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한반도 대한해협으로 역사바라보기

한부울 2019. 7. 16.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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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대한해협으로 역사바라보기

 

글쓴이:한부울

 

1.머리말

2.한반도 지명이 가지는 모순

3.미국지도가 제작된 1920년대의 세계현황

소제 : 제정러시아와 프러이센은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다.

4.유라시아(歐亞:Eurasia)와 아라사(愕羅斯)

5.저지대 유럽제국생성과 시대상황

6.저지대 유럽제국 프로이센

7.베르사유조약과 유럽국가생성의 의문

8.16세기 서양지도에 한반도는 없다.

9.대한해협의 명칭

10.브루턴 해협(Broughton Straft)

11.크뤼센슈테른 해협(Krusenstern Straift)

12.마무리

 

1.머리말

 

우리나라 역사 지명(地名)은 우리 조상의 오래된 사고와 의지가 담겨지거나 생활모습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역사적인 가치는 물론이고 우리에게 귀중한 무형 유물, 문화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를 들여다 보면 지명으로 하여 각 지역 주민의 언어·풍속·의식·도덕·종교 등의 역사발달과 특성을 볼 수 있다 하였고 지형에 붙여진 지명뿐만아니라 행정의 필요에서부터 생성된 법제지명도 개별적 가치와 문화성, 사회성,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는 고대 지명에서 현대 지명에 이르기까지 그 근원과 역사성을 조사, 연구하여 자료를 축적하였고 그 결과 독립적 학문으로써 지명학(地名學:toponymy, toponomy, Ortsnamenkunde)이란 학문을 세워놓았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역사지명에는 시대적 상황과 근원의 역사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지명 특히 한반도 지명에서 보면 시대환경이 타의에 의해 지배되던 일제식민지시대가 존해하였다고 하지만 1920년 미국에서 발행했다고 보이는 한반도 지형지도에는 일제가 관리했다고 여겨지는 법제 또는 행정 지명과도 동 떨어진 서양인들 시각으로 만든 지도에서 대한해협의 또 다른 지명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또 다른 놀라움과 큰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없게 하는 것이다.

한반도 부산(釜山)과 열도의 시모노세키(下關:Shimonoseki) 사이를 대한해협(大韓海峽) "한국해협 (Korea Strait)"이라 한 것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익히 잘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러나 해협 중앙지점에 대마도(對馬國)를 중심으로 북쪽에는 브루턴 해협(Broughton Straft)이라 하였고 남쪽에는 크뤼센슈테른 해협(Krusenstern Straift)이라 하였다는 사실이 1920년 미국에서 발행된 지도에서 발견된다.

이 지도는 안타깝게도 한반도 역사 정체성을 찾아 볼 수 없는 또 다른 한반도 역사의 민낯을 보는 듯하여 눈을 가리고 싶을 정도이다.



대한해협은 왜 자주성조차 찾을 수 업는 신세가 되었는가.

대한해협을 남북으로 나누어 북쪽을 칭한 브루턴 해협(Broughton Straft)은 당시 잉글랜드 귀족 탐험가의 이름으로 파악되고 남쪽의 크뤼센슈테른 해협(Krusenstern Straift)이라는 것은 발트족 독일인 해군장교의 이름임을 알 수가 있다.

그들이 한반도 역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도대체 이런 지명은 어떤 이유로 대한해협에 갖다 붙일 수밖에 없었을까?

어떤 유래가 그들에게 있길래 1920년 당시 가장 부유한 신흥강국으로 세계에 등장하고 세계국가들에게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하던 미국이 제작한 지도에 버젓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이것은 한편으로 한반도 역사정체성을 묻는 것이기도하다. 

이 지도를 보고 있으면 한반도에 삼한역사가 5000년 역사를 자랑하며 존재했던 땅이 맞는가 하는 매우 기초적이고 근원적인 의문이 든다.

왜 고유의 전통적인 지명은 다 팽개치고 얼토당토하지 않는 서양인들의 지명이 붙여진 것일까?

도대체 한반도 역사가 얼마나 우물안에 개구리식 역사이기에 이렇듯 서양인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체 원래 해역 지명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이처럼 깜깜이 같은 지명을 우리가 목도해야 하는가.

1920년대 미국은 세계질서를 좌지우지하던 세력이기도 하지만 대한제국을 통제하던 세력이다.

도대체 이들은 삼한역사의 5000년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왜 무시할 수밖에 없었을까?

다시말해 19세기 주종을 이루는 선교사를 중심으로하는 서양인들의 주장처럼 조선인들이 미개하고 부패한 관리가 쇄국하여 은둔의 암흑 역사이었기 때문에 한반도 역사는 미개한 역사라고 취급된 것이 사실일까?

서양인들에게 지명조차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역으로 생각하면 이미 수많은 서적과 여러 지식인을 통해 충분히 인지하고서도 의도적으로 어떤 불손한 목적을 위해 그들이 표기하는 지도에는 반드시 옛 조선의 원지명을 빼버리고 대신 현재 그들이 조작할 수 있는 지명으로 대체하여 지도에 표기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서양사에 바탕으로 되는 해양식민시대에서 전세계를 안방드나들듯 온천지를 누비고 다녔다는 그들의 일관 된 주장을 뒤받침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때 그야말로 한반도는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밖에 없는 기구한 운명의 역사적 위치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하더라도 5000년 역사를 유지하고 오히려 중국이라는 정복왕조보다 끈끈한 이어옴이 있는 조선사회에서 국가, 민족주의이념을 가지고 있던 역사학자나 지리학자, 지도제작자들이 그렇게도 없어 반대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인가 하고 구성원들의 활약이 그토록 미약했던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든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이미 안타깝게도 좋은 인재들은 다 전향했다고 해야 맞다.

왜냐하면 사라진 왕국에 버티고 있을 구성원은 일반 백성이나 보통사람들이며 그야말로 한반도 인으로 분리되었던 세력밖에는 없었다는 사실도 유추할 수가 있다.

때문에 미국에서 제작한 지도가 어떤 식이라 할지라도 이를 거부하거나 비판하여 수정토록 하고자 하는 조직이나 개인은 전무했다고 보아야 하고 묵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들도 사라지는 국가나 체제보다 현재의 그들의 미래에 대한 삶을 보장해주는 세력이 더 중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지도가 말해주는 한반도 역사는 외롭고 초라하고 볼 품이 없는 그야말로 역사 정체성이라는 것은 찾아 볼 수도 없는 안타까움 그 자체라 할 수 있고 1920년대에 한반도는 주인이 없는 무주공산의 땅이었을 가능성을 진단하게 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1차세계대전을 마치고 어디나 할 것 없이 혼란을 겪을 때이고 생존이 급할 때이기 때문에 이런 지도제작에 메달릴 수 없는 환경이었을 것이다.

  

2.한반도 지명이 가지는 모순

 

한반도 해안이나 해상에 나타나는 서양지명들은 전자에서 이야기 했듯이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한반도에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내민(內民), 즉 구성원들이 한반도 해역으로 벗어나지도 못한체 그리고 본토에서 멀지도 않는 거리 가까이에 존재한 섬의 존재도 파악하지 못하고 뚜렷한 역사적인 지명도 없이 행정관할 밖이라 하여 내버려 둔체 방관했다고 생각하는가.

서양해양세력들이 지들 마음대로 지명을 붙인 울릉도와 독도만 두고 보더라도 그렇다.

그렇다면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512년 신라(新羅) 하슬라주(何瑟羅州)의 군주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해 신라영토로 복속시켰다는 기록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뿐만아니다.

1882년 조선 정부는 울릉도에 대한 그동안의 먼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게 하는 정책 즉 공도(空島)정책을 버리고 개척령을 반포해 강원·경상·충청 등에서 모집한 사람들을 이주시켰다고 하였으며 울릉도의 본격적인 개척 이후 종래의 '우산도'를 '바위섬'이란 뜻의 '석도(石島)'라고 불렀는데 이를 훈독(訓讀)해서 '돌섬'이나 '독섬'으로 부르다가 '독도'로 변형된 것이라 하여 울릉도 어민들의 여름철 어업기지로 이용되었다 한다.

우리가 역사지명으로 알고 있는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기록은 명확하다.

18세기 해양세력 서구인들의 인명들이 무엇이 그렇게 대단하여 기존 역사지명을 무시한체 붙여야만 했을까?

그들이 무슨 권한으로 배를 타고 해양에만 나아가면 무조건 그들의 영토이고 그들의 식민지이기 때문에 남의 땅이라도 상관 없이 눈에 띄이는 족족 지들 마음대로 지명을 붙일 수 있다는 특권의식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점유, 점령한 적도 없다.

이런 짓거리가 세계어디라도 통했다고 한다면 분명 그것은 조작이나 날조을 위한 엉터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전술한 이야기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런 지도가 제작될 수밖에 없는 환경은 1920년 경의 한반도가 본래 무주공산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또하나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지도를 제작한 회사가 동아시아 한반도와 일본 그리고 유럽대륙의 동유럽국가들도 한반도나 열도와 마찬가지의 처지가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1920년 상황을 돌이켜 보면 당시는 한반도가 일제식민지상태였다는 것 밖에 없다.

그리고 유럽대륙은 1세계대전으로 쑥밭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한반도는 정치사이코 아베왜구 조상들이 한반도 관리자이었고 총독도 왜구였으니 한반도 지명은 왜구 점령자들이 바꾸고 싶으면 바꿀 수 있는 환경이었을 것이다.

어디라도 한반도 지명은 왜구 일본인의 언어 히라가나(平仮名:ひらがな), 가타카나(片仮名:カタカナ)일본식 한문으로 갖다 붙일 수는 있다.

그러나 열도 일본어가 아닌 영국, 프랑스, 독일이라고 하는 서양어가 붙었고 이런 지명의 유럽국가들은 당시 발언깨나 하는 국가의 함대명이나 항해인들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의문을 가지는 것은 과연 한반도는 지금의 아베조상인 열도 일본인들이 식민지관리하에 있었던 곳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즉 현재 히라가나, 가타카나를 사용하는 열도일본인이 한반도 역사를 통치한 일본제국의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서술한 것이지만 한반도 동해섬에 한반도 영해에 속한 섬인 울릉도와 독도가 있으며 이 지명들은 19세기 지도에는 전부 서양선박명이나 서양인의 이름이 지명으로 나타난다.

라 페루즈(La Pérouse)함대가 1797525일 대한해협을 지나, 527일 당시 서양지도에는 표기되지 않았던 한 섬을 발견하였고 이것이 울릉도(鬱陵島)라는데 프랑스의 시계공이며 천문학자인 조셉 르포 다즐레(Joseph Lepaute Dagelet:1751-1788)의 이름을 따서 다즐레 섬(Dagelet Island)이라 명명했다고 하였으나 예상밖으로 그들은 울릉도에 상륙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점유도 하지 않았으면서 도명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악착같이 지명을 붙여 그들의 이름을 역사지도에 고스란히 남기고 싶었던 이유는 일개 공명심이 발동한 것일까?

참으로 우리 입장에는 불편하고 불공평한 이야이다.

독도(獨島)또한 상황은 동일하다.

1849년 여름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Liancourt)호가 동해에서 고래잡이를 하다 독도를 발견하고 리앙쿠르 암초라고 하였고 그로부터 6년 뒤 1855년에 영국함대에 의해 독도가 발견되었으며 영국함대의 이름을 따서 호넷 암(Hornet Island)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1849년이나 1855년에조선이 망해버린 것인가.

아니다, 두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이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남의 나라 전통지명은 깡그리 무시하고 변변치도 않는 그들의 이름을 감히 영토 지명에 올려 그것이 세계사에서 한반도 지명이 되도록 한 근거는 어떤 근거로 하였는지 묻고 싶다.

지금이라도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문제를 세계역사학계에 이의를 달 필요가 있다.

한반도 구성원이나 아니면 당시 식민지배하고 있는 조선총독부가 존재하여 자주권, 보호권이 발동될 수 있음에도 이러한 지도까지 버젓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한반도 실체와 조선총독부의 존재를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와같은 행위는 무슨 시장통에 장사꾼도 아니고 먼저 보는 놈이 장땡이라 하여 이것이 역사가 된다면 그야말로 껍질도 벗기지 않고 날로 삼키는 날도적과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

서양해양세력들의 습관적 관행이었다고 하더라도 양심이 있으면 어떻게 남의 나라 영토를 방문한 것과 같은 것인데 그들이 생전처음 발견했다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함부로 지명에 오물을 던질 수가 있는가 하는 말이다.

  

본 블로그 글 "61855년에 호네트호가 들어 온 곳은 한반도 동해가 아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419 "에서 밝힌 이야기지만 철종61855년에 영국함 호네트호(HMS Hornet)와 프랑스함 비르지니(Virginie)호가 한반도의 독도(獨島)를 방문하고 동해안 일대를 측량하였다고 뚜렷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실록에는 그러한 기록이 아예 나타나질 않는다.

그러니 서양세력들이 주장하는 역사사실들은 거의가 자기 주장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몰래 접근하고 도망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후세 역사음모세력에 의해 사건을 빼버렸을 수도 있겠지만 대수롭지 않는 사한으로 본 조선 정부가 이러한 사실을 기록에 남길 만큼 비중있기 보지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국제간의 영토와 영해를 함부로 넘나들면서 몰렴치하게 남의 영토 지명까지 도명(盗名)한 것이 되는데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한반도 지형에서 서양해양세력의 지명이 붙은 것에서 또 한 가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지명이 이 지도에 보인다.

그들이 발견했다고 하는 울릉도에서 북쪽 위 38도선 바로 해상에는 현재 지도에 나타나지도 않지만 실제로 구글위성을 통해 살펴보아도 섬이랄 것이 없음에도 그곳에 그리스신화 아르고선(Argo)에 승선했던 50명의 영웅 아르고나우타이(Αργοναύται)을 의미하는 아르거놋 섬(Argonaut Island)이라고 붙여놓은 지명이다.

그러나 당시 1920년에는 존재했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스테리로 19세기까지 한반도 해상에 존재하던 섬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그들이 한반도에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다른 자료에 보면 "Argonaut Island, real name Ulleungdo, a South Korean island" 라 하여 아르거놋 섬의 지명은 본래 한국섬 울릉도의 이름이라 했다.

도대체 울릉도가 몇개나 되는가.

1920년 미국에서 제작된 한반도 지형에서 동해쪽을 보면 분명 울릉도 위에 또 다른 섬 지명이 존재하고 있어 하는 말이다. 

그래서 도대체 아르커놋(Argonaut)이라는 명칭이 무엇인가 알아보았다.

이 명칭은 잉글랜드 해군 소속인 아르러놋호(HMS Argonaut)가 북아메리카대륙 체서피크만(Chesapeake Bay)과 연결된 린 헤이븐 만(Lynnhaven bay, Virginia)을 중심으로 북아메리카대륙 동부해안에서 거점(South East Coast of America Station:1838-1899)을 만들어 활동한 사실이 밝혀지며 이 지역은 브라질 노예무역을 위한 장소로써 1838년 태평양거점과 분리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노예무역이 무엇인가.

대항해시대 당시 유럽과 접촉한 전국시대 일본에서도 토착 일본인들은 유럽인들에게 노예로 팔려갔다고 알려진다.

이는 당시 수출할 상품이 없었던 일본이 긴 전쟁기간 동안 외국에 판 주력상품이 다름 아닌 자국민 즉, 일본인들이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서양인이라면 간이라도 빼줄 일본인들이 얼마나 알고 있을지 그것 역시도 궁금하다.

실제로 전국시대 당시 해양세력들이 주도한 일본은 농민들이나 전쟁포로같은 자국 일본인들을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 마냥 해외에 노예로 팔아먹었던 사례가 아주 많았다고들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열도일본인들은 날조된 2차세계대전을 그들의 위대한 행적처럼 여기고 우리를 하찮게 보고 있으니 참으로 웃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삼한역사에도 나오듯이 벌거벗은 모습에 훈도시차고 옆구리에 단도를 끼고 설치던 열도일본인들을 무리배라 하여 인간취급조차 하지 않았던 우리 조상들이다.

 

본 블로그 글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 "에서 특히 서양인들이 말하는 태평양(Pacific)은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서부 이편지역 전체를 뜻하는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을 또한 중국바다(中國海:The Sea of China)라 한 사실과 미시시피강유역 주위를 분명 인디즈(Indies)라 명칭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것은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동양역사가 펼쳐졌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잉글랜드 별칭인 앨비언(Albion)은 지금의 버지니아(Virginia)를 뉴앨비언(New Albion)이라고 한 사실과 그들의 지속적인 거류지역, 또는 기지(Station)로 이용한 사실이 발견되고 1853년 일본 강호시대때 매슈 캘브레이스 페리(Matthew C. Perry)가 일본 우라가(浦賀)에 입항했다는 사실 등에서 출발항구가 바로 버지니아 노퍽(Norfolk)이었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가 있어 서양해양세력들의 전반적인 무역기지가 버지니아 해안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때문에 버지니아주(Virginia)의 헤이븐만(:bay)을 종종 "브라질과 강변기지, 거점"이라고 불리었다고 하는데 브라질 강변에 설치던 세력들이 버지니아로 몰려든 것과 같다. 

그러한 브라질 노예무역 기지를 아르커놋(Argonaut)섬이라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해안 버지니아 부근에서 찾아야 할 섬 지명이 한반도에 난데없이 붙여진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또 한가지 집고 넘어갈 이야기가 있다.

당시 서양지리학자, 지도제작자, 또는 탐험가들이 얼마나 엉터린가 하면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이 발생한 시점인 16세기말엽까지 그들이 만든 동아시아대륙 특히 한반도는 지도에 그려 넣지 못했다는 사실과 이외로 그러한 서양지도가 많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만큼 그들의 지도제작술이 형편 없었던 것이다.

16세기의 그들 지도에는 한반도 지형을 아예 표기조차 못했다는 사실은 그들은 최소한 16세기까지 동북아시아를 방문조차 하지 않았고 방문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일본 열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열도일본인들을 끌어들였지만 대조선이 존재하던 한반도를 타겟으로 서양해양세력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임진왜란을 도발할 수 있었다 한다.

얼마나 엉뚱한 발상인가.

15세기부터 해양을 누비며 장사를 하던 세력들을 오늘날 자칭 서양해양세력이라 하는데 이들이 삼한역사에서는 왜구(倭寇)라 한 사실은 본 블로그에서 상세하게 설명한바가 있다.

그들이 조선(朝鮮)을 침범했다는 사실은 도무지 과학적이지 않고 그들의 지도가 엉터리라는 것을 감안할 때 얼마나 그들의 역사가 모순투성인지가 확연해 진다.

아무리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16세말엽 서양세력들이 지도에 표기조차 할 수 없었던 한반도를 무단으로 침범할 수 있었던 것일까 하는 근원적인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19세기 강력한 해양세력이었던 미국이 제작한 지도에 한반도 동해안 섬들을 서양인들의 이름을 지명으로 대체한 지도를 뻔뻔스럽게 제작한 동기가 과연 무엇인지 밝혀져야 한다.  

현재 한반도인들은 자꾸 열도에서 왜구가 기생한 것처럼 알고 있고 또한 임진왜란이 현재 열도 왜구들의 소행이라고 여기지만 본래 일본이란 야폰(Japon)은 아메리카대륙 중부 카리브해에 존재한 사실을 이미 본 블로그를 통해 수차례 발힌 이야기며 그곳을 근거로 북아메리카대륙으로 진출한 세력임을 누차 침이 마르도록 일관하게 주장하였다.

이들 세력들은 16세기 중반까지 세계삼한역사 주체들에게 상당한 핍박을 받았던 해양세력들로써 따져보니 이들은 바스크인(vascos:basques:basques)이며 통일신라시대때 사라진 백제유민으로 판단되고 그들이 주동이 된 것이다.

고대 바스코네스(Vascones)족과 아키텐 이라고도 알려진 로마제국의 속주 중 하나인 아퀴타니아(Aquitania)족을 선조로 하여 한 번도 이들 종족은 통일정부를 가져본 적이 없고, 여러지역에 흩어져 살거나 프랑스(France)와 스페인(Spain)의 통치아래 살았다고 기록된다.

그러나 프랑스는 조선(朝鮮)으로 나타나지만 서양귀족과 부유층의 세력이고 스페인은 라틴아메리카 즉 고려의 서양귀족과 부유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도 알 필요가 있다.

이들이 위그노이며 부르주아들이다.

 

3. 미국지도가 제작된 1920년대의 세계현황

소제 : 제정러시아와 프러이센은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다.

 

대한해협과 울릉도, 독도가 서양인들의 인명으로 처리된 위 지도는 1920년 미국 뉴욕에 있었던 레슬리 주지회사(Leslie-Judge Company)에 의해 제작된 "1920 Leslie’s New World Atlas"란 제목의 지도이다

그 제목속에 동아시아대륙의 특히 한반도와 열도지도가 보이고  "1920, Cenral and Western Europe"이란 제목의 유럽대륙국경지도가 눈에 들어 온다.

위 한반도 지도전체를 파악하고 일단 글쓴이가 일일이 지명을 찾아 여러분들이 알기쉽게 한글로 명기하였지만 곳곳에서 한자명칭이 아닌 이상한 서양 명칭들이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이것들이 전자에서 주지한 낮선 서양인들의 지명이라는데 관심을 가지고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지도가 만들어진 1920년은 국제적으로는 대격변기로 유래가 없었던 인류사상최대의 전쟁인 1차세계대전(第一次世界大:World War I)이 발생하여 세계전역에서 파괴와 살육이 벌어지던 혼란 속에서 연합군(聯合國:Allied Powers)이라고 하는 거대한 산업자본가, 금융자본가들이 지원하는 서양해양세력들이 프랑스혁명으로 약화되었지만 그래도 세계질서를 지배하던 구체제 서양제정군주(帝政君主)들을 물리치고 승리한 후 구체제가 소유하고 있던 다원적인 제정영토를 분할, 분열케하고 전쟁복구가 어느정도 실행되고 있었던 시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한편으론 유럽(西歐:Occident)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으로 사라진 구체제들을 보면 삼한제정군주(三韓帝政君主)체제하에 있었던 군주라고 볼 수 있는데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택하고 있는 홀슈타인-고토로프-로마노프왕가(Holstein-Gottorp-Romanov)의 제정러시아가 있고, 호엔촐레른가(House of Hohenzollern)프로이센 독일제국의 빌헬름 2(Wilhelm II, 1859-1941,재위:1888-1918)가 폐위되었으며, 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Habsburg-Lothringen)의 카를 1(Karl I:1887-1922,재위:1916-1918)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해체, 그리고 오스만제국(Ottoman Turkish, Exalted Ottoman State)의 메흐메트 5(Mehmed VI:1844-1918,재위:1909-1918)의 퇴위, 페르디난드 1(Ferdinand I:1861-1948,재위:1908-1918)불가리아왕국도 사라지고 말았다.

유럽대륙을 기준으로 할 때 서부에는 스페인, 포르투갈이 안착하고, 영국, 프랑스만 남겨두고 동부유럽국가들은 모두 사라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유럽대륙의 또 다른 동서양면]


위 지도와 같이 1차세계대전이 가져다 준 유럽대륙의 또 다른 동서양면이 조성된다.

1차세계대전으로 인해 동부유럽에서 사라진 러시아(로마노프왕조), 프로이센(통일독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그리고 오스만제국은 거대한 영토를 자랑했다.

특히 러시아제국은 윌슨이 노린 것처럼 다원적 국가라는 사실인데 현 미국과 같은 조건이다.

즉 다양한 인종 속에 수많은 민족과 종족, 그리고 다른 언어, 다른 종교, 다른 문화를 다원적 사회국가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현재 동부유럽군에 속하는 러시아가 되었다면 산업후진성을 가진 지리적 환경때문에 자본주의적인 요소가 결여되는 문제의 공간을 확보할 수가 없다.

러시아혁명(1917)이후 1922부터 1927년까지의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1878-1953,재임:1922-1953)체제가 되면서부터 현재 동유럽과 아시아대륙을 서서히 점유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때는 북아메리카대륙에 있던 자본주의에 찌든 유학파들, 엘리트정치인들을 중심의 각개식(各個式)형태로 동유럽뿐만아니라 아시아대륙으로 너나할 것 없이 이동이 시작된 시기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미국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1856-1924,재임:1913-1921)의 자결권(自決權:self-determination)제창에 영향이 있었다고 보이지만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하던 자결권보장을 요구하던 불온세력들을 내쫓는 효과와 하나의 고립정책을 고수하기 위한 방책이라고 보는 것이다.

당시 스탈린 스스로가 소련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과 같은 주요 자본주의 산업국가에 비해 50~100 년여 뒤쳐졌다고 강조한 사실은 유명하다.
당시 동유럽군에 속해있던 우크라이나에서는 1921~1922, 1932~1933 두 차례에 걸친 큰 기근으로 사망자 수는 적게는 8백만 명에서 많게는 1천만 명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소련 전체로는 그 이상의 엄청난 사람들이 산업인프라가 부족한 상태에서 기근이 발생하여 희생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역사가 깊었던 한반도 사람들은 왜 가난했을까?

마찬가지다.
열도는 인위적인 이동이 실시되었고 때문에 그것을 유도한 미국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나 현 신중국대륙보다는 삶이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고 본다.

다원적 국가가 조성되는 것은 자본주의 요소가 극대화 한 상태에서 사회주의가 파생되는 경우이다.

어쩌면 러시아제국은 북아메리카대륙 북부 캐나다의 전신으로 1917년까지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 이후부터 미국이 1차세계대전에 참여했고 그러한 영토나 권한을 자연스럽게 인수한 것이다.

독일제국(프로이센)이란 국가자체가 저지대 발트해를 기준으로 하는 게르만족이다.

이것에서 러시아가 속해 있던 지역이 유럽대륙이 아니라 만약 북아메리카대륙이었다면 미국을 대신할 수 있는 국가체제임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 국경 남쪽에는 이미 권한이 없어진 조선왕조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여러 본 블로그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즉 북부지역은 고려(지나), 남부지역은 조선이란 왕조가 존재하여 지나조선(支那朝鮮)이라 했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솔직히 제정군주체제에서 두 체제가 서세의 거친 공격을 뒤로하고 그나마 1917년까지 존재했다는 것은 서로 밀접하고 긴밀하게 체제보호를 위해 협조가 가능했기 때문이며 서세들의 합체된 자본공격으로부터 최대한으로 방어적으로 일관할 수 있었던 요인은 고려의 힘이라고 할 수 있는 재정적인 힘이 컸다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 역시 서양왕조, 귀족, 영주들이 과욕으로 인해 역린(逆鱗), 사오분열되면서 결국 합체된 서세자본주의세력에게 패전국이란 멍에를 덮어 쓴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체제가 모두 다원적 사회체계를 가진 것은 틀림없다.

그 사이를 비집고 틈을 만들고 파생적인 공격을 감행할 수 있었던 세력은 바로 부르주아 산업자본가, 금융자본가들이 지원한 제국주의 세력이었다.

바로 승전국이라고 말하는 주요세력들을 보면 로얄왕조 조지 5세(George V,1865-1936,재위:1910-1936)는 1922년까지 누군가에 의해 권한이 축소되는 형태를 맞이 하고 그리고 다음으로는 프랑스식민제국(Empire colonial français)의 대통령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1841-1929)인데 조선의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고 러시아제국을 대신한 미국이 바로 그것이다.

1차세계대전이 마무리가 되고 난 후 가장 두드러진 세계 현상은 기존 구체제라고 하는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despotic monarchy) 즉 절대왕정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와 공화정(共和政: Republic)이 들어서게 되었다는 사실과 기존 구체제가 가지고 있던 제정영토와 식민지영토들이 정치적으로 조각조각나는 발칸화 (Balkanization)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조정하던 세력이 놀랍게도 미국이다.

이 미국이란 존재는 고립주의를 앞세우지만 들어날 수 없는 세력으로 1898년 미서전쟁(美西戰爭:Spanish-American War)에서부터 역사전면에 등장한다.

이러한 역사상황은 글쓴이가 판단하길 1차세계대전 자체가 북미동부를 차지하고 있던 제정군주국을 몰아내고 자본주의국가 창설에 바탕을 이룬 전쟁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렇듯 강력한 물리력을 가진 미국은 어떻게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지멱을 캐나다로 만들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로얄왕조가 가진 권한을 미국내에서 몰수하는 반면에 북쪽 러시아와 독일(프로이센)지역을 공여한 것이 아닌가 한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전쟁(1803-1815)과 미영전쟁(War of 1812)은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에는 자본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강력한 세력이 존재한 것이다.

북부 제정러시아와 발트세력 프로이센은 미국의 산업자본가와 금융자본가를 뛰어넘는 자본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블로그 글 "철도 궤로 보는 북미삼한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2 "에서 말하길 당시 제정 러시아가 사용하던 궤(track gauge)가 광궤(1524mm)이었는데 이 광궤를 1748년 영국(Great Britain)의 와일럼에서 왜곤길에 건설되었고 미국 호레이쇼 앨런(Horatio Allen)1827년 이 광궤 사용을 규정하였으며 미국남부 철도에 채택되었다고 하였다고 알려지지만 명칭은 러시아궤(Russian gauge)라 한다는 사실은 제정러시아제국이 영국(Great Britain)과 미국(US)이 설치한 곳에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 광궤는 러시아의 엔지니어 파벨 멜니코프(Pavel Melnikov)에 의해 미국의 철도 공학자 조지 워싱턴 휘슬러(George Washington Whistler)를 고용하여 러시아의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간 철도 건설에 대한 조언을 듣고 1843214일 러시아차르 니콜라스1(Nicholas I)에 의해 철도의 승인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선후가 갈리지만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에 이 광궤가 놓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니콜라이 2(Nicholas II of RussiaI,1868-1918,재위:1894-1917)2월혁명과 10월 혁명으로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어 퇴위되면서 유대인 볼셰비키혁명가에 의해 1918년 처형되고 만다.

사실상 유대인 볼세비키혁명가들이 자본주의 국가체제인 미국에서 주로 활동해야 할 이야기지만 동부유럽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에서 근대사는 동유럽의 러시아에서 그들이 볼세비티혁명을 주도하였다는 사실을 역사사실로 굳힌 것이다.

1차 세계대전 후인 191818, 미국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의회에 '14개조 평화 원칙(Fourteen Points)'을 제출한 것에서 비롯된 민족자결주의(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가 제정러시아의 다원적 제체의 분열을 촉진하는 신호탄이 되었다는 것인데 일찍이 1913년에 민족자결원칙과 분리권을 주장한 레닌이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분명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분리권을 주장한 것이다.

이것들은 로마노프왕가의 지배력이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다는 사실과 다민족 국가로 한 체제이었다는 사실과 거의 일치하는 면이 많다.

당시 미국은 어떤 제정왕조의 지배속에 경제권을 쥐고 있던 형태로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은근히 즐겼던 사람이 바로 미국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우드로 윌슨이다.

오죽했으면 역사비평가들이 1차세계대전 승전국들이 패전국들의 식민지를 자신들이 가로채려고 만든 것이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self-determination)라 하였겠는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혹은 민족자결권이란 것도 윌슨이 주장하기 1년 전 사회주의혁명가 유대인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Ilyich Ulyanov,1870-1924)이 세운 러시아 혁명정부가 발표한 민족자결권 선언과 같았다는 사실과 반면 미국입장은 먼로주의(Monroe Doctrine) 즉 고립주의 정책을 고수했다는 사실에서 상당히배치되는 측면이 있다.

미국이 취한 고립주의라 함은 간섭주의(干涉主義:Interventionism)에 대칭되는 용어로써 개인이나 체제를 상대로 하더라도 표면적으로는 국가간 자국의 이익을 위해 혹은 국제질서를 위해 다른 나라에 경제 혹은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4.유라시아(歐亞:Eurasia)와 아라사(愕羅斯)

 

본 블로그 글 "악라사관기(鄂羅斯館記)로 본 대한제국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4 "에서 심전고(心田稿)에 나타나는 악라사(鄂羅斯:Great Tartary)의 영토가 유럽제국들이 서쪽 한 뼘의 땅이라도 여유가 없을 만큼 어마어마했고 때문에 유럽국가들이 거주했다는 역사적인 공간은 없었다고 해야 옳다.

때문에 적어도 서양세력들이 득세하던 19세기 중반까지는 유럽대륙에 유럽제국들이 국가명을 가지고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비극적인 인류사의 대전쟁인 1차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종식되고 난 후 부터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는 것도 알 수가 있고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서양세력들은 새로운 영토를 만드는 작업에 유럽인들만의 영역으로 만들기를 작정하고 그 이후 판짜기에 광분했다는 사실과 근원적으로 역사사실에서 그들이 원하는 새로운 역사질서와 그에 따른 지도가 필요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새로운 역사와 새롭게 제작된 지도가 바탕이되는 세계사(世界史)가 필요했던 것이다.

세계사(世界史)가 완성된 시기는 대체적으로 웰스(Herbert George Wells:1866-1946)1920년에 역사대관(Outline of History,歷史大觀)을 출판했고, 2년이 지난 1922년에 그것을 요약하여 간추린 세계사(A Short History of the World)를 펴내 완성시킨 시점으로 볼 수 있다.

18세기의 서양지도를 보면 유라시아 전체의 영역 주인은 바로 대타타르(Great Tartary)라 한 사실이 여기저기 흔하게 목격된다.

그러나 아시아대륙 북부만을 대타타르(Great Tartary)라 한 사실은 서양세력들의 또 하나의 감춤이라고 보고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지역까지 대타타르(Great Tartary)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아래지도는 1754년에 프랑스지도제작자 장 팔레르(Jean Palairet:16971774)에 의해 제작된 아시아지도[Carte de l’Asie 1754]이다.




1754 

Author:Palairet, Jean

Publisher: Chez Mess. J. Nourse & P. Vaillant

Publisher Location:London,La Haye

Now compare to the description given by Wikipedia, "Tartary (Latin: Tartaria) or Great Tartary (Latin: Tartaria Magna) was a name used from the Middle Ages until the twentieth century to designate the great tract of northern and central Asia stretching from the Caspian Sea and the Ural Mountains to the Pacific Ocean, settled mostly by Turko-Mongol peoples after the Mongol invasion and the subsequent Turkic migrations."

 

위 지도에서 말하는 타타르(Tartaria) 또는 그레이트 타르타리(Tartaria Magna)는 중세에서 20세기까지 카스피해와 우랄산맥에서 태평양까지 뻗어 있는 북부와 중앙아시아에 사용된 이름이었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주로 몽골제국(Mongol Empire)의 바투(Batu Khan:1207-1255,1227-1255)1241년 폴란드 레그니차(Legnica)1차침공으로 시작된 후 부터 투르크 이주와 함께 투르크몽골(Turko-Mongol) 민족이 정착한 곳이라고 하고 있다.  

왜 아메리카대륙과 아프리카가 나타나지 않는 아시아만의 지도를 서양인들은 그리려고 안달을 했을까?

생각할 수록 궁금해지는 것인데 아시아란 영역을 만들고 확실하게 고정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본 블로그 글 "아세아(亞細亞:ASIA)란 무엇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6 "에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아시아(Asia,亞細亞,亞洲)의 원 뜻은 동쪽, 해뜨는 곳이라고 하는 태양 중심신앙에서 발단된 오래된 지명이다.

그리스말로 “sunrise” ‘태양이 뜨다’, ‘일출’, ‘해돋이라 하였고 아시리아어(Assyrian)로는 'east' 동쪽, ‘동방을 뜻하는 단어로 나타나고 일본어로 아사(asa:あさ:明日:)아침이라는 뜻과 삼한조선이 생성한 땅으로써 태양이 뜨는 땅이라 하여 아사달(阿斯達)이라 하였고 이를 동국(東國), 대동(大東), 해동(海東), 동방(東邦)이라고 한 사실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본 블로그 글 "대서양(大西洋)과 대동양(大東洋)은 같은 바다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15 "에서 밝혔듯이 일본인(서양해양세력)이 만들었다고 하는 지구만국산해여지전도(地球萬國山海輿地全圖)에 대서양을 대동양이라 한 것은 아메리카대륙을 완전체 동쪽대륙으로 보았다는 이야기다.

또한 서양역사에서 동쪽, 태양이 솟는 곳 일출"sunrise“를 그리스어 아나톨리니‘Aνατολή’, 동방을 그리스어 아나톨리코스(ανατολικός)라 한것은 바로 아나톨리아(Anatolia)반도를 소아시아(小亞細亞:Asia Minor)라 했는데 이것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의 플로리다반도와 비견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시아(Asia:亞細亞)는 북아메리카대륙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당한 지명임을 알 수가 있는데 이것이 서양지도제작들에의해 바꾸어져버렸고 18세기부터 지금의 아시아의 의미로 둔갑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서양지도제작자에 의해 지금의 아시아대륙 북부지역에만 대타타르(Great Tartary)영역이라고 한 사실은 역시흐름 자체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콜럼버스 착각지도(그림)

 

콜럼버스(Cristoforo Colombo,1451-1506)14921차 항해하기 전에 그렸다고 판단되는 위 지도에는 일본이라고 하는 시팡구(Cipangu)가 카리브해(Caribbean Sea)에 있으며 특이하게도 아메리카대륙과 아시아대륙이 붙어 있는 대륙이라고 믿었으며 타타르(Tartary)가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에 위치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이것을 콜럼버스의 착각지도(Mistaken Map)라고 하지만 바로 근원적으로 15세기에 서양인들이 인식하고 있었던 아시아(Asia:亞細亞)지도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존재했다고 하는 시팡구가 북아메리카대륙에 소속된 카리브해에 있는 것도 특이하지만 카타이 즉 중국이란 지명도 북아메리카대륙에 그려져 있다는 사실과 특히 망기(Mangi) 만족이라는 지명이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에 그려져 있는 것을 남만(, mong)이라 하였다는 사실과도 겹친다.

이 남만 세력을 일본인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라 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타타르가 북아메리카대륙 북부 뿐만아니라 지금의 아시아대륙 전체를 포괄적으로 지배한 사실이다. 

그러면 유럽대륙에 지금의 서구인들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1차세계대전 후 제정러시아가 해체되면서 무주공산으로 존재하던 유럽대륙에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하던 서양인들과 라틴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하던 서양인들에게 유럽대륙으로 이주하면 특혜를 부여하고 세금을 면제 하면서 거대한 농토를 가질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한다면 당시 이주를 거부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자에서 이야기했지만 윌슨의 자결권(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제창도 한몫했을 것이다.

 

본 블로그에서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에 몽고(蒙古)의 종락(種落) 또는 몽고(蒙古)의 별종(別種)으로 알려진 검은얼굴의 코가 큰 대비달자(大鼻㺚子)들이 거주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를 거란 또는 말갈족으로 볼 여지가 많고 이들이 또한 여진으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사실은 여러 글에서도 언급한 사실이다.

하지만 엄연히 이것과 다른 영역의 심전고(心田稿)에 나타나는 악라사(鄂羅斯)의 영토는 참으로 거대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는데 그곳은 분명 지금의 러시아제국과 유럽인들이 차지한 아시아대륙이다.

그리고 긴 난리통에 검은 얼굴들이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남아시아대륙에는 검은 얼굴의 인종들이 많다는 사실 또한 정확하게 연결되는 역사사실이다.  

위키자료에 보면 이 타타르인들을 튀르크몽골인(Turco-Mongol)이라 하였고 14세기 초에 몽골제국(蒙古帝國:1206-1368), 특히 차가타이칸국(察合台汗國,Chagatai Khanate:1225-1680)과 킵차크칸국(金帳汗國,Golden Horde:1240-1502)의 지배층사이에서 발생한 문화적 융합으로 인한 전통성이 저변에 깔려 있으며 이들 서방 칸국의 지배계급은 튀르크어(Türk)를 사용하고 불교와 이슬람교 등 여러 종교를 받아들이는 한편 정치제도 및 법제도는 몽골식을 그대로 유지했다 하였으며 이후 많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이렇게 문화적으로는 튀르크적이고 정치적으로는 몽골적인 체제를 유지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런 중앙아시아계들이 이슬람과 연결되면서 이집트 문화까지 파고 들어가는 형태를 경계하고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지역에 나타나는 이슬람 문명과 이집트 문명은 분명 역사의 흐름상 정상적으로 보는게 맞는데 이것이 뒤틀려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무슬림왕조 티무르제국(Timurid Empire:1370-1507), 70% 이슬람교인을 가진 카자흐칸국(Kazakh Khanate:1465-1848), 러시아에 소멸된 카잔칸국(Khanate of Kazan:1438-1552), 이슬람 노가이칸국(Nogay Horde:1440-1634), 이슬람 크림칸국(Crimean Khanate:1441-1783), 이슬람 왕조 무굴제국(Mughal Empire:1526-1540,1555-1857)등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들이 모두가 튀르크몽골인(Turco-Mongol)이라고 한 사실이다.

그러나 무굴제국은 남아메리카대륙 북동부에서 홍모번(紅毛番)이라고 하는 영길이국(英吉利國)에게 소멸되었다는 이야기를 한적이 있어 무굴제국을 현재 중앙아시아와 인도아대륙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튀르크몽골인을 아라사(鄂羅斯)라고 정리할 수 있지만 2차세계대전까지 대한제국(大韓帝國)에 의해 조성된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에 소속된 영토인 것은 분명한 것으로 나타나 대한제국(大韓帝國)은 제정러시아라는 사실도 근접하게 다가간 사실이다.

일제는 제정러시아에게 한번 승리했다.

미국은 스페인에게 승리했다.

미안하지만 일제가 세상에 등장할 때 영국은 세계질서유지국에서 빠진다.

이상하지 않는가.

단지 일영동맹(日英同盟)이 존재할 뿐이다.

어쨌던 검은얼굴의 구성원들은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의 거대한 전쟁을 피해 남으로 이동했고 지금의 남아시아의 주요 구성원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서양계 코카소이드(Caucasoid)검은얼굴은 아라사(鄂羅斯)라고 판단된다.

 

물론 대한제국 역시 대조선과 마찬가지로 다민족, 다문화 체제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들은 악라사인은 서양인들로써 대체적으로 검은 얼굴에 코가 크고 눈이 벽안(碧眼)이라고 되어 있다.

코카소이드(Caucasoid)의 피부색은 백색부터 담갈색(淡褐色)까지 다양하며 두발은 블론드 내지 진한 갈색,검정으로서 직상모(直狀毛) 내지 파상모이고 인종은 북유럽 인종, 지중해 인종, 알프스 인종, 디나르 인종, 동유럽 인종, 아리아인종, 아랍인종으로 나뉜다.

튀르크몽골인은 오스만 제국(Osman帝國:Osman Türk:1299-1922)의 바탕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1차세계대전 전까지의 이야기다.

기원전 1천년(BC10C)경부터 몽골어(Proto-Mongolic)조어(祖語)와 투르크어(Proto-Turkic)조어(祖語)로부터 광범위한 어휘 차용과 유사성에서 공유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튀르크족과 몽골족의 혼합 전통자체는 매우 오래 전부터 존재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튀르크족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종교적으로도 양자 모두 단군(檀君), 당골래 탱그리신앙(天神:tengri)을 신봉하였다고 알려진다.

하나의 통치의 영역 내에 살고 있는 튀르크몽골인(Turco-Mongol)고용자들은 통치자로부터 음식, 음료, 옷으로 제공받았고 체제통제력과 군국주의적인 힘을 유지하는데 중요하게 역할을 하였으며 그들은 군호위대 경호원 역할을 맡았고 또한 부족족장과 부족동맹에 의한 군대 일부였다고 알려진다.

후자 집단은 권력을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이들 집단 내의 충성이 필요했기 때문에 튀르크몽골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튀르크몽골 지도자들에게는 영토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충성스러운 튀르크몽골 고용인들을 높은 권위를 가진 위치에 배치하게 하였다고 한다.

권력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 사용된 하나의 정치적 전략은 외교적인 결혼을 통해서도 이루어졌고 전통적으로 유럽귀족사회에서도 유행한 정략혼(政略婚)그것이다.

이 대타타르(Grand Tartary)의 구성원이 튀르크몽골인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속한 하나의 체제는 명확하게 어떤 세력인지 서양인들은 밝히지 않고 있다.

분명한 것은 바로 1차세계대전으로 이 모든 체제 균형을 상실하면서 오늘날 유럽대륙이란 역사의 영역이 서쪽 귀퉁이에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기존 하나의 체제의 영역은 갈기갈기 찢겨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뼈 아픈 것이 되지만 그 속에는 그들이 들어낼 수 없는 역사비밀이 남겨져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물론 1차세계대전을 마치고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수많은 유럽인들이 강제이동, 또는 많은 혜택을 권유한 자발적 이동이 있을 수도 있으며 이렇게 이동한 역사구성원은 유럽대륙의 구성원으로 대체되는 모양새가 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근원이 불분명한 게르만어족의 프로이센의 통일독일제국이나 투르크계열의 오스만제국, 또 하나의 게르만계의 오스트리아과 슬라브족의 헝가리, 그리고 후기 잉글랜드와 정략혼으로 연결되는 제정러시아제국의 로마노프왕가는 철저하게 북아메리카대륙 정치인들로부터 쫓겨나 유럽대륙에 그들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형국에서 만족해야 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예를들어 우랄족(Uralic peoples)이라고 알려진 헝가리(Hungarians)는 스스로 고구려후예 훈족(Hunor)과 마자르족(Magor)이라고 하지만 현재 그들의 정체성은 이상하게도 유목민이 아니라 대다수가 농민출신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모순이 존재한다.

특히 유럽대륙에서 스페인과 프랑스를 제외한 그 외 지역인 동유럽은 거의가 1920년을 깃 점으로 새롭게 국가가 만들어졌거나 설정한 흔적이 존재하고 있고 이 지도에서도 알 수 있지만 새롭게 경계선이 만들어져 마치 오래된 국가가 존재한 것처럼 인식되게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글쓴이 주장을 믿기가 쉽지 않겠지만 지금까지 무수한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분석하고 탐구한 역사상황의 결과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으며 이처럼 새로 발견된 1920년 미국 뉴욕에 있었던 레슬리 주지회사(Leslie-Judge Company)에 의해 제작된 "1920 Leslie’s New World Atlas"란 제목의 한반도, 열도 및 동유럽변경지도를 보더라도 그러한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 지도는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의 세계사강(The Outline of History,世界史綱)의 출판시기와 일치하고, 2년이 지난 1922년에는 웰스가 간추린 세계사(A Short History of the World)를 다시 브리티시 출판사 카셀회사Cassell & Co, Ltd)가 출간하게 되는 과정까지 이것들은 오늘날 세계사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닌가.

이러한 구도의 모습의 판짜기 지도가 완벽하게 완성된 시기는 물론 제2차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전으로 최종 판이 완성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이 지도 제작사인 레슬리 주지회사(Leslie-Judge Company)1920년 프로젝트를 완성하여 출간하고 난 1년 후 1921년에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마침내 1927년에 폐업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회사가 갑자기 어떤 이유로 폐업하게 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 지도는 제작되는 과정에서 미국 정부 조사로부터 자료가 수집되고 최신 지리적 연구결과들을 전시하는 물리, 정치, 역사적 지도시리즈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을 부첨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미국이란 신흥국가조직체의 국가적인 주요 사업이 아니었는가도 의심되며 그렇게 임무를 수행하고 난 후 폐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이 지도가 세상에 들어나는 과정을 보면 현재 유럽대륙의 역사상황과 동아시아대륙에서의 역사 상황이 그처럼 혼란스러웠던 것은 틀림없고 이러한 환경은 그들에게 무한의 자신감으로 차 있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적어도 역사사실에서 밝혀야 하는 것은 1920년을 깃점으로 서양세력들에 의해 역사구도가 상당히 변질되었다는 사실과 새판짜기가 비밀스럽게 기획된 것이 확실하며 유럽사와 유럽제국을 아라사 서쪽 영역에 집어 넣고 서유럽과 동유럽을 구분하여 그들의 역사를 새롭게 심고 생성되게 했다는 사실은 수많은 사실과 실체를 종합할 때 퍼즐을 맞춘 처럼 상황이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31개 연합국과 패전국이었던 독일이 맺은 강화조약이 1919628일 파리평화회의(Paris Peace Conference)란 이름으로 프랑스 베르사유궁전 거울의 방에서 조인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왜 독일만을 대상으로 연합국이 이런 조약을 맺었을까?

통일독일(프로이센)의 영역이 유럽과 아시아대륙전체를 소유한 사실임을 알게 하지만 대한제국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 무언가 이상하다.
하지만 러시아는 영토(領土)와 구성원, 프로이센은 통치체제로 존재한 상황으로 풀어 볼 수 있다.

바로 이중통치체제(二重統治體制)가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요(遼朝)와 금(金朝)은 다른 성격의 영역를 지배하기 위해 거란족의 요(遼朝)는 한족(漢族)과 거란족을 남면관(南面官:南樞密院), 북면관(北面官:북추밀원)으로 나누어 통치했고, 여진족의 금(金朝)은 천호장(千戶長) 맹안 모극제(猛安謀克制)[300호를 1모극, 10모극]로 여진족의 독자성을 유지하고자 한 제도가 시행했었기 때문이다.

게르만(Germanic)이 거란(契丹,Khitan:388–1211)이라는 사실은 그렇게 생소한 이야기는 아니다.

통일독일을 상대로 맺은 이 조약은 전체 440조항으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지고 조약의 원본은 2차세계대전 때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에 의해 사라졌다고 설명되고 있다.

혹 사라진 베르사유조약 원문에는 지금의 유럽대륙에서의 국가생성의 비밀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5.저지대 유럽제국생성과 시대상황

 

놀라운 사실은 바로 대한해협의 알 수 없는 두 개의 지명 중에 하나가 바로 저지대의 발트독일인(Baltic Germans)의 이름이라는 사실이며 이 저지대의 발트독일인 국가 프로이센이 독일통일제국을 세웠다는 사실 때문에 이 저지대 국가들이 주목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현 유럽제국들이 실제로 생성의 비밀스러운 곳 저지대(低地帶,lowland)를 보면 대단한 유럽국가들이 있어야 할 곳은 너무 영토가 협소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반면 북아메리카대륙의 북부 본 블로그가 발트해라고 주장한 곳을 보면 미국동부의 화려한 산업권과 연결된 북부지역에는 수많은 자원과 연계된 무역활로인해 부흥지가 되며 영토 또한 넓고도 넙은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협소한 유럽발트해가 아닌 북아메리카대륙 발트해에서 존재한 국가가 맞다면 1.2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키고 주도했다고 믿을 만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저지대인 발트국은 어딜 말하는 것일까?

발트해(Baltic Sea)는 이미 본 블로그 글 "조선금대화(朝鮮錦帶花)와 발트(Baltic)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8 "에서 충분히 밝혀본 사실로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캐나다지역, 특히 게르만어(Germanic languages)"Aust-marr"라 하여 동쪽호수(Eastern Lake) 혹은 동쪽바다(Eastern Sea)등으로 불리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고대 노르드어(Old Norse)"간드빅(Gandvik)"라 하였으며 백해(白海:White sea)라 하였고 또는 '위험한 바다'라 하여 '뱀 만(Bay of Serpents)'이라 하였으며 형태적으로도 "바다의 입구" 또는 "내해(inlet of the sea)"로 묘사하고 발트해(Baltic Sea)로 지목되는 허드슨베이(Hudson Bay)지역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곳은 조선 관북지방 함길도(咸吉道:1416), 영길도(永吉道:1413), 영안도(永安道:1470), 함경도(咸鏡道:1509) 지명이 있어야 할 위치이기도 하다.

이 허드슨베이지역으로 들어가는 수역들을 모두 합쳐 루퍼츠랜드(Prince Rupert's Land:Rupert's Land)라 명명하였는데 1670년 찰스 왕의 조카이며 찰스2세의 사촌인 루퍼트 왕자(Rupert of the Rhine:1619-1682)가 칙허회사 허드슨베이회사(Hudson's Bay Company:1670-)의 첫번째 총독이었기 때문에 이 지명으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이때는 여진(女眞) 후금(後金:淸朝)에 의해 북쪽지방이 점령되고 있을 때이고 게르만을 선조로 하는 앵글로족의 잉글랜드가 아모이(廈門,Amoy)에 상관을 설치할 때이다.

동시에 북아메리카대륙 북동부 역시 저지대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여기에 포함되어야 한다.

루퍼트 왕자의 이름에 라인(Rhine)이라는 명칭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이사람이 독일인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발트독일인은 생각보다 광범위하게 퍼져 있음을 알 수 있고 지금 유럽대륙독일영내 라인강(Rhine River)도 이 루퍼츠랜드(Rupert Land)에 있는 지명이거나 아니면 북아메리카대륙 북동부 저지대에 있는 강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독일인임에도 프로테스탄트(개신교)로써 잉글랜드내전(English Civil War,1642-1651)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

화물선 메이플라워호(Mayflower)를 타고 잉글랜드 남서부 플리머스에서 신대륙 아메리카 식민지, 현재의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도착한 영국의 청교도(改新敎, Protestantism)들이 그곳에 거주했다는 사실도 이러한 사실과 연관되며 본 블로그 글"(:iron)로 본 새로운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2 "에서 동북지방의 생여진(生女眞)은 고려 함경도일대에 걸쳐 거주한 동여진(東蕃)을 말하는 것이며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뉴햄프셔, 메인주를 합하여 뉴잉글랜드(New England)라 하였다고 밝혔던 바가 있다.

특히 저지대 국가인 프로이센(Preussen:Prussia)의 호엔촐레른왕가(House of Hohenzollern)빌헬름 1(Wilhelm I.1797-1888,재위:1871-1888)는 군국주의로서 프로이센을 일등 국가로 만들려 했기때문에 독일의 통일을 꾀하였고 1864년 프로이센-덴마크 전쟁과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그리고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Franco-Prussian War)에서 차례로 승리한 뒤, 1871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황제 선포식을 거행했다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로 역사에서 유럽대륙 새로운 종주국의 위치에 섰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절대로 조선왕조와의 연결된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는 유럽대륙만을 따로 떼어내고자 하는 설정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프랑스의 붓꽃(Fleur-de-lys)문장을 사용하던 부르몽왕가(House of Bourbon)와 조선(朝鮮)이 연관되어 나타나는 사실을 본 블로그에서 "루이시리즈"로 거론한 바가 있지만 당시 프랑스가 유럽국가들 중에 외교적으로 리더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서 보면 1870년 보불전쟁(普佛戰爭)에서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패퇴시키고 1871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황제 선포식을 거행했다는 사실은 프랑스가 가지고 있던 권한의 상징성을 프로이센이 넘겨 받았다는 의미가 되며 유럽역사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던져 주던 상징적인 사건이다.

실제로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혹은 보불전쟁(普佛戰爭)은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공격하여 곤경에 빠뜨리고 명실공히 유럽제일제국이 되어 독일통일제국을 건설하게 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독일은 프랑스를 대신하여 유럽대륙 외교적으로 중심 국가 역할을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나라가 저지대 발트해에서 생성된 국가이니 판단할 수 있는 이야기다.

 

본 블로그 글 "자포니즘(Japonism)의 해괴한 변신 http://blog.daum.net/han0114/17050829 "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프랑스는 모든 예술적 활동에서도 중심이었고 예술가들이 파리로 몰려 들었다는 사실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문화적으로 보아야 할 단면이지만 자본주의적 부르주아 성격이 매우 강해 자본주의집단임을 생각하게 한다.

프로이센(Preußen)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들어내기 시작한 1861년 동 시대에 국제정세를 보면 1861년에는 그리스에서 혁명일어나, 국왕 오토(Otto,Óthon:1815-1867)가 추방되었으며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산업주의자)와 남부(러시아제국 농노제 폐지에 의한 반발)가 서로 충돌하여 소위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1861-1865)이 발발한 시기이고 동시기에 조선에서는 임술농민항쟁(壬戌農民抗爭:1862), 삼란민란(三南民亂:1862), 제주민란(濟州民亂:1862)등 농민봉기와 반란에 의한 민란(반자본주의반란:사회주의반란)이 다발하였으며 이러한 소요로 인해 체제 자체가 극도로 혼란기에 접어들어 통제력이 상실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시기이다.

또한 조선(朝鮮)이 결정적으로 흔들리는 상황으로 1863년 금위영(禁衛營)군졸들이 받은 녹미(祿米)의 질 문제로 소요가 발생하였는데 수도 중심에서 발생한 훈련도감 금위영의 반란사건은 철종(哲宗1831-1863,재위:1849-1863)의 생명을 매우 위태롭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해 철종14(1863)에 철종왕가 일족이 몰살당하는 역사적인 큰 의혹이 발생한다.

고래심줄처럼 이어지던 조선왕조계보가 완전히 단절이 되어 버린다.

이후의 조선왕정은 통제력을 상실하고 지배력의 한계에 도달하여 권력누수가 심하게 나타난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는데 왕실 자체가 완전히 다른세력으로 바뀌는 모습이기도 하다.

이시기에 체제불안은 여러 해양세력들의 준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1866년에는 조선(朝鮮)에 무단침범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USS Princess Royal,614)를 대동강에서 군민(軍民)들이 불태웠고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리면서 프랑스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 수 천 명을 학살하였다는 이유로 프랑스함대가 양화진(楊花津)에 내침하여 소위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한.

그러나 병인양요 사건에서 이상한 점은 프랑스가 새로운 강자 프로이센의 등장으로 불안한 형국에서 내외부적으로 자신들의 코가 석자인 긴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구둘레길이 40,192km 3/2가 되는 약 30,000km 거리에 있는 동북아시아 한국 즉 한반도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박해를 막겠다고 무모하게 침입하여 그들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체 쫓겨나는 꼴이 될 수밖에 없었던 점은 국가전략상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야말로 헛튼짓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러한 구도는 서양인들이 주장하는 인도적인 문제가 무엇보다도 우선이라고 하고 더불어 상대적으로 무역개방요구라고 하지만 결국 그러기엔 그들이 너무 먼 거리에서 전력 소모가 되고 무장한 함대 몇 척으로 조선(朝鮮)을 제어하겠다는 발상자체가 역사 흐름이 매우 부자유스러워졌다는 이야기다.조선은 그들 주장처럼 은둔하지도 않았고 허약하지도 않았다.

본 블로그 글 "[1]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 귀선(龜船)과 거북선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2 "이란 글에서 충분히 조선의 군사력을 알 수가 있었는데 바꾸어 생각할 때 이러한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조선(朝鮮)과 프랑스는 아주 가깝게 근접한 거리에 존재하였거나 프랑스의 병인양요는 오히려 조선(朝鮮)내의 어떤 세력적인 반발을 크게 확대하여 국가 대 국가 형태로 구도를 잡았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것은 세계사를 꾸밀 때 하나의 체제와 역사를 서양과 동양으로 분리하고 역사도 분리한 결과이다.

당시 프랑스라고 하였지만 천주교 단체의 조직적인 성격이 강했고 그들이 전자에서 언급한 것처럼 부유한 자본가들의 세격집단이라면 양화진에 내침한 함대는 조선체제가 부정하는 고용된 용병함선일 가능성도 높다.

돈이면 무엇이든 해결된다는 사고에서 나온 발상일 것이다.

아마도 천주교신자들을 피신시키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프로이센과 프랑스가 충돌하여 외교권이 넘어간 사실에 비출 때 프랑스는 자본력을 가진 집단으로 조선이란 하나의 체제아래 유럽(해양세력)왕실이나 영주 사이를 묶는 로비역할을 하던 위치에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것은 현재 근대사에서 프랑스식민지제국(Empire colonial français)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아래 글은 유학자이며 의병장인 최익현(崔益鉉:1833-1906)의 시문집 면암선생문집(勉菴先生文集)에서 이 당시를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를 한번보자.

勉菴先生文集 20/ () 외성당기(畏省堂記)

方今世級愈降變亂層生彼西鬼各種交迹中國汩陳五行墮壞倫綱?患之大憂慮之重又非北胡黑水輩之比則其弱彼強此掃淸開廓之政豈容一毫一息捨畏省二字而可以收功也

이 시문집의 시대적 상황은 조선(朝鮮)이 제일 혼란을 겪을 때인 1866(高宗3) 병인양요(丙寅洋擾)때로서 이렇게 시작한다."오늘날은 세상이 더욱 말세가 되어 변란이 거듭하여 일어나서 서귀(西鬼)들이 중국(中國)에 횡행하며 오상(五常)을 어지럽히고 삼강오륜을 무너뜨려 화환(禍患)과 걱정이 크고 중하여 지난날 북호(北胡)[() 즉 을 가리킴]나 흑수말갈(黑水靺鞨)이 거란(契丹:Khitan)에 속하면서 숙여진(熟女眞)이라 불렸는데 이러한 사건들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우려한다 하였고 그럼에도 오늘날 정치현황은 저들(西鬼)을 약화시키면서 우리를 강화시키고 더러운 것을 일소하는 정치를 해야 하지만 어찌 잠깐이나 털끝만큼이라도 외성(畏省) '두려워 반성하는'것은 없이 공효(功效, effective work)를 거둘 수 있겠는가."하고 있다.

위 중국이라 함은 하나의 자유 무역소로써 조선(朝鮮)의 중앙조정(中央朝廷)이 있는 곳이며 서양해양세력들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접근하고 있는 상황이 무엇인지 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너무 안일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변란이 거듭된다 하였는데 이 변란은 국내에서 벌어지는 것이라고 볼 때 당시 유럽왕위계승전쟁, 보물전쟁, 영란전쟁, 그리고 위 기타 열거한 병란(兵亂)들도 이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시대상황이 그렇다.

후금()은 동여진, 흑수말갈은 서여진을 말하고 동여진의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서여진의 3차고려거란전쟁(993-1018)이라고 하는 거란지란(契丹之亂)의 그러한 성격이다.

이것에서 병자호란은 대륙으로 보았을 때 동북쪽이며 거란전쟁은 서북쪽임을 알 수가 있다.

선조때는 임진왜란이후 북호의 분탕질이 지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임진왜란이 진압된 후 1599년 누르하치(老酋:1559-1626)는 해서여진(海西女眞)을 복속했다는 것을 알 수도 있다.

선조 32년 기해(1599)1212(정해)기사를 보면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북호(北胡)가 분탕을 자행한 일에 대하여, 내년 봄에 눈이 녹고 길이 마른 때를 기다려 당사자인 변방을 지키는 신하.변신(邊臣)에게 영을 내려서 기회를 헤아려 만전의 계획을 도모하도록 회계하였다는 사실과 함경 감사 윤승훈(尹承勳)의 장계로 인하여 변장(邊將)들이 심사 숙고하고 기회를 보아 어떻게 계획을 짜는가에 따라 형세를 참작하여 처리하겠다"는 뜻으로 회계의 기록도 볼 수가 있다.

흉노(匈奴)가 있는 중앙을 호() 또는 북호(北胡)라 하고 오환(乌桓), 선비(鲜卑)가 있는 흉노(匈奴) 동쪽을 동호(东胡)라 하며 서역(西域) 각 종족이 있는 흉노(匈奴) 서쪽을 서호(西胡)라 하였다는 사실은 왕국웅(王國維)의저 관당집림(觀堂集林:1923)서호고상(西胡考上)의 기록이다.

서역사람으로만 알고 있는 한자 호인(胡人)도 푸른 눈동자(靑眼), 벽안(碧眼)을 가졌다고 알려진다.

바로 세계삼한역사적으로 볼 때 북방민족, 부족들의 공격적인 양상을 대비하여 크게 걱정하는 것인데 상대가 호인(胡人)이라는 사실에서 구려호(句麗胡), 조선호국(朝鮮胡國), 고려호(高麗胡)까지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북왜(北倭)라고 했거나 또는 서북왜(西北倭)라 한 것이며 또한 남왜(南倭)와 다르게 구분을 한 것임을 알 수가 있으며 서호(西胡)라 함은 고대 총령(葱岭)내외 서역(西域) 각 종족을 통칭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총령은 본 블로그 글 "안식향(安息香)으로 본 삼한(三韓)영역

http://blog.daum.net/han0114/17048871 "에서 밝혀보았던 티벳이 있는 로키산맥 북쪽을 가르켰다.

북방지역에 역사기록을 보면 북호(北胡), 북저(北狄), 북로(北虜)라고 하는 것들은 모두 근대 여진족으로 정리되면 인종적으로는 튀르크몽골족인데 소위 독일(거란), 러시아(몽골)계통의 종족임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어르쇠 흑요석(黑曜石)과 아라사(愕羅斯)정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1 ""악라사관기(鄂羅斯館記)로 본 대한제국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4 "에서 밝혔듯이 몽고종락(種落)이라 하는 것은 대비달자(大鼻獺子) 아라사(鵝羅斯)라고도 하며 이를 타타르(Tatar)라 한 것이다.

진한(辰韓)의 흉노(匈奴), 동호지속의 선비(鮮卑), 거란(契丹)이며 이 또한 근동(近東)에 있으니 이것이 여진(女眞)과 달단(韃靼), 동쪽 회랑의 동량야인(東良野人) 삼한 게르만(Germanic peoples)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런 복잡한 종족간에 특히 18세기 유럽역사를 보면 왕위계승으로 인한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이때는 유럽역사의 리더격이라 할 수 있는 발트해(Baltic Sea) 북유럽에서 넘어온 앵글로색슨(Anglo-Saxons) 잉글랜드(England)는 엘리자베스1(Elizabeth I,1533-1603,재위:1558-1603)를 마지막으로 승계가 끊겼고 이들 종족은 조직이 와해되면서 카리브해로 몰려들었는데 1655년 카리브해 섬들 가운데 동쪽 끝에 있는 바베이도스(Barbados)에서는 잉글랜드의 인간 쓰레기들이 모두 카리브해로 모였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였으니 그들의 발흥지가 어딘지를 명확히 알 수가 있다.

이들이 모두가 최익현(崔益鉉)선생이 말했듯이 서괴(西鬼)가 아니면 왜구들이다.

1603년부터 스코틀란드의 스튜어트왕가(House of Stuart:1150-1807)가 아니면 잉글랜드 왕가가 존속할 수 없었던 상황이 고스란히 들어난다.

이런 이어 붙임이 사실일까?

이렇듯 1653년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병합하면서 1659년까지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연방(聯邦:union)이란 이상한 관계와 국호를 사용했다고 하지만 왕조국가체제가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는 아마도 근세기에 역사짜집기 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며 이리저리 맞추다 힘들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진실로 이러한 지경의 현재 영국이라고 하는 잉글랜드(Kingdom of England)라는 국가는 이미 존재가치를 상실한지 꽤 오래된 것으로 오늘날 세계사에서 영국이란 왕조국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역사의 바른 순리이다.

본 블로그 글 "고려와 스코틀랜드, 원과 잉글랜드 그리고 로마노프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5 " 에서 지적했듯이 러시아로마노프왕가의 해군기와 비슷한 국기를 사용하는 스콜틀랜드의 스튜어트왕가 힘을 빌어 동군연합(同君聯合)이라는 명목으로 왕가 명줄을 이었다고 보는 것이며 때문에 그들의 존속된 역사는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로마노프왕가와 잉글랜드왕가는 혈혼을 빙자한 문제가 있고 이것은 정확하게 튀르크몽골족의 정략혼(政略婚)이.

잉글랜드는 그러한 처지에서 볼 때 또한 유럽강국 프랑스의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divine right of kings)을 바탕으로한 강력한 통치자 태양왕 루이14(Louis XIV,1638-1715 재위:1643-1715)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되어 있는 것도 프랑스가 유럽세력들에게 가지는 권한이 어느정도인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1701-1714), 폴란드 왕위계승 전쟁(1733-1738),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 7년전쟁(Seven Years' War:1756-1763), 바이에른 왕위계승 전쟁(1778-1779)등이 발생한 이 기간동안 프랑스의 강력함은 유럽귀족정치를 주도하는 위치에서 1763년부터 프랑스세가 꺾이고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대신하게 됨을 알 수가 있으며 무엇인가 국가체제로써의 핵심적인 요소가 크게 망가졌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러한 사건들은 역사적으로 국가로 볼 수 없고 다만 체제내 봉건 왕가, 정원을 가진 영주의 문제라 보는 것이 옳다.

 

6.저지대 유럽제국 프로이센

 

북유럽 발트해 자그마한 저지대의 영역을 중심으로 군사대국 호엔촐레른왕가(House of Hohenzollern)의 프로이센(Prussia) 초대국왕 프리드리히 1(Frederick I:1657-1713,재위:1701-1713)가 신데렐라처럼 등장하고 이 세력은 유럽의 강대국인 프랑스를 상당히 괴롭히게 된다.

특히 네덜란드와 프랑스 개신교도 즉 위그노(Huguenot)들의 유입으로 새로운 산업과 땅의 간척사업이 이루어지면서 강대국의 역량을 키웠다고 되어 있는데 이 프랑스 인구의 10% 인 약 200만 명의 위그노들의 이동은 산업구도를 개편시켰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프랑스왕국의 서쪽과 남쪽지역에 80%가 집중되었던 위그노들은 장 칼뱅(John Calvin)의 지도를 따랐는데 귀족들과 도시 부르주아들이 대부분이라 한 이들은 상공업은 물론, 여러가지 기술을 지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본 블로그에서 서양사가 주장하는 이 또한 시민전쟁(Civil wars)이라 하였고 위그노전쟁(French Wars of Religion:1562-1598)기간에 임진왜란도 끼여 있는 것을 보면 수많은 반란 속에서 아마도 임진왜란이 최종적으로 조선군력에 의해 진압되고 마무리된 사건이 아닌가도 한다.

 

위그노(Huguenot)들이 전쟁기간 약 30년동안 활동한 것을 보면 카톨릭교회에 열광적으로 반대하여 사제, 승려, 수녀, 수도원, 수도원, 간판, 교회건물을 마구잡이로 공격하였고 위그노(Huguenot)가 점령한 대부분의 도시들은 교회에 있는 제단과 그림(회화)들로 이루어진 새롭게 새워진 우상들을 무너뜨렸고 때로는 건물들 자체가 허물어 뜨렸으며 고대 유물과 문자는 파괴하였고, 성인들의 시체는 발굴되어 불태워졌다고 한다.

중부에 있는 부즈주(Bourges), 남부의 몽토방(Montauban), 파리의 근접한 오를레앙(Orléans) 영어발음으로 올리언즈(Orleans)의 도시들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위그노(Huguenot)는 그 후 정치운동으로 변모했고 개신교지도자들은 상당한군대와 가공할 기병대를 집결시켰는데, 이 기병대는 가스파르 드 콜리니(Gaspard de Coligny)제독의 지휘아래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지며 이들을 스페인의 자치구 바스크(Basque:백제유민)의 일부인 나바르왕국(Regnum Navarrae)의 앙리4(Henry IV)와 부르봉가(House of Bourbon)가 위그노(Huguenot)와 동맹을 맺고, 그 절정이었던 60개의 요새화된 도시까지 성장한 개신교세력에 부와 영토를 더하여 이후 30년 동안 가톨릭교황권(Catholic crown)과 파리에 진지하고 지속적인 위협을 가했다고 한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이를 종교간의 갈등이라고만 보지 않는다.

종교간에 갈등인 것처럼 처리한 이유는 천주교가 교황제도를 세우려는 이유가 있고 개신교는 천주교를 상대로 처절한 싸움을 한 이력의 역사만을 근거로 서양사 즉 해양세력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 구도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것은 러시아 수학자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가 주장한 고대그리스, 고대로마, 고대이집트를 포함한 고대사 모두가, 중세에 일어난 사건의 반영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과 부합하고, 또 중국이나 아랍의 역사 모두가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친 것으로 1534815일에 바로크귀족 출신이며 군인출신 로마 가톨릭 수사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 Ignatius of Loyola, 1491-1556)에 의하여 창설된 예수회(Society of Jesus)의 장난이라는 주장은 상당한 신뢰성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1860 Einzug der preußischen Gesandtschaft in Yedo-에도에 프로이센 공사관 입성

  

위 그림은 1860년 당시 에도(江戶, Edo)를 점령하고 있던 세력은 프로이센(Preussen)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그림이다.

그러나 1918년 프로이센은 사라지고 반면 일본은 득세한다.

위 그림이 말해주는 시기는 1860324일 벚꽃이 많이 피어 있는 문밖 사쿠라다몬사건(桜田門外)사건이 발생하고 미일수호통상조약(日米修好通商条約:1858)을 독단적으로 처리하면서 히토쓰바시()파를 숙청한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보좌역인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1815-1860)의 행렬을 습격하여 암살한 사건이 발생한 동일한 년도이다.

이것으로 안세이 대옥(安政大獄)이 발생하였는데 이 때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을 임명한 왕(朝鮮)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한다는 의미의 존왕양이(尊王攘夷)사상이 당시 일본무사들에게 미토학(水戶學)으로 불리었고 신봉하던 때이다.

이 사상은 고대 중국의 춘추시대에 서주(西周)왕조의 천자(天子)를 세우고, 영내에 침입하는 이민족(남방의 )을 물리친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인데 이민족이라 함은 남방쪽에 있었을 남만을 말하고 일본근대사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에는 자본력을 가진 프랑스인들도 포함되어야  맞다.

미일수호통상조약(日米修好通商条約:1858)1899717, 일본에 대한 관세 부과의 확립에 관한 조약인 18941122일 조약(Treaty of November 22, 1894)으로 대체되었다는 이유도 사실상 믹구이 주도하는 시스템에서 일본이 빠진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이센의 역할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본 블로그 글 "오리엔탈역사문화의 인도(印度)지명이 아메리카에 있어야 할 이유

http://blog.daum.net/han0114/17049532 "에서 위 사진설명 "Einzug der preußischen Gesandtschaft in Yedo."1860년 프로이센왕국(Kingdom of Prussia:1701-1918)의 원정탐험대가 에도(Yedo:江戶)에 진주하는 모습의 그림이라고 하지만 이 시기는 프로이센(Prussia:普魯士,普魯西)이 군사대국으로써 발돋움하게 되는 1864년에 덴마크와의 전쟁, 1866년 오스트리아전쟁, 1870년 프랑스전쟁(普佛戰爭)등이 있기 전에 이야기다.

이것은 바로 프로이센 군대가 일본이라고 하는 곳, 에도(오늘날 도쿄)에 원정대를 보내 행군을 하게 한 곳은 동아시아대륙 열도가 아니라 덴마크 또는 오스트리아, 프랑스에 존재한 장소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물론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이 모두 체제내 핵심세력으로 소위 에도시대(江戶時代)의 무사집단 다이묘(영주:大名) ()이 아닌가도 한다.

그때 유명한 다이묘세력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등이다.

일본의 에도시대부터 북유럽 발트해국가와 매우 밀접하게 엮이고 있다.

이것들은 안세이5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의 다이묘(영주:領主)들의 체제내에서의 합의가 아닌가 한다.

다이묘들의 통치는 1871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적인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부()와 현()으로 일원화제도가 완성되면서 소멸되었다.

이때부터 하나의 체제가 영토뿐만아니라 봉건 왕가, 즉 영주까지 독립적으로 각자 국가 건립에 중주적인 역할을 하면서 수많은 영주(領主:大名:다이묘)국가, 봉건국가가 생성된다는 것은 오늘날 유럽국가들의 생성을 보는 것이 아닌가도 한다.

 

Prussian

German name: Preussen

[American]1. historical region of N Germany, on the Baltic

2. former kingdom in N Europe (1701-1871) & the dominant state of the German Empire (1871-1919): formally dissolved in 1947

1. 발트해에 있는 북부독일의 역사적 지역

2. 북유럽의 옛 왕국(1701-1871)과 독일 제국의 지배국(1871-1919) : 1947년 해산.

[British]a former German state in North and central Germany, extending from France and the Low Countries to the Baltic Sea and Poland: developed as the chief military power of the Continent, leading the North German Confederation from 186771, when the German Empire was established; dissolved in 1947 and divided between East and West Germany, Poland, and the former Soviet Union.

 

프로이센(Prussia:1701-1918)은 발트(波羅,Balts)족의 일파인 프루사(Prūsa)에서 이름을 따고 한자문화권에서는 보로사(普鲁士), 보로서(普魯西), 품송(品松)이라고도 하는데 90개가 넘는 가맹도시들이 연맹을 한 한자(Hanse)동맹으로 부터 출발하면서 중세(中世)에 일어났던 게르만동방확장(German eastward expansion)과 동방식민운동(東方殖民運動:Ostsiedlung)도 역할한 것으로 통일독일제국설립에 역할을 한 왕조라고 설명된다.

그러나 현재는 프로이센(Prussia)이란 명칭은 사라지고 독일제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자료설명을 보면 프랑스(France)와 저지대국가(Low Countries)에서 발트해와 폴란드로 확장된 북부와 중부 독일의 한 주()가 유럽 대륙의 최고 군사강국으로 발전하여, 독일제국이 성립된 1867-1871년부터 북부 독일연방을 이끌었으며, 2차세계대전 후 1947년에 해체되어 동독과 서독, 폴란드, 구소련으로 나뉘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여러가지 설명에 부족한면이 많다.

1867-1871년이라면 조선(朝鮮)이 프랑스에게 병인양요(丙寅洋擾:1866)으로 당하고, 미국으로부터 신미양요(辛未洋擾:1871)를 당하면서 지속적으로 개방요구에 시달렸으며 서세들의 노골화된 압력을 감당하던 때이므로 조선과도 깊이 연관된 사실임을 알 수가 있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면 일본 다이묘 수준 즉 부()와 현()의 형태로 1800년부터의 프랑스는 크게 보아도 베르사유의 부나 현 정도의 영주국가이었을 가능성이 있고 이 영주국가는 다른 영주국가들을 리더하고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입장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프랑스 국가(國歌) 라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역시 베르사유궁전에 의한 도시 또는 협의의 모티브가 강하다.

 

저지대(低地帶)유럽국가들을 보면 북해 연안의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로 구성된 지역에 있었던 국가이며 어떨때는 베네룩스(Benelux)라고 불리고 공동연합형태를 띄지만 적어도 4차영란전쟁(英蘭戰爭:1780-1784)까지는 네덜란드가 더치(Dutch)란 이름으로 독자적으로 해양력을 구축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점도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다.

이것만 보면 더치와 네덜란드가 다르고 네덜란드 명칭은 근세기에 더치와 바톤터치 한 명칭이다.

이들 국가는 거의가 북아메리카대륙 저지대 동부와 연관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시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지역 형태를 보면 허드슨베이(Hudson's Bay)를 중심으로 래브라도고원(Labrador高原)를 지나 저지대라고 하면 북동부지역이 세인트로렌스만(Gulf of St. Lawrence)의 해안을 이야기 할 수 있고 아니면 캐나다 뉴브런즈윅주의 주도 프레더릭턴(Fredericton)해안 남쪽으로 마린(Maine), 메사추세츠(Massachusetts), 코네티컷(Connecticut), 뉴저지(New Jersey)등의 해안이 될 것이다.

1871년 베르사유조약(Treaty of Versailles)의 진본이 사라진 만큼 그 조약이 진행된 배경과 또한 사라진 이유에 대해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역사학자도 이에 대한 검증이나 확인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많은 의문을 남길 수밖에 없다.

실제로 베르사유조약(Treaty of Versailles)에 의해 현 유럽국가의 경계선 구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해 밝힐 수 있는 근거가 되겠지만 조약원문자체가 사라진 지금 그렇다 하더라도 이를 어떻게 확인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좀 더 의문 꼭지점으로 올라가면 2차세계대전 시점에서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자신이 그들의 자랑스럽지 않는 과거사(1차세계대전패전)에 대한 조약이라고 기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또 하나의 추정은 그 후 명확하게 유럽대륙의 수많은 국가의 국경선이 정해지는 배경이나 바탕이 되는 이 조약의 원본이 존재할 때 지금의 세계사가 온전하게 보호되었다는 보장이 없다.

사망확인조차 여러 낭설이 있는 히틀러의 음모설을 제쳐 두더라도 혹 유럽제국을 만들려고 혈안이 된 최익현(崔益鉉)선생이 말한 서괴(西鬼),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을 움켜 쥔 서양세력 즉 승전국이었던 연합국의 소행일 것이란 의심도 사라지지 않는 미스테리이다.

어쩌면 히틀러의 소행으로 몰아붙이고 있지만 기실 유럽역사의 생성자체를 생각하면 당시 1차세계대전 후 조약의 조항들은 현재 연합국 세력들에게 들어내지 못할 어떤 불리한 사실들이 기록되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7.베르사유조약과 유럽국가생성의 의문

 

1차 세계대전 말에 이루어졌다고 하는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1919.6.28)이후 아래 게시한 중서유럽의 지도(1920, Cenral and Western Europe)에는 철도, 운하, 주요 도시(都市:city) 및 각 국가의 수도(首都)등과 새로운 조약에 의해 세워진 국가 경계선, 제안된 새로운 주()의 경계선, 그리고 나름대로 각 국가의 당시 국민투표에 의해 주권(主權)이 설정되어야 할 부분들이 포함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보면 유럽대륙에서 국가 별 경계선이나 각 주요한 이해관계설정상 간단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이 지도에는 독일군(獨逸帝國:Deutsches Kaiserreich)에 의해 해체된 요새화지역, 알자스-로레인 영토, 애게해(Aegean Sea)와 보스포루스 해협(Bosphorus Strait)사이의 중립 영토가 포함되었고 중서유럽, 국경, 정치, 역사, 교통, 국가 경계, 카운티 경계, 주요 정치 세분화, 역사적 사건, 해양, 위치, 내륙수역, 경계 등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아시아대륙에는 특이하게 한국(韓國:Koeaa)과 일본(日本:Japanese)을 그렸고 신중국이라고 하는 동아시아대륙의 중국지도는 미처 정리가 되지 않았는지 다 그리지 못해 시늉만 한 것으로 나타나 미완성적인 지도이지만 한반도와 열도에 대해 나름대로 세부적으로 지명을 표기하고 국가 면모를 세우려고 애를 쓴 흔적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신중국의 지도가 완성되기 시작한 것은 다른 자료에서도 말했지만 1931322일에 장려화(臧勵龢)등에 의해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이 출간되던 시점이라고 보면 정확할 것이라고 보고 본 블로그 글 "동조선과 서조선 그리고 광동조선 http://blog.daum.net/han0114/17050838 "에서 광동조선에 대한 1926628일 동아일보기사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조선체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1926년까지 중국생성은 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1920, Cenral and Western Europe-1920년 미국 뉴욕에 있었던 레슬리 주지회사(Leslie-Judge Company)에 의해 제작된 "1920 Leslie’s New World Atlas"란 제목 속에 있는 유럽국경변경지도

     

위 지도를 보면 특히 유럽대륙에 서부에 토대를 북아메리카대륙의 식민지 형태를 나타내는 것처럼 스페인과 프랑스의 위치방향과 거의 흡사하게 대륙에서 서부지역에 스페인, 중부에는 프랑스가 자리잡고 그 이외 국가들은 새롭게 짜여지는 느낌을 받는데 이들 국가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네덜란드(Netherlands)의 국경이 새롭게 그어지고 덴마크(Danmark)의 슐레스비히(SCHLESWIC)가 설정되었으며 장차 해체되어야 할 요새화지역(FORTIFICATIONS TO BE DISMANTLED)이 설정되었고, 에스토니아(ESTHONIA), 리보니아(LIVONIA), 쿠를란드(COURLAND), 클라이페다 지역(MEMEL CEDED BY GERMANY), 단치히 자유시(FREE GITY OF DANZIG), 동프로이센(EAST PRUSSIA), 리투아니아(LITHUANIA), 폴란드(POLAND), 독일(GERMANY), 벨기에(BELGIUM), 로렌(LORRAINE), 프랑스 동북부의 지방으로 독일과 접한 알자스(ALSACE), 우크라이나(UKRAINE), 오스트리아(AUSTRIA), 헝가리(HUNGARY), 체코슬로바키아(CZECHOSLOVAKIA), 제네바(GENEVA), 스위스(SWITZERLAND), 이태리(ITALY), 유고슬라비아(JUGOSLAVIA), 알바니아(ALBANIA), 불가리아(BULGARIA), 루마니아(ROUMANIA), 큰 그리스(GREATER GREECE), 터어키(TURKEY), 중립지역 영토(NEUTRAL TERRITORY)등이다.

 

즉 유럽대륙에서 스페인과 프랑스를 제외한 동부유럽국가들은 모두가 새롭게 생성된 것 같은 지도의 기록들이 난잡하게 표시되어 있다.

두 차례의 거대한 세계전쟁을 발발시켰다고 하는 독일역시 새롭게 국경이 정해졌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다.

물론 패전국이었으니 무슨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구도와 무엇인가 다른 새롭게 형성되거나 생성된 느낌의 구도라는 것이다.

북아메리카대륙의 윌슨대통령은 서반구의 구()스페인 식민지에 간섭하고자 하는 유럽제국의 동향 등의 국제정세에 대처하기 위하여 미국 대통령 먼로(James Monroe,1758~1831,재임:1817-1825)가 표명한 원칙적 주장이며 이를 '루스벨트의 먼로주의 수정안'으로 하여 남아메리카 내 후진국의 내정문제에서 비()아메리카인의 개입을 금지하고, 미국이 해당지역, 국가의 치안을 보장하고 이들 나라에 의한 국제조약의 준수, 해당 국가내 유럽 각 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를 책임지겠다는 것이 먼로주의(Monroe Doctrine)라는 것인데 이것은 미국이 아메리카대륙전체를 관할하고 유럽대륙으로 이동한 유럽인들은 더 이상 아메리카대륙에서 관심을 끊으라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윌슨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진 것이다. 

즉 유럽대륙에 유럽인들이 거주하고 국가별 나눔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겠지만 아메리카대륙에서 유럽인들은 완전히 사라져 달라는 것과 이렇든 저렇듯 관섭을 불허한다는 내용이다.

1차세계대전은 유럽전쟁이라고 하였지만 유럽대륙에서 벌어진 전쟁이었음에도 유럽인들이 상당수가 남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보이고 스페인식민지가 북아메리카대륙서부에 존재한 것과 프랑스식민지가 북아메리카대륙 중부전체를 차지한 것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유럽인들이 실제적으로 분리하여 국가형태를 이루고 싶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때문에 1차세계대전은 미국윌슨의 먼로주의를 우선적으로 내세우는 것처럼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는 판단을 하게 한다.

 

이러한 현상은 기존 유럽대륙을 기준으로 먼로주의(Monroe Doctrine)'루스벨트의 먼로주의 수정안' 등에 의해 북아메리카대륙으로부터 추방되었다고 할 수 있고 그 외 다른 국가들도 북아메리카대륙 북동부에 존재했던 소규모의 분체국 또는 유럽역사를 주도하는 도시국가(都市國家:city state)들이며 고대그리스 또한 로마, 아테네, 카르타고와 르네상스시대의 여러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산재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를 대그리스(Great Greece)라 하여 영역을 넓혀 확장시켰다는 것도 생각할 수가 있다.

즉 유럽역사는 도시국가체제를 벗어나질 못했다는 사실밖에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는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옛 고구려의 넓은 영토와 문화의 역사를 간직하는 국가로 남았다는 사실도 고구려 영토가 어마어마했다는 것과 일개 도시국가가 아니었음이 밝혀지는 셈이다.

또한 터어키라고 하는 오스만제국(Ottoman Empire:1299-1922)역시 베르사유조약에 의해 국가가 축소되었다는 사실까지 확인한 상태이다.

원래 아랍어 이름 오스만[ʿUthmān(عثمان)]은 고려의 군사 방()과 동일한 명칭으로 14세기에 오스만의 부족 추종자들을 가리켰고, 이후 제국의 군사행정 엘리트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고려 무신정권의 사조직 중방(重房), 도방(都房)과 같은 성격의 명칭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게 나타난다.

때문에 제국의 명칭으로는 부족한 면이 있다.

투르크(Türk)는 아나톨리아 농민과 부족 인구를 가리키는 말로 보통 낮추어 부르던 용어이며 도시거주 터키인들이 자신을 오스만리족이나 투르크족으로 지칭하는 것을 꺼리고 발칸(Balkan)과 아나톨리아(Anatolia)에서 옛 비잔틴 제국(Byzantium Empire:395-1453)의 영토의 거주자를 의미하는 루미족(Rumi) 또는 "로맨"으로 지칭한다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 필요가 있다.

루미족은 문자 그대로 '로마(Roman)'라는 뜻의 아랍어에서 차용된 단어로서, 로마는 비잔틴제국의 대상으로 삼고 있고 단순히 아나톨리아와 관련된 사람이나 사물에 관련된 것을 가리킨다고 되어 있다.

오스만제국이라 함은 옛 아랍국가를 통괄하는 것으로 알려지지만 모자라는 것이 보이고 이 역시 서양세력들의 입김이 작용한 명칭이며 통일신라(統一新羅,Later Silla:668-935)를 대체하는데는 이집트역사가 포함되어 이것에서 유럽사가 생성되는 바탕역할을 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이를 즉 아랍(Alab)과 유럽(Eurb)을 동일하게 보았던 사실이 있다.

또한 유럽국가 중 리보니아(LIVONIA)는 생소한 국가 이름인데 이것은 미국 미시간(Michigan)주 동남부, 디트로이트(Detroit)부근의 도시로 지금도 자리잡고 있다.

이처럼 도시국가들이 유럽대륙의 영토를 어떤 식으로든지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를 더한다.

동프로이센(EAST PRUSSIA)역시 전에는 독일제국 동북부의 주의 이름었지만 폴란드 회랑(Polish Corridor)에 의해 독일과 분리되어 있던 고립 영토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왜 이런 갖다 붙일 수밖에 없는 형태의 역사가 존재할 수밖에 없을까?

중요한 것은 17세기 일본과 깊은 관계가 있는 네덜란드(Netherlands), 러시아와 쌍심지를 켜고 으르렁되었던 폴란드(POLAND), 오스트리아(AUSTRIA), 헝가리(HUNGARY)역시 유럽영역으로 옮겨졌다는 것은 갈등의 소지가 있는 국가들은 모두가 유럽대륙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가 있다.

수많은 도시국가를 거느린 이태리(ITALY)도 이 범주속에 있다.

이 지도는 미국 정부 조사로부터 수집되고 최신 지리적 (地理的) 연구 결과들을 전시하는 것으로써 물리, 정치, 역사적 지도 시리즈(NY: C. S. Hammond & Company, 1920)로 제작 된 것임을 알 수가 있어 그래서 더욱 놀랍다.

 

8. 16세기 서양지도에 한반도는 없다.

 

서양인들이 만든 제작지도는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하는가.

그들이 만든 지도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이것은 바로 대한해협의 나타나는 이상스러운 지명을 밝히고자 이렇게 긴 길을 달려 온 것이다.

즉 이러한 과정이 없으면 도대체가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유럽대륙을 보았고 이제는 아시아대륙에서 한반도와 열도를 볼 차례인데 어떻게 이 지도는 지명을 처리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차례이다.

일단 열도는 관심을 두지 않겠다.

시간이 허락하면 이 지도가 말하고 있는 열도를 재검토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겠다. 

이 지도에 나타나는 한반도 지형 명칭에 특이하게 나타나는 것은 기존 한반도 역사가 반세기(半世紀)년을 말하고 있는 것에 반해 비록 1920년 서양인이 만든 지도이지만 역사를 근거로 하는 명칭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 둘 정도는 그럴 수가 있다 하겠지만 특히 해안과 바다선상에 있는 섬들은 그들 차지가 되었고 서양세력들이 크고 작은 함선을 이용하여 들락거렸을 가능성이 있는 해안과 섬은 거의가 서양이름으로 칠갑(漆甲)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그들이 명칭을 부여하는 것은 곧 식민지라는 못된 사고가 발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더라도 한반도 역사의 사정상 이름도 근거도 모르는 서양해적선이나 고래잡이어선들이 함선이란 명목으로 무단으로 들어와 해안을 측량을 하고 해안조사를 하는 등 상당한 주권 침해의 짓을 자행했음에도 그것에 대한 반성의 그림자는 눈꼽만큼도 찾아 볼 수가 없다.

모든 것은 그들이 발길이 가는 곳에는 식민지가 생성되고 지도에 옮겨지는 형태를 아무런 꺼리낌 없이 자행하고 무차별적으로 저질렀다는 것은 그들을 정상적인 지식에 의한 것이라고 도저히 볼 수 없는 행태이다.

만약 그곳이 실제로 반만년 역사를 가진 왕권나라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깡그리 무시하고 식민지라 했을 것이 뻔하다.

지금처럼 해안을 함선들이 무선을 타전하여 경계하고 중앙으로 보고하는 시스템이 전무한 상태에서의 그들이 해상침범은 해적들이 하는 짓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다.

일반 서양인 개인이 나서 그렇게 했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일이지만 해적들은 조직을 만들고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치고 달아나면 그뿐이다.

그러한 해적들의 행동때문에 서양사에서도 골머리를 아프게한 사실이 발견된다.

만약 치고 달아난 해적집단들이 동해상에 나타나 그들의 이름을 지명을 남겨 오늘날 지도에 기록되고 제작이 되어 버젓이 역사지도로 탈바꿈하는 형태가 그려지지만 그것조차 우리들은 역사라고 침을 바르고 있으니 어찌 할 말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어쨌던 상황이 그렇다.

그러한 면에서 다시 한번 더 마구 찍어내듯 양산했던 서양지도를 살펴보자.

아래"1575 Asiae nova descriptio"의 지도를 보면 놀랍게도 아예 한반도가 표시되지 않고 있다.


                                                 [1575 Asiae nova descriptio]

 

이 지도를 그린 사람은 바로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Abraham Ortelius,1527-1598)란 네덜란드(Dutch)플랑드르의 지도 제작자이자 지리학자인데 스페인 국왕 펠리페 2(Phillips II,1527-1598,재위:1556-1598)의 궁정 지리학자로 임명되었던 사람이다.

 

                                    [1598 Asia Partiu Orbis Maxima MDXCVIII]


                              [위 지도에서 한반도의 위치를 확대시켜 본 지도]

 

마티아스 쿼드(Matthias Quad:1557-1613)는 퀼른(Cologne)판화사 겸 지도제작자인데 네덜란드(Dutch)에서 태어나 판화를 배웠고 쿼드는 Johann Bussemacher 협력하여 유럽 4절판 지도책(quarto atlas)을 출판했다.


 

이러한 현상은 "1609 Abraham Ortelius : Asiae Nova Descriptio" 에 까지도 나타난다. 

최초의 현대 세계 지도인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Abraham Ortelius)의 테아트룸 오르비스 테라룸(Theatrum Orbis Terrarum:Theater of the world)에서 나온 아시아 지도이다. 

명색이 오르텔리우스는 스페인 국왕의 궁정지리학자이다.

이런 자가 그린 지도를 가지고 필리핀을 방문하고 필리핀을 식민지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색하고 불편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뻔한 거짓말이 역사가 된 세상이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나 같은 부류의 서양해양세력이고 이 지도가 탄생할 시기인 16세기 말엽에 그들이 아시아대륙 지도에서 그려넣지 못한 한반도 코리아에 임진왜란이란 명칭의 사건을 말하고 있지만 그들은 해양세력이란 탈을 쓴 무식한 왜구일 뿐이다.

어떻게 지도조차 그리지 못한 곳을 그들이 전략적으로 공격을 감행한다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놀랄 것이다.

왜 서양인 우리가 한반도를 공격했다고 생각하는가 라고.. 그것조차 몰라서야 되겠는가.

지금의 열도일본에 있는 사람들을 서양인들의 용병이고 노예들이며 일반적으로 농사를 짓게 하여 군량을 거둬드리는 도구라고 생각하던 사람일 뿐이다.

서양인들은 임진왜란을 그들이 저질렀던지 아니던 간에 동아시아대륙에 16세기까지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모두 알 필요가 있다.

일본인들이 왜 서양인이 되고싶어 난리일까?

그들이 서양 노예신분이었던 세월을 돌이켜보면 서양인만큼 존경스러웟던 것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 열도 사이코 정치인 아베가 트럼프에게 녹아나는 것은 그러한 심리가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9.대한해협의 명칭

 

위에서 본 지리상황을 참고로 또 다시 1920년 레슬리 주지 회사(Leslie-Judge Company)"1920 Leslie’s New World Atlas"지도를 다시하번 보자.

1920년 제작한 지도이니 동해를 일본해(Sea of Japan)라고 한 것은 지도제작자가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일게다.

그것을 지금의 한반도 잣대로 친일미국인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하지만 대한해협(大韓海峽:Korea Strait)의 명칭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없다.

동해만 보더라도 한국해(韓國海)라 해야 하지만 우리는 한국해라 하지 못하고 그껏 동해(東海)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17, 18세기의 특히 프랑스가 만든 지도를 보면 상당한 수의 지도에는 '한국해(韓國海)' 'Mer de Coree', 'COREA SEA' 라고 표시된 지도가 너무나도 많다.

글쓴이가 보관하고 있는 지도에만 하더라도 수십종이 된다.

즉 알게 모르게 그들은 이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지도는 코리아해라고 규정지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수로기구(IHO:國際水路機構)의 초대 회원국이었던 일본이 한국보다 우선권을 가졌다는 이유로 그리고 열도인들이 실제로 식민지배를 하지 못했음에도 식민제국처럼 행세하여 마침내 동해(東海)를 그들의 입맛대로 '일본해'라고 공식화 하고 이를 국제수로기구에서까지 인정했다는 사실과 미국과 영국 그외 서양세력들은 이를 묵인한 것이다.

이것은 본 블로그 글 "IHO로 본 세계삼한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8 "에서 잘 살펴보았지만 결국 서양세력들이 장악한 모든 국제환경적인 면에서 우리는 일본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고 해야 맞다.

 

한국해(韓國海) 주제는 다음 또 다른 기회에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하고 대한해협으로 들어가 보자.

본 블로그 글 "코리아지협(whilst the Isthmus of Corea) http://blog.daum.net/han0114/13203353 "와 "1926년 마이애미 허리케인(Miami hurricane)로 본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14 "두 종의 글에서 현재 한반도와 열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바가 있다.

한반도 부산(釜山)과 열도의 시모노세키(下關)사이에 분명 대마도(對馬島) 즉 쓰시마섬이 있음에도 이 쓰시마섬과는 전혀 관계없이 부산과 시모노세키 사이에 해협을 대한해협(大韓海峽)이라 한 것에 대해 전기에 언급한 내용과 다르지 않다.

즉 대한해협의 영어 명칭은 바로 "KOREA STRAIT" 이.

이것이 조선해협일 수도 있지만 코리아 지협으로도 생각할 수가 있다.

굳이 'COREA' 'KOREA' 로 바꿔 사용했다는 문제를 여기서 재론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지난 역사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공부하는 입장에서 볼 때 이미 19세기말엽 미국에 의해 한국이란 명칭은 "KOREA" 로 굳어져 버렸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의심이 간다.

북아메리카대륙 미국내에서 무엇때문에 19세기 말엽 홍보아닌 홍보를 메스미디어로 유별나게 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의문이 존재하고 "COREA" 라 칭하여 적어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이를 신라(新羅), 고려(高麗), 조선(朝鮮)이라 했던 삼한역사에 대한 주체를 인정해야할 소지가 있었던 것이 확실하며 때문에 북아메리카대륙 미국 땅에서 19세기말까지는 "COREA"란 용어는 지속적으로 오르내렸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와 매우 친숙한 역사명칭은 영어라고 하지만 "KOREA" 보단 "COREA"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 명칭으로부터 세계삼한역사를 들여다 볼 수밖에 없다는 사유가 된다.

만약 'Korea'란 명칭으로 굳어져 버린다면 우리는 한반도 역사를 인정하고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과 그들의 목적의식과 동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찬란했던 'COREA' 는 이제 모습을 감추어버렸고 결코 우리나라의 국명으로써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식으로던지 서양세력들로 인해 철저하게 의도된 것이라고 사료된 것이다.

왜 한반도 역사를 서양세력과 대칭적으로 해석하려하는가.라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본 블로그 글 "COREA, CORIA, CORREA, KORAI의 실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1 "에서 지적한 내용이지만 "COREA"란 명칭사용은 18785월 서양나팔수 또한 황색언론이라고 하던 선대이메거진(Sunday Magazine)에 의해 마지막으로 지칭한 것으로 나타나고 미국 각종 자료에서도 공통적으로 이와 같음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 이후부터 현재 사용되고 있는 “Korea”란 명칭을 대신하여 한반도에서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블로그 글 마다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대한(大韓)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는 큰 대(), 한국 한()을 사용하는 한 그자체가 바로 'COREA'이며, 이를 큰 한국, 위대한 한국이라고 통칭하고 영어로 그리이트 코리아(GREAT COREA)라고 하여 자존을 세웠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이러한 문제도 다음 이야기하기로 하자.

 

대한해협의 거리를 수리적으로 보면 부산과 시모노세키 사이의 거리가 되는데 225km, 부관페리(關釜)가 보통 시속12.5노트(1 knots1.852km)로 달리면 대략 10시간 소요되는 거리로써 선박이 1시간에 1해리 혹은 마일(nautical mile)1,852m 항해하는 속력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1920년에 작성된 "1920 Leslie’s New World Atlas (New York City, New York: Leslie-Judge Company, 1920)"지도를 보면 대마도(対馬島)를 중심으로 부산과 대마도 사이를 "브루턴 해협(Broughton Straft)"라 하였고 아래 대마도와 시모노세키 사이의 해협을 "크뤼센슈테른 해협(Krusenstern Straift)"이라 했음을 알 수가 있다.


 

도대체 이 명칭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백과사전에는 해협(海峽)은 육지(陸地)사이에 끼여 있는 좁고 긴 바다로 수도(水道), (), (:), '샛바다' 라고도 한다라고 정리되어 있다.

'샛바다'는 육지와 육지'사이 바다'라는 순 우리말이다.

A strait is a naturally formed, narrow, typically navigable waterway that connects two larger bodies of water. Most commonly it is a channel of water that lies between two land masses.

또한 영어자료를 보면 해협(海峽)은 자연적으로 형성되고, 좁고, 전형적으로 항해할 수 있는 수로(水路)로서 두 개의 더 큰 수역(水域)을 연결한다 하였고 가장 일반적으로는 두 개의 육지 사이에 놓여 있는 물의 통로라고 설명된다. 

Straits are the converse of isthmuses. That is, while a strait lies between two land masses and connects two larger bodies of water, an isthmus lies between two bodies of water and connects two larger land masses.

그리고 해협은 지협(地峽)의 정반대라 하였고 해협이 두 개의 육지 땅 사이에 놓여 있고 두 개의 더 큰 수역을 연결하는 동안, 한 개의 지협(地峽:isthmus)은 두 개의 수역 사이에 놓여 있고 두 개의 더 큰 육지 덩어리를 연결한다고 되어 있다.

더하여 러시아어사전을 보면 스트로이티(стро́ить)라 하는데 (вин) 짓다, 건축하다; (возводить) 세우다, 수립(설립)하다, (cmену и m. п.) 쌓다, 구축(축척) 하다, (машины) 제작하다; (корабли) 건조하다 등으로 나타나 해협이란 의미가 상당히 인위적으로 새롭게 세워진다는 의미가 강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다시 풀이하면 해협은 언제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는 뉘앙스가 존재한다. 

그렇다.

가로 막혀 있던 육지를 가운데 뚫어 길을 터 바닷길을 만든다면 그것이 곧 해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기서 해협의 본래 의미가 자연적인 해협과 인위적인 해협까지 설명이 가능해야 하지 않겠는가도 말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하여 인위적으로 해협 명칭을 아무렇게나 가져다 붙일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대한해협을 상하(上下)로 양분(兩分)하는 브루턴 해협(Broughton Straft)과 크뤼센슈테른 해협(Krusenstern Straift)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10.브루턴 해협(Broughton Straft)

 

north coast of Vancouver Island, British Columbia, Canada,

브루턴 해협(Broughton Straft)은 위 영어자료에 보듯이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밴쿠버 섬의 북쪽 해안을 말하고 있다.


 


이곳은 어떤 곳인가.  

바로 러시아아메리카회사(Russian-American Company:1799-1867)1867년까지 장악했던 곳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니콜라이 레자노프(Nikolay Petrovich Rezanov:1764-1807)에 의해 모피장사꾼들이 1799년에 설립한 러시아아메리카회사(Russian-American Company)는 처음부터 알레스카를 기반으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외 포트로스 캘리포니아(Fort Ross, California:1812-1841), 하와이의 포트 엘리자베스(Fort Elizabeth, Hawaii:1814-1817), 포트 알렉산더(Fort Alexander near Hanalei, Hawaii:1817), 포트 바실리 데 톨리(Fort Barclay-de-Tolly near Hanalei, Hawaii:1817)까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를 관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절대로 러시아가 아시아대륙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러시아를 앞세우고 있지만 결코 지금의 동유럽에 존재한 러시아라고 할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한다.

러일전쟁이 발발하게 한 주요한 원인으로 일본입장에서 보았을 때 러시아가 남하정책 운운하고 있지만 그것은 잉글랜드가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며 현 러시아가 존재하는 유라시아대륙에서 결코 벌어질 수 없는 이야기다.

물론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이 존재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1877년 이야기다.

러시아아메리카회사가 북아메리카대륙 서남부가 아니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러시아가 존재하여 남부를 위협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동아시아대륙에서 1904년 러일전쟁당시 러시아가 남하를 위한 정책을 하기 때문에 일본이 반발하여 기습공격을 감행했다고 하는 것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 이후의 이야기지 결코 당시의 지형 위치상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이야기다.

 

brought-on

1.(상품이) 타지역에서 들어온[만들어진].

2.(사람이) 지역 사회에 속하지 않은, 타관 사람인.

 

브루턴 해협(Broughton Straft)의 브루턴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본래 영어사전에서 브루턴의 의미는 타지역에서 들어 온 것이라든지, 타지역에서 들어온 타지(他地)의 사람이라는 이방인(異邦人:Gentile)이라는 뜻이 큰데 유대인이 아닌 이교도를 지칭하는 말이라 했다.

유대인은 이방인이 맞고 떠돌이가 맞으며 거주지 없이 돌아다니는 고리대금업자라는 인식이 유럽인들에게 강하다.

()"The name Broughton is often derived from the Saxon “Broc”, which means brook or broken land; and “Tun”, the dwelling or town.

브러튼이라는 이름은 종종 '개울'이나 '부서진 땅'을 뜻하는 작센 "브록"과 주거(住居)나 마을을 뜻하는 ""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Broughton may also come from an Old English word meaning 'stronghold'. It is also likely to be derived from “berg” (a hill), and “ton” (a town), both Saxon words.

브러튼은 또한 '강인함'을 의미하는 오래된 영어 단어에서 유래된 것일 수도 있고 작센어인 '베르크'()''()에서도 유래될 가능성이 높다 하였다. 

()Broughton Island and the Broughton Archipelago, and Broughton Strait nearby, were all named in 1792 by Captain George Vancouver, for Commander William Robert Broughton, captain of HMS Chatham during his first tenure in British Columbia, and thereafter upon his return to the British Columbia Coast, of HMS Providence. HMS Discovery, Vancouver's ship, and HMS Chatham under Broughton were anchored off the south shore of this island on July 28, 1792.

마지막으로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밴쿠버 섬의 북쪽 해안에 브루턴 섬과 브루턴 군도, 그리고 근처의 브루턴 해협은 모두 영국탐험가 조지 밴쿠버(George Vancouver:1757-1798)선장에 의해 1792년 브리티시 컬럼비아(British Columbia)에서 처음 재임할 때 프리킷함 채텀(HMS Chatham:133)의 선장 윌리엄 로버트 브루턴(William Robert Broughton:1762-1821)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고, 그 후 1793년 브루턴 선장의 프리킷함 프로비던스호(HMS Providence:406)가 브리티시 컬럼비아 해안으로 돌아오자마자 이름이 붙여졌다.

1792728, 브루턴의 휘하에 있는 디스커버리호(HMS Discovery:330)와 밴쿠버의 배(Vancouver's ship), 채텀호(HMS Chatham)는 이 섬의 남쪽 해안에 정박했다고 말하고 있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에 1774년 스페인배가 이 지역에 제일 처음 도착했고, 그 뒤를 이어 북서항로를 탐색중이던 브리티시(British)의 쿡 선장, 제임스 쿡(James Cook:1728-1779)이 도착했으며 영국과 미국의 모피상들이 최초의 개척자였고 밴쿠버 섬에 대한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지속되다가 영국의 독점권이 인정되자 영국은 밴쿠버 섬을 직할식민지로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그렇지만 1841년 교회에 조시 밴쿠버의 위패( memorial)를 설치한 것을 보면 그 역시 허드슨베이 회사(Hudson's Bay Company)의 고용인이었음도 알 수가 있다.

결국 1788년 건조되었고 1791년부터 1795년까지 조지 밴쿠버선장의 지휘아래 북아메리카 서부 해안 탐험에 관한 디스커버리호와 동행한 영국해군 조사단의 일원이었던 프리깃함 채텀(HMS Chatham)의 선장 윌리엄 로버트 브루턴(William Robert Broughton)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역시나 이사람도 부르주아상인집안 출신으로 윌리엄 로버트 브루턴(William Robert Broughton)의아버지는 함부르크 상인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사람의 국적은 태어날 때는 그레이트 브리튼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1701-1801)이고 사망할 때는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United Kingdom:1801-1922)이다.

이 두개의 왕국을 지금 잉글랜드왕가를 선조로 한다고 역사정체성을 말하고 있다.

 

솔직히 한 것 비해 그들은 너무야단스럽게 부풀린 것이 많다.

돛대가 하나인 작은 범선, 슬루프(sloop) 프리킷함 프로비던스호(HMS Providence:406)1793년 윌리엄 로버트 브루턴(William Robert Broughton)선장이 이끌고 동아시아를 항해를 했고 1797516일 오키나와 남부(south of Okinawa)의 미야코지마(Miyako-jima)에서 산호초(coral reef)를 들이받고 파괴되고 난파되었을 때 천우신조(天佑神助:providential)로 작은 스쿠너(schooner:돛대가 두 개 이상인 범선)를 구입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후 브로튼과 그의 대원들은 이 스쿠너에 몸을 의지하여 임무를 계속하여 동북아시아를 탐험하였고 17992월에 귀국했다고 알려지지만 실제로 이러한 경우에 자신의 목숨조차 구하기 힘든 상태에서 동해안을 항해하면서 울릉도를 발견했다고 하여 울릉도 지명을 그 난파된 선박 선장의 이름을 붙여 지도제작을 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가당찮은 이야기다.

생각해보면 웃기지 않는가.

동아시아 한반도를 삼한의 본거지로 삼기 위해 지도를 만들어야 했고 그 지도에 마음대로 갖다 붙인 것이 오늘날 역사근거랄 것도 없는 프랑스함 라 페루즈(La Pérouse)함대가 발견하고 울릉도에 상륙조차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다즐레 섬(Dagelet Island)이라 명명했다던지 포경선 리앙쿠르(Liancourt)호가 동해에서 고래잡이를 하다 독도를 발견하고 리앙쿠르 암초라고 했다고 하거나 그로부터 6년 뒤 1855년에 영국함대 호네트호가 독도를 발견하면서 호넷 암(Hornet Island)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사실까지 실제로는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다. 

또한 생각해보면 18세기말엽에 500톤 미만의 프리킷함의 해양조사선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대수인가 한다.

 

11.크뤼센슈테른 해협(Krusenstern Straift)

 

Krusenstern Strait (Russian: Пролив Крузенштерна) is a strait that separates the islands of Raikoke and Shiashkotan in the Kuril Islands, Russia. It is separated into two passages by the Lovushki Rocks and is 61.2 km (about 38 mi) wide. A strong northwest tidal current creates tide rips; eddies and whirlpools may also form at times. This strait was named after Russian admiral and explorer Adam Johann von Krusenstern.

크루센스턴 해협(Krusenstern Strait)은 러시아 쿠릴 제도의 라이코크(Raikoke) 섬과 시아슈코탄(Shiashkotan)섬을 분리하는 해협이다. 로브시키 바위에 의해 두 개의 통로로 분리되며, 넓이는 61.2km(38mi)이다. 강한 북서쪽 해류는 조수간만의 파도를 일으키며, 때때로 파도와 소용돌이도 형성될 수 있다.

이 해협은 러시아의 제독이자 탐험가인 아담 요한 폰 크루센스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본래의 크뤼센슈테른 해협(Krusenstern Strait:Пролив Крузенштерна)은 한반도 대한해협이 아니라 오호츠크해 러시아 쿠릴열도(Kuril Islands)에서 중부의 무인도 화산섬인 라이코케 섬(islands of Raikoke:면적 4.6km2, 최고점 551m)과 시아시코탄 섬(Shiashkotan:면적 122km2,최고점 시나르카 봉 944m)사이를 구분하는 해협이다.

서두에서 언급했지만 대한해협을 남북으로 나누어 북쪽을 칭한 브루턴 해협(Broughton Straft)은 당시 잉글랜드 부르주아상인집안의 탐험가 이름으로 파악되며 남쪽의 크뤼센슈테른 해협(Krusenstern Straift)이라는 것은 발트족 독일인 해군장교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쿠릴열도의 시아시코탄 섬에서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라이코케 섬(Райкоке,雷公計島)은 과거 일본이 1875년부터 1945년까지 70년간 이 섬을 실효 지배하고 있다가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후에 소비에트연방의 영토가 되면서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크뤼센슈테른 해협을 이루고 있는 또 하나의 섬, 시아시코탄 섬(Shiashkotan:捨子古丹島)은 세베르기나 해협을 사이에 두고 북동쪽에 하림코탄 섬(Kharimkotan), 남서쪽 약 9 km에 로브스키 암(Lowuschki Rock)를 사이에 두어서 각각 인접하고, 또 서북쪽에 예카르마 해협(Ekarma Strait)을 사이에 두고 약 5km 거리에는 예카르마 섬이 있다.

특히 로브스키 암(Lowuschki Rock 북위:48.33, 동경 153.54)에는 바다사자가 많이 서식하고 있으며 총 4개의 암초로 이루어져 있는 로브스키 암(Lowuschki Rock 북위:48.33, 동경 153.54)에 의해 두 개의 구절로 분리되어 있으며 61.2km(38 마일)로 사이가 넓다. 강한 북서 조류가 조수의 거센파도를 일으키고 때때로 회오리와 소용돌이도 때때로 형성 될 수 있다.


                                                [Lowuschki Rock 그림]

 

특히 마치 독도와 같은 환경을 가진 이 로브스키 섬(Lovushki Islands)을 돌가야 바위(Dolgaya Rock)라고도 한다.

Gaya is one of the best historical sites in India. Gaya is named after the demon Gayasur (meaning "the demon Gaya"). According to Vayu Purana, Gaya was the name of a demon (Asura) whose body became pious after he performed strict penance and secured blessings from Lord Vishnu. It was said that the body of Gayasura was transformed into the series of rocky hills that make up the landscape of Gaya.

가야(Gaya)란 어원은 인도에서 찾을 수 있는데 힌두교의 성전(聖典) 푸루나(purana) 기록에 엄격한 참회를 행하고 비슈누(Vishnu)()으로부터 축복을 얻어낸 후 신체가 경건해진 악마(demon Gayasur)즉 가야 아수라(阿修羅)의 이름이라 하고 있다.

또 가야의 풍경을 이루는 일련의 바위 언덕으로 변모되었다고 하고 석가가 기도한 구릉(丘陵)같은 곳이라고 하는데 위 로브스키 섬을 보면 돌 언덕, 돌 구릉같이 보인다.

돌가야(Dolgaya)에서 돌(dol)은 순수한 우리말이며 돌석()구릉이다.

물론 이것도 이동된 지명이라고 보이지만 한반도 동해 독도를 우리는 외로운 섬이라고 하지만 서양인들은 모두 암()이라고 록(Rock)를 사용하는 것을 풀어보면 암()()의 속자(俗字)이고 ()()으로 이루어 글자인데 바위()의 산이다.

이것은 본래 돌(dol)로 인식되던 독도의 역사 명칭이 아니었는가도 한다.

 

이 크뤼센슈테른 해협(Krusenstern Straift)은 전자에서 풀어 보았듯이 쿠릴반도에 소속된 지명이다.

마찬가지로 쿠릴반도에 이 지명은 러시아제독이며 탐험가인 아담 요한 폰 크뤼센슈테른(Adam Johann von Krusenstern:1770-1846)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사람의 이력을 한번 살펴보자.

아담 요한 크루젠슈테른은 발트 독일인(Baltic Germans)이다.

과거 발트 독일인들은 현재 후손 중 가장 큰 집단으로써 독일과 캐나다에서 발견되는 민족인데 에스토니아(Estonia, Reval), 타르투(Dorpat), 리보니아(Livonia), 사레마 섬(Ösel), 히우마 섬(Dagö), 라트비아(Rīga, Livland, Kurland), 리투아니아(Lithuania) 등 발틱국가에 거주하는 일반독일인이 아닌 토착 농노에 대한 귀족, 지배계급을 구성하였고 이들 땅의 정부, 정치, 경제, 교육 및 문화를 그들이 통제하였으며 13세기부터 1918년까지 700년 이상 통치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동양역사에 적용해 보면 대금(大金)에게 멸망 단계에서 야율대석(德宗)이 서쪽으로 피해 서요(西遼:Qara Khitai, 1124-1218) 즉 대거란를 세우게 되지만 1218년 몽골계 나이만(乃蠻)에게 멸망당하였고 그때로부터 정확하게 700년이 1918년이다.

金史·本紀第二·太祖

遼人以鑌鐵為國號認為鑌鐵是很堅硬的其實鑌鐵雖堅終究還是會變壞只有金才能永遠不變不壞

금사본기(金史本紀)에 보면 " ()는 빈철(鑌鐵:Damascus steel)로 호()를 삼았는데 그 견고함에서 취한 것이다, 철은 단단하지만 결국 변괴될 것이다, 그러나 금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라 한 것이다.

요나라가 취한 빈철은 탄소강(炭素鋼:carbon steel)을 말하는 것으로 탄소 함량이 0.02~2.11%인 것을 말하는데 이 철 재료로 만든 검이 다마스쿠스 검(Damascus blade)이라고 하며 비단 손수건을 칼 위에 떨어뜨리면 저절로 베어질 만큼 예리할 뿐만 아니라, 탄력성이 커서 바위를 내리쳐도 구부러지거나 부러지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북아메리카대륙 버지니아 워싱톤카운티에 다마스쿠스(Damascus, Washington County, Virginia, USA)가 있다.
표고 595 m에 있는 이도시는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 지역에는 체로키족(Cherokees)과 쇼니족(Shawnees)이 거주했고 18세기 중반, 헨리 모크(Henry Mock:1794-1892)와 그의 가족은 로우렐 크리크(Laurel Creek)과 비버댐 크리크(Beaverdam Creek)에서 합해 정착했다. 그 장소는 Mock's Mill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1886년 존 대니얼 임버든(John Daniel Imboden:1823-1895)은 모크(Mock's)의 아들로부터 이 땅을 구입하여 다마스쿠스의 영어 이름인 다마스쿠스(Damascus)를 설립하였다. 임버든은 그 지역에서 철광산(iron mines)을 찾기를 기대했지만, 유일한 퇴적물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현상이었다. 그 마을은 결국 목재산업(timber industry)에 의해 개발되었고 다마스쿠스(Damscus)는 1904년에 시(市)가 되었다.



결국 다마스쿠스의 원래 지명도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본 블로그 글 "철(鐵:iron)로 본 새로운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2 "에서 밝혀 본 것처럼 고대 히타이트(Hittite)의 정확한 위치도 위 그림지도와 마찬가지로 슈피리어호를 중심으로 고기 빅산지에서 우리가 찾을 수밖에 없다 하였고 미국에서 철강산업이 발전하는 주요한 원인으로서 첫째 원석(原石)을 확보할 수 있는 광산(鑛山:mine)이 가까이에 석탄이 있었다는 사실과 제련(製鍊)공정을 원활하게 하는 연로 즉 석탄산업(石炭産業:coal Industry) 또한 철강산업지역과 맞물려 공동발전을 이루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어 그곳은 바로 애팔레치아산맥에 포괄하고 있음도 밝혔다.

제련 기술이 뛰어나는 것은 원광이 존재한 곳과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마스쿠스 검Watered pattern(물결무니페턴)13th-century Persian-forged Damascus]

 

그러나 요()를 멸망시킨 금나라에는 금이 많이 생산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했다는 사실과 금의 색깔은 백()인데, 완안부의 색깔 또한 백이다."하였다.

金史本紀第一 世紀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兄阿古乃好佛留高麗不肯從:「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吾不能去也。」獨與弟保活里俱始祖居完顏部僕幹水之涯保活里居耶懶其後胡十門以曷蘇館歸太祖自言其祖兄弟三人相別而去蓋自謂阿古乃之後石土門迪古乃保活里之裔也及太祖敗遼兵於境上獲耶律謝十乃使梁福斡荅刺招諭渤海人曰:「女直渤海本同一家。」

()의 시조의 휘는 함보이고, 처음에 고려(高麗)에서 나올때, 연령이 이미 60여 세였다. 형 아고내는 불()를 좋아하여, 고려(高麗)에 머물며 나옴을 원하지 않고 말하길 "후세자손이 필히 서로 모이고자 하는자가 있을 것이니, 나는 가지 않겠다. 오직 동생 보활리를 데리고 함께 하겠다" 하였다.

시조가 완안부(完顏部) 복간수의 물가에 거주하였고, 보활리는 야라에 거주하였다. 그후 호십문(胡十門)이 갈소관을 들어 태조(太祖)에게 돌아갔는데 스스로 말하길 그 조상 형제 3인이 서로 이별하여 갔으니, 대개 아고내(阿古乃)의 후손임을 스스로 일컫는 것이다. 석토문과 적고내는, 보활리의 후예다.태조가 경계에서 요병(遼兵)를 깨뜨림에 이르러, 야율사십(耶律謝十)을 붙잡고 곧 양복(梁福)과 알답자로 하여금 발해인(渤海人)을 항복 권유하여 말하길 여직(女直)과 발해(渤海)은 본래() 같은 집안이다.하였다.

큰 형 아고래(阿古迺), 둘째 함보(函普), 그리고 막내 보활리(保活里) 이렇게 3형제다 

여유당전서 第六集地理集第四卷疆域考

金史世紀, 北路沿革續

金之始祖函普初從高麗來與弟保活里俱始祖居完顏部僕幹水之涯保活居耶嬾安僕幹水當是吉州以北耶嬾是咸興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에 보면 함보(函普)가 갔다는 그 완안부(完顏部) 복간수(僕幹水)’는 우리 땅 함북 길주(吉州) 이북이고, 보활리(保活里)가 갔다는 야래(耶懶)’는 오늘날 함남 함흥이라 하였다.

또 금조의 시조 완안함보(完顏函普)는 신라의 후손이라 하여 신라(新羅)의 김씨의 금()을 택한 것이라고 한다.

여진의 땅에 여진인들이 불렀다는 신라산(新羅山)’에 대해 기술하고 있어 신라유민은 북쪽 만주지방의 완안부에 거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案漠北行程錄自同州四十餘日至肅州東望大山金人云此新羅山其中產人薓白附子與高麗接界文止此其云新羅山者亦長白山之謂也

허항종(許亢宗)이 펴낸 행정록(行程錄)에는 동주(同州)에서 40일을 가면 숙주(肅州)에 이르는데, 동쪽으로 대산(大山)이 바라보인다. 금나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곳은 신라산(新羅山)이다. 그 산속에서는 인삼(人蔘)과 백부자(白附子)가 산출되며 고구려와 경계를 접하였다.” 하며 삼가 살펴보건대, 이 산은 바로 장백산이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을 참고할 때 본 블로그 글 "(:iron)로 본 새로운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2 "에서 살펴보았듯이 요()는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 철생산지이며 서부에서 발흥한 금조(大金)는 북아메리카대륙 서북부에서 위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1710년 이후,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제국의 군사, 정치, 민간생활,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에서 점점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 발트독일인들은 1918년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러시아제국에서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진다.

1945년에는 대부분이 독일이나 시베리아, 중앙아시아로 추방되었다.

조선이 누군가에 의해 해체되던 시점인 1881년 러시아의 발트지방에는 18만명의 발트인 독일인(Baltic Germans)이 있었으나, 1914년까지 이 숫자는 162,000명으로 감소했고 1881년 에스토니아에는 약 46,700명의 독일인이 있었다고 알려지며 1897년 러시아 제국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라트비아(Latvia)에는 인구의 6.2%120,191명의 독일인이 있었던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이것이 과연 독일인인가 하는 것은 의문이 남는다고 말하고 있다.

발트 독일인의 역사와 존재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1939)의 체결과 그 후의 나치-소련 인구 이동에 따라 1939년 말에 막을 내렸다고 되어 있는데 절멸인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상 발트지역은 현재 북유럽으로 정해져 있지만 이는 1920년 이후에 이야기며 그 이전 발트는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 허드슨베이 지역이라 해야 맞다.

 

본 블로그 글 "선금대화(朝鮮錦帶花)와 발트(Baltic)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8 "에서 발트해(Baltic Sea)가 게르만어(Germanic languages)"Aust-marr"라 하여 동쪽호수(Eastern Lake) 혹은 동쪽바다(Eastern Sea)등으로 불리었다는 사실을 자료에서 알 수 있는데 현재 "유럽대륙의 발트"의 지명은 이와 같은 위치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고대 노르드어(Old Norse)"간드빅(Gandvik)"라 하여 백해(白海:White sea)라 하였고 또는 위험한 바다라 하여 뱀 만(Bay of Serpents)이라 하였으며 형태적으로도 "바다의 입구" 또는 "내해(inlet of the sea)"로 묘사하였다는 사실을 종합하여 발트해(Baltic Sea)가 있을 곳은 북아메리카대륙 북부 허드슨베이(Hudson Bay)라 하였으며 조선금대화(朝鮮錦帶花)대입하면서 이를 확신한 사실이다.

본래 이 허드슨베이지역을 허드슨베이회사(Hudson's Bay Company, HBC:1670-)의 사유지라 한 것은 적어도 17(1670)세기 이전까지 주인이 없었다는 이야긴데 서양인들이 주장하는 반복되는 허황된 주장이며 이전 주인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조선 영역에서 함경도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참역사사실이다.

 

이것에서 이미 본 블로그 글 "해달(海獺:Sea otter)로 본 함경도

http://blog.daum.net/han0114/17049995""함경(咸鏡)의 빙하와 움푹들어간 땅, 끼어있는 바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7 "에서 충분히 살펴본 이야기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는 북방민족을 거론할 수밖에 없는 곳인데 당조()때 돌궐(突厥)과 송조()때 거란(契丹) (遼朝)이며 요조가 서요가 되었다가 금조에게 망했으며 동북부에는 동호에서 말갈(靺鞨)과 실위(室韋)를 이야기 할 수있으며 식신(息慎), 직신(稷慎), 주신(朱申) 숙신(肅愼) 읍루(挹婁), 어원은 밝다’, ‘이나 로 발음되는 발조선(發朝鮮), 야인여진(野人女眞)으로 만주족(滿洲族까지 이어진다.

함경도 하중부 지금의 길주도 오랫동안 야인(野人)에게 점거(占據)되었다.

우리 사서에 기록된 북방지역의 북인(北人), 야인(野人)이라고 하여 반도역사는 이것을 통칭 여진(女眞)이라고 하지만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여진이 아니라 흑칠(黑漆)한 것처럼 몸이 검은 야인(野人)도 있었고 또한 동량야인(東良野人)이란 올량합이 바로 그것이다.

이곳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아도 여진족들의 영역일 수 있다.

본 블로그는 서부 여진은 현재 역사는 러시아제국 또는 고용된 주식회사로 그리고 있고 동부여진은 잉글랜드라고 하여 역사 접근이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잉글랜드에는 게르만족(Germanic peoples)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발트 게르만족이 존재한 것으로 풀어 볼 수 있으며 여진족의 상업주의와 무역업의 발전이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허드슨베이회사가 생성되고 그 지역을 점령한 것으로 나타난다.

어쩌면 이 허드슨베이회사 역시 조선왕실에서 허가 한 특허회사일 가능성이 더 많다.

고려시기에 고려의 동북면과 연결된 갈라전(曷懶甸)일대에 거주하던 요(遼朝)의 여진부족들은 고려의 국경지대를 왕래하며 그들의 토산물을 부족한 생필품과 무역거래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부락의 추장들 중 일부는 고려를 종주국(宗主國)으로 삼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고려북방지역을 그래서 서양인들이 출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큰 무역시장이 있고 도성이 있어 서양인들의 시각으로 부르주아라고 보았으며 천자가 관할하는 중앙정부(中央政府)관리들이 있어 오래전부터 큰 시장(교역, 무역소)을 근거로 북경 또는 왕경(王京), 성경(萬戶盛京), 중국이라 하였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독일제국 동북부의 비슬라 강(Vistula)하구의 띠 모양의 지역 폴란드 회랑(Polish Corridor)에 의해 독일과 분리되어 있던 고립 영토 동프로이센(East Prussia)과 리투아니아(Lithuania)에서 온 민족 독일인들은 문화적, 언어적, 역사적 친화성 때문에 발트 독일인으로 잘못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프로이센의 독일인들은 독일 북부의 왕국 프러시아(Prussian:1701-1918)를 생성시켜 보유하고 있었고, 1871년 이후에는 그들이 살았던 영토가 프로이센 왕국의 일부였기 때문에 독일 시민권을 보유했다고 알려진다.

리벤족(Lievens)과 같은 일부 귀족 가문들은 원주민 족장들로부터 독일여성(German women)들을 통해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리벤족의 독일 리보니아 기사단(Livonian Order)들 중 많은 수가 러시아 황제 이반 4(Ivan IV:1533-1584,재위:1547-1584)때 러시아와 폴란드-스웨덴 사이에 벌어진 리보니아 전쟁(Livonian War)중에 많이 사상자가 발생하여 거의 사라졌다고 말하고 그 지역에 새로운 독일인들이 도착했으며 이 기간 동안 원래의 정착민들의 낮은 독일어(Platdeutsch)는 점차적으로 새로운 정착민들의 높은 독일어(Hochdeutsch)로 대체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대한해협 대마도 남쪽 해협에 명명된 아담 요한 크루젠슈테른(Adam Johann von Krusenstern:1770-1846)은 스웨덴(Swedish) 귀족가문 폰 크뤼센스트주르나(von Krusenstjerna)에서 이동한 발트족 독일인(Baltic German)가문으로 발트해를 접한 에스토니아(Estonia) 하리우주(Harju maakond) 하구디(Hagudi)에서 태어났다.

1710년 에스토니아 전체가 러시아제국에 의해 정복되었고 이 전쟁으로 에스토니아 인구는 다시 초토화되었는데, 1712년의 인구는 15170,000명으로 추산하였으며 러시아 정부는 발트 독일인들의 모든 정치적, 토지소유권을 완전히 회복시켜 틀어쥐었다.

크루젠슈테른은 스웨덴 출신이면서도 스웨덴-러시아전쟁에서 러시아제국 해군으로 참전하고 1793년부터는 러시아아메리카회사가 생성되는 1799년까지 왕립해군(Royal Navy)에 복무한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이때는 영란4차전쟁(Fourth Anglo-Dutch War:1780-1784)시기에서 영국이 승리하고 영국이 네덜란드의 해상권을 장악하였으며 해양강국이었던 때라고 설명된다.

그러나 앵글로(Anglo) 가 왕립해군(Royal Navy)을 가진 잉글랜드라는데는 의문이 많다.

물론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미국, 인도, 중국이라는 역사위치가 아메리카대륙이다.

그의 활동이력을 보면 남미의 남쪽 끝에 있는 케이프 혼(Cape Horn)과 남아공(South Africa)의 끝에 있는 희망봉을 지나 중국, 인도, 미국을 방문하여 마치 세계 전역을 돌아다닌 것처럼 말하지만 본 블로그 글 "고래역사와 더치·양키 그리고 일본 http://blog.daum.net/han0114/17050830 "에서 이미 알렸듯이 태평양을 횡단하지 못한체 대서양 범주와 아메리카대륙 서부지역해안을 항해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러시아와 중국사이의 직통통신(direct communication)의 이점을 지적하는 논문을 발표한 후, 인정을 받았고 그로인해 그는 차르 알렉산더 1(Alexander I)로부터 아시아 극동 연안(Far East coast of Asia)으로 항해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도록 임명되었다.

이때 위 1920년 미국에서 제작한 지도에도 나타나는 것처럼 한반도 동해안으로 항해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상트페테르부르크출신의 백작 니콜라이 페트로비치(Nikolai Petrovich:1754-1826)와 러시아아메리카회사(Russian-American Company:1799-1881)의 후원으로 크루젠슈테른(Krusenstern)은 세계 최초의 러시아 세계일주항해(Russian circumnavigation of the world:1803-1806)을 이끌었고 이것의 주된 목적은 러시아아메리카(알래스카)회사와의 모피무역의 발전이라 했다.

크루젠슈테른(Krusenstern)1841년 마침내 러시아제독이 되었고, 1842년 푸르 르 메리트(Pour le Mérite)훈장을 수여받았으며 그는 1846년 그가 1816년에 구입한 에스토니아 영주의 저택이 있던 킬시 마노르에서 생을 마치고 탈린 성당에 묻혔다고 자료에 나타난다.

아마도 2척 원정선박은 러시아아메리카회사의 소속일 가능성이 높고 그들의 목표는 중국 및 일본과의 교역을 확립하고 남아메리카에서 교역을 촉진하며, 북아메리카 서부의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가능한 식민지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이 두 척의 배는 크루젠슈테른(Krusenstern)의 지휘 하에 브리티시상선 나데즈흐다(Nadezhda:Hope, formerly the British merchant Leander)와 캡틴-리에리 유리 F. 리스안스키의 지휘 하에 있는 네바(Neva:formerly the British merchant Thames)18038월 크론슈타트(Kronstadt)에서 출항하여 남미의 케이프 혼(Cape Horn of South America)을 둥글게 돈 후 북태평양에 도달하여 남아공의 희망봉(via the Cape of Good Hope at South Africa)을 거쳐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크루젠슈테른(Krusenstern)18068월에 크론슈타트(Kronstadt)에 다시 도착했고 두 척배의 선원들은 그들의 항로에 대한 상세한 기록과 지도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 기록속에는 대한해협의 기록도 있다.

 

12.마무리

 

긴 글을 이제 마무리하게 되었다.

우리의 역사가 순리적이고 반듯하게 존재한다면 이런 불필요한 긴 서술이 필요가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런 편하고 이치에 꼭 맞는 진실의 역사를 가지지 못했다.

하여 글쓸때마다 긴 글이 되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대한해협의 남북으로 구분하면서 북쪽은 브루턴 해협(Broughton Straft)이라 하고 남쪽은 크뤼센슈테른 해협(Krusenstern Straift)이라 한 사실에 대해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 보았다.
그리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서양인들이 마구잡이식이 붙이 지명들은 정립된 것이 아님을 한 눈에 알아 볼 수가 있다.
캐나다 서부 밴쿠버 섬의 북쪽 해안에 브루턴해협이 존재하고 또한 쿠릴열도 라이코크섬과 시아슈코탄섬 사이에 크뤼센슈테른 해협(Krusenstern Straift)도 존재한다.



이와 똑같은 아시아일주탐사가 최초의 러시아 세계일주항해(Russian circumnavigation of the world:1803-1806)보다 이른 시기 1785년부터 1788310일에 호주의 보타니 만을 떠난 뒤 신비롭게 사라졌다고 하는 프랑스 세계일주항해의 선박이다.

이 지도에도 나타나지만 포항을 클로나르 곶(C.Clonard)이라 한 것은 당시 동해안 탐사를 시작한 아스트라베호(French ship Astrolabe(1781))의 선장이었던 클로나르(Robert Sutton de Clonard)의 이름을 따라 명명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한반도에 섬뿐만아니라 해안 육지 명까지 그들이 마음대로 갖다 붙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무엇때문에 이런 행위가 이어질 수밖에 없었을까?

한반도는 숙명적으로 식민지 영토로 만들고자 했던 사실이 들어난다.

클로나르에 대해서도 잠시 살펴보면 프랑스의 해군 장교이자 탐험가인 백작 장프랑수아 드 갈롭(Jean-François de Galaup, comte de Lapérouse,1741-1788)이 루이 16세의 명을 받아 선원 220명의 배 2척을 끌고 태평양 탐험에 나선 그는 1785년 브레스트 항을 출발하여 대서양의 카나리아 군도, 칠레 남단 케이프 혼, 하와이 군도, 알래스카, 마카오, 필리핀 제도, 일본, 그리고 17875월 정조 때 제주도를 지나 울릉도를 지나갔으며, 남해안과 동해안을 조사했고 동해를 지도에 일본해로 표기하였다 하고 캄차카 반도에는 178797일 페트로파블로프스크에 상륙하여 현지인들의 환대를 받았던 것으로 기록되며 그 이후 사모아, 호주 등을 거쳤고 호주 북쪽 바다 뉴칼레도니아 산타크루즈의 티코피아 섬에 이르러 좌초되어 행방불명되었으며, 이후 1826년에 그 선박의 잔해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경쟁적으로 프랑스와 러시아는 세계일주항해를 도모했고 프랑스 루이16세가 지시한 사실과 러시아 차르 알렉산더 1(Alexander I)가 지시한 것과 취지가 같으며 프랑스는 시기가 1785년부터 배가 사라지고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1788년까지를 말하고 러시아는 크루젠슈테른(Krusenstern)에 의해 18038월부터 18068월까지 이루어진 최초 러시아 세계일주항해(First Russian circumnavigation)가 시작된 시기는 거의 동일선상에 놓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의 체제가 움직이는 것과 같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동시대에 왕립해군과 해상권 다툼이 있었고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1769-1821,재위:1804-1814) 즉 홍경래시대(洪景來,1771-1812)가 다가오는 시점이다.

이들 모두가 중국과 해상무역 개방을 요구하고 중국에 대한 관심이 많을 때이다.

러시아 수학자 겸 신역사연구자인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의 주장처럼 중국(中國)이나 아랍(ALAB)의 역사가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친 것으로 중국이 서양인들로부터 관심이 최고조로 올라오던 시점이기도 한다.

때는 조선왕조 순조(純祖1790-1834,재위:1800-1834)시기로 정치적으로는 벽파(僻派)라 하는 안동김씨가 세력을 강화하던 때이며 서양사적으로는 하노버 왕가(House of Hanover)계보에서 그레이트브리튼아일랜드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1801-1922)의 조지 3(George III, 1738-1820,재위:1760-1820)와 같은 시기이며 당시 왕립해군(Royal Navy)이 존재했을 때이다.

홍경래는 정주성전투(定州城戰鬪:1811.12.30-1812.4.19)에 의해 소멸된다는데 상대는 러시아제국이다.

최초 러시아 세계일주항해(First Russian circumnavigation)의 행선지를 잠시 보면 크론슈타트(Kronstadt)를 출항하여 발트해(Baltic Sea)와 대서양(Atlantic Ocean)을 횡단하고,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s), 브라질(Brazil)을 지나 케이프혼(Cape Horn)을 돌아 태평양을 건너 일본을 향해 출발하였고 마르케사(Marksas)와 샌드위치(Hawaiian)제도, 캄차카(Kamchatka)제도에도 정차하였으며 하와이(Hawaii)를 떠난 후 2척의 배는 서로 갈라져 리스안스키(Lisianski)는 러시아아메리카(알래스카)로 향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마스트3개짜리의 슬루프함 나데즈흐다(Nadezhda:1802-1808 Russian ship:430)는 알래스카의 시트카(Sitka)를 향해 출발하여 인도양의 중국과 마카오(China and Macao on the Indian Ocean)를 지나 항해한 다음, 아프리카를 돈 후 발트해(Baltic Sea)를 건너 크론스타트(Kronstadt)까지 돌아왔다.

그런데 인도양의 중국과 마카오란 한 사실은 이상하기 그지 없다.

China and Macao on the Indian Ocean

위 영문을 보자, 근대사가 만든 역사지명위치를 기준으로 할 때어떻게 중국과 마카오가 위치하는 곳이 인도양이 될 수 있는가.

동서지나해라 해야 마땅하지 않는가.

또한 하와이를 떠난 후 서로 갈라진 나머지 한 척의 배, 네바(Neva:1802-1812, 370)1804년 이스터 섬(Easter Island)을 방문했고, 그해 말 알래스카 시트카 전투(Battle of Sitka, Alaska)에서 틀링기트족(Tlingit)을 물리치는데 역할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1805년 리스안스키(Yuri Lisyansky:1773-1837)는 마카오(Macau)에서 크루젠슈테른(Krusenstern)을 다시 만났으나 곧 헤어졌고 또한 1805년에 그는 현재 그의 이름을 가진 그 섬(Lisianski Island in the Northwestern Hawaiian Islands)의 하와이 승려(Hawaiian monk)를 처음으로 묘사했다고 말해진다.

그리고 네바는 1806722일 나데즈흐다(Nadezhda)보다 거의 한 달 전에 크론슈타트로 돌아왔다고 자료에 나타난다.

 

1785년부터 1788310일에 호주의 보타니 만을 떠난 뒤 신비롭게 사라졌다고 하는 아스트라베호(French ship Astrolabe (1781))의 항해도 문제가 있지만 러시아의 항해 경로지를 보면 이 발트해가 매우 신경쓰이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기록은 러시아가 현 유라시아 대륙에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발트해를 설정한 것이기 때문에 발트는 북유럽에 있어야 하고 그곳을 지나 대서양쪽으로 항해하는 설정이나 괜히 아프리카를 휘돌아 대서양으로 들어가 발트해와 크론슈타트로 입항했다고 하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함이 있는 비합리적행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만약 캐나다 동북부 해안에 위치했더라면 카리브해와 대서양 남북전체를 한번 휘돌면 끝이다.

특히 앞에서 잠시 서술한 이야기지만 중국과 마카오가 인도양에 속한 것처럼 지명처리가 된 것도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중국과 마카오가 인도양에 속하려면 카리브해와 대서양 남부를 인도양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있고 대서양전체를 오르내렸으면 가능한 이야기다.

그것은 더욱더 최종 입항지 크론슈타트(Kronstadt)가 북아메리카대륙 북동부에 있었을 확률이 매우 높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본 블로그 글에서도 잠시언급한 내용이지만 남북전쟁을 앞두고 잉글랜드 세계금융조직에 의해 협박을 받고 있던 링컨대통령을 비호하면서 군사 원조를 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20세기초까지 러시아함대가 뉴욕항에 입항할 수 있었던 환경이 아니었는가 판단된다.

그러나 결코 현재의 러시아가 뉴욕에서 군사력을 과시하던 제정주체라고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러시아 해군학교의 책임자으로서 크루젠슈테른(Krusenstern)은 많은 유용한 일과 해양부 과학위원회 위원이기도 했고, 나침반이 철기의 영향을 상쇄하기 위한 그의 고안은 해군에서 채택되었다는 사실도 말하고 있어 그의 업적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대한해협 대마도를 중심으로 남쪽 해협의 지명으로 지도에 나타나는 사실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단 삼한의 군주국이 세계전역을 지배했다고 한다면 설령 한반도 지도에 나타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독도명칭으로 사용한 리앙쿠르, 호넷, 그리고 울릉도의 또 다른 지명 아르거놋 등의 함대는 대조선의 함선일 수가 있고 울릉도 지명이 된 프랑스의 다즐레, 여기서 지금까지 살펴본 대한해협의 브루턴과 크뤼센슈테른 또한 대조선인이라고 볼 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결코 이질적이라고 할 수 없다.

문제는 그러한 역사가 우리가 이질적으로 느끼도록 감쪽같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크루젠슈테른(Krusenstern)1842년에 받았던 푸르르메리트(Pour le Mérite)훈장은 1740년에 프로이센왕국에서 제정된 훈장이며 크루젠슈테른이 받았던 이 훈장은 바로 프로이센의 국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Friedrich Wilhelm IV,1795-1861,재임:1840-1861)재임때 수여된 사실에서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러시아제국 차르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그의 공과가 프로이센의 명예훈장으로 연결괴고 있다는 사실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과연 그러한가.

아니다.

서두에서 언급한 바로 이중통치체제(二重統治體制)의 결과이다.

요(遼朝)와 금(金朝)의 관계에서 요(遼朝)의 게르만 전통적인 역사 흐름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발트인으로써의 프로이센(Prussia)영웅으로 칭해졌겠지만 과연 발트해가 동북유럽이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 북동부에 위치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곳을 지배하고 하나의 일체세력으로 존재한 체제를 통한 연결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 세력은 누구란 말인가.

조선을 이은 대한제국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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