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동물

산양호(山羊湖)는 고트레이크(goat lake)이다.

한부울 2013. 2. 19.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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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양호(山羊湖)는 고트레이크(goat lake)이다.

 

글쓴이:한부울

 

대명은 고려이다.

일백만의 군사를 가진 조선은 당시 인구가 약 오천만명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한부울]

 

세조가 ‘나의 제갈량’이라고 했던 조선초기 문신 양성지(梁誠之:1415-1482)의 상소문인데 이는 조선왕조실록 예종(睿宗:1年)1469 년 6 월 29 일 기사이다.

그래서 아래 부첨하였다.

 

○工曹判書梁誠之上書曰:
一, 議長墻。 臣竊惟本國, 表裏山河, 幅員幾於萬里, 戶數百萬, 兵一百萬, 堯與竝立, 周不爲臣, 元魏通好, 馮燕納款, 隋六師大敗, 而唐賓之, 遼隻輪不返, 而宋事之, 金稱父母之鄕, 元爲甥舅之國。 我大明高皇帝亦謂三韓, 非下下之國。
1. 장장(長墻)에 대한 의논입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본국은 안팎이 산과 강으로 되어 있어 넓이가 몇만 리(里)이고, 호수(戶數)가 1백 만이고, 군사가 1백 만으로, 요(堯)임금과 아울러 고, 주(周)나라에는 신하가 되지 않았고, 원위(元魏)와는 통호(通好)하였으며, 풍연(馮燕)에는 정성을 바쳤고, 수(隋)나라는 육사(六師)가 대패(大敗)하였고, 당(唐)나라는 손님으로 대우하였고, 요(遼)나라는 패군(敗軍)하여 처참하였으며, 송(宋)나라는 섬겼고, 금(金)나라는 부모(父母)의 고향이라고 일컬었으며, 원(元)나라는 사위와 장인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도 또한 삼한(三韓)이라 이르고 하하(下下)의 나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위 글을 다시한번 풀어보면 양성지가 말하길 본국 즉 삼한(三韓)은 안팎이 산과 강으로 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영토가 몇만리(幾於萬里)이며 군세가 일백만(1,000,000)이란 대국이었기 때문에 요(堯)임금과 병립 아물러 공존하였고, 주(周)나라에 굴복하지 않아 신하가 되지 않았으며 원(元)과 위(魏)와 서로 왕래하면 친분을 쌓았다 하였으며 풍연(馮燕) 또는 풍이(馮夷) 황하(黃河)의 신 하백(河伯)에게 정성을 바쳤고 수(隋)나라의 전체군사 즉 육사(六師)를 괴멸하였고 당(唐)나라는 손님으로 대우하였고 금(金)과 송(宋)의 협공으로 멸망한 거란(契丹)족의 정복 왕조 요(遼:907-1125)나라는 우리 고려에게 대패하여 처참할 지경이었으며 그런데 갑자기 번역에서 송나라를 섬겼다고 하였는데 원문은 '而宋事之'이라 이어 송(宋)나라는 우릴 섬겼다고 하는 것이 맞으며 금(金)나라는 우리나라를 부모의 고향이라고 하였다. 앞서 주(周)나라에 굴복하지 않아 신하(不爲臣:事)가 되지 않았다는 언급이 있어 이것은 이 문장 전체를 가름 할 수 있는 주요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임에도 어찌하여 갑자기 문맥도 맞지 않는 송나라를 사대(事)한 것처럼 번역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어 원(元)나라와 장인과 사위관계라 한 것은 꺼꾸로 고려(高麗)가 황제의 나라가 되고 사위나라가 원나라이니 원나라 임금에게 충(忠)자가 들어감이 맞다.

문장 흐름상도 그렇지만 원말명초 때 강서(江西)풍성(豊城)사람 주선(朱善1314-1385)은 그의 혼인율법을 상소한 것을 보면
故稱異姓大國曰「伯舅」,小國曰「叔舅」。列國齊、宋、魯、秦、晉,亦各自為甥舅之國
이라 하여 고대 성(姓)이 다른 외가에 천자 대국을 백구(伯舅)라고 높여 불렀고 작은 나라는 숙구(叔舅)라고 불렀는데 이는 열국시대의 이것들을 각각 스스로 생구지국(甥舅之國)이라고 한다.

바로 삼한(三韓)고려의 실체는 생략하고 본 것이기 때문에 천자국과 혼인관계를 맺은 齊, 宋, 魯, 秦, 晉 스스로가 생구지국이라 하였던 것이다.

데릴사위(甥)와 시아버지(舅)관계이다.

현재 반도역사는 사위는 고려가 되고 시아버지는 원나라가 되어 시어버지가 권세인 것처럼 꾸몄지만 고금동서(古今東西)에서 정략혼인(政略婚姻) 또는 혼인동맹(婚姻同盟)이란 틀에서 볼 때 작은나라가 큰 나라에 딸을 주는 것이 통례인 것을 감안하면 뒤 바뀐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리할 문장은 我大明高皇帝亦謂三韓, 인데 아(我) 즉 우리 명(明)나라라고 하였고 고황제(高皇帝)라 한 사실에서도 다른 정복왕조와 다르게 명을 아(我)라고 칭하여 동질성을 나태내었고 고황제는 태조 이성계를 칭한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고황제 스스로가
삼한(三韓)이라 하였다는 사실은 여태 반도역사의 허접한 논리가 한꺼번에 무너지게 되는 역사사실이 아닐 수 없다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도 반도역사를 추종할 것인가? 

 

문신 양성지(梁誠之:1415-1482)의 상소문에서  "1. 장장(長墻)에 대한 의논입니다"라고 시작한 본론으로 가 그의 요지는 조선과 중국이 접해있는 벽동(碧潼) 경계(境界)에 중국이 긴 담장, 장장(長墻)을 쌓는다 하여 조선과 중국의 영역이 혼선을 생기게 될 것을 염려하였고 한쪽 영역은 담장 안에 있게 되고 다른 한 쪽은 중국의 주장에 좌지우지 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을 조선 강역에 대한 걱정하는 글이다. 세부적으로 알아보면 압록강(鴨綠江)과 산해관(山海關) 사이에 있었던 여덟 군데의 역참(驛站)인 동팔참(東八站)의 길에 중국이 담장[墻]을 쌓아서 즉 동한(東韓)땅 평안도의 중북부에 있는 벽동(碧潼) 경계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결국 동교(東郊)의 땅이 섞일 수 있다는 사한이다.

 

삼한(三韓)에서 대대로 지키어 양국(兩國)의 강역(疆域)을 서로 섞일 수 없게 하였으니(誠以東郊之地, 三韓世守, 兩國疆域, 不可相混)란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서로 엄격하게 영역을 서로 존중하였던 바 이로 인하여 만약 혹 섞인다면 서로 사이가 벌어져 불화 즉 흔단(釁端)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다는 글의 요지이다.

이것은 삼한 내의 갈등을 경계한다는 의미이다.

 

또 이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중국(中國)이 바로 고려(高麗)임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이 기록 첫 머리에 등장하는 글에서도 이러함을 강하게 알 수 있는데 조선문신 양성지가 예종(睿宗1年:재위 1468-1469)에게 상소하길 “우리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도 또한 삼한(三韓)이라 이르고 조선을 하하(下下)의 나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한 사실은 많은 의문을 풀어주고 있다.

 

근대 신중국사에서 입이 닳도록 중국이라고 하던 명(明)나라를 양성지가 아대명(我大明) 즉 우리의 대명(大明)이라고 하여 우리라 했다는 것은 바로 대명(大明)이 삼한 내에 있을 수밖에 없는 동질성을 그대로 숨김없이 토로 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뜻하는 우리민족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우리의 대명 고황제(高皇帝)가 조선(朝鮮)을 하하나라(下下國)라고 하지 않았다는 언급은 대명(大明)이 우리(我)는 삼한(三韓)의 나라일뿐만아니라 조선(朝鮮)을 부하의 나라라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조선(朝鮮)이 어디에 있었던 간에 중국의 속국, 봉국이 아닌 그냥 조선(朝鮮)으로 존중되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조선문신(朝鮮文臣) 양성지(梁誠之)가 놀랍게도 서두에서 말하길 본국(本國)은 안팎이 산과 강으로 되어 있어 넓이가 몇 만(萬)리(里)이고, 호수(戶數)가 1백만이고, 군사가 1백 만으로...”란 사실에서 보면 본국은 조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일백만이란 군사 수치상 단적으로 풀이 하더라도 조선은 허접한 국가가 아닌 그야말로 한 대륙을 통치하고도 남을 대국임을 짐작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의 강역 넓이가 그냥 만리도 아니고 몇 만(萬)리(里)이라 하였음에도 총인구를 책정할 수 있는 호수(戶數) 집 가옥(家屋)은 달랑 1백만 가구라고 하였으니 5인 가족을 곱하여도 5,000,000 명(名)이 조금 넘는 수치 밖에 나오질 않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수치에서 많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어진다.

Colin McEvedy and Richard Jones, [Atlas of World Population History], New York, 1978

위 현대 인구론에서 보더라도 맥에브디와 존스(McEvedy와 Jones)의 인구대비 군사 숫자 산정에서 2% 범주에 있다는 자료를 참고 한다면 군사 일백만이니 2%를 산정하면 50,000,000 명이 된다.

그러니 오백만이 아니라 10배의 오천만명이 된다는 뜻이다.

왜 이런 현격한 차이가 날까?

오백만명의 인구에서 일백만명의 군사라는 것은 당치도 않는 이야기다.

현재 우리나라 병력수자가 60만 대군이니 위 산정율을 대입하면 30,000,000명에 대한 인구 숫자가 상정된다.

물론 인적인 문제에서 과거 군대상황과 현대군대상황은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

때문에 현대들어 인구산정에서 2% 대입이라는 것은 실제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15세기에 오천만명이란 인구였다면 거의 북아메리카대륙 전체의 인구라고 할 수가 있다.

가장 최근의 연구결과는 대략 1500년 경의 아메리카 대륙의 인구를 4000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종(睿宗:1年)1469년 당시 조선의 군사(軍士) 병력수가 1백만명(1,000,000)이라는 시실은 실제로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이러한 수치가 주는 의미는 그야말로 대국으로서의 입지를 충분하게 짐작할 수 있는 것으로서 한반도에 쳐박혀 나약한 처지의 조선이 아님을 상기시키는 이야기다.

 

여기서 덧 붙인다면 근세기 조선말기(朝鮮末期)때도 이와 같은 수치의 군사가 조선 경내(境內)에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초기 예종 때나 조선말기 때도 거의 같은 규모의 군사를 조선은 유지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니 만큼 적어도 군사력만큼은 이설이 없다 할 것이다.

조선은 건국시점부터 일백만명의 군사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자료에서 확인이 가능했다.

양성지가 예종에게 상소를 올린 시기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00년 전 이야기다.

일본 왜구가 일백만을 모병하여 상국인 조선을 공격했다면 분명 조선의 병력수도 그 만큼이 아니면 그 이상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해야 맞다.

 

(중국기록과 선교보고 : 미국장로회상해지부)

CHINESE RECORDER MISSIONARY JOURNAL
SHANGHAI, AMERICA PRESBYTERIAN MISSION PRESS 1886
corea- military officers(1886 :고종23년)

The army is supposed to number 989,376 men, cavalry(기병) and infantry(보병), to wit(using the previously-described alternative names of each province)

metropolitan province 시(市), 도(道) 128,443 명

hu si 湖西 139,229 명

hu nan 湖南 210,574 명

ling nan 嶺南 310,447 명

hai si 海西 153,828 명

kwan tung 關東 46,839 명

합계989,376명이다.

 

또한 위 자료는 1886년 고종23년 중국기록과 선교보고란 자료인데 미국장로회상해지부가 보관하던 기록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은 조선 군사가 전국각지에서 합하면 정확하게 989,376명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어 늘 상 군사보유 숫자가 약 백만대군이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靑史:八道總目

京外諸軍 1,243,704

七道束伍軍 191,524

水軍 47,611

烽軍 1,479

保 29,122

驛吏奴 74,326(고려, 조선시대, 역마를 갈아타는 역참에 딸려 심부름을 하던 사내종)

 

또한 위 자료 청사 팔도총목(靑史:八道總目)를 보더라도 서울과 그밖 지방의 제군 군사 숫자가

京外諸軍 1,243,704

일백이십만명을 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렇듯 정확한 수치가 나오는데 어찌 믿지 않는지 알 수가 없다.

한번 생각해보라.

이러한 규모의 나라가 어찌하여 한반도에 할일없이 쳐 박혀 하찮은 신세에 있었겠는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거짓된 역사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상식적으로 풀어 볼 수밖에 없다.

반도역사가 너무나도 턱 없는 소리를 하니 이것을 배우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실제로 조선이 헛개비인줄 잘못 알고 비관하고 자학까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걱정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일제가 뿌려놓은 역사를 비판없이 그대로 옮겨 앵무새가 된 역사학자들의 잘못이다.

분명히 존재한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려고 하지 않은체 오히려 거짓으로 꾸며 놓은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국사현실에서 비통함을 감출 길이 없고 땅을 치지 않을 수 없지만 무엇보다도 분노를 느끼는 것은 이렇게 들어나고 있는 진정한 역사사실마저 감추기에 바쁘고 이것을 제대로 알리려 하지 않는데 있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 것인가?

보잘 것 없는 지식이 두려운 것인가? 아니면 배설 될 밥통이 사라질 것이 두려운 것인가?

조선은 일백만 대군을 가지고 있었던 나라임을 분명히 여기서 확인 했고 천리가 아니고 또한 만리가 아닌 몇 만리의 강역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나라의 인구도 따져보면 거의 오천만명이라는 수치의 나라임을 밝힌 것이 된다.

 

이런 조선 북쪽 경계에 중국이라는 고려 조상국 천자가 있었다는 사실까지 알 수가 있었다.

조선이 중국을 왜 적대시 하지 않고 조상처럼 섬겼는가 하는 점도 이제 비로소 알았다.

그저 한반도란 지형적 특성을 핑계로 마치 숙명적으로 이와같은 불리함을 감수한 체 현실에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허접한 조선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찮은 일본 열도 왜구 등쌀에 늘 괴롭힘을 당한 것처럼 꾸며진 역사를 대해야 하는 것은 죽기보다 못한 것이다.

이러한 느낌이 청소년들에겐 오죽하겠는가?

마땅히 이러한 규모의 군사라면 대륙으로 뻗어 나가야 함에도 그렇지 못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제약은 좁은 탈출구만이 있는 한반도란 점이다.

이런 식으로 지형적인 불리함을 억지로 역사처럼 묶어 놓았으니 지레 포기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론 늘 상 중국 고려와 조선의 문제를 이성적으로 해결하려고 했으며 고려와 조선을 넘는 세계 문제라면 고려 중국과 이렇듯 허심탄회하게 의논 했을 것이고 목적이 잘못되지 않다면 단연코 군사를 합쳐 적을 무리쳤을 것이라고 충분하게 짐작 된다는 점을 쉽게 확인 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 이러한 거대한 우리의 역사가 근세기들어 타의에 의해 한반도에 들어 앉혀지면서 부터 못된 숙명이라는 것이 생겼다고 본다.

그래서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가 발생했다는 것이고 그때부터 일제가 삼한을 한반도에 쑤셔 넣어 마음대로 조종했다는 이야기가 성립이 되며 끝끝내 나약한 봉처럼만들어 삼한역사전체를 하찮게 만들고 휘황찬란하게 빛나던 영광의 역사는 감추거나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것을 충분하게 짐작케 하는 것이다.

한반도에 들어오기전 그때 조선은 일백만 대군으로 갖추어진 대국이며 강국이었던 것이다.

 

고려가 대명(大明)이며 당시 삼한이 통치하는 사이(四夷)의 천자국 중앙정부이었음을 알게 하였다.

청나라는 중국을 봉성(奉省)이라고 지칭하였다는 사실 또한 익던 소리이다.

봉성(奉省)은 고려봉자(高麗棒子)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고려봉자라고 하는 것은 현 신중국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비하하는 지칭이란다.

봉(奉)과 봉(棒)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도 지금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양식있는 한중역사학자들이 중국 한(漢)족은 허구라고 단정을 내렸다는 사실 또한 틀리지 않음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삼한의 백성들은 모두 고려, 중국을 보고 아대명(我大明)이라고 지칭하였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이러한 체제를 서양사와 동양사로 구분하면서 역사판짜기가 시작되었고 고려와 조선  즉 삼한을 한반도 집어 넣고 중국과 한족이라고 하여 따로 만든 것이 된다. 청나라 사람들이 그래서 천자가 있는 땅을 봉성이라고 했을 것이고 조선 영역 바로 북쪽에 존재하였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이것이 오늘날 북경이라고 하는 곳이며 그곳은 동아시아대륙에 없었다는 것도 밝혀 진 셈이다.

아대명(我大明)이라고 한 양성지가 왜 이런 사실을 몰랐겠는가?

때문에 양성지는 고려(高麗)가 대명이라고 했을 것이고 그 대명이 조선(朝鮮)에 근접해 있었던 고로 삼한영역을 구분하였건만 중국에서 긴 담장을 친다고 하니 그러한 구분이 유명무실해 질까봐 지례 걱정하고 나선 것이다.

고려인 중국과 조선은 장성이라고 하지 않고 담장이라고 했다.

그만큼 군사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고려는 왜 구태어 긴 담장을 쌓으려고 했을까?

 

고려(高麗)에서 분리한 조선(朝鮮)이기 때문에 설혹 같은 삼한이라고 할지라도 이성계(李成桂,1335-1408,재위:1392-1398)와 같은 위인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면 중국 대명 고려가 지니고 있었던 심사를 짐작케 하는 것이다.

갈등이야 왜 없었겠는가?

이 긴 담장의 끝인 벽동(碧潼)을 반도역사에서 그냥 평안북도(平安北道) 중북부(中北部)라고 하였는데 위 기록에서 보면 분명 동한(東韓)땅의 벽동(碧潼)이라고 한 사실관계가 전혀 다름을 알 수 있고 지형적인 문제에서 이를 명확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위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어찌하여 한반도 서북쪽에 있는 벽동을 동한(東韓)이라고 했을까?

동한(東韓)이라 함은 동쪽에 큰 나라 또는 동쪽에 큰 땅이라고 해석되어야 맞다.

한반도 벽동을 동쪽의 큰 나라 또는 큰 땅이라고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誠以東郊之地, 三韓世守, 兩國疆域, 不可相混),

이 한어문장에서 보듯이 비록 고려와 조선이 같은 삼한이라고 할지라도 진실로 동교(東郊)의 땅은 삼한(三韓)에서 대대로 지키어 양국(兩國)의 강역(疆域)을 서로 섞일 수 없게 하였다는 사실은 서로 지켜야 할 원칙이고 예의인 것이다.

동교(東郊)는 동쪽 교외라는 뜻 보다는 일본자료를 보면 들판, 야원(野原)등으로 해석되기도 하였고 중국자전에 보더라도 교(郊)를 야(野), 황(荒)으로 읽었으니 동교는 아주 넓은 들판이나 인적이 드문 황량한 평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즉 중국의 긴 담장은 동한(東韓) 또는 동교(東郊)의 땅 벽동(碧潼)의 경계(境界)인 산양호(山羊湖)사이에 이르고 담장내에 들어오게 되어 혼란이 있을 밖에 없다는 요지의 설명은 평원을 끝으로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볼 때 그곳은 바로 산양들이 많은 호수가 있었다는 설명이 된다.

아주 넓은 들판이나 인적이 드문 평원에 산양이 있어 산양호라고 지칭하였다는 이야기다.

한반도 벽동에 무슨 호수가 있어 산양호라 하였겠는가?

산양뿐만아니라 호수조차도 눈 딱고 보아도 없다.

그렇다면 산양호는 어딜 말한 것일까?

산양호(山羊湖)는 명칭그대로 산양(山羊)이 많은 호수(湖:lake)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지명이 주는 역사성(歷史性)이라고 할 수 있다.

산양(山羊)을 영어로 고트(goat)라고 한다.

산양호는 바로 고트레이크(goat lake)인 것이다.

이 고트레이크를 인터넷에서 검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인터넷은 이래서 좋다.

기대를 충족시키듯 공교롭게도 북아메라카대륙에 아래 다섯군데의 고트레이크(goat lake)가 나타난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British Columbia州)경계의 알래스카(Alaska)고트레이크

서부캐나다 경계의 몬태나(Montana州)코트레이크와 아이아호(Idaho州)고트레이크

동부캐나다 경계의 미네소타(Minnesota州)고트레이크와 미시간(Michigan州)고트레이크 이다.

 

위의 붉은 선을 표시한 경계의 산양호 즉 고트레이크가 있다.

이 붉은 선이 담장이 될 수 있을 것인가는 더 파악해야 할 문제이다.

물론 조선의 벽동이란 곳에 있었던 산양호가 실제로 있었다면 바로 이곳이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Capra Linnaeus, 1758

 

Capra hircus Linnaeus, 1758

 

科學分類

界: 動物界 Animalia

門: 脊索動物門 Chordata

綱: 哺乳綱 Mammalia

目: 偶蹄目 Artiodactyla

科: 牛科 Bovidae

亞科: 羊亞科 Caprinae

屬: 山羊屬 Capra

種: 野山羊 Capra aegagrus

亞種: 家山羊 Capra aegagrus hircus

三名法 Capra aegagrus hircus(Linnaeus, 1758)

 

위의 분포지도는 바로 생명의 백과사전(EOL:Encyclopedia of Life)이 제공하는 DNA 분석을 바탕으로 한 분포지도인데 대표적인 산양(山羊)의 종(種) Capra Linnaeus, 1758 과 Capra aegagrus hircus(Linnaeus, 1758)이 주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북아메리카대륙과 위 산양호라고 판단되는 5군데의 고트레이크(goat lake)가 근원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판단을 할 수 있게 한다.

Goats(Capra hircus )in Montana

산양의 원종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종(Capra hircus)은 린네의 이름이 붙어 있어 근원종이라고 보면 분포지가 위 다섯군에 가운에 있는 몬태나(Montana)를 지정하고 있다는 사실도 무시될 수가 없다.

이 분류지도에서 명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론적으로는 이렇게 일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도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것들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고 단정내릴 수도 없는 문제이다.

또한 본 블로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쉽게 같다고도 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렇더라도 이만큼 온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싶다.

고려가 중국이고 대조선의 군사가 일백만명 이상이라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이야기다.

그래서 당시 조선의 인구가 적어도 오천만명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적인 사실과 더불어 조선의 강역 또한 몇 만 리이었다는 사실은 충격 이상이고 때문에 이 글을 씀에 있어 흥분을 감출 수가 없다.

이 '기만리'라는 것은 곽박이 조선천독(朝鮮天毒)은 5 천축국을 거느리고 중천축국(中天竺國)이 되어 지방삼만리(地方三萬里)를 통치하였다는 사실과도 같다.

산양이 있는 곳, 그곳이 동한(東韓)의 땅이며 동교(東郊)의 땅, 벽동(碧潼)의 경계(境界)인 산양호(山羊湖)라 하여 고려, 중국이 긴 담장을 쳤다고 하였는데 어찌 지금은 볼 수 없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곳은 진정 조선땅이란 말인가?

그곳이 지금 어디라 할지라도...결국 삼한 땅임은 결코 부정할 수 없게 될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家山羊(Domestic goat)Irish_Goat]

 

Wild goat (Capra aegagrus) distribution ranging from Europe and Asia Minor to central Asia and the Middle East. It is the ancestor of the domestic goat.

 

Capra aegagrus aegagrus (Bezoar Ibex)

Capra aegagrus blythi (Sindh Ibex)

Capra aegagrus chialtanensis (Chiltan Ibex)

Capra aegagrus cretica (Kri-kri)

Capra aegagrus hircus (Domestic Goat)

Capra aegagrus turcmenica (Turkmen Wild Goat)

 

Domestic goat(Capra aegagrus hircus, sometimes referred to as Capra hircus; includes feral goat)

家山羊(学名:Capra aegagrus hircus)又稱夏羊、黑羊或羖羊,

野山羊 Capra aegagrus 들염소 Capra aegagrus

家山羊 Capra aegagrus hircus

염소 Capra aegagrus hir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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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睿宗:1年)1469 己丑 / 명 성화(成化) 5年) 6月 29日(辛巳)

국정 전반에 관한 공조 판서 양성지의 상소

一, 議長墻。 臣竊惟本國, 表裏山河, 幅員幾於萬里, 戶數百萬, 兵一百萬, 堯與竝立, 周不爲臣, 元魏通好, 馮燕納款, 隋六師大敗, 而唐賓之, 遼隻輪不返, 而宋事之, 金稱父母之鄕, 元爲甥舅之國。 我大明高皇帝亦謂三韓, 非下下之國。 以遼東之東百八十里, 連山爲界, 以爲把截, 以聖人明見萬里之量, 豈不知土地沃饒, 便於畜獵, 而捐數百里之地, 以空其處者? 誠以東郊之地, 三韓世守, 兩國疆域, 不可相混, 若或相混, 則易以生釁故也。

1. 장장(長墻)에 대한 의논입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본국(本國)은 안팎이 산과 강으로 되어 있어 넓이가 몇만 리(里)이고, 호수(戶數)가 1백 만이고, 군사가 1백 만으로, 요(堯)임금과 아울러 섰고, 주(周)나라에는 신하가 되지 않았고, 원위(元魏)와는 통호(通好)하였으며, 풍연(馮燕)에는 정성을 바쳤고, 수(隋)나라는 육사(六師)가 대패(大敗)하였고, 당(唐)나라는 손님으로 대우하였고, 요(遼)나라는 패군(敗軍)하여 처참하였으며, 송(宋)나라는 섬겼고, 금(金)나라는 부모(父母)의 고향이라고 일컬었으며, 원(元)나라는 사위와 장인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도 또한 삼한(三韓)이라 이르고 하하(下下)의 나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육사(六師):천자가 거느린 육군(六軍)이란 뜻

 

誠以東郊之地, 三韓世守, 兩國疆域, 不可相混, 若或相混, 則易以生釁故也。 今聞中國, 將築墻于東八站之路, 以至碧潼之境, 此實國家安危所關, 不可不深慮也。

진실로 동교(東郊)의 땅은 삼한(三韓)에서 대대로 지키어 양국(兩國)의 강역(疆域)을 서로 섞일 수 없게 하였으니, 만약 혹 서로 섞인다면 흔단이 일어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지금 듣건대, 중국에서 장차 동팔참(東八站)의 길에 담장[墻]을 쌓아서 벽동(碧潼)의 경계에 이르게 한다고 하니, 이는 실로 국가의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바이므로,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팔참(東八站):압록강(鴨綠江)과 산해관(山海關) 사이에 있었던 여덟 군데의 역참(驛站). 우리나라 사신(使臣)이 중국(中國)에 왕래(往來)하던 교통로(交通路)였다 하였음

 

長墻雖自遼河至于鴨綠, 猶有可慮, 若至于碧潼之境山羊湖之間, 則是東韓之地, 在彼封域之中。 如在人肘腋之間, 如處人家園籬之內, 一此一彼, 任彼主張。 豈特長沙舞袖而已哉? 此其害三也。

장장(長墻)이 비록 요하(遼河)에서 압록강(鴨綠江)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염려할 만한 것이 있는데, 만약 벽동(碧潼)의 경계(境界)인 산양호(山羊湖)사이에 이른다면, 이는 동한(東韓)의 땅이어서 저들의 봉역가운데에 있으니, 사람에 있어서는 팔꿈치와 겨드랑이의 사이와 같고 인가(人家)가 울타리 안에 있는 것과 같아, 한쪽은 여기에 있고 한쪽은 저기에 있어서 저들의 주장에 달려 있습니다. 어찌 다만 장사(長沙)의 무수(舞袖)뿐이겠습니까? 이것이 그 해의 세 번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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