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인물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영역?

한부울 2011. 9. 10.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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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영역?

 

글쓴이:한부울


이글의 진의는 다음의 글과 긴밀하게 연결된 것으로 "고구려韓(무쿠리칸汗)계보와 영역 http://blog.daum.net/han0114/17045482" 그리고 "자작나무(白桦 Betula platyphylla)가 단목(檀木)이고 신단수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402"와 "충격적인 동방역사(東方歷史)에 들어가면서 http://blog.daum.net/han0114/17050378", 끝으로 "염수(鹽水)가 할슈타트(Hallstatt) 호수?
http://blog.daum.net/han0114/17050403"를 참고 할 수가 있다.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먼저 결론 부터 내리자면 결국 켈틱 폴리티이즘을 숭상하는 민족들이 바로 고구려와 연결할 수 있다는 최종 결론내릴 수 있어진다.

켈틱 폴리티이즘(Celtic polytheism)은 프랑스 북부지방의 高盧(고노, 고로) 즉 갈리아(Gallia),골(Gaul)지역에 근거한 켈트족이 믿는 정통적인 다신교(多神敎)를 말한다.

고구려는 시베리아전역 뿐만아니라 북유럽을 지배했다고 감히 단언하는 바이다.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라고 하지만 실제 고구려가 얼마나 강했는지 또는 고구려영토는 얼마나 광대하였는지 그 실체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해야 맞다.

그것을 보면 우리는 역사를 입으로만 하고 있을 뿐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누가 나서 이것을 바로 고치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

이 모든 것은 반도사에 짓눌려 있기 때문이다.

해방 후 벌써 60년이 넘었음에도 반도사는 여전히 뻔뻔하게 기득권으로 하는 친일역사학자들의 비호를 받으며 정사(正史)로 취급되고 있다.

이것이 어찌 온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반도사는 진실역사를 밝히는데 장애물일 뿐이고 박멸할 바이러스라고 할 수 있다.

진실한 역사를 세우는 의욕까지 망실되게 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불구의 역사이다.

바르지 않는 역사는 우리의 정서를 피폐하게 만들뿐 개똥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엄연하게 잘못된 일제 병탄기의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일제병탄기에 조선총독부가 치밀하게 역사를 조작하였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이 남겨 두고 간 역사를 고치려 생각하지 않는다.

일제가 한반도를 침략하고 병탄한 사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또한 반도사는 암흑기라는 일제 병탄기에 만들어진 잘못된 역사임을 분명하게 알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받아들이는 이중적인 어리석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이 어찌 모순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반도사가 지탱하게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 잘 아는 것처럼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때(1145년) 김부식, 정습명등 11명의 사관(史官)에 의하여 쓰여진 최고(最古)의 역사서라 하고 있다.

삼국유사 또한 고려 충렬왕 때(1280년대) 일연(一然)스님이 신화, 설화, 시가 등을 중심으로 서술 편찬하였다는 야사(野史)로 기반으로 하는 사서라고 하지만 결국 삼국사기의 부족함을 보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역사서가 일제 문화 침탈기, 병탄기를 온전하게 잘 견디어 우리에게 원본 그대로 남겨져 전해 온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이야기다.

그야말로 순진하기 짝이 없고 어리석은 생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친일강단사학계에서 정사(正史)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일제가 뿌리고 간 엉터리 역사를 가지고 거짓 노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마땅한 일이다.

어찌 36년간 긴 시간동안 그것도 식민지상태에서 민족문화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찬탈까지 자행한 인간백정 일제만행을 어떻게 인정 할 수가 있는가?

무엇보다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원본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식민지기간동안 치밀하게 기획되어 완성된 것이라고 해야 맞다.

일제총독부에 의해 관리되었던 모든 사서(史書)가 조작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란 판단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암흑기라는 병탄기에 이 서서(史書)들만은 온전했다고 주장하는 작자들은 분명 똥, 오줌 가리지 못하는 바보 멍텅구리일 것이다.

그들이 바로 친일사학자들이 아니면 그런 주장을 할 수가 없다.

이 두 사서가 존재하는 바람에 온전한 역사 찾기가 더 힘들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본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일제가 반도역사를 만들기 위하여 철저하게 이용하였던 것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출처가 분명치 않지만 몽골인이 썼다고 하는 자료 무쿠리의 계보란 자료는 큰 값어치가 있다.

물론 이 글에 대한 진위논란과 더불어 말들이 많다.

그렇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 알고 있던 우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고 고구려가 얼마나 강했는지 또는 고구려영토는 얼마나 광대하였는지 그 실체를 어느 정도 짐작 할 수 있게 하였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할 것이다.

 

아래는 고구려 19대왕 광개토대왕(재위392년~413년)의 이야긴데 여태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한번 보자.

고구려 19대왕 광개토대왕(재위392년~413년) 이름은 담덕, 안이고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 등이 전해지며, 이를 줄여서 광개토대왕, 광개토태왕이라 부르기도 한다. 생존시 칭호는 영락대왕이었는데 영락이란 연호는 한국에서 사용된 최초의 연호였으며, 중국과 일본 등지에는 호태왕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에 몽골인 쓴 무쿠리계보란 자료에서는

무쿠리 19대 칸, 러리 토크토부하 바 칸(Leli Toktobuha Ba Khan, 재위391-413). 코리구룬쿠부허 칸(故國壤王)의 타이시(태자). 이름은 타르더(Tarde,談德)이며 시유수린 칸의 정치적 안정(소수림왕정복왕조체제정립)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유목 정복대칸이다. 그의 완전한 묘호는 구룬 낫후니 러리 토크토 부하 바 타이핀 사인 구르칸(Gurun Nathuni Leli Toktobuha ba taifin Sain Gurkhan,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생존시의 칭호는 후투크 쿠문 보그드 칸(Hutuk Kumun Bogd Khan,永樂大王)이었다. 러리 토크토부하 바 칸은 약칭이고, 그가 쓴 후투크 쿠문(Hutuk Kumun,永樂)이란 연호는 제국의 영원한 발전을 약속하는 뜻에서 쓰인 연호이다.

 

여기서 두 자료가 동시에 인정하는 광개토대왕의 광개토(廣開土)란 명칭을 왜 사용했을까 생각하게 한다.

한자사전을 보면 개토(開土)란 토지를 개간하다, 땅을 고르다란 뜻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넓은 땅이 길래 넓다, 광범하다 란 뜻의 광(廣)자를 붙였을까?

이것은 한반도 북쪽 북만주 땅을 고구려가 차지하였다고 하는 반도사의 고구려 최대 영역보다 적어도 10배는 더 넓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당장 역사부도를 꺼내어 고구려 강역을 보고 그기에 10배를 한번 곱해 보라.

어디까지겠는가?

 

본 블로그 일제에 의하여 조작된 도량형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45734 를 보면 일제는 1리(里)를 우리나라 1리(里)의 10배를 적게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역사사실을 10배 공통적으로 축소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 내용이다.

 

몽골인의 무쿠리계보와 삼국사기를 비교해보면 모든 숫자가 10배의 차이를 공히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은 원래 숫자를 삼국사기에 10배로 축소시켰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가 하나라면 실제는 열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니 우리가 알고 있는 반도사는 숫자로 따져 10배 축소된 작아진 역사만을 기록하고 알리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하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유목 정복대칸이라 분명했다.

몽골인들이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라고 하는데 징기스칸 보다 더 광역의 넓이의 영토를 가졌던 것이 바로 광개토대왕(391-412), 이은 장수왕(412-491), 문자왕(491-519) 시대때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그저 지나친 것이라고 무시하고 말 것인가?

몽골인들이 주장하는 역사가 사실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한번 보자.

386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392년 즉위한 직후부터 백제와의 전쟁에 주력하였다.

그 해에 백제를 공격하여 석현성 등 10개성을 함락하였고, 백제 북방의 중요한 요충지였던 관미성을 점령하였다. 또한 거란을 공격하여 500여 명을 노획하고 거란에 노획되었던 고구려인 1만여 명을 되찾아왔다.

 

백제는 빼앗긴 성을 회복하기 위해 계속해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광개토왕은 백제의 공격을 393년에는 관미성, 394년에는 수곡성, 395년에는 패수에서 격퇴하였으며, 394년에 백제를 방비하기 위해 남쪽 변경에 7개성을 쌓았다.

또한 평양을 크게 중시하여 393년에 9개의 절을 평양에 창건하고 399년에는 왕이 직접 평양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395년, 비려(거란일파)를 공격하여 염수 일대의 3개 부락과 600~700개 영을 격파하고 많은 가축을 노획하였다.

 

반면에 몽골인 쓴 무쿠리계보란 자료는

즉위 초부터 다이반(Daiban,帶方) 탈환전을 개시하여 베르체의 북쪽을 진격하여서 세크하르(石峴, 石國=Toshkent?돌마을=Chach City)등 10성을 함락하였다.

 

위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나 무쿠리계보란 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건이 있는데 바로 “그 해에 백제를 공격하여 석현성 등 10개성을 함락하였다..”에서 석현성(石峴城)이다.

고구려 광개토왕이 즉위하자마자 백제의 북쪽을 공격하여 석현성을 공격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석현성(石峴城)은 지금 어딜 말하는 것일까?

(石)돌 석

(峴)고개-현

石國=Toshkent, 돌마을=Chach City

타슈켄트(Toshkent)는 돌 도시라고 하는 의미로 무굴제국 설립자 바부르

(재위1526.4.30-1530.12.26)의 할아버지 유누스 칸의 묘(Yunus Khan Mausoleum)가 있는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의 수도이다

16세기 전까지 Chachkand/Chashkand로 불리다가 투르크(Turkic)언어에 있는 타쉬(Tash)는 돌을 의미하고 켄트(Kand, qand, kad, kath, kud)도시를 의미하는 것이다.

트란스옥시아나지역인 시르다리야(Syr Darya)강과 옥서스Oxus강이라고 하는 아무다리야(Amu Darya)강 사이에 위치한 사마르칸트지역을 옛 중국에서 하중부(河中部)라 하였으니 이 두강 서변(西邊)지역을 하서량(河西良, Hasra,何瑟羅)이라 하여 고구려가 신라와 영토 경계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더 나아가 타슈켄트를 북쪽으로 하는 석현성(石峴城)을 백제가 북쪽영토로 삼았음을 알게 한다.

 

 

삼국사기

396년,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여 아리수 이북의 58개성, 700여개 촌락을 공략하고 위례성을 포위하자 이에 백제 아신왕이 항복하여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명을 인질로 받아 개선하였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한강 이북과 예성강 이동의 땅을 차지하게 된다.

398년, 숙신을 정벌하여 복속시켰다

 

무쿠리계보

396년(러리 토크토부하 바 칸 6년:베르체 아신왕(阿莘王 392-405) 친히 수군 50만을 거느리고 베르체를 정벌하여 58성을 차지하였으며, 칸의 동생인 아시하(Asiha) 옷치킨과 대신 10인을 볼모로 삼아 개선하였다. 이리하여 산동반도근처의 지역과 하느쿵반도의 서쪽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서는 “396년에 광개토왕이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여 아리수 이북의 58개성, 700여개 촌락을 공략하고 위례성을 포위하자 이에 백제 아신왕이 항복하여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명을 인질로 받아 개선하였다”하였으나 비교되는 무쿠리 계보에는 “396년 친히 수군 50만을 거느리고 베르체(백제)를 정벌하여 58성을 차지하였으며, 칸(阿莘王 392-405)의 동생인 아시하(Asiha) 옷치킨과 대신 10인을 볼모로 삼아 개선하였다”하여 백제를 정벌한 고구려 수군 50만 명이라는 엄청난 군세를 삼국사기는 빼버렸다.

무엇 때문에 이런 중요한 군사력을 왜 감추고 싶어 했을까?

삼국사기가 원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무쿠리 계보 역시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사실을 밝히고 있기는 하지만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고구려가 한반도를 벗어나지 못함을 애써 병기하고 있어 이에 대한 또 다른 의구심이 존재하고 몽골인의 입장에서는 고구려가 한반도를 벗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이중적인 잣대를 적용한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할 것이다.

 

그것은 몽고인의 입장에서 무쿠리와 고구려를 다르게 본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무쿠리역사는 몽골인의 역사이고 고구려 역사는 한반도 역사란 등식의 잣대인 것이다.

이것은 일제와 국민당 객가세력들이 만들어 놓은 동양사에서도 서양의 고구려, 백제, 신라와 동양의 고구려, 백제, 신라가 다르고 서양의 아바르, 훈족역사와 동양의 고구려역사가 다르다는 식과 마찬가지 판단이다.

그러나 근원을 따져 들어가면 역사가 하나일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언어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다고 두개 세개 갈라 조작해 놓은 것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사고 세계사이며 동양사인 것이다. 

 

또 삼국사기에는

400년, 백제, 왜의 연합군이 신라에 침입하자 고구려와 동맹관계에 있던 신라 내물왕은 평양으로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광개토왕은 5만의 원군을 보내어 왜군을 물리치고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 같은 해,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후연이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시키고 700여리의 땅을 탈취하였다.

 

무쿠리계보에는

400년에는 쉬르아 나이무르 왕의 요청으로 50만의 원군을 보내어 일번(일본)에서 건너온 남부베르체(남부백제)군를 격퇴시켰으며, 둥야이(Dungyai,東濊:현재의 나나이인)를 통합하고(410), 쉬르아와는 하스라(Hasra,何瑟羅:현재의 하느쿵 반도의 강원도지역)를 경계로 삼았다.

 

한마디로 대단한 것이다.

고구려는 한번 군사를 모았다 하면 50만명의 대군이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와 동맹관계에 있었던 신라에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침입하자 내물왕이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여 광개토왕은 5만명의 원군을 보내어 왜군을 물리치고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고 하였으나 무쿠리계보에서는 고구려가 신라에 파병한 원군이 5만이 아니라 50만 명이라는 대규모 군사였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혀졌으며 고구려가 동예(Dungyai,東濊)를 통합하고 트란스옥시아나지역인 시르다리야(Syr Darya)강과 옥서스Oxus강이라고 하는 아무다리야(Amu Darya)강 서변(西邊)지역을 하서량(河西良, Hasra, 何瑟羅)이라하여 고구려가 신라와 경계를 삼았다는 사실까지 알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고구려가 통합했다고 하는 동예(Dungyai,東濊)가 현재 나나이(Nanai)인들이 살고있는 곳이라고 하였지만 이것도 삼한(三韓)이 극동으로 의도적으로 근세기에 현격하게 지명 이동되면서 이 동예 역시 그에 따른 것이라고 보았을 때 위치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때문에 현재 나나이족(Nanai)들이 살고 있는 만주나 러시아의 오호츠크 해(Sea of Okhotsk)와 아무르 강가 (Amur River, 黑龍江), 하바롭스크(Khabarovsk)와 콤소몰스크나아무레(Komsomolsk-on-Amur)에 일부가 살고 있다는 사실은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

동예(Dungyai,東濊)나나이(Nanai)를 혁철족(赫哲族)이라고 하는데 검은 도끼란 뜻의 흑근(黑斤)、카라 흑진(黑真)、동방인이라고 하는 혁진(赫真, 意为:东方的人)、강가에 산다는 기릉(奇楞, 意为:住在江边的人),청나라 기반이 된 건주여진(建洲女眞)5부족의 하나로 올적합(兀狄哈)、만주(滿洲族)족이라고 하는 혁철(赫哲)、골드(Gold)라고 하는 과이덕(戈爾德)으로도 불리었다.

이렇게 볼 때 카라(kara)라고 하는 의미의 흑(黑)과 만주(滿洲), 여진(女眞), 동방(東方)이 가져야 할 상징적인 지역은 지금의 극동 흑룡강(Amur River, 黑龍江)이 아니라 흑해(黑海)와 카스피해(Caspian Sea), 시르다리야(Syr Darya), 아무다리야(Amu Darya) 또는 카라해(kara sea)를 기준으로 보고 해석해야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과이덕(戈爾德)으로 본 골드(Gold), 세계10위 금 생산국이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사실도 이를 증명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지금의 극동지역이 아닌 아시아 서쪽 유라시아지역이 본거지라 할 수 있어지고 더 나아갈 때 서유럽도 활동범위 내에 있었던 것이 분명해진다.

 

삼국사기에는

402년, 광개토왕은 숙군성을 공격하였고 404년에도 후연을 공격하여 보복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요동성을 비롯한 요동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이를 회복하기 위해 쳐들어온 후연군을 405년 요동성, 406년 목저성에서 격파하여 요동장악을 확고히 하였다. 또한 후연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연과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407년, 백제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6개성을 점령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무쿠리계보에

또 연(燕)나라의 무트바흐츠 키(慕容熙)를 공격하여 이체헤첸(Iche Hechen,新城)·난솜(Nansom,南蘇)의 2성등 7,000 여리의 땅을 회복하였고, 405∼406년 후연(後燕)의 무트바흐츠 키에게 2번 동안 항복권고를 하였으나 뤄둥성(遼東城)과 무치성(Muchi,木底城)을 주는 정도로 거부하였다.

407년 무트바흐츠 키에 반발하여 그의 신하로서 그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자립한 코리챠 운크(Koricha Unkh,高雲)과는 수교를 맺고 현재의 탕구트지역인 서부로 밀려난 무트바흐츠 시버군을 물리쳤다.

 

또 광개토왕은 삼국사기에 언급한 400년 후연(後燕: 384-407)의 공격(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후연이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시키고 700여리의 땅을 탈취하였다)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402년, 광개토왕은 숙군성을 공격하였고 404년에도 후연을 공격하여 보복전을 펼쳤다고 하였지만 무쿠리계보에서는 더욱 명료하게 고구려가 후연을 공격하여 끝내 망하게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호십육국(五胡十六国)의 하나인 후연(後燕:384-407)의 소문제(昭文帝)라고 하는 무트바흐츠 키(慕容熙, 385-407,재위:401-407)를 고구려가 사정없이 공격하여 이체헤첸(Iche Hechen, 新城)·난솜(Nansom, 南蘇)의 2성등 7,000여리의 땅을 회복하였고, 후연 모용희(慕容熙)에게 2번씩이나 항복을 권하였지만 끝내 거부하여 요절하게 만든 것으로 나온다.

물론 고구려 왕족출신의 고운(高雲)이 407년 왕위를 찬탈하고 북연(北燕:407-436)을 세우면서 멸망하였다.

여기서 또 논 할 것은 바로 삼국사기는 700리 회복이라고 하였지만 고구려는 7,000리 땅을 회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700里(275km)와 7,000里(2,756km)는 어마어마한 차이이다.

지금의 요녕성을 구글로 동서길이를 재어보니 556km이다.

 

 

 

7,000里(2,756km)라면 지금의 요녕성(遼寧省)뿐만아니라 신강성(新疆省)까지 뻗어지는 길이다.

고구려가 삼국사기에서도 요동(遼東)을 모두차지하고 요서(遼西) 또한 일부를 확보했다고 하였으니 위의 수치를 가지고 실제로 어디까지 영토를 가졌는지 상상해 볼일이다.

실제 7,000리는 지금 요동성이라고 하는 요녕성 길이를 넘어서는 것은 물론이고 신강성까지 뻗친다는 사실은 반도사가 얼마나 축소한 역사인가를 알게 하고 지금 중공역사와 딱 맞추어 사실인 것처럼 술수를 부린 것이란 사실을 명백하게 알게 하는 것이다.

 

반도사는 실제보다 이처럼 축소한 역사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다시 한어(漢語)자료에 나오는 위 그림을 보라.

 

정령(丁零), 철륵(鐵勒)이라 하며 중앙아시아에 살았던 민족으로서 고대 시베리아 계통의 민족의 나라인 고차(高車)가 있고 바로아래 선비족(鮮卑) 탁발부(拓跋部)에 의해 화북(華北)에 건국되었다는 북위(北魏: 386-534)가 있으며 그 남쪽에 후연이 있다.

고차도 고구려가 되어야 하고 북위 역시 고구려라고 판단 할 수 있다.

그러니 후연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아래는 실제 광개토왕이 왜 광개토(廣開土)란 호칭을 받았는지 그래서 어디까지 고구려 영토가 성립되었는지 밝혀주는 것이기에 우리는 상세히 들여다 볼 필요성이 있다.

삼국사기는 뭉뚱그려 한반도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주요한 지칭은 다 빼버리고 주요한 지명을 이상하게 이동시켜 은폐하였지만 무쿠리계보란 자료는 삼국사기의 이러한 기록이 은폐한 것이란 사실을 밝혀주며 주요한 지명들을 현재 지명과 일치시켜 밝혀 놓았으니 얼마나 다행하고 귀중한 것인지 그 가치를 따질 수가 없다.

비록 무쿠리계보란 자료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모르는 것들을 밝혀주었다는데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이 자료가 지적하는 지명들을 알고 보니 고구려 광개토왕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영역을 확보한 명실공히 정복왕조의 대왕이었음을 폐부(肺腑)속까지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408년, 후연이 멸망하고 고구려계인 고운이 북연을 건국하자 우호관계를 맺어 서쪽 국경을 안정시켰다.

409년, 나라 동쪽에 독산성 등 6개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를 옮겨 살게 하였다.

410년, 동부여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동부여가 고구려의 판도 안에 들게 되었다.

위의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을 다시 요약하자면, 서쪽으로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을 모두 차지하고 요서의 일부 또한 확보하였으며, 북연과 친선관계를 수립하였고 북쪽으로는 부여와 숙신, 비려를 복속시켰으며, 남쪽으로는 백제를 쳐서 한강 이북을 빼앗아 위축시키고, 왜와 가야의 침공을 계기로 신라를 보호국화하는 한편 바다를 건너 침공해 온 왜를 섬멸하였다. 또한 가야를 공격하여 전기 가야연맹을 해체시키기에 이르렀으며 동으로는 읍루를 정벌하였고, 동예를 완전히 병합하는 등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다.

광개토왕은 역대 왕릉의 정비에 힘써 수묘인 제도를 정비하고 실시할 것을 장수왕에게 유언하였다. 이러한 내치로 광개토왕릉비에는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 칭송하는 기록이 남겨졌다.

 

반면에 몽골인 쓴 무쿠리계보란 자료는

410년에는 북부시베리아의 부리야트(東夫餘)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오브강 연안의 동부리야트가 무쿠리의 판도안에 들게 되었다. 또한 남하하여 시라무렌선(황하)까지 진출하였으며, 서쪽으로 로란(Roran)을 격파하고 서부시베리아를 확보하고 킵챠크/쿠만과 국경을 맞대고 그들을 속국으로 만듦으로써 명실공히 유라시아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그의 릉은 소재 미상이며 일번(일본)측이 주장하는 챠이슈트 칸이 414년에 세웠다는 러리 토크토부하 바 칸비(中國 吉林省集安縣 通溝소재)에는 그의 니칸정벌과 하느쿵반도로 범위가 축소된 수준의 기록만이 존재한다.

 

이제 광개토대왕의 실제 확보한 영토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를 느껴보는 시간이 되었다.

그런 마당에 일제총독부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판단되는 삼국사기는 더 이상 도움이 될 수가 없다.

완벽하지 않다 하더라도 몽골인이 쓴 무쿠리계보란 자료를 바탕으로 현재 지명과 연결하여보도록 하자.

 

(1) 410년에는 북부시베리아의 부리야트(東夫餘)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오브강 연안의 동부리야트가 무쿠리의 판도안에 들게 되었다.

 

북부시베리아의 동부리야트(East Buryats, 東夫餘)는 어딜 말하는 것일까?

우리역사의 비밀이란 사이트에 이러한 글이 있다.

 

 

 

바이칼 호수의 반 이상을 둘러싸고 있는 동쪽의 부랴트 자치 공화국(Republic of Buryatia)은 물론이고 서쪽 이르쿠츠크주(Irkutsk Oblast)에 있는 부랴트 자치구등에는 이곳의 원주민인 부랴트족(Buryats)이 살고 있습니다. 이주민인 슬라브계에 밀려 인구비중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아직도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그들 고유의 전통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부랴트족들은 생김새가 우리와 아주 흡사합니다. 물론 우리와 같이 어린이 엉덩이에 푸른 반점이 있습니다. 부랴트족의 일파인 코리족은 먼 옛날 동쪽으로 이동하여 만주 부여족의 조상이 되었고 이들이 훗날 고구려의 원주민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금시초문인 이 얘기는 바이칼 지역에 내려오는 수많은 얘기 중의 하나입니다. 심지어는 고구려 동명왕을 코리족 출신의 고구려한(khan)이라고 부릅니다. 우는 아이도 그치게 했다는 징기스칸을 이곳에서는 칭기스한(khan)이라고 부릅니다.

 

타타르어로 풍요로운 호수라고 하는 바이칼 호수(Lake Baikal)에서 수심이 가장 깊은 알혼섬(alhon) 이즈메이곶 앞바다에는 처녀를 제물로 바쳤다는 인당수의 전설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심청이가 제물이 되었던 인당수가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바이칼에는 나뭇꾼과 선녀의 얘기도 있습니다. 우랄알타이 뿐만아니라 중앙아시아 여러 곳에 전해오는 이 이야기의 기원도 바이칼입니다. 손님에게는 곰방대로 담배를 권하고, 씨름으로써 중대사의 결정을 짓습니다. 또한 신의 아들이 지상의 혼란을 정리하고 귀천한다는 천신주재사상도 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산과 계곡에는 고유한 영(靈)이 있다고 믿고 있으며 술이나 음식을 먹기 전에 우리의 고시래와 같이 음식물의 일부를 뿌려줍니다. 그들은 어른을 공경하지 않는 일을 살인과 같은 일로 취급합니다. 남의 집에 손님으로 갔을 때 문지방을 밟아서는 안되며 손님에게는 반드시 오른손이나 두손으로 접대하여야 합니다. 주인이 차려준 음식을 맛보지 않는 것도 큰 결례가 됩니다. 심지어 우리나라에 취업한 노동자 중에 한국말을 가장 빨리 배우는 사람들이 부랴트족과 몽골로이드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예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우리와 매우 가까움을 증명하는 것들입니다

 

부여는 횃불처럼 밝다고 해서 "불이"였는데 불->불이->부리(부여)->부리야그-->부리야트로 변한 것이라고도 한다. 또 부여의 해모수를 프로메테우수(Prometheus) 즉 그리스 종교에서 티탄족 출신의 최고 책략가이며 불의 신이라고 알려져 있다는 사실도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는 조로아스트교(Zoroastrianism)인데 배화교(拜火教)라 하여 불을 신봉하는 종교이다.

페르시아가 국교로 하였고 이은 사산왕조가 국교로 하였다.

그렇다면 부여(夫餘, 부리아트, Buryats)역시 조로아스트교를 신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은 고구려와 연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부여로 부터 시작된 불의 신앙은 고구려를 거쳐 신라와 백제로 이어지고 페르시아 이어 사산왕조까지 연결되고 대중적으로 사라진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사산왕조가 신라와 연결되고 사만왕조, 셀주크와 룸셀주크 오스만까지 고려와 연결되며 이제 곧 알게 되겠지만 켈트족, 골족, 갈리아족, 아발스족, 파노니아까지 고구려와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게 인식해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이 조로아스트교의 상징인 조류(독수리)인간 형상은 비잔티 제국의 독수리 문양과 다르지 않고 대한제국의 독수리 문양과 다르지 않음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1)오브강 연안의 동부리야트가 무쿠리의 판도안에 들게 되었다.

 

 

 

오비(Ob river)강이 어딘가?

오비강(ob.river)은 서시베리아 저지를 흐르는 강이지만 지류의 이르티시강(Irtysh River4,248km)은 알타이산맥(Altai Mountains)에서 발원을 한 다음, 카자흐스탄(Kazakhstan) 영내를 지난다. 중류에서는 튜멘 유전을 횡단하고, 남북으로 800km 정도 있는 오비만을 지나 북극 카라해(Kara Sea)로 향한다. 강하구의 위치는 북극권에 해당한다. 전체 길이는 세계 5위, 유역 면적에서는 예니세이강(Yenisei River 5,539km) 다음으로 세계 7위이다. 지류로는 바흐 강(Vakh River), 케티 강(Ket River)이 있다.

 

북극 카라해(Kara Sea)와 지중해와 연결되는 흑해(Kara (Black) Sea)는 근세기 역사에서 혼란이란 상징성 그 자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kara와 삼한역사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이다.

 

(2) 또한 남하하여 시라무렌선(Siramuren, 황하)까지 진출하였으며,

 

 

여기서 몽골인은 시라무렌을 황하라 부첨 하였다.

현재 중국의 신강위구르(新疆維吾爾)자치구를 가르는 경계선에 해발 4000 여m대의 준봉들이 이어진 알타이산맥(Altai Mountains) 적봉(赤峰)지역을 관류하는 가장 큰 강을 요하(요하)의 지류인 시라무렌강(西拉木倫河)이 있는데 몽골어로 ‘누런 강'이라고 하였다.

황하와 구별하기 위해 이전에는 황수(潢水)라고 쓰여졌다고 한다.

황수(潢水)가 아닌 황하(黃河)가 되어야 하고 고구려 때 시라무렌강은 지금의 황하(黃河)라고 해야 맞다.

그러나 시라무렌(Siramuren)은 서요하(西遼河), 시라무렌하(西喇木倫河)라고 하고 5세기 중엽부터 내몽골의 시라무렌강 유역에 나타나 거주하던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족이 거란(契丹) 또는 키탄(Khitan)이라 하였다.

누런 강, 시라무렌하(西喇木倫河)는 서요하(西遼河)라고도 하였으니 지금 황하(黃河) 보다 더 서쪽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3) 서쪽으로 로란(Roran)을 격파하고 서부시베리아를 확보하고

 

 

로란(Roran, Rouran)

 

유연(柔然, Rouran Khaganate 330–555)은 서기 5~6세기에 중국 북방에 존재했던 유목 국가로 유연의 시조는 목골려(木骨閭)로 불려 그 왕족은 욱구려씨(郁久閭氏)라고 불렀다. 3세기경에는 선비에게 종속되었지만, 선비가 중국으로 이주한 후의 몽골고원에서 세력을 확대해, 5세기초 구두벌가한 욱구려사륜(丘豆伐可汗 郁久閭社崙:재위402-410)의 시대에 고차(高車)를 복속시켜 타림분지 일대를 지배하면서, 북위(北魏: 386~534)와 대립했다.

 

북위(北魏: 386~534)와의 대립이 깊어진 유연은 남송, 하나라, 북량, 북연, 고구려, 토욕혼와 묶어 북위 포위망을 형성했다. 하나라, 북량, 북연은 곧 북위에 의해 멸망당하지만, 유연은 세력을 계속 유지해 토욕혼과 송과 연계를 취하였다.

 

이것을 불쾌하게 여긴 북위(北魏: 386~534)의 태무황제(太武皇帝, 拓跋燾423-452)는 429년, 449년 두 차례에 걸쳐 친정을 하여, 유연의 본거지를 함락시켰으며, 가한(可汗)은 도주 중에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연은 강세를 계속 유지해, 북위도 남조와의 관계 때문에 북쪽에만 관심을 가질 수는 없었다.

 

유연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약화된 것은 485년, 486년에 지배하에 있던, 고대 시베리아 계통의 민족 정령(丁零330년392년) 또는 고거/고차(高車487-541), 철륵(鐵勒)이 독립한 이후이다. 고차(高車)의 반란은 수습하였지만, 돌궐이 강성해져서 552년 돌궐(튀르크, 突厥,Turks 552-744)의 이리가한(伊利可汗)과의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아나괴(阿那壞)가 전사하고 만다. 유연의 잔당은 북위에 원조를 요청하였지만, 돌궐의 요청에 의해 살해당하고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일부 학자들은 유연이 이후 유럽에 출현한 유라시안 아바르족(Eurasian Avars, 현대의 코카서스 아바르족Caucasian Avars의 선조)과 연관이 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위키]

 

돌궐과 유연은 같은가?

 

아발스(Avars)는 서양을 정복한 고구려이다.

 

아발스족은 A.D. 461-465 에 사빌족(the Sabirs)을 서쪽으로 몰아낸 5세기의 위대한정복자들이다. 중국인이 유연(柔然)이라고 부르는 민족이다.

A.D. 551년에 돌궐족에게 쫒겨났다.

 

아바르족 [族]

 

요약6~9세기에 동유럽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종족.

 

아드리아 해와 발트 해 사이, 엘베 강과 드네프르 강 사이 지역에 왕국을 건설(6~8세기)했으나, 그 기원과 언어는 명확하지 않다. 558년 카프카스 지역에 살면서 게르만 부족 전쟁에 개입했으며, 롬바르드족과 동맹하여 게피다이(비잔티움의 동맹국)를 정복한 뒤 도나우 강과 티소 강 사이의 헝가리 평원에 제국(550~575)을 세웠다. 이 지역이 제국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6세기말에는 카간 바얀의 지도하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아바르족은 비잔티움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하여 626년경에는 거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고 메로빙거 왕조에도 대항했다. 이들은 또한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남쪽으로 이주하게 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7세기 후반 내부불화로 인해 아바르 제국에 반대하는 약 9,000명의 아바르족이 추방되었다. 아바르 제국은 발칸 반도의 불가리아인 국가의 생성(680)에서 비롯된 내부의 저항에 의해 점차 약화되어 샤를마뉴에게 정복되었다.

이들은 고대의 중앙아시아의 거주하던 유목민인 아바르인의 후예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의 5대 10국 중 하나인 유연의 후손이다.

 

7세기 초의 비잔틴 역사학자 테오피락트(Theophylactus Simmocatta)에 의하면 그들 중 일부는 탁발씨(拓跋-Tabgach)에게로 도망하고 다른 일부는 무크리(Mouxri=Mucri)에게로 도망갔다.

 

A. D. 557 년에 처음 비잔틴 제국과 접촉한 아발스족은 실은 '위굴'종족들로 이들은 유명하기 전에 침략했던 종족의 이름만 빌려 썼을 뿐이다. 북부 다게스탄(Daghestan)에 왕조를 건설한 아발스는 이들 '거짓 아발족'이다."

 

이 글은 러시아의 미놀스키(Minorsky)가 고대 페르시아의 지리서 [Hudad al-Alam]의 사릴(Sarir)편에서 주석한 내용의 일부다. 그러나 '거짓 아발족'이란 것도 결국 같은 아발족이란 것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이다.

 

북부 다게스탄은 코카서스(Caucasus)산맥 일대를 말한다.

사릴(Sarir)이란 국명은 아랍어로 "황금 보좌의 군주'란 말의 생략형이다.

이슬람교가 성립한 후의 수많은 아랍기록들이 모두 언급하는 왕조다.

 

고대 아르메니아어의 역사 책에는 보다 구체적인 이 왕조의 기록이 나온다.

(Thomas Ardzrouni <10세기>.[Histoire des Ardzrouni]. in M.-F. Brosset(번역). [Collection d'Historiens Armeniens]. 2 tomes in 1., St.-Peterbourg, 1874-1876.)

 

무크리는 최근 영어로 번역한 [테오피락트의 역사]에서 Withby가 "반도 고려"라고 확인하고 있다. 즉 당(唐)의 예언(禮言)이 편찬한 [범어잡명(梵語雜名)]이란 책에서 "고(구)려를 무쿠리(畝俱理)"라 한다는 고대 산스크리트어가 말하는 '무쿠리(Mukuri)'인 것이다.

펠로트(Pelliot)는 이것을 인용하면서 고대 티베트어에서는 국명을 '무그리그(Mug-lig)'라 한다.

그런데 파커(E.H. Parker)는 '유연'국을 '무쿠리'라 하였다.

유연의 시조인 '목골려(木骨閭)'는 그 발음이 '무쿠리'란 것이다.

깁본(E. Gibbon)은 '모코(Moko)'라고 읽었지만 이것은 틀린 것이다.

이 무쿠리란 국명이 몽골이 흥기할 때에는 음이 변하여 '메르키트(Merkit)'로 변했다고 하였다.

[몽고원류]의 독일어 번역판에서는 솔론고스 메르키드'Ssolongos Merkid'라고 적고 있다.

소롱가(Solonga, Solongud, Solongid)는 몽골어로 고려를 지칭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문본의 [몽고원류]가 "고려묵이격특(高麗墨爾格特)"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메르키트'는 고려의 일부임을 알 수 있고, 유연국시대에는 '무쿠리'국임을 알 수 있다.

쿠빌라이칸 시대의 페르시아 역사학자 라시드(Rashid al-Din)의 방대한 역사 백과사전인 [사집(史集)]에는 [부족지]란 책이 포함되어 있다.

그 책에는 '메르키트 종족'에 관한 항목이 있는데 모두 네개의 지족(支族)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째가 '아우할(Auhar)'이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판에서 '우하즈'라고 하는 것이다.(김호동 역주)

 

'아우할'Auhar은 미놀스키가 역시 러시아 학자인 베레진(Berezine)이 라시드의 [사집] 전체를 석문하고 러시아어로 번약한 것을 근거로 한 것이다. [사집]에 관한 한 베레진의 판본이 가장 권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어판은 다른 필사본을 활용한 것 같다.

아랍어에서 "r"과 "z"의 차이점은 점이 하나 있느냐 없느냐이다.

또 단어 시작의 "아(A)"는 "ㅣ"로 시작하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미놀스키는 베레진 판본의 '아우할'이 고대 아르메니아어의 Aurhazk'에서 'k'는 복수어미이고 -rh-는 -hr-로 변형된 것이다. 또 'Auhraz'의 '-z'는 이란어의 어미사이다. 따라서 그의 고증에 의하면 고대 아르메니아어의 'Auhra-z'는 'Auhar-z'와 동일한 것이면 이것이 후에 페르시아어에서 'Auhar'이 'Avar'로 변한 것이다.

"v"는 "b"로도 표기되며, 러시아의 최초 역사서인 [The First Chronicle]에서는 'Obry'로 표기되기도 한다. 미놀스키의 고증은 주로 '사릴(Sarir)'왕국과 관련해서 이다. 그 전에 서양으로 침입했던 아발족은 게르만족 이동에서 최후로 서로 이동하여 지금의 북부 이태리를 장악한 롬바르드족(Lombards)과 한 때 동맹을 맺어 게피드족(Gepides)을 물리치기도 한다.

                                                          (Gepides)539-551

 

                                   Lombards in the Carpathian Basin around 526

 

그러고는 후에 지금의 헝가리가 있는, 당시는 로마의 속주였던 파노니아(Panonia)에서, A.D.567년에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니 '아발제국(Avarian Haganat)'으로 알려진 제국이다.

유럽을 통일한 샤를르마뉴 대제(大帝)는 이 파노니아의 아발제국의 정복을 마지막으로 하여 로마교황으로 부터 황제의 지위에 오르는 대관식을 A.D. 875년에 거행하게 되었다 하니 그 아발제국의 위상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아발스족은 유럽으로, 특히 동유럽에 퍼져 몇년전의 DNA조사에서는 체코인구의 상당수가 아발족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것이 확인된 바도 있다.

다게스탄의 아발족은 러시아의 카테리나(Catherine II1729-1796,재위1761-1762) 여제(女帝)가 흑해를 장악하고저 남진 정책을 펴고 있을 때도 코카서스산맥을 중심으로 폭넓게 퍼져 귀족들의 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 카테리나 여제 또한 귀족들의 추앙으로 집권한 것이라면 아발스족 무쿠리의 후신으로 정체성을 가졌을 것이란 짐작을 할 수 있다.

카테리나 여제가 바로 그리스 비잔틴을 승계하고자 한 최초의 여제이다.

(Lesley Blanch의 실화 역사소설 [The Sabres of Paradise]에 잘 묘사되어 있다.)

 

깁본(Gibbon)의 [로마제국 쇠망사]에 의하면 무쿠리국은 사륜(社崙)이 A.D. 384년 즉 광개토대왕 영락 4년에 서역원정을 떠나 흑해부근까지 영토를 확장한 적이 있다. 이 원정에서 돌아오자 그는 A.D. 403년에 두대카칸(豆大可汗)이란 호칭을 받게 된다.

[위서]에 의하면 "카칸"은 중국의 "황제"와 같은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영락 5년인 서기 395에 첫 원정의 길에 나선다.

소위 '비려(碑麗)'로 출정한 것이다. 첫 출정이면서도 "또 다시(又)"라고 되어 있다.

광개토대왕비는 훈적을 기록한 비다. 그 외의 업무나 행사 주재등은 기록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또 다시(又)"란 표현은 그 전에 한번 간 곳을 다시 갔다는 뜻이므로, 비려는 무쿠리국의 일부로 추정되며, 그 전년에 "사륜"을 서역으로 원정을 보낼 때 한번 왔던 곳으로 해석된다.

 

비려 역시 할슈타트일 수 있다.

염수(鹽水)가 할슈타트(Hallstatt) 호수? http://blog.daum.net/han0114/17050403 

 

재야학자들 사이에서 고구려가 망한 곳은 지금의 몽골의 북에 있는 항애산(杭愛山)이라 한다.

그래서 남에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강이 세렝가(Selenga)강을 살수라고 하고 있.

그러나 이것도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실제 고구려가 망하는 시점에 대하여 서돌궐 역사같이 합쳐 보아야 하며 앞서 유럽을 통일한 샤를르마뉴 대제(Charlemagne 재위 742-814 AD)는 이 파노니아의 아발제국의 정복을 마지막으로 하여 로마교황으로 부터 황제의 지위에 오르는 대관식을 A.D. 875년에 거행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때문에 살수란 강도 세렝가강이 아닐 수 있고 어쩌면 아발제국의 마지막 영역이었던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강, 유럽에서 두번째 긴강 도나우 강(Donau) 다뉴브 강(Danube)일 수도 있다고 감히 추측한다.

 

그리고 을지문덕은 무쿠리구의 카칸이면서 고구려의 일품(一品)인 "토졸"이라 하였다.

연개소문은 이품(二品)인 "막리지"였다. "막리지"는 고구려 발음으로 "마하하라지" 즉 "마하라지(Maha Raj)"였다. 산스크리트어로 "대왕"이란 뜻이다.([한원]참조)

 

고구려의 통치형태는 현지에 직접 고구려인이 나가서 정부를 세우고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조공만 충실히 바치면 그뿐이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영토는 한반도에서 서양까지 뻗어 있는 방대한 것이었다 것을 정책적인 면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 벽화고분의 하나인 "각저총"에 씨름을 하고 있는 사람이 중동인인 것만 봐도 서역에서 씨름군을 데려와 씨름을 시키고는 고구려인들이 이것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위서]제본기에는 서기 435년을 필두로 436~439, 462~474등의 해로 이어지면서 북위 말년까지 즉 548년 까지 고구려는 항상 수 많은 서역국의 사신을 인솔하고 나타나고 있다, 어떤 해는 한 해에 두 번이나 서역사신을 데려 오기도 한다 하였다. 

 

결과적으로 유연, 고차, 정령, 북위, 후연, 북량, 북연 토욕혼 등은 전부 고구려가 점령했거나 속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북위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

 

고구려의 전성시대인 광개토호태왕과 장수왕 때 당시 중원 국가는 북쪽의 북위, 남쪽의 남조입니다. 그런데 당시 남북조 중 강력했던 중원 국가 북위는 고구려보다 국력이 약한 국가였습니다.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에 국서를 보낼 때 같이 고구려를 차자고 했으나 북위는 그것을 거절하고 오히려 백제의 국서를 고구려에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는 북위가 적어도 고구려보다 국력이 약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당시 국제정세가 북위에게 불리(북위는 동쪽으로는 고구려, 남쪽은 남조, 북쪽은 유연, 서쪽은 토욕혼에 의해 포위된 상황)했기 때문에 백제의 국서를 고구려에 보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국제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국서를 고구려에 바쳤을까요?

이는 고구려가 북위보다 국력이 강했다는 것과 더불어 북위가 고구려의 속국이었음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고구려의 정복 군주인 광개토호태왕은 일전에 북위를 정벌했습니다.

먼저 고구려의 북위정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지요

지나의 역사책이자 북위의 역사를 기록한 『위서』「태조기」를 보면 영락(광개토대제 연호) 8년인 서기 398년 북위의 한 때 수도였던 업(하북성 남부지방, 지금의 태원 일대)에 고구려인 46만과 기술자 10만이 가득차서 수도를 업에서 평성으로 옮긴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기록을 북위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포로로 잡아갔다고 해석을 하는데 한마디로 어불성설입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북위가 56만에 이르는 고구려 포로를 잡았다는 것은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고구려가 북위를 정벌했다는 증거는 위서에서 "북위가 업에 고구려인이 가득차자 수도를 평성으로 옮긴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수도라는 것은 그 나라의 중심지라 마음대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북위가 수도를 업에 둔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를 평성으로 옮겼다는 것은 고구려가 북위의 수도였던 업을 공략해 그 곳을 차지했고 고구려에 밀린 북위가 업을 버리고 평성으로 도망갔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광개토호태왕는 하북성 이남지역인 넓은 지역을 영구히 고구려의 영역으로 확보하기 위해 고구려인 56만(기술자 10만 포함)을 이 곳으로 이주했다는 것을 위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북위의 북연침공

서기 436년 북위와 고구려의 완충지대에 놓인 북연이 북위의 침입을 받아 멸망 지경에 이르자 북연이 자신들의 상국인 고구려(북연을 건국한 고운이 고구려인이었다는 점과 고구려 광개토호태왕가 그를 북연의 왕으로 인정한 점을 볼 때 북연이 고구려의 신국(臣國)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북연의 요청을 받은 장수왕은 갈로와 맹광을 보내 북연을 접수하게 했습니다. 이 때 고구려는 북연왕과 북연의 종묘사직을 고구려로 옮기는데 북위가 그것을 개입하지 않앗다고 합니다.

북위가 고구려의 북연 접수과정을 가만히 지켜보았다는 것은 북위가 고구려의 상대가 되지 않는 것과 북위 또한 고구려의 한낱 신후(臣侯)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2.북위에게, 북위 역사서 바치라고 요구

고구려 장수왕 23년인 서기 435년 장수왕는 북위에 사신을 보내 북위 역대 왕의 계보를 바치라고 요구를 하였습니다. 이 때 북위 조정은 논란이 많았지만 결국 고구려의 요구대로 자신들의 역대 왕의 계보와 이름 적은 것을 사신을 통해 고구려에 바쳤습니다.

역대 왕의 계보와 이름을 적은 것은 그 나라의 역사인데 고구려에서 이것을 바치라고 한 것은 북위의 역사를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역사를 바치는 것은 신하의 나라가 천자(임금)의 나라에게만 하는 행위였습니다.

즉 고구려에서 북위의 역사를 바치라고 한 것은 고구려가 북위의 상국이었음을 알 수있고 북위가 고구려의 속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장수황제와 문자명왕의 죽음

서기 491년 한민족의 대영웅인 장수왕이 붕어하자 당시 북위의 왕 고조(471~499)가 소위모라는 흰색 모자와 포심의라는 상복을 입고 동쪽 교외에 나가 애도를 표하는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21대 황제 문자명왕이 붕어하자 북위에서는 전왕 세종의 부인이며 숙종의 어머니인 영태후가 슬퍼하며 동쪽 사당에 애도를 표시했고 조문사절을 고구려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508년 당시 북위의 왕 세종이 고구려의 시조를 제사지내는 고려묘(高麗廟)라는 사당을 세운 바 있습니다.

신라 무열왕이 죽었을 때 당 고종이 애도식을 거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당을 세우고 임금이 직접 애도하지는 않았습니다. 지나의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 왕이 죽었을 때 상복을 입고 왕이 친히 애도식을 주관하며 그 나라 시조를 제사를 지어준 예는 없습니다.(이는 고구려에서도 마찬가지)

그런데 북위가 이런 행위를 했다는 것은 북위가 고구려보다 힘이 약한 국가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4) 킵챠크/쿠만국경을 맞대고 그들을 속국으로 만듦으로써 명실공히 유라시아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킵챠크쿠만(Kipchak Kuman)-쿠만인들은 동유럽평원을 활보했던 민족이었다.

코만(Coman), 쿤(Kun)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킵차크 초원으로 불리는 현재의 카자흐스탄으로부터 동유럽까지의 평원 지대에 퍼져 유목 생활을 했다. 킵차크의 서진으로, 흑해, 북해연안으로부터 베사라비아(Bessarabia, 현 Moldova)의 방면으로 유목하고 있던 투르크계 유목민들의 일로였다. 이 사람들은, 러시아사에서는 폴로프치로 부른다.[위키]

 

(1)오브강 연안의 동부리야트가 무쿠리의 판도안에 들게 되었다.

(2)남하하여 시라무렌선(Siramuren, 황하)까지 진출하였으며,

(3)서쪽으로 로란(Roran)을 격파하고 서부시베리아를 확보하고 

(4)킵챠크/쿠만과 국경을 맞대고 그들을 속국으로 만듦으로써 명실공히 유라시아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394년(AD) 전진이 멸망.

395년(AD) 테오도시우스 죽고, 제국의 동부를 그의 큰아들 아르카디우스(~408)가, 서부를 작은아들 호노리우스(~423)가 계승하여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

402년(AD) 신라, 내물마립간 죽고(?~),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 즉위(~417).

405년(AD) 백제, 아신왕 죽고(?~), 전지왕 즉위(~420). 407년 가야, 이시품왕 죽고(?~), 좌지왕(坐知王) 즉위(~421).

 

광개토대왕이 유럽원정길을 떠나 또 다시 비려(碑麗)를 공격하던 시기가 AD395년이라면 이 시기에 유럽의 상황이 어땠는가 세계사 연대표로 살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광개토대왕은 전에도 유럽을 공격하였고 다시 공격한 것이니 이 비려가 염수(鹽水)할슈타트(Hallstatt)에 있는 것이라면 거의 확신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역시나 위 연대표를 보면 395년 로마 테오도시우스가 죽고 제국을 동부, 서부를 나누어 자기 아들에 주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그만큼 위기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누구로 부터 위기를 맞이 했겠는가?

바로 대고구려 광개토대왕임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위 전진이라고 하여 마치 대륙에 전진이라는 나라가 있는 것처럼 꾸며놓았지만 전진은 바로 전기 로마를 지칭한 것이며 그것을 대륙역사를 창조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후진은 후기 로마라고 보면 맞다.

또 연대표 뒤에 신라와 백제 역시 로마와 같이 기존 왕이 죽고 상황이 상당히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시기임을 알 수 있는데 같은 시기이니 만큼 문제는 얽혀 있음이고 로마가 골족이나 갈리아 또는 거란이라고 판단되는 게르만에 의하여 공격을 받고 깨지고 있는 상황임에도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명맥을 유지했다고 강변하는 것은 세계사의 모순 중에 모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와함께 연결할 수 있는 것은 신라와 백제역사가 동서로마로 재탄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되는 면도 없지 않는 것이다.

어쨌던 광개토대왕이 유럽을 몇번이나 원정하여 로마가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예상 할 수 있는 상황이 틀림이 없다.

 

마무리하며

위 본 블로그가 그린 고구려 영역의 지도를 한번보라!

위에서 세세히 하나하나 증명한 역사위치를 참고로 한 광개토 영역이다.

엄청나고 실로 어마어마한 광역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고구려의 실체이다.

이런 역사이기에 중공이 동북공정으로 고구려를 자기네 중화역사에 편입하려 한 것이다.

지금까지 나름대로 광개토대왕의 진보적 자료를 바탕으로 심중하게 문제를 풀듯이 풀어 보았다.

우리는 반도사 중심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넓게 냉정하게 비교해 보아야 할 필요성이 분명히 있었다.

더군다나 자라나는 세대에게 꿈과 희망을 듬뿍 줄 수 있는 근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일제가 남기고 간 거짓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는 참역사를 알게 된다는 것은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의 신성한 과업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늘상 한반도에만 갇혀 대국에게 조공으로 일 삼았다는 극히 초라하고 비굴한 역사가 아니라 세계를 아우르고 지배한 역사, 광대한 영토를 경영하던 역사가 바로 삼한의 역사란 사실을 이제 조금이라고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기쁘게 하고 있다.

36년간 침탈기를 거쳐 해방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해방된 것이 아니다.

일제가 남기고 간 유령은 우리를 바보 멍텅구리로 만들고 말았다.

그것이 결국 우리민족을 허약한 민족, 보호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초라한 민족, 나약한 민족으로 낙인을 찍으려 한 간교한 술책으로서 해방 후 지금까지 그저 역사란 이름 때문에 거짓의 역사, 거짓말의 역사, 소설같은 역사 속에서 갈등하고 비참한 역사를 원망하며 끝내 찌들며 병들어버렸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역사라고 배우고 있었던 반도사는 그야말로 역사소설 같은 거짓의 역사란 사실을 비로소 명확하게 알았다.

우리의 선대 역사가 세계를 아우르는 엄청난 영토를 확보하고 지배한 나라였음을 이제 알았다.

고구려 역사가 세계 어느나라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던 거대하고 위대한 역사였음을 강하게 느끼며 감동하게 되었다.

대단한 민족 역사에 대한 깊은 존경심과 긍지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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