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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와 숭정제(崇禎帝) 그리고 효종과 영력제(永曆帝)

한부울 2011. 6. 20.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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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와 숭정제(崇禎帝) 그리고 효종과 영력제(永曆帝)

 

글쓴이:한부울

 

강희제(康熙帝)(1654.5.4~1722.12.20)는 청나라의 제4대 황제(재위1661년~1722년)이자 1644년 숭정제의 자살 후 명나라가 멸망하고 난 뒤 청나라 군대의 입관(入關)이후 중국을 다스리는 통일 황조로의 두 번 째 청나라 황제이기도 하며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휘는 현엽(玄燁), 묘호는 성조(聖祖), 시호 짧게는 인황제(仁皇帝)이며 연호는 강희(康熙)라고 하였다.

 

제3대 황제인 순치제(順治帝)의 셋째 아들이자 순치제의 후궁 출신인 효강장황후 동가씨(孝康章皇后 佟佳氏)의 소생으로서 자금성(紫禁城)에서 태어난 최초의 청나라 황제라고 모든 자료에 나온다. 그런데 이 강희제가 강씨(康氏)제국이라 하였으니 바로 조선 충청도 하중부(河中府)가 있었던 우즈베키스탄 왕조라고 볼 수 있고 기록에 따르면 년대적으로 아스트라한왕조(阿斯特拉罕王朝,1599-1753)와 연결된다. 그렇다면 강희제가 우즈베키스탄 사마라칸트(康國)에서 나온 왕조라 할 수 있어 예측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 현종과 숙종과 그대로 연계됨을 알 수 있다.

 

티무르제국이 있었고 하중부가 있었던 사마라칸트 1500년 이후 왕조는

부하라한국(Khanate of Bukhara,布哈拉汗國 1500-1598)

아스트라한왕조(阿斯特拉罕王朝 1599-1753)

만지트왕조(曼吉特王朝 Uzbekistan,1758-1920)가 있다.

 

 

명(고려) 제16대 황제 숭정제(崇禎帝, 1611.2.6~1644.4.25,재위1628~1644, 묘호:毅宗)의 태생과 죽음(자살)은 조선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昭顯世子, 음력1612.1.4~1645.4.26)의 태생과 죽음(자살)을 보는 듯하다. 년대 차이가 1년 밖에 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죽음에 대한 자살이란 의혹 역시 동일하여 의문이 산처럼 쌓인다. 년대가 태생과 죽음 모두 1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다는 것은 음력과 양력을 따지더라도 거의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고 후세 역사음모세력들이 이 두 왕을 다르게 인식하도록 하기 위하여 장난 친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아래는 위키자료인데

 

1645년 음력 2월 귀국(어디서 ?)한 소현세자는 음력 4월 26일 갑자기 숨을 거두는데 일부 역사학자들은 세자가 죽고 난 뒤 곳곳에 검은 반점이 나고 시신이 빨리 부패했다는 점에 인조와 인조의 총애를 받던 소용조씨(昭容趙氏:조귀인)가 의원 이형익을 시켜 그를 독살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1645년 음력 6월27일《인조실록》에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사람들에게 말한 내용이 실려 있다.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임금)도 알지 못했다. (인조실록 인조 46권, 23년, 소현세자의 졸곡제를 행하다)

 

청(조선) 시조격인 속칭 홍타이지 청 태종(淸太宗, 愛新覺羅皇太極, 崇德 1626-1643)과 겹쳐지기도 하는 명(고려) 주유검(朱由檢) 숭정제(崇禎帝, 1611.2.6-164.4.25) 역시 소현세자와 자살이란 죽음결말은 다르지 않다.

 

명(고려) 숭정제(崇禎帝)는 제위1년 권좌에 있었던 14대 태창제(泰昌帝, 1582.8.28-1620.9.26:재위 1620)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형인 15대 천계제(天啓帝, 1605.12.23-1627.9.30,재위1620-1627)의 아들들이 모두 요절 하여 할 수 없이 제위에 올랐던 명나라 제16대 황제 숭정제(崇禎帝)가 조선 소현세자일 가능성이 많다는 말이다.

 

14대 태창제(泰昌帝)아들-모두 요절한다.

熹宗朱由校,천계제(天啓帝, 1605년 12월 23일 ~ 1627년 9월 30일)

简怀王朱由㰒,生四岁殇,4살때 요절

齐思王朱由楫,生八岁殇,8살때 요절

怀惠王朱由模,生五岁殇,5살때 요절

思宗朱由检,(崇禎帝, 1611년 ~ 1644년)

湘怀王朱由栩,早殇(요절)

慧昭王朱由橏,早殇(요절)

 

15대 천계제(天啓帝)아들-모두 요절한다.

懷沖太子朱慈燃,母孝哀皇后张宝珠,死胎

悼懷太子朱慈焴,母皇貴妃范氏,早夭。

獻懷太子朱慈炅,母皇贵妃任氏,地震时惊死

 

명(고려) 숭정제(崇禎帝)는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패전 이후 북쪽에서 만주족(滿洲族)인 후금(後金)이 침입해오고, 남쪽에서는 1627년에 이자성(李自成)의 반란이 일어나서 명나라으로선 어려운 시기였으며,또한 17세기 들어 닥친 전 세계적인 기상악화와 천재지변으로 흉작이 계속되어 더욱 더 민심이 흉흉했다. 만력 연간 이후로 계속해서 세금이 증가하고 재정의 수요가 증가하였지만, 재정은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숭정제가 즉위할 무렵의 명나라가 닥친 어려움이 이와 같았다.

 

숭정제는 천계제와 달리 정치에 열심이고, 정사(情事)에 빠지는 일도 없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 황제로 있던 17년 동안 부지런히 국정에 임하였던 황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시의심(猜疑心:남을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강하고, 가신을 신용하지 못했던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위 직후부터 여러 차례 신하를 죽였고, 특히 1630년 산해관에서 만주족으로부터의 방어를 혼자서 맡고 있던 명장 원숭환(袁崇煥)을 죽인 일은 치명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혹자는 명 말의 숭정 연간 혼란의 원인 중 하나를 숭정제의 시의심(猜疑心)으로 꼽기도 한다. 재위 17년간에 숭정제에 의해서 살해당한 신하는 총독(総督) 7명, 순무(巡撫) 11명에 달하고 그 외 파면된 사람도 다수 있어 이것이 신하들의 사기를 현저히 저하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숭정제는 중세(重稅)를 견디지 못한 섬서성 출신 반란군인 이자성을 진압하기 위해 차례로 토벌군을 보내지만 그 이자성 토벌군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다시 증세(增稅)가 필요했다. 다시 이로 인해 궁핍한 백성들이 반란군에 참가해,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1644년, 이자성군은 북경을 포위하여, 3월 19일에 북경은 함락되었다. 한 기록에 따르면 숭정제는 위급을 알리는 종을 울렸지만 신하들이 모두 도망가서 환관 왕승은(王承恩)만 혼자 있었다고 한다. 1644년 3월 29일 숭정제는 아들들을 자금성으로부터 탈출시키고, 처첩과 딸들을 살해하고, 자금성의 북쪽에 있는 경산(景山)으로 가서 목을 매달아 자살하였다.[위키]

 

농민들은 청나라와의 잦은 전쟁과 무거운 세금, 황제 숭정제의 포악성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이때 천민출신 이자성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켜 끝내 이자성을 막지 못하고 숭정제는 자실하고 만다. 그러나 이자성은 숭정제 뒤 이어 황제자리에 오르지만 40일밖에 황제 자리에 있지 못하고 청나라 오삼계에게 쫓겨 화남 지방으로 도망갔다가 1645년 결국 그곳 주민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한다.

 

효종과 영력제(昭宗永曆帝)

 

16대 인조(仁祖, 1595-1649, 재위:1623-1649)아들

정비 : 인렬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 소생

소현세자 조(昭顯世子 溰, 1612년-1645년)

봉림대군 호(鳳林大君 淏, 1619년-1659년): 조선 제17대 왕 효종

인평대군 요(麟坪大君 濬, 1622년-1658년)

용성대군 곤(龍城大君 滾)

조졸 : 2남 1녀

 

후궁 : 폐귀인 조씨(廢貴人 趙氏) 소생

숭선군 징(崇善君 澂)

낙선군 숙(樂善君 潚)

효명옹주(孝明翁主) : 김세룡(金世龍)에게 하가(下嫁)

 

소현세자 동생인 제18대 효종(孝宗, 1619년~1659년, 재위 1649년-1659년)은 남명 마지막 황제와 고스란히 연결되는데 1650년 청군이 중국남부 경동과 계림(桂林)을 함락시키면서 1656년 주산열도를 점령하고 1659년에 운남까지 차지하자 영명왕(永明王)은 버마로 도주하지만 1662년 청나라에 투항한 오삼계가 버마까지 쳐들어오게 되면서 후한을 두려워한 버마왕에 의하여 청나라군에 사로잡히게 되고 결국 살해되면서 명나라는 완전히 멸망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영명왕(永明王)이 남명의 제5대 마지막황제 소종영력제(昭宗永曆帝 1625~1662, 제위:1649-1662)이고 주유랑(朱由榔)이다.

또한 만력제의 손자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사촌동생이라 한다.

결국 소현세자 동생인 효종은 버어마에서 살해되는 참극을 맞이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후 강희제(1654-1722, 제위1661-1722)는 명(고려)가 멸망하고 이어 청(조선)황제로 등극하게 되는데 이는 조선 현종(顯宗, 1641-1674,재위:1659-1674), 숙종(肅宗, 1661-1720, 재위:1674-1720)일 가능성이 많다.

 

반도사(半島史)는 숙종이 조선을 다스렸던 기간은 조선이 개국된 이래 당파 싸움이 가장 심했던 때라고 하였다.

그의 재위 기간 중에 남인과 서인의 당파 대립 관계가 치열해지고 1680년대에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어 이들도 서로 당파 싸움을 하게 되었으며 어느 한 당파가 다른 당파를 완전히 몰아내고 1당 정치를 하는 환국정치(換局政治)가 주된 현상이라고 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반도사(半島史)는 반도조선을 만들면서 환국정치(換局政治)라 하면서 막장드라마를 쓰고 있지만 이 환국정치(換局政治)란 단어 속에 감추어진 것을 자세히 보고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참역사가 마치 그런 것처럼 오해가 따르는 것이다.

 

환국정치(換局政治)라 함은 조선이 당시 반란세력들을 제거하고 극형으로 단죄하는데서 파생한 단어라고 보이고 영토를 북서, 동남으로 크게 정벌하여 나라를 분명히 이롭게 한 방책으로 환국을 했다는 것이지 정부 대신 간 권력다툼이나 하면서 마치 당파싸움을 한 것처럼 꾸미고 도식한 것은 일제에 의한 것이지만 반도사의 저질적인 의도를 들여다 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거대한 영토를 경영하는데 반대세력이 어찌 없을 수가 있겠는가?

넓은 광범위한 지역을 지배함에 있어 인종, 종교, 문화, 언어가 다른 다문화국가체제를 확립해야 하는 것에서 어찌 정치적인 반목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이것을 환국이라 하여 폄하한다면 어느 나라가 온전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적인 위업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늘 대신 간에 권력다툼이나 하고 당파싸움으로 날 지새는 한심한 나라로 만들고 말았으니 반도사가 우리에게 주는 폐단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환국 운운하는 것은 근세기 역사음모조작세력들에 의한 장난질에 지나지 않는 창작이다.

 

결국 청조선 강희제(헌종, 숙종)가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왕권을 안정케 하였으며 영역을 동서남북으로 넓혀가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강성 환국을 반도조선사는 당파싸움을 몰아붙여 나약한 왕과 더불어 알력다툼이나 하는 한심한 신하만이 득실거리는 못난 역사로 도배질 한 것이라고 최종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아래 4대 환국을 년대별로 늘어 놓고 대신 그 아래 강희제가 그 연대에 가깝게 영토를 넓혀가는 과정을 비교 열거해 보았다.

 

1.경신환국(庚申換局):1680년(숙종 6년)에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또는 경신출척이라고도 불리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이 발생한다. 이 경신환국으로 말미암아 남인(南人) 정권이 붕괴되는 한편, 서인(西人)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결과를 맺게 된다.

 

강희제는 1669년(강희8년)에 오배의 난을 평정하여 실질적으로 조정을 장악하였다.

이후에는 1673년(강희12년)에 8년 동안 지속된 삼번의 난을 평정하고

1674년(강희13년)에 오삼계는 호남을 점령하고 군을 동서로 나누어 서쪽은 사천성, 섬서성에 동쪽은 광서, 복건으로 진군시킴과 동시에 상가희, 경정충에게 호응을 권유하였다. 경정충은 유혹에 넘어가 반란을 일으키지만 상가희는 반대를 했기 때문에 상지신에게 살해당하고 상지신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가세해 대만에서 정경(정성공의 아들)도 호응을 하여 한때는 장강이남 모두 오삼계 세력의 손에 떨어졌다. 그러나 오삼계 등의 반란은 대의명분 보다는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민중으로부터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오삼계 등은 만주족을 내쫓고 한족의 세상을 되찾는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남명에서 저항하던 한족 왕조(明高麗)의 망명 정권을 남쪽으로 추적해 멸망시켰고, 이로 인해 큰 지지를 얻지 못했다. 또한 오삼계 등 세 명은 모두 동등한 지위로 지휘권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약점으로 인해 청(조선)도 서서히 세력을 만회하고 반란군을 각개 격파 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1676년(강희15년) 섬서가 진압되어 상지신이 항복한다.

경정충도 청에 항복하고 창을 돌려 반란군 토벌에 참가하게 된다.

1678년(강희17년) 열세에 서게 된 오삼계는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주(周)로 삼고 독립을 선언했지만, 반년 후에 병사하게 된다. 사후대장을 잃은 반란군은 급격히 이탈을 시작했고, 운남으로 도피하여 오삼계의 손자 오세번이 황제를 이었지만

1681년에 청군의 공격을 받아 오세번은 자살하고, 전란은 종결되었다.

이어 1683년에는 정경의 아들이 항복하자, 국내의 반청 세력이 일소되어 강희제에 의한 군주독재가 완성되었으며《삼세의 봄》이라는 청나라의 절정기가 초래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2.기사환국(己巳換局):1689년(숙종15년)에는 기사환국이 발생한다.

숙종(肅宗)은 서인이 제기한 원자(元子) 문제를 빌미로 서인의 횡포를 억누르고자 서인을 실각시키는 한편, 남인들을 다시 중용하게 된다.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로 하여금 에도 막부 정권과 협상하여 일본인들의 독도 출입금지를 보장받았다. 또한 조선 통신사를 세 차례나 파견(1682년, 1711년, 1719년)하여 왜가 은을 사용하는 조례를 확정함으로써 왜관 무역을 정비시켰다.

 

이것은 일본을 대만 지칭하는 것처럼 보인다.

 

1712년 함경감사 이선부로 하여금 백두산 정상에 정계비를 세워 영토의 경계선을 확정하기도 했으며, 폐한지로 버려 둔 압록강변에 무창·자성의 2진을 신설하였다.

 

1683년(강희22년)에 대만을 청나라에 복속시켰으며 북방의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만주와 연해주 쪽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네르친스크 조약(1689)

1.국경을 아르군·케르비치 두 강과 외흥안령산맥(外興安嶺)을 양국간의 국경으로 정하고 알바진 성은 파괴할 것

2.우디강과 외흥안령산맥(外興安嶺)의 사이는 미확정 부분으로 한다.

3.아르군강이남에서 러시아인은 퇴거한다.

4.불법 월경을 금지한다.

5.여권을 가지는 것은 교역이 용서된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때까지 러시아가 현 극동 연해주까지 영토를 감히 확장하지 못하였을 때이다. 그런데도 북방 러시아 만주와 연해주 쪽의 국경을 확정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당시 만주와 연해주는 중앙아시아 북쪽에 위치하였다고 보아야 옳다.

 

3.갑술환국(甲戌換局):1694년(숙종 20년)에 갑술환국이 발생한다.

숙종이 장씨를 희빈으로 책봉하고, 후에는 왕후의 자리에 올렸지만, 장씨의 거동이 매우 방자했으므로 숙종은 이에 대항해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남인들을 퇴출한다. 이로 말미암아 서인들은 다시 재집권을 하게 된다.

 

1696년(강희 35년)에는 청나라에 대항하던 몽골 오이라트(Oirats:草原百姓, 林中百姓)로 친히 원정하여 몽골 오이라트 출신의 부족연합체 준가르(Dzungar)의 칸 가르단의 군사를 격파하여 북방을 안정되게 하였다.

 

4.정미환국(丁未換局):1727년(영조 3년)에는 정미환국이 발생한다.

영조(英祖)는 당파심이 매우 강한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탕평책(蕩平策)을 추진한다. 이를 계기로, 서인에서 분파한 소론(少論)은 실각하지만, 또 다른 서인인 노론(老論)은 계속 집권한다.

 

1721년(강희 60년)에는 가르단을 지원했던 티베트에 군대를 보내 정복함으로서 티베트를 청나라 영토에 편입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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