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인물

셀주크 제국(1038-1157)과 고려중기제왕

한부울 2011. 6. 22.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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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주크 제국(1038-1157)

 

 

나는 감히 고려 왕족의 왕(王)씨를 술탄(sultan)을 대칭한 한자어라고 주장한다.

United corea, or korai, 960-1392 AD

위는 미국에서 나온 자료이다.

 

고려는 '유나이티드 코리아' 고려연합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6399 

Asiatic history WM. Elliot Griffis(1843-1928)

New York: Phillips and Hunt, 1881

 

여기서보면 고려를 분명 연합(United)이라고 하였고 corea 와 코라이(korai)를 병용하였다.

그리고 년대를 나타내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의미심장하게 볼 것은 바로 유나이트 고려가 시작한 연도가 960년이라고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송나라(宋, 960-1279) 건국연대와 같다.

이 송나라 역시 명, 청과 마찬가지로 혼입한 결과물이며 모두 고려에 또는 조선에 포함된다는 말과 동일하다.

또 하나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 할 것은 바로 "United corea" 란 명칭이다.

연합(United)는 같은 민족을 통일하였다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 종교, 언어, 인종이 다른 다민족국가를 연합체 또는 연방국가형태로 지배하는 수장국이었다는 말이된다.

 

 

 

                                      [인터넷에 있는 터키인들에게 질문한 자료]

 

우리는 과연 터키와 형제국이 맞는가?

그런데 그들은 한국전쟁에 참전 한 것 이상으로 형제국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그들보다 부족함을 항상 느끼고 있었던 입장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은 그토록 형제애를 표현하는 것일까?

의문이 산처럼 쌓여만 갔다.

그렇지만 그 때 마다 결론은 풀수 없는 물음표(?) 뿐이었다.

그들과 우리는 아시아 극과 극에 위치한 문제와 인종이 다르다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풀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엇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륙역사를 가르치고 배웠지만 우리는 반도사만 알도록 가르치고 배웠을 뿐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문제가 있고 한계가 있었음을 부인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천지신명님께서 도우시려고 그런지 몰라도 인터넷이 생겼다.

그리고 대중적인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 덕분에 부족한 공감대는 서서히 우리에게 채워지게 되고 그들의 감흥을 어느정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무척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의 대중자료는 역사를 잃고 한없이 길을 해매는 불쌍한 우리 민족에게 하늘이 내려주신 큰 선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꿈에도 상상하고 생각할 수 없었던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있으나 마나하고 허수아비 같은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결코 가르쳐 주지 않았던 사실을 이젠 인터넷으로 알게 된다는 사실은 인터넷 대중자료를 경시하는 그들 입장에서 보더라도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어디까지 왔는가 하면 셀주크가 고려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엄청난 사실이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셀주크가 고려역사의 일부라니...

서양, 미국에서 1882년에 고려를 연합체(united)라고 분명히 하였다.

그 실체가 서서히 들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스만제국도 고려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연결할 수 있어진다.

그렇다면 터어키인들이 우리를 보고 한사코 형제국이라고 한 사실도 이 같은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새롭게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에서 그들의 형제애를 느끼고 깨우치게 하고 있다.

그래 기왕에 여기까지 힘들게 왔으니 이제 갈 때 까지 한 번 가보자꾸나.

 

 

강조정변(康兆의 政變)

 

1009년 강조가 일으킨 정변. 고려 왕실에서는 대대로 근친혼이 행하여지고, 사사로운 간통도 많았다. 목종의 아버지인 경종과 생모인 헌애왕후, 그리고 이모인 원정왕후 등은 친 4촌간이었다.

 

경종이 죽은 뒤 경종의 숙부인 왕욱은 자기 질녀가 되는 헌정왕후와 간통하여 대량군 '왕순'을 낳았다. 그런데 경종이 죽을 때, 목종은 2세 밖에 안되어 왕위는 성종이 계승하고, 헌애왕후는 천주궁에 살며 외척 김치양과 추문을 일으키게 되어 성종은 김치양을 유배시켰다. 그런데 그 후 성종이 후손 없이 죽고, 목종이 겨우 18세에 즉위하자 모후인 천추태후(헌애왕후)가 정사에 간섭하여, 앞서 유배되었던 김치양을 복권시키고 중용하였다. 이에 김치양은 제 마음대로 정사를 전횡하였다. 김치양은 천추태후와의 간통으로 아들이 낳게 되자 그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으려 하였다.

 

목종이 후사없이 병을 얻자(1009년), 목종은 채충순에게 김치양의 음모를 말하고, 대량군 순을 후계자로 삼았다. 또한 서북면도순검사 강조에게 돌아와 궁궐을 지키도록 밀명을 내렸다. 이윽고 목종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돌자 강조는 군사 5천을 이끌고 오다가 목종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망설였다.

 

부하 장수들과 함께 회의를 마친 강조는 일단 자신의 부하를 보내 대량군 순을 맞이하게 하고(고려 현종), 자신은 개경을 점령하고 목종을 퇴위시켰다. 이와 동시에 김치양을 죽이고, 천추태후와 그 무리를 귀양 보냈다. 또 사람을 보내어 폐제인 목종을 살해하였다.

이렇게 하여 강조는 정권을 장악하고 고려 현종이 즉위하였다.

 

이것이 바로 셀주크 건립이다.

결국 강조로 인해 셀주크제국이 탄생되도록 원인을 제공한 경우가 된다.

물론 고려 연대표와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근세기 역사판짜기 각색이 한꺼번에 들어나도록 하였을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이 정변이 곧 거란 침공(2차)의 구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 기존 고려가 정치적으로 흔들려 셀주크란 나라가 생성되도록 한것이 분명한 과정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 거란 역시 고려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나라였다고 보여진다.

고려 초기는 이란의 트란스옥시아나와 호라산지역에서 발흥하고 서기 819년부터 999년까지 존재했던 사만왕조(Saman Khuda)와 연결되고 있다.

그렇다면 거란은 사만제국과 관계될 수 있는 종족이라고 해석된다.

또한 사만제국은 고구려와도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거란은 고구려로 보는 것이 옳고 거란의 침입은 종교, 문화적인 전통적인 승계를 거부하며 셀주크로 독립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 아니었는가 한다.

 

또 강조(康兆, 肇, 974-1010)는 고려 목종과 고려 현종 때의 장수이다.

황해도 태생으로 신천(信川)지방의 호족 출신이며 본관은 신천 강씨(信川 康氏)라 하였다.

태조 왕건의 22번째 부인인 신주원 부인(信州原夫人) 강(康)씨의 친정 일족이었다 하였으며 목종을 폐하고 대량원군 순을 세우는 과정에서 거란족에게 포로로 끌려가 사형당하였다고 하고 있다.

 

신천(信川) : 신앙이 넘치는 하천

신주(信州) : 신앙이 넘치는 도시

 

이 강(康)씨가 바로 사마라칸트 강(康)씨이다.

 

신천(信川)은 단군시대의 당장경(唐藏京, 황해도 구월산 밑에 단군의 네 아들이 도읍을 정했던 곳)이라고 한다. 신천(信川), 신주(信州)는 사마라칸트이다.

강국(康國)이라 하여 그 곳에서 강씨의 나라(Kangxi Emperor) 강희제가 후일 탄생한다.

바로 청조선 헌, 숙종이다.

 

제2차 고려-거란 전쟁

 

1010년(현종 1년) 11월 요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략해 왔다. 당시, 고려는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이 불륜관계를 맺고, 목종을 대신하여 그 사이에 나온 아들을 왕으로 잇게 하려하자 강조(康兆)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세력을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했으며 강제 출가한 대량원군을 현종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요나라는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고려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제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거란의 실제적인 의도는 송나라와의 교류를 완전히 차단하여 고려와 거란간의 관계를 재차 확인시키고,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 데 있었다.

 

거란군은 먼저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성주 양규(楊規)의 항전으로 함락하지 못하였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通州)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고 요 성종은 강조를 사로잡아 죽였다.

 

거란은 이어 곽주, 안주 등의 성을 빼앗고,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다시 항복론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거세졌으나 강감찬(姜邯贊)의 반대로 현종은 나주(羅州)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개경의 함락에만 서둘러 흥화진, 구주, 통주, 서경 등을 그대로 두고 내려왔기 때문에 병참선이 차단되었다. 이에 요는 고려가 하공진(河拱辰)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현종이 친조(親朝)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회군가다가 구주 등에서 양규와 김숙흥(金叔興) 등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양규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셀주크제국(Great Seljuq Empire, 1037–1194)

 

 

11세기경부터 14세기까지 중앙아시아와 중동 일대를 다스린 수니파 무슬림 왕조를 말한다.

제1차 십자군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10세기경 셀주크(Seljuk, Seldjuk, Seldjuq, Seljuq)라는 수장이 지휘하는 유목민의 일단이 볼가강(Volga River)을 넘어 흑해연안의 스텝지역으로 건너왔다. 셀주크 가문은 오구즈 튀르크멘 부족이 그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곧 남하하여 이란 북부에서 이슬람 수니파로 개종하였다.

이후 페르시아의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여 페르시아에 동화되었으며 처음에는 페르시아 왕조의 용병으로 있었으나 점차 세력을 확대하였다.

 

셀주크인들은 처음에 사만 왕조(Samani dynasty, 819-999)와 동맹을 맺고 카라한 왕조(Karakhanids or Ilek Khanid: 黑汗,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왕조. 카라칸, 일레크칸 왕조, 기원은 불분명, 840-1212), 가즈나 왕조(Ghaznavids, 호라산, 아프가니스탄 및 인도 북부 지역에 수립되었던 투르크 왕조, 975-1187)와 맞서 싸웠으나 사만 왕조가 권력투쟁에서 패하자 스스로 독립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을 벌였다.

 

셀주크의 손자인 차그리 베그와 투으룰 1세(Tughril, 993-1063, 재위1038-1063)는 가즈나 왕조의 마무드 지원을 받았으나 1037년 가즈니를 공격하여 자신들만의 왕국을 세웠다. 1055년 토그릴은 부와이 왕조에게서 승리하여 바그다드를 정복했기 때문에 셀주크는 수니파 칼리프 주도하에 이슬람의 통일을 회복시킨 존재로 여겨졌다. 1063년 차그리가 토그릴은 이란 서부와 메소포타미아를 포괄하는 제국의 수장이 되었다.

 

차그리 베이의 아들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 1029-1072)때에 이르러 셀주크의 세력을 더욱 강대해져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시리아 지역까지 세력권을 확대했으며 1064년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를 복속하였고 1068년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아나톨리아(Anatolia)를 침공하였다. 1071년 알프 아르슬란은 만지케르트 전투(Battle of Manzikert,1071.8.26)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대군을 섬멸하고 비잔티움 황제 로마누스 4세 디오게네스(Romanos IV Diogenes,재위:1068-1071)를 포로로 붙잡았다. 이로써 셀주크인들은 소아시아로 진출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알프 아르슬란의 뒤를 이은 말리크 샤 1세(Melik sah I, 1072-1092)에는 제국의 영토가 더욱 확장 되었다. 이슬람의 침입이전 이란의 영토이었던 지역의 대부분을 복속하였는데 동쪽으로는 중국과 서쪽으로는 비잔티움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그는 제국의 수도를 라이에서 이스파한(Isfahan, 테헤란 남방 420㎞ 이란 고원 위의 교통의 요지)으로 옮기고 바그다드에 학교를 세우고 군대제도를 개선하였다. 그의 치세에 셀주크 제국은 전성기를 이루어 1087년 아바스 왕조(Abbasid Caliphate, 750-1258)의 칼리프로 부터 "동방과 서방의 술탄"의 칭호를 얻었다.

 

당시 와지르 니잠 알물크(Nizam al-Mulk, 1018-1092)는 제국내 행정조직을 개편하여 이슬람 문화에 크나큰 유산을 남겼다. 일종의 이슬람의 신학 대학인 마드라사 조직이 형성되어 행정관료들과 신학자들에게 통일된 교육훈련을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니잠 알물크는 당시 세력을 키워가던 아사신(Assassins, 암살교단)에 의해 살해당했다.

 

제국의 분할과 십자군1092년 말리크 샤 1세(Melik sah I, 1072-1092)가 죽자 제국은 그의 형제와 네명의 아들들의 권력 투쟁으로 분할되었다. 소아시아는 룸 술탄국을 창설한 킬리지 아르슬란 1세(Kilij Arslan I,1080-1107, 재위1092-1107)에게 계승되었고 시리아는 말리크 샤의 형제인 투투스 1세에게 게승되었다가 다시 그의 아들들에 의해 분할 되었다. 페르시아는 그의 네 아들들의 투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한 셀주크의 분열을 틈타 1095년 군중 십자군과 1차 십자군이 침공해 왔다. 킬리지 아르슬란은 군중 십자군을 이겼으나 1차 십자군을 얕잡아보아 니케아에서 패배, 십자군은 니케아, 안티오키아(Antioch), 예루살렘을 차례로 정복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비록한 기독교 국가를 세웠다.

 

1118년 말리크의 셋째 아들인 아흐메드 산자르가 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했으나 바그다드에서는 그의 형 마무드 2세가 스스로 술탄을 차처하였다. 1131년 아흐메드 산자르는 형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으나 여전히 불안정하였다. 아흐메드 산자르는 각지에서 일어난 카라한(Kara-Khanid Khanate, 840-1212,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왕조)과 반란에 대처하여야 했고 제2차 십자군의 침입에도 맞서야 했다.

 

1153년 오구즈 튀르크가 반란을 일으켰고 산자르는 축출되었다. 이후 그의 계승자들이 셀주크를 다시 통합하려고 하였으나 십자군 국가들과 비잔티움의 공세로 인해 번번이 실패했다. 3년 후인 1157년, 산자르가 죽자 제국의 분열을 더욱 가속되었고 아타베그들은 독립했다.

 

제국의 몰락1194년 이란의 마지막 셀주크 술탄이 전사하고 1200년경 셀주크족의 권력은 아나톨리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끝났다. 이후 이집트와 시리아의 위대한 술탄 살라딘Saladin(재위: 1174-1193)의 지도 아래 시리아가 셀주크의 세력하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루지아도 아르메니아와 함께 셀주크의 영향력을 벗어났다. 바그다드의 압아바스 칼리프도 점차 힘을 키워서 독립해 버렸고 결국 예전 셀주크 제국에서 남아있는 곳은 소아시아의 룸 술탄국과 주변뿐이었다.

 

13세기에 이르러 셀주크는 더욱 몰락하여 결국 몽골제국이 아나톨리아를 침입했을 때 완전히 세력을 상실하고, 몇몇 에미레이트로 분할되었다. 그중에 하나인 오스만 튀르크(Ottoman Empire, 1299년~1326년)가 나중에 다시 대 제국을 세우게 된다.[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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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주크 왕 계보

 

1.투으룰 1세 (Tugrul Beg, 1037-1063)

2.알프 아르슬란 (Alp Arslan, 1063-1072)

3.말리크 샤 1세 (Melik sah I, 1072-1092)

4.마흐무드 1세 (Mahmud, 1092-1094)

5.바르키야루크 (Barkiyaruq, 1094-1105)

6.말리크 샤 2세 (Melik sah II, 1105)

7.무함마드 타파르 (Mehmed, 1105-1118)

8.아흐메드 산자르 (Ahmed Sanjar, 1118-1157)

 

고려 왕 계보

 

 

위는 셀주크 술탄 계보이고

아래는 고려왕 계보중 셀주크 계보와 연계되는 두 왕의 내역을 잘라내어 표시한 것이다.

물론 다른 계보상에는 숫자가 일치하는 것은 없다.

각색하는 마당에 들통날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면 오히려 당연하다 할 일이다.

그러나 그들도 신이 아닌 이상 실수하거나 자료를 놓쳐 흘렸을 수 있는 가정이 필요하다.

그러한 과정에서 흘린 자료치고는 매우 가치가 있는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셀주크 4대 술탄 마흐무드1세가 1092-1094 까지 라 하여 불과 2년 재위기간을 표시하고 있으며

고려 14대 왕 헌종 역시 1094-1095 년도도 같고 재위기간도 1년이라 하여 똑 같다 해도 이상하다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는 같은 왕을 하나는 셀주크 술탄으로 하나는 고려왕으로 표기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셀주크 5대 술탄 바르키야루크 역시 1094-1105 표시하여 고려 15대 왕 숙종 재위기간 1095-1105가 그림처럼 맞아 떨어진다.

어떻게 유라시아 왕과 한반도 고려 왕이 같은 년도 같은 재위기간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두 왕 모두가 꿰 맞춘 것처럼 이렇게 일치 할 수 있는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위 언급한 사실처럼 같은 나라의 왕을 하나는 셀주크 술탄으로 하나는 고려왕으로 표기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고려와 셀주크는 같다라고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도 부정할 사람은 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나타나는 근거는 우리의 역사를 밝히고 찾는데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이러한 흔적조차도 무시하면 어떤 자료가 우리에게 있어 역사 찾기를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이 만한 근거조차도 찾을 수 있는 자료가 흔하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고려와 셀주크는 같은 나라라고 결론을 내려도 무방할 것 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여기에서 만족 할 수 없다.

이를 뒤받침 할 수 있는 이러한 자료와 비슷한 것을 찾아 다시 밝혀야 할 것이라고 본다.

만약 이와 비슷하거나 똑 같은 상황을 다시 찾게 된다면 그땐 믿어야 할 것이다.

 

아래 셀주크 두왕 영어원문과 우리나라 고려 두 왕의 한글자료를 비교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상하게 같은 사건 일 듯한 문구가 공히 보인다.

 

4. 마흐무드 1세 (Mahmud, 1092-1094)

 

Nasir ad-Din Mahmud I was the sultan of Great Seljuq from 1092 to 1094.

He succeeded Malik Shah I as Sultan, but he did not gain control of the empire built by Malik Shah, and Alp Arslan.

 

Following Malik death, successor states split from the Great Seljuq.

In Anatolia Malik was succeeded by Kilij Arslan I, and in Syria by Mahmud's uncle Tutush. The disunity within the Seljuq realms allowed for the unexpected success of the First Crusade shortly afterwards, beginning in 1096.

Although a short term, Nasir ad-Din Mahmud I ruled with an iron fist.

 

14. 헌종(獻宗, 1094-1095)

 

1094년, 승하한 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지만 나이가 어리고 소갈증으로 매우 병약하여 어머니인 사숙태후가 수렴청정 하였다. 1년 뒤인 1095년에 이자의(李資義)가 한산후 균을 옹립하려고 했으나 숙부인 계림공 왕희(후의 고려 숙종)가 이를 미리 알고 장사 고의화를 시켜 살해했다. 이후 왕희에게 선위하고, 2년 후인 1097년 1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능은 온릉(溫陵)이나 현재 위치는 알 수 없고 개성 동쪽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바르키야루크 (Barkiyaruq, 1094-1105)

 

He was a son of Malik Shah I and participated in the succession wars against his three brothers, Mahmud I, Ahmed Sanjar, and Mehmed I.

 

Barkiyaruq ascended to the throne young, and his detractors thought him too inexperienced and accused him of being a drunkard. He waged war to regain control of the core Seljuk land, lands that are today part of Iraq and Iran. His land bordered Syria when Europeans armies arrived to fight in the First Crusade, but at the time his main concern was the rule on Mosul, Aleppo and Damascus, which were ruled in his name, but controlled by rivals.

 

In 1105, Barkiyaruq died in Borujerd. It has been reported that his body was returned to Isfahan. However, some people say[who?] his tomb is in 5 km north of Borujerd, where today is a historical monument called Zavvarian.

 

Tomb of Zavvarian (5 km north of Borujerd)

 

              Zavvarian-A monument from 1000 AD Seljukid era in 5km north of Borujerd.

 

정식 이름은 아부 알 무자파르 루큰 알 딘 바르키야루크 빈 말리크샤다.

중간의 바르키야루크란 터키어 베르크 야룩(Berk Yaruk)을 아랍어로 적은 것인데 그 의미는 강렬하게 빛나는 사람이다.

 

1092년부터 1105년까지 셀주크 제국의 술탄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단독으로 술탄이 되지는 못했다.

 

말리크샤 1세의 장남이다. 본래 그의 위에 형 두명이 더 있었으나,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기에 바르키야루크가 사실상의 장남이다. 하지만 말리크샤 1세의 사망시점에 13세에 불가했다.

말리크샤 1세가 죽자(1092) 그의 아내인 테르켄 하툰이 그녀의 아들인 마흐무드 1세(Mahmud)를 술탄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녀는 이를 위해 군대에 돈을 뿌리고, 남편에게 폐위당한 칼리프(Caliph)를 복위시켜 주었다. 그 결과 그녀는 마흐무드 1세를 술탄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란을 다스리던 관료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재상 니잠 알 물크(Nizam al-Mulk, 1018-1092)가 그랬듯이 장남이 제국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테르켄 하툰과 그의 측근들을 싫어했다. 그리하여 바르키야루크는 라이(Ray:이란)에서 술탄이 되었다.

그리고 곧 내전이 시작되었다.

1094년, 테르켄 하툰이 죽었다. 그에 따르듯 그녀의 아들 마흐무드 1세도 죽었다. 그리하여 바르키야루크는 단독 술탄이 되었으나, 내전은 끝나지 않았다.

삼촌들이 말썽이었다. 호라산의 아르슬란 아르군(Arslan Argun)과 다마스쿠스의 투투쉬 1세(Tutush I, 1079-1095)가 술탄을 거부했다. 투투쉬는 시리아의 군벌들을 규합해 디야르바크르(Diyarbakır)지역을 합병하고, 이란으로 진군했다. 바르키야루크와 투투쉬의 군대는 라이 근교에서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투투쉬는 죽었다.(1095)

이번에는 호라산의 아르슬란 아르군이 독자적인 왕조를 선포했다. 1097년, 바르키야루크(Barkiyaruq)는 그를 패퇴시켰다. 그 뒤에는 술레이만의 아들 무함마드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 역시 바르키야루크에 패배했다.

 

5년에 걸친 술탄 위 투쟁을 승리로 끝마친 그는 영지를 다시 분배했다.

우선 동생들에게 삼촌들의 영지를 주었다.

호라산에는 아흐마드 산자르(Ahmad Sanjar, 재위1118–1153, 셀주크 마지막 술탄)를 보냈고, 무함마드 타파르(Muhammad I,재위1105–1118, 바르키야루크 다음 승계술탄)를 간자 지방(Ganja:보물, Abbasabad)영주로 임명했다. 시리아에는 투투쉬의 아들들이 지배하게 놔두었고, 소아시아의 룸 셀주크 클르츠 아르슬란 1세(Kilij Arslan I, 1080-1107:1092-1107)의 위치를 부정하지도 않았다.

이라크와 자지라(Jazira)의 공국들도 대체로 아버지의 분배를 따랐다.

이러는 사이에 십자군이 침공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1097년, 간자(Ganja)의 영주 무함마드 타파르(Muhammad I,재위1105–1118)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동생 호라산의 아흐마드 산자르(Ahmad Sanjar, 재위1118–1153)도 호응했다. 아흐마드 산자르는 무함마드 타파르에게 al-Sulṭān al-Mu'aẓẓam(우월한 술탄)라는 칭호까지 바쳤다. 또, 자지라와 이라크의 공국들도 타파르에게 갔다. 제국의 반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1099년, 타파르는 칼리프의 인정까지 받아냈다. 곧 바르키야루크의 지지기반이던 관료들도 그를 떠났다

바르키야루크의 남은 치세에는 끝없는 전쟁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전쟁을 치뤘다. 무함마드가 이란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반항하는 튀르크 아미르(Amir)들을 토벌했다. 얼마나 혼란스러웠냐하면, 1101년까지 바그다드는 주인이 8번 가량 바꼈다.

 

이러다보니 군대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찮았다. 그래서 그는 개인재산을 몰수하여 이크타(iqta:封土制度)로 사용하거나, 심지어는 시아파(Shia Islam)를 군대에 편입시키기도 하였다.

 

1104년, 전쟁에 지치고 병마에 시달리던 바르키야루크는 무함마드에 비해 훨씬 유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와 타협했다. 타파르는 디야르바키르, 아제르바이잔, 알 자지라 지역에서 술탄에 버금가는 권위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산자르는 사실상의 독립적인 군주였다.

 

1105년, 바르키야루크는 25번째 생일을 맞기 며칠 전에 보루제르드(Borujerd)에서 죽었다.

그의 시신이 이스파한(Isfahan)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있고, 보루제르드에서 북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묻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때에도 무함마드와 전쟁 중이였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평가)당대의 역사가들의 평가는 좋지 않다. 대다수는 그가 경험 없는 지도자인데다 알코올 중독자라고 적었다. 게다가 시아파(Shia Islam)라는 음해까지 당했다.

시아파라는 공격은 그와 인연이 특히깊다. 테르켄 하툰과 싸울 때부터 그를 따라다니던 이 공격은 죽을때까지 함께했다. 동생들은 물론이고 칼리프도 이에 대해 비난을 보냈다. 이 비난은 그가 재정 문제로 인해 이스마일파(Ismailism. 이슬람교 시아파의 한 분파)를 군대에 편입시킨 뒤에 더 늘었다. 다만 그의 재상도 그런 오해를 받은 점을 보면 아무래도 당대의 주요한 공격 수단이였던 듯 싶다.

어쨋든 실제로 그가 시아파였다거나, 시아파에 동정적이였다는 증거는 없다.

 

또, 그는 평생 아버지와 비교 당했다. 모두가 그를 아버지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 했다고 평가했다.

이런 평가도 나올만 한 것이 바르키야루크의 지배 영역은 이란에 지나지 않았다.

이 영토는 사실상 할아버지인 알프 아르슬란 시절의 영토이다.

 

다만 말리크샤 1세 역시 17살에 술탄이 되었으나, 35살이 되서야 우리가 아는 셀주크 제국의 영토 대부분에서 술탄으로 인정받았음을 생각하면 이 평가도 너무 박한듯 하다.

죽기 직전에 그는 무함마드 타파르보다 일단은 유리했다는 점을 기억하자.[엔하위키]

 

15.숙종(肅宗, 1095-1105)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과단성이 있고 오경(五經), 제자서(諸子書), 사서(史書) 등에 해박하였다. 문종의 큰 기대를 받아 "뒷날에 왕실을 부흥시킬 자는 너다." 라고 하여 문종 때 계림공에 책봉되었는데 친조카인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1년 만에 왕위를 찬탈하여 1095년에 즉위하였다.

 

1096년, 6촌 이내의 혼인을 금하였고 1097년에는 주전관(鑄錢官)을 두고 주화를 만들어 통용하게 하였으며 1101년에는 본국의 지형을 본떠서 은병(闊口)을 주조하였고 이듬해에는 고주법(鼓鑄法)을 제정하여 해동통보(海東通寶) 1만5000관을 만들어 문무백관과 군인들에게 분배하였다.

 

어떤 전쟁에 쓰일 재정을 만들기 위해 돈을 찍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099년 김위제(金謂磾)의 주장에 따라 남경을 중시하고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두어 궁궐을 조성하였으며 1102년에 예부에서 "우리나라가 예의로 교화하기는 기자(箕子)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원컨대 그 분묘를 찾고, 사당을 세워 제사하십시오." 라고 숙종에게 아뢰자 숙종은 서경에 기자사(箕子祠)를 세웠다.

 

1103년 동여진의 추장 영가(盈歌)가 사신을 보내어 내조하였으나 추장이 되면서 고려에 침입하였다. 같은해 2월에 임간(林幹)이 정주에서 패하였고, 3월에는 윤관(尹瓘)이 여진정벌을 계획하였지만 역시 이기지 못하고 화약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이에 따라 윤관의 주장으로 별무반(別武班)을 처음 설치하였다.

 

간자(Ganja)의 영주 무함마드 타파르(Muhammad I,재위1105–1118)와 상대한 이야기 같다.

 

윤관은 “신이 여진에게 패한 것은 저들은 기병이고, 우리는 보병이므로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아뢰니 드디어 기병으로 구성된 신기군(神騎軍),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神步軍)과 승도(僧徒)들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을 두어 별무반이라 칭하고 여진정벌을 준비하게 하였다.

 

1105년 서경에 순행하여 동명왕묘(東明王廟)에 제사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병이 들어 개경으로 돌아오다가 서경에서 승하하였다. 능은 경기도 장단군에 있는 영릉(英陵)이다.

 

"1105년, 바르키야루크는 25번째 생일을 맞기 며칠 전에 보루제르드(Borujerd)에서 죽었다. 그의 시신이 이스파한(Isfahan)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있고, 보루제르드에서 북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묻혔다는 이야기도 있다" 는 것과 이상하게 문맥 정황이 맞아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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