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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독감과 역사 재해석
글쓴이:한부울
1. 개요
2. 스페인독감이란
3. 1차세계대전과 중앙동맹국(中央同盟國)
4. 감염과 각국의 인명손실
5. 총독부자료가 말하는 조선 무오년독감(戊午年 毒感)
6. 스페인 독감과 세계삼한역사
7. 100년만에 찾아온 불청객
8. 정리
1.개요
독감을 뜻하는 인플루엔자(influenza)라는 단어는 18세기 중반 이탈리아에서 발병한 독감을 칭하는 말 인플루엔시아 디 프레도(Influenza di freddo), 추위의 영향(influence of the cold)이란데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진다.
In other words, wherever there is winter, there is flu. In fact, even its name, “influenza” may be a reference to its original Italian name, influenza di freddo, meaning “influence of the cold”
즉 겨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독감이 있다는 뜻이다.
겨울에 독감이 발병하는 이유에 대한 가장 적합한 이론은 다음과 같다.
1) 겨울에는 창문을 봉한 채 실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 독감에 걸린 사람과 같은 공기를 마시게 되어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쉽다.
2) 겨울에는 낮이 짧아지고, 햇빛의 부족은 비타민D와 멜라토닌(melatonin)의 수치가 낮아지는데, 둘 다 생성을 위해 햇빛이 필요하며 이것들은 우리의 면역 체계를 손상시키고, 차례로 바이러스와 싸우는 능력을 감소시킨다.
3)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더 춥고 건조한 기후에서 더 잘 살아남아서 더 많은 사람들을 감염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2007년경, 피터 팔레스(Peter Palese)박사라는 한 연구원이 1918년 독감 대유행 이후 출판된 오래된 논문에서 특이한 논평을 발견했는데, 1919년 논문의 저자는 플루 바이러스(flu virus)가 뉴멕시코의 캠프 코디(Camp Cody)로 도착하자 실험실의 기니피그(guinea pigs)들이 병에 걸려 죽기 시작했다고 서술했다.
연구원 팔레스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몇몇 기니피그들에게 독감을 감염시키려 했고, 확실히 기니피그들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기니피그들이 팔레스에 의해 접종되었을 때 독감 증상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이 바이러스는 한 기니피그에서 다른 기니피그로 전염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어 독감이 따뜻하고 습한 기후보다 춥고 건조한 기후에서 더 잘 전염되는지 여부를 시험하기로 결정하고 기니피그를 온도(41°F, 68°F, 86°F)와 습도(20%-80%)에 따라 다르게 유지되게 만들었다. 팔레세는 이 바이러스가 고온과 고습보다 저온과 저습에서 더 잘 전염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림 1 참조).[Hannah Foster:PhD candidate Harvard University]
그림 1 - 실험 설정 기니피그는 이웃한 상자에 수용되었다. 상자(1)에 있는 기니피그는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었다. 펠레스는 상자(2)에 있는 얼마나 많은 기니피그들이 다른 온도와 습도 수준에서 상자(1)에 있는 기니피그로부터 감염되는지를 관찰했다. B, C) 온도에 관계없이 낮은 습도에서 100% 전송속도였다. 높은 습도에서는 낮은 온도에서만 매개가 발생하였다.
이 연구의 결과는 인플루엔자가 실제로 낮은 습도와 낮은 온도에서 더 오래 생존한다는 것을 암시했고 습도가 매우 낮은 43°F에서는 대부분의 바이러스가 23시간 이상 생존할 수 있었던 반면, 높은 습도와 90°F의 온도에서는 1시간 만에 생존 배양이 감소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2. 스페인독감이란
아틀라스뉴스(http://www.atlasnews.co.kr)에 의하면 1918년 발생한 스페인 독감(Spanish flu)은 1918년 1월부터 1920년 12월까지 약 3년간 지속되면서 당시 세계 인구 18억~19억명의 4분의 1정도, 27% 해당하는 약 5억 명의 감염자가 발생했고 사망자 수는 5,000만 명, 어쩌면 1억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어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는 유럽대륙은 물론 미국, 일본, 인도, 중국을 거쳐 남태평양 군도, 북극에도 번졌다고 하고 있으며 20세기 최초이자 최대의 팬데믹(pandemic)이었다고 적고 있다.
네이버지식백과에 따르면 인플루엔자 범유행은 조류독감(AI) 바이러스가 인체 내에서 '대변이'를 일으켜 호흡기 전염병을 유행시키는 현상을 말하며 팬데믹의 어원은 그리스어 'pan(모두)+demic(사람)'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한번 감염되면 전 세계로 전파되어 모두가 사망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바이러스 A형(Influenza A virus subtype, H1N1)의 대변이는 바이러스가 자연 숙주인 조류로부터 직접 인체로 침입해 적응한 후 변이를 일으키는 예와 제3의 숙주를 통해 유전자 재배열 과정을 거쳐 인체로 침입하는 경우을 말하며 바로 제3의 숙주를 통해 유전자 변이를 통해 나타나는 바이러스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것이 되는데 1918년에 세계적으로 유행하여 5,000만명을 사망케했던 '스페인독감'도 조류독감의 일종이며 인플루엔자 A형 H1N1 아형(subtype)이라는 병원체로 밝혀졌다고 설명된다.
스페인독감의 기원에 있어서는 이견이 많으나 1차세계대전이 마무리되던 시점에서 병사들이 귀향하기 위해 모여있던 캠프에서 발병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고 "3일 열병"이란 이름처럼 짧은 증상기간 이후 단순한 감기 증상을 가지고 귀향한 병사들이 각지에 전파함에 따라 유례없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의 인기 작가이며 역사가인 존 엠 베리(John M. Barry)는 2004년 보고서에서 1918년 1월 캔자스 주 하스켈 카운티(Haskell County, Kansas)에서 처음 스페인독감이 발병했다고 말했다.
그해 3월 11일에 미국 뉴욕주의 뉴욕시에 속한 자치구 퀸즈(Queens)에서도 환자가 생기고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3월과 4월까지 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해 나중에 비난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처음 하스켈카운티 지역 의사 로링 마이너(Loring Miner)가 미국 공중보건청의 학술지에 이를 경고하였으며 1918년 3월 4일, 하스켈 카운티의 요리사 알버트 기첼(Albert Gitchell)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군들을 훈련시키고 있던 미군 시설인 포트 라일리(Fort Riley)에서 병가를 낸 것은 이 병에 노출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고 이후 며칠 만에 이 캠프에 있던 522명의 병사가 병에 걸린 것으로 보고되었다고 자료는 말하고 있다.
오마이뉴스자료에는 미국 캔자스주(Kansas州)에 위치한 외딴 농장에서 시작되었다 하고 농장에 살던 앨버트 기첼은 스페인독감에 감염된 후 미 육군에 징집되었고 많은 신병으로 붐비던 캔자스 퍽스톤 기지에 입소한 앨버트 기첼은 취사병으로 근무하게 되었으며 1918년 3월 4일, 엘버트 기첼은 열과 두통을 호소하며 의무실을 찾게 되면서 곧 기지를 휩쓸면서 3주도 안 되어 1100명이 중태에 빠졌고 38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쓰고 있으며 1918년 3월 수송선 25척이 미군 병력을 싣고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향했고 병사들의 감염상태에서 1918년 4월 미군이 프랑스에 상륙하였고 전장엔 독감이 발발하기 시작했으며 2천만 명이 감염되고 2만 명이 사망함으로써 결국 유럽전역으로 퍼졌다고 하고 있다.
이 시기에 프랑스의 에타플스(Étaples)에 있는 주요 영국군 주둔지와 병원 캠프는 스페인 독감의 중심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3월 11일에 발생한 독감은 미 전역으로 퍼져나가 1주일 뒤 조지아주의 군부대에서는 2만8500여명의 군인 가운데 2900여명이 독감 증세를 보인 것으로 보고되었으며 4월 하순에는 필라델피아 시민 1000명 중 158명이, 볼티모어 시민 1000명 중 148명이 같은 증세를 보였고 그 무렵 독감은 이미 대서양을 건너 1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유럽의 서부전선까지 휩쓸고 있었다고 하였으나 새로운 연구는 이 질병이 프랑스 북서부 에타플스(Etaples)와 잉글랜드의 올더숏(Aldershot)의 영국군 기지(British army bases)에서 발생했다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위 기사가 말하는 퍽스톤이란 지명은 없다.
아마도 포트 라일리(Fort Riley)에 있었던 펀스톤 켐프(Camp Funston)가 아닌가 한다.
포트 라일리는 1887년에 미국기병학교(US Cavalry School)의 부지가 되었고 "버팔로 병사(Buffalo Soldiers)"라고 불렸던 유명한 검은 9기병대와 10기병대(all-black 9th and 10th Cavalry Regiments)는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여러 번 포트 라일리(Fort Riley)에 주둔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이 요새에는 5만 명의 병사가 주둔하였고, 1918년 스페인독감 대유행의 발병지점으로 확인되어 요새병사들이 전 세계에 퍼뜨렸다고 설명된다.
고병원성으로 발전한 것은 1918년 8월 유럽 전선에 투입된 79만명의 미군이 도착한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ittany)의 항구 도시 브레스트(Brest), 유럽에서 석탄을 실은 증기선이 기항하는 석탄보급지 서(西)아프리카 시에라리온(Sierra Leone)의 수도 프리타운(Freetown), 그리고 전쟁물자를 취급하는 많은 회사들로 넘쳐나는 곳 매사추세츠주(Massachusetts)의 보스턴(Boston)에서 더 치명적인 변종이 동시에 나타났으며 이 스페인 독감은 아일랜드(Ireland)전역에도 퍼졌고 아일랜드 군인들을 돌려보냄으로써 전염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프리타운에서만 1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브레스토에서는 8월 22일부터 9월 15일까지 1350명의 군인이 입원해 370명이 숨졌으며 보스턴은 1개월간 시 전체 인구의 10%가 감염되어 이 중 60~70%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1918년 9월부터는 뉴욕(New York)과 필라델피아(Philadelphia)를 거친 독감이 철로를 따라 미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미 인구의 28%가 감염되었고 67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때문에 미국인의 평균수명이 10년이나 낮아졌다는 기록도 있으며 교회와 극장은 폐쇄되었고 야외에서 야구경기를 치를 때는 마스크를 착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연합군(The Allies of World War I)이 그것을 스페인 독감(Spanish flu)이라고 명칭한 것은 이 전염병이 1918년 11월에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옮겨간 후 스페인언론의 더 큰 관심을 받았지만 당시 스페인은 전쟁에 관여하지 않았고 또한 전시검열(wartime censorship)을 받지 않아 자유로웠다는 이유때문이다.
It was nicknamed ‘Spanish flu’ as the first reported cases were in Spain.
이와같이 처음 보고된 사례가 스페인에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독감'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제1차 세계 대전 중이었기 때문에 당사국의 신문들은 사기를 떨어뜨릴지도 모르는 뉴스에 언론 정전으로 검열당했고 그래서 다른 곳에서도 인플루엔자 환자가 발생했지만, 대서특필된 것은 스페인이었다는 사실과 첫 번째 감염자 중 하나가 스페인 국왕이었다는 사실은 상징성을 더 한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좀 더 추궁해볼 문제이다.
3. 1차 세계대전과 중앙동맹국(中央同盟國)
스페인독감이 1차세계대전 막바지인 1918년 1월부터 발병이 확인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하였는데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동원된 유럽군 6,000만 명 중 800만 명이 전사하고 700만 명이 영구장애인, 1500만 명이 중상을 입었다 했으며 독일은 남성 활동 인구의 15.1%를 잃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7.1%를 잃었으며, 프랑스는 10.5%를 잃었다고 나타난다.
합해보면 사상자만 하더라도 3,000만명 즉 유럽군전체의 반이다.
이 전쟁기간동안 기근과 다른 질병등으로 수많은 민간인도 사망했다고 알려진다.
전쟁기간이기 때문에 독일에서는 민간인의 사망률이 평시보다 47만4000명 높았다는 것은 대부분 식량 부족과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화된 영양실조 때문이며 그것에 비근한 예로 전쟁이 끝날 무렵, 기근으로 인한 기아로 인구40만명인 중동 레바논(Lebanon)에서 약 10~20만 명이 사망했다고 알려진다.
이란(Iran)의 시골지역과 도시지역 모두에서, 페르시아 국가가 910,400명에서 2,431,000명의 주민들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스페인 독감 사망률표에 그 당시 전체 인구(1,129만)의 8%에서 21.7%사이로 사망률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 이후 소련정부(蘇聯:Soviet Union)가 들어설 시즘인 1921년에는 러시아기근으로 5백만에서 1천만 명이 죽었다고 알려진다.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 10월 혁명과 그 뒤를 이은 러시아 내전(1917.11~1922.10)으로 민간인 및 비전투원을 포함한 총 사상자 700만명–1,200만명이고 사회적 혼란과 광범위한 폭력이 있었고 1921~1923년 일련의 기근은 약 1,600만 명의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고 500만 명까지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산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있는 구 러시아제국 내에서 2,000건 이상의 집단학살(集團虐殺),제노사이드 (genocide)가 발생하여 약 60,000~200,000명의 민간 유대인들이 살해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또한 1915년에서 1926년 사이에 깊은 잠에 빠지게 하는 무기력성뇌염 또는 기면성뇌염(encephalitis lethargica)의 전염병이 거의 5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되어 있다.
인류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변곡의 흐름은 끝없이 역류하였으며 이로인해 1914년부터 1920년까지 실로 인류가 어마어마하게 희생당한 것이다.
다 아시다시피 1차 세계대전(World War I, WWI)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일어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 대전이다.
미국은 전쟁 중 영국과 독일 간에서 중립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가 1917년 1월 16일, 독일 외무 장관 아서 치머만(Arthur Zimmermann)이 멕시코 주재 독일 제국 대사 하인리히 폰 에카르트(Heinrich von Eckardt)에게 보냈던 암호 전문 치머만 전보에서 독일이 미국과의 중립 유지가 불가능하다면 멕시코와 동맹을 맺으라는 지시가 담겨 있었다. 멕시코에게 함께 일본을 동맹에 끌어들여 미국을 공격하자는 제안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 대가로 재정적 지원과 함께 미국에 빼앗겼던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를 되돌려 주겠다는 내용때문에 미국은 참전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는 미국 영토에 대한 독일의 공격에 한한다는 내용으로 1917년 4월 6일에 제의하여 하원 결의안 373:50, 상원 82:6으로 승인되었고 12월 6일에는 오스트리아에도 선전 포고를 하여, 그 범위가 이탈리아 전선까지 확대되었다.
즉 미국은 독일이 미국영토을 공격하는 것을 전제로 참전한다는 말이다.
위 치머만의 암호전문만 보더라도 독일과 멕시코, 일본은 영토를 맞대고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가 있다.
멕시코 대통령이 일본을 설득할 수 있거나 일본은 멕시코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일본은 멕시코와 같은 영토에 있었던지 명확하지 않지만 멕시코와 국경을 적어도 맞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독일이 멕시코에게 잃어버린 영토,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를 탈환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곳이 일본영역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당시 자료들을 보면 텍사스주에 지주 일본인들이 많아 유럽계 이민자들과 충돌이 잦았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1차세계대전의 동맹국이었던 독일과 헝가리오스트리아, 오스만제국, 불가리아왕국이 러시아제국으로부터 서쪽, 영국·프랑스의 동쪽에 있었다고 하여 중앙동맹국(中央同盟國)이라 칭 한 것에서 유럽대륙에서 지리적 형태를 보면 현재 오스만제국을 중앙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가 있어 그것에 대한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러나 국역승정원일기 고종 30년 계사(1893) 기록에 인도(印度:India)와 터키(Turkey)사이에 합스부르크왕가(House of Habsburg)의 오스트리아가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터키는 오스만제국이다.
또한 순조32년(1832)11월25일 부 영길이국표기(附英吉利國漂船記)에 영길이국 선원이 지나온 길에서 “작은 나라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큰 나라로 하나는 법란(法蘭:프랑스), 둘은 품송(品松:프로이센), 셋은 아라사(鵝羅斯:러시아), 넷은 오지리아(奧地里亞:오스트리아)을 거쳐 왔습니다”라고 한 사실을 참고 해야만 한다.
독일제국이 프로이센이다.
당시 동쪽에 있었다고 하는 러시아와 아라사가 같은 것일까?
아니다.
상기컨데 미국은 유럽전쟁 즉 삼한전통계보의 싸움이라고도 하는 1차세계대전 참전에서 종반기 1917년 4월 의회 제의하고 찬성을 얻어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시기적으로 러시아제국멸망과 정확하게 교차되는 것이다.
러시아 정부가 1917년 3월 붕괴된 이후 유럽동부전선이 해소되었는데 10월 혁명으로 인해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聯合國:Allied Powers)즉 협상국이 러시아 영토를 획득했다고 되어 있다.
즉 다시말해 미국이 러시아를 대신하여 대체하는 것과 같은시기, 동일한 지형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한반도 대한해협으로 역사바라보기 https://han0114.tistory.com/17050836"
에서 미국이 1차세계대전에 참여했고 러시아제국의 영토와 권한을 자연스럽게 인수한 것이라고 언급하였지만 참으로 놀라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유럽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아메리카대륙이어야 맞다.
그것은 합스부르크왕가의 오스트리아의 대공 막시밀리아노 1세(Maximiliano I,1832-1867,재위:1864-1867)가 멕시코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는 사실과 연결되고 라틴어 오스'aus'가 동쪽을 의미하듯 오스트리아는 유럽에 속할 국명이 아니라 태양이 떠오르는 위치 아메리카 동쪽에 존재하던 국가명이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프랑스 왕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의 왕실과 연결된다.
결국 1917년 미국의 개입으로 중앙동맹국(中央同盟國)들이 차례로 투항하고 9백만이 전사한 이 전쟁은 1918년 11월 11일에 끝이 맺게 된다.
중앙동맹국이라고 하는 것은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들이 중앙아메리카대륙에 귀속되어 아메리카대륙 전체로 보았을 때 중앙(中央)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17년 1월 16일 독일 외무 장관 아서 치머만(Arthur Zimmermann)암호전보로 독일이 멕시코를 끌어들이려 한 것은 멕시코와 일본을 동일하게 본 상황이며 러시아제국을 그대로 인수한 미국을 상대로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이와같은 1차세계대전 후 판도는 우리가 알기에는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다.
서양사 자료에 어디에도 조선이라는 명칭은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청조가 망한 후에도 이를 중국이라 하였고 조선은 이러한 중국 프레임에 모두 흡수되어버리고 만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공주가 어머니인 빌헬름2세가 독일제국(Deutsches Kaiserreich:1871-1918)의 황제가 되었다는 것은 빅토리아여왕의 계보를 잇기위한 싸움으로써 또 한번의 유럽패권싸움인 고려천자계보 쟁탈전이 벌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인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4. 감염과 각국의 인명손실
1918년 5월에는 영국, 스칸디나비아, 폴란드까지 덮쳤고 5월말부터는 인도를 초토화시켜 당시 인구의 5%나 되는 1700만명을 쓰러뜨렸다.
독감은 전선이든 후방이든 가리지 않았고 소문보다 더 빠르게 퍼져나갔다.
6월에는 카리브해의 푸에르토리코, 브라질, 남태평양의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가 감염이 되었고 극지방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독감의 증상은 감기에 걸린 듯한 증상을 보이다가 피로, 발열, 두통의 첫 증상을 느낀 지 몇 시간 만에 일부 피해자들은 급속도로 폐렴에 걸리고 환자의 피부에서 산소가 빠져나가면서 보랏빛으로 변해 산소 부족을 예고하며 질식해 죽을 때까지 공기를 마시기 위해 몸부림치곤 했다 한다.
전자에서 언급했듯이 처음 미국병사들이 머물던 캠프에서 기르던 식용 조류에서 발병했고 역시 신체적 특성이 인간과 매우 유사한 식용 돼지를 통해 돌연변이가 발생하여,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병사들에게 쉽게 감염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스페인독감은 대부분 젊은 성인들을 사망케 하였다.
1918년~1919년 미국에서 스페인독감 사망자의 99%가 65세 미만에서 발생했으며, 사망자의 절반 가까이가 20~40세 청년층에서 발생했다고 하였다.
스페인독감 마지막해인 1920년에 65세 미만 사망률은 65세 이상 사망률의 절반으로 6배 감소했지만 여전히 65세 미만 사망률의 92%까지 발생했다.
보통 인플루엔자는 일반적으로 2세 미만의 유아, 70세 이상의 성인, 면역이 약한 계층에게 가장 치명적이기 때문에 젊은 성인들의 사망률은 상당히 이례적이라 하는 것이다.
1918년, 노인들은 1889년부터 1890년까지 인플루엔자 A형 바이러스 아형 H2N2에 의한 즉 일찍이 러시아 독감(Russian Flu)으로 알려진 유행성 독감에 노출되어 부분적으로 보호를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유라시아대륙의 러시아와 아메리카대륙간의 지형적 거리문제가 있는 것을 감안할 때 현재지형과 지리적상황에서 그대로 수긍하기가 매우 힘든 이야기다.
때문에 러시아와 미국은 같은 영역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1889년부터 1890년까지 유행한 독감은 러시아독감이 아니라 미국독감이라 해야 맞다.
1918년~1920년 스페인독감 대유행의 세계 사망표[Global Mortality of the 1918–1920 Spanish Influenza Pandemic]에 의거한 각국의 피해상황을 한번보자.
[중국]먼저 위 사망표를 참고할 때 중국 전체인구 4억7200만명의 사망자가 400만명~950만명이며 사망률이 0.84~2%인 것은 결코 낮은 수치는 분명코 아니다.
그러나 다른 자료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중국의 피해상황을 깜깜이식 추정만 하고 있다.
추정치라 하는 것도 영국이 지배하는 중국 항만도시인 홍콩에서 발견된 낮은 사망률에 대비한 것이며 전체적으로 의사소통 불량으로 더 이상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어 중국 내부를 관통하는 독감을 어느정도 막았는지는 모두 가정에서 근거한 것이라 하고 있다.
일부 신문과 우체국 보고서와 선교사들의 보고는 독감이 실제로 중국내부를 관통했고 중국 농촌의 일부 지역에서는 독감이 심했다는 사실만을 알리고 있을 뿐이다.
중국은 1918년에 세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독감을 경험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그러나 당시 중국 내에서는 중앙집중화된 건강 통계 수집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과 일부 내부 보고서에서는 1918년에 적어도 몇몇 지역에서 스페인독감으로 인한 사망률이 꽤 높았을 것으로 추측하는 정도이다.
그러나 최소한 중국 전체가 세계 다른 나라에 비해 독감상황에서 심하게 걸렸다는 증거는 거의 없고 중국 내륙의 의료기록은 부족하지만 당시 영국령 홍콩과 광동, 북경, 하얼빈, 상하이 등 서양인들이 왕래가 심한 중국 항만도시에서 기록된 방대한 의료자료들을 비교하는 정도에서 비교적 낮은 수치를 말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자료들은 중국 내 영국, 프랑스, 기타 유럽 식민지의 한정된 관리들과 비중국계 외국인들에 의해 주로 운용되는 서양인들이 운영하던 세관에 의해 수집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중국의 항구 도시에서 나온 정확한 자료들은 아시아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낮은 사망률을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다.
홍콩과 광동의 영국 당국은 인플루엔자로 인한 사망률을 0.25%와 0.32%로 보고했으나 인플루엔자가 훨씬 더 파괴적이었던 인도 캘커타나 봄베이 같은 아시아의 다른 도시들의 사망률보다 훨씬 낮다는 것은 신빙성에서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적어도 지금의 지리형태에서 인도아대륙의 인도와 신중국대륙의 중국이 가깝게 인접해있다는 얼마든지 서로 상통할 수 있는 근접생활권이라고 할 때 적어도 인도 사망자 수치만큼 피해가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다.
때문에 한정된 정보에 의한 수치를 보면 1918년 20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지고 있던 상하이시에서도 1918년 인플루엔자로 인한 사망자는 266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중국 도시에서 기록된 방대한 자료에서 추론한다면, 1918년 중국 전체에서 독감으로 인한 제안된 사망률은 세계 평균(3~5%)보다 훨씬 낮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고 대신 중국 항만도시 홍콩의 사망률이 0.25%, 광동이 0.32%로 나타내고 있다.
인도(India)는 당시 인구 2억5,178만명에서 약 1,217만명이 사망했는데, 이는 인구의 약 5%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그러나 위 스페인독감 사망표는 인도인구를 3억569만명으로 기록하여 위 현재 글로벌통계 숫자보다 약 5,391만명이 더 많이 산정되어 있다.
인도 영국자치구(India's British-ruled districts)에서만 사망자 수가 1,388만 명이었다고 한다.
다른 자료에는 1차 세계대전의 모든 사상자보다 많은 1,700만에서 1,800만 명의 인도인이 사망했다고도 한다.
한동안 스페인 독감은 인도 내에서 ‘뭄바이(Mumbai) 폐렴’이라고 불렸다.
소설 '봄베이 열병(The Bombay Fever)'의 저자인 시딘 비두쿠트(Sidin Vidukut)는 1918년 6월에 들어온 스페인독감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군인과 민간인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인도인들이 사망했다고 썼다.
시사인자료를 참고하면 힌두교는 상대방의 카스트를 알 수 없다는 전제하에 최대한 개인 간 접촉을 기피하는 종교다. 때문에 자연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인도문화라고 한다.
그리고 인도 사람들은 손으로 밥을 먹는 대신 밥 먹기 전과 후의 손 씻기는 인도에서 상식에 속하고 아무리 게을러도 하루 7번은 손을 씻는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에도 사망률이 낮아만 했다.
그렇지만 결국 인도는 전체인구의 6%를 잃었다 하고 이것은 전체인구를 2억5천으로보면 1500만명, 3억569만명으로 보면 1800만명이다.
상대적으로 영양이 부족하고, 비위생적이고 통풍이 잘 되지 않는 주거지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이 크며 아픈 사람들을 간호하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많이 죽었다고 알려진다.
자료에 따르면 1918년 5월말부터 인도에 들어간 전염병은 1918년 7월 초까지 매일 230명이 이 병으로 사망했고 이는 6월 말보다 3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도 타임스는 "주요 증상은 높은 열과 등 통증이며 3일간 지속된다"고 보도한 것은 미국이 설명한 "3일 열병"과 일치하며 "붐바이(良港:Mumbai,Bombay)의 거의 모든 집에는 거주자들이 높은 열로 쓰러져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러시아는 1918년 인구가 9천만이었다.
여기서도 일단 미국을 동일선상에 넣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에 사망자 수는 45만 명으로 추산되지만, 이 수치를 제시한 역학자들은 이를 "암흑의 사격(shot in the dark)"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인용한 의미가 어두워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쏘는 것이기에 정확성에 대한 확신이 거의 없다는 것으로써 추측이나 추정에만 국한 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그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란 예상이지만 미국과 러시아의 통계가 만약 겹칠 위험이 있다면 통계수치를 나타내는데 학자들이 부담이 없었을까 하는 점이다.
스페인독감 대유행의 세계 사망표에는 러시아전체인구 1억8,100만명으로 수치되고 사망자가 45만명이며 사망률은 5(per1,000)이며 재통계수치는 0.24%이다.
인구만 하더라도 글로벌통계수치와 차이가 배(9,100만명)가 차이가나며 러시아에 대한 당시 사망자수를 정확하게 돌출해 낼 수 없었다는 역사상황을 우리가 짐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1917년은 러시아사회주의혁명이 두 차례 발생한 해이다.
1917년 3월 8일에 발생한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이 성공하면서 사회주의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세력은 수도인 페트로그라드(Saint Petersburg)를 장악하고, 소비에트라는 이름으로 집권하면서 결국 로마노프 왕조(House of Romanov:1613-1917)가 세운 러시아제국이 무너지고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Aleksandrovich Nikolai II,1868-1918,재위:1894-1918)는 폐위되었으며, 러시아 제국은 쌍방 1,300만명의 희생자를 만들며 내전을 통해 1920년 끝내 멸망했다.
그러나 또 다른 자료에는 러시아인구가 약 2,100명이 늘어난 상태의 인구(1억1,250만)로 산정하고이것의 약 0.4%를 잃었다고 하여 이는 유럽에서 가장 낮은 인플루엔자 관련 사망률을 보였다는 것으로 말해진다.
또 다른 연구자료에서는 러시아가 내전의 와중에서 일상 생활의 기반 시설들이 붕괴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수치는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이 연구자는 러시아의 사망자 수가 2%, 즉 270만 명에 가깝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미국에 비해서는 상당히 높은 수치이다.
다음은 우리와 직접적인 관계설정을 하고 있는 일본이다.
글로벌통계자료에는 당시 일본의 인구는 5,596만명으로 수치되고 2,300만 명(41%)이 감염피해를 입었으며, 최소 39만 명이 사망했다고 보고되었다는데 이는 인구의 0.69% 라 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1919년 7월까지 257,363명의 사망자가 인플루엔자에 기인하여 추정 사망률을 0.4%로, 데이터가 있는 거의 모든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훨씬 낮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위 스페인독감 대유행의 세계 사망표를 보면 전체인구 5,503만명의 사망자가 38만8천명이고 사망률은 0.67에서 0.7%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대유행이 발생했을 때 자국 섬으로의 해상여행을 심각하게 제한했던 결과라고 말한다.
미국은 어떤가.
미국은 인구 1억 320만명에서는 약 28%가 감염되었으니 2,889만명이고 50만~67만5000명이 사망하여 사망률이 인구 0.48~0.64% 또는 0.65 %라고 하고 있으며 스페인독감 대유행의 세계 사망표에서도 동일한 수치가 표시된다.
이 수치는 일본수치와 흡사하다.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Native American tribes)들은 특히 심한 타격을 받았다고 알려지며 포코너스 지역(Four Corners area)에서는 미국 원주민들 사이에서 등록된 사망자가 3,293명이었고 알래스카에서 이누이트(Inuit)와 알래스카 원주민(Alaskan Native)마을 전체가 죽었다고 알려지고 캐나다(Canada)에서는 5만 명이 죽었다고 기록된 것이다.
영국인구는 1918년 당시 3,828만명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절정을 이루면서 일련의 물결 속에서 영국을 강타했다.
전쟁이 끝나자 북부 프랑스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독감은 기차역에서 도시의 중심부로, 그리고 교외에서 시골로 퍼졌다.
영국인구의 4분의 1이 영향을 받았다 했으니 957만명이고 22만8000명이 사망했는데 인구의 0.59%이다.
반면 위 스페인독감 대유행의 세계 사망표에는 전체인구 3,402만명의 사망자 20만명 사망률은 0.49%~0.58%로 나타난다. 인구가 약 400만명 차이가 난다.
프랑스의 1918년 인구가 3,285만명이다.
40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인구의 1.2% 로 상당히 높은 수치이다.
프랑스에서는 역학 데이터가 불완전하지만 12만5000~25만 명의 민간인과 3만 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되어 있다.
스페인독감 대유행의 세계 사망표에는 전체인구 3,283만명에서 사망자가 24만명 사망률은 0.39%~0.73%까지 넓어진다.
프랑스가 미국사망률보다 많은 수치라 할 수 있다.
이 바이러스는 프랑스 서부 항구(western harbours of France)에 상륙한 미군과 인도차이나 군인(Indochina's troops), 그리고 프랑스 전선후방 공장에 고용된 중국인 노동자(Chinese workers hired in the French factories)들과 함께 미국에서 온 것으로 알려지고 당시 프랑스 서부전선의 끔찍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은 감염피해를 더욱 확산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1차세계대전 중 유럽대륙 프랑스에는 전쟁물자공장에 일하는 중국노동자가 상당수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러한 것들은 프랑스가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했다는 가정을 세울 수가 있다.
왜냐하면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 상류를 중심으로 특히 많은 중국인들이 존재했다는 자료가 존재하고 프랑스 역시 루이지애나(Louisiana)를 중심으로 존재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독일(Germany)은 글로벌인구통계수치에 1918년 당시 인구가 6,456만명으로 나타나며 러시아만큼 이상하게 스페인독감으로 인한 자료가 명확하지 않다는 국가 중에 하나이다.
이것은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가 없다.
물론 전쟁당사국이니 여러가지 문제가 있고 또한 패전국으로 처리되면서 모든 자료들이 숨겨지거나 폐기되는 형태를 맞이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스페인 독감으로 알려진 1918/19의 바이러스에 의한 피해는 약 320,000(0.49%)명에서 350,000(0.54%)명의 사망이 발생했을 것이란 추측이 있지만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통계가 정확한 수치가 아니며 1918년 여름과 가을의 이 병이 맹렬하게 유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제국의 붕괴와 비교했을 때, 그 전염병은 대중이나 군사 및 민간 당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으로 위에 제시된 스페인독감 대유행의 세계 사망표에 의거하면 전체인구가 5,845만명으로 나타나고 사망자는 22만명이며 또한 프러시아(Prussia)의 사망자 수가 23.6만명으로 나타나 독일 사망률은 0.37~0.38%이고 프러시아는 0.45%로 더 높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외 유럽전체 사망자가 230만명으로 나타나고 사망률은 0.48%로 수치된다.
특이하게 중동 이란(Iran)의 인구가 글로벌인구통계자료에는 1918년 1,129만명이다.
그런데 당시 다른 나라에 비해 사망률이 상당히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추정치에 따르면 902,400명에서 2,431,000명 사이라 하였다.
전체 인구(1,129만)의 8%에서 22%가 사망했다는 것인데 인도(6%)보다도 더 사망률이 높다.
멕시코(Mexico)는 스페인독감 대유행의 세계 사망표에 전체인구 1,455만명에 30만명이 사망했고 사망률은 2.3%~2.06%로 나타난다.
브라질은 1918년 인구가 2,627만명으로써 로드리게스 알베스(Rodrigues Alves,1848-1919,재위:1902-1906)대통령을 포함해 30만 명이 사망했다고 나타난다.
그러나 스페인독감 대유행의 세계 사망표에는 사망자가 18만명으로 사망률은 0.6~0.68%로 수치된다.
라틴아메리카(Latin America)의 총 사망자는 76만명~96만명으로 사망률은 0.84~1%로 스페인독감 대유행의 세계 사망표가 표식하고 있다.
아프리카(Africa)전체는 사망자 237만명의 사망률은 1.82%이다.
오세아니아(Oceania) 전체사망자는 8.5만명이고 사망률은 명확하지 않는 대신 서사모아는 전체인구 3.6만명에서 23.6% 사망률의 ,8500명이 사망했다.
전 세계에서 오직 한 지역만이 발병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바로 브라질의 아마존 강 삼각주에 위치한 마라죠(Marajo)라는 고립된 섬이이고 또 한 곳은 나폴레옹의 유배지 세인트 헬레나(Saint Helena)인데 감염상황에 대해선 알 수가 없다.
이 외 상당한 수의 나라가 피해를 보았지만 엄청난 사망자 수는 최대 50%의 감염률과 사이토킨 폭풍(cytokine storms)으로 의심되는 증상에서 60세 이상의 노인보다 젊은 사람들을 다수 사망케 했다는 사실을 서두에서 언급했다.
1918년 스페인독감의 증상은 특이하여 처음에는 뎅기(dengue), 콜레라(cholera), 장티푸스(typhoid)로 잘못 진단되었다 한다.
한 관찰자는 "가장 두드러진 합병증 중 하나는 점막, 특히 코, 위, 장에서 출혈이 있었다고 말하고 귀에서 피가 나고 피부에서 꽃잎 출혈도 발생했다"고 말했다.
사망자의 대다수는 인플루엔자와 관련된 흔한 2차 감염인 세균성 폐렴(bacterial pneumonia)에 의한 것이었다.
이 바이러스는 또한 폐에 대규모 출혈과 부종을 일으켜 사람들을 사망케 했다.
가장 심각한 영향을 받은 것은 1914년 뉴질랜드에 의해 점령되었던 이전의 독일령 사모아인 서부 사모아였다. 인구의 90%가 감염되었고; 성인 남성의 30%, 성인 여성의 22%, 어린이 10%가 사망했다고 나타난다.
심지어 사망률이 낮은 지역에서도 많은 성인들이 불구가 되어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이 방해를 받았고 일부 지역사회는 모든 상점을 폐쇄하거나 고객들에게 외부 주문을 남기게 하였다.
의료 종사자들은 아픈 사람들을 돌볼 수가 없었고, 목수들은 그들 역시 독감으로 인해죽은 사람들을 매장할 수 없었으며 굴착기(steam shovel)와 관(coffins)이 없이 많은 곳에 그냥 묻힌 시체(bodies buried)는 여기저기 공동묘지(Mass graves)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1918년 8월부터 치명적인 제2의 물결이 강타한 후 최고조에 이른 후 갑자기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감소되었다는 시기가 11월 11일이다.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는 1918년 10월 16일에 4,597명이 사망했지만 1차세계대전이 끝나는 11월 11일에 이르러서는 인플루엔자가 거의 도시로부터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 질병의 치사률이 급격히 감소했다는 한 가지 설명은 희생자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 발병한 폐렴의 예방과 치료에 대해 의사들이 더 효과적으로 대응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입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론은 1918년 바이러스가 치명적이지 않은 변종으로 매우 빠르게 변이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인 더 위험한 변종의 숙주가 소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병원 바이러스가 덜 치명적이 되는 경향을 말하고 있다.
5. 총독부자료가 말하는 조선 무오년독감(戊午年 毒感)
1918년 당시 조선인의 인구수가 이상하게도 글로벌인구통계에 집계되지 않고 있다.
1917년 인구가 1,699만명이고 1918년에 데이타가 없고 1919년 인구가 1,741만명이다.
양 두해에 42만명의 차이가 있고 이를 2로 나누면 21만명이 되고 다시 1917년 인구수에 보태면 1,720만명으로 산출되는데 이를 1918년 인구로 보면 될까 한다.
한반도에 살던 일본인의 경우 인구 34만 6,619명 중 46%인 15만 9,916명이 감염되었고 1,297명, 인구의 0.37%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의 인구는 5,596만명으로 나타나고 2,300만 명(41%)이 감염피해를 입었으며, 최소 39만 명이 사망했다고 보고되는데 이는 인구의 0.69%이다.
또 다른 자료 에는 5,500만 중 2,500만(45%)이 감염되어 48만명, 전체인구의 0.87%가 사망했다고 하고 있다.
1918-1920년 "스페인" 인플루엔자 범세계적 사망(Global Mortality of the 1918–1920 Spanish Influenza Pandemic)에 보면 5,503만명의 38.8만명으로 published death rate(per 1,000)가 6.7 로 0.67%가 된다.
그러나 다시 재계산된(reclculated) 사망률은 7(per 1,000) 즉 0.7%이다.
전 세계적으로 스페인독감으로 인한 감염률은 평균적으로 40%를 거의가 넘는다.
당시 조선총독부 자료에서는 조선인이 128만명이 감염되고 그 중 4만(감염자 중 3.12%, 전체 인구의 0.2%)이 사망했다는 통계를 말하는데 이것은 세계 최소 감염에 최소 사망률이 된다.
128만명의 감염률은 당시인구 1,720만명을 기준으로 한다고 하면 7.4% 밖에 되지 않되니 평균 40%에 훨씬 못미친다.
세계평균감염율 40%가 넘으니 아예 감염이 적게 된 것이다.
사망률도 세계평균 2%~5%이니 사망률도 따져보면 0.2%가 되어 매우 작은 수치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인용자료에 의하면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당시 조선인 1,678만3,510명 중 절반에 가까운 742만2,113명(44%)이 감염되어 13만9,128명, 전체인구의 0.83%가 사망이 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 수치는 세계통계수치와 엇 비슷한 것이다.
조선에서는 스페인독감을 1918년이 무오년이니 무오년독감이라 불렀다.
조선은 당시 왜 글로벌명칭을 따르지 않았을까?
만약 조선에서 발병된 것이 맞다면 굳이 스페인독감이라고 할 이유가 없다.
당시 신문기사에 나오는 상황을 보면 충청남도에서 특히 기승을 부려 서산시에서는 인구의 대부분인 8만명이 독감에 걸렸고 예산군과 홍성군에서 수천명이 사망했다 하였으며 경성부에서는 268명이 죽었고, 그중 조선인은 119명이었다 하는데 당시 경성부에 외국인들이 반 이상이 되는 것으로 나머지 149명이 오히려 외국인감염자가 되므로 그 비율이 경성부전체의 56%를 차지 한다.
경성에는 외국인들이 조선인들에 비해 더 많이 거주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신동아 2007년 4월호에 보면 세계적으로 고병원이 창궐하기 시작한 2차 바이러스 기간인 8월~10월동안 조선(朝鮮)에서는 9월에 이미 서울에 환자가 나타났다 하고 10월에 전국적인 유행이 절정에 달해 공사립학교와 사숙(私塾)은 휴학, 각 관청과 단체에서는 시무를 보지 못했다 하였으며 11월 들어서는 정점을 말하고 있는데 개성군(開城郡)의 경우 다른 때의 7배의 사망률을 보였고, 충남 서산(瑞山)지역은 8만 명의 인구 중 6만4000명 전체인구 80%가 이 질병에 걸렸으며 매일 100명 이상 150명씩 사망하여 사망자를 처리할 사람이 없었다고 말하고 일반 농가에서는 사람이 없어 추수를 못한 논이 절반 이상이라고 총독부 연감을 인용하고 있다.
(1)1918년 11월-인천에서 하루에만 2천명 사망[每日申報]
"인천(仁川)도 사망자(死亡者)가 매일 이천명(每日二十名)" 1918년 11월 03일
"전세계(全世界)를 습(襲)한 독감(毒感), 각 군 도처에 없는 곳이 없다" 1918년 11월 03일
"사망자(死亡者)가 반일(半日)에 십칠명(十七名), 인천의 독감은 더더욱 창궐" 1918년 11월 04일
"유행독감(流行毒感), 모조리 멍석말이" 1918년 11월 02일
위 매일신보에 보듯이 엄청난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실제로 의료붕괴현상이 당시에 발생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
보도내용을 보면 "유행 감기로 인하야 창궐되는 악성 감기는 아직도 감퇴되는 모양이 없어서 인천 같은 데는 요사이 날마다 20명의 사망자가 생기어 날마다 발인 없는 날이 없고, 각 절에는 불시에 대번망(大繁忙)을 이루는데 이 감기에 대한 예방칙은 전혀 없고 다만 감기에 걸리지 않기만 바라는 바이다.(매일신보, 1918년 11월3일)"라고 하고 있다.
또 "감기가 의주, 신의주, 용암포, 철산, 정주, 박천, 희천, 진남포, 성천군, 중화군, 강동군, 개천군, 통강군, 강서군 등 평안도(平安道)각 군에 전염되어 많은 사망자를 냈다. 포병공장(砲兵工塲)에서도 7000명이 결근하였고, 철도원에서도 7500명이 결근하여 운송에 차질이 생겼다. 공주에서도 1만1800명이 감기에 감염됐고, 목포의 경우는 총인구 4531명 중 580명(12.8%)의 환자가 발생했으며, 원산에서는 1만 명이 걸렸다.”(매일신보, 1918년 11월9일자)하였다.
물론 이러한 자료가 말하는 곳은 지금의 한반도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는 10월 16일에 4,597명이 사망했지만 1차세계대전이 끝나는 11월 11일에 이르러서는 인플루엔자가 거의 도시로부터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놀랍게도 인플루엔자의 소멸 징후의 기사들이 조선(朝鮮)에서의 보도가 봇물처럼 넘쳐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2)1918년 11월-서울, 대구 등 대도시는 줄어들고 지역은 확산[每日申報]
"대구(大邱)의 독감(毒感)은 차차 종식되는 듯" 1918년 11월 06일
"각지독감(各地毒感): 평안도(平安道) 각(各) 군(郡)에 심하지 않은 곳이 없다" 1918년 11월 09일
"각지독감(各地毒感): 철도종업원(鐵道從業員)칠천명이 결근" 1918년 11월 09일
"각지독감(各地毒感): 공주(公州) 목포(木浦)에 창궐(猖獗)" 1918년 11월 09일
"각지독감(各地毒感): 원산元山에는 일만 명 학생에게는 적다" 1918년 11월 09일
"김천(金泉)에도 독감, 우편국원은 전멸" 1918년 11월 06일
"각지(各地)의 독감(毒感), 날이 추워질수록 점점 심해간다" 1918년 11월 07일
"독감(毒感)이 점차종식(漸次終熄), 그러나 지방은 지금이 한창이다" 1918년 11월 08일
(3)1918년 11월-서울, 부산은 안정세, 다른 지역은 확산
"경성(京城)의 독감(毒感)은 적이 침식(沈熄), 죽는 자가 훨씬 줄어" 1918년 11월 12일
"경성(京城의) 독감(毒感)이 아주 종식(終熄)" 1918년 11월 18일
"병세 또 악화 ; 사망률은 더욱 상승, 독감유행"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1월 12일
"아직 휴교, 독감과 관련하여"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1월 12일
"출정군인(出征軍人)이 독감(毒感)에 고생(苦生), 거의 다 앓는다고" 1918년 11월 13일
"독감(毒感)의 유행(流行)과 우편국(郵便局)의 고난(困難), 전멸된 곳이 많다" 1918년 11월 14일
"독감(毒感)으로 인(因)하여 수확(收穫)이 극난(極難), 손해가 비상하다"1918년 11월 16일
"삼수(三水)의 독감(毒感), 군수가 죽었다" 1918년 11월 19일
"휴업중의 각교 수업개시, 독감환자 감퇴"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1월 19일
"독감(毒感)의 종두법(種痘法), 한 번 주사로 면한다, 미국의 신발명" 1918년 11월 20일
"강진(康津)의 독감 사람이 많이 죽었다" 1918년 11월 22일
"인천(仁川)에는 반수(半數), 인천의 독감조사 무서운 그 수효" 1918년 11월 25일
"독감(毒感)의 참화(慘禍)를 받은 진주(晋州), 사망자가 천여명" 1918년 11월 26일
"전독제(前獨帝)도 윤감(輪感)으로 고생하는 중이다" 1918년 11월 29일
그러나 위 당시 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1918년 11월3일과 1918년 11월9일자까지 독감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기사를 볼 수 있지만 놀랍게도 필라델피아에서 소멸되기 시작한 1908년 11월 11일 경에 조선에서도 11월 6일부터 대구독감이 차차 종식되는 듯 하다 하였으며 11월 8일 독감이 점차종식되어 가지만 지방은 한창이라 하였고 11월 12일 부터 경성과 부산의 독감이 침식, 종식, 안정되가며 11월 18일엔 아주종식되었다는 기사를 발견할 수가 있다.
침식(沈熄)불이 밑으로 잠기며 꺼진다는 표현이고 종식(終熄)은 불이 꺼져 끝났다는 이야기로 한때 매우 성하던 일이나 현상이 끝나 멎거나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즉 유행독감을 불에 비유한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스페인독감이 11월 11일에 이르러서는 인플루엔자가 거의 도시로부터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에서도 거의 같은 시기인 11월 6일부터 그런 징후가 나타난다하였고 11월 18일에 아주 종식되었다고 기사는 말하고 있다.
이러한 징후는 같은 대륙에서 벌어진 상황이라고 유추할 수밖에 다르게 설명할 수가 없다.
또 다른 자료를 보면 당시 일제 치하에 있었던 한반도에 스페인독감이 상륙한 것은 1918년 9월, 러시아에서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와서 한반도를 덮쳤다고 말하고 있다.
6. 스페인 독감과 세계삼한역사
스페인 독감은 실제로 유럽대륙 스페인에서 처음 발생한 것이 아니다.
전자에 언급하였듯이 1차세계대전 중에 중립국이었으며 언론사에 대한 엄격한 검열(檢閱)을 강요받지 않았으며, 따라서 스페인은 질병에 대한 초기 기사를 자유롭게 보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독감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이러한 이유는 상당히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무엇인가 당시 역사학자들이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실제로 유럽스페인에서 프랑스서부전선 발병지 중 하나라고 판단되는 곳에서 시작되어 옮겨갔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최초의 발병지가 아니라는 사실은 지금까지 서양역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니 스페인이 최초 발병지는 아니라는 말은 정답이라 해야 맞겠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날 '우한코로나바이러스'라 하듯이 사실상 질병 발병지를 근원으로 명칭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시 미국 캔자스주 포트 라일리(Fort Riley)의 펀스톤 켐프(Camp Funston)에서 발병한 것이 맞다면 "미국독감"이라고 해야 맞다.
그럼에도 왜 스페인독감이라 해야 했을까?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당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每日申報)가 발행되었고 위에서 언급했지만 보다시피 스페인독감이라 하지 않았고 무오년독감(戊午年 毒感)이라고 한 사실에서 적어도 일제 총독부기관지라면 미국의 정보를 따랐을 것이고 공식적인 글로벌명칭 서반아독감(西班牙毒感)정도라고는 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무오년독감 또는 그냥 독감(毒感)이라고 가자들이 명칭하였다.
이것은 조선입장에서 질병 발생 근원지를 바탕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굳이 스페인독감이라 하여 구차한 설명이 그것에는 필요치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다시 재론하면 서두에 언급한 내용이지만 스페인은 1차세계대전 중에 중립국이었으며 언론사에 대한 엄격한 검열(檢閱)을 강요받지 않았고, 따라서 스페인은 질병에 대한 초기 기사를 자유롭게 보도할 수 있었다고 했다.
스페인은 미서전쟁(美西戰爭:1898)에서 미국에게 패전하여 쿠바를 포기하고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에 할양하고, 미국은 스페인에 2,000만 달러를 지불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는데 사실상 이러한 사건 설명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거의 믿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스페인은 이상하게도 역사기저에서 그 때부터 날개쭉지를 잃어버린 평범한 국가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왜 당시 자본만을 앞세운 세력이었던 미국에게 이런 불평등한 조치를 당했어야 하는가 하는 말이다.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전쟁은 황색신문들의 충성심발로에 의한 찌라시기사들이 전부인데 이것을 어떻게 정상적인 전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전쟁이 발발되지도 않았고 스페인이 미국에게 패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스페인이란 역사 측면에서 미국은 최후 동일선상에 놓고 보아야하는데 역사갈취꾼이다.
당시 이 독감의 감염자 한사람인 알폰소 13세(Alfonso XIII,1886-1941,재위:1886-1931)의 가문은 부르봉왕가(House of Bourbon)의 사람이다.
이 부르봉왕가는 프랑스 루이시대를 끝으로 권한이 하노버왕가(House of Hanover:1801-1837)로 넘어가면서 당시 유럽왕가들을 움직였던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1801-1922)에 끼이지도 못하고 2류 왕가로 전락하고 만다.
때문에 유럽왕가쟁탈전에서 이미 밀려난 것이다.
하여 중립국이라고 한 것인데 그 결과 사람들은 황색신문기사가 스페인독감이라 하니 이 병이 스페인에만 국한된다고 잘못알았고 때문에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으로 고착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발병의 발원지가 스페인이 아니라는데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
저널리스트 헨리 데이비스(Henry Davies)의 책 "The Spanish Flut & Co., 2000"에 보면 1918년 봄 로이터 런던 지사(Reuters' London office)의 스페인의 한 통신사(news service)는 "마드리드(Madrid)에서는 이상한 형태의 전염성 질병이 나타났다"고 알렸고 전염병은 약한 것으로 사망자는 보고되지 않았다."고 전언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 보고가 있은지 2주만에,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독감에 감염되었다고 한다.
1918년 봄이라면 3월, 4월이라 할 수 있는데 처음 캔자스주 하스켈 카운티(Haskell County)에서 질병이 처음 발생한 날짜와 동일하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는 이미 1918년 1월부터 미국 캔자스주 에서 이 질병이 발견되었다고 하였다.
이 병이 어디에서 연결되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고 여러가지 추론만 존재한다.
위 도표에도 나타나지만 1918년 스페인독감의 발원 기원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해 세 가지의 기원을 말하고 있다.
1) 영국의 훈련기지인 올더숏(aldershot)과 프랑스의 북서부항구 에타플스(Etaples)에서 발생되었다고 하는 주장으로 1차세계대전의 참호에서 병 근원이 처음 발견되었다는 주장.
2) 중국 산서성(山西省:Shanxi Province)에서 1917년에 발생한 호흡기질환이 스페인독감의 발병원인이라고 하는 주장.
3) 지금까지 잘 알려진 미국 캔자스주 켐프 펀스톤(Camp Funston)에서 1918년 3월 발생하기 직전 병사 48명이 사망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위 세가지의 발병기원을 보면 전부 가능성이 있다고 보이지만 사실상 켐프펀스톤의 발병원인이 현재까지 최초 발병지로 인정받고 있는 경우이다.
1)번 주장은 바로 유럽서부전선인 영국과 프랑스 참호에서 발병이 되어 미국으로 들어갔다는 설이다.
3)번 주장은 이미 전자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나머지 2)번 주장은 2014년 역사학자 마크 험프리스(Mark Humphries)가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통한 주장인데 이사람은 동양인을 혐오하는 측면한 주장인지 알 수 없으나 중국인이 인플루엔자바이러스를 원초적으로 동아시아대륙 신중국으로 몰고갔다고 한 사실이다.
당시 1차세계대전 영국과 프랑스전선(British and French lines)후방에서 일하기 위해 96,000 명의 중국인 노동자를 동원한 것이 대유행의 원인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현 동아시아대륙 신중국 산서성(山西省)을 발원지로 지목한 것이다.
현재 캐나다 동부 뉴펀들랜드 래브라도주의 주도 세인트 존스(St. John's)에 뉴펀들랜드 메모리얼 대학(Memorial University of Newfoundland)의 연구자 험프리스(Humphries)는 이러한 새로 발견된 기록에 기초했다.
그는 최초발병되기 몇 달 전인 1917년 11월에 중국북부를 강타한 호흡기 질환이 1년 후 중국 보건 당국자들에 의해 스페인독감과 동일한 것으로 확인된다는 기록적인 증거를 발견했다는 근거이다.
2016년 중국 의학협회 저널에 게재된 이 보고서는 1918년 스페인독감바이러스가 중국, 인도차이나군인과 노동자들을 통해 유럽으로 수입되었다는 것인데 하지만 그것에 대한 증거를 찾지 못한 것으로 알져진다.
그냥 설인 것이다.
이 바이러스는 1918년 유행병이 발생하기 몇 달, 어쩌면 몇 년 전부터 유럽군대에서 유행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는 말도 있다.
유럽대륙이 전쟁터이고 당시 서부 전선의 참호는 비좁고 더럽고 축축한 환경에서 생활하던 병사들이 병이 났고 이것은 영양실조로 인한 면역 체계가 약해진 직접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덧붙이고자 하는 것은 최초발병지 지도를 잠시 보더라도 1918년을 감안할 때 대륙간 이동운송도구인 여객선은 몰라도 여객기상황은 이때쯤 완전히 초보단계였다.
즉 비행을 하여 승객들을 이동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여객선은 19세기초부터 운행되었다고 서양자료들은 거품을 물고 있지만 대륙횡단을 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웠던 시대 또한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대륙간 이동으로 인한 전염은 극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글쓴이의 주장은 절대로 대륙간 이동은 한계가 있어 바이러스 전염경로라고 할 수 없다 할 때 과연 서양자료들이 일률적으로 주장하는 위 그림과 같은 대륙간 이동설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논점은 나중 기회 있을 때 서술하기로 하겠다.
그런데 서양에서도 이러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전제하는 것으로 중국인 근로자에 의한 발병고리에 연관되는 이야기가 나타난 거론을 하게 하는데 1917년과 1918년 캐나다 전역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할리팩스(Halipax)로 수송되면서 스페인독감과 연관되었다고 말하고 있고 결국 중국인노동자들이 처음부터 인플루엔자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대표적으로 마크 험프리스(Mark Humphries)의 저서 "마지막 전염병(The Last Plagu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2013]에 따르면, 그 노동자들은 대부분 중국 시골의 농장 일꾼들이라했다.
They spent six days in sealed train containers as they were transported across the country before continuing to France. There, they were required to dig trenches, unload trains, lay tracks, build roads and repair damaged tanks. In all, over 90,000 workers were mobilized to the Western Front.[All About History magazine] 그들은 프랑스로 계속 가기 전에 전국(the country)을 가로질러 운송되는 밀봉된 열차 컨테이너에서 6일을 보냈다고 하였다.
전국을 가로지르다고 표현하였는데 캐나다를 관통했다는 말인지는 분간이 잘 되지 않는다.
그는 또한 다른자료에서 1917년에 대부분 시골농장의 북부중국인(?)들이 영국과 프랑스로 보내졌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산서성(山西省)이라고 하는 곳은 그렇듯 북부가 아니다.
신중국 산서성은 한반도 위도위치와 같은 위치에 있다.
문제는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과연 당시 프랑스의 위치문제도 그렇지만 산서성의 위치문제도 풀어야 할 숙제이다.
어쨌던 모든 공식자료에 산서성(山西省)에서 캐나다 밴쿠버로 이동한 사실은 생략한체 중국인노동자들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밴쿠버(Vancouver)로 끌려(?)갔고, 기차편으로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 할리팩스(Halipax)로 가서 영국과 프랑스를 향해 대서양을 건너 전선 후방에서 일하고 있던 군인노동자들과 대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캐나다에 있는 동안 중국인노동자들의 여행은 매우 비밀스럽게 지켜졌고 그들은 기차에서 나가는 자체를 막았다고 하고 있다.
그래서 '밀봉된 열차 컨테이너'라 하고 있다.
험프리스는 1917년부터 유럽으로 이동하던 25,000 명의 중국 노동근로자 중 3천명 이상이 의료 검역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독감같은 증상을 보였다는 의료 기록을 발견했다고 하였다.
몇명 중국인과 경비병들은 "스페인 독감"으로 알려진 전염병처럼 독감을 앓았으며 프랑스에 도착한 후 많은 사람들이 중국병원으로 갔고 수백 명의 중국인들이 독감과 비슷한 호흡기 질환을 앓아 죽었다고 했다.
위에서 프랑스(?)을 향해 같은 방향으로 계속 갔다 하였는데 바다를 건넜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냥 전국(캐나다 혹은 미국)을 가로질러 운송되는 밀봉된 열차 컨테이너에서 6일을 보냈다고 하였는데 끌려간 그곳에서, 참호를 파내고, 기차선로를 깔고, 도로를 건설하고, 손상된 탱크를 수리하도록 요구되었다고 하고 있다.
이 노동자들이 바로 프랑스가 위치한 서부전선에 동원된 노동인력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험프리스(Humphries)는 1918년에 25,000명의 중국인 노동자를 한 명씩 헤아려 3천 명 정도가 의료 검역에서 걸렸고 도중에서 내려졌다고 한다.
당시 이들의 병은 인종적 고정관념 때문에 ‘중국 게으름(Chinese laziness)’ 탓이라 하였고 캐나다 의사들도 근로자들의 증상을 유행병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였으며 중국인 노동자들이 본래 습성대로 생활하던 관습을 캐나다인들이 어느정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는데 이는 오래전부터 생활을 같이 한 상태에서 인지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중국노동자는 벌써부터 캐나다 밴쿠버부근에 정착하던 거주민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안된다.
어쨌던 중국 노동자들이 1918년 초에 프랑스 북부 항구도시에 도착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렸고, 수백 명이 곧 사망했다고 하였으며 험프리스는 이것이 스페인독감의 발병시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 서부항구(western harbours of France)에 상륙한 미군과 인도차이나 군인(Indochina's troops), 그리고 프랑스공장에 고용된 중국인 노동자(Chinese workers hired in the French factories)들과 함께 캐나다가 아닌 미국에서 온 것이라 하여 이 중국인노동자들은 이미 미국에서 일부가 감염이 되어 프랑스서부전선으로 들어간 것이라고도 풀어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프랑스는 북아메리카대륙 내에 미국 동부 도시와 떨어진 어느 곳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주요 논점은 즉 발병의 원인을 중국인노동자로 보고 인도차이나군인이라는 측면에서도 여러가지 추측을 낳게 하고 있다.
특히 서양자료들이 제시하는 여러곳에서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에는 중국인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외국인들은 이들 중국인 노동자들을 가리켜 쿨리(coolie)라 불렀다.
즉 '힘든 일을 하는(苦力) 사람들'이란 뜻이다.
한편으론 미국이나 중앙아메리카에서 백인들이 중국이민자를 칭크(Chink)라 했다.
칭크는 중국의 예절방식 칭칭(Chinese courtesy ching-ching)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청조를 청(Ch'ing)이라는데서 변형이라는 설이 있는데 칭크(Chink)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대략 1880년경이며 형용사인 칭키(chinky)는 1878년에 처음으로 인쇄되어 알려졌다.
중국노동자 쿨리(coolie)들을 미국인들이 이민을 제한하기위해 캘리포니아주가 1862년에 반쿨리법(Anti-Coolie Act of 1862)을 제정할 정도로 미국인들이 불안해 하면서 사업을 하는 중국인이민자에게 세금을 부과하게 만들면서 1882년에 제정된 중국인추방법(Chinese Exclusion Act)이 발효되기전까지 노동력을 착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1863년에 캘리포니아주의 세크라멘토(Sacramento)에서 시작된 북아메리카대륙횡단철도 건설과 1881년 캐나다 서부 태평양철도 가설노동자들 대다수가 중국인노동자가 아니면 아일랜드인이라는 사실이 그렇다.
본 블로그 글 "인도대추(印度棗:Zizyphus mauritiana)가 가르쳐 주는 인도(印度)
https://han0114.tistory.com/17049986 "에서 말하길 인도대추는 자마이카(Jamaica)에서는 쿠리자두(coolie plum, crabapple)라고 하였는데 이 쿠리는 19~20세기 초 미국 즉 북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온(?) 중국(中國)과 인도(印度)의 노동자를 일컫는 용어라 하며 힌두어 큘리(quli)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중국인이 미국으로 건너온 것이 아니라 1881년 조선이 해체되고 난 후 1882년 중국인추방법이 시행되면서 부터 미국에서 쫓겨 나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조선의 스페인독감이 러시아로부터 기차를 통하여 발생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미국이 러시아라고 밝혀진 사실이 있는데도 그렇게 판단할까?
만약 마크 험프리스(Mark Humphries)의 주장이 맞다면 본래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던 코리아 중국인들에 의해 전파된 것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위 우측그림을 보면 중국 공연자들은 죽마장대발 놀이로 프랑스 에타플스(Etaples)의 야외 극장에서 노동군단원들과 영국군을 위문하고 있다. 두 관객은 사이에 작은 철조망으로 분리되어 있으나
그렇듯 중국인들이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영국군과 잘 협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본래 죽마장대놀이는 전통적 고려(Corea)문화이기 때문에 중국공연자는 고려인(COREAN)이며 고려노동자와 영국군인을 위문하기 위한 장면 임을 추측할 수가 있다.
좌측그림은 리빅스 육류추출회사(Liebig's Extract of Meat Company)의 광고판에 나타난 그림인데 COREA 의 영역에서 독창적 문화요소이며 특징적인 것에서 다룬 것인데 이 그림에보면 코리안 여인들이 죽마로 만든 장대발을 이용하여 허들 장애물넘기(jumping hurdles)장면이다.
이것을 스틸트라 하는데 고고학적 유적과 문헌에 따르면 기원전 6세기 이전까지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에서 스틸트워크(stiltwalking)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벨기에에서는 1411년부터 나무르의 스틸트 워커stilt walkers들이 스틸트 위에서 전투연습을 해왔다
습지나 침수지역의 주민들은 때때로 늪에서 일하거나 불어난 강을 건너는 등 실용적인 목적으로 스틸트를 사용하고 프랑스 남부 랑드(Landes)지역의 양치기들은 시야를 넓히기 위해 스틸트에 서서 양떼를 관찰하였고 그곳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일상 활동에서 습기찬 땅을 횡단하는데 종종 사용하였다.
근대에 들어 이를 서커스(circus)에 넣어 한 가지 곡예로 사용했다.
즉 이와같이 유럽인들에게 오래전부터 전통놀이라고 알려진 스틸트로 코리안들이 즐겼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영국인들도 친밀했을 것이다.
또한 코리안이 중국이라 하는 것은 본 블로그 글 "한국인(코리안)이란? https://han0114.tistory.com/17050849 "에서 브리티시인류학자였던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Arnold Henry Savage Landor:1865-1924)가 코리안(Corean)들은 중국인이고, 따라서 체격과 외모가 똑같다라고 하였다는 사실을 인용한 것이다.
7. 100년만에 찾아온 불청객
지금 세계인전체를 페닉상태에 빠지게 하고 사그라들 기색이 없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ronavirus Disease-19, COVID-19)는 백신이 발견되기 전까지 계속이어질 암울한 전망을 낳고 있다.
이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코로나바이러스(Coronavirus)는 1937년 닭에서 최초로 발견되었고, 조류뿐만 아니라 소, 개, 돼지, 사람 등을 감염시킬 수 있는 것으로 코로나바이러스과(Coronaviridae)에 속하는 리보핵산(RiboNucleic Acid, RNA)바이러스로 외피에 존재하는 곤봉 모양의 스파이크(Spike) 단백질로 인해 왕관 형태의 모양을 띠기 때문에 태양의 코로나(Corona)에서 바이러스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사람과 동물의 호흡기와 소화기계 감염을 주로 유발하는 것으로 2003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 SARS)를 일으키는 사스-코로나바이러스(SARS Coronavirus, SARS-CoV), 2012년 중동호흡기증후군(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 MERS)를 일으키는 메르스-코로나바이러스(MERS Coronavirus, MERS-CoV), 그리고 2019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ronavirus Disease-19, COVID-19)를 일으키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SARS-CoV-2)가 있다.[카이스트신문(http://times.kaist.ac.kr)참조]라고 정리한다.
그러나 1918년 스페인독감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의한 범유행병이다.
코로나바이러스와는 다른 종이다.
이것이 인류에게 영향을 준 것을 시대적으로 보면 1918년 스페인독감이 발생한 이후 40년 뒤 1958년에 아시아 플루( A형, H2N2 종)가 발생했고 10년뒤인 1968년에는 홍콩 플루(A형, H3N2)가 발생했으며 그로부터 40년을 터울로 2009년에 신종플루(A형/H1N1종)가 발생한 사실을 열거 할 수가 있다.
세부적으로 잠시 집고 넘어가자면 1918년에 발생한 스페인독감은 전자의 기술한 내용과 같고 1958년에 발생한 아시아 플루(A형/H2N2 종)는 미국에서 7만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고 첫 번째 발병이 1957년 2월 말에 중국에서 발견되어, 1957년 6월에는 미국으로 퍼져 전 세계적으로 2백만명이 사망했다.
1968년 발생한 홍콩 플루(A형/H3N2 종)는 미국에서 34,000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는데 이 바이러스는 1968년 초에 홍콩에서 발견되어, 그해 말에 미국으로 확산되었으며 1968-69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1백만여명이 사망했다고 알려진다.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 혹은 신종 플루(A형/H1N1종)는 2009년 5월 3일 기준으로 멕시코 베라크루스주에서 발생하여 사망자가 150명을 돌파하면서 페닉상태에 이르렀고 이어 미국으로 넘어들어가 전세계로 퍼진 것인데 최종 종료일 2010년 8월 10일 기준으로 세계적으로 160만명의 감염자와 사망자 18,036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독감사례를 코로나바이러스 상황과 비교하는 것에서 좀 이격이 있지만 어쨌던 대범유행병 독감이라는 차원에 묶어보면 100년이란 터울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소제를 달아 본 것이다.
현재 우한폐렴 즉 신종코로나19 로 인해 세계전체가 공포스러운 분위기다.
2020년 4월 4일 오전6시기준 코로나19 주요국의 사망자는 이탈리아 1만4681명, 스페인 1만1198명, 미국 7004명, 프랑스 6507명, 영국 3605명, 이란 3294명, 중국 3322명, 네덜란드 1487명, 독일 1275명, 벨기에 1143명을 각각 나타내고 있고 치명률은 이탈리아 12.3%, 프랑스 10.1%, 네덜란드 9.5%, 스페인·영국 9.4%, 벨기에 6.8%, 이란 6.2%, 스웨덴 5.8%, 중국 4.1%, 미국 2.6%, 한국은 1.7% 수준이다.
세계확진자 109만3,394명이고 사망자가 58,740명으로서 평균치명률이 5.4%이다.
이 수치는 1918년 스페인독감의 최고 수치 5%를 넘는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는 주로 호흡기로 전염되고 감염되었을 경우 바이러스는 폐를 침범하며, 고열과 기침, 호흡곤란 등의 증상이 발생하고 폐렴과 유사한 증상을 보인 끝에 심한 경우 폐포가 손상되어 호흡 부전으로 사망에 이른다고 알려지며 잠복기는 3~7일이지만 최장 14일까지 이어지기도 한다고 알려졌고 가장 무서운 것이 무증상전염사례들이라 하였다.
신중국 무한시(武漢) 무창구(武昌)에 화남(華南)수산시장에서 새우를 팔던 여성 웨이(魏)모씨가 지난해 12월 11일 첫 발열증세를 보였고 자신의 거주지인 아파트 아래층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서도 평소와 다르게 기력이 회복되지 않아 12월 16일 병원에 입원하였으며 동시에 그녀가 사는 아파트주민 11명이 근처병원에 잇따라 입원한 것으로 발병의 시초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곧 바이러스성 호흡기 질환으로 갑자기 확산되는 추세를 차단하기 위해 중국정부는 2020년 1월 23일 1100만명의 무한시를 봉쇄하였고 이후 6000만명의 인구가 사는 호남성(후베이)까지 봉쇄조치가 되었지만 이 바이러스는 중국을 넘어 2020년 1월 감염자가 전세계 여러 국가로 확산되자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에 대해 1월 30일 '국제 공중보건 비상사태(PHEIC)'즉 판데믹(Pandemic)이 선언했다.
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해 판데믹은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로 전국민이 전염병 페닉에 빠졌던 적이 있고 신종 베타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증으로 2003년 발생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과 유사하면서도 치사률은 30% 정도로 높다하여 당시 상당히 공포스러운 사태를 맞이하였던 것으로써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인 MERS-Corona 바이러스가 그 원인 바이러스였다고 알려지는 것이다.
이것들의 유전자 염기서열이 박쥐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하다 하여 박쥐를 원인 동물로 보고 있으며 중간 매개 동물이 낙타일 수 있다는 연구가 있었다.
메르스는 2012년부터 중동지역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나타났으며 2015년까지 천 명 이상의 감염자와 4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또 다른 변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원인인 사스(SARS)보다 전염성은 떨어지나 치사률은 30~40%로 사스(약 9.6%)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나 사람들에게 더 치명적인 공포심을 유발하였다.
우리나라에도 2015년 5월 20일 메르스 최초 감염자가 확인되었고 첫 환자가 발생한 지 68일 만에 메르스가 사실상 종식되었다.
메르스 사태로 감염된 사람은 총 186명이며, 그중 38명이 사망해 치사률은 20.4%로 기록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방한중인 중국인이 1월 20일 최초 감염자로 확진된 이후, 3월 31일까지 모두 9,887명이 감염자로 확진되었고 31번환자로 인해 대구경북지역에 포괄적 전염이 이루어져 심리적으로 거의 패닉상태에서 있다가 점차 회복되어 지금은 안전하다고 판단되지만 사망자만도 2020년 4월 4일 현재 177명으로 집계된다.
우리나라 질병관리본부(疾病管理本部)의 주의를 보면 1918년 스페인독감때와 크게 다르지 않는데 사람이 밀집된 공공장소는 최대한 피하고 특히 발열이나 호흡기 증상이 있는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는 것이 좋고 개인적으로는 손으로 눈이나 입 등을 만지는 것을 피하며 손을 자주 씻고 개인 위생을 철저히 하도록 당부하고 있다.
실제로 발열이나 기침 등 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마스크를 착용하고 가까운 보건소나 선별진료소의 안내를 받도록 하고 있다.
8. 정리
일부 역사가들은 스페인 독감을 "잊혀진 유행병"이라고 칭하였다.
당시 전세계인구 4분의 1인, 27% 해당하는 약 5억 명의 감염자가 발생했고 사망자 수가 5,000만 명~1억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 스페인 독감에 대해 경각심이 사실상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만약 현재 세계인구가 2019년 7월 기준으로 약 77억명이라 할 때 27%라면 자그마치 20억명이나 된다.
전세계국가수가 253개이니 평균적으로 한 국가당 약 8백만명이 감염된다는 소리다.
예를들어 한국인구가 5,178만명에서 27%는 1400만명이 감염자가 발생한다는 이야기며 내 주위에서 4명 중 한명이 감염된다는 말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이고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움이 아닐 수 없다.
당시에 그러한 감염에 대한 공포를 어떻게 이겨냈을까?
특히 사이토킨 폭풍(cytokine storms)에 의한 젊은이들의 공포심은 또 어땠을까?
아이러니한 이야기자만 오히려 당시 서양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전시검열(wartime censorship)에 의한 보도통제와 같은 시스템에 의해 공포심을 덜 유발시켰다는 점에서는 일부 다행스럽다 할 수 있겠지만 1918년 세계대전이 끝날때까지 이러한 깜깜이는 계속되었다는 것은 솔직히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사라지는 사람들에게 안타까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일제가 식민지통제한 한반도 조선상황을 보면 위에서도 알렸지만 총독부기관지라 일컫던 매일신보가 독감에 대해 세세하게 보도를 했다는 사실은 서양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매우 배치된다는 느낌을 우선 받는다.
세상사람들 뿐만아니라 한반도 주민역시 이 스페인독감이 어떤 병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는 이야기고 설령알았다고 하여도 치료방법이 전무했다는 사실은 무기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이지만 실제로 가장 감염이 많았고 사망자수가 많았던 인도와 이란의 경우에서 보면
인도(India)는 당시 인구 2억5,178만명에서 약 1,217만명이 사망했거나 다른 자료에는 최고 1,800만명이라 하였는데 이는 인구의 약 5%에 해당하는 수치라 하였고 이란은 인구 1918년 1,129만명에서 사망자가 최소 902,400명에서 최고 2,431,000명이라 사망률이 21%에 달했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보편적으로 미국 경우를 보면 감염률이 28%이다.
이 비율로 대입하면 인도의 경우 2억5천만명에서 감염자가 7000만명이며 이란은 1,129만명에서 감염자가 3백만명에 이른다.
이렇게 대입한 수치는 전세계평균수치라고 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란은 최고로 사망자가 발생하여 4명 중에 한사람이 사망했다는 사실임을 알 수 있으나 이러하였음에도 당시 사람들은 무슨 병인지도 알 수 조차없었고 그냥 돌림병이라고 알려졌다는 사실에서는 실제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명은 소중하기 때문이다.
2013년에 놀랍게도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에 본사를 둔 미국 리스크 모델링 및 데이터 분석 회사의 보고서[2013년, AIR Worldwide Research and Modeling Group]에는 "1918년 역사적인 대유행을 바탕으로 AIR Pandic Flu Model을 사용하여 오늘날 유사한 대유행의 영향을 추정했다는데 이 모델에서 "현대판 '스페인 독감' 이벤트는 미국에서만 153억~278억 달러(US$15.3–27.8 billion) 약 34조원의 추가 생명 보험 손실을 가져올 것이다."라고 예측했고 188,000명에서 337,000명의 미국사망자가 발생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2013년에 예상한 것이니 2012년 신종플루가 세계적으로 성행하였을 때 위기의식을 가지고 이런 보고서를 발표했겠지만 현재 코로나바이러스19 를 예측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주목을 끄는 것이다.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한코로나19 사태를 보면 이와같은 형상이 동일하게 여겨질 정도로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2020년 4월 3일현재 미국의 코로나19 확산 현황에서 확진자 272,998명이며 사망자가 7,005명에 이른다.
아직 미국상황의 최 정점을 4월, 5월로 보는 것으로 이것에 더하여 미국전염병연구소(NIAID)의 앤서니 파우치(Anthony Stephen Fauci,1940-)소장 역시 CNN방송과 인터뷰에서 미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COVID-19)로 인한 사망자가 20만 명에 이를 수도 있다는 다소 충격적인 전망과 수백만 건의 감염사례를 예측했다고 보도되었다.
이런 사망자의 예측은 미국리스크모델링 데이터분석회사 예측과 거의 일치하는 수치이다.
좀 더 두고 보아야 할 이야기지만 상당히 위험스러운 국면인 것은 틀림없다.
본문 소제 5. 총독부자료가 말하는 조선 무오년독감(戊午年 毒感)에서 밝혀본 사실에서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역사적인 측면에서 고려하고 또한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풀어볼 수 있는 상황은 여러곳에서 잔존해있다고 보지만 1918년 당시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스페인독감이 소멸되는 시점이 일제통치 아래에 있었던 한반도 조선의 경성(京城)의 무오년독감사정과 매우 동일하다는 사실은 충격 그자체이다.
그렇다면 결국 스페인독감의 발병의 시초도 조선(朝鮮)과 깊은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험프리스(Humphries)가 주장한 독감의 발병원인이 중국인노동자로부터 시작된다는 설은 매우 중요하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독감의 명칭 스페인은 북아메리카대륙 캔자스주에 존재해야 맞다.
미서전쟁이 끝난 1901년부터 미국은 스페인과 같은 진로에 편승한다.
이러한 의문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진단할 수 있는 것으로 미국 캔자스주에서 발병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에서 원초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서양역사가들이 말하는 스페인독감이라는 명칭은 즉시 붙여진 것이 아닐 것이다.
1차세계대전 연합국에 의해 처음 불려진 것이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질병이 어느정도 소멸되고 난 후 비로소 보도에 붙어 나온 명칭일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19세기초부터 언론을 지배하는 황색신문들이 넘쳐나던 시대이다.
이 거대하고 치명적인 질병 인플루엔자바이러스를 가지고서도 여러 명칭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보도탓을 하고 있었던 마당이니 보도자체가 얼마나 사회전반적으로 영향이 있었던 것인가를 알 수가 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보면 어쩌면 황색신문이 생성하는 기사들이 역사가 된 사실은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마저 생긴다.
전술한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러시아제국과 독일제국의 정보가 미국이외 다른 나라들에 비해 왜 그처럼 어두웠을까?
러시아제국이 1917년 3월에 멸망하고 바로 나선 주체가 미국이다.
미국은 당시 유럽제국의 패권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유럽왕조들의 싸움이었음에도 미국은 이때부터 1차세계대전 정 중앙에 위치하게 된다.
미국이 참전하면서부터 사실상 전쟁은 끝나게 된 것과 마찬가지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바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자본력이다.
미국이 스페인차에 편승했다는 것은 이 병이 스페인의 왕 알폰소 13세(Alfonso XIII,1886-1941,재위:1886-1931)와 주요 스페인정치인들에게 감염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어떤식으로든지 스페인은 독감에 상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본문 소제 '6. 스페인 독감과 세계삼한역사'에서 언급하길 스페인은 유럽왕가들을 움직였던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1801-1922)에 끼이지도 못하고 2류 왕가로 전락하고 말았고 때문에 유럽왕가쟁탈전에서 이미 밀려난 처지라고 하였다.
그러한 권한이 미국자본가들에 의해 잠식당했다는 이야기와 같다.
스페인독감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럽대륙에서 발병한 것임을 나타내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스페인에서 학교, 막사, 정부 건물과 같은 좁은 지역에서 일하거나 살았던 사람들의 30-40%가 감염되었다고 한다. 마드리드 전차의 운행도 줄여야 했고, 모두 건강한 직원들이 일할 수 없어 전보 서비스를 할 수 없었다고도 하고 특히 '스페인독감(Spanish influenza)'이라는 용어는 영국에서 급속도로 유행했다고 한다.
나이얼 존슨(Niall Johnson)의 책 "영국과 1918-19 인플루엔자 판데믹"(Routledge, 2006)에 따르면, 영국 언론은 스페인의 독감 전염병을 스페인 날씨 탓으로 돌렸는데 "... 건조하고 바람이 부는 스페인의 봄은 불쾌하고 건강에 해로운 계절이다."이라고 타임즈의 한 기자가 보도했다 한다.
1918년 여름까지 이 바이러스는 유럽본토의 다른나라들로 빠르게 퍼지고 있었고 헝가리의 비엔나와 부다페스트는 독감에 대한 고통을 겪고 있었으며, 독일과 프랑스의 일부지역에도 비슷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독일제국 베를린 학교의 많은 어린이들이 아프고 학교에 결석한 것으로 보도되었고, 무기공장의 휴업은 생산을 감소시켜 막대한 차질을 낳았다고도 하였다.
통제가 되었다지만 이렇게 보도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스페인에서 유행하는 독감은 1918년 6월 25일 영국(Britain)에 도달했다 한다.
UCLM(Universidad de Castilla-La Mancha)대학의 María-Isabel Porras-Gallo
와 Ryan A. Davis 저서 스페인 인플루엔자 판데믹(The Spanish Influenza Pandemic of 1918~1919)에 따르면 7월 런던 섬유업계에 전염병이 돌면서 하루 저녁에만 400명 중 80명이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고 런던에서는 독감으로 인해 정부 직원이 결석했다는 보고가 25%에서 50%에 이른다고 기록된다.
그 전염병은 급속도로 대유행병이 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고 말하고 있다.
1918년 8월, 6명의 캐나다 선원들이 세인트 로렌스 강(St. Lawrence River)에서 사망했고 같은 달, 스웨덴 군대, 그 후 그 나라의 민간인,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노동 인구 중에서도 감염이 보고되었다고 했다.
실제로 본문에 게시한 1918년~1920년 스페인독감 대유행의 세계 사망표[Global Mortality of the 1918–1920 Spanish Influenza Pandemic]를 보면 아프리카상황이 매우 심각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Southern Africa)은 전체인구 676.9만명의 30만명이 사망하여 사망률 43.97(per1,000) 즉 4.39%를 나타내고 이 수치는 세계평균 최고 수준에 도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아프리카대륙에서 발병한 높은 수치는 본래 인플루엔자바이러스가 고온, 고습에 영향을 적게 받는다는 사실에서 이외라는 것이다.
아프리카대륙의 총 사망자가 237만명이고 사망률은 평균 1.82%였다.
그 중 가장 심각했던 곳은 바로 카메룬(Cameroon)이었는데 전체인구 56.1만명에서 44.5%인 25만명이 사망했다.
1918년 9월이 되자, 유럽대륙에서 성행하던 독감은 보스턴 항구를 통해 미국에 도착했다.
매일신보(每日申報)의 기사에 따르면 조선에서도 1918년 10월 학교와 군대에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독감(毒感)은 악성(惡性)으로 변했다 하였다.
이것은 가장인명피해를 낳은 2차감염이라고 하는 것인데 1차 캔자스주에서 발생하여 유럽으로 전파되고 유럽에서 다시 미국으로 전파된 상황을 그려볼 수가 있는데 사실상 이렇게 되므로써 미국전역에서 퍼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되자 의사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붐비는 장소나 다른 사람들을 피하라고 촉구했다.
다른 이들은 계피를 먹거나, 와인을 마시거나, 심지어 옥소(Oxo)의 고기 음료(beef broth)를 마시는 것을 포함한 치료법을 제안했다.
의사들은 또한 사람들에게 공공장소에서 입과 코를 가리라고 말했고 한때, 아스피린(aspirin)의 사용은 전염병을 일으키는 요인이라 하여 비난받았다고 한다.
우스게 소리로 1918년 6월 28일, 사람들에게 독감의 증상을 알리는 공지가 영국신문(British papers)에 실렸기에 알고 보니, 이것은 실제로 비타민 회사에서 만들어 판매하는 알약인 포마민트(Formamints)에 대한 광고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지금이나 그때나 가짜 '치료제'를 광고해 돈을 벌려고 했다.
때마침 현재 '우한코로나19 영향으로 도쿄 한 복판 약국에서도 이와같은 현상이 목격되는 바다.
이 광고는 포마민트가 "감염 과정을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하며, 어린이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하루에 네 다섯 개의 알약을 먹도록 강요했다.
물론 학교와 극장은 문을 닫았고 뉴욕시 보건부는 거리에 침을 뱉는 것을 불법으로 하는 위생법 개정안을 엄격하게 시행했다고 알려진다.
미국인들은 감염을 피하는 방법에 대해 비슷한 조언을 받았는데 다른 사람들과 악수를 하지 말라하고, 실내에 머물며, 도서관 책에 손을 대지 말고,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권고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00년전에 그러하였음에도 현재 미국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는 것에대해 당연시하고 아픈사람만 마스크를 해야하며 마스크를 쓴 사람은 예의가 없다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에 과연 같은 미국인이 맞는가 하는 의문도 가져보게 하는 것이다.
당시의 미국인들이 실행한 마스크쓰기가 잘 전달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지금의 한반도 주민들이 아닐까 한다.
10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역사가 달라졌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일부 지역에서 의사 부족을 초래했고, 많은 의사들이 병에 걸렸다.
학교와 다른 건물들은 임시 병원이 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의대생들이 감염된 의사를 대신해야 했던 것은 지금상황과 거의 비슷하다.
낸시 브리스토우(Nancy Bristow)의 저서 "American Pandemic:1918년 유행한 인플루엔자 전염병의 잃어버린 세계"[Oxford University Press, 2016]에서 말하길 이 바이러스가 전 세계 5억 명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그는 이 바이러스가 미국 인구 1억320만명의 25%인 2,580만명을 감염시켰다 했으며, 미 해군 수치가 전해군의 40%까지 올라갔다 하였는데 바다에서 고립되어 복무하는 조건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이 독감은 제2차 감염기간인 1918년 9월에 메사추세츠(Massachusetts)에 있는 군사 기지인 캠프 데븐스(Camp Devens)에서 6,674건의 발병 사례가 보고되었고 대부분이 이등병인 약 850명의 군인이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하였는데 이는 조선에서 1918년 10월 학교와 군대에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독감[風邪]" 부산일보[釜山日報] 1917년 12월 09일
"폭위[暴威]를 떨치는 풍사[風邪]의 신 스페인독감" 부산일보[釜山日報] 1918년 10월 30일
위 글은 바로 조선총독부 기관지라 알려진 매일신보의 기사이다.
사실상 1917년 12월부터 조선(朝鮮)에서는 유행성 독감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부산일보가 보도했던 것 같다.
이것은 북아메리카대륙 캔사스주에서 1918년 1월 처음 발생한 것 보다 훨씬 바른 시각이다.
풍사(風邪)를 일본에서는 감기라 하고 한자사전에는 바람이 병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을 이르는 말이며 백과사전을 보면 풍(風)은 봄철에 발생하는 기후이지만 일년 내내 바람이 나타나므로 일년 내내 발생할 수있고 외감병(外感病)을 야기하는 주요 원인으로 다른 사기(邪氣)와 결합하여 여러 가지 병을 야기한다 하였다.
또한 사(邪)는 감기(感氣)를 말하거나 요사스런 기운이라 하였다.
그러나 풍(風)은 역사적으로 풍이(風夷)와 견주어 볼 수 있는 것으로 옛 환국(桓國)을 세우는데 주축이 되었던 풍이족(風夷族)을 풍이(風夷)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풍이(風夷)는 풍이(馮夷)와 같고 풍이족(風夷族)은 뱀(巳)의 상징성을 가지며 취래장풍기만리(吹來長風幾萬里) 즉 취래(吹來)는 불어온다는 말이고 장풍(長風)은 오래 부는 바람으로 해석되지만 바람은 풍이(風夷)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바람(風)이 기만리(幾萬里)를 불어온다고 하였던 것은 수만리의 영토를 풍이(風夷)가 차지한 것이란 말과 같다라고 본 블로그에서 전한바가 있다.
바람은 북아메리카대륙으로 모두 날라 들어간다.
바로 1년내내 불어되는 센바람 하리케인(Hurricanes)과 회오리돌풍 토네이도(Tornado)가 그것이다.
풍이족은 뱀을 상징하였는데 뱀은 방울뱀으로 묘사하였고 방울뱀(rattlesnake)은 살무사과에 속하는 방울뱀속(Crotalus)과 꼬마방울뱀속(Sistrurus)으로서 아메리카 대륙의 고유종이며, 캐나다의 앨버타주 남부와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남부에서 남아메리카의 아르헨티나 중부에 걸쳐서 분포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대부분의 종들은 미국 남서부와 멕시코에 살고 미시시피강 동쪽에는 4종이, 남미에서는 2종이 발견되며 미국에서 방울뱀의 종류가 가장 많은 주가 텍사스와 애리조나라고 하고 있다.
방울뱀은 대초원, 습지, 사막, 숲을 포함한 매우 다양한 서식지에서 발견될 수 있다.
방울뱀의 가장 유력한 조상 지역은 멕시코의 시에라 마드레 오시덴탈(Sierra Madre Occidental)지역이다. 조상의 가장 유력한 초목이나 서식지는 소나무 오크 숲(pine-oak forests)으로 보인다
본 블로그 글 "방울뱀(Rattlesnake, 響尾蛇)으로 본 마지막 대조선(大朝鮮)
https://han0114.tistory.com/17050522"에서 방울뱀은 미국독립전쟁 기간 동안 식민지 사람들의 상징적인 동물이 되었고, 개즈던 깃발(Gadsden Flag)에 두드러지게 그려져 있고 미국 군대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며, 미국 내의 정치운동에도 이용되고 있다.
본 블로그 글 "모계사회 회귀운동단체 피멘(FEMEN)과 풍이족(風夷族)이 주는 뱀, 용(龍)상징성 https://han0114.tistory.com/17050521에서는 장풍(長風)이란 면면히 이어 온 풍성의 후예, 즉 풍이족(風夷族)이 역사에 불어오는 바람을 의미하고 장풍이 기만리(幾萬里)를 간다고 했으니 풍이족(風夷族)의 후예가 세계 넓게 퍼져 사는 영역이 그만큼 넓어질 것이라는 말이라 했다.
이 바람이 기만리(幾萬里)를 불어온다.
한인천제가 지금으로부터 9,900년 전에 한국(桓國)을 세우고 뱀을 종족의 아이콘으로 썼던 구한족(九桓族)의 지도자가 되면서, 사(巳)에 획을 하나 그어 파(巴)자를 만들고 용이라고 하였다. 한인천제의 이름을 안파견(安巴堅)이라고 하였는데, 안파견에 들어 있는 파(巴)는 용을 의미하는 문자이다. 이후로 용은 풍이족(風夷族)이 12제국을 하나로 묶어 한국을 세우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하화족(夏華族)의 역사에서는 풍이를 풍씨(風氏)라고 하였다.
본 블로그 글 "산양호(山羊湖)는 고트레이크(goat lake)이다 https://han0114.tistory.com/17050611" 에서 조선왕조실록 예종(睿宗:1年)1469 년 6 월 29 일 기사를 인용하길...臣竊惟本國, 表裏山河, 幅員幾於萬里, 戶數百萬, 兵一百萬, ...馮燕納款, 隋六師大敗, 而唐賓之, 遼隻輪不返, 而宋事之, 金稱父母之鄕, 元爲甥舅之國。
삼한은 본시 안팎 영토넓이가 몇 만리라는 것은 거의 북아메리카대륙의 넓이를 말하는 것으로 군사가 1백만명이라 하였으며 풍연(馮燕) 또는 풍이(馮夷)가 거한 황하(黃河) 즉 미시시피강의 신 하백(河伯)에게 정성을 바쳤고 수나라의 육사의 모든 군사가 고구려에 대패하였다는 사실과 당조는 신라를 손님으로 깍듯이 대우하였으며 요조는 고려에게 패군하여 처참하였고 송조는 고려를 섬겼으며 금조는 고려를 부모의 고향이라고 하였고 원조는 조선을 장인의 나라이다라고 하였던 바, 삼한은 반도역사가 말하는 중국역사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으며 위에서 말하는 원조(元朝:1271-1368)역시 고려(高麗)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고 했다.
결국 풍사는 감기 또는 독감이라 하는 말이다.
굳이 매일신보가 풍사라 한 것은 풍이의 땅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불어온 감기라는 것쯤은 얼마든지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풍사(風邪)는 삼한조선이 관할 했던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생된 독감이라는 사실이 여러각도에서 일치함을 알 수가 있다.
끝으로 험프리스(Humphries)가 제기한 북부 중국인노동자의 실체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그 북부중국인은 분명 1910년에 멸망한 청조(淸朝)의 유민(遺民)이라 생각할 수 있고 어쩌면 조선유민(遺民)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던 19세기 잔혹한 서세의 할큄에서 견딜 수가 없어 처절하게 갈라진 고려인(高麗人)들이라고 볼 수 있어야 한다.
사실상 서양역사에는 다른 역사명칭은 다 살아남아도 조선이란 명칭은 서양세력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되고 아예 사라지고 없다.
대신 그 자리에 신영어체인 "Korea" 가 남아 있을 뿐이다.
본 블로그 글 "COREA, CORIA, CORREA, KORAI의 실체
https://han0114.tistory.com/17050771"에서 언급하였듯이 "COREA"란 명칭사용은 1878년 5월 뉴욕에서 선대이메거진(Sunday Magazine)에 의해 마지막으로 지칭한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자취를 감춰버렸다.
현재 어느누구도 한국인을 COREA 라고 표기하지 않는다.
물론 구영어체인 "Corea"은 어느 순간에 신영어체 "Korea" 란 명칭에 죄다 흡수되었다.
결국 이러한 사라짐과 흡수라는 과정속에서 우리에겐 한반도 역사만이 존재할 뿐인데 그렇더라도 삼한이 가진 기존 영광스러웠던 역사는 결코 지워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본 블로그에서 주장한 것처럼 삼한전통계보의 방계 청조는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있지만 고려라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본 블로그 글 "텍사스 롱혼(Texas longhorn)과 청일전쟁 https://han0114.tistory.com/17050728" 에서 충분히 나타나고 설명한 사실이다.
신라를 통합한 고려(高麗)를 지나라 하는 것도 전통중국 지나조선(支那朝鮮)으로 합칭되어 불리어졌지만 지금은 그 고려도 사라지고 조선도 사라져 지나만 남았는데 이것은 현재 신중국이 차지하고 있다.
지금 우한코로나바이러스로 세계가 앓고 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1918년 스페인독감에 대해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도 보고 해석도 나름대로 해보았다.
지금은 전 세계인이 코로나바이러스19 의 퇴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온마음을 다해 응원하는 바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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