부 그리스의 테살로니카(Thessalonica) 지금의 테살로니키(Thessaloniki)를 점령(Siege of Thessalonica, 1422–1430)했다.

오스만군은 처음에는 헝가리·세르비아·카라만 연합군(Serbian-Hungarian coalition)에 잘 대항했지만 1441년 이후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폴란드·알바니아군(Poland and Albania joined)까지 연합군에 가세하게 되자 오스만 제국은 니시(Naisuss)와 소피아(Serdica)를 잃고 잘로와즈에서는 크게 패했다.

당시 12세 된 아들 메흐메드 2세에게 술탄의 지위를 양위하고 자신은 아나톨리아로 남부로 돌아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1444년 6월 12일 에디르네에서 무라트는 발칸의 제국과 10년간 강화조약에 서명하였으나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세력은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지원하에 곧 강화협정을 깨뜨리고 오스만을 침략했다.

아들 메흐메트는 젊고 경험이 미숙했기에 관료들이 따르지 않았고 원정에도 실패했기 때문에 아들의 간곡한 요청에 의해, 무라트는 다시 복귀하여 오스만 군대를 이끌고 1444년 11월 바르나 전투에서 헝가리-폴란드 그리스도교 연합군을 무찔렀다.

바르나 전투 이후 무라트는 1446년 다시 오스만 제국의 통치권을 쥐게 되었다.

 

In 1448 he defeated the Christian coalition at the Second Battle of Kosovo (the first one took place in 1389). When the Balkan front was secured, Murad II turned east to defeat Timur's son, Shah Rokh, and the emirates(emir 총독영지) of Karamanids or Karamanid dynasty(1250–1487) and Çorum-Amasya.

1448년 10월 17일 제2차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를 포함한 그리스도교 나라들과 싸워 승리를 거두고, 비잔티움 제국을 계속 압박했다. 그러나 무라트 2세는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킬 생각은 없었기에 요한네스 8세의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즉위를 승인하고 화평조약을 맺었다.

 

In 1450 Murad II led his army into Albania and unsuccessfully besieged the Castle of Kruje in an effort to defeat the resistance led by 스칸데르베그(Skanderbeg:알바니아출신장군). In the winter of 1450–1451, Murad II fell ill, and died in(이스탄불 북서쪽에 있는 트라키야 평야의 서부에 있는 에디르네)Edirne. He was succeeded by his son Mehmed II (1451–81).

1450년-1451년 겨울, 무라트는 병으로 쓰러졌고 에디르네에서 죽었다.

 

                                                           [Castle of Kruje]

 

샤 루흐 혹은 샤 로흐 (Shah Rokh, 1377-1447, 재위1409-1447)

는 티무르 제국 제3대의 군주이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명군(名君)으로서 내란을 진압하여 오스만 투르크와 명나라의 국교를 회복하여 티무르 제국의 융성시대를 이룩했다. 샤 루흐는 학문·예술에 대한 훌륭한 이해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다음의 울루그 베그의 치세와 함께 티무르풍(風)이슬람 문화의 최성기를 맞았다.

 

샤 루흐는 티무르의 막내 아들이고, 어머니는 이란인이었다. 샤 루흐란 페르시아어로 “왕의 얼굴”이라는 의미인데, 1405년, 티무르가 죽은 뒤 그의 제국은 지배권을 두고 여러 부족들과 장군들의 세력으로 갈렸다. 흑양조는 1410년에 바그다드를 점령함으로서 제국의 서부가 통째로 사라졌다. 하지만 이란와 트란스옥시아나는 1409년에 샤 루흐가 즉위한 뒤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쨋든 그의 제국은 동방과 서방의 교역로(비단길을 포함)들을 관리했고, 그 덕분에 엄청난 세금을 거뒀다.

이란의 도시들이 파괴된 덕분에 제국의 문화적 중심지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Samarkand)와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Herat)가 되었다. 샤 루흐는 제국의 수도로 사마르칸드가 아닌 헤라트를 선택했다. 덕분에 헤라트는 티무르 왕조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고, 그의 후계자들도 이 도시에 거주했다. 하지만 두 도시 모두 샤 루흐의 궁전에 엄청난 부를 가져다 주었고, 샤 루흐 역시 엄청난 특권을 내렸다. 두 도시는 예술과 과학에 대한 후원자들로 넘쳐났다.

 

샤 루흐는 부친 티무르와 달리 이슬람교를 통해 정통성을 재고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자삭보다 샤리아를 중시한 그는 칭기스 왕실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관행을 폐지하였으며, 이슬람 지향적인 역사서 편찬을 명했다. 이 정책은 그가 죽은 뒤에는 사라졌다. 이후 칭기스 왕실의 권위에 의존하는 경향은 되려 더 강화되었다. 그의 아내 고와르 샤드(Gowhar Shād:meaning "joyful jewel" or "shining jewel" in Persian)는 마슈하드와 헤라트에 모스크와 신락교들을 세웠다. 고와르 샤드 모스크의 건축은 1418년에 끝났다. 제국의 복잡한 인종적 상황이 이 건축물에 반영되었다. 페르시아 문명과 중국에서 빌려 온 예술 기법들, 튀르크어와 아라비아어의 영향을 짙게 받은 페르시아어 등이 보인다.

 

본래 티무르 왕조와 홍무제의 제국사이의 관계는 우호적이었으나, 티무르가 죽기 직전에는 크게 악화되었다. 하지만 샤 루흐의 치세 기간 동안 영락제를 비롯한 그의 후손들이 이끈 명나라와 티무르 왕조의 외교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중국의 진성이 이끄는 사절단이 1414년에서 1420년 사이에 여러 차례 사마르칸드와 헤라트를 방문했으며, 샤 루흐가 보낸 대규모 사절단 (이 사절단에는 일기 작가로 유명한 기야스 알 딘 낙카쉬도 있었다.) 역시 1419년에서 1422년 사이에 중국을 여행했다.

샤 루흐는 이란을 순방하던 도중 죽었다.

샤 루흐의 치세기간 동안 트란스옥시아나를 다스린 그의 아들 미르자 무함마드 타라가이 울루그 베그 b. 샤 루흐(Ulugh Beg, 1393-1449, 재위 1447-1449)가 아버지를 계승했다.

울루그 베그는 티무르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한 티무르 제국 제4대 군주로, 제3대 군주 샤 로흐의 장자이다. 문화인으로서 뛰어난 수학자·천문학자·역사학자로서 학자·예술가들을 우대하고 학문·예술을 보호 장려했기 때문에 수도 사마르칸트는 이슬람 학예(學藝)의 중심지로서 번영했다.

예술적인 재능을 가졌던 아들 바이손구르(Sultan Bāyson­ḡor Bahādor Khan, 1397-1433)는 형 만큼은 아니지만 아버지 샤 루흐의 재위기간에 사마르칸드의 행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아버지보다 빨리 죽었는데, 아마 과도한 알코올 섭취가 문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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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메흐메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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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흐메트 2세(II. Mehmet, 1432-1481,1차 재위:1444-1446, 2차 재위:1451-1481)는 오스만 제국의 제7대 술탄이며, 초대 황제이다. 1444년부터 1446년까지 짧은 기간 통치하다가 퇴위되고 나중에 1451년부터 다시 즉위하여 1481년에 죽을 때까지 집권하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으며 오스만 제국의 판도를 대폭으로 넓혀 ‘정복자(Fatih, the Conqueror)’란 별명으로 불렸다.

 

초창기에 메흐메트 2세는 1432년 3월 30일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에디르네(Edirne)에서 술탄 무라트 2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당시 세르비아의 흄 지방(압둘라,Hum. Zachlumia, 현재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출신의 그리스도인 노예로 알려져 있다. 태어난 지 2년 만에 메흐메트는 맏형이 총독으로 있던 소아시아의 도시 아마시아(Amasya)로 옮겨갔다. 3년 뒤 메흐메트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맏형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아마시아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나중에 둘째형이 아마시아 총독으로, 메흐메트는 마니사 (Manisa)총독으로 바뀌었다. 1443년 둘째형이 죽자 메흐메트는 술탄의 계승자가 되었고 다음해 아버지 무라트 2세는 아나톨리아의 카라만 연합군(Karaman, Serbian-Hungarian coalition)과 평화협정을 맺고나서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12살의 메흐메트에게 술탄의 지위를 넘겨주고 남부 아나톨리아도 돌아가서 은둔했다(1444).

메흐메트는 아버지가 다시 돌아와 헝가리군과 싸워주길 바랐는데 아버지 무라트(II. Murat, 1404-1451, 재위142-1451)는 처음에는 거절했다. 메흐메트는 결국 이런 편지를 아버지에게 썼다고 한다.

 

“ 당신이 술탄이시거든, 돌아와 당신의 군대를 이끌어주소서. 만약 내가 술탄이라면 나 지금 당신에게 명령하노니, 돌아와 나의 군대를 이끌어주시오. ”

결국 무라트(II. Murat, 1404-1451, 재위142-1451)는 전장으로 돌아와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게 되고 2년 후 아들 메흐메트(II. Mehmet, 1432-1481,1차 재위:1444-1446, 2차 재위:1451-1481)를 퇴위시키고 다시 술탄에 복귀한다. 그러한 무라트 복귀의 배후에는 재상 할릴 파샤(?~1453)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와 메흐메트는 서로 반목했다고 전해지며 나중에 할릴 파샤는 메흐메트가 다시 정권을 잡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때 동로마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죄로 처형당했다.

퇴위당한 메흐메트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마니사에 머물면서 남색과 여색을 불문하고 난행에 젖어 지내는 것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동로마제국정복:1451년 아버지 무라트(II. Murat, 1404-1451, 재위142-1451)가 죽자, 그는 다른 형제들을 죽이고 정식으로 다시 술탄에 즉위했다. 두 번째로 치세를 시작하면서 아나톨리아 내륙부에 있던 카라만 제후국을 격파하고, 1452년 귀환하던 도중 보스포루스(Bosporus)해협에 루멜리 히사르(Rumelihisari, '유럽의 성')라는 요새를 건설하고 동로마 제국을 압박했다.

 

1453년 재상 할릴 파샤의 반대를 물리치고 출병한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여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켜 역사의 무대에서 끌어내렸다. 수도를 아드리아노플(Adrianople:modern Edirne)에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옮기고 제국을 정복한 이후 그는 다시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에 남아있던 비잔틴계 제후국들을 차례차례 정복하기 시작하였는데, 1460년 펠로폰네소스(Peloponnesos)의 모레아(Morea), 1461년에는 아나톨리아 북서부에 있던 200년간 존속하던 비잔틴계 국가 트라페주스 제국(Empire of Trebizond:1204-1461)을 차례로 멸망시켰다

                                             (Empire of Trebizond:1204-1461)

 

위는 비잔틴 방계 제국인 트라페주스제국(Empire of Trebizond:1204-1461)의 국장인데 8괘(八卦) 중 하늘(天)을 상징하는 건(乾) ☰ 을 하고 있다.

이것은 삼한 계통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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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astern Europe around 1250)

 

콘스탄티노플의 화재 (Incendie à Constantinople)

1453년에 벌어진 투르크족과의 공방전, 서방의 원조를 기다리며 분투한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투쟁담, 정복자 메메드 2세의 콘스탄티노플을 향한 집념, 함락 전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Aya sofya)에서 미사를 올리는 절박한 시민들의 모습, 동서교회의 오랜 갈등과 대립 등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은 회화와 소설을 비롯한 많은 장르의 소재로 사용되어왔다.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후 메흐메트는 자신이 새로운 로마 제국의 황제로 자처하고 나섰다. 330년 로마 제국의 수도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바뀌었고 동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이를 점령한 자신에게 로마 황제의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800년에 카롤링거 왕조의 제2대 프랑크 국왕 샤를마뉴(Charlemagne, 재위 768~814)가 교황 레오 3세(Leo III, 675-741)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임명된 데다가, 동프랑크 왕 오토 1세(Otto I, 912-973)는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임명되었으며, 모스크바 대공국(Grand Principality of Moscow, 1283–1547)이 스스로를 제3의 로마로 선언하면서 러시아 제국으로 승격하였기 때문에 메흐메트의 주장은 빛을 잃게 된다.(이것은 러시아가 동로마의 마지막 공주와 결혼한 것과 동로마의 동방정교를 계승한 것을 근거로 선언한 것이다.)

 

아시아와 유럽의 정복:발칸반도에서는 베네치아 공화국(Venetian Republic, 697-1797)등 유럽의 여러나라와 싸워 펠로폰네소스(Peloponnesos)반도와 세르비아(Serbia)를 정복했다. 이후 그의 관심은 아나톨리아 지방으로 쏠렸다. 아나톨리아에서는 룸 셀주크 왕조(Sultanate of Rum, 1077-1307)의 해체 이래 각지에 할거한 여러 제후국을 정복하고 현재의 터키 공화국의 국토라 할 수 있는 아나톨리아 전부를 손안에 넣었다.

1475년에는 크림 반도에 할거하던 몽골 제국의 후예국가인 크리미아 칸국(1430-1783)을 복속시키고 흑해를 오스만 제국의 바다로 만들었다. 30년에 걸친 두 번의 치세에 이르러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발칸 반도의 여러 왕국, 아나톨리아의 튀르크계 여러 세력을 정복해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급속도로 확대시켰다. 이로 인해 오스만 왕조는 제국이라 불릴 수 있는 내실을 획득할 수 있었다.

소아시아가 안정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으로 힘을 얻은 메흐메트는 그 자신이 로마 제국의 황제의 계승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1480년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한다. 로마를 점령하여 로마제국을 재통합하려는 그의 의도는 좋았으나 때마침 알바니아(Albania)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배후를 차단당하고 교황 식스토 4세(Sixtus IV, 1414-1484)가 이끈 강력한 군대에 밀려 퇴각했다. 그러나 그는 발칸 지방에서 작은 군주국을 제압하는 데 성공하여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발칸지방으로 확대하고 베오그라드(Belgrade)까지 진출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선 독살설이 제기되고 있으며 유대인 의사가 가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내정면에서는 수도를 종래의 에디르네-아드리아노플(Adrianople:modern Edirne)에서 새롭게 정복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고 그곳에 무슬림을 대거 불러 모아 살게 하면서 동로마 제국 시대부터 살아왔던 동방정교회 교도(Eastern Orthodoxy, 東方正敎會)와 서방으로부터 온 가톨릭교도(Catholic Church), 아르메니아 정교도(Armenian Apostolic Church)나 유대인(Jews, 猶太人)도 살게했고, 모스크와 상업시설 등의 인프라를 건설해 이스탄불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붙여진 이 도시를 부활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관습법이나 법령을 집대성한《카눈나메(Kanunname)》라 불리는 법전을 편찬하고, 카프쿠르라 불리는 자식같은 군인관료를 재상이나 주지사 등의 고관으로 임용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중앙집권적인 통치기구를 정비했다.

 

메흐메트 2세 자신은 페르시아어로 시를 짓고, 아라비아어로 풀이할 정도로 경건하고 교양있는 무슬림이었으나, 동시에 전통적인 이슬람 문화만을 고집하는 마음을 갖지 않아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와 예술가를 모았고, 자신의 초상화를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젠틸레 벨리니(Gentile Bellini, 1429-1507)에게 그리게 하는 등 고전적인 이슬람 국가의 이미지에 머물지 않고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우주시민)적인 제국의 군주로써 군림했다.

그는 무슬림 남성에게 존재하던 남색을 애호하여 인질로 있던 그리스도교국의 젊은 왕자나 귀족의 영애들을 사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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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世宗, 1397-1450, 재위1418-1450)

문종(文宗, 1414-1452, 재위1450-1452)

단종(端宗, 1441-1457, 재위1452-1455)

세조(世祖, 1417-1468, 재위1455-1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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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世宗, 1397-1450, 재위1418-1450)

조선의 제4대 왕이며 성은 이(李), 휘는 도(祹, 示+匋), 자는 원정(元正)

대외정책에서 명(明)과의 외교에서 금·은 세공을 말(馬)과 포(布)로 대신토록 하는 데에 합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 김종서(金宗瑞), 이천(李蕆)과 이징옥(李澄玉)에게 6진(鎭), 4군(郡)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일본과의 외교에서 초기에는 삼포개항 등의 회유책을 썼으나 상왕 태종의 명령 아래 무력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사령관 이종무(李從茂)의 실책으로 조선의 피해가 만만치 않아 실질적으론 군사적인 승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대마도 도주가 조선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을 약속하였기에 부정적인 것 또한 아니었다. 조선 앞바다는 그로 인해 얼마간 왜구로부터 잠잠할 수 있었다.

이종무의 실책: 정찰대 선발 때 제비뽑기를 선발 방법으로 채택해 사기를 떨어뜨렸고, 결국 의욕 없이 나간 정찰대 중 180명이 왜병의 기습에 죽고 말았다.

국방정비에서는 세종은 학문적인 사업은 물론이고 국토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왜구 문제는 처음에는 세견선(歲遣船)을 허락하는 등으로 회유책을 써서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으나, 당시 일본국의 무로마치 막부의 전국 통제력도 완벽하지 않아 왜구의 남해안 노략질은 줄어들지 않았다.

1419년에도 왜구가 침입하자 그해 음력 6월 19일 이종무 장군을 삼도 도절제사로 삼아 그로 하여금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들과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케 하였다.

대마도에 상륙한 조선군은 섬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왜구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보름쯤이 지나자 대마도의 도주가 항복을 하였다. 이때 이종무는 왜구에게 잡혀 갔던 조선 사람과 함께 붙잡혀 있던 명나라 사람도 구출하였다. 조선군은 대마도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켜

1420년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킨다고 대마도 도주에게 통고했다.

그 대신 조선과의 무역을 허락하여 삼포를 개항했다. 이것은 왜구를 너그럽게 포용함으로써 노략질을 근본적으로 방지하는 정책이었으며, 실제로 이 같은 정책으로 오랫동안 왜구의 침입이 없어졌다.

1433년에는 압록강을 넘어 파저강 전투에서 여진족을 무찔렀으며, 1443년에는 북방 이민족인 여진족에 대한 강경책과 영토 확장에 대한 일환으로 최윤덕 장군과 김종서 장군으로 하여금 여진족을 토벌하여 평안도의 4군(四郡)과 함길도의 6진(六鎭)을 개척하게 하였다. 이로써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급속히 축소되었던 영토가 두만강 및 압록강 유역으로 확대되었다.

 

파저강 전투(1433년 4월 10일-4월28일)는 조선 세종 시기 1433년 최윤덕(崔閏德, 1376-1445) 등 북방 장수들이 오랫동안 조선을 괴롭히던 여진족들을 정벌하기 위해 여진족들의 근거지 파저강 유역을 소탕한 전투이다. 당시 북방 유목 민족 본래 갈족, 말갈족, 선비족이 융화된 민족으로서 여진(女眞)족은 고려시대 1391년 만포진과 갑산을 점거한 이후 조선의 북방 국경 지역을 넘나들며 약탈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태종 시기 북방 지역에 관심을 기울여 북방 지역으로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각 고을들을 개칭하고 승격시켰다.

 

세종에 이르러서도 여진족의 국경 침탈이 자주 이루어졌다.

1432년 12월 9일에 야인 400기가 경계에 침입하여 사람과 물건들을 약탈해가니 강계절제사 박초가 추격하여 사람들을 구하고 약탈해가는 물건을 다시 빼앗아 왔다고 장계하였다. 이어 12월 21일에 파저강 유역의 이만주가 침입하였는데 이전부터 식량이 부족하여 4군 지역에 자주 침탈하였다. 계속되는 여진족의 참탈을 기화로 조선의 조정에서는 본격적으로 여진족의 정벌을 논의한다.

이듬해인 1433년 1월에 평안도감사가 여연 강계에서의 전투에서 전사자 48명을 포함해서 75명의 피해를 보고했다. 이에 세종은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의 정벌을 위해서 1월 11일에 평안도도절제사로 최윤덕을 임명하였다.

최윤덕 등 조선 조정의 중신들은 정벌에 신중해야한다고 아뢰었으나 세종의 압록강유역의 정벌 의지는 확고하였다. 그리고 최윤덕을 판중추원사 겸 영영변도호부사로 삼았다. 이후 조정에서 처음 정벌군의 규모를 3천을 논하였으나 전술적인면 등을 들어 최윤덕이 아뢰어 최종적으로 정벌군은 1만 이상의 군사로 정하였다.

 

1433년 평안도도절제사로 임명된 최윤덕은 임지로 부임하여 차근차근 정벌에 대한 준비를 실행하였다. 정벌 준비가 완료되고 4월에 모든 군사가 강계부에 집합하였다.

정벌군은 최윤덕을 평안도도절제사 겸 3군도통사로 김효성을 도진무로 하였고, 군사는 황해도와 평안도의 군병 1만 5000명으로 모아 4월 10일에 드디어 압록강유역의 파저강 인근으로 출진하였다.

4월 10일-4월 19일까지 여진족 추장 임할라 휘하의 여러 부락들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고 무기와 가축 다수를 노획했다.

4월 19일 최윤덕은 어허강까지 진출하여 강변에 수비병력 600명을 배치하고 동이 틀 무렵 적장 임할라와 삼타나노의 본거지를 공격했다. 그러나 두 마을은 모두 비어있었고 야인들은 궁시 사격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최윤덕이 궁시 사격을 하려던 야인들을 정중히 대접하자 야인들은 그의 예의에 감동하여 물러갔다.

4월 20일 홍사석 부대는 최윤덕 부대와 합류하여 공격해 야인 장정 31명을 사로잡았으나 곧 포로들이 폭동을 일으켜 26명을 사살하고 5명을 억류시켰다.

최윤덕과 홍사석은 임할라와 손타나노를 뒤쫓아 그들의 광범위한 본거지를 대공격해 수색 활동을 전개하고 함정과 장애물을 설치했으며 지자산군사 조복명과 지재령군사 김잉은 병력 1400명과 야인 포로들을 이끌고 길을 수리했다.

토벌 도중 야인들이 밭에 불을 질러 군사들이 식량 부족에 시달리게 했으나 곧 회복하고 파저강 일대의 야인들을 모두 평정하였다.

이 정벌은 다른 지방의 여진족들의 분열도 불러왔는데, 1433년 10월에 함경도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의 분열을 야기 시켰다. 이에 세종은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사민정책 등을 펼치면서 함경도에서 조선의 내실을 다져가 6진을 개척하였다.

 

생애 후반은 가정의 불행이 있었는데

조선 태종의 4남으로 이름이 종(褈)인 성녕대군(誠寧大君, 1405-1418)의 죽음과 조선시대 초기의 공주로, 조선의 제4대 왕인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심씨의 장녀인 정소공주(貞昭公主, 1412-1424)의 요절과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 소생의 제 5대군 광평대군(廣平大君, 1425-1444)의 죽음 등 가족을 잇달아 잃어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 沈氏, 1395-1446)는 비탄에 빠졌고 곧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이들의 명복을 비는 등 불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이어 소헌왕후마저 사망하면서 그는 생애 후반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조선의 건국 이념은 유교 성리학이었기에 유학자들의 반발이 거셌으나 세종은 이에 개의치 않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였으며, 먼저 죽은 가족들의 넋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한 데다가, 학문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아버지 태종에게 걱정을 샀던 세종은 젊은 시절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다. 각종 질병(중풍, 임질(현재의 요로결석), 노안)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질병으로 인해 여러 번 세자의 섭정을 하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무산되었다. 그러나 세종의 병세가 악화되어 제대로 집무를 할 수 없게 되자 결국 1445년부터 세자 향(珦), 후 조선의 제5대 임금인 문종(文宗, 1414-1452, 재위1450-1452)에게 섭정을 하도록 했다. 《세종실록》을 보면 집권 후반부에는 이런 각종 질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주 온천에 행차하였음이 기록되었다. 세종은 대식가였고, 몸집이 비대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세종이 걸린 중풍은 현대의 의학 용어인 뇌경색과 뇌출혈을 포함하는 용어로서 뇌경색은 비만으로 인한 혈관 내 콜레스테롤 수치 증가로 인하여 발병하며, 뇌출혈은 뇌경색 직전인 상황에서 고혈압이 있으면 발병하게 된다. 1450년 음력 2월 17일 (양력 4월 8일) 54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세종 가족 관계

부: 제 3대 태종(太宗, 1367-1422, 재위1400-1418)

모: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1420)

 

왕비 :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1395-1446)

정소공주(貞昭公主, 1412-1424)

왕세자 향(王世子 珦) - 문종(文宗, 1414-1452, 재위1450-1452)

 

왕세손 홍위(王世孫 弘暐) - 단종(端宗, 1441-1457, 재위1452-1455)

1455년 숙부 세조의 정변으로 양위하였다가, 세조 측근들의 탄핵으로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가 암살되었다.

1450년 세종의 뒤를 이어 문종이 즉위한 그 해에 단종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52년(문종 2년) 4월 문종은 수양대군을 관습 도감 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수양은 야심을 철저히 숨기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는 등 자신의 뜻을 철저히 감추었다. 그가 관습도감 도제조가 되자 사간원에서 종친에게 실직을 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탄핵했으나 문종이 듣지 않았다. 세종이 우려했던 대로 문종은 왕으로 즉위한 지 겨우 2년 3개월 만에 병으로 승하하고 말았다.

1452년 단종은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단종은 어릴 때부터 세종의 칭찬이 자자했을 만큼 영리하였으나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혼자서 나랏일을 결정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결정은 신하들이 도맡아 했고, 단종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 데 그쳤다. 특히 인사 문제는 ‘황표정사(黃票政事)’라는 방식으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왕의 권력이 축소된 것에 반해 세종의 아들이자 문종의 동생인 수양대군 등 왕족의 세력은 나날이 팽창되어 갔다.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 왕족의 대표로서 자신을 단종을 최측근에서 모실 수 있는 보호자라고 말하였고, 무신 세력을 양성하여 왕위를 찬탈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안평대군 계열이 먼저 손을 쓰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자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켰는데, 이때 그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신권을 억압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의 왕족과 성리학자들의 지지를 획득한다. 이후 수양대군은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 등을 역임하며 권력 기반을 다지게 된다.

혜빈 양씨와 영풍군 등은 단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문종의 후궁인 숙의 권씨 등은 정보를 훈신들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특히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세력 경쟁은 단종이 즉위한 지 1년 만인 1453년 음력 10월, 계유정난을 불러왔다.

1453년 10월 정인지·한명회·권람 등과 공모하고 홍윤성·홍달손 등을 통해 병력을 모은 뒤 문종의 고명(誥命)으로 단종의 보호책임을 맡은 황보인·김종서 등을 죽이고 아우 10월 10일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키고 스스로 영의정부사가 되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454년(단종 3년) 3월 논공행상을 정하여 정난공신을 책정하고 자신은 분충장의광국보조정책정난공신(奮忠杖義匡國輔祚定策靖難功臣) 1등관에 서훈하였다. 계유정난으로써 수양대군이 정치적 실권을 거의 장악하자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고 말았으며, 안평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가서 사약을 받았다.

1454년에 수양대군이 단종의 나머지 측근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하는 일이 일어나자 계유정난을 계기로 일부 신료들은 단종이 양위해야 된다는 공론을 세웠고 이는 통과되었다.

1455년(세조 1년) 단종은 수양대군의 측근 세력인 한명회·권남 등이 선위를 강요받아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1456년 음력 6월에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 등 이른바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는 일이 일어났다. 세조가 즉위한 이듬해(1456년)에 성삼문·유성원·하위지 등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과 무인들은 연회때 별운검을 설치한 뒤 세조 3부자를 제거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가담자의 한명인 김질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에게 이를 말하고, 정창손의 설득에 의해 사육신의 정변 기도를 폭로한다. 그 바람에 1457년 단종은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숙부인 금성대군 역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사약을 받고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정의공주(貞懿公主) 하가(下嫁) 연창위 강맹담(延昌尉 姜孟聃)

 

수양대군 유(首陽大君 瑈) 조선의 제7대 임금 세조(世祖, 1417-1468, 재위1455-1468)

세조는 1457년 음력 6월 갑자기 악몽을 꾸고 형수이며 조선 문종의 왕비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 1418-1441)의 묘를 파헤쳐 부관참시한 뒤 폐서인시켰다. 이를 두고 여러가지 전설과 야사가 나왔고, 세조 사후 희극작품의 소재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야사는 1457년 아들 덕종(의경세자)가 일찍 죽자 세조가 아들 단종의 죽음에 한을 품은 문종비 현덕왕후의 혼령이 사주한 것이라 착각하여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꺼내는 엽기적인 행각을 저질렀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전혀 맞지 않는 낭설이다. 덕종이 사망한 것은 1457년 음력 9월 2일로, 오히려 단종(1457년 음력 10월 21일)보다 한 달 정도 먼저 사망했다.

또한 현덕왕후가 세조 시기인 1457년 음력 6월 26일에 서인으로 격하되었지만, 그것 또한 현덕왕후의 어머니와 동생이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다 발각되어 처형당해 현덕왕후(1457년 음력 6월 26일 폐서인)가 아버지 권전(1456년 음력 7월 7일 폐서인)과 함께 연좌된 것이었다. 폐서인된 왕후의 능은 평민의 격에 맞도록 작게 재조성되었고, 제사 또한 지내지 않게 된다.

세조는 피부에 고름이 생기다가 문둥병으로 이어졌다. 전설에 의하면 단종의 모친인 현덕왕후의 원혼이 세조의 꿈에 나타나 내 아들을 죽인 원수라며 침을 뱉은 이후로 병증이 심해졌다 한다.

어의들도 치료를 못하자 그는 그 치료를 위해 온천욕을 즐겨 다녔으며, 아산의 온양온천 등에 행궁하기도 했다. 한번은 오대산 상원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100일 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치고 몸이 가려워 혼자 목욕을 하는데, 지나가는 동자승이 있어서 등을 밀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네가 나가서 행여나 사람을 만나더라도 상감 옥체에 손을 대고 흉한 종기를 씻어드렸다는 얘기를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더니 동자승이 미소를 지으며 "잘 알겠습니다. 상감께서도 후일에 누구를 보시던지 오대산에 가서 문수동자를 친견했다는 말씀을 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하는 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현재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에는 세조가 보았다는 목조 문수동자상이 있다.

만년의 세조는 심한 악몽에 시달렸고, 악몽을 계기로 불교에 귀의할 결심을 한다. 이는 유교 성리학을 국교로 하는 조선의 국가 이념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의 불교 귀의에 항의하여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 학자들과 훈구 유학자들은 연명 상소와 사퇴 등으로 항의의사를 표시하기도 했으나, 세조의 만류로 무마되었다. 그러나 조선건국 당시 금지한 불교 금지령을 완화시켜 양반 사대부들 중에도 불자가 나타나기도 했다.

세조는 여러 불당의 중수와 창건을 지원하였다. 훈구파 공신들과 사림파 신진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내에 불당을 지었고, 원각사와 신륵사 등을 지원하였다. 또한 수종사(水鍾寺) 등의 중건을 지원하기도 한다. 강원도의 월정사, 상원사 등에도 적극 시주, 후원하였고 파주 보광사, 남양주의 수종사와 양평 용문사, 합천의 해인사 등도 그가 후원하는 사찰들이었다.

그가 지원하던 사찰 중에는 양주의 수종사도 있었다. 그런데 수종사는 세조가 죽인 자신의 동생 금성대군이 시주해 세운 곳이기도 하다.

또한 세조는 유점사를 왕실의 복을 비는 원당으로 정하였으며, 조선의 왕 중에서는 유일하게 직접 금강산에 와서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등을 들러보며 매년 쌀 100섬과 소금 50섬을 금강산의 사찰들에 (시주로) 지급하도록 지시한다. 이를 '세헌'이라고 하는데 뒤에는 200여섬으로까지 늘어나게 된다. 그런가 하면 반역죄로 처형당한 사람의 토지와 노비, 삼림 등을 금강산 사찰들에 나눠주기도 했다.

한편 그의 사후 금강산에 있는 표훈사에 그의 영정이 봉안되기도 했다.

합천 해인사에도 그의 영정이 봉안되었는데 이 해인사 영정은 2000년대까지도 전하고 있다.

왕자시절부터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불교는 왕실의 안녕과 미래를 보장하는 종교적인 신앙으로서 필요했다. 세조는 불교가 가지고 있는 호국성에 근거한 국가·민족의식의 고양을 통해 국방력과 집권체제의 강화를 도모하고자 원각사(圓覺寺)를 세우고〈월인석보 月印釋譜〉를 간행하였다. 1461년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해 많은 불경을 국역하도록 명하기도 했다.

함경도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카 귀성군(龜城君)을 파견하여 평정케 하고, 강순(康純)을 파견하여 건주위(建州衛) 여진족을 토벌하였다. 그는 무장들을 신뢰하여 구성군, 남이, 강순 등을 측근에 두었는데, 이들에 대한 총애에 반감을 품은 세자 해양대군은 즉위하자 마자 이들을 모두 제거한다.

만년에는 왕위의 찬탈로 인한 인간적인 고뇌에 싸여 불교에 귀의했다고도 한다.

1468년 세조는 자신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고, 한명회 및 신숙주, 구치관 등을 불러 그들에게 왕세자 해양대군을 잘 보필해줄 것을 부탁했다. 9월 6일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 날 승하하였다. 바로 명나라에 고부사신 황중(黃中)·김계박(金繼朴)을 파견하여 그해 12월 혜장이라는 시호를 받아왔다. 당시 나이 향년 52살이었다.

안평대군 용(安平大君 瑢 1418-1453)

임영대군 구(臨瀛大君 璆 1419-1469)

광평대군 여(廣平大君 璵 1425-1444)

금성대군 유(錦城大君 瑜 1426-1457)

평원대군 임(平原大君 琳 1427-1445)

영응대군 염(永膺大君 琰 1434-1467)

 

후궁 : 영빈 강씨(令嬪 姜氏, 강석덕의 딸)

화의군 영(和義君 瓔 1425-1460)

 

후궁 : 신빈 김씨(愼嬪 金氏)

계양군 증(桂陽君 璔)

의창군 공(義昌君 玒)

밀성군 침(密城君 琛)

익현군 연(翼峴君 璭)

영해군 당(寧海君 瑭)

담양군 거(潭陽君 璖)

 

후궁 : 민정혜빈 양씨(愍貞惠嬪 楊氏)

한남군 어(漢南君 ?)

수춘군 현(壽春君 玹)

영풍군 전(永豊君 瑔)

옹주(翁主) : 일찍죽음

옹주(翁主) : 일찍죽음

후궁 : 귀인 박씨(貴人 朴氏)

후궁 : 귀인 최씨(貴人 崔氏)

후궁 : 숙의 조씨(淑儀 曹氏)

후궁 : 소용 홍씨(昭容 洪氏)

후궁 : 숙원 이씨(淑媛 李氏)

정안옹주(貞安翁主) 하가(下嫁) 청성위 심안의(靑城尉 沈安義)

후궁 : 상침 송씨(尙寢 宋氏)

정현옹주(貞顯翁主, 1424-1480) 하가(下嫁) 영천부원군 윤사로(鈴川府院君 尹思路),

후궁 : 사기 차씨(司記 車氏)

옹주(翁主) : 일찍죽음[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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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드님이 제기 하신 파저강 지도입니다.

특히 바이에른이 자유(free)시 자유주라는 것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대한제국 말 흑해사변이 불현듯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