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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부연(三釜淵)폭포의 역사진실

한부울 2018. 6. 30.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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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부연(三釜淵)폭포의 역사 진실

 

글쓴이:한부울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속의 삼부연폭포
고서에서 나타나는 삼부연폭포
삼부연폭포의 신구 비교
철원이란 역사지명
한반도에 원숭이가 서식한 진실.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에 있는 폭포.

현재 한반도 철원군청 소재지에서 동남 방향 1.5㎞ 지점, 명성산(921m)기슭에 있다는 삼부연폭포.

그래서 한탄강 유역 내의 명소로 알려지며 철원8경(鐵原八景)의 하나라고 하는 곳이 바로 역사 속에 남겨진 삼부연폭포이다.

 

역사 사실에서 보면 철원(鐵原)은 궁예(弓裔)가 후고구려의 새국호 태봉(泰封)의 수도를 천도한 곳이며 철원(鐵原)을 우리말로 풀면 '쇠벌'이라 하는데 이것은 '수도'를 의미하는 '서울'이란 말의 유래 중 하나라고 알려지기도 하다.

또한 철원8경중에 하나라고 하는 삼부연폭포는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편)에는 궁예가 풍천원(豊天原)에 태봉국(泰封國)의 도읍을 정할 당시 이곳에서 도(道)를 닦던 두 쌍의 이무기 가운데 세 마리가 폭포의 기암을 뚫고 용이 되어 승천하였고 그때 세 곳의 혈연(穴淵)이 생겨 삼부연(三釜淵)이라 이름 붙였다고 설명되고 있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해악전신첩의 삼부연[海岳傳神帖 三釜淵]

 

본래 삼부연(三釜淵)이란 말은 높은 절벽 사이로 쏟아지는 폭포수가 떨어지는 지점에 가마와 같이

생긴 곳이 세개가 있어 삼부연이라 한 것이라고 설명된다.

그림에도 알 수 있듯이 양쪽에는 거대한 암석이 버티고 있어 절벽인 것을 실감하게 한다.

부(釜)는 다리가 없는 가마솥이라는 의미로 풀이한 것으로 송조(宋朝) 진원정(陳元靚)의 사림광기(事林廣記)에는 발이 없는 솥을 부(釜)라 하고, 발이 있는 솥을 기(錡)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단 형태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보면 폭포수가 높은 절벽 사이에서 세 번 꺾여 떨어지고 때문에 자연스럽게 세 군데의 가마솥 같이 생긴 연(못)이 생겨 삼부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 것은 실체의 형태 모습을 보는 듯하고 상당히 높은 위치에서 낙하하는 폭포수에 의해 구멍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위 산수화 로는 세개의 가마솥 같이 생긴 연(못)을 뚜렷하게 구분 할 수가 없다.

어쩌면 세번 꺾이는 형태를 그림으로 알 수 있고 세번 꺾이는 공간 휘도는 듯한 표현을 하였는데 이것을 소용돌이 정도가 아니라 구덩이 즉 연(못)으로 구분할 수 있지 않겠는가 판단할 수 있고 그렇게 짐작이 가능할 것 같다.

 

釜 [가마 부]

1. 가마(가마솥), 가마솥(아주 크고 우묵한 솥) 2. 솥의 범칭(汎稱ㆍ泛稱)

소(沼)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속의 삼부연폭포

 

역사적으로 삼부연폭포 화첩이 속해 있다는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의 기록에서 보면 1711년 정선 나이 36세 되던 해 8월에 정선을 후원했던 김창흡(金昌翕:1653~1722)이 제자들을 데리고 떠나는 금강산행에 같이 동행하였고 이렇게 금강산을 다녀온 후 꼭 1년만인 1712년 8월, 정선은 다시 금강산 유람에 나선 것으로 되어 있다. 

기록으로는 말년에 한번 더 금강산을 찾았던 것 같다.

물론 동학인 이병연(李秉淵)의 사천시초(槎川詩抄)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숙종 38년(1712)임진 경 8월, 부친, 아우, 장응두(張應斗), 정선(鄭敾)등과 금강산을 유람하다"란 내용과 함께 "정선이 선사한 내외금강산 眞景 21폭에 시를 곁들여 ‘海岳傳神帖’을 만들다"란 기록이 있다.

겸재 정선은 스승인 김창흡의 영향을 받았고, 동학인 이병연과 1711년 이후 두 차례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진경산수의 묘미를 터득한 것으로 전해지며 ‘신묘년풍악도첩(申卯年楓嶽圖帖)’에서 그 기법이 드러나기 시작하여 1738년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을 그린 전후 무렵의 모색기를 거쳐 1747년 72세 때 3차 금강산을 유람하며 그린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 이후 완성기에 들었다고 되어 있다.

 

그는 내외금강산 진경 21폭을 그려 동학인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에게 선물하니 이를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이라 이름 붙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화첩들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고 알려지는데 이렇게 숨겨진 사실들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해악전신첩에는 21의 화첩이 있다고 알려지는데 삼부연(三釜淵), 이외 화적연(禾積淵), 문암(門岩), 문암관일출(門岩觀日出), 사인암, 단발령망금강산도(斷髮嶺望金剛山圖), 칠성암(七星岩), 총석정(叢石亭), 당포관어(唐浦觀漁), 정양사(正陽寺), 해산정(海山亭), 용공동구(龍貢洞口), 화강백전(花江栢田), 피금정(披襟亭), 정자연(亭子淵), 시중대(侍中臺), 불정대(佛頂臺), 만폭동(萬瀑洞), 장안사비홍교(長安寺飛虹橋)등으로 알려진다.

시간이 있으면 특히 우리 눈에 참으로 귀괴하게 여겨지는 화첩 총석정도 사실관계를 따져 봄직 하겠지만 위 화첩의 진상과 현재 한반도 지형과 엇비슷하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다.

 

위 겸재 정선의 산수화의 특징을 보면 동양회화에서 북종화법(北宗畵法)으로 산이나 바위의 입체감과 질감을 나타내기 위해 부벽준(斧劈皴)기법을 사용하였다는데 준(皴)은 주름이라는 의미는 그림에서 뾰족하고 험악한 바위의 표면이나 깎아지른 산의 입체감과 질감을 표현할 때 쓰는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특징적으로 위 삼부연폭포 그림에서 특히 가운데 절벽 기암괴석에서 거대한 암석이 약간 비스듬하게 타원형으로 뉘어진 모양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전면으로 돌출된 형태의 기암괴석임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입체감의 화법은 붓을 옆으로 비스듬히 뉘어 재빨리 들면서 끌어당겨, 마치 도끼로 찍었을 때의 자국같으며 끌로 판 자국과도 비슷하다 하였으며 힘차고 남성적인 느낌을 주며 붓자국의 크기에 따라 대부벽준과 소부벽준으로 나뉜다고 백과사전에서 이를 세밀하게 해석하고 있다.

이 화법은 북송 말기에 시작되었고 북송 산수화와 남송 산수화를 연결하는 이당(李唐:1080-1130추정)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또 남송 화원(畵院)에서 가장 뛰어난 화가였던 마원(馬遠)과 하규(夏珪)의 마하파 화풍(馬夏派畵風)의 암벽의 처리에 자주 구사되었으며 명의 절파(浙派)화가들에 의해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이것 역시 전통적으로 삼한화법(三韓畵法)이 아닌가 한다.

때문에 조선에서는 중기 화가인 김제의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역시 그와같은 화법을 볼 수있다고 설명되며 또한 조선 후기 화가인 이인문(李寅文)은 산수도첩(山水圖帖)에서 부벽준과 피마준(披麻皴)을 골고루 사용한 준법을 보였다고 알려진다.

피마준(披麻皴)기법은 갈필(渴筆)에 의한 약간 물결짓는 필선으로 베(麻, 마) 섬유를 푼 것 같은 꺼칠꺼칠한 감촉을 가지며, 산의 겉면을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하였으니 상당히 기존 화법보다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화법들을 대대로 이어 전수한 실체가 조선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청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필사정도가 아니라는 사실등은 화법이 전통적으로 삼한 화법이라고 볼 수 있고 최종 조선에서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할 것이지만 이러한 발전 상황을 알 수 없게 처리했다는 부분에서도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삼부연폭포라고 알려진 곳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현재 한반도에 존재하는 삼부연 폭포는 철원군청에서 동쪽, 명성산(鳴聲山)의 북쪽의 용봉산 계곡에 있는 3단으로 구성된 높이 20m의 폭포라고 정리된다.

 

 

 

 

현 주소지는 한반도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로 되어 있으며 폭포 상류 3km 지점에 각흘산(838m), 명성산(923m)에서 발원하는 용화저수지가 있으며 여기서 흐르는 천을 용화천이라 하며 사계절 마르지 않는 물과 기이한 바위가 주위 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폭포수가 가마솥 모양의 웅덩이를 세 번에 걸쳐 내려오기 때문에 삼부연(三釜淵)이라고 부른다고 알려지는 것처럼 모양새가 그렇게 그려지고 있다.

과연 이 형태의 지형이 맞는 것일까?

하지만 첫째로 지적할 것은 역사적 의미에서 언급한 양쪽 암석이 버티어 절벽을 이루고 있는 용화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과 현재 한반도 지형상 삼부연폭포에서 세 개의 가마솥같은 구덩이를 실체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확신이 없다.

 

이 세 개의 가마솥같은 구덩이가 얼마나 중했으면 세 개의 소(沼) 중 맨 위쪽을 노귀탕, 중간을 솥탕, 아래쪽의 못을 가마탕이라고 부른다고 되어 있겠는가.

 

소(沼)① 늪 ② 둥근 것은 池, 굽은 것을 沼라 한다.

연(淵) 물 속이 깊고 넓어 물이 흐르지 못하는 것을 나타내어 연못

 

고서에서 나타나는 삼부연폭포

 

다시 옛 기록을 찾아 분석을 해보면 인조 때 철원 부사(鐵原府使)를 지냈으며, 이괄(李适)의 난때에는 병랑(兵郞)으로 있으면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호위하여 한강을 건넜고, 정묘호란때는 동궁을 배위(陪衛)하여 남행(南行)하였다는 철원 부백(鐵原府伯) 김정경(金正卿)이 삼부연(三釜淵)에 떨어지는 물이 끝나는 곳에 한 촌락이 있어 참으로 난리를 피할 만한 곳이라고 하였으며 길이 험하여 갈 수가 없기에 창연히 바라보면서 읊은 시가 바로 철원(鐵圓)이라 한 사실이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본래 철원은 상당히 험준한 곳임을 짐작할 수가 있고 난을 피해 은거할 수 있는 곳이라고 표현하고 있을 정도로 알려지지 않는 곳임도 알 수가 있다.

 

(1)철원(鐵圓)

문곡집 제5권 / 시(詩) 156수

작은형님께서 태화산을 유람하다가 아들 창흡에게 써서 보여 준 시를 삼가 차운하다〔敬次仲氏遊太華書示翕兒之韻〕

三淵興不盡 삼부연의 흥취 끝나지 않았으니 /

百折上危巓 백 번 감돌아 아찔한 꼭대기로 오르네 /

怒瀑能穿石 노한 폭포수 바위도 뚫을 수 있겠고 /

攢峯欲到天 솟은 봉우리들 하늘 닿으려 하는데 /

閒尋猿鳥社 원숭이와 새들 모임 한가로이 찾아가 /

共和鶺鴒篇 할미새 노래한 시편 함께 화답한다네 /

一聽禪房磬 선방의 경쇠소리 한번 들어보니 /

幽懷更爽然 그윽한 심회 다시 상쾌해지네 /

 

(2)김창흡(金昌翕)완당전집 제9권 / 시(詩)

삼부연(三釜淵)

趺坐亂山裏 높고 낮은 산 속에 발괴고 앉아 /

閒看瀑布流 한가로이 폭포를 구경하누나 /

三漥連木末 세 웅덩이 나무 끝을 연이어 있고 /

雙壁起雲頭 두 벼랑 구름 위에 솟아났구려 /

吐納惟龍氣 들이고 뱉는 것은 용의 기운뿐 /

尋常便雨愁 심상한 곳도 문득 비 시름일레 /

淵翁眞卓絶 삼연 늙은이 정말 탁월도 하니 /

能辦此居幽 이와 같은 유거를 선뜻 구했네 /

 

한국고전번역에서 말하길 삼부연(三釜淵)은 강원도 철원에 있는 폭포 이름이며 1757년 홍양한(洪良漢)의 건의로 왕명에 따라 홍문관에서 각읍의 읍지를 수집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다시 고치고 그동안 달라진 내용을 싣고 간행한 여지도서(輿地圖書) 철원도호부 산천조에는 “삼부연(三釜淵)은 용화산(龍華山)에 있고 여러 시내가 뒤섞여 모여 갈수록 깊고 점점 커지다가 석벽에 거꾸로 걸리면서 문득 3층의 돌구덩이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으며 그 깊이는 알 수 없는데 모양은 세 개의 가마솥과 같으므로 그렇게 부른다 하였으며 이것이 곧 기우처(祈雨處)이다.”라는 기록을 볼 수가 있다.

그 만큼 중앙조정에서 제작하는 여지도서 등에 기우처를 명시해 두어 기우제를 지냈던 곳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의 삼부연폭포에는 여지도서가 말하는 용화산이 존재하지 않고 각흘산(838m), 명성산(923m)에서 발원하는 용화저수지 만이 폭포 상단 위치에 있으며 폭포수를 공급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 용화산(龍華山)은 거대하고 험준한 산임을 알 수가 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라 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산으로 부터 수많은 시내가 펼쳐져 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물론 용화산이란 지명이 지금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이 기록에서 보면 용화산 골짜기나 평지에서 흐르는 자그마한 여러 시내가 뒤 섞여 모여 갈 수록 깊고 점점 커지다가 석벽에 걸리면서 3층의 돌 구덩이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 석벽이라는 용어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지형이다.

석벽(石壁)은 계곡의 바위가 자연적으로 마치 바람벽처럼 내리질린 곳으로 해석된다.

그것은 천길 낭떠러기지 절벽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의 한반도 삼부연폭포는 저수지에서 공급되는 수로 말고 수많은 시내 가지가 모여 흐른다고 할 수 없고 천길 낭떠러기기의 석벽을 이야기할 수 없다.

 

다시 고전 기록을 보면 조선 숙종(肅宗)1699년(숙종 25)에 김수항(金壽恒:1629∼1689)의 아들 김창집(金昌集)과 김창협(金昌協)이 간항한 문곡집 제5권에서 (1)철원(鐵圓)편에 김수항 셋째 아들 삼연(三淵)김창흡에게 써준 시에서 "백 번 감돌아 아찔한 꼭대기로 오르네, 노한 폭포수 바위도 뚫을 수 있겠고, 솟은 봉우리들 하늘 닿으려 하는데~ "라고 하여 실제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지명이지만 용화산이 하늘에 닿을 듯한 험준한 산이었음을 말하고 있고 그곳에는 원숭이와 새들 모임 한가로이 찾아가, 할미새 노래한 시편 함께 화답한다네~"라고 읊고 있음도 알 수가 있는데 놀랍게도 원숭이의 모임을 말하고 있다.

삼부연폭포가 있는 곳은 험준한 산악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만 도대체 원숭이가 새들과 노닌다는 내용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한반도에 원숭이가 서식한다는 이야기는 실제로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렇지 않는가.

 

또한 삼부연의 풍경을 관찰하기 위해 첨부된 김창흡의 완당전집의 삼부연이라 시(詩)에서도 "두 벼랑 구름 위에 솟아 났구려~"라고 읊은 시에는 구름에 걸려 있는 높디 높은 두 벼랑 사이로 흐르는 삼부연폭포임도 알 수가 있다.

즉 절벽같은 석벽 사이로 폭포수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지금의 한반도 삼부연 폭포가 있는 곳이 구름이 걸릴 정도로 높고 깊은 산악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절벽과 같은 석벽 사이로 폭포수가 흐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삼부연폭포의 신구 비교

 

           [한반도 삼부연폭포(좌), 알 수 없는 겸재 정선이 그린 산수화의 삼부연폭포(우) 비교]

 

이러한 사실들을 좀 더 확실하기 위해 시각적인 검증도 할 수 있으면 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역사가 기록한 삼부연 산수화의 모습과 오늘날 한반도에 남아 있다는 삼부연의 모습을 비교하기 위해 양쪽 형상의 그림들을 게시하고 비교에 들어가 보자.

위 게시한 그림에서 좌변은 한반도 지형상황 사진이며 우변은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에 있다는 삼부연폭포 산수화이다.

 

이 두 그림에서 무엇인가 명확히 말을 할 수 없지만 지형새와 폭포 위치 세번 꺾였다는 웅덩이 솥 형태, 규모면에서도 원거리 기법을 감안하더라도 형태적 차이가 상당히 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첫째 (A) 부분을 양쪽 그림에서 비교해보면 한반도에는 작은 나무들이 우거져 양쪽 벼랑, 절벽, 또는 석벽이라는 지형을 구분이 어렵지만 우측 정선의 그림에서는 확연히 두 벼랑과 상당히 규모가 있는 석벽등이 나타나고 중앙이 훤히 뚫려 있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즉 한반도 지형 형태상 우측 정선의 그림처럼 애초부터 불가능한 지형 형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둘째(B) 부분을 양쪽으로 비교해보면 좌측 한반도 실물사진의 암석 모양과 우측 정선 산수화 암석화법 모양이 절대적으로 같다고 할 수 없다. 

한반도의 암석은 거대한 암석형태라고 말할 수 없는 매우 불규칙적으로 난해함을 느끼지만 우변 정선의 산수화의 화법에서 거대한 암석의 입체감이 품어내는 규칙적인 형태를 읽을 수 있다.

그것에는 정선의 산수화 화법이 뾰족하고 험악한 바위의 표면이나 깎아지른 산의 입체감과 질감을 표현할 때 쓰는 부벽준(斧劈皴)기법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지만 약간 비스듬하게 그려진 암석 바위의 모양에서 절대로 현재 한반도 좌측 사진과 같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세번째 (C)의 양측 그림을 비교할 때 좌측 한반도 사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정선 산수화 우편의 산정상에서 부터 시작하여 아래 폭포수를 관람할 수 있는 청솔숲을 그늘로 하는 바닥공간(D)까지 길게 굴곡지게 늘어져 있는 인위적인 계단과 잘 닦아진 길이 놓여 있음을 명확하게 식별할 수가 있다.

이것은 무섭게 낙하하는 폭포수를 관람할 수 있는 공간에는 그림처럼 갓을 쓴 조선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있지만 매우 지형환경이 단정하고 정리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평소에도 그곳에는 수많은 관람객들이 모여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임을 금방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한반도 그림은 그러한 공간은 찾을 수도 없음은 물론이고 어딘가 모르게 그냥 방치된 상태의 매우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 폭포수가 그만큼 현대인에게도 매력을 주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은 역사 전통적으로 사람들이 찾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게 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현재 비교를 해보아도 참으로 이해하기가 힘든 차이점이라 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 언급한 문곡집 철원편 시(詩)에 용화산에 원숭이가 서식하였다는 사실만큼 한반도 지형에서 이질적인 면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두 그림에서 차이점을 총괄적으로 지적하게 만드는 것은 한반도 지형 사진 그림에서 보면 삼부연폭포로 들어오는 수로가 각흘산(838m), 명성산(923m)에서 발원하는 용화저수지에 모여 들어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본 사실에서 두개의 낮은 산이 아니라 거대하고 험준한 용화산이 존재하여야 하고 그 곳에서 발원하는 수많 가지의 시내가 모여 깍아지른 절벽과 석벽사이로 흘러들어가야 거대한 폭포수가 만들어질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것을 감안 할 때 우측 그림 정선의 산수화 (A)부분을 자세히 보면 훤히 트림 공간에 거대한 물줄기가 폭포수 아래로 흘러드는 것을 알 수가 있지만 이것에는 여러 시내들이 가지처럼 모여들어 거대한 물줄기를 만드는 것임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가 있다.

반면 한반도 지형사정은 그렇지가 않고 사진과 같이 상당히 활발하지 않는 흐름 형상이다.

여기서 한가지 더 부첨할 것은 폭포의 길이 가시적인 측정인데 좌측 한반도 사진에 나타나는 현재포수 아래 사람들의 원거리 구도와 우측 정선 산수화 그림(D)공간의 구경꾼들과의 원거리 구도를 비교할 수 있을 것인데 한반도 그림에서의 사람과 폭포사이에 거리와 비교하더라도 정선 산수화의 사람과 폭포사이에 거리가 훨씬 멀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시각적으로 정확할 수는 없다고 하겠지만 원거리 구도상 폭포길이 측정 값은 한반도 폭포길이보다 정선 산수화의 폭포 길이가 훨씬 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물론 그 크기가 정확하게 얼마라고 할 수 없겠지만 원거리상 비교할 때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한반도의 삼부연폭포는 겸재 정선의 산수화에 등장하는 삼부연폭포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정말로 지금의 한반도가 아니라면 과거 역사에서 한양을 출발하여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라 할 수 있는 철원(鐵原, 鐵圓)은 도대체 어딜 말하는 것일까?

 

철원이란 역사지명

 

본 블로그 글 "철(鐵:iron)로 본 새로운 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2"에서 말하길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헤머타이트(Hematite) 즉 ‘피’, 혈액(血液)를 뜻하는 그리스어 접두어(haema)에서 유래된 적철석(赤鐵石)의 가장 중요한 광상(鑛床:ore deposit)이 퇴적 기원으로, 북아메리카의 슈피리어 호(Lake Superior)지역과 같은 퇴적광상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생산(연간 약 7,500만t)되는 것을 바탕으로 판단 할 때 이곳을 철의 원산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른바 철원이란 뜻의 지명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철 생산지, 메사비산지(Mesabi range), 마켓산지(Marquette range), 메모미니산지(Menominee range), 고기빅산지(Gogebic range), 버밀리온산지(Vermillion range)가 있는 미네소타주를 말할 수 있다 한 사실이다.

물론 이곳에서 미국 철광 생산량의 75%가 생산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주로 고품질의 적철석(赤鐵石)을 산출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들은 철원이란 지명과 상당히 결부시킬 수밖에 없는 사실임을 알 수가 있었다.

일부가 다소 편협적이라고 하는 세계삼한역사관점이 아니라 지질학적인 분석에서 나온 주장이다.

대신 지명에서 광의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겠지만 미네소타주는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지명 철원으로써 충분한 역사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장소이다.

이에 더하여 본 블로그 글 "동청(冬靑)과 금강산(Blue Mountain) http://blog.daum.net/han0114/17050672"에서 밝혔듯이 옛날 제왕들의 능침으로 사용했던 붉은 열매나무 감탕나무 동청(冬靑)으로 본 생물학적 판단에서 금강산은 미국동부지역에서 제일 높은 산, 높이 2,037m(6,683ft)의 미첼 산(Mount Mitchell) 이나 혹은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전체에서 가늠할 수 있는 지칭이라고 하였던 사실을 비추어 보면 더욱 철원의 주장이 근거가 있는 신빙성을 더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금강산지역에서 석탄이 산출되었던 사실과도 일치하는데 애팔래치아산맥은 석탄광산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한번 다시 대중에게 물어본다.

한반도의 철원이 세계사적인 철의 원산지라고 감히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역사 지명은 아무렇게나 붙이는 것이 아니다.

철원(鐵原, 鐵圓)이라 하는 지명은 바로 세계사적으로 철의 원산지를 나타내는 지명임을 의심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네소타주(Minnesota)나 슈피리어호(Lake Superior)가까이에 삼부연폭포가 존재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겠는가.

 

한반도에 원숭이가 서식한 진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생물학적 분석에서 원숭이가 철원 삼부연폭포에 서식한 사실을 밝히는 일이 남아 있다.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의 시문집 문곡집 제5권 / 시(詩) 156수 철원(鐵圓)에서 "閒尋猿鳥社 원숭이와 새들 모임 한가로이 찾아가~"의 시귀에서 바로 삼부연에 원숭이와 새들의 모임이라 하였으니 상당히 많은 수의 원숭이들이 있었음을 감지할 수가 있다.

한반도에 원숭이가 서식했다는 사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원숭이가 서식한 곳을 찾아야 하는데 철원이라고 할 수 있는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지역에 과연 원숭이가 서식한 사실이 맞는지를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

 

원숭이 분류체계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본래 원숭이는 영장류(靈長類:Primate)에 속하는 동물을 총칭하는 말이라고 했다.

사람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영장류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열대 또는 아열대 지역에 살고 있다라고 정리된다.

영장류의 원시 조상은 약 6,500만년 전의 백악기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약 5,500 ~ 5,800만년 전의 팔레오세 후기의 화석 기록으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영장류는 플레시아다피스(Plesiadapis)라고 하였다.

영장류를 총칭하는 원숭이하목, 진원류(眞猿類:Simian)는 약 4,000만년 전에 등장했으며, 2개의 분류군을 포함하고 있는데 남아메리카에서 발달했고 신세계원숭이(New World monkey)를 포함하고 있는 광비원소목(廣鼻猿小目)과 아프리카에서 발달하였고 구세계원숭이(Old World monkey)와 사람 등의 유인원을 포함하고 있는 협비원소목(狹鼻猿小目) 바로 그것이다.

후자의 것이 인류시원을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일반적으로 최초분류체계에서 시미아 또는 시미아속(Simia屬)을 지정하였는데 1758년 칼 폰 린네(Carl von Linné:1707-1778)가 자연의 체계(Systema Naturae)에서 영장목으로 분류했던 4개 사람속(Homo屬), 여우원숭이속(Lemur屬), 박쥐속(Vespertilio屬)의 속 (屬)중 하나로 체계화한 것이다.

 

긴꼬리원숭이 또는 구세계원숭이(Old World monkey)는 포유류 영장목의 협비류에 속하며 분류에는 긴꼬리원숭이상과(Superfamily:Cercopithecoidea. Gray, 1821), 긴꼬리원숭이과(Family:Cercopithecidae Gray, 1821)원숭이들의 총칭이라 하며 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분포한다고 하고 이 류의 학명자가 영국동물학자인 존 에드워드 그레이(John Edward Gray,1800-1875)로 나타난다.

긴꼬리원숭이아과(Cercopithecinae)는 비비원숭이와 마카크원숭이 등 약 71종(種)을 포함하고 있으며 마카크원숭이는 동아시아에서부터 북아프리카의 지브롤터까지 분포하지만, 대부분의 긴꼬리원숭이아과 원숭이들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제한적으로 서식한다고 하고 있다.

 

또한 광비원류(廣鼻猿類:Parvorder: Platyrrhini. E. Geoffroy, 1812) 또는 신세계원숭이(New World monkey)는 포유류의 영장목에 속하는 소목(小目)으로 (1)북부아메리카와 남부아메리카 아마존 유역(Amazon basin)에 발견되는 비단원숭이과(Callitrichidae)의 작은원숭이와 타마린(Marmosets and Tamarins)이 있고, (2)열대 및 아열대 남북부 및 중앙 아메리카 전역에서 발견되는 꼬리감는원숭이과(Cebidae)의 작은원숭이와 타마린 그리고 거미원숭이와 다람쥐원숭이(Capuchins, and Squirrel Monkeys)가 속해 있으며, (3)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숲에 널리 분포하며, 그 지역은 파나마 남부에서 파라과이와 북부 아르헨티나에 이른 올빼미원숭이과(Aotidae)의 올빼미원숭이가 있고, (4)북아메리카 동부와 대부분은 종들은 브라질의 아마조니아 지역에 살고 있으며, 일부는 북쪽의 콜롬비아부터 남쪽의 볼리비아에 걸쳐 발견되는 사키원숭이과(Pitheciidae)의 티티원숭이, 사키 및 우아카리(Titi Monkeys, Sakis, and Uakaris)와, (5)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 북부에 이르는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숲 지역에서 널리 발견되는 거미원숭이과(Atelidae)분류의 총칭이라 할 수 있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광비원류는 모두 5과 21속 138종(種)으로 분류된다.

특히 구세계원숭이는 아프리카와 아시아란 고체적인 서식지와는 다르게 신세계원숭이 중 특히 북아메리카대륙에 서식했다고 판단되는 광비원류 비단마모셋속(Callithrix)은 구세계원숭이 명명자 존 에드워드 그레이가 명명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모식종(模式種) "Simia jacchus Linnaeus, 1758"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말하고 있다.

 

모식종(模式種) 시미아 또는 시미아속(Simia屬)으로 영장목 4가지 속명 중에 하나임을 알 수가 있다.
또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서식했다고 판단되는 거미원숭이과(Atelidae) 역시 영국 동물학자 존 그레이가 명명했고 모식종(模式種)으로 알려지는 "Simia belzebul Linnaeus, 1766" 와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 역시 린네가 명명했다.

위 종(種)과 동일한 모식종은 주로 중앙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대륙을 분포하는 원숭이를 말하는것으로 "Alouatta belzebul (Linnaeus, 1766)"와 또한 동일하게 취급되고 있다.
모식종(模式種)에서 모식(模式, type)이라는 말은 생물학 특정 분류군의 특징을 정의하는 성격이라 정의하고 있으며 어떤 생물종이 정식 학명을 얻도록 하는 특정 표본 또는 표본군을 모식표본(模式標本, type specimen)이라고 하여 그것의 생물 분류군을 대표하는 종임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원숭이에 대해 좀 더 생물학적으로 밝혀 볼 일이 있겠으나 굳이 신구(新舊)세계로 분류한 이유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이것 역시 아메리카대륙에서 완전히 사라진 사자나 코끼리 등과 같이 아메리카대륙을 피해 어떤 특정 지역에 서식지화한 것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은 지울 수가 없다.

최초인류가 아프리카대륙을 기원으로 하고 있지만 일단 북아메리카대륙을 기반으로 했음을 우리는 증명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원숭이가 영장류라 하고 이것이 인류와 연관성이 존재하는 한 영국 박물학자가 신구세계 원숭이 분류체계를 만들고 이것에 크게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현재 인류학의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면 어쩌면 신구세계원숭이 분류에도 이러한 그들만의 방식에 의한 이분적 의도된 체계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를 의심해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위 3가지의 신세계원숭이 군의 분포지도를 보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서식지가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는 구신세계원숭이를 분류하기전부터 원숭이가 서식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최초인류를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부터 230만년전에서 240만년전 사이에 아프리카에서 분리되었다고 하고 신생대 제4기 홍적세(플라이스토세)에 살던 멸종된 화석인류 곧선 사람,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를 대표적으로 베이징 원인이라고 순차적인 이동과정을 아프리카, 아시아대륙으로 하고 있지만 오늘날 사람의 형태를 지닌 지혜가 있는 사람 또는 두 발로 서서 걸어 다니는 사람이라고 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실제로 이와같은 이동경로와 같은 분류로 취급해야 할 것인지는 다시금 생각해볼 이야기라는 것이다.

물론 이 중 약 85%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아프로-유라시아, 구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과 나머지 15%만이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신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맞춰 보고 있다 하겠지만 이것은 본래 인류문화가 발생한 위치가 밝혀질 때 모두 한꺼번에 무너질 사상누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이론이 고체화된 과정에서 수많은 주요 생물들이 본래 서식지에서 변동되어 이질적으로 나타난 사실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것들이 결국 혹 우리가 알 수 없었던 불편한 지식으로 남겨져 있지만 이것으로부터 해소될 수 있을 것이란 믿음도 가져보는 것은 그렇게 잘못된 것만 아닐 것이다.

 


우리가 근대 역사에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판단할 수 있다 하겠지만 정확한 원인과 경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세계삼한역사주체가 서양세력에게 밀려 하는 수 없이 한반도로 이동하기 전까지의 역사상황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글쓴이가 주장하는 부분들에서 수많은 밝힘이 있었지만 근원적으로 풀어 낼 수 있는 사실들은 솔직히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직까지 수많은 의혹이 산재하는 것도 사실이고 솔직히 긴가민가 하는 점도 없지 않지만 생각 해 보면 상식적인 상황을 전제한다면 어렵지 않게 풀수도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증명하기 위해선 여러가지 면에서 정보 부족의 한계를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생각해보면 북아메리카대륙에서 근세기에 급변하였던 역사적 환경에서 최소한 1920년까지의 역사를 이야기한다면 하나의 체제에서 사용하던 언어문제가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수많은 의혹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기존 역사와 그리고 그 이후 변화하는 역사사실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판단을 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때 대중적으로 사용되던 언어는 한글과 일본어 또는 영어가 섞여 사용되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고 그 구성원들은 다문화적인 성격이 강했을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정부나 관에서 사용하던 중요한 문서나 전문서적 등의 언어는 한문이 주를 이루었을 것이지만 드물게 라틴어 서적도 존재했을 것이란 예상도 할 수 있다.

때문에 적어도 1920년 이후부터 한글의 소요처, 일본어의 소요처를 동양계 사람들으로 한정지워 구분하고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사용을 스스로 합법화하면서 개몽전략으로 나가던 서양문화와 결부시켰을 것이며 저변에서 범위를 넓혀 나갔을 것이란 사실도 어렵지 않게 추측이 가능하다.

한글 사용처를 명확히 만들기 위해 예를 들면 한글 신문들을 발행하게 만들고 속칭 조선총독부에 의해 시행된 이른바 문화 통치의 일환으로 1920년 1월에 3개의 한국인(동양계 조선인)민간신문 발행을 허가하였다는 사실이 그렇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존 하나의 정치적인 체제가 동양계 조선인으로 축소되어 버리는 현상을 맞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역사 흐름의 난해함과 아무리 꿰맞추려 해도 맞출 수가 없는 역사 혼돈을 느낄 수밖에 없다.

1920년부터 한글 전용 구어로 동양계조선에 한정 짓고 마찬가지로 일본어를 정부 공영어로 삼는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신문발행을 통하여 끊임없이 낯설다 할 수 있는 언어체계를 만들어 나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신문발행이라는 것은 사실, 진실을 보도하는 차원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떤 계층부류의 체계를 만들고자 하거나 어떤 프레임을 세우기 위해 대중들에게 시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에서 대중들의 여론을 가시화할 수 있는 과정의 실행 행위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게 될 때 이전까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던 정보 문화와 역사를 갑자기 변화하는 세태에 영향을 받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러한 체제상태를 이성적이거나 전통적인 것이 아닌 대중적인 판단에 의존하게 하는 그래서 개인적으로 기존체제를 지극히 이질적인 것으로 판단하게 하는 상황으로 돌변하기 쉽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개몽차원을 넘어 서양문화를 받아들이게 만들고 기존 체제를 변화시키거나 개몽시키는 차원을 넘어서는 오히려 새로운 국가와 체제를 갈망하거나 요구하는 형태로 작용된다는 사실에서 만약 체제 흔들기와 체제를 붕괴시키기를 원하던 세력이 있었다면 이러한 방법을 동원하고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가 있다.

상당히 난해하게 들릴 수가 있겠지만 기존 역사 흐름은 냉혹하게 끊겨 버린다는 사실이다.

과거 특수한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체제 정보가 필요 이상으로 통제되거나 한정되면서 언어가 하나의 체제에서 통용이 가능할 때는 설령 문화가 달라 여러 언어가 존속되었다 할지라도 그러한 형태를 대중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정보 경직성이 존재했을 것이지만 반대로 개몽, 개혁이란 이름으로 점차적으로 기존체제를 비판하게 되고 체제 정보가 어느 한 특수계층의 전유물인 것처럼 독점적인 사회체제를 거부하거나 부정하게 되면서 일반인들이 고급정보에 접근이 가능하게 되면서 기존 체제전복을 용인하는 사태까지 이를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자 기존 언어에 대한 불만, 불신이 쌓이면서 수많은 언어가 독립성을 주장하고 이것들이 혼란이 가중되면서 이를 사회적으로 제어가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신문발행이라는 위력이며 아마도 20세기 초 사회변혁 바람이 심하게 나타날 때 신문이 사회에 주는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한마디로 기존 언어체계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언어체계가 세워질 수밖에 없는데 이때 체제를 정복한 세력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언어를 사용하도록 유도하거나 개몽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판단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현상은 본 블로그 글 "COREA, CORIA, CORREA, KORAI의 실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1"에서 밝혔던 사실이지만 이상하게도 미국사회에서 "COREA"란 명칭사용을 자제하고 대중적으로 "KOREA" 로 사용해야 한다는 사설이 난무한 때가 바로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종결되고 난 후 부터이었다는 사실과 그 이후 1878년 5월 뉴욕 선대이메거진(Sunday Magazine)에 의해 마지막으로 "COREA"란 대중적인 지칭되고 사라졌다는 사실 등은 우리입장에서는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고 난해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한 미국사회에서 왜 이런 논란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무엇때문에 미국사회에서 한반도 존재하던 국가 명칭으로 인하여 그렇게 민감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미국 시민들에게 COREA 란 명칭이 얼마나 알려졌길래 신문 사설로 이를 비판하고 대신 KOREA 를 사용해야 한다고 홍보까지 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한반도로 역사주체가 이동하기 이전 역사상황이 이러했다면 명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하더래도 그것이 말하고 있는 그 이전 상황이나 그 다음 발생할 수 있는 상황전개 등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현재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나름대로 무수한 억측을 낳고, 추측하거나, 추정 또는 나름대로의 가정등을 세우는 여러가지 형태로 생성되고 있음을 곳곳에서 미디어를 통해 목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리를 한다면 북아메리카대륙의 1920년 이전 역사상황과 그 이후 한반도 역사는 알 수 없는 역사고리 가 있으며 끊이지 않고 이어진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거대한 세계삼한역사주체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거대한 체제가 맞고 단일민족을 외치던 한반도 역사와는 달리 현 미국사회처럼 다문화, 다종교, 다민족체제였다고 한다면 사용하던 언어 역시 단순하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고 앞에서 언급한 1871년 신미양요 상황과 그리고 뉴욕이 주도하던 상업적 신문태동이 정점에 있던 1878년 상황에 이어 1881년에 글쓴이가 주장했던 세계삼한조선이 난데없이 체제 해체에 이르기까지 역사 흐름의 역사는 끊을 수 없는 굵은 선은 이어졌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후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풍전등화격인 조선을 완전히 해체하기 위한 수많은 음모와 개혁세력들의 변화가 존재한 것이 사실일 것이며 이러한 바람은 하리케인처럼 조선사회와 역사전체를 핥퀴고 지나갔겠지만 우리가 안타깝게도 알 수 있다는 것은 현재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쪼그라진 한반도 역사와 허리가 갈라진 반토막난 영토, 그리고 일제에 의해 1910년부터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던 그래서 숨어서 야학에서만 가르쳤던 한글 만이 우리에게 존재하고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이것이 변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같은 처참한 역사 변괴는 변괴가 아닌 정상적인 역사인 것처럼 오늘도 우리 정신을 갉아먹고 있다.

 

현재 보물 1949호로 지정되었고 일제시대때 불쏘시개가 될 뻔했다고 하는 겸재 정선의 금강산 경치를 21점에 담아 엮은 화첩 ‘해악전신첩’에 나타나는 금강산 그림들은 모두 하나같이 실제로 한반도 풍경과는 사뭇다르다는 점이 존재하고 있는 것도 역사 변괴의 하나의 증거이다.

삼부연폭포 역시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탐구해 본 결과 한반도 이동의 역사가 낳은 위치 문제를 바라 볼 수 있고 이 논제에 대한 결론은 한반도 삼부연폭포가 역사 속의 삼부연폭포라 할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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