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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소수림왕대의 의문점 네 가지
세계삼한역사를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현재 대륙사를 근거로 한 고구려 소수림왕대의 의문점 네가지를 열거해 보기로 한다.
인터넷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몽골인이 쓴 『무쿠리칸(汗)계보와 영역』이란 글은 그 진위가 어디에 있던지 간에 우리가 평소 궁금해 하고 수수께끼가 되어버린 고구려란 실체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진귀하게 취급되어야 자료라고 생각한다.
중공정부가 동북공정 틀 안에 고구려를 억지로 집어넣고 싶어하는 이유가 한반도를 중화화(中華化)하겠다는 목적뿐만 아니라 고구려가 결코 한반도 북부지방만을 한정한 왕조가 아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사실을 원초적으로 덮어버리거나 숨기기 위한 꼼수를 부리는 것이라 할 수 있고 고구려까지 중화화(中華化)함으로서 미래에 불거질 영역적인 역사문제를 돌파하겠다는 의미가 내포된 계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식에 계산된 의혹을 비로소『무쿠리칸(汗)계보와 영역』이란 글로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크며 도저히 정사(正史)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삼국사기가 정말로 누군가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할 것이다.
몽골인이 쓴 이글을 그대로 삼국사기 기록과 비교하면 분명하게 들어나는 것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모든 역사 숫자 개념이 사실과 다르게 10배로 축소되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 수 있으며 고구려가 결코 한반도 북방지역만을 한정한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는 것에서 큰 가치를 부여 할 수 있다.
[자료1] 몽골인이 쓴 소수림왕(재위:371-384)편을 보면
고구려 17대왕 소수림왕(재위:371-384)을 시유수린 칸(Siyoosulin Khan)라 하였고 아지게 카투르 칸(小解朱留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쿠부이(Kubui, 丘夫)이다.
코리구룬 유완 칸(故國原王)의 아들이라고 하였고 355년(코리구룬 유완 칸 25년) 타이시(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71년 부왕 고국원왕(코리구룬 유완 칸)이 백제(베르체)의 근초고왕(近肖古王:쿠툴루크 칸)과 평양에서 싸우다가 화살(流矢)에 맞아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하였으며 니칸(漢) 전진(前秦)왕조로부터 조공을 받는 관계를 수립하여 조공을 받았던 것은 물론이고 동로마제국과의 교역에 노력하였으며, 372년 니칸(漢)의 전진 왕 부견(符堅)이 보낸 조공사절단에 속해있던 승려 순도(順道)가 가져온 불상과 경문을 받아들여 니칸(漢)식 불교를 공인하여 같은해 타이 타치하 아문(Tai Tahchiha Amun, 太學)을 설립하였으며, 373년 처음으로 법령(Fafun, 律令)을 반포하고, 375년 니칸(漢)식 불교절인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여 순도를 머물게 하였다. 그 해에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하였고 전년에 고구려(무쿠리)에 온 중 투르크(Turk) 승려 아투르(Atur, 阿道)를 위하여 이프란사(Ipran, 伊佛蘭寺)를 지어 주지(住持)로 삼았으며, 같은 해에 백제(베르체)의 수곡성(水谷城:Siyoo Gol Hechen)을 빼앗았다. 377년 30만 대군의 백제(베르체)반란군 침공을 물리치고 백제(베르체)의 북변(北邊)을 역습하였으며 이듬해 키타이(契丹)인 제후를 그곳에 임명하여 북방백제(베르체)지역의 통할을 맡겼다.
[자료2]
前秦(350-394) | |||||
대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 |
|
太祖 |
三秦王)(武惠帝)경명제추증 |
부홍 (苻洪) |
- |
350 |
|
- |
三秦王 |
부건 (苻健) |
- |
350 |
|
- |
大秦王 |
부건 (苻健) |
皇始 351-355 |
351-352 |
1 |
高祖 |
景明帝 |
부건 (苻健) |
" |
352-355 |
2 |
- |
廢帝(厲王) |
부생 (苻生) |
壽光 355-357 |
355-357 |
3 |
世祖 |
宣昭帝 |
부견 (苻堅) |
永興 357-359甘露 359-364建元 365-385 |
357-385 |
4 |
- |
哀平帝 |
부비 (苻丕) |
太安 385-386 |
385-386 |
5 |
- |
高帝 |
부등 (苻登) |
太初 386-394 |
386-394 |
6 |
- |
- |
부숭 (苻崇) |
延初 394 |
394 |
[자료1]에서 중요하게 판단되는 네 가지 대목을 분류하고
(1)니칸(漢) 전진(前秦)왕조로부터 조공을 받는 관계를 수립하여 조공을 받았으며 372년 니칸(漢)의 전진 왕 부견(符堅)이 보낸 조공사절단에 속해있던 승려 순도(順道)가 가져온 불상과 경문을 받아들여 니칸(漢)식 불교를 공인하였으며...
(2)동로마제국과의 교역에 노력하였으며
(3)전년에 고구려(무쿠리)에 온 중 투르크(Turk) 승려 아투르(Atur, 阿道)를 위하여 이프란사(Ipran, 伊佛蘭寺)를 지어 주지(住持)로 삼았으며
(4)377년 30만 대군의 백제(베르체)반란군 침공을 물리치고 백제(베르체)의 북변(北邊)을 역습하였으며 이듬해 키타이(契丹)인 제후를 그곳에 임명하여 북방백제(베르체)지역의 통할을 맡겼다.
[자료3]오호 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304~439) 영역사진
오호 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304~439) 중 376년의 전진(前秦: 351~394, 분홍색)과
동진(東晉: 317~420, 노란색): 376년은 전진이 최대의 영토를 가진 때로 위의 지도는 서역의 영토를 포함하고 있다
먼저 [자료1]에서 보면
소수림왕 아버지 고국원왕(코리구룬 유완 칸)이 백제(베르체) 근초고왕(近肖古王:쿠툴루크 칸)과 평양에서 싸우다가 화살(流矢)에 맞아 전사하였다는 사실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어 나오는 기록은 우리에게 충격 그 자체이다.
고구려 17대왕 소수림왕(재위 371-384)은 당시 국왕이 전사한 상황에서 국가의 체제 정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넓은 영토와 주민들을 체계적으로 통치할 제도의 정비가 요구되던 시기였으므로 소수림왕은 새로운 체제로 국가를 정비해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 넓은 영토와 주민을 관리하는 정복왕조체제로 정비한다는 의미이다.
(1) 니칸(漢) 전진(前秦)왕조로부터 조공을 받는 관계를 수립하여 조공을 받았으며...
고구려가 전진(前秦)왕조로부터 조공을 받는 관계를 수립하여 조공을 받았다는 내용이 삼국사기에는 빠져있다.
반면 몽골인 쓴 글에서 고구려 17대왕 소수림왕(재위371-384)때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중에 하나인 전진(前秦)을 고구려가 조공국(朝貢國)으로 삼아 소수림왕 재위2년(372년)에 전진(前秦)왕 부견(符堅)이 조공사절단까지 보내왔음을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위 지도그림은 한어자료에서 나온 것인데 일부러 고구려를 숨기려 했겠지만 모든 정황으로 보았을 때 분명 고차(高車)가 고구려(高句麗, 高麗)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 챌 수가 있다.
이 고차(高車) 역시 고구려의 제후국이거나 아니면 고구려일 가능성이 많다.
위 지도그림에서 보면 376년 전진(前秦)은 전성기를 맞아 최대한으로 영토를 넓혔다고 하고 있지만 북쪽에 고구려가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구려에 막혀 북방으로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고 판단 할 수 있다.
전진(前秦 350-394)은 불과 44년이란 짧은 재위기간을 가진 작은 왕국일 뿐이다.
그러한 나라가 칭제를 했다하니 고구려는 무엇이라 했겠는가?
어떠한 수식어를 달더라도 전진(前秦)은 대고구려의 조공국(朝貢國)으로 존재했고 고구려를 두려워하며 머릴 조아릴 수밖에 없는 방계 왕조인 것이다.
372년부터 대국인 고구려가 전진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사실은 충격이다.
실제로 북쪽에 대국인 고구려가 크게 버티고 있어 전진 왕 부견(符堅)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란 판단과 함께 늘 고구려 때문에 심장이 오그라들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44년이란 짧은 재위기간만 존속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대륙사와 반도사는 고구려를 한반도 북부에 한정시켜놓고 고구려를 전진의 속국으로 만들어 놓고 있는 실정이니 안타깝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동로마제국과의 교역에 노력하였으며...하는 문장이 있다.
이 역시 삼국사기에서는 빠져 있다.
동로마(東羅馬, 大秦: 330-1453)가 지금의 비잔틴제국(Byzantine Empire, 395-1453)이라고 할 때 도대체 어떻게 한반도와 교역을 감히 생각 할 수 있었던 것인지 발상자체가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한반도에서 그리스(비잔틴)까지 구글로 거리를 재어보면 육로거리가 10,000km이고 바다 항로가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거쳐 간다고 할 때 자그마치 30,000km나 되는 어마어마한 거리이다.
교역은 장사이다.
이렇게 수송수단이 원활하지 않아 목숨뿐만 아니라 비용이 많이 든다면 장사할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동로마와 한반도 교역 운운하는 것은 거짓이라고 단언 할 수 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멍청한 설정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서기 372년이 현재처럼 자동차란 특수한 수송수단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면 한반도에서 출발하여 대륙을 거치고 중앙아시아를 넘어 소아시아 발칸반도로 들어가는 길은 한마디로 교역이란 단어하나만으론 부족하고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이와 같은 설정은 장사가 아니라 당장 죽음을 담보하는 험난한 길이 아닐 수 없다.
거리도 거리지만 중간 중간 노정(路程)에서 나라가 다르고 말이 다르고 관습이 달라 그냥 지나가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고 특히 중앙아시아 지역은 정통적으로 거칠고 전투성이 강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이와 같은 사실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 피터 홉커크(Peter Hopkirk)가 쓴 "Great game" 이란 글에서 알 수 있는데 서세동점시기 19세기내내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지역을 선점하기 위해 벌린 수많은 탐험가, 병사, 상인들의 암투와 죽음에서 알 수 있듯이 높은 산맥, 가파르거나 좁은 고개, 물 없는 사막, 계속되는 모래 언덕, 한여름에 사막에서 몰아치는 폭풍, 너무 가난해서 현지주민조차 먹고 살기 힘든 지역의 약탈자, 적대적 부족, 도살자, 도적떼가 들끓는 위험한 지역은 물론이고, 하룻밤사이에 군대를 점멸시킬 수도 있는 잔혹한 겨울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무엇하나 만만할게 없는 험난한 지역이 곳곳에 가로 놓여있다는 위 기록을 보더라도 한반도 고구려가 동로마를 상대로 교역한다는 허황된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교역의 길은 죽음이 저 만치 기다리고 있는 지옥 같은 노정(路程)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다.
막연하게 사서에서 그렇다면 그렇겠지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 372년에 한반도 북방지역을 차지하였다는 고구려가 비잔틴 동로마제국과 감히 교역을 하였다는 사실을 어찌 믿으란 말인가?
삼국사기가 반도사가 우릴 속이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삼국사기는 위 교역사실을 빼버린 것이다.
실제로 고구려가 동로마와 교역을 한 것이라면 고구려 위치가 한반도가 아닌 동로마(東羅馬)와 근접하거나 가깝게 있어 쉽게 통행할 수 있는 조건이 존재했다고 보아야 하고 좀 더 확대해서 풀이 할 것 같으면 고구려가 동로마(東羅馬)접경까지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있어야 가능하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고구려 소수림왕이 로마와 교역하였다는데도 그 대상이 東로마인가 아니면 西로마인가 하는 점이 또 있다.
동로마(東羅馬, 大秦: 395-1453)는 시작년도를 아르카디우스(Flavius Arcadius, 377년/378-408)가 즉위한 년도 AD 395년이다.
그때부터 동로마라고 비잔틴제국(Byzantine Empire, 395-1453)제국이라 했다.
그러나 소수림왕의 재위기간(371-384)을 따져 볼 때 동로마와 교역했다는 것은 년도 상 맞지 않는다.
로마 마지막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Flavius Valentinianus, 321-375, 재위364-375)는 365년 갈리아(Gallia, Gaul)에서 알레마니족(Alemanni, Alamanni)의 침입으로 로마군이 패하자 그는 파리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계속 그 곳에서 머물면서 알레마니족(Alemanni, Alamanni)과 싸웠다. 동생 발렌스가 프로코피우스의 반란으로 도움을 요청했을 때 그는 알레만니족과의 싸움으로 병력을 빼 수 없다고 그 도움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프로코피우스는 우리 형제만의 적이지만, 알레마니족은 로마 세계 전체의 적이다."
이 알레마니족(Alemanni, Alamanni)이 갈리아(Gallia, Gaul)와 연결되고 있으며 고구려와 관계되었다고 여겨지는 켈트족(Celts)과도 연관된다는 사실이다.
발렌티니아누스의 장군인 요비누스는 알레마니족을 상대로 3차례 승리하고 그 후 여러 해 동안 갈리아지방을 안전하게 했으나 발렌티니아누스는 367년 브리타니아(Britannia)에서 피트족과 켈트족(Celts)일파인 스코트족(Scots)의 침입을 받았다. 자신은 갈리아에 있어야 했으므로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황제 테오도시우스의 아버지)에게 브리타니아 원정을 맡겼는데 테오도시우스는 성공적으로 원정을 마쳤다. 이후 발렌티니아누스는 아들(Flavius Valentinianus, 375-392)의 왕위계승권을 강화하기 위해 당시 9세인 아들 그라티아누스(Flavius Valentinianus, 375-383)를 공동황제로 임명했다. 그는 트리어에서 7년 동안 머물면서, 제국의 국경을 안정화시키고 373년 갈리아에서 돌아왔다.
374년 판노니아(Pannonia)의 도나우 강(Donau River)건너편에 살던 콰디족(Quadi)이 로마가 요새를 세운데 불만을 품고 제국의 국경을 침입하였다. 이듬해 발렌티니아누스는 콰디족(Quadi)의 사절을 만난 자리에서 갑자기 뇌졸증으로 쓰러졌고 분노한 채로 죽고 말았다 한다.
소수림왕의 재위기간(371-384)은 공동 재임한 상태에 있었던 西로마 황제 그라티아누스(Flavius Valentinianus)와 발렌티니아누스 2세(Flavius Valentinianus)때이다.즉 고구려가 교역했던 나라가 東로마(Byzantine Empire, 395-1453)가 아니라 西로마라는 말이 된다.
그리고 로마제국 북방까지 고구려가 존재했다는 가정을 세울 수 있다.
이문제도 나중에 따져보자.
(3) 전년에 고구려(무쿠리)에 온 중 투르크(Turk) 승려 아투르(Atur, 阿道)를 위하여 이프란사(Ipran, 伊佛蘭寺)를 지어 주지(住持)로 삼았으며
승려 아투르(Atur, 阿道) 즉 아도화상이 투르크(Turk)인 이라고 한 사실이다.
물론 이부분도 삼국사기에는 언급하지 않는다.
고구려부터 왔다고 하는 묵호자(墨胡子:5세기)와 동일 인물로 추정하는 삼국사기에 아도(阿道), 아도(我道) 또는 아두(阿頭)라 하여 일반적으로 인도승려로 추정하고 또 국적불명의 승려로 신라눌지왕(재위417-458)때 고구려에서 신라로 건너와 불법을 전했다고 하였으며 또 아도는 고구려의 승려로 5세에 출가하여 16세때 위(魏)에 가서 아버지 굴마(堀摩)를 찾아뵙고 19세때 다시 고구려에 돌아와 어머니 고도령(高道寧)의 명을 받들어 신라미추왕 2년(263년)에 신라왕가에 불교를 전파하려다 실패하였다는 기록이다.
무엇 때문에 삼국사기는 이렇듯 불명확하게 아도화상을 그렸을까?
이것은 삼국사기가 실증적인 역사서란 사실을 믿을 수 없게 하는 증거이다.
분명 누군가에 의해 철저하게 조작, 가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삼국사기를 조작한 역사음모세력들은 고구려와 신라가 어떻게든 투르크(Turk)계와 연결, 연관되는 사실을 은폐, 또는 숨기려 했던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고구려와 신라를 투르크계와 연계 가능성을 막았다는 것은 고구려나 신라에 전파된 불교가 원시불교가 바로 조로아스터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원시불교를 바탕으로 한 나라인데 비로소 소수림왕 때 조로아스터교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시기적으로 따져 볼 때 사산왕조라 판단되는 신라는 이미 조로아스터교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있으며 이어 고구려가 조로아스터교를 신라로부터 받아 들였다는 사실을 이 글로 알 수 있게 한다.
특히 384년에는 백제에도 원시불교(조로아스터교)가 전래되었다.
(4) 같은 해에 백제(베르체)의 수곡성(水谷城:Siyoo Gol Hechen)을 빼앗았다. 377년 30만 대군의 백제(베르체)반란군 침공을 물리치고 백제(베르체)의 북변(北邊)을 역습하였으며 이듬해 키타이(Kitai, 契丹)인 제후를 그곳에 임명하여 북방백제(베르체)지역의 통할을 맡겼다.
반면에 삼국사기에서는 이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375~377년에 걸쳐서는 백제의 수곡성을 빼앗고 3만대군의 백제군 침공을 물리치고 백제의 북변을 역습하는 등 백제와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378년, 극심한 가뭄이 든 상태에서 거란의 침략을 받아 8개의 부락을 빼앗겼다.
위 글들을 비교해보면 이상한점이 발견된다.
백제군사의 숫자이다.
몽골인의 글은 백제군 30만 대군이라 한 반면 삼국사기는 3만 명이라 하여 자그마치 10배를 축소하여 기록했다는 사실이 들어났다.
또 몽골인의 글에서는 377년 30만 대군의 백제(베르체)반란군 침공을 물리치고 백제(베르체)의 북변(北邊)을 역습하여 378년 키타이(Kitai, 契丹)인 제후를 그곳에 임명하여 북방백제(베르체)지역의 통할을 맡겼다고 한 반면에 삼국사기는 3만대군의 백제군 침공을 물리치고 백제의 북변을 역습하는 등 백제와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하면서 378년 극심한 가뭄이 든 상태에서 거란의 침략을 받아 8개의 부락을 빼앗겼다라고 나온다.
추려 보면 고구려 제후국인 거란에게 통할 맡겼다는 사실과 거란에게 침공 당하여 오히려 고구려 땅을 거란에게 빼앗겼다고 하는 상반된 기록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해석을 하자면 전혀 다른 천양지차(天壤之差)의 글이다.
당시 30만 대군이라면 어마어마하다.
그것도 백제군사라는 것인데 백제가 있었던 곳은 분명 한반도 전라도라 했다.
그곳에서 당시 30만 대군이라면 어느 정도이었을까?
아래 자료는 한국지리지 전라편(박영환 외2인)에 자료인데 전라도 인구변천 도표를 보면 1669년(현종 10년)에 전라도의 전체 인구는 약 97만이라 하고 있다.
위 도표에 나오는 숫자를 비교하더라도 1300년 전 서기 377년에 고구려를 침공한 백제군사가 30만 명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산술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숫자이다.
이것은 한반도 백제백성 남녀노소 전부 군사가 되어야 맞출 수 있는 숫자가 된다.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면 몽골인이 쓴 글에 30만 명이라는 대군의 백제가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때문에 일제가 주도한 역사음모는 삼국사기를 빌어 숫자를 10분지1로 축소하였을 것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30만 명의 군사를 동원 할 수 있을 정도라면 현재 인구수 당 동원 가능한 군사 숫자를 전인구의 5%을 보면 적어도 당시 백제인구가 600만 명 정도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백제인구만 372년 당시 600만 명이라?
임진왜란 당시 조선 전체 인구가 400-500만명이라 한 것을 보면 시간적으로도 숫자적으로 상당한 괴리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몽골인이 쓴 글에서는 거란, 키타이(契丹)는 고구려의 제후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골, 굴, 글, 갈 모두 같은 음역이다.
거란은 근세기에 급조된 고구려 대칭일 수도 있다.
백제(베르체)반란군 침공을 물리치고 백제(베르체)의 북변(北邊)을 역습하였으며 이듬해 키타이(契丹)인 제후를 그곳에 임명하여 북방백제(베르체)지역의 통할을 맡겼다 한 것은 거란이 바로 고구려이거나 고구려를 보호국으로 하는 제후국임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지금의 한반도 북방지역만을 영역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한반도 백제가 어딘데 백제북방을 거란에게 맡겼다 하는가?
한반도 백제라면 한강 중부 지방일터 그곳을 거란에게 맡긴다?
말이 되는가?[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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